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누군가 물어봤다. 사는 건 다 똑같은데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상위 3프로의 소득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기생하는 느낌입니다. 상위 3프로에게. 너무 솔직했던가,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라이프에서 상위 3프로라는 형용사가 그 무엇을 더 덧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다른 이들의 상상력에 내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봤다.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노라고 한 남자 입술을 쓰다듬으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대략 20년 전에.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책을 살 테니 그 책을 다 사줘, 커피를 좋아하니까 커피를 넉넉히 준비해주고, 술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덜 마시겠지. 하지만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걸 갖고 싶은 욕망이 더 심해질 테니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해. 아마 아이가 생기겠지. 내가 딸아이가 갖고 싶으니까 너의 정자가 만일 내 뜻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딸아이를 갖게 될 거야. 그 아이도 책을 좋아하면 좋겠다, 너와 나만큼. 그 아이도 커피를 마시겠지, 사춘기가 다가올 무렵. 아마 성인이 되기 전에 술을 접하게 될 거야, 우리 아빠가 내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 처음 맥주를 따라주었던 것처럼. 그럼 그렇게 같이 오순도순 살면 될 거야. 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결혼을 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그 오순도순 꿈은 파탄이 나버렸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혼은 지금 안 된다, 우리 엄마는 단호했다. 버석버석. 버석버석. 아침이면 영혼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때부터 쭉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내 친구들과 엄마는 나를 말리곤 했다. 유일하게 이혼을 지지해주는 이는 여동생 진이뿐이었다.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어떤 모임에서 물어보더라고. 그 이야기를 진이에게 했더니 진이가 말했다. 한번 살아보라고 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인생인지. 둘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푸후후 웃었다. 


샌드위치 가게라도 해볼게, 그러면서 살고 싶어, 아이 키우면서 둘이서. 남자는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감히 이혼 이야기를 꺼내냐는 반응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이혼을 하자고 할 적마다 응했어, 그러다가 번번이 끝을 맺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고. 네가 내 손을 더 이상 잡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항상 고개를 끄덕였어. 마음은 잡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맞잡고 있는 두 손은 헐거워. 그냥 서로 마지못해 잡고 있는 것처럼 걸쳐져 있어. 나는 이제 네 손을 놓을 거야. 자유롭고 싶어. 가난이 두렵지 않냐고 능력도 없으면서 전업주부가 아무 준비도 없으면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두려운 건 두려운데 그렇게 있다가는 그냥 네 돈만 보고 너한테 기생해서 계속 살아야 돼. 네가 죽거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어있을 거야. 할머니가 되어서 은발이 되어 얼굴과 몸이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너를 탓하고 나를 탓하게 될 거야. 나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 탓하겠지. 내가 나를 잃어버린 삶을 택했으니까. 근데 이제는 내가 소중해져버렸어. 나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한 번뿐인 이번 인생을 살 거야.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이어갈 수 없어. 남자는 비웃었다. 나이 오십이 되어 그 누가 여자로 봐줄 거 같냐. 예순 먹은 할배들이라면 모를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이제 여자로 살 거야.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는 네 옆에서 오래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여자로 봐주는 남자를 만나서 뭐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내 환상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이제 네 곁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나를 더 설득하려고 했다. 언제나 돈 돈 돈 이었다. 당신이 나를 매어둘 수 있는 게 겨우 돈뿐이구나, 그래서 가련했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돈과 사랑. 사랑과 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것들이라는 걸. 슬기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한 번만 더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6년 전, 1년이 흐르고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이야기하셨다. 능력도 없는 별볼 일 없는 게 어디서 감히 이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녔냐, 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당신 아들이 내게 이혼을 원한 거다, 난 응한 거다, 그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때 나 혼자 시댁 마당에서 울면서 그랬다. 아이가 스물이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좀 앞당겨졌다. 슬기롭게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블랑쇼를 읽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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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20: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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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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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로 이동을 하던 중에 마음에 드는 패턴이 새겨진 스타킹이 보여서 그걸 골랐다. 딸아이 스타킹도 사려고 했으나 아이는 나를 닮아 스타킹을 싫어해서 교복 치마를 거의 입지 않고 바지를 입고 다닌다. 내 스타킹을 하나 사서 값을 치루기 위해서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돌려주시면서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좀 어리둥절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어리둥절한 것은 아니었다. 사모님이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 소리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 오늘 좋은 결실 맺으시기 바랍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네, 사장님도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 너무 일찍 도달하는 바람에 근처 스타벅스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 위해 샌드위치 섹션을 얼쩡거리다가 그냥 우유가 들어간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왜 아까 그 아저씨는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마치 내 모든 상황을 아는 사람처럼. 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네 앞에 나타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런 거 비슷한 건가.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이동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에 한그득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패딩을 벗고 헤드폰을 여전히 귀에 끼고 이동하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옆에 앉아있던 나이든 아줌마들도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개의치 않고 이동했다.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났고 상황이 거칠게 흘러가자 다음에 다시 날을 잡을지 의향을 물어봤고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오늘 무조건 끝낼 겁니다. 그럼 나가서 10분 시간 드릴 테니 이야기하고 들어오세요. 그래서 복도에 나가자마자 나는 욕설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깟 5천만원을 더 받겠다고. 그러니 그깟 5천만원 포기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잠깐 1분 동안 생각했다. 포기하고 얻을 것들과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헤아렸다. 판사는 말하고 말했다. 나는 이혼이 처음인지라 변호사도 없었고 좀 얼떨떨해보였나 보다. 50대 초반의 판사는 여성이었다. 너 이거이거이거 명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으이구, 하면서 힌트를 주시긴 했지만.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말했다. 좀 금액을 자세히 알아보고난 후에 다시 기일을 잡아서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내게. 아뇨,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판사가 아이구 이 바보등신아, 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알고 있어요, 판사 언니. 지금 제가 얼마나 손해 보는 흥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라고 눈빛으로 말하니 판사 언니도 알아듣고 오케이, 확정 지읍시다, 했다. 다만 판사 언니는 내가 법의 보호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눈치인지라 물론 피신청인이 그러실 분은 아니겠지만 신청인을 위해서 이건 이렇게 명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가 모르는 것들까지 하나하나 넣어주셨다. 판사 언니, 고마워요, 라고 나도 눈빛으로 말했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과 통화를 했다. 계산기를 재빨리 두드린 동생이 말했다. 그깟 5천만원이 아니야, 이 여자야. 넌 대략 최소 2억에서 4억을 손해본 거야. 또 넘어간 거야, 그 새끼 농간에. 통화를 끝내고 4억이란 돈을 대충 헤아려봤지만 잘 감이 오지는 않았다. 


아이의 점심과 저녁까지 챙겨준 동네 친구와 간단하게 다음날 점심을 같이 했다. 어머님이 무당이셔서 신기가 있는 녀석이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마어마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아. 바라건 바라지 않건 봐라,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애 키우며 책 읽으며 노닥거리던 인생은 이제 없는 거야. 푸훗 웃음이 나왔다. 웃냐? 좋냐? 물어봐서 응, 지금은 좋아. 웃음도 저절로 나오고. 법원을 나오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더니 엑스가 그러는 거야. 그렇게 좋냐? 라고. 그래서 응, 좋네. 자유네. 했더니 좋겠다, 해서 나만 자유냐 너도 자유야. 이제 마음껏 연애 해라. 누구 속이고 그럴 일 없으니. 하고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석양의 해가 반짝거렸고 퇴근길이 가까워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총총거렸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 다음 생에는 만나지 말자, 부디.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동네 친구는 둘 다 자유로운 영혼들이구나 했다. 이 아줌마 영혼 신경쓰지 말고 님 앞일이나 신경 써라, 했더니 다른 사람들 앞길 보이는 것처럼 내 앞길도 보이면 좋겠는데 내 앞길은 안 보여, 라고 말했다. 다 보이면 다 알면 그게 인생이냐. 말했다. 


한 페이지가 끝났다. 

새로운 페이지를 넘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냥 지금 느낌은 그때 처음 그 영화를 봤을 때, 그러니까 신혼 초 책을 읽다가 심심해서 홀로 다시 봤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를 다시 보고난 후 내 삶이 저렇게 되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저 길을 걷겠구나 언젠가는, 싶었고 그 막연한 느낌이 결국 16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내고난 후 들어맞았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잔뜩 내뱉었다. 그래서 둘 다 소리소리를 질렀다. 서로의 가슴에 일부러 깊게 생채기를 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우리는 오랜만에 통화를 한 건데 미친듯 지독한 말만 내뱉었다, 둘 다. 우리는 싸울 때 지독히 미친 년놈들이 되는구나 그것도 알았다. 우아한 척, 지적인 척 한껏 교양있는 척 평상시에는 그러면서. 짐승처럼 며칠을 보내고 할 일을 끝내고 소주를 한잔 마시고나니 다시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고 인스타그램을 삭제하려고 했으나 너무 많은 사진들이 많아서 비공개로 돌리고 앱을 폰에서 다시 삭제하고 아주 오래 애용해왔던 블로그 계정에 당분간 쉬겠노라 글을 올리고 이리저리 계속 울려대는 폰을 바라보면서 받을 전화만 받고 카톡을 무음으로 설정해놓고 알라딘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당분간은 읽을 일만 있는데 알라딘마저 닫아놓으면 내가 너무 심심하겠구나 싶어 알라딘만 겨우 남겨놓고 충동적으로 글을 올린다. 그가 좋아하는 가와이 하야오의 책을 완독한 기념으로.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무모하게 시작하고 또 무모하게 나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다. 4억을 손해봐 이곳저곳에서 잔소리가 한없이 쏟아져 말했다. 이건 내 선택이고 이건 내 삶이니까 다들 닥쳐. 라고. 그제서야 모두 조용해졌다. 또 모르지, 내가 떼돈을 벌지, 했더니 웃음꽃이 피어났다. 지독하게 싸우고난 후 마치 서로 보지 않을 것처럼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난 후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난 후 내 남자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 말을 했는지 그제서야 깨닫고 훌쩍훌쩍거렸다. 이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는 우리 사랑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너무 크나큰 모험이잖아, 라고 말했다. 나는 내 남편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을 내 퍼스트로 두고 싶지 세컨드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건 너무 슬프잖아, 라고 말했더니 웃고 또 웃었다. 당신은 진짜 열일곱 같다, 아니, 열일곱이네. 라고 그가 말했다 다 웃고난 후에.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난 열일곱 소녀처럼 너를 사랑할 거야, 라고 말하고 씨익 웃었다. 그냥 우리 둘 마음만 생각하면 되는 건데 내가 너무 어리석어서 사람들 말에 귀가 팔랑거려서 그를 미친듯 할퀴었다, 말로. 내가 할퀴니 그도 나를 할퀴었다. 둘 다 미친듯 소리를 지르고 울고 그 지랄들을 하고. 그가 내게 지금 오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게 오면 너는 너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 그러니 도망쳐, 라고. 나는 그런 거 상관 없어. 그냥 당신만 있으면 돼,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겁이 났던 거 같다. 겁에 질린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에게 소리를 질렀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워서. 더 이상 통신이 연결되지 않는 영역에서 나 홀로 훌쩍거리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용서를 구했다. 할퀴어서 미안해. 할퀴고 또 할퀴어서 미안해, 내 사랑. 울면서도 알았다. 


봄날이 오고 있구나. 

그는 내게 오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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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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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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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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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06: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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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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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6 1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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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0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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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7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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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9 06: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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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나를 용서하지 마, 알라딘, 오늘은 책 교보에서 샀어, 

 그래도 알라딘 너를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푸훗

 그래도 크리스테바는 알라딘에서 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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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2-28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서점나들이 가셨군요^^ 알라딘은 이해할 거예요… ㅋ

수이 2024-02-28 21:02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속으로 욕할 거 같은데요 왜 알라딘에서 안 샀어 수이님 나빠 라고 욕 엄청 할 거 같은 느낌 ㅋㅋㅋㅋ
 
















빛과 어둠의 직조로 탄생되었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민이는 중간에 잠들었다가 거의 끝나갈 무렵 잠이 깨어 결말을 보았다. 아이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 무렵 미안해 하고 속삭였다. 아빠를 이미 잃은 이들과 아빠를 곧 잃을 이들이 본다면 어떨까 싶다. 아이라인이 온통 번질 정도로 우는 이들은 모두 아줌마들이었다. 나이든 여성들. 폴 메스칼이 헐벗은 등으로 미친듯 침대 위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좀 아빠의 무게랄까, 나는 엄마로서 갖는 기쁨만 온통 느끼려고 하는 사람인지라 엄마로서 갖는 양육자의 무게감은 거의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런다. 양육자의 무게와 자신의 존재가 지닌 무게가 마치 지구 같고 우주 같아 계속 오열만 할 수밖에 없는 자의 비애감이랄까. 그게 느껴져서 흐느꼈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살아가는 유형과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계속 벗어나려는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그리고 어른이 되어 살아가고픈 나날들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나날들이 복합되었을 때 그 유형의 구분마저 무의미해질 때 있다. 민이가 이해가 도저히 되지 않았는지 씨네큐브 회전문 들어서기 전에 대체 왜 그렇게 울었어? 엄마, 하고 물어보았는데 즉각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살아가는 게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어른의 존재감이 느껴지면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거다. 라고 이야기했다. 목젖에서 전류가 느껴질 정도로 울음이 나온 건 작품을 보고 정말 오랜만이었다. 영화 속 아빠로 나오는 폴 메스칼의 연기는 압도적이었다. 이제 갓 사춘기로 입성하는 딸아이가 우울감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양치질을 하며 그 이야기를 듣던 아빠는 양치질 마지막에 욕실 깨끗한 거울을 향해 자신의 입 안에 있던 치약 거품을 침과 함께 퉤 내뱉는다. 볼 때는 아 저게 뭐야 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니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더라. 세상 속에서 부유하는 이들의 불안감을 예리하게 잘 캐치해서 연기했다. 술에 취해 무작정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 호텔 테라스 난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마치 날아갈 것처럼 두 팔을 뻗을 때. 그가 느린 선 동작을 행하고 그가 읽는 책 제목들이 또렷하게 카메라에 잡힐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딸아이에게 네가 그 무엇을 하건 이 아빠에게 모두 다 이야기하라고 이야기 들려달라고 했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계속 아빠가 떠올랐고 늙은 나의 엄마가 떠올랐고 속절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겹쳐져서 이게 대체 뭔가 그런 넋두리가 저절로 나왔다, 오열과 함께. 우리 아가가 생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만을 바라지만 그건 오롯이 내 욕심이라는 걸 안다. 딸아이가 어른이 되어 한밤중 깨어나 우는 자신의 아기를 향해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나갈 때, 그리고 테레비 화면으로 아빠와의 지난 여름 휴가를 바라볼 때,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딸아이를 향한 캠코더를 끄고 사람들이 춤추는 암흑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성인이 되어버린 딸아이와 아빠가 동시에 서로를 부여잡고 춤을 느리게 출 때,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져 다가왔다. 집시 소울을 지닌 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한줄평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고향이 좋노라고 에든버러가 좋노라고 딸아이가 이야기할 때, 아빠는 이야기한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구나. 아빠는 결코 에든버러로 돌아가지 않을 거 같아, 라고 딸아이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유쾌하거나 가벼운 영화는 아닌지라 포스터만 보고 관람을 선택하지는 마시기를. 민이와 나 역시 아빠와 딸아이의 여름 방학 여행 이야기려니, 유쾌하려니 하고 선택했다가 민이는 켁, 나는 오열하고 말았으니. 아, 영화를 다 보고 알았다. 나는 내가 의식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빠를 사랑했구나, 아빠를 그리워하는구나 알았다. 아빠를 너무 알지 못하고 아빠를 그대로 어둠 속으로 보내버렸구나 싶어서. 아빠의 빛을 잘 알지도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빛 아래 빛으로만 존재하는 인생도 없고 어둠 아래 온전하게 어둠으로만 존재하는 삶도 없다. 빛과 어둠의 직조로 존재한다. 활자와 활자 사이 여백이 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걸 알려줬다, 애프터썬은.








1년 전 오늘 남겨놓은 기록 읽고난 후,

애프터썬은 썬크림과 다른 크림이다.

썬크림은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미리 바르는 크림이고

애프터썬은 이미 햇볕에 타버린 피부를 치유하고자 바르는 크림이다.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썬크림이 되기 위해 애쓸 때 많다.

하지만 정작 부모라는 존재가 필요한 건 애프터썬 역할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아빠는 딸아이에게 자주 애프터썬을 발라준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이는 자신의 아빠를 떠올린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아픔과 상실을 겪지 않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싯다르타 아비가 싯타르타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온통 쾌락과 기쁨과 행복으로만 이루어진 장면들을 연극처럼 내보여주며

내 자식에게는 온통 좋은 것들만 보여주고 주고자 할 때

하지만 싯다르타는 궁궐 밖 장면들을 보게 되고 그 찰나들은 그에게 다른 삶을 안겨준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삶 말이다.

자신이 스스로 택한 삶.

삶의 시간을 사등분해보자면_

사분의 삼은 고통과 아픔과 상실과 불행과 무기력과 우울과 건조한 나날들이고

사분의 일은 행복과 기쁨과 쾌락과 찬탄의 나날들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그 말을 듣고난 후에 나는 그 사분의 삼의 시간과 사분의 일의 시간을 묘하게 뒤섞어놔야겠구나,

책을 읽고 길을 걷고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사유할 때 그것들을 뒤섞어놔야겠다,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뒤섞어놓으면 그 사분의 일이 조금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착각 속에서, 그런 생각.

영화를 볼 때도 그랬고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그랬고 딸아이는 아 재미없었어, 지루했어, 라고 했지만

정확한 워딩은 아 졸라 재미없었던 그 아빠랑 딸 나온 영화! 

내 아이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테고 삶의 쓴맛과 괴로움을 서서히 알게 될 때 그 비루함에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을 때

이 영화를 달리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제 카페에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보면서 그 생각을 했다.

빛과 어둠을 잘 활용해서 사랑하도록 하자, 두려워하지 말고.


아빠가 많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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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성 원리는 ‘절단‘하는 기능이 있다. 근대에 서양에서는 강조된 부성 원리에 의해 근대과학과 개인주의가 탄생했다. 그들에게는 타자에게서 자립해서 ‘자아를 확립‘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목표였다. ‘자아= 의식‘의 강조에 대해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중요성을 제기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는데, 그는 무의식을 어떻게 하면 자아가 컨트롤할 수있는 범위 안에 놓을지를 연구하는 데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의 심리학은 부성 원리를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반면에 융은 모성 원리에도 주목하면서 자아를 넘어서 인간을 전체로서 보려고 했다. 어쩌면 그가 직접 체험한 환각 등은 자아로 손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 전체로서 다룰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지다. 이 중요하게 여겼던 이미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4장 ‘심상과 상징象徵‘ 부분에 설명해놓았다. - P13

1907년 프로이트와 처음 만난 융은 그의 협력자로서 경력을 시작하지만, 프로이트가 1912년에 <리비도의 변천과 상징을 발표하자 그와 자신의 지향점이 다르다는사실을 확인하고는 결별을 선언한다. 그 후 융은 자신의 길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결별 후 처음 발표한 책은 인간의 성격유형에 관한 책이었다.‘ 이는융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가 가는 길이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융은 자신이 어떤 현상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프로이트나 아들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다. 이것은 현상에 대한 개인의 의식적인 경향을 다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후에는 무의식 안에 숨어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밝히는 데에 힘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의식의 구조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개인의 의식적 경향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융은이와 같은 의식적 경향을 문제 삼으면서도 항상 무의식의 보상작용compensation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의 상호보완성과 마음의 전체성을 향한 강한 관심에는 그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려고 했던 자기self에 대한 생각이 내포되어 있으며, 성격유형에 관한 그의 저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융이 사용한 ‘내향형introvert‘과 ‘외향형extravert‘이라는 용어는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근본적 생각은 그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그의 생각을 따라가며 각 성격유형에 관해서 설명해보겠다. - P19

감각과 직관이 무언가를 먼저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기능인 반면, 사고와 감정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색과 형태 또는 문득 떠오른 생각은 무조건적으로 존재하지만, 사고나 감정은 그것을 개념으로 규정하거나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융은 사고와 감정을 합리기능rational function 감각과 직관을 비합리기능irrational functi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경우 비합리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성의 틀 밖에 있다는 뜻이다. 직관과 감각은 겉으로 드러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을 본래의 특성으로 삼으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법칙에 비추어보면서 다루지는 않는다. 여기서 감정을 합리기능으로 구분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말하는 감정기능은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호불호와 미추의 판단기능을 가리키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의 체계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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