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 미틱(프랑스 인터넷 만남 사이트) 의 광고

 

24. 극단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관점은 사랑에서 주관적 경험의 최상의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고안해내는 철학자들인데, 아마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를 들어 쇠렌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를 꼽르 수 있겠지요.

 

심미적 단계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과 반복을 경험하는 것, 모차르트의 동 쥐앙.

윤리적 단계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

종교적 단계 -

 

자아가 사랑 고유의 투명성을 거쳐서 자아를 상정한 그 힘 안으로 빠져들게 될 때”, 사랑의 궁극적인 변모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 덕분에 자아가 제 신성한 기원에 뿌리내리게 될 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유혹을 초월하여 그리고 결혼이라는 신실한 매개를 통하여, 인류의 이상에까지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27.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플라톤은 이와 관련하여 최초의 직관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보편적인 영향력을 지니며, 실현 가능한 보편성의 개인적 경험이자 철학적으로 매우 근본적이라고 말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8. 물론 타자의 몸이라는 매개가 존재하지만, 결국 쾌락이란 언제나 제 자신의 쾌락일 것입니다. 성적인 것은 결합하지 않으며, 분리할 따름입니다. 홀딱 벗었건 타인과 한 몸으로 들러붙어 있건 간에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 즉 상상적 표상에 불과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쾌락이 당신을 타자에게서 멀리, 아주 멀리 떠에놓는다는 겁니다.

 

실재는 나르키소스적이며, 관계는 상상적입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없다, 라캉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만약 섹슈얼리티에서 성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사랑은 성관계의 결핍을 보충하러 도래하는 무엇이됩니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으로 하여금 사랑에서 주체가 타자의 존재에 접근하려 시도한다고 말하게 해 줍니다. 결국 주체가 제 자신을 넘어서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을 넘어 서게 되는 게 바로 사랑 안에서라는 것이지요. 섹스에서 당신은 타자라는 매개를 통해 결과적으로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될 뿐입니다. 타자는 당신이 쾌락의 실재를 발견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반대로 사랑 속의 타자라는 매개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만남입니다.

 

32. 그리고 사랑은, 예컨대 진리의 구축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33. 레비나스의 관점은 타인의 얼굴과 결부된 환원 불가능한 경험, 이를테면 그 매개가 결국에는 전체 타자로서의 신이 되는 그런 출현에서 출발합니다. 이타성의 경험은 핵심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윤리의 근저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는 따라서 사랑이 가장 전형적인 윤리적 감정이라는 결론을 위대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빚어내게 됩니다.

 

41. 사랑은 개인인 두 사람의 단순한 만남이나 패쇄된 관계가 아니라 무언가를 구축해내는 것이고,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의 시작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에 대한 물음들에 늘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사랑의 낭만적인 개념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며, 다소간 이 개념은 만남에다 사랑을 소진시켜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만남에서,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술적인 외재성의 한순간을 맞이하여 불타버리고, 소진되며, 동시에 소비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로 여기에서 바로 기적의 범주에 속하는 어떤 것, 즉 존재의 강렬함, 완전히 녹아버린 하나의 만남이 도래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사랑이 이렇게 전개될 때 우리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서로를 통합해버리는 사랑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의 연인이 만났고,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와 같은 무언가가 세계에 맞서 생겨납니다.

 

....이 개념에는 놀라운 예술적 매력이 존재하지만, 제 생각에 이 개념은 심각한 실존적 위험을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개념을 사랑에 대한 진정한 하나의 철학으로 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예술적 신화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44. 지속성이라는 표현에서, 사랑이 지속되고 서로가 항상 사랑하며 또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각자라는 존재는 사랑의 시련 속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시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사랑은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

 

51. 저는 사랑이, 예컨대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제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컫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주 단순히 말해서 이 진리는 둘에 관한 진리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차이의 진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사랑은 바로 이것에 대한 경험입니다.

 

52. 이 사랑 이야기들이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는 이유는 사랑에 보편적인 무엇이 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보편적인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 그것은 모든 사랑이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 것과 연관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독한 의식에 의한 것과는 상이하게, 사람들은 서로 대면하고 서로가 서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랑이라 해도 새로운 증거를 우리에게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 아우수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우리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런 한편,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우리 역시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제 모든 의미를 철학에 부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55. 사랑을 선언하는 것은 만남-사건에서 진리 구축의 시작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며, 만남의 우연을 시작이라는 형식 안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고, 더 이상 처음 시작되던 때처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것이 아닌, 실제로 하나의 필연처럼 등장하는 세계의 경험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우연이 고정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완벽한 우연이 결국 하나의 운명이라는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의 선언은 우연에서 운명으로 이르는 이행의 과정이고, 바로 이런 이유로 사랑의 선언은 그토록 위태로운 것이며, 일종의 어마어마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57. 말라르메는 시를 낱말에 의한 낱말로 극복된 우연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랑에서 충실성은 이러한 끈질긴 승리를 지칭합니다.

 

58. 우연의 고정, 그것은 바로 영원의 통고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랑이 영원을 선언합니다.

 

59. 사랑은 주관적인 어떤 힘입니다 사랑은 순간에 일어난 우연에서 시작되어, 당신이 영원을 제안하게끔 만드는 보기 드문 경험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60. “사랑이라? 그래, 그것은 둘의 시련이지. 사랑은 둘의 선언이고, 영원이야. 하지만 하나라는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어떤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문제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상징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모습이 바로 아이입니다.

 

67. 정치의 목표는 공동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에서도 그 목표는 차이의 지점인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하나 빠짐없이 경험해나가는 것이지, 종의 재생산을 확보하는데 놓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71. 사랑의 적은 경쟁자가 아니라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내 사랑의 주된 적,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 하는 자아입니다.

 

72. 순전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사랑에서 드러나는 변증법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두 가지 정치적 또는 철학적 정치적 개념이 있습니다. 먼저 코뮤니즘이라는 낱말 속에는, 공동체가 극단적인 모든 차이를 통합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런 사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박애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용어는 분명 차이들에 관한 물음, 즉 적과 근본적인 경계를 긋는 그런 대면을 동반하는, 정치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차이의 우호적인 공존에 관한 물음에 관여할 것입니다.

 

74. 기독교는 사랑을 초월성에다 곧바로 투사해버린 것입니다. ....타자는 분명 존재합니다만, “전체 타자나 초월성의 대타자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교가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77. 예컨대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여전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와 같은 표현에서 잘 드러나지요. 말하자면 사랑은 가능성은 아닌 것이며, 오히려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78 사랑을 지상에 도래하게 하는,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이행하게 하려는 이 의지는 바로 역사 속에 존재해왔던 코뮤니즘의 의지이기도 하였습니다.

 

82. 사랑과 혁명적 참여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사유의 영향을 받아 차츰 참여로 변해가는 삶이 획득하게 될 강렬함 그리고 사랑에서 차이의 작업을 삶에 부여하는 질적으로 상이한 강렬함, 이 둘 사이에, 주체들의 가장 은밀한 수준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은밀한 반향을 명확하게 보여주자는 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제가 역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89. 초현실주의는 법을 벗어난 사건적인 힘으로서의 이 미친 사랑에 열광하였습니다. 사랑에 관한 사유, 그것은 모든 질서에, 법질서의 힘에 대항하여 만들어지는 사유에 다름 아닙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바로 여기서 언어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 속에서 하나의 시적 혁명을 전개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살찌워나갈 무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 모퉁이에 있는 미친 사랑이 될 <나자>는 우리에게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만남의 시학을 눈이 부시도록 빼어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92. ‘이제 그만 Assez’이라는 제목의, 매우 찬란한 짤막한 텍스트에서 베케트는 산과 사막이 조금씩 뒤섞인 풍경을 배경 삼아 아주 늙은 커플의 방황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이야기는 사랑과 이 늙은 커플의 지속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이 작품은 육체의 참담함, 존재의 단조로움, 나날이 증가하는 섹스의 어려움 따위를 조금도 감추지 않습니다. 텍스트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한편, 결국에는 빛을 발하는 사랑의 힘과 사랑을 구축하도록 지속시키는 끈질김의 체제 아래에 이야기를 위치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95. 포르투칼 시인 페소아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저는 사랑은 하나의 사유이며, 앙투안 비테즈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사유와 몸 사이의 관계는 아주 특이하며, 필연적인 어떤 폭력으로 늘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 이런 사랑에 넋 나간 젊은 녀석들하고는! 너희들은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한 사랑이 하나의 사유라는 걸 알아차릴 능력이 없는 놈들이로구나 내 이 페르난도 페소아의 말을 젊은 너희들에게 직접 이르노니,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 할 것이라는 뜻이노라.

 

108. 차이를 만들어내고, 고유하며, 반복을 전혀 동반하지 않고서, 고정되지 않고 낯선 무언가에 대한 사랑을 반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숭배와 대립시켜야만 합니다. 저는 1982<주체이론>에서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109. 고다르에게는 사랑이 거의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사랑과 저항 사이의 접속에서 고다르와 저의 차이는 바로 멜랑콜리인데, 이것은 고다르에게 모든 것의 색깔을 의미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반면, 저는 사랑과 관련된 것을 포함하여 이 주관적인 채색에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113.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저는 우리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의 기쁨을 봅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처럼

 

물결 속에서 발가벗은

네 기쁨에 이른 너를

 

저는 봅니다.

 

121.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163.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의 과정을 다리 절기 (boiterie)라고 부른다. 다리 절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걷기이다. 다시 말해 다리 절기란 그 자체로 걸음인 동시에 걷기를 금지하는 것이다.” 완전한 걷기라는 것은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수렴/발산의 조화는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다. 사랑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항상 절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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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14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디우가 황지우를 인용했나 했습니다.

바디우 황지우 라임 쩌네요.....

시이소오 2016-09-14 11:02   좋아요 0 | URL
ㅋ ㅋ 그러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추석 명절에 사랑의 담론이라... 뭔가 언발란스하기는 하지만.. 좋습니다.
명절 무탈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시이소오 2016-09-14 12:48   좋아요 0 | URL
명절에 사랑이 발란스한 그날이 오기를 고대해봅니다. 저야말로 곰발님글을 매번 열독하는 일인입니다 ^^

컨디션 2016-09-14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랭 바디우 이 사람. 프랑스 철학자인가요? 아니 당연히 그렇겠죠.^^ 근데, 근데요.. 라캉이니 데리다니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걸까요. 읽다보면 정말 돌아버릴거 같아요.ㅠㅠ(시이소오님 글이 그렇다는 게 아니구요^^)

참, 그리고 저도 궁금했는데, 위에 syo님 댓글이요.. 이 책 인용하시면서 번호 매기신 게 페이지인가 뭔가 하다가, 아 페이지 겠구나 했는데 황지우 시 인용하시면서 121이라고 되어있어서, 어 뭐지? 알랭바디우가 황지우의 시를 자기 책에서 다뤘단 말인가? 암튼 너무 궁금하네요.ㅎㅎ

추석을 코앞에 두고, 음식 하다 말고 갑자기 북플 들어와설라무네 너무 길게 주절거렸네요ㅎ

시이소오님, 추석 잘 보내시구요~^^

시이소오 2016-09-14 12:52   좋아요 1 | URL
아, 페이지 수 맞구요 옮긴이글을 옮기다보니 바디우 책에 황지우가 등장하게 됐네요.

컨디션님도 컨디션 조절하시면서 편안한 추석 보내세요 ^^

나뭇잎처럼 2016-09-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재발명. 바디우가 본 사랑이 뭘까, 궁금해서 잠이 안 올거 같아요. 서재질 이제 막 시작했는데, 서재의 단점을 알아챘어요. 쌓인 책 위에 나날이 무게를 더해 쌓이는 책! 연휴고.. 택배는 멈췄고.. 도서관도 쉬고.. 어쩔..

시이소오 2016-09-14 13:10   좋아요 0 | URL
연휴엔 서점을 습격해 보심은 어떨지요.

나뭇잎처럼님도 즐거운 추석보내세요 ^^

2016-09-14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9-20 15:58   좋아요 1 | URL
어머나 답글이 날아갔네요. 지송^^;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저 역시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하게 포착하시는 영성님 글을 읽을때마다 기쁨을 느낍니다.

희망을 보았다고 할까요?

좋은글 계속 변함없이 써주세요.

감사드립니다^^

커피소년 2016-09-20 15:06   좋아요 0 | URL
명절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시이소오님께서 제 글을 읽고 기쁨을 느끼신다니 저야말로 기쁩니다.



절망의 나라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절망을 느끼고 있었는데

시이소오님의 댓글을 읽고 작은 희망을 느끼네요.ㅎㅎ



시이소오님도 계속 변함없이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지만

일 시작하시면 바쁘셔서 글을 못 쓰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글을 지속적으로 써주시는 분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만큼 당황스럽고 아쉬운 일이 없으니까요. ㅎㅎ


감사합니다.ㅎㅎ

시이소오 2016-09-20 16:00   좋아요 1 | URL
작은 희망을 느끼시다니 저의 희망이 헛되지 않은거죠? ㅎ ㅎ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
 
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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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매설리의 <인생의 모든 의미>를 읽으며, 20세기 100여명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숱한 사상가들 중 전혀 예상치 못하게 테리 이글턴, 샤르댕, 윌 듀란트의 대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세 사상가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허걱, 이토록 식상할 수가. 수 백명의 대답 중 난 어쩌다 사랑에 꽂힌 것일까.

 

삶의 의미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따라오는 문구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삶의 의미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 따라서, 타인에게 폐만 끼치는 정치가들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들의 삶은 버러지보다 더 가치가 없다.)

 

그런데 사랑이란 단어를 쓰면 굳이 저런 문구가 필요가 없다. 그동안 읽었던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한 플라톤에 관한 책들, 이서희의 <유혹의 학교>등도 결국 사랑에 수렴한다. ‘그래, 사랑 박사가 되야겠다!’하고 작정하고 읽은 책이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다.

 

바디우 역시 랭보의 <지옥에서 한철>을 이 책의 제사로 삼았다. 사랑의 재발명을 언급한다. 왜 한병철 바디우는 사랑의 재발명을 말하는가?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프랑스 인터넷 만남 사이트 미틱의 광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 언제부턴가 썸 탄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썸 탄다는 건, 간만 보는 거다. ? 사랑에 빠지면 아프니까. 다치니까. 상대방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현대의 사랑은 애초에 나르시시즘에 불과할 뿐이다. 타인의 몸뚱아리는 단지 매개체일뿐 현대의 사랑은 결국 자기 사랑에 그친다.

 

루소는 자기애를 아무르 프로프르amour propre’아무르 드 수아amour de soi’로 구분했다. ‘아무르 드 수아가 자연스럽고도 유용한 자애심인 반면 아무르 프로프르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종속시키는 시선이다. 그것은 지위에 대한 욕구이며 문명사회의 모든 악의 근원이다. 현대의 사랑은 아무르 프로프르. 라캉은 말했다. “성관계는 없다. 오로지 자기 사랑만 있는데 어떻게 성관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디우는 낭만적인 사랑을 회복하자는 걸까? 바디우에게 사랑은 언제나 둘이 등장하는 무대. 그런데 낭만적인 사랑은 결국 하나로 소모되고 소진된다. 거기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종교적인 사랑은? 종교는 초월성이라는 십자가에 사랑을 못 박는다. 결국 종교가 말하는 사랑 역시 사랑이 아니다.

 

나 역시 낭만적인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찍이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 할 것이라고.

 

페소아는 말했다. “사랑은 하나의 사유라고.

바디우에게도 사랑은 진리의 구축이다. 어떤 진리? 두 사람의 차이의 진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신비로운 공명에 이를 수 있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

 

-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중에서

 

사랑을 시작으로 우리는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까지 뻗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글턴, 샤르댕, 듀란트,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의 공통점이다. 그런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칸트에겐 영구평화론이요, 샤르댕에겐 오메가 포인트’,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이 나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하는 세계공화국이다.

 

차이 속에서 하나 된 세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종착점이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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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14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명절 연휴도 쉬지 않으시는 시이소오님!
좋은 명절 보내세요~^^

시이소오 2016-09-14 11:03   좋아요 1 | URL
저도 이 글을 마지막으로 연휴 들어갑니다. syo 님도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

물고기자리 2016-09-14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가 되는 것도, 초월적인 것도 아닌 사랑의 재발명.

`차이에도 불구한 신비로운 공명`

마치 시이소오 님과,
다른 길을 통해 같은 정상에서 만난 것 같은 기쁨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시이소오 2016-09-14 13:29   좋아요 0 | URL
물고기자리님, 정상에서 만나죠. ^^

커다란 달덩이만큼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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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젊은 작가상 대상은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 해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였다. 그 후로 2년 만에 최은영의 단편집 <쇼코의 미소>가 나왔다. 그렇지만 굳이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웃 분들의 리뷰와 특히나 다락방님 - (나와 친한..... ?) - 의 추천에 떠밀려 집어 들었다.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이런 글을 읽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 <쇼코의 미소>이후 이런 글을 쓰고 있었던 거야!’

 

 

나이를 먹어서인지, 책을 읽다 자주 운다. 에스트로겐 작렬!! 공공 도서관에서 이런 책을 읽을 땐 참 난감하다.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새벽 3시 경, 집에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아마 펑펑 울었을 거다.

 

 

독일에 가서 한국의 한 가정이 베트남의 한 가정을 만나 우애를 다진다.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들의 잘못과는 상관없는 과거의 역사가 두 가정의 우정을 파탄 낼 줄이야.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국제시장>에선 미국이 한국의 구원자처럼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베트남의 구원자로 묘사된다. 인간이 얼마나 뻔뻔해야 이런 영활 만들 수 있을까. 한국군은 베트남의 구원자이긴 커녕 베트남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미 한국군은 자국 민간인을 잔인한 방법으로 수 백만명 학살해왔는데, 베트남 민간인들에겐 그 잔인함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데 구원자 한국이라니! 베트남 사람들이 <국제 시장>을 볼까 무섭다. 쪽팔려 죽겠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이런 쓰레기 영화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너무 죄송스럽네요. 한국 국민 모두가 한국이 베트남의 구원자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부디 용서하시길. ) <씬짜오 씬짜오>100억이란 돈이 들어가고, 천만 명이 넘게 관람한 영화 <국제 시장>과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값진 소설이다.

 

<씬자오 씬자오>에서 간신히 눈물을 참고 다음 단편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를 읽었다. 아우, 저절로 흐르는 눈물. 2차 인혁당 사건을 소재로 삼을 줄이야! 어떻게 이렇게 어린 작가가!!

 

<한지와 영주>에서는 한지와 영주의 러브 스토리. 그런데 한지는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쌔까만 아프리카 남자애다. 금발에 푸른 눈의 뉴요커가 아니고?!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 소은은 선배 미진을 통해 알게 된 폴란드인 율랴와 우정을 나눈다.

 

<미카엘라>는 세월호를 배경으로 한다.

 

책을 읽는 내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 대한 신형철의 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신형철은 이렇게 말했었다.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최은영 작가에게 말하고 싶다.

 

고맙다.

이런 글을 읽게 해줘 너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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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9-12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까지 읽고 있었는데 너무 좋았어요ㅠㅠ 두 번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9-12 11:20   좋아요 0 | URL
두번씩이나요? 저는 다시 읽을 때 또 눈물 나던데요.

syo 2016-09-12 11:22   좋아요 0 | URL
저도 코에 휴지 꽂고 봤어요.. 콧물도 하도 나서;;

시이소오 2016-09-12 11: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늙어서 훌쩍 거린 것만은 아니군요. ^^

다락방 2016-09-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지요? 뽐뿌질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시이소오 2016-09-12 11:21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저와 친한) 에게도 고마워요. ^^

아무 2016-09-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014년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이 쇼코의 미소였어요. 이번 단편집을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리뷰를 보니 더 미루지 말고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시이소오 2016-09-12 11:23   좋아요 0 | URL
저도 미뤄놓고 읽으려 했는데 읽어보니 좋네요.

아무님도 얼른 책을 드소소 ^^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2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9-12 11:26   좋아요 0 | URL
곰발님도 좋아하실듯. 리뷰 기대되네요. 릴레이 리뷰 어떤가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2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은 책을 다 사서 다음달에 읽고 반드시 리뷰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소님 리뷰가 대부분 정확해서 저도 기대가 됩니다.. ^^

시이소오 2016-09-12 11:39   좋아요 0 | URL
취향이 다 달라서.
어떨지, 기대치를 낮추셔야 ㅋ

다락방 2016-09-12 11:57   좋아요 0 | URL
음 제가 그동안 보아온 곰발님은, [아주 한낮의 연애]는 싫어하실 것 같고 [쇼코의 미소]는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네, 뭐 그렇습니다.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만 ㅋㅋㅋㅋㅋ

시이소오 2016-09-12 12:11   좋아요 0 | URL
저도 다락방님의견에 한표 투척이요.
아니어도 어쩔수 없죠 ㅋ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2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그래요. 그럼 두 편 다 읽어보고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프리쿠키 2016-09-1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으음~여기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죄다 모여 계시네요~곰브리치가 발목을 잡고 있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뽐뿌질 동참할께요ㅋ

시이소오 2016-09-12 14:05   좋아요 0 | URL
곰브리치가 곰발님 별명인가 멍하니 읽고있었네요 ㅋ

비연 2016-09-12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을게요... 아직도 안 읽고 있었다니..ㅜ

시이소오 2016-09-12 14:06   좋아요 0 | URL
비연님도 릴레이 리뷰 기대합니다 ^^

나뭇잎처럼 2016-09-1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믿고 봐야할 것 같은 리뷰. 늘 근처에서 머뭇거렸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당장 읽어야 할 거 같네요 ㅎㅎ

시이소오 2016-09-12 14:07   좋아요 0 | URL
나뭇잎처럼님도 리뷰 파도타기 동참 입니다!
ㅎㅎ

CREBBP 2016-09-1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시장에 베트남 얘기도 나오나요? 영화가 후진 건 동의하는데, tv로 보다말다해서 그부분 놓친거 같습니다 ㅎ 이 책 기억했다가 읽겠습니다.

시이소오 2016-09-12 17:07   좋아요 0 | URL
황정민 일행이 베트콩으로부터 베트남 주민을 구해줘요. 베트남 인들이 보면 이가갈릴듯 합니다. 아이들마저 잔인하게 학살한 한국을 오히려 영웅시 하다니요.

식민지배가 한국을 위한거라고 말하는 일본과 다를게 없어보입니다ㅠㅠ

푸른희망 2016-09-12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죠?
아마 이 책을 안읽으신 분은 있어도 싫어하는 분은 없을거라는~~
저도 왠만해선 안우는데 눈물 찍 하며 본 소설입니다

시이소오 2016-09-12 17:23   좋아요 1 | URL
그럴것같아요. 최은영 작가는 별다른 기교없이 감동을 주는 재능을 타고 난듯합니다. 사람이 맑아서겠죠 ^^

stella.K 2016-09-1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가 봅니다. 얼마 전 뭔 책을 신청할 때
쪽책으로 같이 왔는데 버리지 말고 그거라도 읽어 볼 걸 그랬습니다.
제가 요즘 작가들에 대해선 유난히 낮설어하는지라 그러다 보니
요즘 작가 누가 좋은지 변별력이 떨어져서...
좋다는 말은 들었는데.

나이들수록 울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렇더라구요.
실생활은 잘 모르겠는데 꼭 TV 보다 울어요.
남자분인데도 그런가 봅니다.ㅋ
책 보다 우는 경우 별로 없는데 저도 언제고 읽고 눈물 대열에 끼어보고 싶군요.^^

시이소오 2016-09-13 15:58   좋아요 0 | URL
눈물 대열 동참해 주세요 ㅋ ^^

깊이에의강요 2016-09-1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에서 이야길 정말 많이 들었는데 읽어보진 못했네요.
시이소오님 이렇게 극찬하시니 더 궁금해지는데요~^^

시이소오 2016-09-13 17:50   좋아요 0 | URL
강요님도 좋아하실듯 ^^

서니데이 2016-09-1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시이소오 2016-09-13 20:4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도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

초딩 2016-09-1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님 추석 잘 보내세요~~~

시이소오 2016-09-14 12:16   좋아요 1 | URL
초딩님도 즐거운 추석 되세요 ^^

고양이라디오 2016-09-2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의 이정도 추천이라면 꼭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9-21 12:39   좋아요 0 | URL
고양이라디오님도 좋아하실듯 해요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뮈엘 베케트 선집
사뮈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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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사가 없는 소설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베케트를 읽었던 걸까? 나탈리 레제의 베케트 전기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서사도 없고 묘사도 없다. 오로지 목소리()의 헛소리만이 가득하다. 이 소설은 애초에 이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왜 읽었는가

재밌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떠올라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카프카,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 들뢰즈, 바르트, 조로 아스터교, 수메르 신화, 데모크리토스, 원자, 기하학, 물리학, 신학, 특히나 모리스 블랑쇼. 쓰고 싶은 말들이 흘러 넘치는데, 이걸 다 쓰려면 독후감이 아니라 아예 논문을 써야 할 지경이다.

 

베케트는 1934년에서 35년 사이에 250회에 걸쳐 비온 박사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었다.

 

우리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에 대해 자기 살갗의 구멍들에서 흘러나오는 땀에 대한 것과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이 대목을 상기시키는 베케트의 말은 몇 년 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 등장한다. “내 눈물이 가슴 위에서, 옆구리에서, 혹은 등을 타고 내리며 나를 놀리는 게 느껴진다.” 이 둘은 모두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눈물을 찾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음으로써 암흑으로부터 헤어나고자 하는 거대하고 이산된 몸이 그것이다.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는 오로지 자아의 무한한 분열밖에는 없다. 소설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마후드 일 수 있고, 웜일 수도 있으며, 신일 수도 있고, 오물 덩어리일 수 도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베케트적인 영화라면 아마도 <존 말코비치 되기>가 아닐는지. 이런 소설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베케트는 왜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의 헛소리로 이루어진 소설을 썼을까.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베케트는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문장을 통해서 진정한 자아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윗 문장에서 방점은 잘 모르는에 찍혀져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였다면 에피퍼니의 순간이라 했을 것이다. 조이스가 여러 개의 에피퍼니를 수집했다면 베케트에겐 인생에 단 한 번의 에피퍼니의 순간이 있었다. 베케트는 계시라고 표현했다. 어머니를 간호하던 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친다. 그것이 지나고 그는 안다.

 

사물들에 관한 일반 지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얻은 그것은 자기 자신에 관한 아주 비좁은 지식이다. 이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자꾸 곱씹는 일(조이스처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않는다....)이 끝난다. 대신, 죽어가는 어머니의 방에서 둥글고도 단단한, 마치 한 개의 돌멩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받아들이다(consentir). 자신의 취약함을, 어리석음을, 한계를 받아들이자. 찰나의 계시.

 

-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베케트는 이후 자신의 모국어 안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파울 첼란의 가르침을 버리고, 비코의 말을 따른다.

 

무릇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들의 최초의 불행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베케트는 이후 영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다. 최초의 불행 상태, 결핍의 언어. 그 결핍의 언어를 가지고 베케트는 침묵과 말 사이를 오간다. 계속.

 

.....계속해야만 하잖아,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계속해야만 해, 그렇다면 내가 계속해야지, 단어들을 말해야만 해, ......그 단어들이 어쩌면 내 이야기의 문턱까지, 내 이야기로 통하는 문 앞까지 나를 데려갔을 수도 있고, 에이 설마, 만일 문이 열리면, 내가 있을 거야, 침묵이 있겠지, 내가 있는 그 곳에,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걸 영원히 모를 거야, 침묵 속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해, 계속해야만 해, 나는 곧 계속할 거야 (p119)

 

윗 문장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마지막 구절이다. 왜 그는 끊임없이 계속 말해야 할까?

베케트는 언어에 구멍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언어에 구멍을 내기 위해선 계속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하더라도 자아에 도달할 수 없다. 베케트는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지만 어쩌면 그것만이 창조행위가 아닐까.

 

만일 베케트가 오늘날 활동했다면 그는 연극, 영화 연출가보다 힙합 프로듀서나 힙합 아티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요즘 <언프리티 랩스타>를 즐겨 본 영향 탓일까. 책을 묵독하면서 랩을 하듯이 읽었다. 이런 식으로 읽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읽다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한참이나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아직 안타깝게도 마약 경험이 없는데 뽕 맞은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책인지라 뇌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뉴런과 시냅스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해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랩처럼 읽히는 운율을 타는 문장 탓이었을까. 마치 테크노 음악에 취한 것처럼?

한마디로 약 빤 느낌이었다.

 

베케트를 통해 처음으로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 책과 접했다.

이웃님들이 왜 워크룸 프레스 책을 사 모으는지 절절이 느꼈다.

최고의 편집이다. 편집에 감동을 먹다니!!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을 손에 잡을 땐 마치 여인의 가녀린 허리를 잡는 듯하여 놓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책이 이렇게 손에 쏘옥 안길 수 있지? 놓았다 하더라도 다시 손에 쥐었다. 반납일 지났는데 아직 반납 못하고 있다. , 이 책 진짜 반납하기 싫다

 

워크룸 프레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사뮈엘 베케트 책을 계속 읽어야겠다.

 

계속 읽어야 하잖아, 계속 읽을 거야, 계속 읽어야만 해,

나는, , 계속 할, 거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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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은 왠지 어려울 것 같은데 편집이 좋다니 또 혹하네요.

근데 이거 원 허리 굵은 사람은 서러워 살겠습니까?
평생 좋아하는 사람 품에 안 겨 보지도 못하고..
왜 남자들은 허리 가녀린 여자만 좋아할까요?ㅠㅠ
허리가 굵던 가녀리던 여자는 똑같은데...
그럴 땐 남자가 팔이 짧은 것을 안타까워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ㅠㅠㅋㅋ

시이소오 2016-09-07 14:33   좋아요 0 | URL
굵은 허리도 좋아합니다. ㅋ

안 안기는 책도 좋아하구요 ㅋ ^^

cyrus 2016-09-07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서사 없는 소설이 재미있어요. 굳이 줄거리를 파악할 필요 없이 그냥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 보기만 하면 되잖아요. 계속 보다 보면 지루하지만, 일반 소설과는 다른 특별한 매력이 있어요. 재미없어서 읽고 싶지 않은데도 결말이 궁금해서 끝까지 보고 싶은 느낌이 들어요. ^^

워크룸프레스 사드 전집을 모으고 싶은데, 출간 소식이 뜸하네요.

시이소오 2016-09-07 17:42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베케트 소설이 맞으실듯

사드전집을 기획하다니 대단한 출판사에요 ^^

나뭇잎처럼 2016-09-0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가운 이름. 베케트. 베케트 하면 저는 자동반사적으로 크누트 함순이 떠올라요. 베케트가 좋으셨다면 크누트 함순도 좋아하실 듯!

시이소오 2016-09-09 18:15   좋아요 0 | URL
베케트에 비하면 함순은 친절하지 않나요? 굶주림 을 읽다 말았는데 다시 읽어야겠어요 ^^
 


리뷰가 안 써지네요. 흑.......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는 사회집단이 역사적으로 변화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인으로서 계급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인간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듯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사고방식을 계급의식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 속에 그저 멈춰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고 사물적인 존재라는 입장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타락하는 길, 짐승이 되는 길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입장을 헤겔로부터 배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도약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인간학을 거칠게 표현한 것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자기의식이란 한마디로 일단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떨어져 그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상상을 통해 마련된 전망 좋은 자리에서 땅 위의 자신과 주변의 사태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상상으로 확보된 나와의 거리, 그것이 자기인식의 정확함을 보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직관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겠지요.

 

헤겔이나 마르크스 모두 자기로부터의 괴리=조감적 시야의 확보는 단순한 관상이 아니라, ‘생산=노동에 몸을 던짐으로써 타자와의 관계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개념이며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입니다.

 

관계망 중심에 주관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주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의사를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어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관계의 매듭 안에서 주체가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탈 중심화또는 비 중추화라고도 합니다.

 

중추에 고정적이고 정지적인 주체가 있어 그것이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표현하는 천동설적인 인간관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고 그 연결의 얽힘으로서 주체가 상정된다는 지동설적인 인간관으로의 이행, 그것이 20세기 사상의 근본적인 추세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너라 그 도덕률은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의 보전, 개인의 자기보존, 자기실현’, 그러니까 자연권의 최대의 행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선악의 규범 그 자체에 대해 어떤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인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추의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언젠가 이타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도덕관입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단 하나의 행동 준칙은 타인과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무리는 누군가 특별하거나 탁월한 것을 싫어합니다. 짐승의 무리가 지닌 이상은 모두 동일하게입니다. 그것이 짐승의 무리가 지닌 도덕이 됩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짐승의 무리를 위한 도착적인 도덕이 탄생합니다. 도착적이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 짐승의 무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그 행위에 내재하는 가치나 그 행위가 그에게 가져다줄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과 동일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상호참조하며 이웃 사람을 모방하고 집단 전체가 한없이 균질화되어 가는 것에 깊은 희열을 느끼는 인간들에게 니체는 노예Sklav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보다시피 니체는 초인이란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초인은 구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인간의 초극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인 듯합니다. 다시 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무엇인가를 격렬하게 혐오한 나머지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열망한 것을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이 바로 자기초극의 열정을 제공해줍니다.

 

2. 창시자 소쉬르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를 하나만 든다면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이름이 생기고 비로소 사물이 그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라면 명명되기 이전의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 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이처럼 말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의 두께와 깊이를 소쉬르는 가치valeur’라고 불렀습니다.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시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시의 신이나 소크라테스의 다이몬말을 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언어 운용의 본질을 직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이고, 내가 몸에 익힌 어휘이며,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입니다.

 

이와 반대로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하고 때 묻지 않은 나의 의견은 대개의 경우 비슷한 이야기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맴돌고 앞뒤가 모순되며 주어가 도중에 바뀌는, 그래서 자기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난감한 문장이 됩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 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 자아중심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임이 분명해졌습니다.

 

3장 푸코와 계보학적 사고

 

감옥이 되었건 광기가 되었건 또한 학술이 되었건, 우리는 그것이 시대나 지역과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과거의 어느 지점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탄생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 제도나 의미가 생성된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푸코의 사회사작업입니다.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훗날 롤랑 바르트는 영도degré zéro’라는 학술 용어로 부르게 됩니다. 구조주의란 한마디로 다양한 인간적 여러 제도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에서의 영도의 탐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 를 역사의 진화에서 최고 도달점, 필연적인 귀착점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푸코는 인간주의humanisme’라고 부릅니다. (자아중심주의의 일종입니다.)

 

푸코는 지금, 여기, 를 근원적인 사고의 원점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시각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지의 자세를 인간주의라고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

 

광인은 사법관에 의한 수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에 의한 치료의 대상이 됩니다. 얼핏 광인의 처우 방법이 보다 합리적이고 인도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단단한 격리로부터 부드러운 격리로의 이행 과정에서 어떤 공범관계가 암묵적으로 생겨납니다. 그것은 바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지와 권력의 결탁입니다.

 

권력은 감촉이 부드러운 이성적인 대리인학술적인 지를 통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행사됩니다. 이것이 푸코의 생각입니다.

 

근대 국가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습니다.

 

신체의 지배를 통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이 정치기술의 최종 목적입니다. 이 기술의 요체는 강제 지배가 아닙니다. 통제되고 있는 사람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의지를 토대로, 자기의 내발적인 욕망에 의해 순종적인 신민이 되어 권력의 그물코 속에 자기를 등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성적 행위를 망라한 목록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공공화하는 것, ‘기호를 공유하는 마니아들을 조직화하는 것, 매춘부나 포르노그래피를 다루는 성 상품 시장을 세우는 것, 의학이나 정신병리학, 사회학 등을 성에 대한 학문적 지식으로 편성하는 것 등 이런 무수한 흐름이 성의 담론화라는 담담한 거대 강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검열? 그렇지 않다. 거기에 설치되어 있는 것은 성과 관계된 담론을 생산하는 장치, 많은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 푸코 <성의 역사에서>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4. 바르트와 <글쓰기의 영도>

 

상징과 기호는 닮았지만 다른 것입니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은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호라는 것은 어느 사회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입니다. 기호는 표시의미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깁니다.

 

소쉬르는 귤껍질과 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표시를 의미하는 것signifiant(시니피앙)으로 장기의 졸의 작용의미되는 것signifié(시니피에)라고 불렀습니다. 기호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의 세트이며, 이 둘을 합친 것이 기호입니다.

 

바르트는 이 보이지 않는 규칙에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랑그스틸입니다. 랑그라는 것은 우선 국어입니다. 바르트의 정의를 빌리면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입니다.

 

랑그가 외부로부터의규제라고 한다면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무엇인가 말을 할 때 우리의 언어 운용을 내부에서규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언어 감각이라고 할 만한 것들입니다. ......바르트는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 고독인 이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을 스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르트는 이들 외에 제3의 규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에크리튀르écriture입니다.

 

스틸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입니다.

 

깡패는 깡패의 에크리튀르로 말하고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맨의 에크리튀르로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크리튀르의 죄수입니다.

 

여기서 바르트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특히 어떤 집단 고유의 에크리튀르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넓은 범위를 지닌 어법이 지닌 위험성입니다. ‘징후가 없는 언어 사용이 바로 패권을 쥔 어법입니다. 그 사회의 객관적인 언어 사용입니다. 즉 어떤 주관적인 의견이나 개인적인 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 개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사용하는 언어 사용을 말합니다. 바르트는 이처럼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어법이 포함한 예단편견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적인 어법 속에 그 사회집단 전원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깃들어 있다는 바르트의 생각을 보다 교묘하게 활용한 것이 페미니즘 비평의 이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읽으면서 첫 번째 읽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은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텍스트texte’직조된 것tissu’입니다. 직조물은 다양한 곳으로부터 모인 다양한 요소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편의 텍스트가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주제나 문체, 원고 매수, 동시대적인 사건, 다른 텍스테에 대한 의식과 경합 등 이런 각각의 것들은 고유의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얽혀 어느새 텍스쳐texture’가 직조됩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중략)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중에서

 

바르트는 독특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이()’에 대한 편애입니다. ...바르트는 온갖 사상에 근거이유역사를 갖다 대는 것도 나름대로 소중하지만 그것이 유럽적 정신이 지닌 질병의 징후는 아닐지 의심했습니다. 그는 공은 공으로서기능하며 무의미에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책무가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라고 물었습니다.

 

에크르튀르의 영도, 순수한 에크리튀르란 희망, 금지, 명령 판단 등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개입이 전혀 없는 순백의에크리튀르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르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언어의 꿈이었습니다.

 

 

바르트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방인>의 에크리튀르는 순수한 에크리튀르의 훌륭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쿠를 읽는 다는 것은 언어에 대해 욕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호의 제국>에서

 

5. 레비스트로스와 끝나지 않는 증여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키르케고르 등의 실존 철학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이론을 접합한 것입니다.

 

실존한다ex-sistere’라는 동사는 말의 뜻만 보면 바깥에 선다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존립의 근거가 되는 발판을 자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의 외부에 두는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역사와 관계될 때입니다.

 

이것이 참여engagement’(원래의 뜻은 구속되는 것’)라는 사태입니다. 내가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은 중립적이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으며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서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역사적 상황의 변동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적절한 계급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자기변혁의 노력을 게을리했고 지식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를 이끌던 때의 카뮈는 역사적으로 옳았지만 동일한 입장에 머물러 제3세계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전면적인 참가를 주저하는 카뮈는 역사적으로 틀렸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한번 배제했던 신의 관점역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뒷문으로 끌어들인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비난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서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와 결별하게 됩니다.

 

방대한 현지 조사를 기초로 한 레비스트로스의 결론은 미개인의 사고문명인의 사고의 차이는 발전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사고이며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언어의 사용은 그것이 지적 능력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민족사회 속의 특정집단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차이에서 온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문명은 각자가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준엄하게 충고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자기가 보고 있는 세계만이 객관적으로 리얼한 세계이며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세계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세계라고 생각하며 타인을 깔봅니다.

 

음운론phonology음소론phonemics’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것은 언어로서 내뱉어진 음성은 어떤 랑그 속에서 어떻게 다른 언어의 소리와 식별되는가, 그 언어 소리의 차별화가 지닌 메커니즘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말소리에 대해 그것이 모음인지 자음인지’, ‘비음인지 비음이 아닌지’, ‘집약적인지 확산적인지’, ‘끊기는지 연속성이 있는지등 열두 종류의 음향적, 발성적인 물음을 제기하면 세계의 모든 언어에 포함된 음소를 목록화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어떤 음소 체계라도 12개의 이항대립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12비트, 12번의 0/1 선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소를 특정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구조는 4개의 항(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친족의 기본구조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친족구조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언제나 존재하는 세 종류의 가족 관계, 즉 공통의 아버지를 갖는다는 관계, 결혼에 따른 관계, 낳은 자와 태어난 자와의 관계 바꿔 말하자면 형제자매, 남편과 아내, 어버이와 아들의 관계- 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레비스트로스, <구조 인류학>에서

 

세계의 모든 언어 소리를 12비트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어디서나 친족의 기본 구조는 2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설입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 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친족 구조는 단적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기 위해존재하는 것입니다.

 

근친상간이 금지된 것은 여자의 커뮤니케이션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한 답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란 인간사회에 있어 사내가 계집을 획득하려면 이를 다른 사내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계집을 딸이건 자매건 전자에게 양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남자는 다른 남자로부터 그 딸 또는 자매를 양도받는 형식 외에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대발견입니다.

 

친족관계에는 오직 한 가지의 존재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친족이 존재하는 것은 친족이 계속 존재하기때문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증여와 답례)은 인간에게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진리를 되풀이해서 새겨넣은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 싶다면 타인으로부터 증여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여와 답례의 운동을 일으키려면 먼저 자기가 그와 동일한 것을 타인에게 주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증여의 기본 규칙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이들 커뮤니케이션은 최초에 누군가가 증여를 하고 그에 따라 준 사람이 무엇인가를 잃고 받은 사람이 그에 대해 반대급부의 책무를 진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균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며 유통되는 시스템입니다.

 

이 일반적인 호혜 형식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은 각각의 그룹이 직접적으로 상대편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줄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며 얻은 자에게 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AB에게 주고 다른 C로부터 받는다는 식으로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기능하는 호혜의 순환을 이루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구조인류학>에서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6장 라캉과 분석적 대화

 

거울 단계란 유아가 생후 6개월이 되면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마침내 강렬한 희열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아이는 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거울 단계는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즉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으로 이해됩니다.

 

아이가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를 처음 조우한 경험. 그것이 거울 단계입니다.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어쨌든 본래의 나는 아닙니다.

 

인간은 내가 아닌 것라고 가정하는것에 의해 를 형성한다는 외상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야만 간신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 단계를 통과하는방법에 의해 인간은 의 탄생과 동시에 일종의 광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볼 때, ‘라는 (‘주체의 외부에 있는)것을 구조적으로 본래의 주체로 착각하고 인정하며 살고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은 어느 정도 미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치료의 거점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치료의 발단으로 선택한 것은 언어의 수준입니다.

 

정신분석에는 단 하나의 매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이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있다. 그런데 말해지는 언어는 반드시 응답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보려고 하는 것은 응답이 없는 말 걸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말 걸기에 침묵으로 응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주고받기 속에 정신분석의 핵심이 존재한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우리가 자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은 나와 듣는 사람사이에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경우라야만 합니다.

 

 

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분석가가 말없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피분석자의 내용 없는 이야기에 분석가가 응답을 하면, 그것도 긍정적인 응답을 하면 침묵 이상으로 피분석자의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 증진된다는 것이 아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분석자가 말하는 언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채워지지 않음이 아닐까? 즉 피분석자라는 주체는 말하면 말할수록 자기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결국 피분석자는 자기의 존재가 상상의 세계 속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고 이 작품이 지금 그의 자기확신과 어긋난 것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닐까


- 라캉, <정신분석에서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영역>에서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억압을 해제하고 증후 형식을 위한 여러 조건을 제거하며 병의 원인이  되는 갈등을 어떤 형태로 해결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에서


프로이트는 그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그 본질적인 몸짓인 다른 것을 드러내는’, ‘번역하는’, ‘이전하는’, ‘대체하는것은 독일어 übertragen이라는 동사로 모두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위버트라켄 하는 일입니다.

 

라캉은 여기에 음악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악보 위 음악 소리의 작용에서 중요한 것은 음표끼리의 연결 방법이나 다른 음표와의 화음입니다. 그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악보에서 떨어져 나와 단독으로 제시된 소리는 음악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분석적 대화에서 환자가 말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단독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경험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음표처럼 전체 악보 위에서 다른 음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기호가 될 뿐입니다.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주고받기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 이야기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화 작용에 다름 아닙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하나의 창조행위이지요.

 

라캉이 자아moi’je’주체sujet’라는 동의어를 마술사처럼 교묘한 손놀림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는 주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언어로 거기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를 통해 계속 말을 걸어야 하는 근원적인 채워지지 않음입니다. ....그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는 것만은 말할 수가 있습니다. 라캉의 자아는 그 말로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이 말을 불러오는일종의 자기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주체가 로서 말을 하고 있을 때 늘 구조적으로 주체에 의한 자기 규정, 자기정위의 말로부터 도망치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더욱 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는 것이 바로 자아입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있는 곳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즉 자아와 나는 주체의 두 극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체는 이 양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자아의 거리를 가능한 좁히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분석가의 작업은 그것을 지원하는 일입니다.

 

오이디푸스는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이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 어머니와의 유착이 아버지에 의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성의 위협적인 개입의 두 가지 형태입니다. 라캉은 이것을 아버지의 부(Non du père)=아버지의 이름(Nom du père)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와 어머니의 유착에 Non’을 알리고 (근친상간을 금지), 동시에 아이에게 사물에는 이름’Nom’이 있다는 것을(또는 인간의 세계에는 이름을 가진 것만 존재하고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언어 기호와 싱징의 취급 방법을 가르칩니다.

 

자르는 것, 이름을 붙이는 것. 이것은 소쉬르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사실 동일한 몸짓입니다.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디지털로 자르는 것, 그것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기호에 의한 세계의 분절이 되고, 인류학적으로 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은 언어를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세계는 분절되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자기가 처음부터놓여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능력하다라는 사실을 맛보게 될 때 반사적으로 그 사태의 원인이 나의 외부에 있으며, 나보다 강력한 것이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이나 자기실현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 형태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무서운 것에 굴복하는 능력을 몸에 지니는 것이 오이디푸스라는 과정의 교육적 효과입니다.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을 억제하는 강력한 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의 약함을 포함해서 를 통째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주는 신화적인 기능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버지의 간섭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것이 설명되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심리구조를 주입하는 것을 우리 세계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레비스트로스의 해설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한 것을 거의 그대로 정신분석적 대화에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타자와의 언어적 교류는 이해 가능한 진술의 주고받기가 아니라 말의 증여와 답례의 형태가 되고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언어 자체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증여에 대한 언어의 답례를 하는 이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타자(분석가)를 경유해야만 한다는 인류학적인 진리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언어의 관계망 속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뭐야,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

 

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개체 간의 관계를 우선 연구하는 바로 그것이 구조주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방식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고 다만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과거에 없었을 뿐이지 구조주의적 사고방식은 오늘날보다 고대에 훨씬 많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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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9-06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안써지는 것치고는 아주 길었어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9-06 18:12   좋아요 2 | URL
이 내용을 한장으로 퉁치려고 하다보니 안 써지네요 ㅋ

AgalmA 2016-09-06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타자(분석가)`의 필요성도 깨닫게 해 주는 것도 있죠. 정신분석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자와 환자라는 1:1 구도가 된 것도 상통할 테고요. 많은 사람과의 대화 구도에서는 내면 깊숙한 얘기를 나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소셜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의 공황 상태도 그런 부분에서 살펴 볼 부분이 있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최면 상태보다 이성적인 상태에서 환자와 면담하는 걸 중요시 했으니 그가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 말한 게 연결되네요.

막스 피카르트가 언어의 `초월적 선험성`과 `내재적 선험성`을 이야기 할 때 `내재적 선험성`의 위험을 강조한 게 생각납니다. 오랜 시간 사건과 역사를 겪으며 언어가 오래될 때 인간적 요인에 의해 언어의 내재적 선험성이 커지게 되고, 인간의 사고는 그만큼 좌지우지 되겠죠.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민족성이라든지 종교의 교리가 그런 예가 되려나요. 계보를 형성해 온 철학 또한 거기에서 비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났는데, 읽다가 질문들이 상당수 날아갔어요;;
시이소오님 글 읽을 땐 메모를 해야겠다는! ㅎㅎ

시이소오 2016-09-06 21:42   좋아요 0 | URL
저도 읽으면서 여러 생각들이 미친말처럼 이리저리 날뛰는통에 아직 다스리질 못했네요. 말씀하신대로 언어가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조장하는게 아닌지 숙고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