로마인 이야기 세트 - 전15권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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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 12~15권을 읽고

 

   “1992년에서 2006년 까지 매년 한 권씩 15권을 15년 동안” 작가는 로마인 이야기1권 서문에서 그렇게 각오를 밝혔고 그렇게 했다.

  나는 로마인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이 1998년이었고 마친 것이 2013년, 읽는 데에도 그와 같은 15년이 걸린 이 시리즈를 마친 소회가 각별하다.

 

  98년, 세계의 전부였던 책방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잔액마저 누군가에게 완전히 털린 것을 실감하던 그 비장한 날들 로마인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세상은 바야흐로 난분분 벚꽃이 피었다 지던 봄날이었지만 오층짜리 낡은 아파트 월세의 작은 방에 스스로 갇혀 지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작은 언니의 손에 이끌려 지하상가 더 좁은 곳에서 김밥, 우동을 팔기 시작 했다. 먹고 살아야 했고 최소한 일이 필요했으니.(언니는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한다. 그러나 그곳은 삶의 새로운 학교였고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좀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니 언니는 자랑스러워해도 되는데.......^^)

  그곳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호객행위를 했고 점차 넉살도 늘어갔지만 여전히 격리 수감 중이었다. 스스로 유폐를 풀 때 까지 세상과의 유일한 면회는 차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동안 가난한 허기를 채우는 떠나는 영혼들과 책이 전부였을 것이다. 차츰 시간이, 사람들이, 책이 황폐한 심경을 치유해줬고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걷는 여정도 길어졌다. 걸으면서 성장했다. 날 선 모서리들이 햇볕아래서 바람결을 따라 둥글어지기 시작했고 그 길 위에서 세상의 많은 책들에게 위무를 받았다.

  그렇게 로마인 이야기와 함께 한 15년, 여전히 두어군데 옮기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 밥상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다. 누가 믿든 말든 배고픈 이들에게 정성스런 밥 한 그릇을 내어다 주는 아주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하면서. 물론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떤 15년이 위대한지는 자명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위대한 15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잘난 체하는 버릇이 생겼다. 부끄럽게도 꽤 오래 그랬던 것 같다. 조금 모자란다 싶거나 묘사가 서투르다 싶으면 가차 없이 글쓴이를 무시하면서 ‘안 써서 그렇지 내가 쓴다면 발가락으로도 이 정도는 쓰겠다 뭐’ 하는 생각이 그랬다.

  활자에 목마른 시절,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고 심지어 순정만화, 할리퀸 로맨스문고, 통속소설로 치부되는 온갖 로맨스 소설들, 무협지, 선데이 서울류의 잡지들, 영화대본들까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안목도 생겼고 나름 좋아하는 작가, 문체, 장르들이 터득되었던 것인데....... 스스로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글이든, 그것이 무슨 장르이든 시작을 해서 완성하기까지의 과정들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뼈저린 순간들이 담겼다는 것을. 그래서 이젠 어떤 책에든 겸손해지게 된다. 감사하면서 읽게 된다. 문장부호 하나하나들까지 거기에 숨은 의미를 읽으려 애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감동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 그녀의 끈질긴 노력과 탐구, 인간에게의 접근은 그 긴 시간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도시국가 로마의 탄생에서부터 천년동안의 존재감이 역사로서만 아니라 문화, 이념, 정치, 책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방대한 철학서이자 교훈서였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생들이 그렇듯이 혈기왕성한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진진하고 다이내믹하다. 성장하는 로마도 그러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꿋꿋하고 멋진 지도자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착실한 지도자가 확고하게 굳혀둔 제국을 지키는 황제들이 있었던 시절의 로마는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쇠퇴기, 노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읽어내는 일은 몰락해가는 오빠를 바라보는 일처럼 안쓰럽고 안타깝고 애통하다. 마침내 완전한 멸망 앞에서도 악다구니처럼 발버둥치는 치열한 동작들은 페이지를 더디게 넘기게 했다. 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에서부터 15권 로마 세계의 종언까지는 힘들게 마친 읽기였다.

  읽는 동안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읽으면서 노년의 자신을 떠올리게 되어서다. 어느 사이 끝을 향하고 있는 때가 되어서도 끝인지 모르고 과거에 매여 살아온 날들이 섬뜩하게 다가 온 것이다. 그래, 마무리를 준비하는 여정은 쓸쓸하지만 아름다우리라. 끝끝내 권력의 한 줌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악착같을수록 추하게 몰락해 갈 것이다.

  끝을 인정하자.

  언젠가는 끝이 온다.

  어떤 끝이든.

  놓을 것은 놓아 버리자.

  로마인 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가 대단해지는 건 그 지점이다. 천년 제국의 역사가 우리 생의 모습과 닮았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결국 역사는 미래인 것이다. 개인의 역사도, 국가의 역사도.

  다시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긴 시간을 건너뛰어서 앞부분을 봐야 했던 곳들이 많아 아쉬웠으니.

 

  다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늘고 있다.

  책 읽는 방식도 책 선택 목록도 바뀌고 있다는 반증이다. 다독을 겨냥한 속독에서 정독 쪽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고. 꼭꼭 씹어 먹는다.

  신중해지고 있다.

  낡아간다.

  늙어간다.

  책읽기는 관찰이고 성찰이다.

  삶도 그러하다.

  내 삶 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그러하고 사물이나 풍경이나 자연을 대하는 관찰자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성찰 또한 다르다.

  다시 읽고 나서는 예전과 얼마나 다른 느낌일지 궁금하다.

  로마인 이야기는 끝에서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열어 보인다.

 

 

  로마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지중해는 이제 로마인의 ‘내해’(Mare internum)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와 다른 문명 사이에 가로 놓인 경계선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면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까지 가는 시간은 로마에서 파리에 가는 시간보다 짧다. 하지만 공항을 나오면 다른 문명권에 왔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문명이 더 우수하고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르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미술관에 가서 로마시대의 조각상이나 모자이크를 감상하거나, 교외에 나가서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로마 시대 유적 앞에 서면, 로마의 포로 로마노나 콜로세움에 갓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고대에는 지중해 남쪽과 북쪽이 같은 문명권에 속해 있었다. 양쪽이 분리 된 것은 7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연결 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로마인 창조해낸 로마 세계는 아니다.

로마 세계는 지중해가 ‘내해’가 아니게 되었을 때 소멸했다. 지중해가 양쪽을 연결하는 길이 아니라 양쪽을 갈라놓는 경계선으로 변했을 때 로마 세계는 사라져버렸다.

  그후 지중해는, 사라센 해적의 내습을 알려주어 사람들을 산으로 도망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토레 사라체노’(사라센 탑)가 절벽 위에는 반드시 서있는 바다가 되었고, 십자군 병사들을 태운 배가 동쪽으로 항해하는 바다가 되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날 무렵에는 동방의 이슬람 세계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이탈리아의 해양도시국가들 -아말피·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배가 오가는 바다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후에는 고대의 부흥과 인간의 권리 회복을 기치로 내건 르네상스의 바다가 되어간다.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하고, ‘제행’(res gestae)은 무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이치라면,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것을 배웅하는 것이 인간 노력의 집적이기도 한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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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3-1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정말로 좋습니다.. 추천을 백번 쯔음 누룰 수 있으면 하고 바라보아졌어요.. ~~
즐찾하고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냥 돌아서기가 너무 아까워서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서재님..

뒤의 글들까지 읽으면서 .. 왜 이런 서재가 많은 분들께 알려져 있지 않는지 너무 안타까워요.. ㅠㅠ

2014-03-19 21:19   좋아요 0 | URL
훗~! 고맙습니다.
저 보다 훨씬 맛깔 난 글쓰기를 하시는 분께 받은 칭찬에 으쓱해지네요.

손 내밀기에 서툰 제게
먼저 손 내밀어 주셔서 감사하구요.
자주 뵈어요^^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부엔리브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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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를 11권까지 밖에 읽지 못하고 있었고 같은 저자 시오노나나미와 시인이자 번역가인 한성례의 지명도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구입한 책이었다.

  그런데 차일피일 지금까지 미루어오다 이번에 읽었는데 쩝~ 많이 실망했다.

  갑자기 본전생각에다 읽고 있는 시간이 아까워 누구한테든 화를 싶을 만큼.

  배가 많이 고픈데 맛있는 거 먹겠다고 오래 기다리다, 드디어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기대감에 한 입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 돈 생각에 배고픔에 꾸역꾸역 먹긴 했는데 입은 버리고 배는 부르고……. 딱 그런 때의 기분 같은 거였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의 광대한 스케일과 소소한 설명 전개에 익숙한 내게 ‘중간 생략’이 너무 많은 마치 줄거리만 엮어 놓은 것 같았다. -결국 그 계기로 로마인 이야기를 마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꼭 나쁘다고만 할 수 는 없다.-노고단까지 버스타고 올라갔다 와서 지리산 갔다 왔다고 말한 것 같은 찜찜함과 지리산의 일부분을 만나고 나니 그 산에 오르고 싶다는 심리가 발전했다고나 할까. 다행히 뒤쪽으로 갈수록 아깝지 않았다. 돈이든 시간이든.

  마지막 장인 9장, ‘로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꼭지.

  전체를 메모해 두고 싶을 만큼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했다.

   "현재는 아무리 나쁜 사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시작된 원래의 계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 말을 전한 사람은 1500년 후의 마키아벨리이고 거기에 그는 ‘그 말은 전적으로 진실이다.’는 짧은 코멘트만 덧붙였다 한다. 현재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 과거를 나쁜 것으로 몰아가는 역사의 되풀이 속에서 신선하고도 서늘한 지적이다. 우리의 정치인들께서 그 지적을 기억하고 받아들였을까?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정치적 잇권과 견해에 따라 만들어지거나 같은 이유로 사라지는 많은 입안들이 생기진 않을 테니. 그 속에는 사회복지 입안들도 그럴 것이고. 당연히 요즘 같이 듣는 것만으로도 추워지는 뉴스들을 만나진 않았겠지.

  참 추운 시절이다. 세 모녀의 자살 소식 때문인지, 이 꽃샘추위의 느낌은 오래 가겠단 생각이 든다. 엊그제, 광교산에도 한 청년의 자살에 구급차며 경찰들이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다행이 미수에 그쳤지만 중태더라는 등산객의 소식에 산그늘 어둠이 싸늘하게 다가왔다. 위태위태한 사람들이 한계치에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록으로 덧붙은 ‘저자에게 듣는 로마 영웅들의 성적’은 재미있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 자기 제어 능력, 지속하는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일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다시 천년쯤 후에 세계 어느 역사에서 그를 능가할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난세에 영웅도 있는 법이라 했으니 태평성대이기에 그런 지도자가 나올 일이 없다는 역설이 되는 것인가.

  영웅이 그립다. 세기의 영웅 카이사르까지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그의 업적과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해 팍스 로마나를 실현한 아우구스투스 같은. 그는 지적 능력, 설득력, 육체적 내구력의 점수는 카이사르에 미치지 못하지만 자기 제어 능력과 지속하려는 의지는 동등한 점수를 받은 지도자였다.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에 부합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카이사르는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는 성실히 그 임무를 수행했다. 성실한 지도자, 그런 영웅이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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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시선 204
장석남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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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水墨) 정원 9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중에서

 

               ㅜ

 

지난번에 이어서 수묵정원을 올립니다.

연작시편이기도하고 이‘번짐’을 좋아해서요. ^_^

번짐,

이 단어가 주는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만으로도

다가오는 봄날이 희망으로 그려집니다.

여기 머문 그대도 날마다 그러시기를 기원합니다.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지는’ 순환의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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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창비시선 238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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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는 한 호흡

예순 갑자를 돌아나온 아버지처럼

그 홍역 같은 삶을 한 호흡이라 부르자

                                시집 [맨발 (창비2004)] 중에서

 

         

 

이천십사 년이 시작 되었어요.

태양의 숫자로도 달의 숫자로도 새해.

‘한 호흡’으로 숨고르기 합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지고

기나긴 겨울이 가고 연록의 새봄이 옵니다.

곧……. ^_^

어느 날은 찌질하게 시작됐다 호기롭게 마감되고

어떤 날은 화들짝 개었다 별 볼일 없이 마감되기도 하는

우리들의 하루, 하루들 …….

가파른 계단을 오르듯 힘든 하루도,

꽃그늘아래 환해지던 하루도 당신 생의

또한 제 생의 ‘홍역 같은 삶’입니다.

그래도 봄이 오는 길목

머지않아 광교산 나무들도 봄물 오르겠지요.

여기에서 머문 당신의 시간도 봄물,

봄빛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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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춤이다
김선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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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춤꾼 최승희의 이야기이면서 최승희의 여러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승희. 그녀는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다. 최근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그녀의 사망일은 1969년 8월 8일이다. 최후 정황은 여전히 안개 속이지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그녀는 죽었다.

  너무 일찍 세상에 오는 사람들이 있다. ‘적당히 일찍’ 올 수 있다면 예술가로서의 운명치곤 퍽 행운인 것인데, ‘너무 일찍’ 와버려 불행했던 사람들, 최승희 그녀도 너무 일찍 왔다. 아니, 그녀가 너무 일찍 왔다기보다, 그녀의 존재를 받아내기에 우리의 근현대가 너무도 불우하게 기우뚱거렸던 탓도 있으리라. 기획된 근대의 전근대적 옹벽 앞에 내던져진 현대의 예술가. 그녀는 21세기 감각으로 20세기를 살았다. 불우는 당연했다. 1911년 출생.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조선. 한국전쟁. 분단. 우리 근현대사의 혹독한 상처들을 고스란히 통과한 그녀는 8.15이후 북쪽 사람으로 살다가 숙청당했다. 당내 정치적 역학 관계에 의해 남편 안막이 숙청된 후 그녀도 곧 숙청당했지만, 남편의 숙청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북한이라는 닫힌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힘든 사람이었다.

  나는 느낀다. 검은 불꽃, 강력한 죽음의 느낌, 초혼과 위령의 흐느낌이 그녀에게 묻어 있다. 이글거리는 빨강, 죽음만큼 강력한 삶의 느낌, 현실의 경계를 솟구쳐 가로지르는 담대한 탈주의 스케일이 그녀의 그림자에 어른거린다. 예술가로서 그녀가 싸우다 간 것은 인간의 조건이었다. 예술은 그녀를 노마드로 만들었고 그녀는 너무도 일찍 코스모폴리탄이 되었다.

  쿨하기엔 너무 뜨거운 심장을 가진 그녀가 기우뚱한 간극에서 도약하는 것을 바라본다. 불우와 찬란함의 공존, 화려한 외양속의 극한의 고독, 그녀에게 합당한 수식어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에의 갈망’일 것이다.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자신의 예술-언어를 구속시키지 않았다. 무용가로서의 자존의 핵심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예술가. 자신의 몸, 자신의 춤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에고이스트. 전근대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탈주하는 최승희가 바람처럼 속삭인다. 자유인 춤. 자유인 예술. 자유인 영혼!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춤이다’가 김선우 시인이 쓴 첫 장편소설인 줄로만 알았지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삼은 줄은 몰랐다. 조선 최고의 춤꾼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최승희라는 이름도 알게 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이사도라 던컨은 아주 오래전에 알았으면서.

  이것이 내 개인의 한계인지,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단 거다. 비단 그뿐이겠는가. 어쩌면 아우슈비츠에 관해서보다 만주에 대해서, 아니 수용소의 유대인들의 죽음보다, 만주 항쟁이나 시베리아에서 죽어간 우리 혁명자들에 대해, 제주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간 무고한 4.3의 희생자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죽음의 비중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고 세계사에는 그럭저럭 아는 척할 만큼은 알면서도 정작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무지한 자신이 한심하고도 한심했던 것이다. 우리는 알지도, 알려 하지도 않는 사이에 그렇게 잊혀지고, 묻혀 버린 숱한 ‘너무 일찍’ 세상에 와버린 이들께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 책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최승희라는 큰 나무의 가닥만 있을 뿐, 많은 부분 허구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절을 살아 간 사람들의 척박한 생이 밟혀왔기 때문이다.

  역사 소설에서 특정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자칫 실제보다 부풀릴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객관화 되지 않으면 정형화된 모델로 만들어 버리기 쉬울 텐데 감성적이고 단단한 문장들은 여리고 예민하고 꿋꿋한 예술가의 표상을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반전처럼 드리운 최승희의 그림자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되었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책을 덮고 나니 말줄임표들이 유독 많았다는 생각이 났다. 나 또한 습관적으로 말줄임표를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런데 장편소설을 읽고 나서 문장은 기억이 남질 않고 말줄임표들이 떠오른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행이 여운을 남기는 문장들이 시어처럼 가득했다.

 

  숨이 소진되면서 가슴이 꽉 차는 느낌. 내가 이편에 없는 순간 저 편에 있게 될 거라는 확신 같은 게 불현듯 들곤 해. 죽음과 삶의 경계가 아주 흐릿하고 심지어 뒤섞여 있다고 느끼게도 돼. 육체를 한계상황에 밀어 넣을 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덧없어지지 그래서 나는 춤에 미친 건지도 몰라.p56

 

  그 꽃이 얼마나 깊은 관능으로 흐드러지는지 옥수숫대를 잡아당기며 놀아본 이들은 안다.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난분분 자욱한 냄새의 열락을 만드는 옥수수밭. 옥수숫대는 온몸으로 꽃냄새를 풍겼다.p64

 

  여자 몸속의 뼈들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발바닥과 연습실 바닥 사이가 엄청난 간격으로 느껴졌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각.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지만, 열여섯 살의 여자를 기묘한 방식으로 자극했다. 바닥을 잘 느껴라. 움직이는 바닥이, 지구가, 이시이 선생이, 여자에게 요구했다. 바닥을 잘 느껴라. 그것은 춤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바닥을 딛고, 바닥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살아간다. 여자의 이마와 등에서 땀이 솟았다. 결국 여자가 휘청, 주저앉았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여자가 열 개의 발톱으로 처음으로 바닥을 움켜쥐었다.p81

 

  눈뭉치가 떨어지며 파아, 하고 가루눈이 되어 바람 속으로 흩어졌어.p88

 

  이런 독기, 여자가 계속 이시이 문하에 있었다면 품을 수 없었을 이 실패의 독기가 여자를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아니라 세계의 무용가로 이끌 힘이 될 것이다. 여자의 독기와 고독, 나는 그것에 패를 걸기로 한다. 지금 내개 필요한 것은 일본 최고의 무엇이 아니다. 조선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무기, 그것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매혹을 가진 무기를 나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꽃이다.

  여자가 나를 날카롭게 일별했다. 나는 그 눈길을 칼자국처럼 예민하게 느낀다. 여자를 얻기 위해 여자의 감도에 나를 맞춰야 한다.p114

 

  그녀의 유행혐오증이 생래적인 것이듯 그녀는 계급적인 각성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오직 최고의 춤만 생각하는 예술가일 뿐이다. 그런데 그녀 속에 있는 자유에의 갈망, 이것이 이념적인 것과 그다지 멀리 있지 않음을 나는 느낀다.p120

 

  아름다운 것은 치명적인 것과 함께 온다.p125

 

  사랑의 모순처럼 인생은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든 모순으로 가득했다. 여자는 힘을 원했다. 예술, 명예, 돈, 모든 면에서. 그런데 자꾸 여리고 약한 것들을 향해 여자의 마음이 움직였다. 힘을 원하는데 힘이 결핍된 것들을 향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모순. 여자는 보살핌 받기를 원했다. 누군가 자신을 안전하고 강건하게 보살펴주기를. 그런데 자꾸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은 이들에게 마음이 가닿곤 했다.p130

 

  모든 돌연한 말들이 한 줄로 꿰어지는 듯한 느낌, 살아온 날의 마디들이 공중에 흩뿌려 놓은 점들 같다가 느닷없이 한 줄로 꿰어지면서 손목이나 목 언저리에 감겨 오는 듯한 느낌.p142

 

  단지 소름 끼치는 정체감, 오래도록 고여 있어 심장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정체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몸을 움직여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 멎어버리는 순간, 그것이 곧 몸의 타락임을 여자는 그때 알았다. 몸의 타락은 마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현상은 본질을 반영한다고 하던가.p144

 

  배롱나무 꽃 타래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다 들릴 듯했어요.158

 

  최승희. 그녀가 왔다. 두 눈에 가득 불을 품고 왔다. 기묘한 광기와 외로움이 흐르는 눈빛이었다.p209

 

  아름다운 것들은 기록하고 싶어지죠. 세상이 미쳐가서 아름다운 것이 드물 땐 더욱.p210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꿈꾸고, 욕망하고 움직이고, 흔들리며 달릴 것이다.p216

 

  해탈한 마음이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을 아파하며 함께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보살도라 하였어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보살춤을 보는 일은 황홀하고 고통스러워요. 어머니를 보는 일처럼 힘들고 아파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듣는다는 관음보살의 얼굴을 상상해요. 관음의 자비. 관음의 슬픔. 아름답고 아프고 고요해요.p256

 

  이성과 감성, 두뇌와 심장,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 위태로운 다리처럼 걸쳐져 있는 목. 그리고 목의 뒤편. 가장 명랑한 무용도 노출한 목을 통해 감정의 균형을 무언으로 조절한다. 무용가의 목선은 그래서 중요하다. 기쁨 배면의 슬픔, 슬픔 배면의 쓸쓸함, 쓸쓸함 배면의 자존감, 이런 이중적인 감정을 존재 자체로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목이다.p267

 

  여자가 떠난 빈방 어디서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 아래 나란히 놓인 다섯 개의 둥근 등에 기타로가 천천히 불을 붙였다. 세상에 온 첫 번째 바람을 밟듯이 나비가 가만히 눈을 떴다. 빈방 한가운데로 나비가 떠올랐다. 빛의 나비와 검은 나비 그림자. 그러니까,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이 얻어지는 거야. 고치에서 춤을 꺼내듯, 이 순간의 몸과, 다음 순간의 몸이 그렇게 연결되는 거야p285

 

  마지막 구절처럼 춤은 몸의 예술이다. 몸을 오래토록 등한시해왔다. 또한 몸의 말에도 그랬다. 소설은 몸의 말이기도 하고 머리의 말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둥근 등에서 날아오르는 나비가 장자의 꿈이기도 하고 최승희의 꿈이기도 하듯이.

  몸의 말을 받아 적는 일에 김선우시인은 탁월하다. 그녀를 통해 여자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관능의 언어로 몸의 말을 듣는 것은, 무대 위 여자의 보살춤을 보고 있는 듯 했다. 시에서와는 다른 환상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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