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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증보판 ㅣ 창비시선 20
신동엽 지음 / 창비 / 1989년 4월
평점 :
사람들 사이엔 강물이 있다.
늘 사람들 속에서 그 강물 소리를 듣는다.
어떤 이와 있을 땐 그 강물은 달빛 젖어 흐르고, 어느 땐 흙탕물이 되어 흐르고, 누군가와는 가뭄에 말라가는 얕은 물소리를, 때로는 햇빛 잘게 부서지며 아름답게 흐르는 강물을, 어떤 이와는 살얼음 서걱이는 그 강을 건너는 발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 마다에 서로 다른 물소리는 늘 사람들 속에 있게하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강물은 늘 아름다운 광경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떠나 살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속을 떠나 살수는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나도 한결같이 조잘조잘 흐르는 내 유년의 강, 그리운 드들강 물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몇 안되는 친구가 있다. 그중 두 친구를 만나서 가자고 한 곳은 봄이 오는 호수, 대청호 였다.
해 마다 이맘때면 나를 부르는 바람이 있다. 이른 봄,이른 시간의 충주호 유람선의 뱃머리에 서있어 본적이 있었다. 그때 얼어붙게 만들던 추위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던 산들과강물, 가슴에 스며드는 몽실한 물안개며, 폐부를 채워주던 달콤하고 맵짜하던 봄바람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이맘때면 어김없이 내 안에 흐르는 강물을 흔들어데는데, 멀지않은 곳에 대청호가 있으니 무얼 주저하랴!
비는 끈질기게 봄을 불러 대지를 적시며 그 속에 숨쉴 생명을 노크하고, 하늘 향해 두팔 벌린 나무는 그 비를 마셔 혈관을 통해 새잎을 불러오는 삼월인데...
어른이 되어 만났다면 같은 길에서 한번도 부딪치지 못했을 각기 서로 너무 다른 셋이서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로 차안에서는 수십장의 접시가 깨져 나간다. 그 깨진 날카로운 사금파리 조각으로 누구나 베일것 같던 우리도 그 사금파리 무디게 갈아 꽃밥이며 꽃반찬을 차려낼 줄 아는 소꼽놀이때의 어른들이 되었다. 아직 어딘가에는 가끔은 햇빛에 쨍하게 빛날 사금파리 모서리를 숨기고 사는지도 모르지만 세월은 날카로움도 무디게 해준다는 얘기를 나누며 봄비에 젖어드는 풍경속으로 들어간다.
차안에 남아 있겠다는 둘을 놔두고 가는비를 그냥 맞으며 수많은 계단을 오르려는 나를 불러대는 저 물소리를 쫓아 올라간다. 물소리보다 먼저 틀어놓은 테잎에서 유행가가 나를 반기지만 모른체 하고 가쁜 숨을 뱉으며 계단을 단숨에 오르지만 비릿한 물내음뿐, 물은 아직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공원화된 대청호 주변은 실제 물을 보기 위해선 한참 걸어가야 했다. 빠르게 나를 부르는 그 소리는 공원을 가로질러 뛰듯이 걷게 만들어, 한 우산아래 어깨 맞댄 연인의 모습도,가위 솜씨 자랑한 나무도, 눈에 들어 오지 않게 한다.
드디어 대청호.
산은 물을 감싸고 물은 산을 에돌아 그렇게 수런 거리는 하늘에 구름은 몽실몽실 떠돌고 있었다. 물 밖을 감싸안은 것도 산이고, 물 안을 채우고 있는것도 산 이었다. 산은 물을 떠나지 못하고 서로 그렇게 애타하며 가까이서 멀리서 서로에 속해 있었다.
꽃가룬들 아니 날러오랴
철은 이르지만
철은 이르지만
아름다운 하늘은 넘쳐 흐르는 햇빛
향긔론 바람은 머리칼에 속살대다
풍장이라도 들려올듯
풍경화처럼 조용한 대낮
유화빛 강물은 미끄러히 구비돌고
묵은 계절을 추억과 함께 작별하면
빛나는 가슴,가슴은 수줍음처럼 반가워...
홀로 놓인 돌방석
우리 함께 강 언덕에 올라와
그리움 처럼 노래 부르노라
그리움 처럼 노래 부르노라
머언 나라
강물을 건너 뚝길을 지나
까마아득한 산맥을 넘어
그곳이 어데라도 좋다
가다가서 쓰러져도 좋은 길
---신동엽의 '빛나는 강 언덕에서'전문---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물이며 산을 흔들어 대는 비 내리는 대청호를 바라보면서 내가 간절하게 떠올린것은 신동엽의 금강이었다.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흘러 여기 잠겨있는 실제의 금강이 아니라, 산을 적시고 삶을 관통하여 생의 구비를, 민중의 숨결을 어루 만지며 흘러온, 아리게 아프고도 질긴 그리움, 금강이였던가 보다.
하지만 하지만,
대청호는 그 안에 살던 마을만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정서도 그리움도 간절함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그저 대전과 청주 사람들의 목을 적시고 몸을 적시지만 정신은 적시지 못하게 꼭꼭 숨어서 사람들을 차단하고 그저 산속에 고요히 멈춰 있었다. 조용필이 뭐라든 말든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 일 것인가!
멈춰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무수한 생명을 키우고 있을거라고, 저 먼 바다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을거라고, 아픈 위로를 스스로 던지며 바라보는 대청호에 비는 가늘게 스며든다. 눈치 채지 못하는새 그 비는 물의 수위를 높여가리라. 정신은 그런 것임을.
산은 결코 물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우리들이 떠나 온 고향을 생각하며 선생의 시, [고향]을 읽는다.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며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창비1992)] 중에서
2003. 3. 12. 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