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 즉 사랑을 위해서는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데 대한 철두철미한 논증인 동시에, 전적으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 외에는 관심이 없는 오늘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싹을 짓누르고 있는 온갖 함정과 위협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한다.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토포스atopos(장소가 없는)로 불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차이는 타자성과 반대로 일종의 긍정성이다. 오늘날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점점 강화되어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리비도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주체성에 투입된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가 아니다. 자기애를 지닌 추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타자를 배제하는 부정적 경계선을 긋는다. 반면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확정하지 못한다.....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 속을 철벅거리며 나아가다가, 결국 그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무엇보다도 성공을 겨냥한다. 그에게 성공은 타자를 통한 자기 확인을 가져다준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 반면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발적인 자기 부정,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사랑의 주체는 특별한 약화의 과정 속에 붙들리지만, 이러한 약화에는 강하다는 감정이 수반된다. 물론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타자의 선물이다.

 

동일자의 지옥에서 아토포스적 타자는 묵시록적인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에는 묵시록만이 우리를 동일자의 지옥에서 건져내어 타자를 향해 해방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아는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흉성이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와 각성의 효과를 낳는 부정성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아는 그것이 멜랑콜리의 특수한 형태인 우울증을 치유하는 행성이라는 점에서 역설적 이름이다. 그것은 저스틴을 나르시시즘의 늪에서 건져내는 아포토스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스틴은 죽음을 가져오는 행성 앞에서 말 그대로 활짝 피어난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점점 다가오는 재난을 그녀는 연인과의 행복한 합일처럼 기다리고 있다. 이졸데 역시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환희를 느끼며 세계의 숨결이 불어오는 우주에 몸을 던진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타자를 향해 열린다. 저스틴은 이제 나르시시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클레어와 그녀의 아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타자의 아토피아(무소성)는 에로스의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멜랑콜리아>의 묵시록적 하늘은 블랑쇼가 유년 시절의 원초적 장면으로서 경험한 저 텅 빈 하늘을 닮아 있다. 블랑쇼에게 그 하늘은 동일자를 갑자기 중단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자의 아토피아를 계시해준다.

 

나는 일골 살이나 여덟 살쯤 된 아이였다. 나는 어느 빈 집 안에 있었다. 닫혀 있는 창문 근처에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는데- 갑자기, 그보다 더 갑작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을 듯 했다- 마치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무한자를 향해 무한히 열릴 듯했고, 이 압도적인 열림의 순간은 무한자를, 하지만 무한히 공허한 무한자를 인정하라고 내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하늘의 절대적 공허, 보이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하늘 신의 공허함. 그것은 명백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것은 신성한 것에 대한 단순한 암시를 훨씬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 , 그 하늘을 본 충격이

너무나 매혹적이고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으므로, 아이의 눈에는 일순간 눈물이 가득 고였다.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성과사회는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 (‘해야 한다’)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구호는 실제로는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령은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 속에 빠뜨린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자신의 강제 구조를 개개인이 누리고 있는 가상의 자유 뒤로 숨긴다. 그 속에서 개개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다. 좌절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잘못이며 장차 이러한 죄를 계속 짊어지고 다니게 된다.

 

.....자본주의가 종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죄(채무)와 죄사함(채무 면제)의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죄(채무)를 만들기만 할 뿐이다. 자본주의에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채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속죄할 수 없다는 것은 성과주체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울증은 소진증후군과 더불어 할 수 있음이 초래하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이며, 다시 말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에로스는 성과와 할 수 있음의 피안에서 성립하는 타자와의 관계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에로스에 핵심적인 부정 조동사다. 다르다는 것의 부정성, 즉 할 수 있음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타자의 아토피아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타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질성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질성을 절대적으로 원초적인 에로스의 관계 속에서, 즉 할 수 있음으로 번역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고 그 결과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성애로 변질된다. 섹시함은 증식되어야 하는 자본이다. 전시가치를 지닌 신체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다. 타자는 성애화되어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질성이 제거도니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타자는 성적인 부분 대상들로 파편화되기에 더 이상 하나의 인격성르 지니지도 못한다. 성적 인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예의가, 예의바름이, 바로 이격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즉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랑은 욕구, 만족, 향락,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에 타자의 결핍이나 지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검색 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모든 갈망을 폐기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깨어나는 것은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얼굴들visage”에 직면할 때이다. “얼굴은 비밀이 없는 페이스의 대척점에 있다. 페이스는 포르노처럼 발가벗겨진 채 전시되는 상품이며, 시선에 완전히 노출되고 남김없이 소비된다.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과잉과 광기로 표출되는 에로티즘의 심연을 인식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오늘의 사회에서 나르시시즘적 경향의 심화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는 타자의 부정성,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아토포스적 이질성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또한 레비나스의 에로스 윤리는 타자를 경제적 수단으로 사물화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질성은 소비 가능한 차이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인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간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3장 벌거벗은 삶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책에서 연인의 성적으로 흥분된 눈(erotikon omma)를 묘사한다. 그것은 흥분된 엄니와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당신의 눈은 나의 눈을 꿰뚫고 들어와 나의 골수에 뜨거운 불길을 일으키나니 당신으로 인해 사멸해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라.”

 

사랑은 피치노에 따르면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이다. 그것은 변신이다.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다.” 바로 이러한 변신과 상처가 사랑의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하지만 오늘날 사랑이 점점 더 긍정화되고 길들여짐에 따라 사랑의 부정성도 희귀해져간다. 사람들은 자기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할 따름이다.

 

부정성의 완전한 부재로 인해 오늘날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쪼그라든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동일자의 안락함으로 대체된다.

 

노동과 벌거벗은 삶은 죽음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벌거벗은 삶을 지키려는 경향은 더욱 첨예화되어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치닫고 있다. 현대의 노예는 자주성과 자유보다 건강을 더 중시한다. 그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 즉 건강 자체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인간과 흡사하다.

 

오늘날의 성과 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헤겔은 그 누구보다도 타자에 대한 강한 감수성을 지닌 사상가였다. 이러한 감수성을 개인적 기벽으로 깍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헤겔을 데리다나 들뢰즈, 또는 바타유 등이 가르쳐준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들의 독해에 따르면 절대자는 폭력과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겔에게 절대자는 무엇보다도 사랑을 의미한다......절대적이라는 것은 곧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기에 타자에게서 등을 돌리는 정신은 제한된 정신이다. 절대적인 정신은 이와 반대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한다. “정신의 삶은 헤겔에 의하면 죽음 앞에서 겁을 먹고 파멸로부터 온전히 스스로를 보존하는벌거벗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해가는삶이다. 정신이 생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죽을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 절대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긍정성이 나이다. 정신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그 곁에 머물러있는다. 정신은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헤겔의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정니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에로티즘이란 죽음 속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4장 포르노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포르노의 매력은 살아 있는 성애 속에서 죽은 섹스를 예감하게 한다는 데서 나온다.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가상공간에서의 섹스만이 포르노인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실제 섹스 역시 포르노로 변질된다. 세계의 포르노화는 비속화의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포르노화는 곧 에로티즘의 비속화다.

 

물론 박물관도 사물을 격리한다는 점에서는 사원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물이 박물관에 소장되고 전시될 때, 제의가치는 전시가치에 의해 파괴되어버린다.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전시가치로 터질 지경이 된 얼굴에서 성애의 새로운, 집단적 사용법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감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전시는 모든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그저 따뜻함, 친밀함, 안락한 자극을 넘어서지 않는 오늘의 사랑은 신성한 에로티즘이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포르노에서 완벽하게 배제되는 에로틱한 유혹 역시 환상의 연출, 가상 형식과의 유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심지어 유혹이 사랑과 대립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제의는 유혹의 질서에 속한다. 사랑은 제의적 형식의 파괴, 제의적 형식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생겨난다. 사랑은 이러한 형식의 해체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결국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속화라는 아감벤의 구상은 제의적 공간을 격리의 강제 형식이라고 의심함으로써,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의 탈제의화, 포르노화 과정을 더욱 부추긴다.

 

5장 환상

 

그리하여 시각적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한다.

 

사물의 내밀한 음악은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울려 나온다. 눈을 감는 순간에야 사물 앞에서의 머무름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르트는 카프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평탄하게 다듬어진 공간은 투명하다. 문턱과 다리는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지대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 문턱의 부정성이, 문턱의 경험이 없는 곳에서는 환상도 위축된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6장 에로스의 정치

 

에로스에는 보편적인 것의 씨앗이 담겨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또한 에로스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둘의 무대.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한다.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는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도, 어떤 거리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7장 이론의 종말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개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오랫동안 예감했던 것이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으로 옮겨져야 할 때, 그럼에도 말해진 것이 아직도 오랫동안 외로이 남겨져야 할 때, 나는 어쩌면 에로스의 날갯짓을 다른 때보다 더 강렬하고 오싹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소. 그것에 순수하게 부응하면서도 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에로스의 비행을 쫓으면서도 다시 잘 귀환하고, 두 가지를 같은 정도로 본질적이고 합당하게 수행하는 것, 나는 그렇게 하는 데 너무 쉽게 실패하곤 하오.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가 작동시킬 수 있는 것은 그저 계산일 뿐이다. 사유에는 계산 불가능함이라는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론은 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세계를 정제한다. 우리는 이론이 제의나 예식과 공통의 기원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정신이란 본래 불안을 의미한다. 정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다.

 

정보사회는 체험사회다. 체험 역시 가산과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점에서 체험은 경험과 구별된다. 경험이란 대체로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체험에는 변신시키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지않다.

 

에로스의 힘을 도반하지 못하는 로고스는 무기력하다.....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혹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적인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전승되어온 견해와 달리 플라톤은 포로스가 에로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포로스는 길을 의미한다. 사유는 과감하게 전인미답의 지대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답게 사유에게 길을 일러준다.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이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 즉 지혜의 친구라고 부른다. ....그것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 초월적인 경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나의 일상은 책과 산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가까운 근교의 산이나 길을 걷는다. 하루 종일 걷기도 하는데, 지하철에선 주로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읽었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만일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가져가야지.

 

삼년 전에도 삶의 위기가 있었다. 동네 뒷산도 가 본적이 없었건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겨울 지리산 종주를 감행했다. 겨울산은 위험하다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산에 올라 죽을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위기인걸까. 이 책엔 매장마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과 작가, 책들이 즐비하도록 소개되건만(필사 포기), 가장 눈에 들어온 문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solvitur ambulando.”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면 나는 이 문장을 믿겠다. 솔비투르 암불란도. ‘걸으면 해결된다를 읊조리며 삼악산을 올랐다. 고작 5km의 코스건만 4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다. 너무 소요하며 걸어서일까? 다음날 임금 체불한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번 내가 전화해서 재촉했었다. 전화 끊고 나서 1분 만에 체불된 임금이 입금되었다. 나처럼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갈 수 없는 형편이라면 동네뒷산이라도 오르자

걸으면 해결된다.

 


폴 서루가 이곳에 살고 싶다가 아니라 이곳에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아홉 군데의 장소.


 

발리



태국



코스타리카



오크니 군도



이집트 - 카이로가 아닌 다른 곳.



트로브리엔드 군도



말라위



메인 주




하와이



 

폴 서루가 뽑은 장소 중, 나는 고작 발리와 태국만을 가 봤을 뿐이다. 언젠가는 다른 곳도 갈 수 있겠지

그러나, 지금 이곳도 나쁘지 않다. 여행은 마음의 상태니까.


여행은 마음의 상태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이국적인 곳에 있는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행은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경험이다.

 

- 폴 서루, <신선한 공기의 마니아>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ingri 2016-05-26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아침부터 풀썩. 넘 이쁩니다.

시이소오 2016-05-26 08:17   좋아요 0 | URL
싱그리님, 싱그러운 아침되시길 바래요 ^^

지니 2016-05-2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으면 해결된다`
오늘 저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단 한마디 갔습니다.
시이소오님의 글을 읽는 순간 `이거다.` 싶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저기 틈나는 대로 걸어 보겠습니다.
저 사진 중 코스타리카에 있다고 상상하며 불편한 모든 생각 내려놓고 걸어봐야겠습니다.
오늘을 잘 보낼 수 있는 해결책 감사합니다~~
이래서 북플이 좋아요~!!
책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시이소님~^^*

시이소오 2016-05-26 14:15   좋아요 1 | URL
좀 걸으셨는지요? 안 좋은 일들이 잘 해결되길 바랍니다.

계속 좋은 하루 되세요 ^^

hnine 2016-05-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어디 저장해두어야겠습니다.
저도 현재로선 위의 장소보다 우선 제 집 뒷산이 더 중요합니다. 당장 걸을 수 있으니까요 ^^

시이소오 2016-05-26 14:16   좋아요 0 | URL
그쵸? 오늘 비가와서 아쉽네용^^;

2016-05-26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6 14:21   좋아요 0 | URL
죽어도 좋아, 할만한 장소들이죠. 걸으셨다니
리뷰 쓴 보람이 있네요.
제가더 감사하죠 ^^

물고기자리 2016-05-26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걷는 걸 무척 좋아해요.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하루에 12킬로 정도를 걷는데 그 시간은 책 읽는 시간과도 바꾸지 않죠.

5월엔 아카시아꽃향기 때문에 책을 못 읽었어요;; 달콤한 숲 향기와 걷기는 지상의 축복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26 14:28   좋아요 1 | URL
하루에 12키로라니 대단하십니다
저도 4월, 5월은
책 보다는 산책이 더 좋드라구요 ^^
 
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선 위선이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박해와 차별을 당한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볼테르 식으로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여성을 착취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페미니스트의 적이다. 설거지도 안 하고, 밥도 안 하고, 빨래도 안 하는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변명을 하자면 가사노동을 분담하려고 해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우리 와이프가 못하게 한다. (와이프가 이 글을 안 봤으면)

 

다만 나는 성폭력이나 성희롱, 성추행을 해 본적은 없다. (성추행을 당해본 적은 있다. 남성에게. 또한 몸무게 100kg를 훌쩍 넘긴 듯한 여성에게. 맞을까봐 조용히 있었다. 이런 된장.) 고등학생 때, 여동생을 한 번 때린 적은 있다


(낮잠 자는데 피아노를 치 길래 치지 말라고 했더니, 여동생은 더 세게, ‘포르티시시모<엄청 강하게>’로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나는 여동생을 쳤다.. 그래도 나는 메조포르테<조금 강하게>’정도로 쳤을 뿐이다. 남동생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때렸으니 피아니시시모<엄청 약하게>’에서 포르티시시모까지 모든 강도로 - 성차별은 아닌 것 같다.....성차별일까)

 

최근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남성의 무차별 살인 사건에 희생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성 혐오냐 아니냐로 논란이 되고 있다. 나는 여성 혐오 범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대다수 여성들이 여성 혐오로 인식한다는 게 아닐까. 그만큼 그동안 여성들이 여성 혐오를 직접 몸으로 겪어왔다는 반증이다.

 

여성을 왜 혐오하는지 잘 모르겠다. 일자리에 대한 남성들의 위기 때문일까.

여성은 당연히 숭배해야 하거늘.

 

비록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책에 대한 독후감은 쓸 수 있지 않을는지. 프로이트는 작은 차이를 가지고 끊임없이 대립, 반목, 경멸하는 현상에 대해 사소한 차이의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페미니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페미니즘 내에서도 리버럴, 마르크시즘, 래디컬, 백인, 흑인, 근본적인, 온전한, 포괄적인 등등 여러 분파가 난립, 각자가 자기만이 옳다고 하고, 다른 페미니즘에 대해 이를 가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즘’(혹은 부족한)을 주장한다. 페미니즘을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토대로 록산 게이는 미국의 문화, 즉 영화, 소설, 드라마, 팝송 등에서 은폐되어 있는 여성의 성차별을 들추어낸다. 책의 어떤 부분들에선 저자의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다가 다른 곳에선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내 관점에서 록산 게이는 전혀 배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어떤 장에선 가혹하다 할 만큼 작품을 갈가리 찢어놓는다.

 

<헝거 게임>이 이렇게 대단한 소설이었다니! 영 어덜트 소설이라 무시했거늘. 읽어봐야겠다.

 

여성 캐릭터는 왜 항상 호감만 연기해야 하는가하는 저자의 문제제기엔 동의할 수가 없다. 록산 게이의 말대로 나는 여성 캐릭터가 호감만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는 다른 글에서 남성 캐릭터가 비호감이라고 비난한다. 이건 완벽한 모순이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강간을 일삼는 개차반 남성 캐릭터를 비난할 근거가 없어진다. 성차별이다.

 

얼마 전에 리뷰를 썼던 주노 디아스의 <이렇게 그녀를 잃었다>도 록산 게이의 도마에 올랐다. 록산 게이는 소설의 작품성을 인정하지만 그 안에 성차별주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노 디아스는 여성들을 착취하는 수시오’(난잡한 놈)이자 페로’()인 도미니카노(도미니카 남자들)에 대해 썼다. 록산 게이는 이 수시오들이 잘못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하다고 말한다. 록산 게이는 소설속의 여성들이 단지 유니오르의 성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썼다. 만일 그렇다면 유니오르는 왜 떠나간 애인을 몇 년동안 잊지 못하는 걸까. 단지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여자로 대체하면 그만 아닌가.

 

이외에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같은 소설, 드라마 <걸스>, <헬프>, <노예 12>, <장고 : 분노의 추격자>등의 영화도 록산 게이의 도마에 오른다. 예를 들어, <헬프>같은 경우 뇌를 아파트에 놓고 영화를 보러 간다면괜찮은 영화라고.

 

록산 게이는 공인들이 커밍 아웃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직도 게이란 단어가 여진히 비방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게이 남성들이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나는 공인들이 왜 커밍아웃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인이 아니라면 더 더욱. 왜 사람들은 타인의 잠자리 취향까지 알려고 하는 걸까. 사적 영역이란 개인의 은행 잔고라고 말했던 이는 누구였더라. 록산 게이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집단 강간당한 사건을 고백한다. 굳이 이 사실을 꼭 밝혀야만 했을까.

 

강간 농담, 강간 유머가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한국에도 있나? ‘합법적 강간’? 강간이 어떻게 합법적일 수 있을까? 선거철만 되면 선거 공약으로 낙태 제한권을 들고 나오는 정치가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미국 정치가들은 한국의 새누리당 정치인들만큼 제 정신이 아닌 것들이 많구나. 여성들이 그리스 희극 <리스스트라타>처럼 성 파업을 일으켜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남자와 어느 정도 사귀고 나서 남자가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피임약 복용하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아니? 그러는 너는?”하고 답할 때이다.

 

윗 문장을 읽고 남성인 나는 왜 이리 통쾌했던걸까. 나는 남성으로서의 나의 특권을 인정한다. 이게 출반선이 될 수 있을까.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허무라도 욕망하라고 말했던 니체의 경구가 떠오른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앞으로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욕망하고 싶다.


 

린 히긴스, 브렌다 실버 <강간과 재현>

다이애나 스페츨러, <스키니>

케이틀린 모란, <진짜 여자가 되는 법>

가렛 카이저, <프라이버시>

수잔 콜린스,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 제이>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케이트 잠브레노, <그린 걸>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조앤 디디온, <플레이 잇 애즈 잇 레이즈>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5-25 15: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성을 ‘숭배’해야 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남성혐오자들의 반감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숭배라는 단어가 신 같은 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보는 행위를 뜻합니다. 여성혐오자들은 남성의 존재감이 여성보다 아래에 있는 상황을 싫어합니다. 과거 남성 중심의 위계적 질서를 그리워합니다. 옛날에는 남성이 신이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의 말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여성들도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들은 위계질서를 누리는 주인공이 여자가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지기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자신들의 위치가 협소해질까 봐 불안감이 생기고,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현실을 못마땅합니다. 저는 여성혐오의 원인을 이렇게 봅니다. 이거 말고도 다른 원인이 있을 겁니다. ^^

저는 숭배보다는 여성의 말과 행동에 ‘공감’해야 한다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남성은 여성의 말과 생각에 공감해야 합니다. 공감하는 행위 자체가 여성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니까요. 제가 남자 입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느낀 게 남자는 여자의 사소한 말 한 마디를 귀 담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자가 올바른 소리를 해도 한 쪽 귀로 흘러 듣습니다.

:Dora 2016-05-25 17:16   좋아요 1 | URL
정신적으론 숭배찬성 태도는 공감...웬지 자존감이 급상승하는 느낌이 들어서 찬성합니다

시이소오 2016-05-25 17:36   좋아요 0 | URL
아고 답글이계속 사라져 힘드네요 ㆍ공감이더 적절한 표현이겠네요 ^^

cyrus 2016-05-26 15:57   좋아요 0 | URL
To. Theodora, 시이소오 // 처음에 ‘공경’이라는 표현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을 노인처럼 대하는 것 같아서 고민한 끝에 ‘공감’으로 바꿨습니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녀 모두 평등하게 사는 삶을 만드는 방식도 차이가 있거든요. 제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입장도 있을 겁니다. ^^

시이소오 2016-05-26 16:16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

:Dora 2016-05-25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에게는 친밀함의 유전자가 없다고 누군가 쓴 걸 읽었어요. 모든 불평등과 차별에 반대하는 의미에선 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05-25 16:44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친밀한 남성들도 있지 않을까요?

:Dora 2016-05-25 16:55   좋아요 1 | URL
ㅋㅋ맞아요 흔하지는 않지만 있긴 있죠

시이소오 2016-05-25 17:06   좋아요 2 | URL
제가 그렇다는거는아니구요ㅋ

:Dora 2016-05-25 17:15   좋아요 1 | URL
확인불가 사항이라 딱히 드릴말씀이 ;;;;
 
명리 : 운명을 읽다 - 기초편 명리 시리즈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군대 시절, 수통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우리 과엔 나와 똑같은 해, 똑같은 달, 똑같은 날에 태어난 군발이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원했다. ‘, 별일도 다 있다싶었는데, 돌이켜보니 그와 나의 사주팔자가 비슷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가 속한 는 이비인후과, 피부과와는 달리 고작 스무 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그 중에 생년월일이 똑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명리학은 무엇인가? ‘운명(運命)’이라는 말에 이미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이 말 자체가 이미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운용한다, 운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은 주어진 요소들을 가리킨다. ‘을 합친 말이 바로 운명이고, 이것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각자 자기만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다. 이것이 명이다. 그 명을 키우고 발현시켜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오로지 그 주체의 몫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의 삶이 같은 것은 아니다.

 

명리학은 흔히 사주팔자라고 말한다. 음양오행, 천간지지, 십이운성, 신살 등을 토대로 인간의 을 알아내는 것이다. ‘운칠기삼이라기보다는 운칠명삼이다. ‘주체의 몫이 운이라면 타고난 소명이 이다.

 

군대를 제대 후, 세일즈 아르바이트를 했다. 난 그 당시 정말 이 제품을 믿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칼을 팔았다. 지금은 주부들에게 꽤나 알려진 칼이다. CUTCO 칼이었다. 팀장까지 했었지만 당시 지점장이 내 실적을 가로채 그만두었다. 천간을 살펴보면 나는 신신(辛辛)병존이다. 신신병존은 오늘날 주로 외과 의사 같은 칼잡이들이 많다고 한다. 외과의사는 되지 못해 나는 칼을 팔았던 것일까.



 

사람의 명이 갈리는 부분은 결국 십신이 아닐까. 십신은 다섯가지로 구분된다. 비겁, 식상, 재성, 관성, 인성이 그것이다. 비겁은 비견과 겁재, 식상은 식신과 상관, 재성은 편재와 정재, 관성은 편관과 정관, 인성은 편인과 정인으로 나뉜다. 나는 상관1, 식신2, 편관 1, 정재 3이다. 정재는 선비이고 학자의 마음이라고 한다. 정재의 키워드는 정도를 걷지만, 인간적으로 쪼잔하다이다. 예전에 와이프의 부탁으로 개명을 하기 위해 철학관을 찾아갔더니, 그분은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내가 고지식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아마도 정재가 셋이나 있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듯. 실제로 고지식한 편이다. 넉살이나 사기를 칠 수 있는 재능이 아예 없다. 속이 훤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나는 정재가 가진 단점을 개선해야 할 것이다.

 

십신 이외에 또 십이운성이 있다. 십이운성은 십신과 결합되어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진다고 한다. , , , 장생, 목욕, 관대, 건록, 제왕, , , , 가 그것이다. 나는 제왕이 두 개다. 제왕은 십이운성 중 가장 센 힘이라고 한다. 나 같은 경우엔 정재와 제왕이 만나서 인지 가장 유순한 편이라고 한다. 또한 나는 상관과 사가 만난다. 이런 경우 글을 쓰는 작가나 뭔가를 세공하는 장인, 수술을 주로 하는 집도의 등과 같이 정밀한 분야의 직업을 갖는 것이 좋다고 한다. 명리학으로 보건대, 나는 외과의사가 되었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수학을 못했을까. 이런 된장.

 

여기에 또 신살과 귀인이 있다. 대표적인 신살엔 역마, 도화, 괴강, 양인, 백호, 화개, 귀문관, 공망, 삼재등이, 귀인 가운데는 천을귀인, 천덕귀인, 월덕귀인, 문창귀인, 월공, 암록, 천의성 등이 있다.

 

삼재만 살펴보면 나는 해년생으로 들삼재, 묵삼재, 날삼재의 3년이 모두 힘들다고 한다. 작년이 날삼재였다. 무지 힘들었다. 올 초까지 힘들었다. 삼재 끝이다. 음핫핫.

 

귀인으로 나는 천을귀인, 천덕귀인, 문창귀인이 있다. 문창귀인은 인문학적인 귀인으로 종이를 가지고 하는 모든 행위에 재능이 있다고 한다. 지식욕이 있긴 하지만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외에 건강용신, 행운용신, 대운에 대한 설명은 한 두 번 본다고 이해하기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점쟁이는 나보고 한국 영화에 획을 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나는 한국영화에 점 하나 찍지 못했다. 대운은 이미 들어와 있고 삼재가 끝났다. ‘대로라면 올해부터 나는 바닥을 찍고 올라설 것이다. ‘역시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을 안다는 것은 명대로 살기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을 거슬러 삶을 운용하기 위해서이다. 누구에게나 부족한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각자에게 부족한 점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는 게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이 책과 더불어 좌파 명리학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각자가 셀프로 자신의 을 확인해 보는 건 어떨지. ‘을 안다면 을 개척할 수 있으므로.


밑줄 친 문장 

 

명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이 고정되거나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천변만화하는 우주적 속성의 한 부분으로, 인간의 근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변치 않고 말해주는 학문이다.

 

20세기 한국 명리학의 태두 중 한 사람인 도계 박재완은 인간의 길흉화복은 환혼동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환은 사람으로 태어났는가의 여부를 말하고, 혼은 조상의 환경이며, 동은 태어난 나라와 시대이고, 각은 바로 그 사람의 자유의지의 깨달음이다.

 

명리학은 무엇인가? ‘운명(運命)’이라는 말에 이미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이 말 자체가 이미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운용한다, 운전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은 주어진 요소들을 가리킨다. ‘을 합친 말이 바로 운명이고, 이것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명리학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 각자 자기만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다. 이것이 명이다. 그 명을 키우고 발현시켜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오로지 그 주체의 몫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의 삶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연해자평>을 거쳐 청나라 시대를 지나며 <적천수><궁통보감>의 두 개의 틀을 바탕으로 명리학은 다양한 이론의 확산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왔다.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며, 일본과 중국에서는 아베 다이장과 웨이첸리라는 명리학계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한국에도 20세기 들어 세 명의 위대한 명리학자가 존재했다.....첫 번째 분은 명리학의 자존심 자강 이석영 선생이고, 두 번째는 도계 박재완 선생, 마지막은 가장 영민하고 천재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 불리는 제산 박재현 선생이다.

 

판에는 이판과 사판이 있다. 이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어떤 현상을 인간적인 직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사판은 현실적인,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고려해서, 형이하학적인 경험론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적천수>에는 다음과 같은 음미할 만한 구절이 있다.

 

오양종기불종세 오음종세무정의

 

다섯 개의 양은 기를 따르되 세력을 쫓지 않고, 다섯 개의 음은 정과 의리 없이 세력을 쫓는다. ”

 

한마디로 양은 명분이고 음은 실리라는 이야기이며, 부드러움은 능히 굳셈을 제어할 수 있지만 굳셈은 부드러움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레프 2016-05-24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명리학에 관해 영화를 만들어보심은 ... ^^

시이소오 2016-05-24 13:39   좋아요 2 | URL
굿 아이디어시네용 ^^

오매불망 2016-05-29 16:0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관상이라는 영화도 흥행했잖아요^^

시이소오 2016-05-29 16:08   좋아요 0 | URL
명리를 써양겠네요^^

건조기후 2016-05-24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와 엄청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사주팔자에 관성이 아예 없더라고요. 소름 ; 엄청 부자는 못 되어도 평생 의식주 걱정은 안 하고 산다는데 정말 돌아보니 어찌나 근근히 잘도 살아왔는지 ㅎㅎㅎㅎㅎ 다른 책도 더 보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명리학이라는 게 꼭 누구 팔자를 맞추고 안 맞추고 이런 거 보다 인간을 분석하는 틀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그게 정말 흥미롭고 매력있는 거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24 14:22   좋아요 2 | URL
평생 의식주 걱정 안하시다니 부럽습니당
저자도명리학은점치는게 아니라고 누누이 말씀하시죠
건조기후님 말씀대로
명리학은 흥미롭고 매력적인 학문 같아욤 ^^

인다라의구슬 2016-05-24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헌 샘 책을 읽고 나서 여러 사람 사주를 받아 풀이해봤는데 역시 책 한 권으로는 한계가 ;;; ^^ 적용해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명리에 대한 관점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

시이소오 2016-05-24 18:17   좋아요 1 | URL
저도 책 구입해서 지인들 사주 풀이로연습을 해봐야겠어요 ^^

2016-05-24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4 19:10   좋아요 0 | URL
조선시대였다면 백정의 사주로군요ㅋ 침은 제동생과 아버지가 놓신답니다^^

2016-05-24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4 19:2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저도 금천지에요~~
^^ ㅋ

룰루라떼 2016-05-26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만에 북플 들어왔더니,
좋은 글들이 넘치네요^^
읽어보고 싶은 책들은
왜일케나 많은지~ㅠ
그니까
명리학(사주 등)에 문외한인
사람이 읽기에 요 책이
무난할까요?

시이소오 2016-05-26 14:32   좋아요 2 | URL
넵. 저도 완전 문외한이거든요.
편집 을 꼼꼼히 잘 한듯 싶네요 ^^

룰루라떼 2016-05-26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머낫~시이소오님...
완전 전문가 이신줄 알았어요^^ㅋ
바쁘실텐데,
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님의 박학하심에
다시한번 놀라며...

시이소오 2016-05-26 14:38   좋아요 2 | URL
책ㅇㅔ 씌여있어 그런거지
제가 박학한건 아니죠~~

다락방 2018-01-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명리학 공부를 해볼까 하고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이소오님.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후훗.

땡투땡투

시이소오 2018-01-29 17:20   좋아요 0 | URL
ㅋ 이책 추천이요. 저도 명리학 공부를 다시 해볼까요? 명대로라면 잘 살고 있어야하는데 어디서 어긋난것인지 ㅎㅎ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마지막 페이지까지 에포케 (판단중지)’ 상태로 책을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몇일 동안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 책이 픽션이었다면 판단은 좀 더 단순했을텐데. 살인자의 쌍둥이 아들 일화가 떠오른다. 쌍둥이 중 한 명은 아버지처럼 범죄자가 되어 감방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를 탓했다. 다른 한명은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터뷰어가 물었다. 쌍둥인데 왜 그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냐고? 그는 말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는 <롤링스톤>의 수석 편집장이었으며, 유명한 음악평론가였고, 이 책으로 전미도서협회상, LA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할 만큼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반면 그의 형 게리 길모어는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살해한 살인범이었고, 1977년 사형당했다. 마이클의 셋째 형 게일렌은 게리처럼 술에쩔어 경미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첫째 형 프랭크 2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당잡부의 삶을 살았다.

 

형들과 마이클의 차이점이라면 유독 마이클만이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맞지 않았다. 아버지 프랭크는 아내인 뱃시를 때리고, 아들 프랭크, 게리, 게일렌을 때렸다. 뱃시는 또 프랭크, 게리, 게일렌을 때렸다. ‘본성과 양육논쟁은 오늘날도 거듭되고 있지만 나는 본성보단 양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정폭력을 당해다고해서 다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가 차후 괴물이 될 확률은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더 높을 것이다.

 

가정폭력만큼이나 게리를 괴물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소년원과 감옥이라는 시스템이었다. 이른바 교도소(矯導所), 바로잡을 ’, 이끌 . 마이클이 묘사한 미국의 소년원은 흡사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소년들에 대한 일상화된 간수들의 강간. 구타. 상상할만한 모든 잔인무도한 일이 다 행해진다고 봐도 좋으리라. 소년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밖에 남는 게 없다.

 

그러나, 분명 게리는 회생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게리는 모든 가능성들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잔인하게 죽였다. 나는 사형반대론자다. 그러나, 게리가 사형 당했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책이 제기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형당하고 싶어 했다. 사형반대론자인 마이클은 게리의 사형 의지를 꺽고 싶어 한다. 만일 마이클의 의지대로 게리가 사형을 모면하고 형기를 마친 다음, 사회로 나와 또 다시 무고한 시민을 죽인다면? 감옥이 교도, 교화는 고사하고 보다 교활한 괴물들을 생산하는 현실로 미루어보건대, 게리는 출소 후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책을 덮으며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 책을 써야만 했을까?’ 이미 노먼 메일러가 게리와 그의 가족을 인터뷰한 자료로 <사형집행인의 노래>라는 소설을 써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마이클은 분명 이 책을 씀으로써 다시 한번 살인자의 동생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을텐데, 그럼에도 왜 그는 자기 집안의 치부를 들춰내면서까지 이 책을 써야 했을까.

 

이 책은 굳이 쓰여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저자가 글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허영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명성과 돈을 얻기 위해 가족의 비밀을 만천하에 까발긴 것이다. 만일 이러한 폭로가 오로지 마이클과 그의 가족에게만 국한되었다면 수긍할 수도 있었으리라.

 

책 말미에 저자는 그의 형 프랭크가 실은 마이클의 배다른 형인 로버트의 자식이라고 폭로한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들과 해 프랭크를 낳았으니, 프랭크는 아들인가, 손자인가?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건가?) 그의 형이 그 내용을 실어도 좋다고 허락했다손 치자. 그렇다면 로버트와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는 명성과 돈을 얻기 위해 타인의 삶(혹은 배다른 가족)을 처참히 망가뜨린 것이다. <나의 투쟁>에서 칼 오베 크라우스고르는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을 똥칠하며 죽어간 아버지의 일화를 소설에 썼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그를 고소했다. 왜들 이렇게 자기 가족의 치부마저 드러내고 싶어 안달일까.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 자기 고백은 이제 상품이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픽션이 논픽션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제임스 프라이 자서전 <백 만개의 파편>은 오프라 북클럽에 소개된 이후, 두 달만에 200만부가 팔려나갔다. 웹사이트 <스모킹 건>이 그 작품이 거짓, 날조라고 비판하자, 제임스 프라이는 자서전이 완전한 허구임을 인정했다.

 

페이스북이 일상인 전시 사회’, 누가 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지 배틀을 벌이는 것 같다. 최근 읽은 책의 반은 장르를 불문하고 저자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제임스 프라이는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마저 조작했다. 이 책에 씌여진 전부가 다 진실일까. (특히나 하우스 공포물을 연상시키는 귀신 이야기는?) 타인의 삶을 수단시하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고백 글은 작품의 수준과 별개로, 무언가 끔찍한 구석이 있다.

 

나는 마이클의 형인 게리나 게일렌 같은 이들을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

또한, 마이클 같은 비열한 인간은 더더군다나 만나고 싶지 않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ora 2016-05-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기사보고 절대 못 읽겠구나 싶었는데.. 정말 그런의도 였을까요? 자신의 엄청난 가정환경이 감당이 안 되어서 계속 뭔가를 남기는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시이소오 2016-05-24 12:17   좋아요 0 | URL
사형집행이후 마이클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롤링스톤ㅇㅔ글을 썼어요ㆍ
형의 죽음이
슬펐다면 절대로 할수 없는행동이 아니었을까요?


nomadology 2016-05-2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취향은 아닐거라 생각되어 읽어볼 생각자체를 안했는데, 시소님 리뷰로 대충은 느낌을 알겠네요.

시이소오 2016-05-24 13:43   좋아요 0 | URL
호평이 더많은 작품이
에요. 다른분들 리뷰도
참고해 보세요^^

coolcat329 2016-05-2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시이소님의 리뷰로 충분하네요. 정말 제 생각보다 충격이 크네요. 자기 고백을 상품화해서 썼다는 의견에 저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5-24 13:46   좋아요 0 | URL
호평이 더 많은 작품이니 직접 읽어보시구 판단하시는 건 어떠실런지요? ^0^

마녀고양이 2016-05-2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책이 있다는 걸 몰랐는데 시이소오님 리뷰에 바로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제가 좀 무섭기도 합니다 ㅠㅠ

시이소오 2016-05-25 00:15   좋아요 0 | URL
워낙 험한세상이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