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밤. 문학의 승리

 

p15.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p17.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을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p23.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p24.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p25.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p31. 재현과 미. 그대는 아름다운 교양을 가진 인간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마치 아름다운 지방을 찾을 때처럼 역시 제한된 전망과 광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전경적 인간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전경적인 지방처럼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라고 말했습니다만, 바로 현재를 좇으려고 하는 이런 초조함에서 절대적으로 잃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조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손끝에서 달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p32. 니체는 온갖 책에서 회임, ’임신이라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책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라고.

 

임신, 회태, 수태. 이런 은유를 그는 반드시 침묵’, ‘과묵과 연결시켜 말합니다. 또는 휴식이 양생이라든가, 어쨌든 소요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가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한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마리아의 수태‘conceptio Maria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conceptio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

 

p33. 질 들뢰즈가 쓰는 것여성이 되는 것의 연결을 강조하며 쓰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남자라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닐까라고 묻는 건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p34. 그렇습니다. 철학이란, 그리고 쓰는 것이란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p35.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p39. 그러나 그 벌것벗은 형태의 읽기라는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륀베델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이. 그는 아마 그 텍스트를,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동경과 사랑을 모조리 털어놓는 거울처럼 보고 말았을 겁니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을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미쳐버리고 말았겠지요. 아마도.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p40.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체의 나는 일개 다이너마트다라는 대사를, 뭔가 과장되고 멋이나 부린 농담이나 그 비슷한 것쯤으로 흘려듣는 만만한 태도에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p42.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p42.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p43.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p44.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p47. 프로이트가 10대 때부터 애독했던 작가에 루트비히 뵈르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수필에 <사흘 만에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생각한 것을 뭐든지 종이에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핏 보는 것보다 꽤 어려운 일입니다. 뭐든지, 라는 것은 아무리 부끄럽고 보기 흉한 일이라도, 불쾌한 일이라도, 무의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도, 쓰기에 괴로운 일이라도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 쓰고, 또 쓰고 마구 써대고 있으면 뭔가가 보이게 됩니다.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자동기술이 정신분석의 영향 하에 있고 그 정신분석이 뵈르네의 방법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p48. 리처드 엘먼의 방대한 전기에 확실히 쓰여 있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환희또는 향락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바꾼 것입니다. 아니, 과장이 아닙니다.

 

p50. 그런데 모더니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영어 표준판을 낸 제임스 스트레이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구혼한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리튼 스트레이치의 동생입니다. 또 표준판을 출판한 호가스 출판사는 울프 부부가 세운 출판사입니다.

 

p52.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의 제목이 뭐일 것 같습니까? ‘그 책이란 무슨 책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제목의 책에 대해 쓴 수필입니다. 여기서 그런 소년소녀용의 낡아빠진 책에 대해 뭘 그렇게 정색을 하느냐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p53. 로빈슨은 해변에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 내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에 겁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 또 그 장소에 가봤더니 발자국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것은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p55. 다시 한 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이런 말을 써버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라는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 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p57. 애초에 문학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어로 되었던, 당초에 이것은 먼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의미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간된 저작의 총체를 의미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헌이나 서지에 가깝겠지요.

 

예컨대 페스트에 대해서는 방대한 문학이 있다라는 용례가 보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문학’, 즉 아름답다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야 나타납니다. 17세기에 출현한 미적인 문학이라는 의미를 갖는 벨 레트르라는 어휘도 있습니다.

 

p57. 좀 더 분명하게 말하지요. ‘문학이란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을 말했습니다.

 

p59. 라틴어의 용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집니다. 즉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 라틴어의 문학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성전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기법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이나 규범, 제도와 관련된 텍스트를 둘러싼 기예도 문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협애한 것인지,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p61. 그러나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문학이라 불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따라서 끝을 모르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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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3-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들 ㅡ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0:34   좋아요 1 | URL
방문해주셔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0:36   좋아요 0 | URL
흐흣~^^
별 말씀을 요!^^
저만 썰렁하게 느끼는 중일까요? 안보이는 분들 많은것 같은건 ㅡ (있는 분들도 못챙기면서 !^^;)


시이소오 2016-03-11 10:38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아직 저는 북플 새내기라 잘 모르겠어요 ㅋ^^;

[그장소] 2016-03-11 10:39   좋아요 0 | URL
아..핡 ㅡ저...저도..새내기입니다~일년 버틴!새내기!^^

시이소오 2016-03-11 10:41   좋아요 1 | URL
저는 이제 2개월 정도요^*;

[그장소] 2016-03-11 10:50   좋아요 0 | URL
일년 ㅡ금방 갑니다~!뭐했나 ㅡ싶으면 지나간 시간이네요...!2개월 ..시작이 반 ㅡㅎㅎㅎ
응원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1:10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1년 후에 `그장소`님 얼마나 따라잡을지 궁금하네요. ㅋ^^

[그장소] 2016-03-11 11:12   좋아요 0 | URL
음 ㅡ얼마든지 ㅡ내공이 있으실테니..원체 많이 읽으시기도 하잖아요!^^

시이소오 2016-03-11 11:15   좋아요 1 | URL
이거 왠지 제논의 역설과 비슷해지는건 아닐지 ㅋ
죽어도 못 따라잡는 ^^;

[그장소] 2016-03-11 11:31   좋아요 0 | URL
아ㅡ별 ...별 ㅡ말씀을 ..
제가 미칠듯한 연애에 빠져 책을 놓지 않는한 ㅡ아니면 영혼의 책이다 싶은 단 한권을 찾았어ㅡ하는 경우가 아니면..놓을일은 없겠지만 ㅡ그래도 갈지자 다이아모드 스텝이라 ㅡ잘 꼬이고 넘어져서 ..충분히 따라오실걸로..!!!

시이소오 2016-03-11 11:41   좋아요 1 | URL
10년 후를 내다보고 갑니다^^

[그장소] 2016-03-11 12:31   좋아요 0 | URL
음 ㅡ지금도 그때도 ㅡ저는 살아있다면! (응?~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엉뚱한 놀이에 빠져 있길 ㅡ바라는 중입니다.
책에서 빠져 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테니..저의 경우 !^^;
응원은 공짜니..많이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2:38   좋아요 1 | URL
저도 책에서 빠져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텐데... 응원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2:45   좋아요 1 | URL
좀전에 읽은 토픽 ㅡ글
짧은 한줄로 심금울리기 ㅡ에...
사람들이 넘 감동하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경기대 헤밍웨이 ㅡ라는 ...
그 문제의 한 줄은..

크리스마스에 (경기대 도서관)열람실여나요?
.
.
.
왕~왕~왕~~~( BGM은 자동)~
ㅋㅋㅋ
우리 크리스마쓰에도 책읽어요..쭉~~~~!!^^

시이소오 2016-03-11 13:28   좋아요 1 | URL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놀아야죠 ㅋ^^

[그장소] 2016-03-11 13:54   좋아요 1 | URL
그러니 ㅡ오죽하면 ㅡ이래저래 눈물 빼는 글로 등극을 했겠어요...저는 혼자도 별 개의치 않는 주의 입니다만~^^

oren 2016-03-1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몇십 분 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들으면서, 문득 작년 봄에 가봤던 프라하와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과, 그리고 (그의 흔적조차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카프카를 잠시 떠올렸었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에 살았으면서도 왜 카프카는 <성>이나 <소송> 혹은 <굴>과 같은 어둡고도 답답한 소설들만 썼을까 싶은 의문도 다시금 떠올려보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카프카가 ˝초조해 하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했다니 그 말의 진의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보여줬던 온갖 `아득한 미해결 상태`와 `압박`과 `불안`과 `초조` 조차도 결국 모두 다 `탈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저 말에 따르면) `유죄`로 귀결되고 마는가 싶은, 어설픈 비약까지도 해보게 되구요.

그리고, 전혀 뜻밖에도, `버지니아 울프가 학교에서 낭독했던 과제물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마주친 것도 반갑습니다. 비록 그녀가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말이지요.^^

* * *

드 베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책을 수집했다. 그가 소장한 책은 영국의 다른 주교들의 책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 책들을 침대 주변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책을 밟지 않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행운을 감사하게 여겼던 드 베리는 학자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아닌 것을 그의 것이라 이야기했고 형편없는 시구를 인용하면서도 마치 오비디우스의 시구인 양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견한다. 책에는 전쟁을 암시하는 전조들이 설명되며 평화의 법도 나온다. 모든 존재들은 결국에는 부패하고 썩게 마련이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삼키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치유법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학교에서 낭독한 한 과제물에서 드 베리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를 받게 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그런 질투심으로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없어. 그들에겐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라고 말할 것이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11:58   좋아요 2 | URL
책 읽기를 사랑하시는 오렌님껜 아무것도 드릴께없네요^^

니페딘1T 2018-04-04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미 리뷰가 다 되어 있었네요!!! 역시!!!

이 책 너무 잼나지 않나요? ㅎㅎㅎ

이 책보고 똑같이 따라하면.... 출판사는 다 문 닫겠죠? ㅋㅋ

시이소오 2018-04-04 09:56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넘 재밌게 읽었어요. 이건 리뷰라기보단 필사?? ㅎㅎ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사료처럼 던져주자.

 

책을 필사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둘째, 빌려온 책이기 때문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리뷰 대기 중인 소유한 책만 한 백 여권 정도 있다. 빌려온 책들 때문에 계속 밀린다.)

셋째, 결정적으로 리뷰가 써지지 않아서다. (필사를 하다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막막한 책들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경우엔 말미에 이현우의 추천 글이 실려 있다. 깔끔하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은 추천의 글만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 쓰자니 추천의 글과 똑같은 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리뷰쓰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필사를 했다. 그다지 두툼한 책도 아니고, 선별한 문장들만 필사를 했건만 하루 종일 걸렸다. 필사를 끝내고 나서는 기절했다. 다음 날은 저녁 약속도 펑크 내고는 하루 종일 잤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책 한 권을 재독하고 필사하는데 에너지를 전부 다 소진시킨 느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저자의 열광적인 문체와 주장에 호응하다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정도의 책.

 

크게 보자면 책을 읽는 방법엔 다독의 길과 정독의 길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후자를 강조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성경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성경 박사가 된 루터는 물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 당시엔 누구나 교황을 따르고 추기경을 따르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었다. 심지어 천국행 티켓을 돈을 받고 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경에 그런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루터는 결국 대 이단으로 선고 받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든 성구를 계속 따르겠다.” “따라서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루터로부터 이른바 16세기의 종교개혁’, 혹은 독일혁명’,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에 따르면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다신교를 믿던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목소리를 듣는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읽었다. 성경을 읽은 그는 쇠망해가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된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역시나 성경을 읽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개혁 운동에 나선 아빌라의 성 테레지아다.

 

문맹인 상인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 상인은 도망친다. 그러나, 아내 하디자의 설득에 다시 가브리엘을 찾아간다. 천사가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물어도 상인은 싫습니다.”하고 거부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상인이 듣겠다고 하자 천사가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천사는 상인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것을 상인의 신체에 돌려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였다.

 

신은 무함마드에게 붓을 주고 말한다.

 

써라.”

 

그렇게 해서 쓰인 책이 책의 어머니’ <코란>이다.

무함마드와 그가 받아 적은 책 <코란>에 의해 현대 이슬람 문명이 태동했다.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유시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무려 600년간 망각에 묻혔던 책이었다. 이후 이 책이 근대 모든 법의 원천이 된다. 중세해석자 혁명은 무엇인가? 이 책을 옮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스니티아누스 법전을 옮기던 당대의 법학자를 상상해보자. 이건 법전이다. 이상하게 오역하면 죽는다.

(현대 번역가들 책상 앞에 붙여 놓자) 손으로 베껴 써야 하는데 한 글자라도 틀리면 큰 소동이 벌어진다. 번역을 하고 제본, 주석, 수정, 색인을 하는데 100년이 걸린다.

 

텍스트란 곧 법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꼭 문자를 필요치 않는다.

신체에 법과 신화를 새기면 그것 역시도 텍스트, 곧 문학이다.

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에서 춤, 음악, 연극, 노래, 회화 이 모든 것이 다 문학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종언, 예술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인류의 멸망을 말한 이들을 경멸한다. 옴 진리교같은 사이비 종교. 헤겔, 코제브, 하이데거, 아감벤 같은 철학자 등등.

 

20만년 중 5천년이니 80세 수명의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현 인류는 겨우 두 살에 불과하다.

문학이 끝났다고?

 

니체는 자비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에게 보냈다.

세계에서 단 7.

 

19세기 문맹률은 어땠을까? 여기서 문맹률의 판단 기준은 사인을 할 수 있는가였다. 잉글랜드는 30퍼센트. 프랑스는 40~45퍼센트, 이탈리아는 70~75퍼센트, 러시아는 90~95퍼센트였다.

 

이때 러시아 작가엔 누가 있었나?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등.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다. 사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400만 명. 즉 당시의 러시아 작가들은 0.1%에 승부를 걸었던 셈이다.

 

읽는다는 것은 혁명이다. 루소가 그랬고, 무함마드가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다. 전태일은 무엇을 읽었나? 근로기준법을 읽어 버리고말았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을 정도로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하루에 15시간 일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물었으리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만일 세계가 맞다면, 법이 맞다면 책이 틀린거겠지.

결국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을 들고 자신의 몸을 성화처럼 태웠다.

그가 남긴 불씨는 이후 한국 현대사 혁명의 순간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벤야민은 말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발소리가 들려온다. 들리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 이제 시작이다.

읽어라. 써라, 고쳐 읽어라. 고쳐 써라. 발표하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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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6-03-11 0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씹어드시는군요.넉다운될 정도로 힘을 다하여 필사까지 하시며 책을 읽고, 리뷰를 쓰시다니.. 부끄럽네요.
쓰신 글 마지막은 주문같네요. 집어들고, 읽어야죠. 배우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08:56   좋아요 2 | URL
ㅋㅋ 빌린 책이라서요. 맞습니다. 마지막은 주문입니다. 친구에게, 저에게 건네는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3-1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이 책은 무엇인데 이토록 뜨거운 리뷰를 양산하는지... 아무리 얇아도 필사가 진짜 쉽지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3-11 20:55   좋아요 0 | URL
책이 뜨거우니까 리뷰들도 뜨겁나 봐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리뷰를 읽으면
책이 막~~ 읽고 싶어져요^^

시이소오 2016-03-11 23:28   좋아요 0 | URL
저는 깊이에의 강요님의 댓글을 읽으면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어져요^^

깊이에의강요 2016-03-11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이소오 2016-03-11 23:56   좋아요 0 | URL
^^

oren 2016-03-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책 속 내용들을 쭈욱 읽어보니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의 주장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나 많아 좀 놀랍습니다. 물론 사사키의 책은 `책과 혁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조차 좀 격렬한 데가 있다면, 망겔의 고찰은 훨씬 더 차분하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좀 더 일반적이면서도 드넓은 지평 위에 `독서의 역사`에 대한 폭넓은 탐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로는 꽤나 다르게 접근하는 책으로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만... 굳이 예를 들자면, 망겔의 책에선 `필사`에 대해서조차도 무려 몇십 쪽을 할애할 정도니까요... 기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제가 베껴둔 `몇 대목`만이라도 여기에 좀 옮겨볼까 합니다.. (옮겨 붙이는 일은 참 쉬운데, 협소한 공간에 너무 길게 붙여넣는 꼴이 너무 꼴같잖아서 좀 민망하긴 합니다...)

* * *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

이제야 필사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인쇄술이 필사 텍스트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마음 속 깊이 새겨 볼 만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구텐베르크와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자들의 손재간을 흉내내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인큐내뷸러는 외관이 필사본을 쏙 빼닮았다. 15세기 말경에는, 비록 인쇄술이 확립된 터였지만 우아한 손재능에 대한 동경이 사그러들지 않았고, 서구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달필의 일부는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었다. 책을 대하기가 더 쉬워졌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편으로 글자를 보다 우아하고 두드러지게 쓰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는 인쇄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육필 입문서의 시대이기도 했다. 기술상의 발전이-구텐베르크의 경우처럼-그 기술로 인해 뿌리째 뽑혀 버리리라고 예상되던 것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시키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주목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자칫 간과하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식으로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전통적인 미덕에도 참다운 가치가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 * *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 * *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고백록』의 어느 중요한 단락에서 두 가지 방식의 독서법-소리를 내는 방법과 소리를 내지 않는 방법-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나머지, 또 자신의 과거 죄에 분노를 느끼면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그때까지 자신의 여름 정원에서 (큰 소리로) 함께 책을 읽고 있던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빠져 나와 무화과 나무 밑으로 몸을 던져 흐느껴 울었다. 바로 그때 근처의 어느 집에서 어린이(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노래의 후렴이 ˝책을 잡고 글을 읽으세˝였다. 그 노랫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리피우스가 아직도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가 미처 다 읽지 못했던 바울의 『사도행전』한 권을 집어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그 책을 집어 펼친 뒤 시선이 가장 먼저 닿은 첫 부분을 소리내지 않고 읽었다˝고 말한다. 그가 소리내지 않고 읽은 단락은 로마서 13장으로, ˝육신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지 말고 그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갑옷처럼` 걸쳐라˝라는 훈계였다. 혼비백산한 그는 문장의 끝에 이른다. `믿음의 빛`이 그의 가슴에 충만하고 `회의의 어둠`은 말끔히 걷힌다.

* * *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고백록』을, 나의 라틴어 선생이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좋아했던, 오렌지색 표지에 두께가 얄팍했던 로마 고전판을 지금도 가지고 왔다. 그 책을 손에 쥔 채 여기 이렇게 서 있노라니 언제나 주머니 크기만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품고 다녔던 저 위대한 르네상스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와 어떤 동료 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고백록』을 읽을 때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정스레 속삭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던 그는 인생 말년에 가까워서는 그 성인과 상상 속에서 3번이나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나의 비밀』이 그것이다.

* * *

페트라르카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도 젊은 시절에 꽤 혼란스런 삶을 살았다. 단테의 친구였던 그의 아버지는 단테처럼 자신의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페트라르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들을 아비뇽에 있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의 궁정으로 옮겨야 했다. 페트라르카는 몽펠리에와 볼로냐의 대학들을 다녔으며 아버지가 죽고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는 다시 아비뇽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미 돈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富)도 젊음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방탕한 생활 몇 년 만에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대부분을 탕진하고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서 발견한 키케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들은 새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의 말에 잠재해 있던 문학 취미를 일깨워 주었고, 그는 여생을 걸신들린 듯이 책을 읽어댔다.

그는 30대 중반에 두 개의 작품 『저명한 남자에 대하여』와 시 『아프리카』를 창작하면서 신중하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들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고 실토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로마의 국민과 상원으로부터 월계관을 얻는 영광을 누렸다.

* * *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나의 비밀』에서 페트라르카(그의 기독교 이름인 프란체스코로)와 아우쿠스티누스는 `진리 부인`이 뚫어져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정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프란테스코가 자신은 도시의 공허한 번잡스러움에 지쳐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의 삶에 대해, 시인인 프란체스코의 서재에 꽂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긴 하지만 아직 프란체스코가 어떤 식으로 읽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있는 책과 같다고 대답하면서 그에게 미쳐 버릴 만큼 성가시게 구는 군중을 주제로 한 텍스트를 몇 권 상기시킨다.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것도 들어 있다. ˝이런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묻는다. 그 질문에 프란체스코는 책을 읽을 때는 매우 유익하지만 ˝책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책에 대해 느꼈던 모든 감정도 눈 녹듯 사리지고 마는걸요˝ 라고 대답한다.

아우구스티누스 : 그런 식의 독서는 지금 매우 보편적이라네. 학식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으니까. ······ 하지만 자네가 적절한 여백에 약간의 메모를 간결하게 적어 놓으면 아마 독서의 열매를 쉽게 즐길 수 있을 걸세.

프란체스코 : 어떤 종류의 메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우구스티누스 :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억지로라도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 보라구.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런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 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자네에게 유익할 것 같은 어떤 문장이든 접하게 되면 분명히 표시해 두게. 그렇게 하면 그 표시는 자네의 기억력에서 석회의 역할을 맡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멀리 달아나고 말 걸세.

(페트라르카의 상상력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암시하는 독서법은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사고를 위한 버팀목으로 책을 이용하지도 않고, 또 사람들이 현인의 권위를 믿는 것처럼 책을 믿지도 않으면서, 책에서 사고와 문장과 이미지를 취한 뒤에 그것을, 오래 전부터 머리 속에 담고 있던 다른 텍스트로부터 정제해 낸 또 다른 사고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거기다가 독서가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곁들여서 사실상 전혀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해 내는 독서 방법이었다.

* * *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페트라르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독서법도 그 자신이 `신성한 진실`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을 고려하다 우연히 터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신성한 진실`이란 책장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해석해 내기 위해 독서가들이 꼭 갖춰야 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는 심지어 작가의 의도마저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런 작업은 독서가 자신이 다른 독서 경험을 기억해 냄으로써만 가능하며, 그런 기억을 통해 작가가 책장에 담은 기억이 자연스레 흘러 나온다고 페트라르카는 암시한다.

* * *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 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시이소오 2016-03-12 00:08   좋아요 2 | URL
북풀로 읽다가 아무래도 컴으로 다시 읽어야겠어요. 오렌님 사이트가서 복습도 하고 망엘 혹은 망구엘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밤의 도서관은 읽는 중이에요^^

머털이 2016-03-12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훅! 하고 강하게!! 궁금하네요...👍👍

시이소오 2016-03-12 01:54   좋아요 0 | URL
목적 달성이네요 ^^

니페딘1T 2017-10-0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을 글에 전율이 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7-10-02 09:21   좋아요 0 | URL
이 책 자체가 전율입니다. 니페딘님 제가 고맙습니다^^
 

P162.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P166. 볼테르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하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는 마라. 그가 밤에 날 죽일지 모르니까.”

 

P170.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상상의 질서가 정확히 어떻게 삶이라는 직물 속에 짜 넣어졌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요 요인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다.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3. 상상의 질서는 상호 주관적이다.

 

P173. 낭만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이 모두를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반복되는 일상과 친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먼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P211.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오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1. 경제적인 것, 화폐 질서

2. 정치적인 것, 제국의 질서

3. 종교적인 것,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P308.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일신교는 기원전 1350년 경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파라오 아케나텐은 이전까지 이집트 만신전에서 그저 그런 위치를 차지하던 아텐신이 사실은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했다.

 

P313. 이신교는 이른바 악의 문제에 간명한 해답을 주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인 세계관이다. 이 유명한 문제는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근본적 관심사 중 하나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직관에 반하는 답으로서, 즉각 수많은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악을 선택하도록 허락한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악을 택하며, 일신교의 정통적 설명에 따르면 이런 선택은 반드시 신의 벌을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아무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일신론자들이 악의 문제에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다.

 

P314. 요약하면, 일신론은 질서를 설명하지만 악 앞에서 쩔쩔맨다. 이신론은 악을 설명하지만 질서 앞에서 당황한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논리적 방법이 하나 있다. 온 우주를 창조한 전능한 유일신이 있는데 그 신이 악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을 가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P321.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P327. 인본주의


1.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2.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3. 진화론적 인본주의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P328. 그런데 영원한 영혼과 창조주 하나님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자유주의자로서 사피엔스 개개인이 뭐 그리 특별한지를 설명하기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려워진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P329.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P332. 나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나치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인권, 공산주의와 싸운 것은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찬양하며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따르면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반 쯤 진실이다. 인류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었다기보다는 오로지 히틀러 자신만을 위버멘쉬로 믿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는 예컨대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P173.

 

P340.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P342.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P344.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P356. 하지만 현대과학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 무지를 기꺼이 인정하기.

현대 과학은 라틴어로 표현하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우리는 모른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2. 관찰과 수학이 중심적 위치 차지

3. 새 힘의 획득 .

 

p383. 최근 유전공학자들은 예쁜꼬마선충의 평균 수명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나노공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나노 로봇으로 구성된 생체공학적 면역계를 개발 중이다. 그 로봇들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막힌 혈관을 뚫고, 바이러스와 세균과 싸우고, 암세포를 제거하며, 심지어 노화과정을 되돌릴 것이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p441. 스미스는 경제를 -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잉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 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할 뿐.....

 

(알려져 있다시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현 시점에 가장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곳은 말리다.)


p457.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애초에 한 주에 50리브르에 발행되었다. 12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키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 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p464.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가장 현명한 경제정책은 정치를 경제로부터 분리하고, 과세를 줄이고,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며,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 현 정부와 어용 경제학자들의 논리)

 

시장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기, 도둑질,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다. 속임수를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할, 경찰, 법원, 교도소를 설립하고 지원함으로써 신뢰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체제가 할 일이다. 왕이 시장을 적절히 규율하는 업무에 실패하면 신뢰의 상실, 신용의 축소, 경기침체로 이어진다. 우리가 1719년 미시시피 버블에서 배운 교훈이 이것이었다. 혹시 잊은 사람이 있었다면 2007년 미국의 주택시장 버블과 그 결과로 일어난 신용 붕괴와 불황이 상기시켜주었을 것이다.

 

p569. 최근 러시아, 일본, 한국 과학자로 구성된 연구진은 시베리아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작업을 완료했다. 이제 이들은 현생 코끼리의 수정란에서 코끼리 DNA를 제거하고 매머드에서 복원한 DNA를 삽입한 뒤 그 수정란을 암코끼리의 자궁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앞으로 22개월 후에는 지난 5천 년 사이에 처음으로 매머드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매머드만으로 끝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최근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 처치 교수는 이제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으니 복원한 DNA를 사피엔스의 난자에 이식할 수 있고, 그러면 지난 3만 년 이래 처음으로 네안데르탈인 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P572. 미국의 군사 연구기관인 국방고등연구기획청DARPA은 곤충 사이보그를 개발 중이다.

 

2006년 미 해군잠수전센터는 사이보그 상어를 개발하겠다는 의도를 발표했다.

 

P573. 최첨단 보청기는 바이오닉 귀라고도 불린다. 귀에 이식된 이 장치는 귀의 바깥에 장치된 마이크로폰을 통해 소리를 흡수한다. 장치는 소리를 걸러서 인간의 목소리를 식별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번역한다. 신호는 중추 청각신경으로, 다시 뇌로 전달된다.

 

미 정부가 후원하는 독일 회사인 망막 임플란트는 시각장애인이 부분적으로라도 볼 수 있도록 망막에 삽입하는 장치를 개발 중이다.

 

미국의 전기 기술자인 제시 설리반은 2001년 사고를 당해 두 팔을 완전히 잃었다. 오늘날 그는 시카고 재활연구소의 도움 덕분에 두 개의 생체공학 팔을 사용한다.

 

P575. 또 다른 붉은털 원숭이 아이도야는 2008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의자에 앉아서 일본 쿄토에 있는 생체공학 다리 한 쌍을 생각으로 제어했던 것이다. 두 다리는 아이도야보다 스무 배 무거웠다.

 

P576. 생명의 법칙을 바꾸는 제 3의 방법은 완전히 무생물적 존재를 제작하는 것이다.

 

P576.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완전히 새로운 디지털 마음을 창조한다면 어떨까? 컴퓨터 코드로만 구성된 그 마음이 자아의식, 의식, 기억을 다 갖추고 있다면? 이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그것은 인격체일까? 그것을 지우면 살인죄로 기소될까?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만일 성공한다면, 이것은 생명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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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정리는 핵심을 잘 집어주셔서 책 안사도 님 정리보면 다될듯 얄밉다 님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7   좋아요 1 | URL
ㅋㅋ 안그래요. 정리 개념으로 적기보단 인상적인 문구만 적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민정식님이 책을 읽으셔서 그렇게 느끼실지도 ^^;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 다카시는 대학시절 베르자예프의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를 읽고서는 사고의 스케일이 완전히 변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한국에선 미 번역이다.)

 

공간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일상 공간을 벗어나, 세계 전체, 우주 전체까지 시야에 들어왔으며, 시간 축에서는 근미래, 근과거만이 아니라 백년 단위, 천년 단위의 과거와 미래, 심지어는 신의 운명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영원이라는 시간마저 고려하게 된 셈입니다. ”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 피도 살도 안 되는 100> p84

 

신의 운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책은 백년 단위, 천년 단위로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다룬다. 유발 노아 하라리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에서 영감을 받아 호모 사피엔스의 빅 히스토리를 추적한다.

 

135억 년 전, 빅뱅이 일어난다. 원자, 분자가 등장한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른바 인지혁명.

45,000년 전, 사피엔스, 호주에 정착한다.

12,000년 전, 농업혁명이 시작된다.

5,000년 전, 문자가 발명된다.

500년 전, 과학학명이 일어난다.

250년 전, 산엽혁명

50년 전, 정보혁명.

 

인류는 약 250만년 전 동부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유럽과 서부아시아의 인류는 호모 네안테르탈렌시스’, 흔히 말하는 네안테르탈인으로 진화했다. 아시아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는 호모 솔로엔시스가 살았다.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섬에는 호모 폴로레시엔시스가 살았다. 2010년 시베리아 데니소바 동굴에서 호모 데니소바인들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동아프리카에선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에르가스터인이 살았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지난 1만 년간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한 인간 종이었다. 왜 유독 다른 종들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저자는 언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러 학자들은 약 7만 년 전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이변이에 의해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등장과 함께 전설, 신화, , 종교가 탄생했다. 다른 종과 달리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로부터 허구를 말할 수 있고,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45천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호주에 정착한다. 이에 호주의 대형동물이 멸종한다. 3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다. 16,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자 역시 대형 동물들이 멸종을 맞는다.

 

수렵, 채집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약 1만년 전부터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농업혁명이다.

 

그렇다면 과연 농업이 먼저 였을까? 정주가 먼저였을까? 유발 하라리는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따라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말한다. 밀 때문이다. , , 감자가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밀을 재배하면서 수렵, 채집 때보다 더 많은 식사를 제공받은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농업이 정주를 일으킨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정주가 농업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했다.)

 

7만년 전 중동에 도착한 호모 사피엔스는 이후 5만년 동안 농업없이 번성했다. 간혹 그들은 밀을 먹었다. 점점 많이 먹게 되자 무심코 밀이 퍼졌다. 밀을 수확하게 되자 그들은 4주간 정도 캠프를 차렸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5, 6주가 되고 이내 마을이 되었다. 정착촌이 생기자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자 질병이 들끓고 동물로부터 전염병에 감염되었다. 아이들은 떼죽음 당했다.

 

(아이의 사망률보다 출생율이 더 높았다. 그렇다면 DNA입장에선 수렵, 채집보다 정주의 방식이 더 이익이 되지 않았을까. 밀 때문이라기보다는 호모 사피엔스의 DNA가 농업을 발생시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다시 수렵, 채집 사회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사는 건 더 어려워졌다. 수렵 채집인들은 미래를 중요시 생각지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뿐더러 먹을거리나 소유물을 저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이제 미래가 중요해졌다.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속 극장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은 주연배우가 되었다.”

 

농업혁명 이래 인간 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 신화와 허구는 더욱 정교해지고 수백만 명이 협력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문화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보편적 질서 후보 세 가지가 출현한다. , 제국, 종교.

종교와 유사한 것은 공산주의다. 혹은 이데올로기다.

 

지난 500년 이후로 인류는 과학 혁명의 시기로 접어든다. 인류는 무지를 인정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이 시기 과학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제국이 탄생한다. 식민지 노예 무역이 성행하고 자본주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진다.

 

신기술은 영국의 석탄광산에서 태어났다. 석탄이 발견되었고,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다. 산업혁명은 에너지 전환의 혁명이었다. 기차가 생기고 시간표가 나오자 시계가 나왔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온갖 상품들이 만들어졌고 자본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그러나,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 줘야 했기에 자본주의는 대중심리학(just do it!)의 도움을 받아 소비지상주의를 전파했다.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었지만 가족과 공동체 문화는 붕괴되었다.

 

1945년 이후로 제국들이 식민지에서 조용히 철수했다. 이제 전쟁의 대가는 너무나 커졌고, 전쟁 비용이 치솟은 반면 이익은 작아졌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인간 스스로 점점 더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호모사피엔스는 이제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자연선택은 이제 지적설계로 대체되었고 지금도 대체되고 있다.

 

2005년 시작된 블루브레인 프로젝트는 인간의 뇌 전부를 컴퓨터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만일 성공한다면 생명은 40억년 만에 유기물을 넘어 비유기물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 후손들의 의식이 작동하는 차원이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만일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따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97IBM의 컴퓨터 딥 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에게 이겼다. 지난 128일 구글의 AI 알파고가 바둑에서 중국 판후이 기사에게 55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01639일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첫 판 불계승으로 졌다.

(호모 사피엔스들은 대개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예견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한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2014년에 AI ‘유진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했다. 우리가 과연 AI를 길들일 수 있을까? AI도 언젠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뇌에 전극을 심은 원숭이는 자신보다 스무 배 무거운 수백 킬로 떨어진 곳의 생체공학 다리를 생각으로만 들어올렸다. 호모 사피엔스의 다음 세대는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쾌락을 원하는 이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유발 하라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어쩌면 악한 신이 될 것이라 우려한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히틀러가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다면 자신의 쾌락만을 원하는 악한 신이 히틀러보다 도덕적일 것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과연 대안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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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6-03-10 0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장 신선했던 점은 저자 하라리가 펼친 인지혁명 논리였습니다. 좀 보충하자면 저자는 사피엔스의 사회적 특징이 사피엔스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인지혁명을 설명했던 걸로 생각됩니다. 종교,정치,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인지혁명을 통해 이루어 졌다고 본것같습니다. 또한 사피엔스 종은 수렵채집인이래 생물학적 진화가 전혀 없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소오 님 덕분에 복습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감사🤗

시이소오 2016-03-10 08:22   좋아요 2 | URL
유발 하라리 주장 중 저한테 가장 와닿은 부분은 호모 사피엔스의 허구를 믿는 능력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론 예술, 민주주의 등이 발생했지만 한편으론 종교 전쟁, 나치가 태동하기도 한거죠.
토론 하기에 좋은 책인거 같아요^^

징가 2016-03-10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기치는 기술과 다구리(?)하는 능력?!

시이소오 2016-03-10 08:4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허구를 믿는 능력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갈지가 관건이네요^^

cyrus 2016-03-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농업혁명의 신화를 깨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과학혁명을 설명하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국의 엘리트들이 과학혁명을 주도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 유럽중심주의 역사관과 유사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시이소오 2016-03-10 21:58   좋아요 0 | URL
아마 그건 아닐거에요. 전반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오리엔탈리즘울 비판하는 입장이니까요^^
 

4장 안다는 것.

 

프로이트 1,2 피터 게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역사철학 테제,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 테제>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 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비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려,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찰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소개하든 사족이다. 이 책은 전공을 막론하고 공부를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인식하고 갖춰야 할 정치학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밀스가 좋아한 용어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 V.I 레닌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권한다. 마르크스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웬 레닌? 이렇게 생각한다면, 레닌주의에 관한 오해가 아니라 지식 일반에 대한 오해다.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는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전위 조직 건설이다. 두 가지는 같은 주제의 얘기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현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크레도(Credo). 근대성의 핵심은 계몽, 기획성, 인간 의지에 의한 사회와 자연 개조다. 나는 이 책이 근대적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고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구조와 개인의 관계는 이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샹탈 무페 등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자에 의해 해결됐다. 내가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이 수동태 표현이 숨막힌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두치펑, 푸코,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 이에 상반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 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권김현영 외.


선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한채윤)라는 말이 이 책의 패러다임을 요약한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제도 안에 머물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가 진행되고 굴요적인 자기 조정을 계속 요구받게 된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권력의 법칙을 해체(, 인식)하지 않는 저항은 반칙, ’불평불만‘, ’낙오자의 불복심지어 역차별의 가해자라는 엉뚱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인간의 기준이 남성인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면 이중 노동을 해야 하고 다름을 주장하면 시민권을 잃고 피보호자가 된다.

 

주류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노력하지 말고 일단,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공부하라. 이 책은 그 노고를 덜어줄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용성과 지적 수월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빅 이슈, 일본어판214

 

세계 41개국에서 발행되며 14000명의 노숙인이 판매원으로 일하는 잡지 <빅 이슈>는 노숙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다. 편집, 기획, 집필에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실제작비 외 수익은 모두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유명 여가수 가토 도키코(71)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1989년 베를린 방벽 붕괴부터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이른바 ‘3.11’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레벌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re volution)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박효종 외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멘틱한 사건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 호미 바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유형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 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 (실은, 하소연하다가 사과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하여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은유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 전의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조혜정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 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episteme는 미셀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바위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 담론은 부서진다.

 

과학과 젠더, 이블린 폭스 켈러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이 책은 초기 여성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 인류 지식의 연원을 추적한다. 개인(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 차별 주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으로 둔갑했는가를 역사, 정신분석, 과학사의 세 차원에서 분석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 착오, 시기상조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외


 

사카이 나오키, 도미야마 이치로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좀 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와 나오키의 대담집이며 부제는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저)에서 제프 베닝턴의 글을 읽고 이 암호를 해독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모든 음절이 중요하다. 첫째, 우편배달부뿐 아니라 발신자나 방문객은 두 번 행동한다. “딩동, 딩동”, “,” “여보세요?, 안 계세요?” 한 번 시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 번만 길게 누른다면 싸이코혹은 최소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당한 부정적인 행동의 전조다. 그러니까 언제나 두 번울린다.

 

둘째, 우편 제도와 인쇄술의 발달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그 이전의 사자, 사신은 집단과 집단이나 개인 간의 일대일 메신저였지만 철도의 발달과 함께 온 국민을 횡단하는 전달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사자에 비해 동시적, 다중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남성은 모두 죽는다. 프랭크는 멕시코 출신, 그의 정부의 남편은 그리스인이다. 우편배달부는 국가를 대변하는 국민이다. 이들은 소수자 우편배달부쯤 될 것이다. 벨 울리기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같은 행위다. 떠도는 삶, 이유 모를 죽음, 우편배달부끼리 쫓고 쫓기는 삶.

 

무엇이 달라졌을까. 메시지는 대개 비문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알고 죽거나 모르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성/, R, W 코넬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사상이라는 인식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저자 코넬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남성성 연구의 선구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는 남성으로서 자기 몸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녀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50대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사례가 풍부하고 성별 이론 전반에 박식한 옮긴이(현민)의 주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책으로 배웠어요유형이이서 그런지, 남성은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 흥미로운 생애사와 쉽게 풀어낸 정신분석, 정치학, 퀴어, 역사 이론은 인문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섹스Intercourse>. <삽입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인데 여기서 급진적은 발본적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 에른스트 블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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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세계사의 해체》 담아갑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절판이네요.

시이소오 2016-03-09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사회학적 상상력 읽고 싶네요^^

oren 2016-03-10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옮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온통 제가 모르는 책들과 저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고` 댓글을 달기가 몹시도 주저됩니다만, 그래도 `딱 한 곳`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딴지를 걸고 넘어가고 싶네요.(전체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문장의 어느 한 구석을 찾아내서 꼬투리를 잡는다는 게 몹시도 꺼려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요.)

도대체 니체의 텍스트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악평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니체만큼 오독하기 쉬운 책도 없다더니, 저런 고명하신(?) 분이 니체를 저토록 오독하다니, 저는 그게 너무 놀랍습니다. 저 책의 저자가 읽었다는 바로 그 책 속에 담긴 `니체의 목소리`로 반박해주고 싶군요.

* * *

뭐라고? 그 반대이다! 제기랄.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중에서

시이소오 2016-03-09 22:04   좋아요 1 | URL
저도 좀 의아스럽긴해요^^; 취향이라고 한다면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것 같고.....아마 이해가 안돼서 필사해놨던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파울 파이어아벤트 판매 책이 단 한 권도 없단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ㅠ

시이소오 2016-03-09 23:09   좋아요 0 | URL
정희진씨 추천책엔 유난히 품절, 절판도서들도 많네요. 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에 소개된 책들은 거의 번역이 안됐더라구요. 번역된 책들먼저 읽어야겠습니다^^

yamoo 2016-03-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권이 있고 3권을 읽었습니다. 근데 <방법에의 도전>의 백미는 그 논증 구조에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를 살피는 것이 이 책 읽기의 미덕이죠.

개인적으로 정희진의 <패미니즘의 도전>인가...너무 실망스러워서 이 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시이소오 2016-03-09 23:47   좋아요 0 | URL
우와, 대단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