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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가을에 온다면,
반쯤은 웃고 반쯤은 비웃으며 주부가
파리를 쓸어 내 버리듯이,
여름을 쓸어 내 버릴래요.

1년이 흘러야 그대를 볼 수 있다면
한 달 한 달을 공처럼 뭉쳐 -
순서가 섞이지 않도록,
서랍마다 하나씩 넣어 둘래요 -

수 세기가 지나야 그대를 볼 수 있다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지쳐서 내 손가락이
반디멘스랜드에 떨어지겠죠.

이번 생이 끝날 때, 분명히 -
그대도 나도 사라져야 한다면
이번 생을 과일 껍질처럼 버리고,
영원을 맛볼래요 -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얼마나 날갯짓을
더 해야 그대가 올지 전혀 몰라,
쏘지 않고 윙윙대는 기다림이 -
악마 벌처럼 날 괴롭혀요.

(122-123)

조애리 번역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서 오늘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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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3-11 18: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 낭송에 정말 잘 어울리는 목소리이고 톤이고 분위기네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저는 윤명옥님 번역하신 디킨슨 시선집에 들어있길래 다시 읽어보았어요.

수이 2024-03-11 18:23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나인님, 든든해서 앞으로 종종 올릴게요. 봄날 감기 조심하시구요. :)

단발머리 2024-03-11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이님의 불어 낭송을 엄청 좋아하는 1인입니다.
에밀리의 시가 이렇게 좋군요. 매일 한 편씩 꼭꼭 부탁드립니다!!

수이 2024-03-11 19:1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단발님이랑 나인님만 좋아하실걸요.
매일 올리면 알라딘이 싫어할지도 몰라서 이틀에 한 번씩 헤헤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아이는 탐스러운 딸기를 한입에 왕 넣고 우물거리며 이야기했다. 말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려니 여기면서도 네가 또 그로 인해서 잃게 될 것들이 있을까봐 나는 어미로서 살짝 저어하는 마음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건 네 삶이고 네 시간이고 네 운명이고 네 사람들이니까 이 어미가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건 어쩌면 네게 하등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도망치려는 생각뿐이었던가. 도망치고 도망치면 언젠가 내 낙원에 다다르게 될 거라고 여겼던 건가.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햇살이 너무 좋아 일순간 행복했다. 당신의 숭고한 몸_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순간을 잠깐 헤아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고. 일흔이 가까워오는 한 나이든 여성의 일기를 우연히 읽었다. 나를 더 이상 여자로 봐주는 시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직도 여자 같지만 세상은 더 이상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고 그 시선에 익숙해진지 어느덧 십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때때로 서운함을 느끼는 건 나이든 여자의 노망일까. 그 일기를 읽다가 한 풍경이 떠올랐다.


 나를 어여삐 여기시는 신들이시여, 제 나아갈 길을 보여주세요, 제가 그 길을 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때가 작년 이맘때쯤. 


 불과 1년이 지났을 따름인데.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마땅하리라, 몸과의 접촉은 불확실하고 간헐적이며 자꾸 달아나면서도 여전히 끈질기게 잠존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몸에 부딪혀 끊임없이 말과 언어, 담론을 쥐어짜내야 하리라. 확신해도 좋은 사실은 여기서든 저기서든, 접촉되고 명명되고 의미의 바깥으로 기탈되어 진정 이것이 되는 몸의 노출이 발생하는 곳에서라면 어디에서든지 언어와의 몸싸움 corps à corps, 의미의 육박전이 일어나리라는 점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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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와 치카의 [계절의 모노클]에 실린 전주곡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정수윤 번역가가 번역했습니다. 봄날, 동네 친구에게 꽃을 선물받았고 저 환한 노란 빛깔이 자꾸 어른거려 두 눈을 즐겁게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인간의 생이란 참 찰나에 불과하면서도 영원을 내내 말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잠깐 났습니다.

바다가 가까이 있는 곳으로 정착지를 옮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언제고 어디에서고 내내 친구들이 평안하기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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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태양이 되고 싶다고 그랬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여겼던 거 같아. 김안의 입춘을 읽다 말고 아 그래, 그래서 우리가 쉰이 다 되어서도 이렇게 살고 있나 보다, 안아, 라고 소리내어 말했어. 딸아이가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왜 너희들이 시를 재미없어하는지 아냐고 물어보셨어. 아이들은 모두 황망하게 고개를 내저었고. 시는 분석하면 안 되는데 시는 해체하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시를 배우지,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를 가르치지. 그러니 어디 시가 재밌겠냐고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대. 엄마는 시를 사랑하지. 유일하게 엄마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어. 하지만 이 에미는 재능이 특출나지 못해 시인이 되지 못했지. 하지만 철학자보다 더 멋진 이들이지. 언젠가 타락하고 추악하고 마치 악마처럼 묘사되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과 김안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시인들 사이에 뒤섞여 있으면 내 마음이 마치 무당이 된 것마냥 저절로 말로 흘러나와서 그게 그렇게 좋았지. 엄마가 술담배를 하던 옛날 고려 적에. 말하니 아이는 엄마는 집시잖아. 그러니까 시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나는 이상을 읽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져. 이건 엄마 피일까. 아이가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죽을 맛나게 떠먹으면서 물었다. 김안의 시집을 읽다 말고 그러고 보니 불면증에 시달려서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괴로웠던 이십대 시절이 떠올랐다. 온라인 친구였던 닉네임이 무엇인지조차 까먹었던 서대경이 곧잘 새벽에 내가 투덜거리면 이런저런 댓글로 나를 위로해주곤 했지. 그가 김안의 친구 서대경이라는 건 나중에 안이가 말해줬던 것도 같고.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새벽에 주고받으면서 다 지나갈 것들 아니겠냐고 그랬는데 시인이 해주는 위로라는 건 역시 특별하군, 새구름처럼 금세 포근하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지. 내게 와서 태양이 되고 싶다고 한 사람은 시를 읽더라구. 나도 모르게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하고 말았는데 시를 읽는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야, 놀라워 그랬네. 빛살 사이로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풀이름과 꽃이름을 모두 다 알고 있는 그가 마치 파랑새처럼 느껴져서 자 이제 둔갑술을 그만 부리고 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보련, 파랑새야, 말했더니 그는 파도와 똑같은 음향으로 웃었어.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반하고 말았지. 나는 언젠가 이 남자의 품에 안기겠구나. 마음과 마음이 닿는데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이었거든. 다초점 안경은 괴롭다. 눈이 금방 피로해져, 머리도 무거워지고. 밤이 깊었어. 하늘과 바다 사이로 내게 다가오고 있는 내 태양을 그리워하다가 잘래, 일찍. 갱년기 증상 때문에 새벽에 벌떡 일어나는 때가 잦아서 요즘은 일찍 잠들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나중에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나가는 와중에 그 가운데 자리쯤에 있다 싶을 때 그때 다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아 맞다, 안아, 친구로서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네 팬으로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 시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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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고 싶은 글을 읽고 그냥 댓글을 달지 않았다. 혐오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여긴 열린 공간이고. 나도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하고. 근데 돌려 깐다고 해야 하나, 그게 좀 더 혐오를 포함하고 있어도 세련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강신주가 하는 장자 강의를 듣다가 결국 그의 장자 개론서를 샀다. 장자가 왜 좋은가 헤아려봤더니 장자는 혐오를 표현해도 좀 세련되게 한다는 걸 알았다. 그 문장들은 결국 쓰는 이의 모든 걸 드러낸다, 이걸 다시 깨달음, 오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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