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 그는 누구보다 안토니오 그람시로부터 이론을 배웠고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주로 게오르그 짐멜로부터, 특히 그의 갈등 이론보다는 정신적 삶Geistesleben’에 대한 개념과 그의 생철학Lebensphliolsophie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인의 이 생철학 니체보다는 루트비히 클라게스와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생철학 특히 그의 삶의 형식Lebesformen’ 개념은 바우만에게 많은 이론적 주제와 이론화의 형식들을 제공했다.

 

p12. 바우만이 그려내는 사고의 지도 위에서 우리는 그람시와 짐멜의 철학 또는 사회학적 견해들뿐만 아니라 그가 경애하는 철학자인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적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바우만에 따르면 20세기 최고의 윤리학자인 레비나스의 통찰들은 타자의 인격과 존엄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의 생명을 구하기까지 하는 기적에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그는 사회학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며,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고 말했다.

 

p13. 비타우타스 카볼리스는 사회학과 사회과학 전반이 멜로디를 잃은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바우만은 이와는 반대 사례이다. 그의 사회학은 음향을 방출하고,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응시이다. 당신은 눈을 돌리며 응답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탐색하는 시선이나 주위의 물체들을 흡수하는 소비하는 시선과 달리 바우만의 시선은 윤리적 거울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p14. 바우만은 보는 자를 보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며 말하는 자에게 말한다.

 

바우만 이론의 핵심 개념인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ity’에 대해 그는 <액체 근대> 2012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한때 탈근대라고 (그릇되게) 일컬어진 그리고 내가 더 명료하게 유동적 근대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것은 변화만이 불변한다는, 불확실만이 확실하다는 점에 대한 점증하는 확신이다. 백 년 전에 근대적이다라는 말은 완벽의 최종 상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최종 상태가 보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향상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p15. 이들의 일대기는 근대 경제 구조의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자본주의의 개척자들, 기업가들, 초기 근대 미술의 천재들 등의 일대기가 아니라 화형에 처해진 이단자이자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메노키오 같은 사람들의 일대기이다. 역사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런 말 없는 단역배우들은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불안, 애매함, 불확실, 불안정 등에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p18. 기술은 당신이 방관자로 있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나는 해야만 한다.”로 변질된다.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나는 해야만 한다. 딜레마는 허용되지 않는다.

 

p19.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비밀을, 즉 이야기하거나 공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없앰으로써 사생활을 식민지화하려는 욕망은 새로운 악의 두 가지 표현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대기, 내밀한 이야기, 삶과 경험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무감각과 무의미의 한 증상이다.

 

p21. 악의 상징적 지리학은 정치체제의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심리 상태, 문화, 민족성, 사고방식, 의식의 경향 등에 스며들어 있다.

 

악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악은 전쟁이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P24. 이것은 자신이 의무를 이행하는 도덕적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어느 낯선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악, 유동적 근대에 존재하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의 사악함이다.

 

...... 이런 자에게는 통계가 실제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하며, 설령 그가 인류를 위해 발언한다 해도 그에게는 한 국가의 크기와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그저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유동적 근대의 새로운 사탄이다.

 

...이 유동적 근대가 평범함으로 변모시킨 것은 무력한 선이 아니라 악 자체이다. 오늘날 가장 불쾌하고 충격적인 진실은 악이 연약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철학자, 문학가의 저작을 통해 알던 악마나 악령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악은 강력하지 않으며 널리 흩어져 있다. 불행하게도, 슬픈 진실은 이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모든 인간에게 잠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악의 잠재력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문화, 인간관계 등으로도 이런 상황과 사정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악은 허약함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동시에 허약함이기도 하다.

 

악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는 운이 좋았다. 오늘날 우리는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장벽이다.

 

P26. 검열의 새로운 형태들은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가학적이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언어와 아주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언어는 특히 익명 댓글에서 언어적으로 난무하는 얼굴 없는 증오심, 가상 변소에서 태연하게 싸지르는 배설물, 비할 데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인간적 무감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예민한 지각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의 위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단역배우, 통계적 개인, 통계적 단위, 군중, 유권자, 보통 사람, 여러분 등에게도, 즉 기술관료들이 구성한 그 모든 자기 기만적 관념에게도 인간이 존엄하고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다는 인식을 돌려주어야 한다.

 

인간에게서 얼굴과 개성을 빼앗는 것은 이민자들이나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주로 그들 안에서 위협을 찾아내려 하는 것만큼이나 사악한 짓이다. 이 악은 정치적 올바름(실제 상황의 희화로 전락하곤 하는) 관료화되고 강제적인 관용을 통해 극복될 수 없다.

 

P27. 이 책은 파편화, 원자화, 그리고 그에 따른 감수성의 상실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귀속감의 재발견 가능성에 관한 대화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 인류와 인류의 도덕적 상상력의 탈도덕화가 놓은 덫과 많은 위협에서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새로운 윤리적 전망에 관한 대화이기도 하다.

 

세계화는 우리가 피신하여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땅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또는 무의미, 기준의 상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불감증과 감수성의 상실에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개인화라는 무감각, 도덕적 고통을 마취하는 소비의 굴레

 

그러나 고통의 이런 경계, 경고, 예방 기능은 유기적이고 신체적인 현상에서 인간관계의 영역으로 옮겨온 불감증이라는 관념에 도덕적이라는 한정사가 붙으면 거의 잊히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인간의 공동생활과 공동체의 생존력에 무슨 문제가 생기려 한다거나 이미 생겼다는,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조기 신호를 제때에 탐지하지 못한다면, 위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너무 오랫동안 경시될 것이며 마침내는 공동체의 자기방어를 위한 토대로 작용할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피상적이고 형식적이며 허약하고 분열적으로 변하여 못쓰게 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적으로 조합되고 개편되거나 해체되며, 네트워크의 유일한, 그러나 매우 변덕스러운 기초는 이것을 지속하려는 개인의 의지이다. 그러나 관계는 두 개인이 만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불감증해진 개인은 즉 어느 타자의 안녕에 대한 책임을 내팽개칠 권한이 있고 또 그러길 원하는 개인은 좋든 싫든 동시에 자신의 도덕적 불감증의 대상이 지닌 도덕적 불감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순수한 관계는 해방의 상호성보다는 도덕적 불감증의 상호성을 예고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둘의 모임은 더 이상 도덕의 온상이 아니다.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탈도덕화는 소비자와 상품의 관계를 모범으로 삼아 전개되며, 이것의 효과는 이 관계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잘 이식할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그러나 만약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어두운 면이 합리성과 문명의 허약안 덮개를 파괴하는 절대적으로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관철된다면, 20세기 서유럽 문학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근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며 익명적이고 비인격화되었으며 인간의 책임과 합리성을 별개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분할하고 사회를 원자들로 파편화하며 자신의 초합리성을 통해 자신을 보통 사람들에게 불가해하게 만드는 근대성이다.

 

요컨대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종말론적 예언자가 미하일 불가코프라면, 중유럽에서 이에 상응하는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카프카와 로베르트 무질일 것이다.

 

유동적 시대에 평범한 악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면에서 이것은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만남>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신들은 목마르다>의 주인공에 관해 이야기 함녀서 강조한 것과 비슷하다. 즉 젊은 화가 가믈랭은 프랑스 대혁명의 열광적 지지자가 되지만, 그는 혁명이나 혁명의 발기자인 자코뱅 당원들과 무관한 상황이나 관계 속에는 전혀 괴물이 아니다. 쿤데라는 가믈랭의 이런 정신세계를 진지함의 사막또는 유머가 없는 사막으로 멋지게 비유하면서 가믈랭이 단두대로 보낸 그의 이웃이자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인 브로토를 그와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예의 바른 사람 안에 괴물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과 눈,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는 실존적 상황 대신에 인간의 삶과 인격이 경험적 데이터와 증거 또는 통계로서 소비되는 포괄적 분류 체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부터 조지 오웰의 소설까지 악은 늘 존재했다, 다른 모습으로

 

오웰의 비전은 서구보다 동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 비전은 무엇보다 동구 유형의 전제정치가 서구로 쇄도하여 서구를 지배, 정복, 노예화한 이후에 서구가 띠게 될 모습의 예상이었다. 그것의 핵심 이미지는 한 인간의 얼굴을 땅바닥에 짓이기는 한 군인의 가죽 장화와 같았다. 반면에 헉슬리의 비전은 명백히 서구적 창조물인 임박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선제 반응이었다. 그것의 중심 주제는 힘을 빼앗긴 인간들의 농노 신분에 관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 그것은 몽테뉴의 주장이 맞다면 에티엔 드 라 보에티가 300년 전에 만들어낸 용어인 - ‘자발적 복종이었다. 즉 채찍보다 당근을 더 상요하고 폭력, 노골적 명령, 가혹한 강제 대신에 유혹과 매혹을 일처리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유토피아 전에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는 더 큰 선 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인간의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12년에 처음 발표된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를 읽는 21세기의 독자들은 아마도 당혹감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가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세계 앞에 걸린 커튼을”, 이전 해석들의 커튼을 찢어발겨” - 쿤데라의 견해에 따르면 소설가의 사명이자 모든 소설 쓰기의 소망인 - “위대한 인간적 갈등들을 선과 악 사이의 투쟁으로 순진하게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 그것들을 비극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독자들을 위해 아직 엮이지도 않은, ....“세계 앞에걸리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는 커튼을 자르고 찢는 데 사용할 도구를 고안하고 시험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나톨 프랑스가 펜을 내려놓고 완성된 소설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던 순간에 볼셰비즘’, “파시즘심지어 전체주의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어든 다른 언어든 사전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이름들은 어떤 역사책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에밀 시오랑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로베스피에르와 마라의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젊은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불운이 그들의 운명이다. 불관용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은 그들이며 그 교리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들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젊은이가 그럴까? 그리고 오직 젊은이들만이 그럴까? 그리고 오직 로베스피에르나 스탈린의 시대를 살았던 자들만이 그럴까? 이 세 가정은 모두 명백히 틀린 듯하다.

 

사생활에서 마주친 악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착하고 평범하며 호감이 가는 미국의 처녀 총각들은 괴물도 아니었고 변태도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했거나 추측, 억측, 상상, 공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고향에 사는 이웃들은 그들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그 매력적인 처녀 총각들이 아부 그라이브 고문실의 스냅사진에 찍힌 괴물들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오늘날까지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인이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나치 유혹자들 가운데 진짜 천재는 히믈러였다. 왜냐하면 그는 괴벨스처럼 보헤미아 출신도 아니었고 슈트라이허처럼 성도착자도 아니었으며 괴링 같은 모험가, 히틀러 같은 광신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같은 미치광이도 아니었지만, 대중의 절대다수가 흡혈귀나 가학성 변태성욕자가 아니라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대중을 조직해 총체적인 지배 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돈스키스 . 이것은 집들의 내부 사정을 폭로할 힘을 지닌 악마가 등장하는 17세기 소설인 루이스 벨레스 데 게바라의 <절름발이 악마>나 동일한 주제의 변형인 알랭 르네 르사주의 소설 <절름발이 악마>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사람들의 사생활과 비밀을 빼앗으려는 악마 같은 힘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제 우리의 자기폭로 시대에 고의로 흔쾌히 자신을 노출하는 리얼리티 쇼나 그 밖의 유사 행위와 뗄 수 없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와 문학적 상상이 어우려 있는, 악마에 대한 이런 관념은 근대 유럽 예술의 배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토비트서>에 나오는 여자 악마 아스모데아를 묘사한 고야의 그림 <아스모데아>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악마를 어떻게 환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에 자네는 한마디로 말해 사생활이 죽었다고 선언한 듯하다. 우리는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파놉티콘 기획부터 사생활의 식민지화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우리 시대에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이 당한 패배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정치적 자유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협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리얼리티 쇼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것이 새롭게 획득된 우리의 안정이자 기회인 것처럼 이것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은 악마를 찬양하는 우리의 새로운 형태인가? 이것은 악마에 대한 유동적 찬양인가?

 

바우만.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 우리가 손수 만든악마이다. 이것은 널리 흩어져 있고 처음부터 규제와 인격에서 자유로우며 우리 같은 개인들로 민영화되고 자회사로 분할될운명의 무수한 국지적 행위자들을 낳는 인간 무리 전체에 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다.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

 

그리고 이런 것들의 전체적인 귀결은 고백실 내부에 마이크가 설치되고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 사회. 고백 사회의 성원 자격은 모두에게 솔깃하게 열려 있다. 그러나 밖에 머무르려면 중벌이 따른다. 가입을 망설이는 자들에게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최신판인 나는 관찰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교훈이, 나아가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는 식의 교훈이 뒤따른다.

 

돈스키스. 우리는 동유럽 작가들로부터 치명적인 망각이 동유럽과 중유럽의 저주라는 사실을 배운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이고 천재의 작품이자 경고의 작품이며 한 여성이 정신병원에 갇혀 괴로워하는 일생의 연인인 한 소설가를 구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다는 파우스트식 이야기이기도 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미하일 불가코프는 악마의 힘에 어쩌면 결정적인 한 측면을 추가로 부여한다.

 

이 악마는 비인격체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위축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서 그의 기억을 빼앗을 수 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과 주위 세계에 대해 어떤 비판적인 물음도 던질 수 없게된다. 그들은 개성과 교제의 힘을 잃음으로써 기본적인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른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근대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들 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는 이 악마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장소, , 기억, 소속에 대한 감각을 빼앗는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시인 이반 베즈돔니는 악마와 신의 존재,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어둠과 빛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역사와 보편적 인간성까지 부정하게 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데, ‘집 없는 자를 뜻하는 러시아이기도 한, 베즈돔니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집 없는 자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성이 집없는 자를 뜻한다는 사실은 불가코프가 장소의 상실, 집 없음, 망각을 급진적이거나 전체주의적 형태의 근대가 지닌 악마 같은 측면으로 간주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베즈돔니는 완전한 분열, 기억의 상실, 삶과 역사의 통일적 원리들을 해독할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의 토대 자체를 상실하고 만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의 정신병은 기억 및 감수성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악마가 내린 처벌의 일부이다.

 

기억 역사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유대계 리투아니아 작가인 그리고리 카노비치는 기억과 감수성의 상실을 악마가 사회적 대변동, 재난, 전쟁과 참사 동안에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의 불가피한 한 측면으로 기술한다. 소설 <악마의 주문>에서 그는 서사시적인 화법을 사용해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대학살 동안에 자행된 범죄들을 고의로 잊는 것을 악마가 행한 작업의 한 측면으로 묘사한다.

 

텅 빈 양심, 망각, 잊으려는 의지는 자산들에게 자행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는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결정타이며 인간의 기억과 감수성을 박탈하는 악마 같은 행위이다.

 

근대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몰살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최대한 통제할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의 기억과 집합 정서도 마찬가지다. 오웰의 <1984>에서 보듯이 역사는 오로지 기록과 문서를 통제하는 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개인들이 당이 허락한 방식대로만 존재해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기억은 역사를 창조하거나 복구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만약 기억이 일상적으로 통제되거나 가공되고 갱신된다면, 역사는 권력과 통제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려는 기도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는 민주주의 정치가든 권위주의 정치가든 정치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나 그것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 존재의 상징적 설계이자 우리가 매일 행하는 도덕적 선택이다.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자유의 한 초석이다.

 

바우만. 다시 말하지만 내 생각에 악마는 온갖 종류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왕이 하는 일들은 보통 모호하고 양면적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교환 행위, 거래, 대가, 보복이며,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면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되는 식이다. 마왕의 힘은 그의 뛰어난 위조술에 기초한다. 악마의 모습은 협잡꾼, 사기꾼, 돌팔이이며, 한마디로 말해 평균 22미터 × 16.1 미터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아이맥스 스크린 같은 곳에 투영된 사기꾼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제기한 주장에 따르면 유혹이 발휘하는 정말로 저항하기 힘든 견인력은 그 유혹에 굴복할 때 생긴다고 약속되거나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하는 상태의 매력에서 비롯하기 보다 유혹받음의 상태 자체에서 비롯한다. 유혹이 제공하는 것에는 희열에 대한 욕망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유혹받은 상태에서 미지의 것에 대한, 경계선을 잘못 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직 연필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즉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쁨에 의해 압도된다. 레비나스는 이런 상태를 가르켜 유혹의 유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 순간의 미결정됨’, ‘결말이 확실치 않음’, ‘불완전함에 매료된 상태이다.

 

손에 쥐기 어렵고 고통스러울 만큼 짧은 이 자유의 순간은 우리가 이미 선택의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아무 탈 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것이 일종의 신성한 상태라고, 죽을 운명의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신의 한 속성인 무한한 권능을 힐끗 엿보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유혹을 악마와 그의 작업과 관련짓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을 전능한 자로 상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한다면, 유혹의 상태는 불경한 것이다. 자신이 유혹받로고 놔두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법에 명시된 형벌이다.

 

결정의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악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이다.

 

자네 말대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악한 위조의 의도와 야망을 지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들에게 고용된 열렬하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망설이는, 그러나 언제나 순종하는 수많은 일꾼과 때때로 부주의하지만 자발적인 공범들의 도움과 노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1984>에서 진리부가 윈스턴 스미스를 고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사건 X가 제거된 기억은 텅 빈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역사적 기억이며, 다만 다른 역사의 사건 X를 포함하지 않은 어떤 역사의 기억이 될 뿐이다.

 

덧붙이자면 동유럽 출신이지만 나중엔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가 된 레오니드 셰스토프는 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만큼이나 과거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테네인이 소크라테스에게 독살의 범행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이미 만들어진 것을 다시 만들면서 뒤로 행하기’, ‘이미 한 것을 되돌리기’, 그래서 과거를 바꾸기를 신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능력으로 간주했다.

 

만약 그렇다면 악마가 과거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자신을 신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신의 게임에서, 마땅히 신에게 속하는 게임에서 신을 이기려는 악마의 무한히 오만하고 필사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베즈돔니가 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악마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악과 선이 연쇄적으로 분열 생성한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나와 대화를 나눈 폴란드 저널리스트 아르투르 도모스와프스키가 지적하길 올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팔레스타인이 겪은 박해를 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사명이 잠재적으로 유사한 성격과 규모를 지닌 또 다른 대참사로부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구원하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공존 양식의 토대 자체에 비록 감춰져 있지만 매우 생동적이고 강고하게 내장된 섬뜩하고 잔인한 경향들을 증언할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 역사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인 라울 힐베르크도 이 사명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 점은 나치의 집단 학살 기계가 독일 사회의 정상적인 조직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정상적이고일상적인 역할 중의 하나를 수행하던 바로 그 사회였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리처드 루빈스타인)의 결론에 따르면 유대인 대학살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라 문명 진보의 증거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서 도출해낸 유일한 교훈이 아니었다. 또 다른 교훈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이 유대인 운명의 합법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가능한 다른 경우들보다 더 심대한 충격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소중히 품고 있는 또 다른 신화를, 즉 고통이 고상하게 만든다는, 그래소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이 시련에서 벗어나 찬란하게 정화되고 도덕적으로 고양된다는 신화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슬픈 진실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가해자를 타락시키고 추락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피해자들이 도덕적으로 아무 상처도 없이 그들의 시련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잔혹함과 박해의 진정한 귀결은 작용과 반작용이 잇따라 일어나 단계마다 양쪽의 집요함과 호전성이 심화되고 양쪽을 갈라놓는 심연이 확장되는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또 다른 연쇄적 분열 생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쇄 작용의 무한한 확장에서 빠져나오려면 상당한 의지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각은 그저 부재와 결여가 아니라 니체가 보여준 것처럼 정신적 삶의 한 가지 기본 조건이다. 오직 망각 덕분에 마음은 완전한 갱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돈스키스. 악은 비정상 사례, 병리, 탈선 같은 것에 숨어 있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정상으로, 심지어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그리서어 아이다포론 adiaphoron 또는 그것의 복수형 아디아포라 adiaphora중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했으며 후에는 마틴 루터의 동료 종교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이 사용했는데,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존재하는 예배의 차이를 가리켜 아리아포라라고, 즉 굳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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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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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할 땐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탈도덕화의 구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소비주의 문화다. 이제 인간은 타인을 상품처럼 대한다.

 

우리는 점차 둔감해져간다. 요제프 로트는 우리의 습관적인 둔감함의 메커니즘을 이렇게 설명했다.

 

큰 재해가 발생하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도 발 벗고 나선다. 급성 재해들은 확실히 이런 효과를 낳는다. 사람들은 재해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성 재해들은 이웃들에게도 너무 께름칙한 나머지 그들은 재해나 재해의 피해자들에게 점차 무관심해지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기까지 한다. ...위급 사태가 질질 끌게되면 도움의 손길은 다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동정의 불길은 차갑게 식는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80

 

<세월호 학살>은 국가가 국민들의 습관적인 둔감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기획된 것일까? 우리는 점점 더 시들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이런 태도는 결국 또 다른 재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다음 재난의 피해자는 누가 될까? ‘는 아닐 거라고? 과연 그럴까? 혹은 만 아니면 재난은 일어나도 되는 건가?

 

재해가 오래 지속되면 초기의 충격과 격분이 망각 속에 빠지고 피해자들을 향한 인간적 연대가 메마르고 쇠약해짐에 따라 재해 자체가 지속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미래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여러 힘이 결합할 가능성은 서서히 약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p 81

 

 

바우만에 따르면 오늘날 99%프레카리아트’(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한 무산계급, 좀비 용어가 된 프롤레타리아를 대체하는 용어).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더라도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 프레카리아트는 해고되었거나 앞으로 해고될 것이다.

 

오늘날 99%는 공포 속에 살아갈 뿐이다. 공포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있다.

 

첫째 무지이다. 이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종류의 불행이 어디에서 닥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등에 대한 무지이다.

 

둘째는 무기력이다. 이것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앞의 두 이유에서 파생하는 굴욕감이다.

 

99%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국가에 헌납한다. 공항에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알몸을 국가에 바친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길들이기 위해 더 나은 공포를 창조한다.

 

아동 강간범은 네 이웃이다.”,

 

외국인은 연쇄살인범이다.”

 

국가가 모든 걸 감시하지 않으면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자.

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공포를 이겨내고 싶으면, 남들과 다르고 싶으면,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라!

소비하지 않는 자는 죄인이다. 소비하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자는 빨갱이다. 규제 철폐, 구조 조정, 민영화만이 살 길이다.”

 

경쟁만이 살 길이다. 네 이웃이, 외국인이 네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다.”

 

언론, 신문, 방송, 지식인들은 서로가 앞 다투어 힘 있는 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오늘도 매일 매일 구호를 떠들어 대고 있다. 양심을 팔아먹은 것들에 힘입어 오늘날 프레카리아트는 연대가 불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기득권들은 이승만이 국부라고 떠들어댄다. 국부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전쟁이 터져서 우리의 국부께서 도망가실 수도 있다. 선조도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의 국부는 가만히 있으라고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왜 한강 다리는 끊고 도망가서 국민들 피난도 못 가게 하셨을까? 한강 다리 아래로 얼마나 씨벌건 강물이 흘러야 우리 1%들은 만족하실려나. 1%눈에 들기 위해 지식인들께선 또 얼마나 많은 역사와 기억을 조작해야 만족하실려나. 언젠가는 이승만이 나뭇잎을 타고 한강을 건너셨다 주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악이 도처에 만연해 있는 오늘날 어떻게 하면 우리는 도덕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체코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진정한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하벨은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잘 조직되고 견고한 정치 기구에 기초한 대규모 정치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풍성하게 쓸 수 있는 공금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군대도 미사일 발사기도 비밀경찰이나 정복경찰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를 유명 인사로 만들고 그의 메시지를 수백만에게 전달해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따르도록 만들어줄 대중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하벨에게는 역사를 바꾸려는 그의 노력에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무기만이 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용기와 불굴의 의지였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많은 적든 가지고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카스, <도덕적 불감증>

 

머릿속에 박힐 정도로 나는 반복하고 반복할 것이다.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전공자가 아닌 자가 번역하면 이꼴 난다. 불굴의 의지로 읽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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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잡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4-13 07:34   좋아요 1 | URL
`영혼을 위한 삼계탕`을 드신 느낌이시겠네요. ^^

영혼을위한삼계탕 2016-04-13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

꼬마요정 2016-04-1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다가 번역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데요..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시이소오 2016-04-13 08:11   좋아요 0 | URL
짜증스럽긴 합니다만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신다면 읽을 수 있습니다 ㅋ^^

초란공 2016-04-13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내용의 책인데 읽기는 짜증이 나긴합니다. 하지만 전공의 여부와는 무관한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3 09:3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오자, 탈자, 비문, 오문들도 많지만 용어번역도 의아스럽드라구요. 바우만의 다른책에서 사회학자 노명우 씨 번역은 자연스러웠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4-13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읽을 능력도 없으면서 번역에 무지 민감한 더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 한탄스럽네요.

시이소오 2016-04-13 21:2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도 그런걸요. 이 기회에 저도 영어 공부나 할까봐요. 가끔 참 답답합니다. ^^;
 

 

p33. 간단하게 표현해서 경제학 = 최적화 + 균형이다. 이 방정식은 다른 사회과학들이 따라올 수 없는 강력한 조합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경제학 이론이 기반으로 삼은 가정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첫째 일반적인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최적화 문제는 종종 해결이 쉽지 않거나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 ....둘째 사람들이 결정을 내릴 때 기반으로 삼는 믿음들은 사실 편향되어 있다. 경제학자들의 사전에 지나친 낙관주의라는 말은 없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런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p38. 우리가 정말 중단해야 할 것은, 그런 모형이 인간의 행동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이라 가정하고, 그런 결함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인supposedly irrelevant factor, 즉 내가 줄여서 SIF라고 부르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P47. 나는 지불 의지수용 의지차원에서 두 가지 질문을 만들었다. 첫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내년에 죽을 가능성을 0.1 퍼센트 낮출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내년에 죽을 확률이 0.1 퍼센트 높아지게 된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할 것입니까? ”

 

P50. 기회비용이란 어떤 것을 선택하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P51. 신용카드 가격이 1.03달러이고 현금가가 1달러일 때, 3센트 차이를 할인이라고 부르든, 추가 요금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카드사들은 분명하게도 할인이라고 부르는 쪽을 더 선호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그 차이를 프레이밍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추가 요금을 부담하는 것은 주머니에서 실제로 돈이 빠져 나가는 것이지만, 할인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기회비용일 뿐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은 자산의 일부라는 점에서 나는 이런 현상을 소유효과로 설명한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자기 자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들, 즉 가질 수 있지만 아직 소유하지 않은 것들보다 이미 자기 자산의 일부가 된 것들을 더욱 가치 있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와 마주하게 되었다. (집을 파는 판매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P57. 사후판단 편향이란 hindsight bias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것이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결과가 그렇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p59. 그들의 논문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긴과 지적 능력은 다분히 제한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한 경험 법칙, 즉 휴리스틱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그 한 가지 사례는 바로 가용성availability’이라는 개념이다.

 

그들 논문의 핵심 주제, 즉 휴리스틱의 활용은 사람들이 예측 가능한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p60. 허버트 사이먼이 말하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란 인간에게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p61. 가령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총기 사망 사건에서 살인과 자살 중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을까? 대부분 살인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사실은 자살에 의한 총기 사망 사건이 살인의 경우보다 두 배나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측가능한 실수.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질문을 던진다 하더라도 그 오류들은 서로 상쇄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p64.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말하는 구성 원리라 두 가지 형태의 서로 다른 이론, 즉 규범적normative이론과 기술적descrptive이론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규범적 이론 어떤 주제에 대한 올바른 사고방식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올바른 right’이라는 표현은 도덕적 차원에서 바람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제학적 사고방식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그리고 때로 합리적 선택이라고도 불리는 최적화 모형이 제시하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는 뜻이다. 내가 이 책에서 쓰고 있는 규범적이라는 표현은 모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p65. 한쪽 철로를 보자. 그러면 밑변이 1마일, 사변이 1마일 1인치인 직각 삼각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삼각형의 높이는 얼마일까? 다시 말해 그 철로는 지면에서 최대 얼마나 높이 솟아있는가? ..그냥 직관적으로 대답해보자. 그 높이는 대략 얼마나 될까?

 

사람들 대부분 철로가 1인치 늘어났으므로 그 비슷한 정도로, 혹은 2인치나 3인치 정도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 정답은 29.7 피트다! .......사람들이 내놓았던 대답들의 평균은 2인치 정도에 불과했다.

 

경제학자 개리 베커가 처음으로 내놓았던 인적 자본 형성 이론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할 것인지, 향후의 경력을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자신이 받을 특정한 형태의 교육을 선택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p67. 이와 달리 전망 이론은 인간 행동에 관한 단 하나의 이론이 규범적이고 기술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두 사람의 논문은 불확실성 하에서의 의사결정에 관한 이론을 주제로 다룬다.

 

그 이론의 밑바탕에 깔린 초기 아이디어들은 1738년 다니엘 베르누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베르누이는 실질적으로 위험 회피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행복은 돈이 많아질수록 증가하지만, 그 증가율은 점점 감소한다고 가정했다. 이런 현상은 민감도 체감 diminishing sensitivity 원리라고도 불린다.

.가난한 농부에게 10만 달러는 인생을 바꾸어 놓을 횡재다. 하지만 빌 게이츠에게 10만 달러는 별 의미가 없다.

 

첫 번째 1,000달러의 효용이 두 번째 1,000달러의 효용보다 더 높고, 두 번째가 세 번째보다 더 높고,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런 형태의 효용 곡선은 위험 회피 성향을 보여준다.

 

위험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법에 관한 공식적인 이론(소위 기대 효용 이론expected utility theory)1944년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과 경제학자 오스카 모르겐슈테른의 발표로 알려졌다. ....<게임이론과 경제 행동>이 탄생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기대 효용 이론에 대한 논의를 부수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다.

 

p70. 기대 효용 이론은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한 올바른 방식인 것이다. 반면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합리적 선택을 위한 유용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실질적인 결정을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한 대안으로 전망 이론을 제시했다. 전망 이론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이론이다.

 

p71. 예전에 전망 이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동안 내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던 것은 이런 선언이었다. “ 인간의 행동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기술적인 경제학 모형을 구축하라.”

 

p73. 우리가 현재 상태로부터의 변화에 따라 민감성 체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은, 베버 페흐너 법칙이라 알려진 인간의 또 다른 기본적인 특질을 잘 보여준다. 베버 페흐너 법칙은, 어떤 변수의 변화에 대한 최소 식별 차이just noticeble difference’는 그 변수의 크기에 비례함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체중이 30그램 늘었을 때 우리는 그 차이를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채소를 살 때 30그램은 대단히 중요한 차이로 다가온다. 심리학자들은 최소 식별 차이를 줄여서 그냥 JND라고 부르곤 한다. 여러분이 심리학자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면, 칵테일 파티에서 그 용어를 한번 꺼내보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추가적인 투자로는JND를 느낄 수가 없어서 이번에 새 차를 사면서 아예 고가 사운드 시스템으로 넘어왔죠. )

 

한번은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자동차 전조등 두 개가 동시에 나가버렸어요. 카센터로 찾아가니 전구 두 개만 갈면 된다더군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전구 두 개가 동시에 나간다는 건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요?”

톰은 즉각 이렇게 대답했다. “,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베버 페흐너 법칙이로군요!”

 

그의 대답은 사실 두 전구가 동시에 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전조등 하나가 나가도 운전자들은 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즉 두 개의 전조등에서 하나의 전조등으로의 변화가 항상 인식 가능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반면 하나의 전조등에서 0개의 전조등으로의 변화는 분명하게 인식 가능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495달러짜리 TV를 살 때보다 45달러짜리 라디오를 살 때, 사람들은 10달러를 아끼기 위해 더욱 기꺼이 10분을 투자하려 한다. TV를 살 때 절약할 수 있는 10달러는 JND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익과 손실 모두에서 민감성 체증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익에서는 위험 회피적이지만, 손실에서는 위험 선호적이라는 사실이다.

 

문제 1. 지금보다 300달러가 더 있다고 해보자. 다음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A. 확실하게 100달러를 얻는다. (72%)

B. 50% 확률로 200달러를 얻거나, 50% 확률로 하나도 얻지 못한다.(28%)

 

문제2. 지금보다 500달러가 더 있다고 해보자. 두 가지 선택권이 주어져 있다.

 

A. 확실하게 100달러를 잃는다. (36%)

B. 50%의 확률로 200달러를 잃거나, 50% 확률로 하나도 잃지 않는다. (64퍼센트)

 

이익이 가져다 주는 기쁨보다 손실이 가져다주는 슬픔이 더 큰 현상을 우리는 손실 회피라고 부른다.

 

P83. <전망이론>의 핵심 내용은 사람들이 이익의 차원과 손실의 차원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P85. 여러분은 지금 재킷을 (125달러) (15달러), 그리고 계산기를 (15달러) (125달러)에 구매하려고 한다. 그런데 계산기를 파는 점원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다른 매장에서 똑같은 계산기를 (10달러) (120달러)에 판매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여러분이라면 다른 매장으로 차를 몰고 가겠는가?

 

내 예상대로 피실험자들은 값싼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에 5달러를 아끼기 위해 차를 몰고 가겠다고 답했으며.....

(5000원 아끼자고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다른 매장을 간다고? 기름값이랑 거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계산 안 하나?)

 

86. 스티븐 존슨이 말했던 느린 예감slow hunch’이란 게 있던 것 같다. 느린 예감은 모든 진실이 명명백백 드러나는 유레카의 순간과는 다르다. 다만 뭔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 소중한 진실이 조만간 드러날 것이라는 직감에 가깝다.

 

하지만 느린 예감의 문제는, 혹시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미리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발견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새로운 세상의 해안에 거의 이르렀다는 느낌만 갖고 있었다.

 

p 91. 여러 가지 반박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마치 ~처럼 이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이 주장은 경제학자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단히 복잡한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마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p92.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경제학의 두 가지 핵심 개념, 즉 행위자는 최적화를 추구하고 시장은 안정적 균형에 도달한다는 개념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균형점에 도달하게 되는 조건을 결정하기 위한 기술을, 그리고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밝혀내기 위한 기술을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그 한 가지 사례는 이른바 기업 이론이라는 것이다. 기업들은 언제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말이다.....일부 경제학자들은 현실 속의 경영자들은 절대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며 반박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단순한 사례로 한계 분석 marginal analysis’라는 개념이 있다.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은 한계 비용이 한계 수입과 일치하는 점에서 가격과 생산량을 결정한다. 우리는 이런 분석을 근로자를 고용하는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즉 마지막으로 고용한 근로자에 대한 비용이 그 근로자가 발생시키는 수입의 증가와 동일해지는 시점까지 기업은 근로자들을 계속해서 고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론과 달리 경영자들은 임금의 변화가 고용이나 성과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제품을 최대한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하고, 수요에 따라 노동력을 늘리거나 축소한다고 대답했다. 레스터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발언으로 논문을 마무리지었다. “이 논문은 전통적 한계 이론, 그 이론의 기본적인 가정의 타당성에 대해 중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이런 논의의 국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증 경제학의 방법론이라는 제목의 영향력 있는 글에서 프리드먼은 가정을 기반으로 이론을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이론이 제시하는 예측의 정확성이다.

 

당구 선수가 최적의 궤적을 알려주는 복잡한 수학 공식을 알고 있고 눈으로 각도를 측정하면서 공의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공식을 통해 순식간에 계산해서 그에 따라 공이 굴러가게 하는 것처럼 경기를 펼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우리는 정확한 예측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가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실력이 뛰어난 당구 선수들이 이런 방식으로 공을 칠 수 있다거나 혹은 친다는 믿음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결가에 도달할 수 없다면 그들은 절대 프로 선수가 아니라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p96.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치 ~처럼질문을 다루고 있다. 나 또한 당구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 논의의 핵심은, 경제학은 비단 전문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 당구 선수들은 마치 관련된 모든 기하학과 물리학 지식을 아는 것처럼 경기에 임하지만, 바에서 재미로 치는 일반인들은 제일 치기 쉬운 공을 노리고 게다가 종종 실수를 범한다.

 

그런 일반인들이 쇼핑을 하고, 은퇴에 대비해 저축을 하고 , 일자리를 찾고, 저녁을 요리하는 방법에 관한 유용한 이론을 개발하고자 한다면, 그들이 마치 전문가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은 치워두는 게 좋을 것이다.

 

p98. 리흐텐슈타인과 슬로빅은 경제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들 선호 역전이라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는 간단하게 말해 피실험자들이 b보다 a를 선호한다고 말하고, 그리고 동시에 a보다 b를 선호한다고 말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모든 공식적인 경제학 이론의 핵심적인 논리 기반, 즉 사람들은 모두 분명한 선호를 갖고 있으며,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일관되게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p99. 리흐텐슈타인과 슬로빅은 피실험자들에게 두 가지 선택을 제시하여 선호 역전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피실험자들은 상대적으로 확실한 경우 (97퍼센트의 확률로 10달러 받기), 그리고 좀더 위험한 경우(37퍼센트의 확률로 30달러 받기) 중 하나를 선택한다. 두 사람은 전자의 경우를 확률이 높다는 의미에서 ‘p’선택, 그리고 후자를 더 많은 돈을 딸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선택이라 불렀다. 먼저 두 사람은 피실험자들에게 어느 경우를 더 선호하는지 묻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확실한 이익을 좋아하기 때문에 p를 선택했다. 즉 피실험자들은보다 p를 선호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두 사람은 p를 선호하는 피실험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이 p를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합시다. 그 선택권을 판다고 했을 때 여러분이 받길 원하는 최저 금액은 얼마입니까?” 이어 선택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다수는 p보다 를 포기하는 대가로 더 많은 돈을 요구했다. 이 말은 그들이 선택을 더 선호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피실험자들은 보다 p를 선호한다고 말해놓고, 동시에 p보다 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성모독이다.

 

(선호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정박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30달러에 닻이 내려져있다. 자신에게 아직 있지도 않은 30달러를 마치 있는 것처럼 여기는 착각. 그래서 를 팔 때는 일종의 손실회피의 심리, 또한 소유효과가 작동하는 셈이다. )

 

심리학자들은 경험에서 배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두 가지란 충분한 연습과 즉각적인 피드백이다.

 

p102. 사소한 일을 선택하는 경우 우리는 충분한 연습 기회들을 통해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주택이나 대출, 직장을 선택할 때는 충분한 연습이나 학습 기회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빈모어는 거꾸로 이렇게 말했다. “학습을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위험이 높은 일보다 위험이 낮은 일들을 더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다. ”

 

p104. 다음 순간 트버스키의 질문은 핵심을 찔렀다. “마이클, 당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 아주 간단한 경제적 판단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당신 이론에서는 모든 주체들이 천재라고 가정하고 있군요. 어찌된 영문인가요?”

 

p105. 가령 퇴직연금을 위한 좋은 포트폴리오를 선택할 때 치밀하지 않은 사람이, 금융 자문이나 대출 중개인, 혹은 부동산 중개인을 구할 때 치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대중을 현혹하거나 폰지 사기를 쳐서 큰돈을 벌 사람들은 많지만, “그건 사지 마세요라고 조언하면서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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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 결정적 1%, 사소하지만 치명적 허점을 공략하라
리처드 H. 탈러 지음, 박세연 옮김 / 리더스북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폭설이 내렸다. 그러자, 한 철물점이 눈을 치우는 삽을 만 5천원에서 2만원으로 가격을 올렸다. 이러한 가격 인상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인정할만하다. 18퍼센트.

부당하다. 82퍼센트.

 

MBA 학생들은 뭐라고 했을까?

 

인정할만하다. 76퍼센트,

부당하다 24퍼센트.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가격 인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리고 일어나야만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니 대다수 경제학자들, MBA 졸업자, 재벌들이 사악할 수밖에.

 

기존 경제학은 인간을 이성적이고 감정이 없는존재로 가정한다. 기존 경제학은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라기보다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싸이코패스로 양성한다. 탈러는 기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가상의 존재를 호모 이코노미쿠스’, 이른바 이콘이라 부른다.

 

기존 경제학은 크게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합리성, 시장의 합리성. 여기에 인간의 감정 따위는 무시된다. 그러나 탈러를 비롯한 행동경제학들의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시장 역시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행동경제학의 시초는 <생각에 관한 생각>의 대니얼 카너먼, 아모스 트버스키다. 두 사람은 여러 실험을 통해 인간의 비합리성을 증명해냈고, ‘휴리스틱과 편향으로 설명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실험들 중 공공재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깜짝 놀랐다.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멍청한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알지 못하는 열 명의 사람들을 실험실에 모아놓고 각각 1달러짜리 다섯 장을 지급한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피실험자들은 각각 모르게 빈 봉투에 돈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공공재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기를 원하는지 결정한다. 그렇게 피실험자들이 공공재 봉투에 집어넣은 돈은 두 배가 되고, 그 돈은 다시 각각의 피실험자들에게로 공평하게 분배된다.

 

당신이라면 얼마를 낼 것인가? 나는 5달러 전부를 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들도 협력할 경우 나는 10달러를 받게 될테니까.

 

기존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기부를 하면 안 된다. 실험에 따르면 대개의 사람들은 반 정도를 기부했다. 경제학 대학원생들은? 20%밖에 되지 않았다.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마티아 센은 이런 게임에서 언제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일컬어 맹목적으로 이기심만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바보들이라 불렀다. “‘전적으로경제적인 인간은 사회적인 바보에 가깝다. 경제학 이론은 이런 합리적인 바보들만을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니 삼성과 같은 재벌, 경제학자들, 자칭 경제학자라 우기는 한국의 공 모씨, 최근에 환율에 관한 책을 낸 자칭 이코노미스트라는 홍 모 박사 같은 이들이 왜 그렇게 멍청하고 사악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주식이나 폐쇄형 펀드에 투자하는 분이 계시는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폐쇄형 펀드에 투자하는 사람들에 대해 래리 서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멍청이들이 있다.”

워런 버핏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주주들의 관성과 우둔함에 대한 값비싼 기념비라고 좀 더 우아한 방식으로 말했다.

 

폐쇄형 펀드에 대한 탈러의 의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 6개월 만에 100달러에서 90달러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품을 왜 107달러나 주고 사는가?”

 

나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행동경제학의 실험에 따르면 똑같은 사례를 어떤 방식으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은 달라졌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시아 질병 문제실험이다.

 

아시아 질병 문제

 

두 그룹의 피실험자들에게 600명의 사람들이 어떤 아시아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두 가지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방안 a를 선택하면 200명의 환자를 확실하게 살릴 수 있다.

방안 b를 선택하면 3분의 1 확률로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3분의 2 확률로 600명 환자 모두가 죽게 된다.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은 a 안을 선택했다.

 

방안 c를 선택하면 확실하게 400명이 죽는다.

방안 d를 선택하면 3분의 1확률로 아무도 죽지 않지만 3분의 2 확률로 모든 환자들이 죽는다.

 

대다수는 위험한 d안을 선호했다.

 

자세히 보면 ac는 같은 말이다. 그런데도 문제를 어떻게 제시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전혀 상반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오늘날 빈번이 사용되는 프레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만일 프레임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진다면 좀 더 긍정적인 선택으로 이끌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이른바 <넛지>. 한국에서 탈러의 <넛지>40만부나 팔렸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워낙에 심리학자들과 행동 경제학의 실험을 신뢰하지 않아서일까? 오늘날의 실험은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쉽게 읽히지도 않았다. 재미를 느끼지 못한 채, 매몰비용이 아까워 거의 보름 만에 읽었다. 재독을 하고 필사를 하면서 탈러의 주장을 곡해했다는 걸 알았다. 재독하면서 여러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라 충분히 즐기며 읽었다. (이 책과 바우만의 <도덕적 불감증>, 이 두 권 때문에 일주일 간 다른 책은 한권도 읽지 못했다.)

 

장사나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책을 통해 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세울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특히나 13)

 

<넛지>는 도구일 뿐이다. <넛지>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단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느냐에 따라 선한 넛지’, ‘악한 넛지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가하는 악한 넛지에 당하고만 살지 않으려면,

이웃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선한 넛지를 개발하고 싶은 분이라면

강추한다.



(몇 일간 고심했지만 결국 나는 이 책의 3분의 1도 담아내지 못했다. 출판사 주장처럼 책이 쉽지가 않다.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하노벡의 <부자들의 생각법>, 롤프 도벨리의 <스마트한 선택들>이나 여타의 행동경제학 입문서 격인 책을 읽고 나서 접근하시는 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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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DOKU 2016-04-1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넛지나 심플러를 읽은지라 반복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보류 중인데 괜찮나 보네요.

시이소오 2016-04-12 10:01   좋아요 0 | URL
조금 더 어렵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그만큼 생각할 꺼리도 더 많네요. ^^

초딩 2016-04-1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는 실험들이 가득할 것 같네요~
담았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2 10:26   좋아요 1 | URL
탈러가 워낙 곰처런 느릿느릿 말합니다.
천천히 따라가시면 재밌으실 거에요.

저도 몇번이나 포기할까 했는데 두번째 읽으니 더 좋더라구요 ^^

cyrus 2016-04-1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동경제학》이라는 책도 좋습니다. 이 책과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었으면 《똑똑한 사람들의...》의 반 정도는 안 읽고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시이소오 2016-04-12 11:5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안그래도 <생각에 관한 생각> 3분의 1쯤 남았는데 완독해야 겠어요 ㅋ ^^

곰곰생각하는발 2016-04-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사악하군요...ㅎㅎㅎㅎ. 시밤바들...

시이소오 2016-04-12 13:58   좋아요 0 | URL
ㅋ 시밤바 ㅋㅋㅋ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케케묵은 주역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공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50살부터 죽기 전 까지 주역을 공부했다. 주역을 연구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발견했다. 이진법이 컴퓨터를 만들었으므로 결국 주역이 오늘날의 디지털 문명을 만든 셈이다.

 

김용규의 <생각의 시대>를 읽다, 지성과 무지를 가르는 기준은 범주화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어떤 학문이건 범주화를 토대로 한다. (범주화의 대가들은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시인이다. 시인들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범주화를 창조하니까. )

 

그렇게 본다면 주역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범주화 도구를 갖추는 셈이다. 주역을 어떻게 하면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음양이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고 팔괘가 64괘를 낳는다. 우선은 8개만 제대로 알면 된다. 이른 바 팔괘다. 그런데 두 괘(건과 곤)는 시간과 공간, 하늘과 땅이다. 따라서 6개만 알면 된다. 사상을 두고 밑에 것은 기존의 것, 위의 것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 가운데 음양을 끼어 넣으면 8괘가 된다. 일반적인 순서와는 다른데 건과 리, 태와 진, 손과 간, 감과 곤이다.






태괘를 살펴보자. 태괘는 고양이, 호랑이다. 연못이다. 연못은 물을 담고 있다. 따라서 담는 성질을 지닌 것은 다 태괘에 속한다. 가방, 지갑, 주머니 다 태괘다. , 고향, 단골집, 조국, 여자, 태괘다. 연못, 고양이는 침착하고 평정을 유지한다. 침착함, 혹은 평정의 성질에 해당하는 것도 태괘다. 침착한 사람, 절제력이 있는 사람, 태괘다. 호수같은 것, 태괘다.

 

손괘를 살펴보자. 손괘는 바람이다. 날아가는 것은 다 손괘다. 참새, 비행기, 손괘다. 냇물도 손괘다. 흐르기 때문이다. 소식, 새로움, 유행, , , 열려 있는 것, 쏟아진 물, 어린아이의 걸음걸이 다 손괘다.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 시원하게 달리고 있는 것, 손괘다. 바람같은 것, 손괘다.

 

운명이 제자리에 있는 사람은 손의 기운이 부족하다. 여행을 떠나 손의 기운을 흠뻑 얻으면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오늘은 태괘고 내일은 손괘다.

 

무언가를 막는 것, 다 간괘다. , 우산, 담벼락, , 어린아이에게 아버지, 신용이 좋은 사람 간괘다. 관우, 춘향이, 간괘다. 군대, 남자의 배짱, 여자의 마음이 태괘라면 남자의 마음은 간괘다. 침묵, 위축, 긴장 간괘다.

 

우레와 같은 것, 진괘다. 손괘가 부드러운 움직임이라면 진괘는 육중한 덩어리가 움직이는 형상이다. 여인의 걸음걸이가 손괘라면 군인의 걸음은 진괘다.

 

물은 감이다. 와글거리는 것, 흐물흐물 한 것, 덩어리가 아닌 가루, 인간의 감정은 감이다. 어린아이, 군중. 그릇이 태괘라면 그 안에 담겨야 할 것은 감괘다. 돌보는 것이 태괘면 돌봄을 받은 것은 감괘다. 어두운 심정, 근심, 구름, 혼돈, 감이다. 쉽게 부서지는 비스킷, 모래 같은 것, 감이다. 육체적인 사랑, 나쁜 운명, 잠들었을 때, 감이다. 캄캄한 우주, 미궁에 빠진 사건, 미래, 감이다. 미지의 세계, 험난한 세계, 딱히 답이 안 나올 때, 무서울 때, 슬플 때, 지쳐있을 때, 감이다.

 

질서, 리괘다. 혼돈이 감괘라면 질서는 리괘다. , 평화, 희망 리괘다. 감성적인 것이 감이라면 이성적인 것은 리다. 덩어리는 리, 가루는 감이다. 불은 리고 물은 감이다.

 

8괘로 대성괘가 만들어진다. 팔괘가 단어라면 대성괘는 문장이다. 괘상은 2개의 파트, 상하로 나뉘어 있다. 아래에 있는 것은 현재고 위에 있는 것은 미래를 의미한다.


 

지뢰복부터 곤위지까지를 십이소식괘 혹은 군주괘라고 한다. 12개의 괘를 이어보면 양이 증가하다가 음으로 변하는 형상이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처음 괘상의 맨 위층이 이어지는 괘상의 맨 아래의 반대가 되고, 나머지 효들은 한층 씩 밀려 올라가는 형태다.



이런 패턴으로 저자는 64괘를 정렬한다. 12개 괘 다섯 묶음과 4괘 한 묶음.



과연 저 방법으로 주역 64괘를 공부하는 게 나을까? 주역 초보라 잘 모르겠다.

64괘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만한 다른 방식이 있을 것도 같은데.

 

저자는 주역 괘상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주역 공부를 백날 해도 소용없다고 한다.

64괘의 이름을 언제 다 외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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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4-12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역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우리 옛문화를 이해하려해도 주역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미뤄두는 공부만 자꾸 늘어납니다.

시이소오 2016-04-12 10:29   좋아요 0 | URL
주역 한권 들고 산에 들어가도 몇 년은 심심하지 않겠어요 ㅋ ^^

samadhi(眞我) 2016-04-12 10:47   좋아요 0 | URL
그랬다가 산에서 광년이모드에 빠져들면 어찌합니까. 영영 속세로 돌아가지 못 할지도 모르는데 ㅋㅋ

시이소오 2016-04-12 10:50   좋아요 0 | URL
ㅋ 돌아오셔야죠.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은 산 속이 아니라 속세에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