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 -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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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저자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할 수 있을까. 나는 박노자의 모든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헬조선 시대, n포론, 흙수저로 통칭대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왜 민란이 벌어지지 않는 걸까.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요인은 성장 신화의 지속이 아닌가 싶다. 여태까지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 안정을 이룩한 부모 세대의 지원에 힘입어 실업자가 돼도 굶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은, 한편으론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자기 탓으로 쉽게 돌린다.”

 

내가 생각하기에 무한 경쟁시대의 능력주의와 내 탓이오그리고 원자화, 파편화된 개인주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요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큰 활약을 한 이들은 이른바, 지식인, 학자 그룹, 혹은 학피아들이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 노엄 촘스키.

 

학피아 학살자들. 이들은 청년들에게 우정을 버리라며 경쟁력만을 부르짖는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청년들은 경쟁에서 낙오될 경우, 그 결과를 오로지 자신 탓으로만 돌린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11년간 자살율 1위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친구가 적이 되어버린 무한 경쟁 사회에서 개인은 점차 파편화, 고립화, 원자화 되어간다. 이들에게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친일파가 왜 문제일까?

 

박근혜는 광복절 연설에서 건국 68주년이라고 말했다. 왜 이게 문제일까? 박근혜를 비롯한 새누리당, 뉴라이트 들은 광복절건국절로 이름을 바꾸려고 지랄발광들인데 왜 그런걸까? ‘건국 68주년이란 말은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면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았던 친일파로서는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왜 오늘날에도 친일파를 얘기해야 할까? 

 

친일은 결국 일본이라기 보다는 일제를 가리킨다. ‘친일파는 정확히 말하면, 일제 식민당국이라는 정통성 없는 권력에 참여했거나 부당한 거래를 자발적으로 진행한, 특히 이미 광의의 지배자적 위치에 있거나 그런 위치를 점하려 하는 피식민 사회 구성원을 일컫는다. 그들의 행위는 민족적 배신이라기보다는 무법적 권력에 대한 부역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 행위다. ‘민족을 떠나서 이런 행위는 근대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곳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민족 배신보다는, 국내외적 권력형 폭력에의 가담이야말로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일이라기보다는, 폭력 사회에서 정상 사회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친일파들은 결국 무볍 권력에 대한 부역 행위를 통해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용납할 수도 없는 범죄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이 자들이 대한민국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상위1%가 되어, 뻔뻔스럽게도 역사를 왜곡하는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광복절을 건국절이라 칭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발악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치 않고 4.19 민주이념을 도외시 한채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뉴라이트와 새누리당, 박근혜, 이들은 명백히 대한민국 헌법에 침을 뱉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한다? 빨갱이 아닌가? 대한민국 헌법을 경시하고 부정하는 자들을 저대로 놔둬야할까.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해선 안 되는 이유

 

광복절 연설에서 박근혜는 사드 역시 언급했다.

 

사드 배치 역시 북한의 무모한 도발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위권적 조치였습니다. 저는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이런 문제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다. 사드 배치는 국민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런데 왜 지멋대로 결정하는 걸까.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에서 사토 마사루는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을 3차 세계 대전의 징후로 보았다. 반면 박노자는 우크라이나 내전 자체가 이미 3차 세계대전이라고 말한다. 우크라이나 내전은 미-러 전쟁의 대리전이었고, 우크라이나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만큼 폐허가 되었다. 이 책은 사드 배치 결정 이전에 씌어졌다.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을 겨냥하는 미-일의 공격적인 패권 전략에 말려들어 한반도의 전장화 위험까지 감수하는 것이 평화와 통일로 향하는 길일까?

 

가장 무서운 것은, 식신민지적 상황이 미군의 총검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친미 지배 엘리트와 미국 사이의 이해관계의 일치와 밀접한 유착으로 유지. 심화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불법 정보 수집 행위의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는 바로 중국이며, 미국의 제1호 가상 적도 바로 중국이다. .......평화가 지속되면 몇 년 뒤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 될 중국은 당연히 그 어떤 전쟁도 바라지 않겠지만, 중국보다 월등히 강한 부문이라고는 군사 부문밖에 없는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유혹을 느끼지 않겠는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시기를 방불케 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계속해서 잠재적 침략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가? 영세중립등의 가능성들을 꼭 배제해야 하는가?

 

사드는 전문가들의 말대로 북한 미사일에 대한 대응책이 아니다. (북한에서 미사일 쏜다고 사드로는 요격이 불가능하다.) 오로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다.

 

사드 배치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조치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ㅁㅊㄴ

사드를 놓았을 경우와 사드를 놓치 않았을 경우, 한반도 전장화 가능성, 한반도에서의 미-중 대리전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우크라이나가 황폐화 되는 동안 미국, 유럽, 러시아의 군수 기업들은 쾌재를 불렀다지.



 

우크라이나 사태를 교훈 삼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반도 전장화 방지를 위한 노력이다. - 미 갈등이 앞으로 한반도의 전정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남북관계 개선부터 매우 시급하다. 일단 공동 군축 등을 할 만큼 남북한 사이의 신뢰를 쌓는 것부터 급선무다. 이것은 정치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

 

오히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한반도를 전장화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사드 배치는 박근혜 말대로 단지 정쟁이 아니다. 모든 국민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과연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한반도를 전장화해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작금의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이대로 내버려둬야 할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로 믿는 바,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된다는 것,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 등이 포함된다는 것, 이러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 정부들이 수립되며, 이들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에 연유한다는 것, 어떠한 형태의 정부라도 그러한 목적들을 파괴하는 것이 될 때에는 그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버려 새 정부를 수립하되인민들에게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이룩할 것 같이 보이는 그런 원칙들에 입각하여 그 토대를 마련하고 또 그런 형태 하에 권력을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라는 것 등이다.

 

- 미국 헌법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좋아하는 미국의 헌법이다. 국민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파괴하는 정권은 언제든 국민에 의해 없앨 수 있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권은 존재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민란이 안 일어날 것이라고? 부마항쟁이었지. 부디 아버지의 말로를 기억해라


송로버섯과 캐비어를 처먹으니 국민들은 개돼지로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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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8-16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드배치반대합니다!

시이소오 2016-08-16 08: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드 배치 결사 반대입니다. ^^

2016-08-16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6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이 역사를 요약해서 잘 전달해 주셔서 머리에 쏙쏙 박힙니다.

시이소오 2016-08-16 16:24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애초에 박노자씨가 귀에 박히게 말씀을 하셨죠. 누가 안 된다면 다행입니다^^

singri 2016-08-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원해 시이소오님은 요즘 저의 사이다 ㅋㅋㅋ

사드는 물렀거라 미국은 10만서명보고 뭐라할까요? 그네는 암생각도 없고 걱정이 몰려옵니다.

시이소오 2016-08-16 16:24   좋아요 0 | URL
시원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책을 읽으면서 시원했다가 정신나간 그네생각에 골치가 이프더라구요 ㅋ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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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신년사에서 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하겠다고 발표한다. 서울지검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 ‘파카소 수채화 물감등을 생산하던 삼중화학공업 대표 박정원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제품의 판매 및 광고를 금지시킨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카소가 공산당원이라는 것.

 

3선개헌을 위한 작업도 계속되었다. 전국의 역술계에선 정도령론이 휩쓸었다. 한상범은 정도령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8년 영구집권의 발판으로 3선 개헌을 합리화하는 공작에 그(박정희)역술인이란 직업을 가진 무당, 점쟁이, 관상가 등을 대대적으로 조직, 동원했다. 그들은 전국 조직망을 거미줄처럼 얽어 박정희가 정도령이고 민중 대망의 진인이며 미륵불의 헌선이고 도래한 메시아라고 떠들어댔다.”

 

개헌을 지지하는 정체불명의 정치 단체들도 속출했다. 박정희는 67년 총선 때 “3선 개헌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수없이 말했고. 68년엔 내가 만약 3선 개헌을 한다면 김상협 의원 당신도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벼라. 당신들에겐 당연히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까지 말했었다.

 

613일 신민당 원내 총무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에서 “3선 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이며, 개헌 음모의 총본산은 중앙정보부라고 비판했다. 1주일 후, 620일 밤 김영삼은 자택 근처에서 괴한 3명에게 피습당한다. 괴한들은 김영삼에게 초산을 퍼부었으나 차창이 닫혀 있어 피해는 없었다.

 

박정희는 닉슨 독트린 때문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갖는다.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또 필요하다면 핵무기 설치도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으로 한국은 약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인다. 베트남 파병은 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신화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한진그룹이다. 한진 그룹은 월남 특수 5년동안 13천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한진 그룹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693월 대한항공을 인수해 대재벌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베트남 특수를 들어 베트남 파병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대해 한홍구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 특수의 최대 수혜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매년 우리가 베트남 특수의 전 기간에 벌어들인 금액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벌어들였다. ...20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 한 사람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은 싱가포르나 홍콩이 베트남 특수를 누리지 못하거나 냉전의 정치경제적 논리 속에서 선택적으로 개방된 미국 시장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다.

 

한국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 피해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에, 미국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베트남전에서 얻은 경제적 소득은 겨우 2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베트남 전에서 한국군 전사자는 5천 명, 부상자는 16천명에 이르렀다. 한국군의 대량 사망은 은폐된 채, 신중현 작가 작곡, 김추자 노래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만 울려퍼졌다.

 

53년부터 66년까지 해외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이었다. 이중 귀국한 사람은 6%에 불과했다. 상류층 자제들, 이른바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돈없고 가난한 이들만이 월남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64년엔 무즙 파동이 있었다. ‘무즙 파동이란 64127일 전기 중학입시의 공동출제 선다형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시험 문항의 답안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당시 보기 가운데 하나였던 무즙도 정답이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법원에 제소했고, 나아가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솥 채 들고 나와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는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이 무즙 파동6개월 이 지나 무즙을 정답으로 인정, 떨어진 학생 38명을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키며 일단락 된다.

 

67년엔 창칼 파동이 있었다. 서울시대 전기 중학교 미술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은 어느 것인가?”의 정답이 두 개라는 것이었다. 서울중학교 낙방생 학부모 549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해 불합격 처리됐다

 

그만큼 국민들은 너도나도 교육에 목숨을 걸었다. 66년 봄 한국부인회는 치맛바람 자숙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KS병도 생겨났다. KS (경기고 서울대)병이다. 이에 69년 서울에서부터 중학교 무시험 추첨 배정제가 실시된다. 이른바 뺑뺑이’. 71년에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69년엔 패티킴 노래의 <서울의 찬가>가 유행했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72%에서 70년에는 59%로 감소했다. 도시화율은 6028.3%에서 7043.1%로 뛰어올랐다. 60년대의 10년간은 전 셰에서 유래가 없는 압축적도시화의 시기였다. 66년에서 70년 사이 서울 인구 증가는 한국 전체 인구 증가의 77%를 차지했다. 이에 정부가 취한 대응책은 강남 개발이었다.

 

1226일엔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완공되면서 강남은 서울생활권으로 들어오게 된다. 3한강교 기공식 이후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우는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난다. 당시 강남은 영동이라 불렸다. 영동지구 개발사업에서 사업비 충당용으로 책정된 체비지 가운데 일부 땅은 정치자금용으로 박정희에 제공되었다.

 

영동 땅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70년에 학동은 20, 압구정동 25, 신사동 50배까지 오른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복부인이다. 비판의 화살은 투기를 부추긴 정부가 아니라 아줌마의 탐욕에 돌려졌다.

 

개발 열기는 남산에까지 미쳤다. 케이블카, 재향군인회관, 야외음악당, 남산순환도로, 야외음악당, 어린이 회관 등등. 손정목은 남산 외인아파트를 인간이 얼마만큼 바보일 수 있는가의 극치를 알려주는 사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왜 남산이었을까? 김현옥은 주로 고지대에 아파트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국장과 과장들이 아파트를 너무 높은 곳에 지으면 위험하고 불편하지 않냐고 이견을 제시했다. 김현옥은 말했다지.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와우아파트는 7048일 붕괴했다. 33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권은 강남 개발을 하는 동시에 서울 빈민을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킨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145천명의 주민들 역시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경기도 광주에는 뭐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의 상징은 고층건물과 자동차였다. 70년 삼일빌딩이 준공되었을 때 전국민이 자랑스러워했다지.

 

<사상계>는 몰락한 반면 여성지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67<여성동아>가 복간했고, 69년엔 <여성중앙>이 창간된다. 여성지 시장은 <주부생활><여원> 과 함께 4파전을 형성해 간다.

 

신문들은 계속 배를 불린 반면, 기자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현명한기자들은 촌지를 챙기는 것으로 가계를 꾸려 나갔다. 청와대 출입 기자 가운데, 청와대 대변인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써주고 5천불의 촌지를 받는 기자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박정희와 닉슨의 정상회담장 주변엔 월남전 반대 시위가 요란했는데도, 기자들은 수많은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과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보도까지 햇다.

 

박 대통령 전세기가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전, 냉장고 까지 사서 전세기에 실었기 때문이었다. 소장 언론인들인 <동아일보>의 유혁인, 최영철, 이동복, <한국일보>의 임방현, 임홍빈, ,조선일보>의 이종식, 동양통신의 김성진 같은 기자들이 예외 없이 변절해, 박정희의 총애와 은혜를 입었다.

 

43일엔 미원, 미풍 조미료 광고방송 사건이 있었다. 미풍 조미료 제조회사인 삼상 계열의 제일제당과 미원 조미료 제조회사인 미원주식회사가 조미료 원료인 이노신산 소다를 일본에서 불법적으로 몰래 들여온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동양방송은 미풍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미원이 밀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만 보도했다.

 

영화계에선 김지미, 엄앵란, 최은희, 태은실, 이후 문희, 남정임, 윤정희 등의 새로운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된다. 관객동원에서 69년은 한국영화사상 최고조를 이룬 해로 기록된다. 영화관객은 6919400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이후 70년 이후 계속 내리막을 걷게 된다. 텔레비전의 영향 때문이었다.

 

88MBC TV가 개국한다. 이후 TBC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된다.

 

716일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다. 미국 공보원은 남산 야외음악당에 대형 TV 스크린을 설치, 17일엔 생중계, 22일엔 녹화중계를 방송한다. TV는 또한 만화방이 갖춰야 할 필수 품목이기도 했다. 만화방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70년 전후로 이때 전국 만화방은 약 18천 개 였다.

 

68년 코카콜라, 69년 펩시콜라의 한국 상륙은 TV 광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

 

10월엔 클리프 리차드 내한공연이 있었다. 여고생과 여대생들이 손수건과 속옷을 무대로 던진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남성들의 충격 탓이었을까. 71년엔 리처드의 국내 공연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신중현 작사, 작곡 박인수 노래 <봄비>는 새로운 감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박정희는 67년에 중정에게 공무원 부정부패 단속 지시를 내린적이 있었다. 중정이 단속에 뛰어들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부패 공무원이 너무 많아 행정과 치안이 마비될 지경이었기에. 이맹희에 따르면, 삼성전자를 만드는 데 에 들어간 뇌물만 5억 원이었다.

 

당시는 어느 기업이나 모두 공장의 건설이나 외자(차관) 도입에 연관되어 정부나 혹은 박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가를 전해야 했다. 삼성전자를 설립할 당시 내 기억으로는 5억 원을 주었던 것 같다. 이 액수는 당시 차관액의 약 3%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래도 내 경우에는 ....박 대통령과 적절한 라인이 있어서 비교적 액수가 적었던 셈이었다.”

 

박 정권하에서 정치자금 징수는 공화당 재정위원장만의 몫이 아니었다. 힘을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자들이 다 동원되었다. 69년 하반기 어느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은 현대건설, 대림산업, 극동건설, 삼부토건, 동아건설 사장 5명을 소집한다. 3선 개헌과 71년 대선과 총선을 위해 돈을 내놓으라는 이유였다.

 

박정희는 돈을 뜯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수족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려댔다. 박정희는 장군들이 청와대로 인사를 오면 서울에서 양옥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었다.

 

60년대엔 박정희의 비호아래 약 40개의 기업이 거의 모든 산업을 독점했다. 기존 산업에 신규 업체가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 120여개의 규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913,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다. 14일 새벽 250, 공화당 및 무소속 의원 122명은 야당 의원들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길 건너편 국회 제 3별관 3층 특별위원실에 집결해 개헌안을 25분만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사봉이 없자 직원이 가져다 준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탕탕탕쳤다.

 

922일 중정은 가장 격렬한 개헌 반대운동을 벌인 ‘4.19 6.3 범청년회소탕 작전을 개시한다. 모임 사무총장이었던 최형우는 중정에 끌려가 20여일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의 죄명은 3선 개헌을 반대해서 사회를 혼란케 했으니 북괴를 이롭게 한 용공분자라는 것이었다.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1017일로 예정되었다. 박정희는 밀가루 대통령’답게 돈과 밀가루를 퍼붓는다. 김종필은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며 국민들을 협박한다. 개표결과 투표율 77.1%, 찬성률은 65.1%였다. 각 지역별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보상금이 차등 지급된다.

 

3선 개헌이 통과되면서 김형욱은 폐기처분된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에 김형욱 대신 김계원을. 비서실장에 이후락 대신 김정렴을 앉힌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직후 이승만에 대해 동정적인 사설을 쓴 이병주에게 이런 반론을 펼쳤따.

 

그거 안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혀 없소. 12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겐 필주를 가해야 해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라고 할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는 이승만을 돼먹지 않는 놈이라 말했는데, 이승만을 국부라 하는 것들은 박정희 말을 무시하는 건가? 박정희를 무시하는 건가


아놔, 돼먹지 않은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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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는 진실이 어떻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이승만, 박정희를 숭배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려고 합니다.

시이소오 2016-08-15 19:14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사법처리를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건국절이라는 말은 상해임시정부를 인정치않겠다는건데,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것들은 국외추방해야죠.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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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70년대의 남북관계는 적대적 공존관계였다. 한쪽이 긴장을 고조시키면 다른 한쪽 정권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닮은 꼴이 되었다. 이종석은 그런 관계를 거울영상효과라고 부른다.

 

박 정권은 자주, 자립, 자위, 주체, 국방, 경제 병진 건설 등 60년대 북한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말들을 60년대 말부터 빈번히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체제 형성 뒤에는 더욱 일반화해서 사용하였다.”

 

68121일 새벽 4, 북한 산 비봉에 31명의 젊은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116일 개성을 출발한 김신졸르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단이었다. 김신조 일당은 청와대에서 불과 500미터 떨어진 거리까지 접근하는 동안 단 한번도 제지 받지 않았다. 자하문 고갯길에서 최규식이 강경 대응하자 공비들은 기관총을 난사한다. 공비들은 시내버스 헤트라이트 불빛을 국군 출동으로 착각하고 시내버스에 세 발의 수류탄을 투척한 이후, 각자 도주한다. 김신조 한 명만 생포된다. 나무꾼이 무장공비를 신고한 건 119일 오후 2시였다. 그러나, 군경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분노한 박정희는 미국 대사 윌리엄 포터를 불러 북을 공격해야 겠소. 이틀이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오하고 말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포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을 공격하시려거든 혼자 하십시오.”

 

1.21 사태가 일어난 지 이틀 후 123일 동해상에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영해 침범으로 북한에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승무원은 모두 83명이었다. 미국은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 바다 배치, 항공호함 2척을 추가 배치, 공군전투기 361대를 이남으로 전진 배치했다. 미국이 청와대 습격보다 푸에블로호에 더 중점을 두자 박정희는 분노한다. 박정희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한 미국은 대통령 특사 사이러스 밴스를 한국에 파견한다. 밴스는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 등으로 박정희를 달래는 한편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철수하겠다고 위협할 경우,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한동안 푸에블로 음모론도 등장했다. 미국이 상호 갈등을 빚고 있던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악화시키기 위해 꾸민 일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1. 미국은 이미 정찰위성과 정찰기의 최신예 레이더로 북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어, 정보함을 북한 영해 가까이 보낼 필요가 없었다. 2. 푸에블로호에는 기관총을 비롯, 제대로 된 방어 무기가 없었다. 3. 나포 당시 미 공군이나 해군의 즉각적인 구원 작전도 없었다. 등이 제시되었다.

 

1.21 사태로 야당 입지는 위축되고 반공이 지상명제가 되었다. 41일 향토예비군이 창설된다. 주민등록법1.21 사태로 통과된다. 1121일부터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끕되었다.

 

반공 교육은 물론 반공법 적용도 강화되었다. 68년은 미군들이 한국 사람을 린치한 신문기사를 놓고 술자리에서 미군을 욕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빨갱이로 무수하게 두들겨 맞고, 택시에서 한두 마디 박정희 비난을 했다가 그대로 남산으로 실려가 빨갱이 앞잡이라고 매타작을 당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던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마누라와 정사를 하는 배 사이에도 중정의 촉수가 파고들어 있다고 하는 세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박정희의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자는 김종필이었다. 김종필은 권력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고, 박정희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권력을 계승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김형욱은 끊임없이 김종필을 괴롭혔다. 이런 와중에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진다. 김종필의 측근들이 반국가단체를 조직, 대통령 각하를 비난했다는 것. 이에 김형욱은 김종필의 측근들을 정보부로 연행, 고문한다.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824일은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진다. 158명이 검거되고 50명이 구속되었다. 공소사실은 김종태, 이문규 등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 전복과 공산정권 수립을 꾀하였으며 북괴로부터 자금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중정, 안기부, 국정원의 조작질은 정말 이제 지겨울 정도다. 어떻게 수 백번이나 똑같은 조작질을 벌이는데도 국민들은 가만히 있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억울하게 죽어야 국정원 같은 조작 단체가 없어질려나.

 

5명이 사형당하고 신영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중형을 언도받았다. 김종태는 잡지 <청맥>을 발간했다. <청맥>에 드나들던 멤버 중 한사람이 육군 중위 신영복이었다. 신영복은 2020일 복역하고 88815일에 가석방된다.



 

1030일 울진, 삼척에 130명의 무장 공비가 침투한다. 군은 1224일까지 110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의 전과를 올린다. 남한 측은 군인 33, 민간인 16, 부상 37명이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 9살 이승복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승복이 죽기 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특종을 보도한다. 완벽한 소설이었다. 조작 기사였다.

 

68년 이후 20년간 이승복의 반공 영웅화가 국가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교과서에 실렸고, 반공 웅변대회에서 이승복은 필수 소재였다. 이승복 노래도 만들어지고, 동상이 세워지고 기념관까지 건립되었다.

 

90년 이후에야 와서야 교과서에서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이은상, 박종홍, 이인기에 의해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진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니,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니.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3선 개헌을 위한 분위기 조성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동아일보 기자인 김진배와 박창래는 <신동아> 6812월호에 <차관>이라는 심층보도 기사를 실었다. “차관이 정경유착의 표본이며 정치자금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기자는 구속되었다. 다른 언론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신문은 완전히 중앙정보부 손으로 넘어갔다.

 

이 대신 <주간 중앙>, <선데이 서울>, <주간 조선>, <주간 경향>이 창간했다. <주간 한국>의 발행부수는 68년에 이르러 40만 부에 달했다. <선데이 서울>은 창간호 6만 부가 2시간 만에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언론의 치열한 상업성 추구는 박 정권이 바라던 바였다. 박정권은 언론에게 각종 특혜를 베풀어 언론이 오직 상업적 성장에만 몰두하게 유도한다. 특히나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베푼 특혜에 힘입어 신문사 건물과 코리아나 호텔을 짓기 위한 상업차관을 일본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들여온다. 7~8%의 상업차관이었다. 당시 국내 금리는 연 26%였다. <조선일보>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서울 신문 등이 중앙정보부와 손을 맞잡고 사옥을 지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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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1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68년부터 `북풍`이 존재했군요.. 지금까지 애용되는 정치 공작의 역사는 정말 유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시이소오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8-14 15:10   좋아요 2 | URL
몇십년동안 똑같은 짓거릴해도 매번 당하는 국민들이 있다는게 이해불가네요. 이게 무슨 닭대가리도 아닌데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ㅋ ㅠ ㅠ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4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야. 이런 글 읽으면 속이 뒤비지는데.....

시이소오 2016-08-14 15:15   좋아요 0 | URL
답답하죠. ㅠ ㅠ

겨울호랑이 2016-08-14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문제를 인식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일단 알게된 후에는 좀처럼 잊지 못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더운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시이소오 2016-08-14 15:41   좋아요 2 | URL
그렇게 믿어야겠죠. 겨울호랑이 님도 건강하게 보내세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1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종북...ㅋ

시이소오 2016-08-14 20:25   좋아요 1 | URL
저는 북한도 싫어요

깊이에의강요 2016-08-14 2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실을 알려주거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무슨 말인지 생각도 안해보고 앵무새마냥 종북종북.

시이소오 2016-08-14 21:08   좋아요 1 | URL
진실을 알려주거나 바른말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할께요 ^^

깊이에의강요 2016-08-14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한 싫어요

마르케스 찾기 2016-08-15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북한이,,, 좋은데ㅋㅋㅋ 북한 정권, 김부자 옹호 세력이 싫을 뿐ㅋㅋ 헌법에 북한도 독도와 같은 대한민국 영토라 되어 있다네요. (북한 주민도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는ㅋ).. ˝남 북˝의 지도자들이 어찌 그리 다 자기들만 잘살려드는지,,,, 박정희도 싫고, 북한 김부자 정권도 싫고,, 힘없이 매번 당하는 남북 국민들(우리)만 안타까울 뿐,,, 대한민국은 동서로, 남북으로, 정권세력과 국민으로, 세대차로, 심지어 남녀로,,, 너무 나눠져 있는 거 같아서 안타까워요ㅋ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8-15 18:32   좋아요 1 | URL
ㅋ 맞는 말씀입니다. 김부자가 싫은거죠~~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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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한에서는 쌀값이 수시로 변하고 농촌에서는 돈만 있으면 물건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못 산다고 말했다.

구속되었다. 군사상 기밀 누설이라는 것. 이른바 반공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현대문학> 653월호에 남정현의 <분지>가 실렸다. (분지는 똥땅이란 뜻)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 남재희도 중정에 끌려간다. 2월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법정에 피고인 측 증인으로 출두한다. 변호인은 한승헌이었다. 검사는 소설을 읽고 놀랐고, 용공적이지 않냐고 이어령에게 물었다.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이어령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분지>에 징역 7년형을 구형한다. <현대문학>33년 후인 9810월 호에 다시 <분지>를 실었다.



 

322일 판문점 출입기자 이수근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한다. 110개월 후엔 다시 남한에서 북한으로 탈출한다.

 

신변의 위협과 김일성 독재에 염증을 느껴 탈출했다는 이수근은 689월 모 교수와 결혼하는 등 남한에 정착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수근이 화장실에서 이빨을 딱딱거리면 전파가 나간다는 둥 이수근은 이중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69년에 이수근은 서울을 탈출하지만 2월에 중정에 붙잡힌다. 중정은 이수근을 이중간첩이라 발표한다. 미국 CIA 관계자들은 웃었다. 이수근의 탈출 동기는 중정의 이중간첩 혐의였기 때문이었다.

 

중정 감찰실장 방준모는 이수근에 대해 분노했다. 이수근의 여자관계 때문이었다. 이수근은 여자 사냥의 천재였다고 한다. 이수근은 20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수근 스토리를 김수용은 <고발>이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박노식이 남우주연상을, 조문진이 반공영화 각본상을 받았다. 이후 이수근이 위장간첩으로 몰리자 수상은 취소되고, 수상자들은 상패를 반납했으며, 영화는 상영취소되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27일 통합 야당인 신민당을 창당, 대통령 후보에 윤보선, 당수 유진오로 결정한다. 장준하는 4월부터 윤보선 선거캠프에 뛰어든다. 장준하의 박정희 비판은 화끈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 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개표 결과, 박정희는 5688666(51.5%)을 얻은 반면, 윤보선은 4526541(40.9%)에 그쳤다. 승패는 이번에도 영남에서 갈렸다. 영남에서 박정희는 2266천표, 윤보선은 893천 표. 5대 때 66만 표였던 것이 6대 때는 137만 표로 두 배나 벌어졌다.

 

막대한 선거자금에 힘입은 부정 선거였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만일 윤보선이 당선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중정 감찰실장으로 있다 이수근 사건으로 쫓겨난 방준모는 90년대 초에 윤보선 저격 음모를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만일 개표 결과 윤보선의 당선으로 나타나면 총으로 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박정희를 비난한 장준하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장준하를 구속한다. 장준하는 동대문 을구 후보로 옥중 출마해 4만 표 이상을 얻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다.

 

5.16 쿠데타 직후부터 철저한 지역주의와 특정지역 패권주의가 시작된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지배동맹을 구축하면서 호남을 차별했다. 박정희는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한다. 반면 호남 민심을 달래기 위한 호남 복선화 사업36년 후인 2003년에 가서야 완공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를 사랑하는 영남인은 호남 푸대접론에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누가 옳건 그르건 극심한 분열이라고 하는 사실 그 자체다. 문제의 요점은 이것이다. 박정희는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했다. , 누구보다 한국인의 분열주의를 증오하고 개탄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사후 20년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지역 분열주의 화마 또는 그 원흉이 된 것이다.”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1971년에 끝나게 돼 있었다. 박정희는 또 대통령을 해쳐먹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68일에 치러지는 제 7대 국회의원 선거가 중요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온갖 부정이 자행되었다. 박정희는 자유당 시절에 동원되었던 온갖 비열한 수법들을 부활시켰다. ‘야당 토벌 작전까지 시행되었다. 공화당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다녔고, 밀가루에 이어 보리쌀이 공짜로 뿌려졌고, 여당을 찍으면 판잣집을 헐지 않겠다는 은밀한 공약이 판을 쳤다.

 

박정희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선거구는 목포였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여당 국회의원 10명이든 20명이든 낙선시켜도 상관없다. 반드시 김대중만은 당선이 안 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2만여 명의 유령 투표권자를 만들어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을 감행한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2천 표 차이로 당선된다.

 

공화당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웃도는 130석을 얻는다. 선거 과정 뿐만 아니라 투개표 과정에서도 전국적으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야당은 6.8 총선을 무효로 선언하고, 재선거를 요구,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전국 각 대학에선 6.8 부정 선거 규탄데모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서울 21개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16일까지 전국 31개 대학, 163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진다.

 

비공식적으로 공화당이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야당과 타협할 자세를 취하자, 야당은 또 다시 분열한다. 타협파와 비타협파. 김대중은 정부 측에 3선 개헌을 할 수 없는 보증을 얻을 것과 지방 자치를 실시할 것,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타협을 모색하는 게 어떤가?” 하고 제시하지만 강경파는 등원 거부 투쟁을 벌인다. 이후 비타협파는 박정희의 사죄에 아무 소득도 없이 등원한다. 이후 벌어진 북한 무장 공비들의 청와대습격 사건으로 인해 부정선거 문제는 완전히 잊혀진다.

 

동백림, 동베를린을 그렇게 불렀다. 78,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총 관련자는 194명이었지만, 기소자는 34명이었다. 유럽에 있던 사람들은 617일 전후해 전격적으로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돼 한국에 끌려온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 라고 비난한다.

 

730일 대법원 형사 3부가 간첩죄와 잠입죄에 대해 파기 환송 판결을 내린다. 곧바로 2일과 3일 새벽에 용공판사 처단하라는 괴벽보가 나붙었다. 이응로는 국위 선양한 유공자로 초청하고 속여 국내에서 체포된다. 6개월 동안 구금당했던 천상병은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유치되었다. 천상병은 이렇게 말했다.

 

“677월 내 인생은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 정부부에서는 나를 세 번씩이나 전기고문하며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나는 몇 차례 까무러쳤을망정 끝내 살아났다. .....나는 찢어지는 고통도 이겨냈다.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고문을 한 놈을 찾아 죽이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겼으니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다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진실과 허위 중 어느 것이 강자인가를 알고 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희생자로 알려진 건 윤이상이다. 윤이상은 제 3심에서 10년 형을 언도받았다. 부인도 남편이 보고 싶어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납치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과 함께 수감당했다가 얼마 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윤이상은 계속되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윤이상은 독일 정부와 세계적 예술가들의 줄기찬 석방요구에 의해 69225일에 석방돼 독일로 추방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김형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동백림 사건의 모든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고 싶다라고 말했지만, 김형욱은 국가 테러리즘의 하수인이었을 뿐이고 그 우두머리는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이후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외치면서 조국 근대화를 위해선 국가 테러리즘도 필요악이라는 자세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박정희 씨바라



 

661031일 시청 앞에서 벌어진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환영 행사는 엉뚱하게도 서울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촉진시켰다. 한미 양국의 TV 생중계 때문이었다. 서울 시장 김현옥은 세운상가, 낙원상가, 파고다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매달린다. 세운상가는 주상복합아파트로 당시엔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2한강교는 65125일 준공 개통되었고 66119일엔 3한강교 (현 한남대교)가 착공되었다. 여의도, 3.1 고가도로(청계 고가도로)도 건설되었다. 워커힐에선 연일 기생파티가 벌어졌다. 박정희는 청와대 앞 궁정동에 안가가 생기기 전까지 주로 워커힐에서 기생파티를 벌였다.

 

67년 들어 박정희는 언론 탄압에서 언론 포섭으로 언론 대책의 방향을 바꾼다. 중정은 <조선일보>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정부의 나팔수가 되기를 제의하고 금전적으로 후한 당근을 제시한다. 리영희는 단호히 거절했다. 당시의 언론인으로선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은 권력에 빌붙어 영혼 없는 성장을 거듭한다. <조선일보>는 리영희를 쫓아낸다. 신민당은 언론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국제신문인 협회 등에 제출하기로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히려 신문들이 신민당을 공격한다. 군사정권 탄압이후 <사상계>는 연일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장준하가 6.8 총선으로 국회의원이 된 후, 사상계는 부완혁에게로 판권이 넘어간다. 66년 창간된 계간 <창작과 비평><사상계>의 역할을 일정부분 수행하게 된다. <창작과 비평>엔 김수영과 신동엽의 저항시들이 본격적으로 게재되었다.

 

이즈음 나타난 독특한 장르의 영화는 이른바 만주물이라고 불리는 액션영화들이었다. 이 무렵부터 쿵푸영화가 수입되어 인기를 누렸다.

 

67년 최고의 화제작은 배석인 감독의 <팔도강산>이었다. 팔도강산은 이후 5편의 속편으로 이어졌고, 드라마 <꽃 피는 팔도강산>으로 까지 제작돼 12년 간의 장기흥행을 이어간다.

 

17일 신동헌의 총천연색 장편만화영화 <홍길동>이 개봉 해 큰 인기를 끌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63년에 만들었던 일본에선 드디어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고야 말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늘날 <홍길동>의 필름은 한 벌도 남아있지 않다.

 

17일 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귀국, 한국에서도 미니스커트 선풍이 일게 된다. 65년에 데뷔한 남진은 66<울려고 내가 왔나>를 히트시킨 데 이어 67년엔 <가슴 아프게>로 대히트를 기록한다. 한편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로 인기를 끌었다.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등 도시형 트로트로 인기를 끈다.

 

북한은 소련, 중국과 갈등을 빚으며 67년부터 김일성 개인숭배가 전면적으로 실시된다. 북한의 자주노선으로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가 중단된다. 북한의 전쟁불사론에 따라 군사분계선에서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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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복희 미니스커트 광고 기억납니다. 신세계백화점 광고였죠. ^^

시이소오 2016-08-13 14:30   좋아요 0 | URL
기억력 좋으시네요. ^^

2016-08-13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8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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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일 한미행정협정이 조인된다. 정확히 말하면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또는 소파(SOFA : Status of Forces Agreement) . 한홍구는 소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입장에서 볼 때 소파는 엄청난 불평등 조약이지만, 베트남 파병이라는 피의 대가로 한국은 미군의 무법천지를 적어도 외형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미군 범죄는 1967년 이후 해마다 적을 때는 1100여건, 많을 때는 2300여 건이 일어났는데, 1967년 이전에는 통계조차 없다. 다만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파 채택 이후 미군 범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미군 범죄가 그동안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미국은 한국지식계 역시 장악했다. 가장 대표적인 친미 연구소는 57년에 창립된 고려대의 아시아문제연구소였다. 62년엔 아세아문제연구소는 고려대 총장 유진오, 한국학술원 회장 이병도, 미 대사 버거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포드재단 원조자금에 의한 특수연구 시무식을 개최하기도 한다.

 

황용주 필화사건 이후 통일 논의는 완전 금기가 되었다. 금기를 깬 건 민주사회당 발기를 선언하고 나선 서민호였다. 서민호는 한일협정 폐기, 주월 한국국 철수, 김일성과의 면담을 주장하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524, 부산 세관은 한국비료에서 사카린 2259포대(55)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어와 판매하려던 것을 적발한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의 시발이었다.



 

동양텔레비젼, 동양라디오, <중앙일보>등 삼성 비호에 전 중앙 매스컴이 총동원된다. 국회에선 이만섭, 김대중 등이 이병철의 구속을 주장한다. 김두한은 국무위원석으로 다가가 똥이나 쳐먹어, 이 새끼들아, 고루고루 맛을 봐야 알지라고 국무위원들에게 똥을 뿌린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병철은 한국비료 국가헌납과 자신의 경제계 은퇴를 발표한다. 헌납각서까지 썼던 이병철은 도중에 각서 내용을 부인하는 한편 사카린 밀수사건은 언론이 만든 조작극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어 물의를 빚는다. 이병철은 뭘 믿고 이토록 오만방자했던 것일까.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공모한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 밀수라고 폭로한다.

 

“65년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 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장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당시 밀수 총액은 요즘으로 치면 2천억 원에 해당했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리스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양변기의 경우 한국 암시장에서는 15만 원에 팔렸다고 한다. 삼성이 양변기 100개를 남대문 암시장에 풀자 가격이 10만원으로 떨어졌다. 김형욱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 품목들이 사카린은 물론 표백제, 전화기 제품, 수세식 변기, 심지어 목욕하는 욕조에 이르기까지 1만여 가지에 달하고 있었다. 울산 현장에서 나의 요원들이 조사를 시작하자 이병철은 당황하여 물건들을 모래 사장에 묻기도 하고, 바다에다 버리기도 하면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나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맹희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비료는 박정희 이병철 합작사업이었다. 종국에 박정희는 이병철을 배신한다. 박정희는 공식석상에서 재벌 밀수는 반국가 행위라고 말했다. 조갑제는 만약 이맹희가 이런 고백을 1966년 당시에 했더라면 아무리 강력한 박정희 정권이라 하더라도 무너졌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의 충격적인 내용이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밀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한다.

 

1015일 민중당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특정재벌 밀수진상폭로 및 규탄국민대회를 개회했다. 이 대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야말로 우리 나라 밀수 왕초다라고 말했다.

 

대구 발언 때문에 장준하는 구속된다. 강준만은 이렇게 적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야말로 우리나라 밀수 왕초다라는 말이 박정희를 분노케 했을 것이다

그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10월 말부터 한국군 2만 명 추가 파병을 요청한다. 한국으로선 4차 파병이었다. 박정희는 동의한다. 미국 대통령 존슨 방한은 1031일로 예정돼 있었다. 박정희는 존슨 환영을 위해 15천만 원을 투입한다. 국기 100만개, 국화 5만 송이. 존슨을 위해 홍콩에서 특제 침대형 침대까지 긴급 공수된다. 한양대에서 워커힐 뒤편 빌라 까지 이틀 밤을 새워 자갈길을 포장도로로 바꾼다. 존슨의 환영식에 동원된 인원은 학생 100만명 시민 155만명, 공무원 20만 명등 모두 275만명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350만명)

 

박정희는 존슨을 위한 기생파티까지 준비했으나, 존슨의 아내 버드 때문에 무위에 그쳤다. 박 정권은 존슨을 수행한 백악관 기자들에게도 기생 서비스를 베풀었다. UPI 통신 기자인 매리엄 스미스가 자기 방에 들어온 여자를 보고 기겁을 해 문명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문명자의 증언이다.

 

“ ‘홍 장관,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 여자를 붙여요?’ 홍종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이라며 쩔쩔맸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니.”

 

65년 초, 박정희, 김종필, 김형욱이 모인 자리에서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경향신문>을 정부 소유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66<경향신문>이 경매 처분되어 기아산업 대표이던 김철호에게 넘어간다. 중정이 개입한 음모극이었다. 박정희는 이후 <경향신문>을 신진자동차 김창원에게 넘긴다. 이후 <경향신문>은 문화방송과 함께 박정희 친위언론으로 전락한다.

 

<조선일보>45일자 신문에서 <부정부패를 추방하자>라는 캠페이성 기사를 연재한다. 이 기사가 나가자 중앙정보부는 정권 타도의 의미가 있다며 세무사찰, 은행 융자금 회수, 신문용지 배당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한다. 박정희를 비판한 <동아일보> 최영철 기자, 민주당 의원 박한상, <동아일보> 정치부 권오기 등은 괴한으로부터 테러를 당한다.

 

625일 한국사상 첫 세계 권투 타이틀 매치인 김기수의 챔피언 도전전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다. MBC의 시청률은 거의 100%에 육박했다.



 

60년 중반의 가요계는 이미자와 최희준의 시대였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최희준의 <하숙생>이 인기를 끌었다. 3월에 귀국한 패티킴 리사이틀이후 리사이틀 붐이 일었다. 어떤 공연이건 무조건 리사이틀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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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8-12 11:15   좋아요 0 | URL
엄청나게 뿌렸죠. 당시 2층 양옥집을 살 정도 돈을 쥤다고하네요. 그러니 그냥 박정희라 하면 꺼벅 죽는거죠

겨울호랑이 2016-08-1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아문제연구소에는 식민사관의 거두 이병도 이 분도 있네요.. 정말 아시아에서 문제있는 연구소입니다.. 지금 보니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옛날도 그렇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라고 생각했는데 속보를 보니 이재현 CJ 회장님께서 특사를 받으셨군요..

시이소오 2016-08-12 14:03   좋아요 1 | URL
재벌과 권력의 유착, 계속 이렇게 놔둬야하는지.
갑갑하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