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티를 내리고난 후 때마침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좋아서 급찍어보았습니다. 모두들 초여름 즐거운 독서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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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딩

라캉은 그가 영향을 받았던 대부분의 저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야스퍼스를 다루었다. 라캉은 어떤 개념을 받아들이거나 어떤 생각을 참조하거나 어떤 이론을 고찰할 때 언제나 이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는 계기로 삼았고, 이로써 낡은 가치의 파괴자, 오래되고소중한 전통의 계승자, 새로운 과학의 고독한 개척자 역할을 동시에 맡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희대의 인물이었던 그는 항상 현대화에 고전주의를, 조상 숭배에 전복을 대립시켰다. 그리고는 곧 스스로 자기이론의 반대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존재와 부재의 변증법을 공간과 운동의 논리학과 연계시키는 바로크풍 문체로 전달되었다.
라캉이 마르그리트에게 매력을 느낀 것 역시 숨박꼭질 놀이 같았다. 그는 포목상, 식초 상인, 식료품 영업 사원으로 이어지는 오랜 상인 집안의 자손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점 경영을 거부하고 지적인 영광과 권력을 꿈꾸었다. 그에게서는 성공에 대한 의지가 자기 정체성을 바꾸려 - P96

는 보바리 부인의 욕망처럼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어떤 면에서 마르그리트는 그의 분신과 같았다. 그보다는 덜 부유했고, 더 시골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평범한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녀도 라캉과 똑같이 지적인 성공과 명성을 갈망했다. 1931년에 라캉은 편집광적인 남자들을 비난하면서 이들을 광기의 지옥에 돌려보냈지만 일 년 후 독학을 하고 있는 한 고독한 여자 때문에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만일 라캉이 의사가 되지 않고 방황과 망상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녀의 운명은 바로 그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라캉의 편집증 환자는 여성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제시한 거울에 투영된 자기 가족의 역상(象)을 주의 깊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의 가족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지만 비정상적인 광기가 오랫동안 일상적인 사랑으로 위장된 채 존재했던 세계였다. 라캉은 아마 아래와 같은 글을 쓸 때 성직자가 된 동생을 생각하면서 또한 에메의 범죄 욕망을 생각했을 것이다. - P97

라캉이 이처럼 무의식의 탐구보다 자아 분석과 저항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둔 것은 이 시기에 그가 여전히 무의식 이론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기반한 프로이트 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대해서는 1920년 이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하나는 무의식적 결정이 주제에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을 부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반면 ‘이드‘가 ‘자아‘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자아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양차 대전 사이에 이 두번째 해석이 IPA 내부에서 주류로 통용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정신분석가 훈련에 필요한 소위 ‘표준화된‘ 기술적 규칙들을 세우는 데 용이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캉이 프로이트 이론은 아니더라도 정신분석의 실천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두번째 해석을 통해서였다.
따라서 그가 정신의학계에 가져온 이론적 발전과 이 발전을 가져오기 위해 그가 사용한 용어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에 라캉은 자신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시도한 정신의학의 수정 시도를 프로이트 이론에 관한 그의 수정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관한 적절한 해석과 일치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1932년 6월에 라캉이 뢰벤슈타인에게 정신분석을 받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불일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라캉은 에메에게 프로이트 식 치료를 행할 수 없다는 점에대해 아주 불안해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환자에게 정신분석을 실행하지 못한 나의 부주의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내 연구의 범위와 가치를 동시에 한계지을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적어두고자 한다." 라캉은 분석에 들어가기 일 년 전인 1931년 6월에 마르그리트에 - P102

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실제적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다는 사실은 그가 그의 논문을 자신의 발전 도정에서 어떤 자리에 놓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이미 정신분석적 글인 동시에 여전히 정신의학적인 저서였다. 우리는 지금 마르그리트의 이야기에 관한 장 알루슈의 책에 디디에 앙지외가 쓴 후기 덕분에 라캉에게서 분석받기를 거절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앙지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련의 면담을 가지면서 어머니를 연구하고 있었을 때 라캉은 아직 전문적인 정신분석가가 아니었다. 그는 환자에게 정신분석 요법을 시도한 적이 없었고, 그런 시도였다면 어머니도 그것을 거절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나와 내 아내에게 여러 번 말씀하시길, 라캉은 신뢰하기에는 너무 유혹적이고 광대 같다고 하셨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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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이 책 절판된 건데 나 읽고 팠는데!!!!!!!!!!!!!!!

수이 2024-06-10 22:45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왔습니다. 참고로 광화문 교보문고에 2권만 판매중입니다. 아직 재고 남아있는 걸로 나옵니다. ㅋㅋㅋ
 

소설가니까,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먼길을 돌아왔지만 나의 답도 힐러리 경만큼 단순하다.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 것이다. 4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오면서 내 자아의 많은 부분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었겠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겠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었겠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을 위해 소설을 집어든 것은 아니었다.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 같은 것으로 설명해버리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겪는 경험의 깊이와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개개의 독자가 특정한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우리는 소설을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이라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때 인간은 자연이 합목적적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 살았다. 태양은 식물을 성장시키기 위해 아침마다 떠오르는 것이고 과일은 따먹으라고 있는 것이고 사슴은 잡아먹히라고 들판을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 중심주의는 끝없이 붕괴되어왔다. 태야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온갖 동물이 인간에게 잡아먹히도록 창조된 것도 아니었으며, 인간과 원숭이는 별반 차이가 없는 종이었다. 자연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창조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 소설도 인간의 어떤 필요를 위해 쓰이고 읽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 않아도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이다.
그렇다. 정말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120-121)
  • 다다다김영하 지음복복서가 2021-02-26장바구니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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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와 [보바리 부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어리석은 미치광이 돈키호테와 광기어린 사랑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보바리는 세르반테스와 플로베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그들에게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 속의 세계가 계속 되기를 바라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가 거기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인물들에 매료되고 자기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며 그들의 뒤를 따라간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해 우리의 일부를 돈키호테와 엠바 보바리로 바꾸어놓는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된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가 자신과 분리할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
동시에 소설도 우리를 통해 증식을 거듭한다. 그렇게 이야기와 인간이 하나가 되면서 이야기의 우주가 무한히 확장해간다. 한때 나는 인간이 이야기의 숙주라 생각했다. 이야기가 유전자처럼 인간을 탈것으로 삼아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대부분을 이야기로부터 배웠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런 인간은 과연 무엇일까?
그렇다. 인간이 바로 이야기다.
돈키호테와 엠마 보바리는 비록 현실의 존재는 아니지만 김영하라는 생물학적 존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도 증식을 거듭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 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 (54-56)
  • 다다다김영하 지음복복서가 2021-02-26장바구니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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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0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죄송합니다. 원래 있었던 댓글은 다시 읽어보니까 넘 아닌 거 같아서 삭제했습니다. 수이 님, 미안합니다. ㅜㅜ

수이 2024-06-02 22:27   좋아요 0 | URL
원래 댓글이 아주 궁금한데 남아있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적어주셔도 되는데 😏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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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의 가벼운 에세이집을 읽고난 후 바로 마리 루티를 읽으면서 중간 틈틈이 펼쳐 휴식 삼아 읽은 건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그의 입을 빌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왜 내가 다시 읽기 모드로 돌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고백삼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없으리라 여기며 홀로 이혼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넉넉한 생활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액수가 더 커질 테고 나이를 먹으면서 누리고픈 것들은 더 누릴 수 있을 테니 남편의 따뜻한 눈길 따위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좋아하는 책을 넉넉하게 사서 쟁여두며 맛집을 돌아다니며 딸아이를 등교시키고난 후 홀로 시간을 보내곤 할 때 이혼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어떤 생활을 해나갈지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인물로 생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자주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나가곤 했다. 더할나위 없이 불행해진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상상의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겠지_로 매번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혼을 하고난 후 이게 정말 내게 벌어진 일인가 자문하기도. 나이가 들어 폐경 조짐이 보이고 노안이 오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나날들이 쌓여갈 때 바라는 풍경이 있다면 직접 내 손으로 그걸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심장 한쪽에 새겨놓고 언어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고다르의 영화 속 대사를 따라 읊으면서 우리가 나눈 것들은 기껏 말뿐이고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함께 했어도 언젠가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겠구나 알았다.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하면 사람들은 다 기겁할 것이다. 나 역시 장난으로 가볍게 대꾸를 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비 오는 날 상상놀이를 이어가는 동안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낯선 말들이 오고가는 틈바구니 사이로 내 혀와 내 팔다리가 쏟아내고픈 말을 다이렉트로 내뱉으면서도_ 그랬다.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 읽기라는 행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선들, 책이 사라져가는 풍경들 사이로 어지간히 도망쳐보려고 했다. 얼마나 읽지 않았는지 그 시간을 헤아리는 건 나보다 내 친구들이 먼저였다. 분산된 신경들을 한데 억지로 모아 읽어봤자 의미를 헤아리려고 억지로 또 힘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읽기를 포기했다. 너무 당차게 말야. 도망쳐봤자구나 그걸 다시 알게 된 건 비비언 고닉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읽는 존재에 대한 광폭한 사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소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깨닫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반복 강박. 전남편이 내게 처음 사랑한다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네 판타지다, 하고 수없이 말을 해도 그걸 마주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사기를 당했네, 속았네 투덜거려서 어리석구나 아무리 타이르며 말을 해줘도 막힌 귓구녕을 더 스스로 막더니만_ 소년 역시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전남편과 똑같아 현기증이 살짝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을 해도 아니 난 달라, 나는 안 그래, 하며 눈도 코도 귀도 막더니만 결국 자기가 만든 판타지 속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신경질을 때때로 낼 때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홀로 쌍욕을 하면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건만 이 무슨 리바이벌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허참.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비비언 고닉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는 동안 나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긴 그들의 태도도 그저 학습된 것일뿐, 더 지혜로운 척 하지 않고 덜 오만했더라면 또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하고 이내 아쉬움을 느끼는 건 혼자 앉아 반추하는 동안이다. 5월 마지막 날이다. 불러들이지도 않고 올 사람은 오고 가라고 온갖 욕설을 내뱉어도 가지 않을 이들은 가지 않고 그런 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라는 걸 알 것도. 무례하게 내 행복을 자신의 불행과 견주어 비웃는 이들은 내 친구가 아니다 싶어 그만 안색을 싹 바꾸고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이혼해. 그렇게 궁상맞게 살지 말고, 라고. 말을 내뱉는 순간 아 썰리는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은 하고 살아가기로. 읽는 동안 버릴 책과 버리지 않을 책, 다정함을 유지하되 무례한 경우에는 여지 없이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걸 특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시 인류애를 되새겨버림. 그러니까 다시 읽는다고 하는 말을 뭐 이렇게 장황하게 해버렸을까.

"남자가 완전체 인생을 살 용기를 낼 수 있게끔 여자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협약은, 저 깊이 흐르는 불안이라는 관점을 통해 보자 별안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우주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제정신으로 그 주장을 밀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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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줘서 정말 좋아요. 혹시라도 저한테는 침 뱉기 전에 한번만 반성하고 갱생 할 기회를 주세요.

수이 2024-06-02 06:49   좋아요 1 | URL
우리가 서로에게 침을 뱉을 상황이 생긴다면 침을 뱉는 대신에 이야기를 나누겠죠. 다시 읽어라 제발_이라고 누가 계속 잔소리했던 게 떠오르네요. 그 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읽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