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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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미스테리 작가 3인방은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할런 코벤이었다. 제프리 디버의 최근 작, <킬룸><옥토버리스트>, 할런 코벤의 최근 작 <미싱 유>를 읽고 뻘쭘해졌다.

지인들한테 추천한 작가건만 어떡한담, 이런 졸작을 쓰고 있으니.’

 

<살인자들의 섬>이나 <미스틱 리버>를 읽고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 <무너진 세상에서>를 읽고 고민에 빠졌다. 이제, 제프리 디버나 할런 코벤을 빼고 그 자리에 데니스 루헤인을 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 .

 

하드 보일드란 이런 것이구나! 소설은 주인공 조 커글린을 중심으로 한 템파 마피아의 영락을 다루므로 마리오 푸조의 <대부>를 연상시킨다. 조에게 살인 명령이 떨어졌다. 과연 조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조폭들 이야기는 결국 권력과 죄의식, 구원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옆집 저택에 개자식이 하나 살고 있어. 대출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집에서 내쫓았지. 빚을 갚지 못한 이유는 1929년 은행들이 이자 놀이를 하다 돈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저축도, 직업도 없는 이유는 고용주나 은행이 그 사람들 저축과 집을 날려버렸기 때문이고, 하지만 그런 이들을 집에서 내쫓은 자들? 그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아.....도둑과 은행가의 차이라면 내 눈엔 기껏 대학 학력이 전부야.”

바네사가 고개를 저었다.

은행가들은 거리에서 총을 쏘지 않아요, .”

정장을 구기고 싶지 않으니까. 바네사, 총이 아니라 펜으로 추악한 짓을 한다고 더 깨끗해지지는 않아.”

 

그렇다고 총으로 추악한 짓을 한다고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 조 커글린은 템파 럼주 전쟁에서 스물 다섯 명을 죽였다. ‘영혼이 무구하고 삶이 자유로워조나 디온이 조폭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죄와 슬픔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다른 유형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 뿐.

 

죄가 정말로 크다면 죄의식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할 때도 있다. 이따금 불법이 불법을 낳고, 그 일이 빈번해지면, 우주의 구조를 위협하고, 결국 그 우주는 물러나고 만다.

 

마피아 세계에서는 로마 시대 원로원을 연상시키는 커미션에서 모든 결정이 이루어진다. 가진 자의 이익에 누가 된다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어제는 그 놈이 죽었다. 오늘은 어쩌면 내 차례일지도.

 

어제 강남역 상가 화장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꽃다운 나이의 젊음이 사그라들었다. 갑질이 일반화된 사회, 갑질을 당한 을은 또 다른 병을 찾아 갑질을 부린다. 병은 또 다시......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에서 이런 사건들은 무한 반복될 것이다. ‘나는 남자니까 상관없어가 아니라 , 혹은 내 가족이 죽을 수도 있었어라는 인식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나쁜 페미니즘>을 읽으며, 이렇게나 많은 여성들이 육체적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남성이어서일까. <내 심장을 향해 쏴라>의 저자 마이클 길모어의 형 게리 길모어는 아무 이유 없이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살해했다. 훗날 게리 길모어는 살면서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사람이 없었지만 8학년 담임인 라이든 선생님에게는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라이든 선생님이 조금 더 게리에게 손을 내밀었더라도 게리는 살인을 저질렀을까. 억압된 것이 회귀된다는 건 진리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을 배제하고,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회에서 억압된 자들은 유령처럼,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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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벚꽃 2016-05-19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프리 디버와 할렌 코벤에게 실망 중이네요. 데니스 루헤인의 <무너진 세상>에서는 읽으려고 진작 준비해 두었는데... 아무래도 <운명의날>과 <밤에 살다>부터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서평 잘 읽고 거요^^

시이소오 2016-05-19 22:50   좋아요 0 | URL
저도 두 작품 모두 읽고싶네요^^

비로그인 2016-05-1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이해하는 갑질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시이소오 2016-05-19 23:33   좋아요 0 | URL
기득 권을 가진자들이 조금 만 양보하면 좋을텐데요 ^^;

2016-05-21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21 12:18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말씀을 들으니 데니스루헤인 책을 더 읽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비상경보기 - 절실하게, 진지하게, 통쾌하게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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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 벤야민, <일방통행로>

 

강신주는 양두구육(羊頭狗肉), 양의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이 난무하는 시대, 사이비가 판치는 시대에 철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신독재의 망령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친일파들을 그때 살려두었기 때문일까. 프랑스는 나치협력자 200만 명을 심판했다. 한국의 나치들을 어이할까.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은 필요하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

 

우리에게 적이란 누구일까? 친일파의 후예이며 친미파로 갈아타 국민들을 총칼로 살해한 독재정권의 잔당인 새누리당과 보수세력, 재벌들이다.

 

자화자는 말했다. ‘온전한 삶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이 둘째이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핍박받는 삶이 제일 못하다.’

 

다수의 99%가 소수의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언제까지 자발적 복종으로 착취당하며 살아야할까. 새누리당은 얼마나 자랑스러워할까. 한국이 세계 11연패를 달성했으니. 11년 연속 자살율 1! 삶의 척박함을 사회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전가시킨 탓이다. (세계 11연패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쓰레기 학자들과 언론인, 방송인들이 동원되었다. 이들 지식인들은 한 사람이 자살할 때마다 기뻐해도 좋으리라. 한 사람이 자살할 때마다 이들에게 공로상을 줘야하지 않을까.)

 

규제를 완화하는 게 자유인가?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사이의 칸막이를 없앴다. 초식동물의 자유란 이제 사냥감이 될 자유뿐이다. 진주의료원은 폐쇄되었다.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에? 언제부터 공공의료기관이 이윤을 남겨야 했지? 우리는 도로교통법이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막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이나 되는 일인가? 프랑스인들은 시위가 벌어지는 날이면 차를 집에 두고 직장으로 출근한다. 한국에서처럼 시위대 때문에 차가 막힌다고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차를 뒤집어엎을 것이다. 시위대 때문에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시위대 욕하는 후배가 있었다. 절교했다.

 

아직도 색깔론을 운운하는 사람이 있나? B.R 마이어스는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라는 책을 썼다. 전 국민의 새누리당 화, 그게 빨갱이다. 새누리당 색깔도 이제 빨갛지 않은가.

 

돼지같은 자본주의시대에 민주주의로 가는 일방통행로 같은 건 없다. 곳곳에 자본가들의 졸개들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 그렇다면 돌아가면, 즉 우회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막으면? 골목길로, 혹은 개구멍으로도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어느때보다도 지식인 혹은 학자들의 파르헤지아가 필요한 시대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 말이다. 우리 선배들은 단지 그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아니,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유신 독재 시대가 아니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 기득권의 비위에 맞춰 거짓말만 늘어놓는 걸까.

 

학계에서 강신주를 비판한다고? 자본가들 앞에서 꼬리나 흔드는 것들이?

양두구육, 지록위마의 시대에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오늘 518일이다. 아직도 5.18을 간첩이 일으킨 거라 말하는 정신 나간 것들이 있다. (이제는 고소당할테니 입조심 해라.) 정권이 바뀌는 대로 5. 18 관련자들 전부 색출해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김대중은 자신이 뭐라고 전두환을 용서한다고 풀어준 걸까. 수백만의 시민들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5, 18 학살 세력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 곤봉으로 얻어맞아 뇌수가 터져나가야 정신을 차릴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도청을 사수하다, 가족들 때문에 할 수없이 도청에서 도망친 분들, 부당함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든 시민들의 명복을 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말했던 적이 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와! 진리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된 순간이 비극이었다면,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순간은 바로 희극이었으니,...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

- 최인훈, <광장> 서문 중에서.

<세미나XX>에서 라캉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돌아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남자는 이기적이고 심지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강해져서 타자와 충돌하는 것이 바로 강박증이다.

그래서 스펙터클이란 "삶에 대한 시각적 부정"이라고 기 드보르는 자신의 주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강조했던 것이다.

자신의 주저 <팡세>에서 파스칼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 아니라, 허영에서 찾는다. 중요한 것은 허영의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인정 욕구라는 메커니즘이 자리 잡고 있다는 그의 통찰이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된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 않는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이 된다." 그의 주저 <부정변증법>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도르노는 ‘절박함’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절박함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철학을 표방한 것으로 위대한 형이상학자 장재의 이야기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나의 어머니로 부르며, 나는 이처럼 미미한 존재로 아득하고 광대한 천지에 태어나 살고 있다. (...) 사람들은 모두 나의 가족이며, 만물은 모두 나의 동료이다. (...) 천하에 피곤하고, 고달프며, 병들고 불구인 사람, 그리고 부모나 자식,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형제들 중에 넘어져 고통스러우먼셔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장재의 주저 <정몽>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벤야민이 역사철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술회하면서 "곁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본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제강점기나 혹은 유신 시절에 아무리 세련된 문물들이 범람했을 지라도 심지어 그것들이 그 시절 유물의 99퍼센트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해야만 한다. 그 모든 세련된 문물들은 결국 제국주의를 위해, 혹은 독재자를 위해, 아니면 자본주의를 위해 바쳐진 기념비일 테니까 말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타자가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한마디로 타자는 역지사지가 불가능해지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타자와의 제대로 된 관계는 당장 현재는 불가능하고, 오직 미래에 가능하기를 꿈꿀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하나의 삶의 형식이라는 사실은 고대철학의 세계에 관통하고 스며들어 있으며 지속되고 있는 파르헤지아라는 기능, 즉 용감하게 진실을 말하는 기능이란 일반 도식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철학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어떤 것들의 포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인생의 선택이다."

..파르헤지아라의 가치는 솔직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빛을 발한다. 이런 이유로 푸코는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에 "용감하게"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것이다.

영민한 현대 프랑스 사회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도 자신의 저서 <리듬분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미디어화는 대화를 지우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이다.

‘리스판스response’가 ‘반응’이라는 의미라면, ‘어빌러티ability’는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리스판서빌러티’는 ‘반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아니면 사물이든 간혹 우리는 타자의 고통이 뼈저리게 다가오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 순간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1992년에 출간된 시집 <희망의 나이>를 마무리하면서 시인 김정환도 말한 적이 있다. "사회성과 서정성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 정확히 말해 그것이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게 시의 문제는 사회적 서정의 수준을 높이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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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8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6-05-18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좋은리뷰도 감사하구요 강신주샘 강의 듣고파

시이소오 2016-05-18 20:37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

cyrus 2016-05-1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비 시대에 적응하는 사이비, 가짜 철학자도 있을 거예요. 요즘 시대에 뭐가 진짜인지 사이비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요. ^^;;

시이소오 2016-05-18 20:38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사이비가 워낙에 판을 쳐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힘든 시기네요. ^^ :

2016-05-19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19 09:42   좋아요 0 | URL
그랬나요 ^^;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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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2014년 최고의 한국 장편 소설 3편을 뽑자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 성석제의 <투명인간> 그리고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 (그러고보면 2015년 최고의 한국 소설은 뭘까? 언뜻 떠오르지가 않는다.뭐가 있는지요? )

 

한국 소설가 중 웃길 줄 아는 소설가는 성석제, 이기호, 천명관, 윤성희 정도가 아닐까. 그 중에서도 성석제와 이기호는 우열을 가르기 힘들만큼 웃긴 소설가다. 웃기다기 보다는 웃픈소설가라고 해야 할까. 성석제나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낄낄거리고 웃다보면 어느새 울고 싶어진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는 단편집이라기 보단 콩트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짧은 글이지만 웃픈세상사는 짧지 않았다.

 

검도 도장 관장인 승혁 씨는 중학생 아이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다. 중학생 아이가 소녀 시대 태연 양을 험담했기에 때렸다나. 형사가 합의를 종용하자 사랑이 어디 합의할 수 있는 거던가요?”라며 합의를 거부하는 승혁씨. <벚꽃 흩날리는 이유>

 

는 중동에서 삼십 년 살았다는 할머니 옆 좌석에 앉아 있다, 메르스가 걱정되어 스튜어디스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청한다. 할머니는 부천시 중동에 사신다고. <타인 바이러스>

 

편도 차비만 손에 들고 강원도 해수욕장을 찾은 세 젊은이들은 유흥비를 벌기 위해 주차장 알바를 시작한다. 사흘 만에 더위 먹고, 화상입어 지쳐버린 친구들은 알바를 그만두고 사장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데 숙박비, 식비 빼고 받은 돈은 세 사람 분 고작 팔 만원. 해변엔 사람들이 웃고 뛰어다니는데. <그녀와 마주친 어느 오후>

 

나는 자살을 하기 위해 고속도로 쉼터에서 번개탄을 피우려는데 주변에 정차한 트럭 기사가 라이터 불을 달라고 계속 귀찮게 한다. 자꾸만 귀찮게 하는 트럭 기사에게 나는 벌컥 화를 낸다.

 

저기 그러지 마시고요, 선생님. 여기 벤치에 앉아서 저하고 같이 고등어나 한 마리 구워 드시죠. 어차피 라이터도 저 주셔서 번개탄 붙이기도 어려울 텐데....., 그냥 허기나 채우자고요. 별도 좋은데.”

 

그의 말에 는 자신도 모르게 뚝뚝 눈물을 흘린다. <미드나잇 하이웨이>

(나도 모르게 나도 운다.)

 

는 아버지 산소 옆으로 어머니가 키우던 봉순이를 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다. 어머니 말로는 봉순이가 잠든 어머니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고. 봉순이가 엎드려 있던 곳엔 어머니의 양말 두 짝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사람한테 일 년이 강아지한텐 칠 년이라고 하더라. 봉순이는 칠 년도 넘게 아픈 몸으로 내 옆을 지켜준거야. 내 양말을 제 몸으로 데워주면서.” <우리에겐 일년, 누군가에게 칠년>

 

사업을 말아먹은 기준씨는 아들의 축구 실력에 희망을 걸고 아들을 유소년 축구단에 가입시킨다. 아들은 긴장해서인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아들은 공 한번 제대로 차지 못했다. 아들 말로는 자기 학교에서 축구할 땐 다섯 명 씩 하는데 -아들 학교는 전교생이 30명 이다. - 여긴 열한 명씩 한다고...애들이 너무 많단다. 그 말을 들은 기준 씨는 곧 울 것만 같은 심정이 된다. < 달려라 아들 >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1년 만에 해고당한 그는 어느날 tv를 보다가 또띠아 토스트를 해먹기로 하고 부엌에서 조리를 한다. 밀가루 반죽을 하다 소주병이 깨져버리고 새벽 네 시에 놀라서 깬 부모님이 거실로 뛰쳐나온다. 어머니가 만두를 해먹으려고 했던 거냐고 묻자 그는 또띠아를 해보려고....”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뽀삐를 왜 해먹어? 이 새벽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저 모든 것이 부끄러워졌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무언가를 다시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그는 괜스레 케이블 tv 속 셰프가 원망스러웠다. 누구에겐 초간단 요리가 또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음을.....아무도 그것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초간단 또띠아 토스트 레시피>

 

시골의 아버지는 노을 다방미스 심을 태우고 가다 오토바이 사고를 일으킨다. ‘는 아버지를 서울 병원으로 모신다. 그와 함께 병원 로비 프랜차이츠 커피 전문점으로 간 아버지는 다방 문화에 익숙해서인지 카운터 여자 아르바이트 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가씨도 한 잔 마셔.”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커피숍 바깥으로 나간 사이, 아버지는 테이블 앞에서 부르르 떠는 진동벨을 놓고 안절부절 어쩔 바 몰라한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는 진동 벨을 귓가에 갖다 댄다.

여보세요?” <입동전후>

 

가진 자 들의 자유를 부르짖는 신자유주의, ‘돼지 같은 자본주의세상은 철창이 무너진 동물원과 같다. 너나 나나 모두 다 가려워 보인다’. 가려운 데 긁을 수 없으면 어떡할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면 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볼까.

 

그냥 허기나 채우자고요. 별도 좋은데.” 


(우왕, 한강님의 맨부커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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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희망 2016-05-17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고의 장편에 소년이 온다와 투명인간이 있습니다
두 작품이 다른 무늬로 울게 만들더군요
왠만해선~~도 또 그런 종류구요

시이소오 2016-05-17 10:05   좋아요 2 | URL
한강님 맨부커상 수상으로 <소년이 온다> 한 백만 부 팔렸으면 좋겠네요.^^

CREBBP 2016-05-17 1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님 수상 덕에 소년이 온다도 전세계적으로 많이 팔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지고, 아직도 처살아서 오늘도 어김없이 주둥이를 나불대고 있는 살인마를 세상에 더 알리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시이소오 2016-05-17 12:29   좋아요 1 | URL
동감이에요. 살인마들 잔당들이 아직도 한 나라를 농단하고 있다는걸 전 세계인이 알게되면 한국 민주화운동도 좀 더힘을 얻을 수 있겠죠? ^__^

알레프 2016-05-1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네요 ^^

시이소오 2016-05-18 00:40   좋아요 0 | URL
이기호 작가의 장편에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재밌어요 ^^
 
라플라스의 마녀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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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정말 미스테리한 작가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읽고 나선 꼭 다짐의 말을 한다.

내가 또 다시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읽으면 성을 간다!’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왜 잘 팔리는지 도무지 미스테리다. 애초의 다짐을 잊어버리고,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계속 읽어보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나마 뒷이야기가 궁금하기는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 중에 뒷이야기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예상을 벗어났던 소설은 <몽환화>가 유일했던 것 같다.

 

옮긴이의 말에서 양윤옥 번역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작이면서도 태작이 드문 작가라고 말했다.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태작이 다작인작가가 있던가?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플롯, 자동 인형인듯한 영혼 없는 캐릭터, 인터넷으로만 검색한 듯한 빈약한 자료 조사, 안개처럼 뿌옇고 흐릿한 세부 묘사, 읽다보면 어느새 바보가 된듯한 멍청한 대사.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재밌다고 하는 걸까? 도덕 교과서에 나올법한 이런 대사들 때문일까?

 

당신은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중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인지 알려줄게.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고,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 아까 당신이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아니야. 이 세상은 몇몇 천재들이나 당신 같은 미친 인간들로만 움직여지는 게 아니야.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야.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사람들이 기욤 뮈소를 왜 좋아하는지 미스테리를 풀기위해 기욤 뮈소 전작을 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작도 불가능하다. 어림잡아 80편이다. 기욤 뮈소 전작 경험으로 유추해 보건대, 전작한들 시간낭비일 공산이 크다.

 

애덤 그랜트는 <오리지널스>에서 걸작을 창작할 비법을 제시했다.

작업량을 늘리면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태반이 태작이다. 그럼에도 잘 팔리고 개중에는 훌륭한 소설도 아마 있을 것이다. 작품의 질을 떠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성실성만큼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라플라스는 그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존재에는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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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6-05-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왜 잘 팔리는지 도무지 미스테리다...
이거 공감입니다. (저도 게이고 책 읽을만큼 읽었죠. 2/3 정도는 읽었을 듯...)
꼭 만화대본소 작품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쳐다도 안봅니다...^^

시이소오 2016-05-16 13:03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시는 분이 있다니 위로가 되네요.
저는 제 스스로가 `대중감각이 결여`된 인간이 아닐까 심히 괴로웠거든요. ^____^

:Dora 2016-05-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성을 간다면 어떤 걸로...? 비이소오 히이소오 기이소오

시이소오 2016-05-16 15:21   좋아요 0 | URL
글쎄요. 본명을 갈아야죠. ^^;

:Dora 2016-05-16 15:56   좋아요 0 | URL
아닌 거 알면서도 끌릴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시이소오 2016-05-16 16:16   좋아요 0 | URL
제 취향이 그렇다구요. 제 취향이 옳다고 주장하는건 아니에요. 히가시노게이고는 오히려 열등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들 재밌다는데 난 왜 재미가 없을까. 도대체 문제가 뭘까, 하고여.

cyrus 2016-05-1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이 다 읽는 책에 매력 한 점이라도 느끼지 못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남들이 다 읽는 책에 대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서평을 남길 때 망설여집니다. 괜히 악평을 남겼다가는 책 잘못 봤다는 의견을 들을까 봐 무서워요. ㅎㅎㅎ

시이소오 2016-05-16 17:24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글쓰기가 무섭네요. ㅎㅎ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푸른희망 2016-05-1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게이고의 성실성만큼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몇몇 좋은 작품이 있긴 해요...다만...... 아닌것도 넘 많죠..
그리고 가끔 가르치려고 들어서 맘에 안들기도 하구요...

시이소오 2016-05-16 20:51   좋아요 0 | URL
몇몇 좋은 작품 읽자고 80편을 다 읽어볼수도 없고, 저는 포기해야겠어요 ^^;

2016-05-17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7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나 같을 땐 정말 놀랄 수밖에 없어요! 히가시노 게이고에 기욤 뮈소 (저는 더해서 코엘료까진데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알수 없는 1인 여기 추가합니다 ㅎㅎ

시이소오 2016-05-20 23:46   좋아요 0 | URL
앗, 힌님도요? ^^ 이럴땐 찌찌뽕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21. 한국근현대사를 보는 눈

 

제국의 렌즈와 재현의 정치학

제국의 렌즈.

 

사진은 객관적이지 않다. 제국의 렌즈에 잡힌 조선인들은 그저 원주민에 불과했다.

 

윤치호가 본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윤치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와 기독교였다. 그는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기에 3.1운동에도 반대했다.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윤치호는 또한 독실한 기독교도로 하나님이 전쟁을 진보와 이성을 향한 수단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믿었다. 저자는 윤치호의 인간적 고뇌에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에필로그에 적었다고. 로쟈의 말대로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한윤형은 우선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 수용한다.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 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로 김구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말한다. 셋째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뉴라이트는 만한이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로 오히려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은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 기회주의자들의 역사였다고.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1997년 겨울 <한겨례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단다. 한때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이상하게 변해 사회와 나라를 걱정했던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인 풍경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한윤형에 따르면 그때와 달리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그는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문화대혁명의 실패에 대해 지젝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로자의 리스트11. 후쿠자와 유키치 읽기.

 

22. 불한당들의 세계사.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를 고발하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 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 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그러나 한편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악한 나라를 뽑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닐까. 일반인들이 미국의 사악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탓이다. 제발, 탐 크루즈는 미국이 아니다! 그런 사악한 나라에 전작권을 되돌려 주는 건 박근혜 정부의 사악함도 그에 못지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미 제국의 민중사>

<오만한 제국>

<미국민중 저항사1,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살아있는 미국 역사>

<권력을 이긴 사람들>

 

1권력 혹은 불한당들의 세계사,

1권력, 히로세 다카시.

부의 제국 록펠러, 론 처노.

 

미국의 재벌 가문 모건과 록펠러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조종했는지 추적하는 <1권력>은 말하자면 이 불한당들의 세계사.

시작은 미국의 남북전쟁이었다. J.P 모건은 무기를 판매하면서 6배의 차익을 남겼다.

 

1901년 당시 백수의 왕 사자라고도 불린 필적할만한 거대한 구렁이 아나콘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석유사업가 록펠러였다. 이 양대 자본가가 미국을 지배해왔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이다. 20세기의 첫 대통령 올린 매킨리부터 레이건까지 내각의 66개 각료 자리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중 290개의 자리, 79퍼센터가 모건 록펠러 연합의 수족이었다. 1983년 기준 미국 매출 10위권 기업, “1위 액슨, 2GM, 3위 모빌, 4위 포드, 5IBM, 6위 텍사코, 7위 듀폰, 8위 인디애나 스탠더더 오일, 9위 소칼, 10GE”순위를 진짜 주인으로 바꾸어 나열하면 “1위 록펠러, 2위 모건, 3위 록펠러, 4위 모건 록펠러, 5위 모건, 6위 모건- 록펠러, 7위 모건, 8위 록펠러, 9위 록펠러, 10위 모건이 된다.

 

베트남전에서도 미국은 패배했지만 모건 록펠러 연합은 떼돈을 벌었다.

 

로쟈는 매카시는 빨갱이 사냥꾼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파시스트였지만 모건과 록펠러 같은 투기꾼에게 빨갱이 사냥 자체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로 한건 빨갱이의 위협을 조장해서 전쟁을 고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 소유의 기업이 거대한 이익을 올리는 것뿐이다. <....>파시스트나 행동대원은 투기꾼들에 의해 교묘하게 이용당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라는 대목을 강조한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고 세상은 파시스트들이 아니라 투기꾼들이 움직인다는 게 히로세 다카시의 핵심적인 전언이라고. 남한사회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 재벌가 지도를 그려보면 10대 기업이 혈연관계로 거미줄마냥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나라를 농단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오만하고 저급한 제국,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 존 터먼.

 

저자는 미국이 세계를 망쳐놨다고 주장한다. 무려 100가지 방법으로. 우선 환경파괴. 부시는 온실 가스 배출량을 규제하자는 교토의정서에 사인하길 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이거나 거짓에 불과하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지만 지난 30년간 미국 가계 실질 소득은 늘어나지 않고 소득 불균형만 점차 심화되었다. 미국 기업 경영진의 봉급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475배에 이른다. 일본이 11, 영국이 22배인것과 비교해보아도 터무니없는 차이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다. 1제곱 킬로미터당 5천 톤으로 미국보다 8배 더 높다. 담배연기만 보면 죽을 듯이 피해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왜 자동차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엔 관대한 걸까.  자동차 매연보다 담배연기가 더 인간의 건강에 위험한 걸까. 혹은 지구에??

 

핵환산금지조약이냐 핵항의금지조약이냐, 뉴레프트리뷰2.

 

몰랐다. 이런 잡지도 있었는 줄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었다. 비핵국가들이 핵무기 개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국제사찰 아래 원자력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으나 프랑스조차 NPT가 열강들의 독점적 지위를 강화할 뿐이라면서 도의적 차원에서 협상을 거부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NPT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핵무장 해제로 나아가려면 NPT를 폐기해야만 한다는 게 <뉴레프트리뷰>의 결론이다.

 














로쟈의 리스트12. 미슐레 읽기.

 

여자의 삶

여자의 사랑

프랑스 역사

프랑스 대 혁명사.

 

23.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구조된 자들에 대해 말한다. ‘익사한 자구조된 자라는 이분법적인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 구별 불가능하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은 이렇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놨도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건 수용소 바깥 역시 수용소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우슈비츠 가자 용산.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라울 힐베르크.

 

이 당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이슬라엘은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부었고, 아이와 여자 할 것없이 수천 명의 팔레스탄인들이 학살당했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기념비적인 책이라고 한다. 힐베르크는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프란츠 노이만의 독일 정부론강의를 듣고 나치즘의 지배 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힐베르크는 자신의 홀로코스토론에 이를 수용한다.

 

그는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제들 자료를 선별하는 기록보관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 자신의 논문을 준비했다. 그가 맡은 자료는 책꽃이로 무려 8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를 저술, 발표한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의 집대성뿐만 아니라 두 가지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첫째로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구조를 밝혀낸다. 그것은 단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 정의, 재산 약탈, 그 이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는 이것을 파괴 과정이라 불렀고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 기계라고 불렀다. 그가 보기에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두 번째로 홀로코스트는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치즘의 파괴 기계는 사실상 독일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악은 일상화되었고 5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한다.로쟈의 말대로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 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관료제, 군대, 대기업, 나치당


 

내가 사는 세계의 이야기야. 거꾸로 가는 나라들. 판카즈 미시라.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후 1970년 중반부터 증가해온 전문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부상했다. 대부분은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능력을 소지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범법자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나랏돈을 챙기고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거 때마다 수행원과 AK 47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유세에 나다닌다.

 

RSS는 카스트와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힌두교인이 단결하여 힌두국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단체다. 간디를 암살한 것도 RSS였다. RSS가 인도의 거대 정당, 교육, 노동조합, 문학협회 및 종교단체까지 장악하고 있다.

 

판카즈 미시라는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과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을 읽고 자신이 잘 아는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고. 윌슨은 <감정교육>에 대해 인생에서 뭔가를 볼 시간이 있었던 사람만이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했다.

 

유러피언 드림은 어디에 있는가.

유러피언 드림, 제러미 리프킨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아메리칸 드림의 대안으로 제러미 리프킨이 제시한 것이 유러피안 드림이다. 무엇보다도 공동체 의식과 삶의 질을 중시하는 것이 유러피언 드림의 요체이며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비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비젼이 참혹한 암흑을 겪고 나서야 세워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870년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사망자는 184천 명 , 1차 세계대전에서 800만명, 2차 세계대전에서 4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졌다. 계몽주의의 유산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왜 이러한 참상이 벌어졌을까? 저자가 보기에 유럽은 거대한 묘지 위에 세워진 실험실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의 교전장이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나치즘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붕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뜻한다는 시각에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로쟈의 리스트 13. 인권의 발명 읽기

 

24.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철학, 사카이 다카시

폭력, 로제 다둔

폭력의 세기, 한나 아렌트

법의 힘, 자크 데리다

혁명이 다가온다. 슬라보예 지젝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에서 지적한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아벨을 살해한 카인이다. 성서를 따르자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가 공모한 역사고, 폭력의 역사.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과 권력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조르주 소렐은 <폭력에 대한 성찰>에서 무력force violence를 구분한다. 전자는 지배 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등의 억압적 폭력을 뜻한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폭력의 라틴어 원어인 비스vis’ 는 힘의 발휘, 폭력 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절적인 규정이기도 하다. 호모 비오랑스, 폭력적 인간이라는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폭력의 철학>에서 사카이 다카시는 비폭력이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며 반폭력anti- violence이라는 범주를 추가한다. 반폭력은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인 반면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p.s 메를로 퐁티, <휴머니즘과 폭력>

정면환 편, <프랑스지식인들과 한국전쟁>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

 

미국을 재교육해야 한다. 폭력의 시대, 에릭 홉스봄

 

홉스봄이 극단의 세기라 칭한 20세기는 물질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인류의 역량이 우주로까지 뻗어나간 세기였지만 동시에 유사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였다.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187명백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민간인의 피해는 제 1차 세계 대전시 5%였던 것이 요즘에는 아예 80~90%에 이른다고. 홉스봄은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단절로 네 가지를 꼽았다. 첫째, 농민 계층의 쇠퇴와 몰락, 둘째, 초거대 도시의 부상, 셋째, 의사소통 수단의 기계화, 넷째, 여성이 처한 상황의 변화.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은 유일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9.11이후 미국은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과대망상주의에 빠져서 가공할 군사력을 과시한 것 외에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고 경제적 허약함만을 노출시켰다. 역사학자로서 홉스봄은 미국의 현재와 같은 위세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전쟁광 미국을 말릴 순 없다 하더라도 미국을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게 홉스봄의 결론이다.

 

러시아 혁명, 그 가능성의 중심.

 

러시아 혁명, E.H .

러시아 혁명, 스티브 스미스

 

카는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비난했지만 러시아 혁명의 성과마저 부인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없는 것보다는 위로부터 혁명이 있는 게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스티브 스미스가 <러시아 혁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도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사악했다기보다는 무능했다. 따라서 저자는 러시아 혁명이 써낸 답안은 틀렸지만 문제까지도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정치신학 VS 정치철학, 사산된 신, 마크 릴라

 

인간이 전쟁에서 짐승도 하지 않을만큼 만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신을 믿기 때문이다. 짐승은 먹이나 번식을 위해서 싸울 뿐이지만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려고 싸운다.

 

저자는 인간을 짐승보다도 더 잔혹하게 만드는 것이 광신주의고 메시아주의적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열정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켜서 사고하지 않는, 이른바 정치신학에서 비롯한다.

 

기독교 정치신학은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이 신성한 연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미지에 의존한다. 그러한 이미지에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내민 철학자가 토마스 홉스다. <리바이어던>의 목표는 기독교 신학의 전체 전통에 대한 공격과 파괴였다는 것이 마크 릴라의 평가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주의 전통에서 종교가 이전처럼 정치를 위협하거나 광신주의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 신학은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무너진다. 더불이 그들이 꿈꾸었던 신은 사산된 신에 불과했다는 것이 폭로된다. 종말론적 구원사상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언제라도 악용되었다. 저자는 서구만이 정치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는데,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없는 망발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

 

테러리즘과 디오니소스, 성스러운 테러, 테리 이글턴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이글턴은 이러한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를 꼽는다.

 

테베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감옥을 나온 뒤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가? 이글턴은 <바쿠스>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p.s 에우리피데스 비극 <박코스의 여신도돌>

그리스 비극, <바코스의 여신도들>

천병희, <그리스 비극의 이해>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사이먼 골드힐,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25. 정치적인 것의 가장 자리에서

 

아르스토텔레스와 고소영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세계의 정치, 모제스 l 핀레이.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올바른 정치질서의 세가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다. 참주정은 왕정의 왜곡이고 과두정은 귀족정의 왜곡이며 민주정은 혼합정의 왜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는 단순하다.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넉넉한 계급, 가난한 계급, 그리고 그 중간을 형성하는 중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일반원칙으로서 절제와 중용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재산의 소유에 있어서도 가장 좋은 것은 중간 상태다. 중간계급의 시민으로 구성된 국가가 가장 잘 조직된 국가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의 가장 좋은 형태를 이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구성원들이 알맞은 재산을 갖는 것이다. 이 글은 2008년에 씌어졌다. ‘고소영’, ‘강부자인선 파문으로 알려져 있듯 명백한 과두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정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는데 그녀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의 핵심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 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human species나 도덕적 존재로서의 단수적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men이다.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때문에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미군 장갑차가 두 여중생을 친 사건을 불가피한 사고라고 보는 판단과 최소한 과실이라고 보는 판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판단이 더 공유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물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공통감common sense다 이때 공통감은 공적 감각public sense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감각community sense. 따라서 정치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의 상식, 즉 공통감을 일깨우는 일이며 공동체 감각을 북돋우는 일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정치적인 것의 귀환, 상탈 무페,

민주주의의 역설, 상탈 무페.

 

상탈 무페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의 특정 분야를 지칭하는 정치politics’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자체이기 때문이다. 무페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이는 독일 정치 철학자 카를 슈미트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이란 적과 친구를 가르는 것이다. 즉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가를 판별하고 구분하는 것이다. 한데 이것이 어째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이 되는가? 어떤 수준이든 간에 자기 정체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와 대립되는 타자가 먼저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력과 적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서 권력 관계의 실재를 인정하며 그것을 변형해나가려 노력하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프로젝트이다.

 

랑시에르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자크 랑시에르

 

1988년 미테랑과 시라크가 맞붙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은 재선에 임하면서 단 하나의 공약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시라크를 여유있게 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것은 약속의 종언’, 정치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새로운 사유에 대한 요청, 랑시에르와 아감벤

 

랑시에르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고, 아감벤은 정치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은 통치와 평등이라는 두 이질적인 과정의 충돌이다. 통치의 과정이란 사람들을 공동체로 조직하고 그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치안police을 가리킨다. 평등의 과정이란 몫이 없는 자들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그 실천을 말하며 달리 해방이라고 이름 붙여진다. 이 해방의 과정, 혹은 해방을 위한 소송을 랑시에르는 정치politics’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이란 이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이며, 몫을 갖지 않은 자들을 다시 셈하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이며 불화이다.

 

문제작 <호모 사케르>를 통해서 주권의 역설적 논리를 분석하고 수용소야말로 근대성의 노모스이면서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던 아감벤은 <남겨진 시간>에서 바울의 편지에 대한 치밀하면서도 유려한 문헌학적 주석을 통해 그의 메시아주의를 면밀히 분석한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수단. 조르조 아감벤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아감벤은 정치철학의 전통적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아감벤은 다른 의미의 생명을 그리스어 bios에서 찾는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한 마디로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즉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 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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