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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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아타루와 더불어 읽고 싶었던 에밀 시오랑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열광하며 읽었다면 에밀 시오랑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니체를 불어로 쓰면? 에밀 시오랑이다. 이 정도면 거의 표절인데. 시오랑은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시오랑은 이 책을 23살에 썼다. 나 역시 젊은 날,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열광했었다. 그때의 시오랑보다 겁나 나이를 먹은 나는 왜 아직 이런 책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절망을 넘어서자는 건가? 그런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84살까지 끈질기게 살진 않았겠지? 읽다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안 죽은 거야? 올가미에 목을 매달 것이지 펜을 붙들고 자빠졌냐?’ 자신의 글대로 생각대로 살고자한다면, 시오랑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자살을 감행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너무 잔인한 독설인가? 읽다보면 불끈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십대도 아닌 내가, 시오랑의 거친 사유에 마냥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죽도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윗 문장을 나침반으로 삼아야할까. 윗 문장과 모순되는 글을 만나더라도 계속 읽어가기 위해선? 

 

시오랑은 살기 위해선 서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 고통을 느낄 때,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서정적이 된다. 서정적이 될 때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고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정의 절정은 광기이고 정신착란이다. “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무의미함을 증명한다....나와 같은 인간의 존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삶이라는 흑점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윗 문장에 꽂혀, 시오랑을 읽고 싶었다. 굉장히 공감할만한 문장이다. 직접 책을 읽어보니 시오랑을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시오랑은 자기비하자기애의 수단으로 삼는다.

 

인생은 야만적으로 나를 짓밟고 억눌렀으며, 한창 날아오르는 나의 날개를 꺽어버리고, 내가 누릴 수도 있었을 기쁨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나의 열정, 속세에서 뛰어난 인간이 되려고 퍼부었던 미친듯한 에너지, 찬란한 미래에 느꼈었던 매력

 

시오랑의 책은 성공하지 못한 젊은이의 푸념, 세상에 대한 원망의 글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오랑은 신자유주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부활한 것일까. 시오랑은 나르키소스다. 자신을 느무느무 사랑한다. 이토록 사랑스런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멸절되어도 좋다. 시오랑은 니체보다는 히틀러의 자식이다. 젊은 시절 시오랑은 파시스트였다. 루마니아 극우민족주의 단체 철위대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만큼 호감이 가고 존경할 만한 동시대 정치인은 없다는 망언까지 저질렀다. 이 책에서도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모든 것이 분출되고, 붕괴되며, 떨어져 나온 땅의 파편들이 날아올라 먼지가 돼버리고, 풀들이 허공에 괴상한 무늬와 기괴한 뒤틀림과 훼손된 형상을 그리기를! 불꽃의 소용돌이가 원시적 힘으로 솟구쳐 세상을 휩쓸어버려 미물까지도 종말이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게 되기를! 형상이란 형상은 모두 사라지고, 세상에 있는 견고한 구조들이 혼돈 속에 모두 삼켜지기를! 모든 것이 미친 소란, 몰아쉬는 거친 숨, 공포와 폭발이 되기를! 뒤를 이어 영원한 침묵과 최후의 망각이 이어지기를! 그 마지막 순간 인간의 삶이 너무나 높은 강도에 도달한 나머지 후회, 갈망, 사랑,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느꼈던 모든 것이 폭발하여 폐허가 되기를!

 

나치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나치는 그러한 종말의 순간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 나치즘은 나르시즘을 기원으로 한다. 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시오랑은 허무주의자라기 보단 자기애에 빠진 일개 파시스트다.

 

나치가 니체를 오독했듯 시오랑 역시 그러하다. 니체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해석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 니체가 주장한 영겁회귀는 영원히 똑같은 삶이 반복됨을 가정으로 한다. 내가 지금 한 행위는 다음 생에 반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낙타처럼 노예로 살아야 할까? 좆선일보나 쳐보면서, 국민을 총칼로 학살한 자들을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뽑고,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의인들을 조롱하며, 수억 번을 그렇게 버러지처럼 살아야 할까? 

 

시오랑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자신만의 우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바다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워야 한다. 예술은 거짓말이 아니고 철학은 농담이 아니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무가치하지 않다. 역사를 모르므로 원숭이보다 못한 것을 대통령으로 뽑는 원숭이들로 가득한 거 아닌가.

 

이 책을 좋아한다면 자기 자신만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증거다. 절망에, 허무에 매혹되는 것은 자기비하가 아니라 자기애때문이다. 절망에, 허무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박학다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런 생각 없이 멍청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는 집어치워라!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거울속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저주받을 역사! 무엇에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죽음의 문제는 하잘 것 없을뿐만 아니라, 고통은 무익하고 빈약하며, 열정은 불순하고, 삶은 합리적이며, 삶의 변증법은 악마적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절망은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이며, 영원이란 텅 비어 있는 단어이고, 허무의 경험은 환상이며, 운명이란 농담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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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다른 느낌으로 읽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감의 토로가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을,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있고 어쩌면 딱부러지기까지 하게 글로 정리해놓을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생각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거든요.
시이소오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07:46   좋아요 0 | URL
다소 격렬한 리뷰였죠? 시오랑이 히틀러를 찬양했다는 사실에 격분하는 바람에 ^^;

보빠 2016-05-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평론가하셔도 되겠습니다. 공격할 포인트 찍고 논리 세우고 감성적으로 전달하고...직업이 글 쓰는 일인가요? 재미있는 리뷰였습니다

시이소오 2016-05-07 10:28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앎이 미천하여 부끄럽네요. 재밌게 읽어주셔 감사할 따름이네요 ^^

2016-05-09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5-09 10:28   좋아요 0 | URL
블로그 이웃님은 중2병 환자의 책이라고 혹평을 ㅋ

자주 찾아주셔 감사합니다 ^______^
 
비트레이얼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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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정도일줄이야. 이거 출판사 광고대로 영국, 프랑스 베스트셀러 맞나? 더글러스 케네디 최악의 작품. 망작도 이런 망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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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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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대한 개츠비>의 독후감에서 나는 <위대한 개츠비>가 자본주의를 낭만적 사랑이란 외투로 감싼 소설이라 비판했었다. 내 생각과 다른 관점의 책을 읽고 싶었다. 모린 코리건의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는 딱 그런 책이다. 작가의 논리에 설득된다면 언제든 나는 내 생각을 바꿀 뿐만 아니라, 저자 앞에서 바닥을 기어 다닐 수도 있다. ‘, 몰랐습니다. 개츠비는 정말 위대한 소설이었군요.’

 

모린 코리건은 책 전반부에서 피츠제럴드, 혹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여러 비판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반 유대주의? 맞다. 인종주의? 맞다. 국수주의? 맞다 ( ‘성차별동성애 혐오는 일단 미뤄놓자). 정치적으로 올바른 작품인지 시험을 치른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낙제다.

 

또한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모든 작품 중에서- 160편의 단편을 포함해 - <위대한 개츠비>만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다른 소설들은 쓰레기거나 그저 그렇다는데 그녀 역시 동의한다. 이후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의 주장 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을 다룬 미국 소설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고전들 중 인종 대신 계급을 중시한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개츠비가 데이지와 함께 행복한 결말을 얻지 못하고 물에 빠져 익사했으므로 계급이라는 주제를 다뤘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 (인용한 고전들 - <모비딕>, <허클베리 핀>- 을 단지 인종을 다룬 작품이라는 해석도 충격적이다) 나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다는 교수가 이걸 지금 논리라고 펼치는 건가?

 

만일 이 작품이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면 모든 계급의 캐릭터가 등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주요 인물들 중에 하층 계급 캐릭터엔 누가 있나? 개츠비? ? 데이지? 톰 뷰캐넌? 베이커? .......아무도 없다. 굳이 찾는다면 주유소를 경영하는 윌슨 부부인데 이들은 거의 단역 캐릭터에 불과하다. 언제부터 부자를 다루면 계급을 다루게 된 것일까? 하층 계급은 아예 계급에 끼지도 못한단 말인가?

 

오히려 <위대한 개츠비>는 계급보다는 인종에 대한 얘기다. 톰 뷰캐넌이 추천하는 책이 뭔가?

고더드가 쓴 <유색 인종 제국의 등장>이다.

 

요컨대 우리가 북유럽 인종이라는 거야. 나도, 그리고 당신도, 그리고 자네도, 그리고......” 조금 망설인 뒤에 고개를 약간 끄덕이면서 데이지도 포함시켰다. ....“ 게다가 우리가 문명을 이루는 데 들어가는 온갖 것들을 생산해 낸다는 거지. 과학과 예술, 그런 모든 것들을 말이야. 알겠나?”

 

톰 뷰캐넌은 유럽을 상징한다. 저자가 언급했듯 <위대한 개츠비>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상한 장면이 있다. 어느 날, 개츠비의 집에 뷰캐넌과 두 친구( “슬론이라는 남자와 이름 모를 예쁜 여자”)가 말을 타고 온다. 개츠비는 그들을 환대하고, 말이 없지만 차로 그들을 따라가겠다며 나갈 채비를 하기위해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남자들은 개츠비를 조롱하며 그를 기다리지 않고 떠난다.

 

저자는 피츠제럴드가 삶에서 겪었던 왕따에 대한 기억으로 이 장면을 해석한다. (그는 왕따당했으므로 피해자다.) 나는 이 장면을 귀족유럽에 대한 미국의 열등감으로 읽었다. ‘에 대한 열등감. ‘오만한유럽 앞에 희생자인척 하는 미국. 개츠비는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개츠비가 아무리 프랑스식 저택에 살지언정 그는 결코 유럽인이 될 수 없다. ‘올드 머니에 대한 뉴 머니의 열등감. 그렇다고 해서 뉴 머니가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치가 사악하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인을 학살하는 유대인이 선해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2. <위대한 개츠비>는 반미국적인 소설이다.

 

굳이 내가 반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반박해보자. 저자는 개츠비의 마지막 장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개츠비>에서 가장 심오한 순간에 피츠제럴드는 하나의 목소리를 소환한다. 이 목소리를 미국의 전지적 목소리로 부르자. 그것은 아메리칸드림을 거부할 수 없게 하고, 애끓게 하고, 또 자신만만해지게 하는 목소리다.”

 

3. <위대한 개츠비>는 하드보일드이고 느와르다.

 

난 이 주장에 동의한다. 처음 개츠비를 읽었을 때 내 소감이 딱 이랬다.

뭐야, 이거 장르소설이네, , 호갱 남주, 배신, 팜므파탈.

 

<위대한 개츠비>를 느와르로 해석하건 하드보일드로 해석하건 그렇다고 해서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4. <위대한 개츠비>의 익사 이미지에 매혹됐다.

 

저자는 대개의 장면을 물과 익사 모티브로 분석한다. 저자의 말대로 푹 젖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의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걸까? 나 역시 이 소설을 액체 이미지로 분석할 수 있다. , 알코올, 석유로. 그러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작품이 위대해지는 건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익사 이미지로 분석하면 그 소설은 위대해지는 건가?

 

5. 피츠제럴드는 왕따였고 고생했다.

 

피츠제럴드가 어린 시절 왕따였고 빚 때문에, 미쳐버린 젤다 때문에 고생했다고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피츠제럴드는 전체 미국인 수입의 10%에 달하는 돈을 한 달 동안 식료품 구입에 썼다. , 그의 1년 치 식비가 전체 미국인 수입과 똑같았다는 말이다. 빚을 안 질래야 안질수가 없다. 오늘날 그럴 수 있는 작가가 누가 있을까? 물론 고통을 객관화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배를 굶어가며 작업한 숱한 작가들 앞에서 피츠제럴드가 고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6. <위대한 개츠비>는 미래를 예언했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홀로코스트란 단어가 쓰였으므로 나치를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츠비의 집에 불이 꺼지고 파티가 끝난 점을 들어 대공황을 예언했다고 주장한다. 언제부터 평론가가 점쟁이가 된 것일까. 이 정도면 증상이 심각하다. 정신과 치료가 시급하다.


 

이 책을 통해 피츠제럴드와 개츠비를 둘러싼 여러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마치 위대한 개츠비 파쓰레기 개츠비 파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현재는 위대한 개츠비 파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시대다. 1925년도 <위대한 개츠비>가 출판될 당시엔 상황은 전혀 달랐다. 당시엔 고작 2만 부가 팔렸을 뿐이었고 대중들로부터, 비평가들로부터 완전히 잊혀졌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모리 코리건은 <위대한 개츠비> 부활의 역사를 추적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제 2차 세계대전 때문에 부활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출판한 스크리너브스 출판사의 편집진이 전승도서 편집진에 합류하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목록에 포함시켰다. <위대한 개츠비>20대의 군인들에 의해 부활한 셈이다. (주인공인 개츠비와 화자인 닉 캐러웨이 역시 군인이었다.)

 

이후 <위대한 개츠비>는 페이퍼 백 인기에 편승한다. 1950년대, TV의 등장도 한몫했다. 피츠제럴드의 장편과 단편들 다수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이후 피츠제럴드는 대중문화를 거쳐 빠르게 번져나갔다. 피츠제럴드 덕후인 브루컬리 교수도 피츠제럴드 부흥에 이바지했다. <위대한 개츠비>의 부흥의 정점은 2013년 개봉한 바즈 루어만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의 영화화가 아니었을까.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소설이라면 왜 애초부터 위대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왜 이렇게 <위대한 개츠비>푹 젖었을까’? 우선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직업적으로 너무 많이 읽었다. 50. 두 번째 이유가 결정적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엔 저자 자신의 성이 나온다. 4장 시작 부분. 캐리건 부부.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개츠비>가 나를 읽어내다니 짜릿하다.”

 

개츠비는 당신을 읽은 적이 없다. 이건 소설이다. 제발 정신 차려라. 모린 코리건은 ‘21세기 보바리의 현현인가. 저자의 지인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는다.

 

나는 언제나 개츠비가 자신의 내면을 채우 것을 잘못 찾고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틀렸나? 어떻게 생각해? 개츠비는 돈과 옷과 데이지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는 없지. ”

 

저자는 오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독해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개츠비의 특징이 사라진다. 모든 것을 거는, 프로메테우스처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다.

 

......이 작품은 계급 문제와 벌기와 쓰기의 궁극적인 공허를 다루는 가장 위대하고 위대한 미국 소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리고 실수로) 1920년대에 자리 잡기 시작한 소비사회를 찬양하는 소설로 회상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저자들의 말을 인용한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의 저자 아자르 나피시는 회고록에서 학생들과 <개츠비>를 읽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개츠비>를 두고 학생들은 재판을 연다. 학생들은 <개츠비>를 대악마 미국의 문학적 대리인으로, 미국과 관련된 모든 퇴폐적인 것들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아자르 나피시가 설득력있게 개츠비를 변호했다고 그녀의 말을 인용한다.

 

금전에 관한 꿈이 아니다. (개츠비) 본인이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한 상상이다. 물질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평가보다는, 돈이 꿈을 살려내는 수단이 되는 관념적인 국가에 대한 평가다. 여기에 아둔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아둔함이 꿈과 숫제 섞여버렸기 때문에 따로 구별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윗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을 음미해보면 전적으로 <개츠비>를 두둔했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개츠비는 아둔함이 꿈과 섞인 인물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낭만적 사랑과 소비지상주의가 구분할 수 없이 섞여있다. 그리고 내가 비판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드러내놓고 소비를 찬양하는 소설은 아니다. ‘낭만적 사랑아래 소비지상주의를 감추고 있기에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이찌되었건 사람들은 개츠비의 과시적 소비를 닮고 싶어 한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최근 들어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국가는 중국이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최근 들어 기업가들이 자기 창조와 과시적 소비의 짜릿함을 느낀 이 나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바즈 루어만의 영화는 2013년 중국에서 상영을 허락받은 해외 영화 서너 편 중 하나였다.

 

....중국 패션 브랜드 마사 마소의 다채로운 남자용 와이셔츠 광고 문구를 보라. ‘굉장한 가이 ’, 서양에서는 <위대한 개츠비>로 알려진 작품의 가르침을 기억하라며 쇼핑족들을 이끈다. 광고는 권한다. ‘잊지 말자, 주인공 개츠비는 명성과 부를 획득하자마자 나가서 밝은 색의 아름다운 셔츠를 산다. 그 셔츠는 데이지의 눈에 비칠 그의 이미지를 바꿔준다. 사실이다. 꽃무늬 셔츠를 입으면 그 옷은 당신에게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보여줄 것이다.

 

 

소설가 조너선 프랜즌은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피츠제럴드는 미국의 중요한 우화를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책을 읽으면 휘핑 크림을 먹는 기분이 들죠.”

 

휘핑 크림을 먹는 듯한 기분. 피츠제럴드의 글에선 아파트도 하얗고 긴 케이크 조각이 된다.

피츠제럴드 덕후인 저자 덕분에 작가에 대해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접해 나름 재미있었다.

한편으로, 저자의 아둔함과 꿈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밑줄 친 문장들.

 

"나는 밖에 나가서 부드러운 황혼을 헤치며 동쪽으로 공원을 향해 산책하고 싶었지만, 내가 나가려고 할 때마다 거칠고 공격적인 논쟁에 휘말려 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하지만 도시 높은 곳에 줄지어 선 우리의 노란 창문들은, 어스름 무렵 거리를 별 생각없이 걷던 사람이 쳐다볼 때면 자기 몫만큼씩 인간의 비밀을 나누어주었을 것이다. 나 역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궁금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안에 있으면서도 안에 없는 채로, 인생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에 매혹되면서도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보내준 책은 감동적이었어요. 당신의 세대에 내가 감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미래를 향해 비행하는 세대니까요....
내가 지금 당신과 다툴 문제는 하나뿐이에요. 개츠비를 진짜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 당신은 그가 인생 초기에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에게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 짧은 요약 말고요. 그랬다면 그의 상황이 분명했을 테고, 그의 마지막 비극도 진정한 비극이 되었겠지요. 조간 신문의 "사건 사고"기사처럼 보이지 않고요.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그러다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 -----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나는 낙담했습니다. (...) 그 시절 피츠제럴드도 형편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형편없어요. "

- 로버트 프로스트. 1946년 작가 모임에서.

"우리는 1930년대의 비평적 실수에 대해 과도하게 회개하면서 피츠제럴드의 책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때는 스타인 벡이나 제임스 T. 패럴을 선호했는데, 이제 우리가 더 이상 그들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이유로 그러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마치 소녀 같아 보인다. 우리가 외딴 집에 남겨두고 떠났는데 미처 돌아가기 전에 죽은 소녀. 가슴 아프기도 해라. 그래서 특히 감상적으로 이상화하기 쉽다. "

비평가 레슬리 피들러, <스콧 피츠제럴드에 관한 몇 가지 메모> 1951년

"나는 <개츠비>가 미학적으로 과대평가되었고, 심리적으로 공허하며, 도덕적으로 안이하다고 생각한다. 그 책이 품은 교훈에 대해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개츠비> 또한 신성불가침이 아니라면, 이들 중 아무것도 내게 중요하지 않다. "

- <뉴욕>지 서평가 캐서린 슐츠, 나는 왜 <위대한 개츠비>를 경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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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5-0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개츠비 ㅋㅋ 신선하네요!

시이소오 2016-05-06 09:24   좋아요 0 | URL
너무 운을 맞췄죠? ㅋㅋ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5-07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상전환
다양한 해석
문학은끝이없네요^^

시이소오 2016-05-07 06:28   좋아요 0 | URL
문학은 끝이 없죠 ^^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스르자 포포비치.매슈 밀러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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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서 가장 궁금했던 인물은 스르자 포포비치였다. 맞춤 맞게 포포비치의 책이 나왔다. 제목의 독재자를 나는 도살자의 딸박근혜, 혹은 새누리당으로 읽었다. 누가 뭐라든,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악마다. 논쟁할 가치도 없다.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을 대통령,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사람들은 언젠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올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인간이라면) ‘난 단지 몰랐어요.’라고 하겠지. 그날이 제발 빨리 오기만을 바랄뿐이다.

 

포포비치는 비폭력 저항운동 단체 오트포르!의 리더로서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셰비치를 끌어내린 장본인이다. 이후 그는 전 세계의 독재자를 끝장내도록 각국의 사회 운동가를 막후 지원해왔다. 벨라루스 청바지 혁명,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이란 그린 혁명, 레바논 백향목 혁명, 튀니지 자스민 혁명 등등.

 

포포비치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핵심전략은 유머. 재밌게, 웃기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1982년 폴란드 동부의 작은 도시 시비드니크 주민들은 TV를 들고 걸어 다녔다. 거짓 투성이 TV뉴스에 질린 시민들의 노골적이지 않은항의였다. 별로 재미가 없자, 시민들은 유모차 밀 듯 TV를 손수레에 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경찰로서는 딱히 법에 저촉되지 않았기에 체포할 수 없었다. (우리도 유모차에 TV실고 돌아다닐까)

 

시리아 활동가들은 이제 그만’, ‘자유라는 문구를 새긴 탁구공 수천 개를 경사진 거리 골목길에 쏟아버렸다

경찰 당국은 탁구공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나.

 

2012년 푸틴의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 시위를 불허하자 활동가들은 장난감 인형 시위를 주도했다. 레고 인형, 장난감 병정, 봉제 동물 인형, 모형 자동차 등. 장난감 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피켓을 들었다. 러시아 정부는 장난감을 비롯한 무생물의 시위도 법률위반이라고 대응해 국제적인 등신으로 등극했다.



 

1인 시위 외에는 시위를 불허하는 한국에서 본받을만한 시위 방법이지 않은가?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된 것도 비슷하네. 곰돌이 푸에게 피켓을 들게 하면 어떨까? 아이한테서 초를 빼앗을 만큼 멍청한 한국 경찰들은 푸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을까? 뽀로로, 루피, 크롱, 등등이 닭장차에 실려 감옥에 갇힐 지도 모르겠다. 유치원 아이들의 글로 청와대 게시판 불 날거다. “대통령 할머니 나빠요. 뽀로로를 풀어주세요.” 

 

크게 꿈꾸고 작게 시작하라

 

돼지 같은 자본주의를 끝장내기로 결심한 이스라엘 운동가 이치크 알로브는 커다란 대의명분을 이루기 위해 실행 가능한 아주 작은 부분에 집중했다. 이치크 알로브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코티지치즈의 가격을 문제시 삼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코티지 치즈를 정말 좋아한다고 한다. 과거 정부는 국민의 기본 식단이라는 이유로 보조금을 지원했지만 2006년 보수 정권, 신자유주의 정권은 보조금을 폐지했다.

 

알로브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코티지치즈를 썩게 내버려두자고 주장했다. 이에 초기에는 서른 명 정도의 친구들만이 온라인 서명에 동참했다. 한 블로거가 알로브를 인터뷰한 다음날 9,000명이 서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로브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우리로 치면 농심을 연상시키는 업계 1위 트누바는 가격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했다. 예상할 수 있듯 트누바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2주 만에 마트에서 할인에 들어갔지만 할인 폭은 크지 않았다. 시민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유제품 회사에서 시위대가 원하는 가격으로 할인에 들어갔고, 트누바 사장은 사임했다.

 

동성애자인 하비 밀크는 초기에 개똥 문제를 해결해 동성애 운동을 펼쳐나갔다.

 

비폭력 투쟁이론의 아버지진 샤프는 모든 정권은 몇 안 되는 기둥에 의해 유지되며, 따라서 기둥 한두개에 충분한 압력을 가하면 체제 전체가 곧 붕괴된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가들의 기둥이 무엇일까? 재벌들 아닐까? 예를 들어 삼성을 끝장내면 독재 학살정권들을 끝장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돼지 같은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해 집중해야할 사소한 것이 뭐가 있을까? 작게 시작할 만한 실행가능한 것. 또한 되도록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 통신료는 어떨까? 나는 왜 매달 35천원이 넘는 돈을 꼬박꼬박 통신 회사에 지불해야 되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요즘 핸드폰 안 쓰는 사람이 있나? 수도나 전기만큼이나 모든 국민들이 사용한다면 그렇게 비싼 요금을 내는 건 부당한 일이다. 통신회사들은 정치가를 돈으로 매수해 매년 수 십 조원을 국민들로부터 강탈해 간다. 도둑놈들이 따로 없다. 핸드폰 요금을 국유화 하던가, 예전의 전화 요금과 비슷한 정도의 최저 요금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노동당, 녹색당, 정의당 등은 국민들 99%가 찬성할 만한 정책을 계발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

 

몰디브는 독재자 압둘 가윰이 30년간 군림해왔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코티지 치즈에 비교할 만한 음식이 몰디브에선 라이스 푸딩이다. 활동가들은 라이스 푸딩 파티를 개최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 몰디브 민주화 운동은 결정적으로 비전이 없었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도 그러한 예이다. 독재자 무바라크를 축출한 이집트인들은 너무 일찍 샴폐인을 터트렸다. 박정희 도살자만큼이나 악랄한 전두환 살인마가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가 축출된 뒤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 도살자를 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즉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더 큰 대의를 목적으로 삼아야 했었다.

 

문제는 단결.

 

<비상경보기>에서 강신주는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숱한 선배들의 민주화운동으로 19876.29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1988, 국민들은 또 다른 악마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 당시 만일 야권이 단일 후보를 냈다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 당시 나는 투표권이 없는 십대였지만 선배들은 얼마나 통탄의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측면으로 보자면 김영삼, 김대중도 역사 앞에, 국민 앞에 죄인이다.

 

여기서 퀴즈? 올해 20대 총선, 안산 단원 갑, 단원을, 서울 중, 성동을, 동작 을의 공통점이 뭘까? ......맞다. 새누리당이 당선된 지역이다.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야권에서 단일 후보가 나갔더라면 새누리당은 절대 당선될 수 없었던 지역구다. 야권이 단결했다면 안산 시민들이 세월호 아이들을 외면한 파렴치한으로 몰릴 이유도 없었고, 동작구 구민은 쌍놈의 국민으로 욕먹을 필요도 없었고, ‘국민 쌍년나경원같은 버러지가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단 말이다. (왜 이년아, 주어 없는데. 어쩔거냐, 이 쌍년아. 목적어도 없다. 개 같은 년아.) 


20대 총선, 이런 투표구가 서른 곳이 넘었다. 

 

2010년 벨라루스에서 우리나라 1988년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 루카셴코에 대항한 후보가 아홉명이었다. 결국 독재자인 루카셴코가 당선됐다. 밀로셰비치를 축출하기 위해선 다양한 이익집단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된 슬로건이 필요했다오트포르!가 내세운 슬로건은 '그는 끝났다'였다. 

 

포포비치는 뉴욕 월가의 오큐파이 운동의 실패에 대해 잘못된 슬로건을 이유로 뽑는다

월가를 점령하자가 아니라 ‘99퍼센트였다면 어땠을까?

 

나는 비폭력보단 폭력 시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젊은 날의 네루다나 게바라처럼. 히친스는 그의 책 <논쟁>에서 세 사람에게 헌사를 바친다. 모하메드 부아지지, 아부압델 모남 하메데, 알리 메흐디 제우. 이들은 튀니지의 노점상, 이집트의 식당 주인, 리비아에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의 이름이다. 튀니지 노점상은 소인배 관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자스민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이집트의 식당 주인은 정권의 부당성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범한 가장이었던 알리 메흐디 제우는 카다피 정권에 맞서 자신의 차에 석유와 폭탄을 싣고 바스티유 감옥같은 카디바 기지의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기까지 숱한 선배들이 자신의 몸을 던지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분들의 순교에 힘입어 수많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하여, 폭력 시위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을 읽고 포포비치에게 완전히 설득 당했다. 비폭력 시위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것도 유쾌하게. 자세한 이유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길.


책의 피날레는 감동적이다.

 

포포비치에게 영웅은 그의 형 이고르였다고 한다. 포포비치가 10대 일 때, 이고르는 영국 록 뮤지션 피터 개브리엘의 음반 한 장을 건네며 <비코>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비코는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에 일생을 바치다 살해된 남아공의 활동가를 기린 곡이다. 이후 개브리엘은 포포비치의 영웅이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후 밀로셰비치를 쓰러뜨린 세르비아 혁명 기념일인 2013105, 피터 개브리엘이 베오그라드 무대에 섰다. 모든 연주가 끝난 후, 개브리엘이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13년 전 오늘, 이 나라에는 국민의 권리를 위해 용기를 내어 일어선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젊은이들은 그들이 배운 것을, 그들의 지식을 캔바스와 함께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전달 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의 많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믿는 것을 위해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됐다고 믿는 것과 싸울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용기 말입니다. 한 젊은이가 남아공에서 바로 그렇게 용기를 내어 행동했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스티븐 비코입니다. ”

 

멤버들이 다시 무대로 되돌아왔고, <비코>가 울려 퍼졌다. 포포비치의 무릎이 후들거렸다. “그리고 세상의 눈이 지금 지켜보고 있다라는 가사에 이르렀을 때, 개브리엘은 불끈 쥔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며 관중들을 향해 오트포르!식 인사를 했다. 오천명의 관중들이 주먹을 들어올리며 비코를 따라 불렀다. 노래가 끝났을 때 개브리엘이 마지막 메시지를 던졌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그리고 개브리엘은 무대 뒤로 사라졌다.

마이크를 관객에게 돌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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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16-05-0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말하기도 지침 그렇게 멍청하기도 어렵다 생각함 주어 목적어 없이 국제등신 되는 걸 정말 정말 보고 싶네요

99가 찬성할 작은 정책들을 쉼없이 내놓는 일 ㅡ 작은정당이 힘쎄게 나설수 있는 작은 일은 생각해보면 정말 많을꺼 같은데 왜 못하거나 안 하는걸까요?

99중의 하나가 되어 참여하기엔 뭔가 비장하고 무섭고 불이익을 받을꺼같아 선뜻 나서지 못하는거같아요ㅡ. 정말 리뷰에서처럼 장난처럼 유쾌하게 정치에 참여하는지 모르게 참여하는 방식을 개발(?)해 낸다면 과연 우리도 기펴고살수 있는 나라 구경 할 수 있을까요? 아아 ㅡ 정말

일단 리뷰만으로 재미난 책이네요 무지무지 !

시이소오 2016-05-05 08:59   좋아요 0 | URL
포포비치를 수입할까요? 얘기하다보면 뭔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아요.
포포비치 오라고 하면, 달려올 듯 합니다. ^^

2016-05-05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05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의 결기가 느껴집니다.

시이소오 2016-05-05 15:47   좋아요 0 | URL
차에 폭탄실고 청와대 들이받는게 속 시원할텐데 아니네요. ㅋ

samadhi(眞我) 2016-05-06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두고 한 두번 읽다 말다가 서평을 계속 미뤄뒀습니다. 요즘 계속 무기력해서...
속이 후련한(?) 글이네요. 이 나라 정치 상황은 갑갑하지만 이 책처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계속 모여 논의하고 머리를 쥐어짜고 함께 아다다 할매를 끌어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이소오 2016-05-06 08:34   좋아요 0 | URL
으, 벌써 세번째 댓글. 왜 자꾸 댓글 입력이 안되는지. 아무튼 힘내세요 ^^

samadhi(眞我) 2016-05-06 08:37   좋아요 0 | URL
어쩌면 제가 글을 수정하는 바람에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시이소오 2016-05-06 08:40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로 뜻이 맞는 여러 사람들이 고민한다면 보다 창의적인 시위 방법도 고안해낼 뿐더러 `돼지 같은` 자본주의도 끝장낼수 있을 것 같네요 ^^

alummii 2016-05-0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e is over. wahaha ...you crack me up ....속이 다 후련하네요..ㅋㅋ

시이소오 2016-05-06 10:06   좋아요 0 | URL
`그것`은 끝났어요 ㅎㅎ ^^
 
서평 글쓰기 특강 - 생각 정리의 기술
김민영.황선애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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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서 내가 쓰는 리뷰라는 게 독후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감상이 위주다. 이 책의 지은이들과 달리 내가 생각하는 서평가란 일종의 지도 제작자다. 로쟈 이현우 씨가 대표적이다. 소개하는 책이 위치하는 시간적, 공간적 위도와 경도를 제시할 것. 서평하는 책의 강도(剛度)를 제시할 것.

 

따라서 한 편의 서평을 쓰기 위해선 이미 숱한 독서의 경험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기준에 따르면 아직 나는 서평을 쓸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애초부터 서평을 쓰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저자들은 리뷰와 비평의 차이를 논하면서 리뷰어들이 공짜 책을 받고 리뷰를 쓴다고 지적한다. 단 한 번도 공짜 책 받은 적 없는 나는 리뷰어가 아닌 셈이다. 비평가에게 타협이 없는 만큼 독후감에도 타협은 없다. 아니, 문학 권력에 타협하는 주례사 비평가들이 넘치고 넘치는 현실을 고려하자면 오히려 독후감만이 독보적으로 자유롭다.

 

공짜 책 받고 리뷰어들이 쓰는 거짓 리뷰에 얼마나 속았던가.

겨우 몇 만원에 영혼을 팔다니!

거짓된 리뷰를 읽느니 진심으로 쓴 독후감을 읽고 싶다.

 

서평가 로쟈 이현우 씨는 훗날엔 비평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십년 후쯤에 나는 서평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메모한 구절

 

25.세상에는 무리해서 끝까지 책을 읽고도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출력을 전제로 입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이라면 아무리 입력해도 좀처럼 몸에 익지 않을 것이다. 출력을 하려면 입력과 동시에 가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것을 제삼자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을 전제로 듣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키워드와 핵심에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 입력할 때 어떻게 출력할지도 의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사이토 다카시, <1분 감각>

 

43. <기다림>의 작가 하진은 명문장가로 유명합니다. 중국인임에도 완벽한 영문소설을 쓰는 작가죠.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문장은 담백하며 유려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하진의 작품을 담당했던 편집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팬이라는 제게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문장을 100번 쯤 고친다고 합니다.”

 

151. 퇴고를 글쓰기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퇴고는 처음이면서 중간이면서 마지막이면서 그 모든 것이다.

 

- 안도현,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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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5-05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몇 달 전에 서평과 독후감의 의미에 대한 글을 써서 회원분들의 엄청난 반응에 호되게 당했습니다. 다시 꺼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책 줄거리를 소개했거나 책에 대한 감상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록한 글이라면 서평, 독후감으로 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

시이소오 2016-05-05 19: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뭐라고 하셨길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