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들은 느슨한 시인, 나를 단련시킨다. 그의 ‘시로 씌어진 제사(祭祀)‘를 읽으며 나는 달리기를 준비한다. 신발끈을 조이며 겨울모자를 쓴다. 한 시인이 도착한 어느 순간에 동반하기 위하여 정결하게 옷깃을 여민다. 나의 폐활량이 충분하여 이 달리기가 그곳으로 이르길 바란다. 짧고 간결한 제사, 투명하게 슬픈 제사, 풀벌레와 새소리, 낙과와 울퉁불퉁한 과일과 쓸쓸한 어머니를 위한 제사. 이 아득한 아름다움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전에 아름다움은 우리를 떠나갔나. 태준의 시들은 그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않더라도 심란하지 않게 저녁을 잘 보내라는 안부인사다. 이런 짧은 안부인사가 시의 어떤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들이여, 왜 세계는 가장 가난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우리를 기억하겠는가. 허수경 시인

아침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 P10

빈집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 P13

먼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 P18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세계가 큰 풀잎 한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를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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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후로 夕陽, 夕陽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내 맨발 흥건히 젖어들 때
툇마루에 반쯤 걸터앉은 햇빛에는 애당초 누군가 살고 있는 게다
한량처럼 열대의 늪을 건너가는 河馬와
南國으로, 남국으로 한절기를 버티려는 되새떼 그 빈사의폭동 사이
개같은, 당최 이 개 같은 틈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때
내 맨발이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가려질 때
눈에 호롱불을 들이고
바늘귀를 꿰주마, 중얼거리는 그런 오랜 족속이 있는 게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내 할머니 넋, 혹은 내가 부려온 세상의노복들이 있는 게다 - P61

포도나무들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철사줄을 감아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낸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 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야 죽음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을엔 나무란 나무가 죄다 포도나무, 늙은 생애들뿐이다 - P65

오, 나의 어머니


꼿꼿하게 뿔 세우고 있는 흑염소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죽창 들고 봉기라도 하듯 젖먹이 어린것들 뒤로 물린 채 북풍에 수염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뒷발질에 먼지를 밀어올리면서 들판에 일렬로 벌리어 있었습니다 - P66

엽서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 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 - P74

그믐날, 부고를 걸다


장닭이 하도 울어서 낮잠이 깨었는데
누군가 다녀간 게다
쿰쿰한 변소 안에 두려다 문짝에 끼워두고 돌아선다
그새 바람 일었나
덜컹거리는 문짝이 먼저 우는 것 같아 용하다
뒤란으로
물에 빠졌기에 건져 가둔 다람쥐를 보러갔다 
하, 놈이 없다
얼마나 요동쳤을까
즐거웠을까 - P77

갈라진 흙집 그 門을 열어
세월에 하얀 燈을 주렁주렁 켜는


대청마루 가득 꽃을 내다거는 누구
소켓을 돌려
하얀 등을 주렁주렁 켜는 누구
가만 보자,
지나치는 내 등뒤에
기억 안에
문득

향기를 밀어넣는
아카시아, 아카시아 - P78

수런거리는 뒤란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 P86

忍冬


겨울 나무가 친필을 보내오니
그 文章이 물빛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퇴고도 없고
가두는 것 없이
퀭한 이목구비도
그냥
그런 듯이
요양원처럼 - P88

焚書

겨울 빈 들판에 허허 바알간 불이 타오르는
들판의 분서!
재를 삼키는 들판을 보라
겨울새도 그 위는 날지 못하는, 잔뜩 웅크린, 불끈 쥔, 빈것으로부터의
힘! - P89

첫눈


오래
오래도록
걸어
걸어서 온
첫눈
하나
하나가
벼랑집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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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새벽 3시에 무덤은 독에 물이 꼭 차 찰랑거린다
모가지를 날갯죽지에 묻은 장닭처럼 무덤이 횃대에 올라있다
부풀어오르는 저 무명씨의 무덤을 찾는 이 나는 본 적 없다
새벽 3시,
한그루 나무처럼 내 척추에는 가시 같은 바람이 뻗쳐 있다 - P34

망나니가 건넨 말


초승달을 저만치 걸어두고
무덤에서 반 썩은 열 되 남짓 내 송장이
걸어가는 사람의 발을 이 밤에 잡아채거든 오랜 습관으로
알 것삼신밥을 올리는 점쟁이로 알 것산사람이 귀양간들 탱자나무 안세월이야ㅣ 봉창 뚫린 집에 한 사나흘 묵었다 가지마음은 허허벌판에 쏟아지는 우레 같은 것주리틀수록 외로워지는 것거미줄을 걷고 빈집의 문간 드나들며 방칸 수나 이따금 세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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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함.

문태준 시에는 실재와 환몽이 간격을 벌리고 그 사이로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細路가 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애잔한 그리움 속을 서성이고 처연한 우수에 젖게 된다.
그러나 이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이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의고투의 추억담이 아니라을 살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삶 자체의 향기일 것이다.
-김명인 시인. 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아. 참 좋은 시들이다. 오랜만이다. 이 깊은 내륙의 정서를 나는 뼛골의 시들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 싶다. 마치 뜨거운 뼛속에서 구워낸 시들만 같다. 읽고 나니 내 마음의 뼈들도 뜨끈하다.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특이하고 아름답다. 시가 낡디 낡은 언어의 품일망정 기성품을 거부하는 운명인 이상 때로 낡은 것은 많은 ‘새로움‘ 위에서 새롭기마련이다. 문태준의 시들이 따듯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새로운 낡음 때문이다. 옥수수 속으로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니!
-장석남 시인

시인의 말

시골집 뒤란엘 가면 심지를 잃고 모로 누운 초롱을 보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아슬하다. 삶이라는 게 원체 모로 서 있는 것인지는 모르되, 그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은 고통스러웠다.
장마 지나고 나서 눅눅한 것을 내어다 말리는 일을 거풍(擧風)이라 하는데, 바람을 들어올린다‘는 그 말의 여울을 빌려 일흔다섯 편의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람을 들어올려 가슴속에 남아있던 무거리를 마저 체질할 수 있다면, 그래서 흰 광목 몇 마처럼 마음자리가 환해졌으면 좋겠다. 가늘고 가벼운 다리로 수면을 횡단하는 소금쟁이처럼.
쉴새없이 바람에 흔들렸던 가족 모두에게 미욱한 첫시집을 바친다.

2000년 3월
문태준

호두나무와의 사랑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

철 지난 매미떼가 살갗에 붙어서 호두나무를 빨고 있었다

나는 지난 여름 내내 흐느끼는 호두나무의 哭을 들었다
그러나 귀가 얇아 호두나무의 중심으로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불에 구운 흙처럼 내마음이 뒤틀리는 걸 보니 나의 이 고백도 바람처럼 용서받지못할 것을 알겠다 - P10

돌배나무와 배나무


예순한살의 아버지가 진흙을 발라 돌배나무에 접을 붙이고 있었다

얼굴은 잊혀지고 그 옛사람의 그림자만 
남았다

사마귀 대가리처럼 치켜 오르던 꽃들의 잔치도 무덤덤해졌다
내 마음도 먹줄을 튕긴 듯 고요해졌다

그러나,
사소한 후일담도 없이 돌배나무는 배나무로! - P11

첫사랑


눈매가 하얀 초승달을 닮았던 사람
내 광대뼈가 불거져 볼 수 없네
이지러지는 우물 속의 사람
불에 구운 돌처럼
보기만 해도 홧홧해지던 사람
그러나, 내 마음이 수초밭에
방개처럼 갇혀 이를 수 없네
마늘종처럼 깡마른 내 가슴에
까만 제비의 노랫소리만 왕진 올 뿐
뒤란으로 돌아앉은 장독대처럼
내 사랑 쓸쓸한 빈 독에서 우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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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어린 모들 막 고개를 내미는 무논에
노을은 내리고

헐은 잇몸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다
언제부턴가 저도 썩어
뿌리째 달랑거리던
이빨 하나
논물 속에 툭 떨어진다

날로 살져가는 흙 속에
나를 바라보는 흰 왜가리
눈빛 속에 - P64

여름비


장독뚜껑에 고여 있는 빗방울

맨드라미 붉은 꽃벼슬에도 빗방울

줄행랑을 놓던 고양이란 놈
뽈뽈뽈 다 늙은 감나무 가지에 기어올라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검둥개는 낑낑거리며 나무 밑을 맴돌고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 밑엔
길 잃은 두꺼비 한 마리

언젯적 하늘인가
무지개가 활짝 선다 - P65




아플수록 몸은 눈이 밝아진다

열에 들린 몸이
꼼지락거리는 나무의 발가락을 본다
제 속을 날아가는 흰나비를 본다

넋이야, 넋이야 출렁이는 피

열꽃이 터지는가
온몸이 근지러워라
다리며 허리
가랑이며 자지 끝까지
고름이 쏟아지고
몸 속 가지 가지마다 숨이 열리고
한 숨, 한 숨 돋아나는 물방울들

어디서 사과 익는 냄새
신 살구 냄새 - P68

물소리
물소리
달구나 거렁뱅이 바람에도
진한 살 냄새

아 뜨거운 몸이
한 발만 내디디면
그대로 춤이 될 것 같은데
허공에 피어
갖은 빛깔로
흐드러질 것만 같은데 - P69

봄비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나직하게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
힘든 네 몸을 내려놓아라

네가 살고 있는 낡은 집과, 희망에 주린
책들, 어두운 골목길과, 늘 밖이었던
불빛들과, 이미 저질러진
이름, 오그린 채로 잠든, 살얼음 끼어 있는

냉동의 시간들, 그 감옥 한 채
기다림이 지은 몸 속의 지도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레소리 들리고 - P70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빈 방의 퀭한 눈망울이 젖는다

저 밑바닥에서 내가 젖는다

웬 새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있다
비 젖은 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날아간다 - P71

꽃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 P74

저 꽃이 불편하다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P76

봄눈


흰 빛만이 남았네

내 한번도 가지 못해 지명으로만 남아 있는 망월동에
눈이 내려
눈이 내려

다들 떠났다는데
무덤자리엔 깨어진 이름자 하나 없다는데

먼 내 집 뼘짜리 마당
겨울도 봄도 아닌 수상한 바람 속에
새움 내밀고 있는
꽃가지에 엉겨붙는
눈이 되어

웬 더벅머리 청년 하나이
잠바때기에 신발을 끌고
한점 빛으로 꺼질 때까지
나를 부르고 - P84

허기


시커먼 폐수 속을 꽂이파리가 흘러간다
그 너머 공장 굴뚝 위로
오늘은 새파란 하늘에
낮달이 떠간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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