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배후로 夕陽, 夕陽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내 맨발 흥건히 젖어들 때 툇마루에 반쯤 걸터앉은 햇빛에는 애당초 누군가 살고 있는 게다 한량처럼 열대의 늪을 건너가는 河馬와 南國으로, 남국으로 한절기를 버티려는 되새떼 그 빈사의폭동 사이 개같은, 당최 이 개 같은 틈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때 내 맨발이 저무는 나무들의 이파리에 가려질 때 눈에 호롱불을 들이고 바늘귀를 꿰주마, 중얼거리는 그런 오랜 족속이 있는 게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내 할머니 넋, 혹은 내가 부려온 세상의노복들이 있는 게다 - P61
포도나무들
오래된 포도밭에는 폐경한 여인들이 산다 지주목도 비와 바람에 삭아서 죽은 포도나무에 기댄다 녹슨 철사줄을 감아쥔 덩굴손, 살점 다 발라낸 뼈다귀 같다 여름이 솟았다 진 자리, 나무들이 더러 죽었다 죽은 나무를 건드리자 포도 알갱이들이 송이에서 빠져나온다 알은체하니 마르고 쭈그러진유언들이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것이다 나무들은 그제야 죽음쪽으로 돌아눕는다 마을엔 나무란 나무가 죄다 포도나무, 늙은 생애들뿐이다 - P65
오, 나의 어머니
꼿꼿하게 뿔 세우고 있는 흑염소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죽창 들고 봉기라도 하듯 젖먹이 어린것들 뒤로 물린 채 북풍에 수염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가끔 뒷발질에 먼지를 밀어올리면서 들판에 일렬로 벌리어 있었습니다 - P66
엽서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 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 - P74
그믐날, 부고를 걸다
장닭이 하도 울어서 낮잠이 깨었는데 누군가 다녀간 게다 쿰쿰한 변소 안에 두려다 문짝에 끼워두고 돌아선다 그새 바람 일었나 덜컹거리는 문짝이 먼저 우는 것 같아 용하다 뒤란으로 물에 빠졌기에 건져 가둔 다람쥐를 보러갔다 하, 놈이 없다 얼마나 요동쳤을까 즐거웠을까 - P77
갈라진 흙집 그 門을 열어 세월에 하얀 燈을 주렁주렁 켜는
대청마루 가득 꽃을 내다거는 누구 소켓을 돌려 하얀 등을 주렁주렁 켜는 누구 가만 보자, 지나치는 내 등뒤에 기억 안에 문득 훅 향기를 밀어넣는 아카시아, 아카시아 - P78
수런거리는 뒤란
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 P86
忍冬
겨울 나무가 친필을 보내오니 그 文章이 물빛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퇴고도 없고 가두는 것 없이 퀭한 이목구비도 그냥 그런 듯이 요양원처럼 - P88
焚書
겨울 빈 들판에 허허 바알간 불이 타오르는 들판의 분서! 재를 삼키는 들판을 보라 겨울새도 그 위는 날지 못하는, 잔뜩 웅크린, 불끈 쥔, 빈것으로부터의 힘! - P89
첫눈
오래 오래도록 걸어 걸어서 온 첫눈 하나 하나가 벼랑집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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