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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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칼의 노래>는 남성적 묘사의 극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나는 김훈의 <화장>을 읽기가 불편했다. 추은주가 오상무에게 쓴 편지부분에서 계속 김훈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김훈이 화장을 하고 여장을 한 모습이 연상된다.

 

남성적 서사가 주를 이루는 <칼의 노래>같은 소설을 읽을 땐 그의 문체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화장>같은 경우엔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김훈의 소설보단 에세이가 읽기에 마음 편하다. 어떤 이웃분이 김훈의 글은 낭독에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동의한다. <라면을 끓이며>도 읽다보면 어느새 읊조리게 된다. 어쩌면 그는 시조의 형식을 차용한 게 아닐까. 아니면 국악의 리듬을 차용한 것일까. 알려진 대로 김훈은 <칼의 노래>를 집필할 때 국악장단을 연상하면서 문장을 썼다고 말했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등등.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을 읽다보면 저절로 소리를 내뱉고 싶어진다.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라면을 끓이며> P224. 3부 몸.

 

원래 좋아하던 문장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반가웠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 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새카만 씨앗들이 별처럼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라면을 끓이며> P336. 4, .

 

가끔씩 아무 이유 없이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내뱉곤 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그리곤 혼자 자지러진다.

아으, 동동다리

 

그의 글에선 여전히 전체성과 개별성이 투쟁을 벌인다.

애초에 필사를 포기한다. 반납 일을 하루 넘겼기에.

사서 필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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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13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낭독하기에 좋은 글이다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3 07:59   좋아요 0 | URL
그쵸? 누군가 읊어줬으면 좋겠어요^^

mipsan 2016-03-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정석같은 느낌

시이소오 2016-03-13 18:03   좋아요 0 | URL
갈고 닦은듯하죠? ^^

mipsan 2016-03-13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ㅎㅎ

깊이에의강요 2016-03-13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듬이 있지요^^

시이소오 2016-03-13 20:38   좋아요 0 | URL
그렇죠? ^^

caesar 2016-03-1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은 소설보다 에세이라는 말, 저 역시 매번 해왔던 말이라 동의x3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00:12   좋아요 1 | URL
역시, 그렇죠? ^*^

징가 2016-03-1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사까지 허걱 거의 만랩이십니다.
김훈 작가의 필력은 살아숨쉬는 생물같다고 생각합니다.

시이소오 2016-03-14 13:05   좋아요 0 | URL
살아 숨쉬는 생물이라는 말을 들으니 뱀장어가 떠오르네요.
왜일런지요. ㅋ ^^

비로그인 2016-03-1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팝에서 알파벳으로 바꿨습니다.
시이소님 좋은 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3-14 19:51   좋아요 0 | URL
오, 대문화면도 멋지네요. 기억하겠습니다 ^^

김선중 2016-03-2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륜있는 글의 면면입니다

시이소오 2016-03-20 08:36   좋아요 0 | URL
한국의 코멕 메카시라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닐듯 합니다 ^^

마르케스 찾기 2016-10-0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을 한 낮의 한 적한 버스 안에서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ㅋㅋ
종점에서 종점으로ㅋ 한 낮 버스 안이라 사람도 없고,, 맨 뒷 줄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 방해도 없이 시원하게,,,
올 여름 저의 휴가였어요ㅋㅋ
낭독하기 좋은 글이다는 말씀에 격하게 저도 동의합니다,,,
작년 휴가땐 KTX타고 서울가서,
대학로 연극을 일주일간 내내 보러 다녔죠.
휴가철엔 산 계곡 바다,, 온 나라가 소음에, 쓰레기에, 가는 곳마다 술판과 고기판과 수박찌꺼기라ㅠ

한 적한 시간을 소소하게 보내기에 좋은 책과 좋았던 시간들이었어요. 오디오북으로 듣기엔 김훈님의 자전거 여행만한 책은 없더라구요.
라면을 끓이며 이 책도 ˝읽고 싶어요˝가 아닌 ˝듣고˝ 싶어지네요ㅋㅋ

시이소오 2016-10-02 01:04   좋아요 0 | URL
오디오북이 있군요. 자전거 여행은 오디오북으로 읽어야겠어요 ^^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p121. 그러는 사이에 서른두 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아주 낙담하여 뜰의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신음하듯 읊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아무리 지나도 내일인 겁니까? 왜 저의 더러움이 바로 지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곳에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흘러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 소리에 이끌려, 또 친어머니가 갖고 있던 신앙에 이끌려 그는 성서에 있는,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역시 여기도 읽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멸망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쇠망의 길을 걷고 있는 제국의 유일한 신앙의 거점이며 서방 교회를 인도하는 빛이며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합니다.

 

p124. 들뢰즈=가타리는 그들의 저작에서 국가장치에 대한 전쟁기계라는 아주 신선한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국가장치는 악이며 전쟁기계는 선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전쟁기계야말로 근본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산만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냉철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기계가 옳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나치라는 것은 분명히 전쟁기계였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쟁기계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투쟁력 없이는 어떤 변혁도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으로 제기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쪽은 좋고 저쪽은 나빠라는 단순한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유치한 사고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p126. 하지만 그렇게 협애한 라캉상을 라캉 스스로 극복하게 된 계기는 이 에스파냐 신비주의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지아와 그 오른팔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필두에 두는 운동입니다.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하면 T.S 엘리엇과 폴 발레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에즈라 파운드와 더불어 역시 파울 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엇이 그의 대표작 <네 개의 사중주>에서 십자가의 요한을 많이 인용했고, 파운도도 <캔토스>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폴 발레리도 성 요한의 <영적 찬가>를 완벽한 시의 한 예로 절찬하고 있습니다.

 

P127.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대해 배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걸까요? 지금 예로 든 것만 해도 이미 라캉도, 푸코도, 20세기의 위대한 시인들도 그()들을 예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항상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쪽이었으니까요.

 

P128.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 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다소라도 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P129. 신비가라는 것은 제일 먼저 그녀에게 읽고 쓴다는 것이 처음부터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목숨을 택할지, 읽는 것의 광기를 택할지 하는 일이 됩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광기를 무릅쓰고 읽거나, 읽는 내가 옳은지, 읽는 나를 압살하려는 세계가 옳은지 어쩐지 앞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녀는 환각을 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알립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P132.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종교 법인인 것에 안심하고 인가를 받아 세제상의 우대 조치라는 은혜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라고 합니다. 무명 시대라고 번역됩니다. 무지의 시대라는 것이지요.

 

P134. 무함마드는 야팀입니다. 고아지요. 아버지 없는 아이입니다. 어머니도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전 <코란>은 분노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고아, 빈민을 학대하는 사회에 대한 격렬한 의분의 말이 나옵니다.

 

P135. 당연히 상인 계층이므로 시리아로의 대상 무역에 종사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코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였겠지요. 그는 기적을 거부합니다.

 

P138. 대천사 지브릴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하얀 백합꽃을 손에 쥐고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 그 천사입니다. 무함마드는 그때 그 자리에서 기뻐하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미쳐버리지 않았나 생각하며 도망칩니다.

 

P139.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격려를 받고 용기를 되찾아 다시 동굴로 갑니다. 그러나 역시 지브릴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감동적이고 또 희극적인 장면이 시작됩니다. 전거에 따라 다릅니다만,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지브릴이 자루를 갖고 있어 그것을 무함마드의 머리에 씌워 목을 졸랐다는 설. 아무것도 갖지 않고 무함마드에게 덤벼들어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는 설.

 

책 같은 것이 든 자루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때렸다는 설. 이를 다섯 번 정도 합니다.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싫습니다.” 그러면 때리고 세게 조릅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거부합니다. 다시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합니다.

 

P140. 그러나 무함마드가 왜 이렇게까지 거부했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읽으라고 하니까요. 읽어라,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무함마드는 무엇을 읽어야 좋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뭘 읽으라는 겁니까, 하는 말대답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일단 천사가 사라졌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계시는 내려집니다. 대천사가 전한 신의 계시, 전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는 이렇습니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P142.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은 무함마드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등장하고 이슬람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에 대항하고 그에 대해 닫음으로써 비로소 유럽은 고대에서 벗어나 통일체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디자가 없었다면 무함마드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디자가 없었다면 유럽도 없었습니다. 즉 유럽에 의한 세계의 근대화도 없었습니다. 하디자가 없었다면 세계화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세계화 안에서 다양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저항하는 유일한 세력도 그녀가 선택한 남편이 창출해낸 이슬람 공동체였으니까요.

 

P143. 너희들의 아내, 누이, 딸들은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자이므로 소홀히 대하지 말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이 왜 아직도 여성 차별적인 사회의 존립을 허용하고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P144.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문맹은 아랍어로 움미ummi’라고 합니다. 사실 이는 아랍어로 어머니인이라는 모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느 전승에 따르면, 지브릴은 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코란>에는 인간일 읽을 수 없는 신의 말로 쓰인 원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본을 이슬람에서는 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코란>은 책의 어머니의 사본인 셈입니다.

 

p145.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입니다. 이제 예언자는 나타나지 않고 계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구히 사라져 잊히고 맙니다. 무함마드가 읽는 다는 것, 이는 책의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소진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 같은 걸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소실, 읽는 것의 좌절,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빛나는 책이라 불리는 <코란> (‘읽는다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놀랄만한 역설일까요? 그렇지도 않겠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다면 미쳐버립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것만이 읽는다는 것입니다.

 

벤슬라마는 이를 정확히 ‘le concept du liver’라 불렀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 concept of the book’입니다. 책의 개념이라고 번역한다고 해도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는 책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책의 어머니가 잉태하게 하는, 어머니인 고아의 읽는다는 것’. 그것이 <코란>이고 이슬람 공동체의 근원입니다.

 

p146. 그가 추구하는 궁극의 대상, 그것은 책의 어머니입니다. ‘책의 어머니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책의 어머니는 신이 아닙니다. 그는 신도, 신인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책을, 바로 책을 추구합니다. 읽을 수 없는 그가 읽을 수 없는 책을. 어머니인 그가 어머니인 책을.

 

p147. 읽을 수 없는 것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화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읽을 수 없는 것으로 흐려지는 이 절대적인 순간. 이 자체가 천사천사적인 것입니다. 읽을 수 없을 터인 것을 읽는 것, ‘읽는다는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사적인 일입니다.

 

p148. 대천사 지브릴은 무함마드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습니다. 그것을 무함마드의 신체에 돌려놓았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습니다. 마음이 정화된 무함마드는 천마를 타고 한달음에 천리를 날아갔습니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러자 천리를 갔다-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 번이라도.

 

p149. <하디스>라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 자신이 말하는 훌륭한 문구가 있습니다. 이르길, 신이 최초로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 붓입니다. 갈대를 꺽어 만든 붓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쓰는 판 점토판일까요?-을 창조하고,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써라.”

 

p150. 완벽합니다. 이 문맹인 고아에게 내린 읽어라’, ‘붓을 들어라라는 명령이 그 위대한 이슬람의 서예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p151. 카바 신전에서 시를 낭송하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를 무파카라라고 합니다. 운을 맞춘 시를 읊는 대회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립니다. 무함마드는 웬일인지 이를 자주 보러 간 모양입니다. 래퍼들의 배틀 같은 것입니다. 우승한 시는 무알라카트라고 합니다. 이는 걸어놓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천에 금빛 글자로 쓰인 그 시를, 우승자를 칭송하기 위해 1년간 카바 신전에 걸어두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시를 무척 좋아하여 <코란>에도 시의 언어는 황금보다 훌륭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아이샤라는 아내를 맞이합니다. 아이샤는 그 미모가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원이었습니다. 모든 아랍 시를 암기하고 있어 무함마드가 그것 좀 해주게하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술술 읊었고, 자신도 시를 쓰고 연설가지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p152.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p153. 그래도 거기에는 한순간이라도 빛이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목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말은 역시 읽어라였습니다.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그리고 꽃을 피운 것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올 때 확실한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코란>의 텍스트가 분실되고 그것이 잊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교도인 처지에 건방진 말이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p158. ‘폭력의 선행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나 사회를 정초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모르는 강대한 힘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정초자의 근원적인 폭력이 우선 존재하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법이, 그리고 법에 의한 평화가 성립합니다. 즉 법의 텍스트가 성립하고, 그에 준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p161. 그러므로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신분석적, 민족학적 사고의 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국가나 공동체나 법의 기원에서 폭력을 찾는 사고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동 문화를 미적으로만 뛰어난 것으로 칭송하는 대신 지적으로는 열등한 것으로 차별하는 태도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p162. 폭력이 반드시 선행하고 폭력이야말로 국가나 법의 기원이고 근원이라는 사고는 완전히 시야 협착에 빠져 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p165. 불교는 광대한 교양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시불전에 의거하는 한 이런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부처조차 최종적인 해탈, 즉 열반(니르바나)에 달한 것은 죽을 때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최종적인 해탈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티베트 불교의 게룩파에서 최종 해탈자를 자처하지 마라는 규칙은 4대 계율 중 하나입니다. 즉 죽이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에 버금가는 계율인 것이지요.

 

p166. 마르코의 복음서 1332~34절입니다. 예수의 종말의 그날과 그 시간의 도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p168.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p172. 죽음에 대한 선동, 죽음의 공포라는 선동을 받고 오히려 죽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절대적 순간의 향락으로. 이는 사실 나치적인 담론입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일찌감치 자료도 다 나오지 않을 때부터 명민하게 지적했습니다. 나치의 본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고 자신의 죽음과 멸망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이지요.

 

나치가 목표로 했던 것,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사실 잘 모르지 않나요? 그건 자살입니다. 게다가 자신과 셰계를 일격에 동시에 죽이는 것. 종말의 절대적 향락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빈다.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p174. 왜냐하면 현대사상은 그 후 압도적으로 병든 방향으로 향하고 말았으니까요. 누구나 역사의 종말이니 우리는 잠재적으로 아우슈비츠에 있는 것이다느니 인간의 역사는 끝났고 이미 종말이 찾아왔으며 이제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현실에 대한, ‘현재에 대한 굴종을 선전하며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175. 어떻게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역사의 종말이 오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조르조 아감벤이나 코제브처럼요. 시시합니다.

 

p176. 아감벤이 어떤 저작에서 굉장히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일렉산드리아가 어딘가에서 세계의 끝, 종말을 그린 그림이 나옵니다. 즉 천국이 도래한 그림이지요. 거기에는 동물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감벤은 흥분하여 역시 세계의 종말, 역사의 종언은 동물의 세계다, 동물화인 것이다, 하며 기고만장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일신교에서 세계의 종말을 천국의 도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원래 그리스어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라고 하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페르시아어인 파이리다에자가 어원입니다. 그런데 파이리다에자란 무슨 뜻일까요? 원래 여기에는 천국이라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둘러싸다는 의미고, 나아가서는 왕의 즐거움을 위한 광활한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은 헤브라이 문화로 전해져 인간의 종말에 약속되는 구제의 장소인 천국으로 전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자와 양이 함께 어울리며 평화롭게 사는 곳이다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에 오는 천국도 원래는 동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p177. 아감벤처럼 남이 하는 대로 덩달아 끝이다, 종말이다, 동물이다, 하고 떠드는 사람은 전 세계에 우글우글합니다. 그러데 조금은 자신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참하며 조악한 사고의 형태에 알랑거리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p179.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이 책의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아일랜드의 속요 <피네간의 경야>에서 온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신화적 영웅 핀이 돌아온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선 피네간의 ‘Wake’, 경야’, ‘깨어남그리고 삶의 영위인 항적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피네간에 함의되어 있는 ‘Finn-Again’, 다시라는 의미기도 하기 때문에, 또 끝이 왔지만 다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찾아온 종말, 하지만 끝날 것 같아도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p180. 제임스 조이스의 제자인 사무엘 베케트도 <>이라는 소설, 그리고 <승부의 끝>이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은 잡지에 게재될 때 계속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역시 끝날 것 같지만 전혀 끝나지 않는, 길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소설을 썼습니다.

 

괜찮겠지. 이건 말이야, 결코 끝나지 않아. 난 말이야 절대 나가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는 클로브가 주인공 함의 얼굴에 손수건을 덮어주는 데서 끝납니다. 함은 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케트 자신이 베를린에서 이 작품을 연출했을 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손수건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또 손수건은 막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무뚝뚝하게 그렇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p181. 20세기 최대 걸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선 저녁이라는 지문이 쓰여 있습니다. ‘저녁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에스트라공이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직접적으로 이는 단지 구두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중 의미로, 이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끝났다, 라고 말이지요. 거기에 어슬렁어슬렁 블라디미르가 등장하고, 에스트라공의 첫 대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렇게 믿을 뻔했어.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거슬러왔어. 자신에게 이렇게 훈계하면서 블라디미르, 잘 생각해봐. 넌 아직 모든 걸 시도해본 건 아냐, 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

 

p182. 그러자 포조가 돌연 격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지긋지긋해, 그만둬. 시간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얘기 하는 건, 바보 같아! 언제야! 언제야! 어느 날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날, 놈은 벙어리가 되었어. 어느날 나는 맹인이 되었어.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지. 어느 날 태어났어. 어느 날 죽겠지. 같은 어느 날, 같은 어느 시간에. 그것으로 충분하잖아. 여자들은 묘석 위에 걸터앉아 출산을 하지. 그 순간 해가 빛나는 거야.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 앞으로!

 

p183. 이런 베케트주의자로서의 푸코라는 시점 없이 어떻게 푸코에 대해 논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현대문학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 뭔가 결정적인 몰락이나 종언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유치한 사고에 대한 투쟁으로 조직되어 왔습니다.

 

이 희곡은 지금도 부조리나 난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 이 희곡은 뭘 의미하고 있는 겁니까? 하는 젊은 배우의 소박한 질문에 베케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웃으면서 베케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공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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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그리고 다음 원숭이의 말을 머리에 채워 넣기 위해 서둘러 다른 강의실로 떠난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P8. 내가 아는 공부는 반대였다. 어떤 지식 권력의 정당성과 주도권을 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 공부였다. 삶은 언제나 지식보다 풍부한 것이고, 언어에 도전하는 것이었다......삶이 공부의 식민지가 아니라 공부가 삶의 도구였다.

 

P9.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P19. 미국식 표현으로 잔디깍기 맘이라는 말이 있어요. 부모가 먼저 잔디까기 기계로 풀을 깍아줘서 아이가 갈 길을 먼저 열어준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486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예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신이 성공했던 방법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거죠. 그런데 사실 거시적으로 보면 운이 좋은 세대였던 겁니다. 80년대 초반엔 졸업 정원제가 있어서 그전에 비해 어렵지 않게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들이 취업할 무렵인 87,88년도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기가 좋을 때라 대기업 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좋은 일자리 수에 비해 대졸자가 모자랄 정도였죠.

 

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손쉽게 집을 살 수 있었어요. 이른바 굉장히 좋은 라인업을 탄 것입니다. ...일종의 프리라이딩, 운이 좋은 세대죠. .....그런데도 본인들이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복제해서 자기 아이들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P43. 그런데 요즘 이십대 친구들을 보면 대인관계에서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조차 안 돼 있는 친구들을 왕왕 봐요. 머리는 똑똑한데. 그걸 <아프지 않다는 거짓말>이란 책을 쓴 가이 윈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관계의 근육이 쇠퇴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어요.

 

P48. 심리 발달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중 하나의 틀이 자아 중심성egocentrism’에서 자아의 탈중심성egodecentrism’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p56. 아즈마 히로키라는 일본 문화비평가의 표현 중에 게임화된 현실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을 응용하면 모든 일을 정말 게임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시뮬레이션한 대로 통제가 되고 일이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시뮬레이션한 데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아이템이 주어지듯 뭔가가 주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61. 자아 중심성이 굉장히 강하니까 자의식은 무척 높은데, 자기 의견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없고, 그러다보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남 얘기에 쉽게 넘어가는 거죠. 자기 의견이 없게 돼요.

 

 

p63.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겠죠. 그런데 일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계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p64. 미디어가 점점 더 대다수의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시민들을 관전평, 품평을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어요. 댓글을 달고, ARS를 돌리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하는 등등이 마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저 품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거든요. 의견을 말하는 것이 참여자의 입장이라면 품평은 구경꾼의 언어예요.

 

p68. 엄기호. 공부를 하는doing’게 아니라 구경하는 거예요. 교재에 형광펜이 다 칠혀져 있다니, 세상에 그런 공부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구경하는 형태예요, 존 듀이가 말한 대로라면 언더고잉undergoing;’, 즉 겪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죠. 공부 중독이라고 하는데 중독될 실재는 없어요.

 

p76. 특히 정신과가 각광받으면서 최근 7,8년 동안 똑똑한 친구들이 정신과에 많이 지원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정신과 의사가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어요. 정말 똑똑하고, 공손하고, 예쁘고, 잘생기고, 영어도 제2외국어도 너무 잘 하고.....그런데 정신과 의사가 가져야 할 파이팅이 없어요. 아울러 자기가 살아온 세계가 너무 좁으니까 연민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좁고, 마치 요즘 교사들이 공부 못하는 애들을 이해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왜 학교를 안 가니?” 이런 식, “이 정도면 가난한 건가?” 이런 식....머릿속에 상식이 만들어져 있어요.

 

p79. 엄기호. 그들에게는 세상이 안 공정한 거예요. 나는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서울대 왔는데, 그리고 또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정규직이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화 해 달라 그러면 너는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아왔는데 그런 요구를 하느냐, 생각하죠. 우리는 차별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들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이 이야기는 오찬호 씨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잘 나와 있죠.

 

p81. 하지현. 바칼로레아와 논술시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칼로레아는 어떻게 보면 답이 없어요. 구술하는 논리 전개를 보는 거잖아요? 철학적 담론이나 재미있는 주제를 던제주죠. 그런데 우리나라 수리 논술시험은 독특해요. 수학 문제, 통계, 확률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하는 방법과 그것이 왜 그런지를 써라. 전 처음에 이게 무슨 논술시험이야’,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논술시험을 볼 때는 철학 문제나 윤리적 딜레마, 이런 문제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니, 이래야 논란의 여지가 없이 채점이 가능한 거예요.

 

p86. 엄기호. 지금 대학은 논문을 쓰는 교수, 강의를 잘하는 교수, 책을 쓰는 교수, 프로젝트를 잘 하는 교수 등등 더 다양한 형태의 교수가 필요한데, 학교랑 똑같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논문 기계들만 임용되게 되는 거죠. 결국은 이 공정함이라는 게 어떤 공정함인가, 누구를 위한 공정함인가, 라고 질문 할 수밖에 없어요.

 

p99. 하지현. 우리나라는 2천 년대 초반 이후, 특히 IMF 이후에 성장 곡선이 정점을 찍고 이후에는 아마 멈추지 않았나, 5천 만 인구의 내수 시장을 봤을 때 이미 꽉 차지 않았나 싶어요. 7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의 팽창은 이제 불가능하죠. 그런데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486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분당이나 일산의 아파트 분양권을 당첨 받아서 그걸 두세 번 갈아타니 어느새 서울이나 소도시에 꽤 괜찮은 아파트를 갖게 되었고, 그걸 통해서 먹고살 길이 생긴 거죠. 이런 라인업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사회가 팽창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P100. 공부를 통해서 고학력을 얻고 고학력을 통해서 나름의 기본 위치를 갖는 것은 여전히 안전한 길입니다. 하지만 확률로 따지면 성공 확률이 높다기보다 상대적으로 실패 확률이 낮은 방법일 뿐이에요.

 

실제 자료를 봐도 그래요. 사회학자인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2000년부터 2014년까지의 한국노동패널 자료를 분석해서 중간계급 세대 간 이동 경로를 추적했어요. 놀랍게도 부모와 자녀 세대가 모두 중간 계급을 유지한 확률은 10.5 퍼센트에 불과했어요. 10명에 9명은 지위가 달라진 거예요. 이렇게 애를 써서 자기 중간 계급을 물려주려고 부모 세대는 무진장 애를 쓰지만 10명에 9명은 실패했다는 것. 이건 이 전략이 개인의 능력 문제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전략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 아닐까요?

 

P105. 엄기호. 공부라고 했을 때,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얻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위계화되고 학벌화된 시스템의 자격증만이 유의미하게 됐죠. 이반 일리치의 개념을 가져와서 쓰면 한국사회가 스쿨링화된 사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었다는 거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스쿨 자체가 굉장히 위계화된 학벌사회라서, 어디를 나왔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과 그 밖의 모든 것을 검증해주고 보여준다고 보는 사회죠. 그래서 좁은 의미의 공부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생겼죠. 그런데 이게 사회적으로 보면 정말 비극이거든요.

 

요즘 강남 대치동의 학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주는 약 중에 하나가 오력탕이라고 하던데, 총명하게 하고, 뭐 그렇게 하면서 다섯 가지 힘을 준대요. 그런데 그 약의 핵심적인 기능이 잠 안 오게 하는 거래요. 잠자지 말고 공부하라는 거죠.

 

P111. 현재 교육 시스템에서 근대 교육의 기본 정책을 재고해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평균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일으키고, 그리고 주로 제가 만나는 아이들, 하위 50퍼센트 친구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탈락하는 10퍼센트를 5퍼센트로 줄일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에요. 결국 이 친구들도 사회에 나갈 거니까, 사회에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술과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단 말이죠. 그리고 상위 5퍼센트 친구들은 알아서 가는 거지 학교가 힘쓸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고등학교 정문 플래카드에 어느 대학 몇 명, 어느 대학 몇 명 합격했다는 게 그 학교의 성적표가 되어버렸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거거든요. 학교는 학원이 아니거든요. 우수한 몇 명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중간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되는 게 원래 학교의 취지에 더 맞죠. 그러니 플래카드를 붙인다면 졸업 10년 후 80퍼센트의 졸업생이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P114. 엄기호. 학부모고 학생들이고 실제로는 최상인데 그것을 마치 중간값이고 평균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한윤형 씨가 썼던 표현대로 하면 평균압입니다. 평균에 대한 압력이죠. 한국은 적어도 평균이 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매우 높은 사회라는 뜻입니다. 평균이 되지 못하면 탈락이고 낙오이며 패배한 인생이라는 말이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균이라는 건 절대 평균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높다는 거죠.

 

.....중간쯤 되는 아이들도 소위 10개 대학 있잖아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라고 하는, 그 정도까지는 가줘야 평균이라고 생각하죠.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하지현. 10개 대학 정원을 대략 계산해보면 3만 명 정도 되거든요. 현재 수능 수험생을 65만 명 정도로 보면...대략 4.5퍼센트. 그런데 이걸 평균값으로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P.124. 하지현. 얼마 전에 연애연구소를 운영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볼 기회가 있었어요. 기업 교육을 나가서 연애란 어떻헤 하는 것인가를 가르치는 분이에요. 제일 반응이 좋은 직업군이 판검사, 의사라고 하더군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해라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에 열렬한 반응을 보인대요...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분이 저한테 가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그러더라고요. 어디일 것 같으세요

이마트 직원 분들이래요. 이분들은 늘 사람을 대하고 있으니 도리어 연애 기술이라고 하면서 사람 대하는 기술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게 조금 웃기는 거예요.

 

P129. 엄기호. ,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꼭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예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예요.

 

P132. 엄기호. 공부 중독의 비극적 역설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와 삶을 분리시키고 공부에 올인하다 보니 삶이 더욱더 빈약하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것. 그 빈약함과 허약함을 채우기 위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또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만들면서 삶은 공부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고요.

 

P139. 엄기호.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돈을 꽤 많이 벌거든요. 노동 계급의 대표는 아니고 중산층화된 노동 계급이죠. 이 사람들은 이제는 대학 가 봤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아요.

 

P144. 하지현. 마루야마 겐지 식으로 얘기하면 자식도 엄밀하게 말하면 남이다, 아들러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자식이라도 자식의 삶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마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게 참 안되죠. 자식을 자아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여기죠.

 

자신의 삶의 성적표가 자신의 성취에 의해 매겨지는 게 아니라 애가 대학갈 때, 취업할 때, 결혼할 때, 이렇게 세 번, 자신의 인생 성적표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자기 인생에서 내가 뭘 얻었고, 내가 뭘 재미있게 생각했고, 내가 그동안 살면서 사회에 어떤 공헌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이 어느 대학에 갔고, 어디에 취직했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집안과 결혼해서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가를 가지고 자기 인생의 성적표를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라는 거죠.

 

P145. 엄기호.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메시지를 매우 강력하게 던지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학교 안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공부 중독이 차별과 혐오를 굉장히 광범위하게 양산해내고 있거든요. 그 핵심에 지나친 과잉 투자와 보잘것없는 아웃풋이 있다 보니까, ‘내가 이 개고생을 해서 어떻게 얻었는데 내가 왜 쟤랑 이걸 나눠야 하지’, ‘왜 내가 쟤랑 동등해져야 하지’, 이런 생각에 용서가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게 안 되면 안 될수록 중산층들은 교육을 더욱 더 특권화하려고 해요.

 

P147. 엄기호. 여전히 의미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그런 지식인들이 자식에게 내가 소위 공부를 통해서 여기까지 와봤지만 정말 별것 아니더라하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 돈을 발판으로 농부가 돼든 목수가 돼든, 조금 벌고 조금 쓰는 삶을 살아라, 이건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P149.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식을 신빈곤층으로 만든 거예요. 부모님이 아파트 팔아가지고 사교육 시켜줬으니 부자인 줄 알고 살다가, 대학 와서 자기가 신빈곤층이 되었음을 절감할 때,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있을까요? .....그런 학생들 말고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학생들이 있어요. 가난에 대해서 조금의 면역 체계도 없는 학생들이 완전히 멘붕이 되는 거죠.

 

P151. 엄기호. 의사나 변호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을 때까지 갈 수 있는데, 대기업 부장은 다 허깨비예요. 해고되면 끝이잖아요.

 

엄기호. 제가 아는 친구 중에서는 그 돈으로 온 집안 식구가 1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한 집이 있어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안감에 묻죠. “그러고 난 다음에 먹고사는 건 어떻게 할 거냐”, “직업은 어떻게 할 거냐”. 이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두 가지죠. 하나는 내가 무슨 직업을 구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가 사회학자니까, 뭘 하든 굶어죽지 않는 시스템을 사회에서 만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시민 수당이든 어떤 형태든지 간에요.

 

P153. 하지현. 부모고 아이고 리스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요. 그런데 그 두려움을 넘어서야 돼요. “이리로 한번 가봐. 그 대신 6개월은 해봐. 그럼 대충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돼. 그런데 그게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면 그동안 시간 낭비한 게 아니라 최소한 네 인생에서 이 길은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잖아.” 이십대 초반에 얻어야 하는 것은 하고 싶다도 있지만, ‘해보니까 이건 아니다인 것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P156. 하지현. 우리나라 사람들의 3퍼센트에서 5퍼센트에 드는 수입일 텐데, 이들이 허덕허덕한다는 것은.....

 

엄기호. 강남 대치동에 사는 제 친구는 그곳을 늪이라고 표현해요. 안 시키려야 안 시킬 수가 없대요.

 

하지현 : 제가 이런 얘기를 강연에서 하면 나오는 특징적인 피드백이 있습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이 변하지 않는 한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나 개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맞으면서도 현실에 맞지 않는 허황된 얘기로 들린다라는 것입니다. 사교육 안 시키고 그래서 좋은 대학 못 가고 그래서 취업이 안 되면 사회에서 듣보잡취급 받으면서 살 텐데 어떡하느냐는 거죠. 저는 그래서 더욱 더 이부분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와 행동을 해낼 개인이 늘어나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한 명씩 한 명씩이라도 개인의 선택의 변화가 이어지고, 그 수가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수가 된 다음에는 결국 상식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위상 전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다행히 분위기는 무르익었다고 봐요. 중산층이 어려워지면서 더 이상 이 게임에 넣을 판돈이 모자란다는 현실과, 인풋 대비 아웃풋이 턱없이 맞지 않을 정도로 인풋 요구량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고, 아웃풋마저 매우 미비한 확률 게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게임 내지는 이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고 여기서 벗어나야 살 수 있겠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날 그날이 꽤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봅니다.

 

P159. 하지현.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공부가 필요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가 아니라 뭔가를 알고 싶다라는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공부. 이 친구들에게 이전까지의 공부는 불쾌한 기억이거든요.

 

P163. 공부라는 것, 알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데에는 동기가 필요하거든요. 동기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하나는 절박감이에요. ‘이거 모르면 나 죽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이런 것이죠. 두 번째는 경쟁심이에요. ‘쟤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어하는 욕구, 세 번째는 그냥 하고 싶어’, ‘알고 싶어이런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세 가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추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없는 친구들이 있어요.

 

P166. 하지현. ‘그렇다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에 대해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핵심, 맥락을 잘 잡아내는 거죠. 둘째는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셋째가 진짜 공부를 잘 하는 것일 텐데, 이치를 깨닫는 것이죠. 큰 흐름 안에서 이게 뭘 의미하고 있고,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나아가서는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가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이겠죠.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공부는 둘째가 90퍼센트예요. 성적이 아주 잘 나오는 아이는 첫째 덕목인 맥락을 잡 잡아내서 요령이 좋죠. 정작 중요한 것은 셋째인데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칠 여유가 없어요.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비극입니다. 저는 순서로 볼 때 셋째를 목표로 하면서 첫째를 중심으로 흐름을 잡고, 그리고 둘째는 필요에 의해서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P181.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력간 임금 격차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거예요.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임금 격차가 너무 큽니다. 이 경제적 격차가 사회적, 문화적 격차로 이어지는 한 결코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P184. 엄기호.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계급이 구조화가 되면서 동시에 경제적 격차도 구조화가 된다는 점이에요. 경제적 격차가 줄어드는 방식으로 또는 경제적 격차를 완충하는 방식, 이를테면 복지 제도잖아요, 그런 방식으로 계급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P193. 공부의 블랙홀에 빠진 부모는 공부에 중독된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온다. 공부 백 퍼센트짜리 순도 높은 존재일 뿐, 사회성, 공감능력, 유연성 같은 요소는 상대적으로 결핍된 상태다. 공부로 승부하는 나이는 20대 중반까지이고 그 후에는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 요소들이 모자라다고 느끼면 역시 공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책과 학원을 찾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다. 공부라는 블랙홀이 학교를 넘어서 사회와 인생을 빨아들이고 있다.

 

P194. 더 중요한 것은 공부에 중독된 한국인이 그 독 때문에 내 인생뿐 아니라 자식의 인생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사회구조까지도 동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그 길로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끝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올 것이라 믿고 싶지만, 이 대담에서 누누이 반복했듯이 그럴 확률은 급격히 작아진 것이 현재 우리 사회다.

 

모두가 미쳤어, ”이건 아니야를 외치면서도 그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아는 도둑질이 이것뿐이라는 점도 있고, 나만 혼자 빠져나갔다가 혼자서만 불리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이슈로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라는 개인의 문제가 되는 순간 이전의 합리적 상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멈춘 채 하던 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P195. 이 대담을 시작으로 한 명이라도 더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전환과 용기의 불씨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 다른 트랙에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부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설 정도의 참여자가 모이고 나면, 블랙홀은 그 위력을 잃고 사라져버릴 것이라 기대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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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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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을 읽기 전까진 중산층 교육열이 그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하다니! 잠실이 이정도면 대치동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우리 세대야 베이비 붐 세대여서 초등학교 때도 한 반 70명에 오전, 오후반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대학가기도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소설을 보니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듯 했다.

 

한국의 사려 깊은 사회학자 엄기호와 신뢰할만한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이 대한민국 공부 중독현상에 대해 논한다.

 

엄기호는 학생들이 아프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공부 중이다. 학생들은 공부 중이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절대로 타석에 직접 서려 하지 않는다. 타석에 서지 않아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만능감을 해치지 않을 수 있다.

 

20대 아이들은 기본적인 대인관계에서도 서툴고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할 줄 밖에 모른다. 그들은 현실을 게임처럼 받아들인다. 자신이 열심히 했다면 아이템이 주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력적이 되기까지 한다. 데이트 폭력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은 자기중심성은 강하지만 자기 의견이 없으므로 어떤 결정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 얘기에 쉽게 넘어가기도 한다. “정답이 뭐냐?”라는 질문만 받아온 아이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구경한다. 교재마저 형광펜이 칠해져 나오는 형국이다.

 

누가 아이들을 공부로 모는가? 물론 부모다. 특히나 486세대들. 이들은 실제로 공부를 통해 성공한 세대기도 하다. 하지현은 486세대가 굉장히 운이 좋은 프리 라이딩시대였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공부를 통한 계급 상승이 가능하던 세대였다. 그러나, 그런 모델은 이제 끝났다. 신광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열에 아홉은 계급 유지에 실패했다.

 

특히나 하지현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평균을 너무 높게 잡는다고 지적한다. 흔히 말하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의 대학 정원은 3만 명, 수험생들은 65만 명이다. 4.5퍼센트다.

 

가장 교육에 목을 메고 있는 계층은 중산층이다. 그렇지만 판돈은 점점 더 커지고 아웃풋의 효과는 미비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중산층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서 신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

 

엄기호, 하지현은 과도한 사교육이 이제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말한다. 하루빨리 이 미친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부모들은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현은 생각의 전환과 용기를 가지고 한 사람이라도 먼저 이 트랙을 빠져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임계점을 넘으면 보다 건강한 교육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얼마 전, 아이들 놀이 책을 써서 제법 유명해진 친구와 카톡을 했다. 그 당시 친구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외국에 있었다. “놀이 책 썼으면서 아이들 유학 보내는 거 좀 그렇지 않냐?”고 물었다. 친구는 톡했다.

 

그건 노는 거고 이건 공부지.”

 

, 그렇구나.’ 작금의 교육 문제. 트랙에서 벗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타석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공부한다고 핑계를 대곤했었다. ‘내공을 쌓는다라는 표현대신 헨리 밀러의 말을 빌려 렌즈를 닦는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충분하지 않다고. 만일 렌즈가 완벽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엔 모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놀라운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주겠다고.

 

실제로 부족하다 느껴서 였겠지만 한편으론 만능감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준비가 되면 나는 최고로 잘 할 수 있어.’

 

렌즈처럼 완전해지는 순간이란 없다.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읽으면서 꽤나 뜨끔 거렸다. 혹시 나도 공부중독이 아닐까.

나 역시 여전히 삶을 회피하고 식민화하는 공부를 하는 중일까.

삶의 무게를 지고 싶지 않아서 책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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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2 08:23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절학무우,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풍림화산님도 불바람(?)같은 주말 시작하세요^^

아타락시아 2016-03-1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오는 공부 중독이 아니죠.

시이소오 2016-03-12 15:15   좋아요 0 | URL
진정한 공부가 필요한 거겠죠?^^

cyrus 2016-03-12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지현 씨가 문제점은 잘 지적했는데, 해결방안이 아쉬웠어요.

시이소오 2016-03-12 21:59   좋아요 0 | URL
해결방안이 참 애매모호 하죠 ^^

기억의행성 2017-09-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준비를 회피의 다른 말로 쓰는 저의 모습이 생각나 뜨끔하네요

시이소오 2017-09-29 22:18   좋아요 0 | URL
기억의 행성님도 일단 저지르세요^^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저번에는 비평가와 전문가라는 두 가지 지의 나쁜 형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움을 받아 그가 말한 변질하여 가치판단의 힘을 잃어버린 철학자칼리오스트로 같은 철학자라는, 역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형상과 반향하면서 말이지요.

 

p67. 사람들은 거기서 적어도 여섯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호칭이야 논자마다 다르지만 일단 열거하기로 합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p68. 혁명은 보통 영어로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일반적인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어느 유명한 에피소드에서 입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았을 때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반란이다라고 말하자 측근인 라 로슈포코 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폐하. 이건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옵니다.”라고 했다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p69.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별칭으로 교황 혁명은 유럽에서 최초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슬로건”, “상징적인 기도 문구이고 은유”(르장드르)였습니다. 그 슬로건, 기도, 은유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Reformatio totius orbis’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세계혁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Reformatio’를 혁명이라고 번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버먼이 이를 독일혁명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역시 원어를 보면 독일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혁명이라고 번역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p73.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가요? 폭력이고 유혈이며 참극입니다. 영국혁명의 일부를 이루는 명예혁명은 영어로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빛나는 혁명’, ‘영광스러운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불리는 걸까요? 무혈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p75.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9. 수도원은 원래 학문과 노동과 금욕과 명상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수도원은 이제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소굴, 패셔너블한 사교장으로 전락해갔던 것입니다.

 

p81.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을 벌하는 정의의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 그리고 모독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신에 대해 분노를 안고 있었다. 가련한, 영원히 상실된 죄인을, 죄 때문에, 십계명에 의해 온갖 종류의 재앙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신은 만족하시지 않는 걸까 ?

 

p83.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p84.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p85.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p86.루터가 말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루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충고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려 한 번도, 두 번도 이미 충분히 읽었고 들었고 말했다. 뭐든지 근저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갖는 자는, 때 아닌 때에 열매를 맺는 과일 같은 것으로, 절반도 익지 않은 채 떨어져버릴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이 세계에는 준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미쳤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륀베델처럼요. 저는 이를 준거의 공포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런 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일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루터는 아무래도 자신이 미쳤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91.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한 황제 카를 5세가 기다리는 보름스 국회의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p93.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좀 더 넓게 잡아도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의 전체 서적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9월성서>1534년까지 85쇄를 찍어 냈고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p97.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크 빈민 구제법이라는 법률을 공포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이 도시에 가난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구걸을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실제로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p102. 어쨌든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그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루터파 법학은 양심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재판관의 양심적인 판단이지요. 서구의 현행법이 루터파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공정하게적용한다는 것은 양심에 따라판단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p104.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한 싸움일지라도, 그륀베델 같은 광기의 위험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p106. 연설은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술과 여자로 몸을 망칠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술을 금지하고 여자를 죽이라고 할 것인가?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늘에서 떼어내야 하는가?

그런 성급함이나 폭력은 신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

말이 그 모든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p109.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들뿐입니다. 부당하게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문화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95개조의 의견서가 있었던 것처럼 12개조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전적으로 루터적인 방식으로 성서에서 합법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흘린 피는 무익했을까요?

 

아닙니다. 전쟁이 종결된 이듬해인 1526년 슈바이엘에서 제국의회가 개최됩니다. 거기에서 농민의 요구에 대한 대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논의 끝에 황제에게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12개조의 요구를 원안으로 삼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부당한 징세가 폐지되었고, 농노제도 폐지되었으며, 이동의 자유나 토지의 반환이 제기되었습니다.

 

p111.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상의 힘을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대학교수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도 있다고 말이지요. 하이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유럽의 이신론의 목을 잘라버렸고, 루소의 책은 로베스피에르를 매개로 앙시앵레짐을 파멸시킨 피투성이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p112.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p113.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p114.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정보의 틈새에서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통치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무미건조한 정보이자 서류인 어느 시공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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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은 `책의 놀라운 힘`을 제대로 직시했던 게 틀림없었던 듯합니다. 정성들여 옮겨주신 덕분에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나마 엿들을 수 있어서 참 좋네요. 혁명가 루터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도 여러 곳에서 `그의 영향력`을 거듭 강조하더군요. 다른 한편으로, 니체는 `르네상스 혁명`으로 거의 다 죽어가던 `기독교`를 `루터`가 기어이 다시 살려냈다면서 ˝르네상스가 ㅡ 의미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그를 몰아세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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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는 사람들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지우고 과거를 파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서적 2만여 권이 불태워지는 동안 선전 부장이던 파울 요셉 괴벨스가 환성을 지르는 10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이 왜설스런 것들을 불길로 집어던지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거야말로 전세계를 향해 낡은 정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막강하고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불사조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으로 훗날 런던의 유대학을 위한 레오 백 연구소 소장이 된 한스 파우커도 그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화염 속으로 책을 집어던질 때는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설이 이어졌다고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던지기 전에는 검열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정신의 파괴적 분석에 기초를 둔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허풍에 맞서서,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기꺼이 불길에 맡기겠노라.˝ 스타인벡, 마르크스, 졸라, 헤밍웨이, 아인슈타인, 프루스트, H.G. 웰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잭 런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저자들이 이와 비슷한 묘비명으로 경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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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의 판단

예를 들면 1981년에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권은 칠레에서 『돈키호테』를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호소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다는 판단에서였다(피노체트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23:33   좋아요 1 | URL
이토록 장문의 댓글을. ㅋ 감사합니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니까요. 지배자들 입장에선 다루기가 어려워지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