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그런 차가움이 공기 속에 감돌고 있지만_ 그러니까 입춘이 지나긴 지났다만 아직 완연한 봄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애매모호한 봄의 경계에 있다. 봄이 곧 오실 거라는 건 알지만 아직은 몸을 감싸는 냉기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어제 도서관에서 따뜻하다고 패딩을 잠깐 잠깐 벗었는데 그새 몸이 오슬오슬거리는 게 섬뜩해 다시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열람실 안에서 나오는 히터 기운에 몽롱해지면서 책 몇 권을 빌려 왔다. 집에 오면서도 추웠고 보일러를 틀어놓아도 추웠고 샤워를 할 때는 벌벌 떨면서 뜨거운 물을 콸콸 틀었고 머리를 말리면서 헤어 드라이어로 목과 어깨에 끝없이 뜨거운 바람을 갖다 댔다. 온수매트를 미리 틀어놓고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이불을 덮고 아 추워 추워 추워 내가 미친년이야 아까 패딩을 벗지 말았어야 하는데 식당에서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패딩을 벗지 말았어야 했는데 계속 자책을 하면서 벌벌 떨면서 잠들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냉기가 몸을 전체적으로 감싸면 아 그때는 뼈까지 으슬으슬거려서 감기가 오시는구나 싶어 미리 유난을 떤다. 이때 유난을 떨면 감기에 된통 걸리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물론 냉기가 몸을 침범하는 순간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데 어제 또 방심하고 말았다. 볕이 하도 좋아서. 나는 추위에 약한 인간인지라 한겨울에는 항상 온몸을 두꺼운 천으로 감싸고 다니는데 이렇게 애매할 때 한없이 감싸기에도 애매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코트를 입거나 가볍게 입고 다닐 때 나만 패딩을 벗지 못할 때 이때가 제일 춥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몸을 풀고 음성을 남기고 요거트에 꿀과 견과류를 넣어 뜨거운 커피를 내려 번갈아 먹는다. 내 루틴이다. 일부러 몸에 열기를 내려고 반복 횟수를 늘리니 체온이 올라갔다. 가디건을 걸치고 커피를 내리고 있노라니 평상시보다 아이가 일찍 일어나 사과를 깎아달라고 해서 사과를 하나 깎아 접시에 담고 폰을 보니 3년 전에 썼던 오늘 일기와 5년 전에 썼던 오늘 일기와 7년 전 오늘 일기가 알림판에 떴다. 하나씩 읽어보고 웃음이 나왔다. 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7년 전에도 도서관에 다녀온 이야기였다. 도서관에 갔다. 날씨가 애매모호하다. 좀 추웠지만 버틸만 했다. 패딩을 입고 자판기에서 뜨거운 밀크커피를 뽑아 벤치에 앉아 마셨다. 봄이 곧 오실 거 같다. 기분이 좋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엄마들은 아장거리는 아이들 뒤를 쫓아다닌다. 새가 지저귄다. 불행은 도서관에 출입이 불가하다. 안온하게 존재하고 싶다. 언젠가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이렇게 봄이 곧 오실 테니 내 인생에도 봄날이 오지 않겠는가. 김윤아는 봄날은 간다고 노래를 했지만 살아가는 내내 봄이 또 오시리라 믿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봄날은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도 오고 겨울이 시작되고 또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식의 이야기를 3년 전에도 5년 전에도 7년 전에도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명절증후군을 앓을 여동생들 걱정을 잠시 했다. 방어 기제에 대한 구절들을 읽고 그렇지, 인간이 다 그런 거지.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러긴 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 내가 제일 끔찍하다고 여기는 인간 유형들, 그런 행동들. 그런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채 6개월도 되지 않아 그런 짓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기장을 펼치고 문장들을 하나씩 적어가던 아주 오래 전 기억도 떠올랐다. 시간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야. 책 하나씩 들고 딸아이랑 오후에는 엄마 집으로 간다. 번잡스러움을 온통 물려버리고 1961년에 녹음된 음에 몸을 맡기고 어젯밤 남은 식재료를 꺼내 밥을 볶을 준비를 한다. 구정이다. 게으르게 보낸 2024년 1월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렇지! 2024년 1월은 내일부터 시작인 거지, 비로소! 개구지게 웃는다. 많이 웃고 많이 웃어서 눈주름도 한가득, 팔자주름도 한가득 깊이 만들래. 그럴래. 내가 원하는 삶은 그런 거니까. 어릴 때부터 내가 원한 자아상도 그런 거였으니까.

봄이 곧 오시지 않겠어요.

그러니 서서히 준비를 하도록 합시다.

1961년 녹음된 음들이 속삭이는 전언. 민이 책 도착.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소피의 세계]를 같이 읽고 있다. 만화책으로 된 소피 1권을 갖고 있기에 2권이 언제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걸 알고 재빨리 주문. 봄을 기다리는 동안 두껍고 두꺼운 책을 하나씩 깨뜨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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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09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보다 으스스한 추위를 더 무서워하는 사람이에요. 어제 4도라고 하더니 나가니 바람 불어 춥더라구요.
오늘도 기모 청바지에 패딩 입고 나갔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데우시고 뜨거운 물을 부어주세요. 감기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이제 막 들어왔어요. 1부, 2부, 3부 마치고 왔고요. 오늘 대망의 4부 마치고 나서 글 쓰는 단발머리로 돌아오겠습니다!
계속 데우고 있어요!!

수이 2024-02-11 08:38   좋아요 0 | URL
저도 기모 청바지에 패딩 입고 외출할 준비 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노노. 그저께 어제 고생하셨으니 오늘 해피 모드로 푹 쉬시기를 바랍니다. 아 일요일이네! 오늘까지 고생하시고 내일부터 푹 쉬세요!

hylaw2 2024-02-19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좋네요. 이 글 제목을 인용해서 저도 블로그 한편 올려야 겠어요. 작성하면 공유해 드릴게요.

수이 2024-02-19 17:04   좋아요 0 | URL
작성하시면 보여주세요! :)

steal0321 2024-02-2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힘이 강해요. 봄은 부드럽고. 제가 참가하는 독서모임에서 소피의 세계 함께 읽기가 계속 언급되어도 시큰둥했는데,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라니, 흥미가 올라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이 2024-02-21 20:25   좋아요 0 | URL
만화로 보는 소피의 세계도, 소피의 세계도 모두 좋아요.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은수달 2024-02-27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피의 세계가 만화로도 나왔군요! 꼭 읽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수이 2024-02-28 08:14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하시길 바랍니다 은수달님 :)
 















마음 같아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중년에 대해서 중얼거리고 있노라니 열여섯 딸아이가 가소롭다는듯 웃으며 기어코 한마디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집에서 주인공들이 대부분 중년이야. 얼마나 쓸쓸하던지. 청춘도 아니요 노년도 아니야, 이도저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경계. 그 경계선을 지키는 이들의 이야기, 너무 쓸쓸해. 간단하게 소감을 말하니 아이는 푸후후후 웃었다. 왜 웃냐_ 묻지는 않았다. 웃기시겠죠, 님 보시기에는. 열일곱 영혼이 지금 무슨 중년 이야기를 같잖게 하고 있냐, 지금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말하지 않아도 아니 다행이다, 엄마야 라고 딸아이가 말했다. 하지만 열일곱이라고 해도 쉰이 가까워오는 육체를 지니고 있고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변명조로 대꾸하니 아이는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성이 좋은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모든 불행을 겪어도 끄떡없이 열일곱일 수 있는 거 아닐까? 미숙한 중년이라고 봐야 할까. 욕심은 콧구멍 언저리까지 그득 차서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어마무시한데 숨이 깔딱깔딱 거릴 무렵이면 아 별 거 아닌데 이러려나. 혼자서 볕 좋은 도서관 벤치 지정석에 앉아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중년이 되어 바라보는 저 너머는 대개 과거와 미래 그 풍경 속 애매모호한 시간대의 세계다. 소설 속 등장 인물이 이야기한다. 



"이게 나라니 믿어지니? 마야는 썼다. 내가 얼마나 평범해졌는지 봐. 그 옛날에는 이렇게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63) 



원하는 자아상이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 청춘이 한창일 때는 중년 무렵이 되면 이렇게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바 꿈꾸는 바, 하지만 막상 중년이 되고 보니 어리둥절하기만 할뿐이다. 정독도서관에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열일곱부터. 휴대폰 녹음기를 켜고 중얼거렸다. 열일곱에서 바로 며칠이 지난 거 같아. 이렇게 여기에서 고등학생 때 혼자 바람을 쐬러 나와 발목을 까딱거리며 눈을 쉬어주곤 하던 그 공간은 그대로인데 나만 갑자기 30년 이상 늙어버렸다는 게 신기하기만 해. 믿기지 않아. 중늙은이가 되어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리는데 정말 그대로야, 30년 시간이 느껴지지 않아, 며칠이 지난 거 같아. 그런 느낌이야. 라고 말을 했다. 친구들은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운동을 미친듯 하며 얼굴에 보톡스나 필러를 넣고 비싼 돈을 들여 리프팅을 하며 젊음을 되찾으려고 애쓴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도 늘어간다. 완경이 찾아왔다는 친구들도 서서히 생기고 호르몬 변화로 인해서 불면과 우울증이 찾아오면서 괴로워하는 이들도. 어쨌거나 젊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잘 늙을 것인가. 미를 넘어서서 이제는 노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자유로울 줄 알았고 어른이 되면 다른 이들만큼은 살아야 하니 평균 이상이 되기 위해 애쓰고 청춘이 흘러 중년이 되면 좀 편해질 줄 알았건만 결혼을 하건 결혼을 하지 않건 무관하게 그닥 자유로워보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보통 이상, 그래야 평균이고 그래야 평범한 건데 그조차 지키기 쉽지 않다. 나는 이미 그 평균, 그 노선을 탈피했다. 그러니 대한민국 중년의 평균, 그 이하라고 봐야 한다. 서글프거나 괴로운 부분은 없다. 마지못해 그랬다면 또 괴롭고 서글퍼 흑흑 눈물 방울을 떨굴지도 모르지만 뭐 그닥. 노년을 대비하는 중장년이 된 동년배들과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아직도 왔다갔다 갸우뚱거리는 나는 딸아이 말대로 몸만 늙은 열일곱이긴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다. 하루에 한끼는 제대로 먹지만 두끼는 좀 부실하다 싶을 정도로 먹는다. 몸이 이미 그에 적응이 되었고 두끼를 제대로 먹으면 속이 좀 더부룩한듯해 평소보다 더 움직인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으니 이제 하루에 만보 이상은 걸어줘야 한다. 팔다리를 수시로 휘두르며 엉뚱한 쿵푸 자세를 취하면서 거울 너머로 웃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며 깔깔거린다.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책에 고개를 파묻지 않으려 애쓰고 명상이란 걸 좀 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잘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정 보고 싶은 이들이나 보자고 하는 이들이 있으면 약속을 잡는다. 술은 일주일에 한번 이상 마시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혼자 와인이 땡길 때는 와인잔을 찬장에서 꺼내 화이트 와인을 담아놓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니나 시몬의 목소리나 빌리 할리데이 목소리나 엘라 피츠제럴드 목소리를 틀어놓는다. 사람들은 나를 괴롭힌다. 왜 괴롭히는지 그 까닭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래서 귀찮고 성가셔 인간관계는 더 좁아지기만 한다. 언젠가 딸아이와 딸기케이크를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마 엄마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그닥 많지는 않을 거 같아. 하지만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가 사랑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조촐한 장례식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아. 노년을 대비하는 것도 모잘라 장례식 풍경까지 미리 구상해놓는다. 딸아, 엄마 장례식에는 한쪽에서 재즈 음악이 나와도 좋을듯해. 그리고 국밥 같은 건 하지 말고 핑거 푸드로 간단한 먹거리만 준비해줘. 소주와 맥주 그리고 와인도 준비해줄래? 했더니 장례식이 파티야? 파티니? 그래서 깨갱했다. 깨갱하면서도 적당히 슬퍼해줘, 적당히 애도하면 돼. 과하게 슬퍼하지도 말고 쓰러질 것처럼 울지 않아도 돼. 마음 속으로 그렇게 나머지 못한 말을 이어서 했다. 그리고 또 종알종알, 죽을 때까지 열일곱이면 좋겠다. 명징한 정신으로 아 나는 열일곱인데 이렇게 몸이 늙어버렸네,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이제 더는 사랑을 고백할 수도 없겠네, 투덜거리면서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간다면 유쾌하겠구나. 아 너무 갔네. 하지만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 제목은 [사라진 것들]이다. 중년이란 시기 자체가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갑자기 확 찾아오지 않는 나이도 아닌지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들, 언제 중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세상이 이제 너희는 중년이야, 여기 이 라인에 서도록 해, 지시를 할 때부터 중년이 되어버린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 방황하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와중이지만 한편으로 그 방황이 다른 컬러를 지녔을 뿐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서글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파편들, 살아가기에 살아가고 있기에 살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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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2-09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중년이란..
저도 이책 읽고 아 중년이다...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마음은 젊은데 외모부터 주위까지 다 세월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어서 좋았던 책~!!

수이 2024-02-11 08:40   좋아요 1 | URL
현실은 직시하고 싶지 않아도 항상 알려주는 거 같아요. 왜 젊을 때보다 중년이 더 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끝없는 중년의 활동들....... 그 와중에 아 중년! 정말 새파랑님 말씀대로 그걸 깨닫게 해줘서 소중히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이 말을 들었을 때_ 우선 정희진 선생님 강연회에서 자기 검열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떠올랐다. 자기 검열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선생님이 하시는 동안, 난 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검열에 관한 질문을 한 그 분도 물론 그런 질문을 하신 까닭이 글을 쓰고 싶은데 계속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는다_ 했는데 왜 자기 검열을 하는지 그걸 캐보면 결국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가, 이렇게까지 솔직할 일인가,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괴물 같다 바보 같다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_ 그 측정을 먼저 하게 되니까 자기 검열이 더 강화되는 거 아닌가 싶다. 남 부러울 거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춘 한 친구가 말한 적 있다. 나도 솔직하게 다 쓰고 싶어_ 그래서 그럼 네 본명을 숨기고 써, 그리 말했는데 난 아직 자기 검열 필드 안에 있어. 그래서 공적인 글만 쓸 수 있어, 그렇게 20년 이상 살았어. 그 말을 듣고 네가 쓰지 못한 글을 읽지 못할 생각에 가슴이 아프구나 과장되게 흑흑 흐느낀 척. 물론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려면 더구나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언니 겸 누나 이 페르소나를 버리기란 어렵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아름다워서, 그 사람이 경제력이 있어서, 그 사람이 똑똑해서, 그 사람이 다정해서 등등 그 조건을 보고 마음이 혹 한다.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사람이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그 사람이 더 이상 부자가 아니고 그 사람이 더 이상 똑똑하지 않고 그 사람이 더 이상 다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조건들. 최근 수년 동안 들은 말 중에 가장 상처가 된 말은 망한 집안 딸_ 이었다. 듣고서도 귀를 후벼팠다. 설마 설령 내가 망한 집안 딸이라고 해도 그걸 대놓고 내 앞에서 말하겠는가 싶어서. 말이 화살촉이 되어 심장 한가운데 와서 박혔다. 피가 질질 흘러 심장이 저릿거리는데 웃음만 나와서 웃었다. 당황스럽고 황당해서 차마 이게 내게 일어난 일인가 싶을 때 그때마다 나는 웃었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망한 집 딸이니 별 볼일 없다 이건가, 그래서 망한 집 딸이라 대놓고 내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건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런 말을 입밖으로 내뱉는다는 게 얼마나 모욕인지 모르는 건가, 대체 뇌가 있는 건가. 대체 심장이 있는 건가. 뇌와 심장이 있는데 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망한 집안 딸이니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가. 화장실 안에서 꺼이꺼이 울면서도 우리 엄마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싶었다. 우리 엄마는 망한 집안 딸이 되고난 후에 백과사전을 팔러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낯선 집 대문 앞 초인종을 누르고 눌렀는데 나는 망한 집안 딸이 되고난 후에 그냥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화장실에서 울고 있네_ 싶어 눈물을 훔쳤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나는 이제 자기 검열 끝낸다_ 했다. 그러니까 글 쓸 때 자기 검열 말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검열. 밟았냐? 좋아, 꿈틀거려주지. 밟았니? 좋아, 꿈틀거려주지. 나도 모르게 반복하면서. 그때부터 서서히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 건가. 어떤 조건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자기 검열 버리고 막 쓰면 어쩐지 손해일 거 같은데 득 되는 게 많다_ 하실 때도 고개 끄덕끄덕.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또라이 소리를 들었고 나이 먹고 관습에 젖는 시간이 축적이 되면 또라이 기질이 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엣센스라는 건 나이 먹고 시간 흐른다고 해서 감해지지 않더라는. 조건들이 모아지면서부터 난 쌍년이 될 거야, 그랬다. 우리 아빠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한 이야기, 아빠가 자주 했던_ 최대 모욕적인 말은 쌍것들_ 이었는데 어렸을 때도 양반은 뭐 별 거 있나, 위선적인 것들 투성이면서_ 속으로 투덜거리곤 했는데 집에 돌아와 돌아가신 아빠 사진 앞에서 소리내어 말했다. 아빠, 난 이제 쌍년이 될 거야. 그러니 봐줘. 얼마나 내가 쌍년이 되어 잘 살아가는지. 자기 검열이란 단어를 들으면 그래서 나는 반사적으로 쌍것들_이 단어가 떠오른다. 우아하고 지적인 쌍년이 되어줄게. 자기 검열 따위 비웃으며. 이건 그나마 좋아하는 언니들 보고 다짐한듯. 엄마에게도 말했고 딸아이에게도 말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쌍년 딸은 또 쌍년? 웃음으로 답하며 그 기개로 살아가렴, 아가, 만만치 않은 세상이지만_ 쌍년들에게는 더더욱, 그래도 꿈틀거리면서. 꿈틀거리면서 할 말이라도 속 시원하게 내뱉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 싶은 마음에 내 아가에게도 엄마는 이제 쌍년으로 살래_ 그런 거고. 자기 검열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여성의 삶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줄게_ 이건 아니 에르노 언니 덕분이고. 정희진의 문장으로 또 마무리.

“억압받는 정체성과 이에 저항하는 정체성 사이에서,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사랑의 힘이든 인류애든, 그것은 못 건널 강이 아니다. ”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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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07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억압받는 정체성과 이에 저항하는 정체성’….. 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에요, 수이님…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수이 2024-02-08 21:27   좋아요 0 | URL
스스로를 억압하는 게 가장 안 좋은 거 같아요. 제일 좋지 않은 방향. 하지만 뭐 이거야 다 각자 생각이니까. 하지만 정희진 샘 말이니까 또 한번 더 입속에 넣고 우물우물거려보는.

독서괭 2024-02-08 08: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어떤 써글 인간이 그딴 말을 한대요? ㅡㅡ^
자기검열은 저도 많이 하기 땜에 공감합니다~~

수이 2024-02-08 21:30   좋아요 0 | URL
아 누구인지는 차마 ㅋㅋㅋ 자기 검열 적당히 하세요,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독서괭님!
 


























 조끼 좀 벗어주세요.......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마리 루티의 [가치 있는 삶] 북커버랑 비슷하네, 라는 생각을 또 했다는. 2023년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 중 최고의 책으로 꼽힌 [가치 있는 삶]을 읽다가 나는 이혼을 새삼 결심했는데 오늘 아침 딸아이와 아침을 먹으면서 아이가 한 이야기는 좀 충격적이긴 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게 내 눈에도 너무 뻔하게 보여서 언젠가는 이혼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 라는. 어린아이들은 다 본다. 문장 하나가 무슨 인생을 바꾸게 만들겠냐고 그런 소리들 하지만 마리 루티를 읽다가 아 그래, 결국 나는 타이밍을 보는 거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해일처럼 닥치는 그 순간은 언제란 말인가, 라고 마리 루티 안에 써넣었다. 사랑했고 상처를 주고 받았고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깨졌고. 짧은 연애와 기나긴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야기로 풀어낼 가능성이 있을지도. 다른 여자들도 어리석게 당하고 산다는데 내가 볼 때는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던데 나는 계속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행복한 척, 즐거운 척, 지적인 척, 모든 것을 가진 현대 중산층 여성의 표본을 나 스스로 이미지화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정희진의 문장들을 읽다가 억압받고 당하고 슬퍼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도망친다고 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정말 행복해질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고 그렇게 사는 일이 진실로 가능할까_ 묻고 또 묻다가 이내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수많은 여성들의 지난 삶을 마주했다. 나도 그 안에 있었고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나의 친구들도 그 안에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여자처럼 보였어_ 라고 지금 나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말을 했다. 모든 것을 가진 우아한 중년 부인. 그 말을 듣고 나는 포복절도했다. 상처 없는 삶은 없다. 관계는 생성되고 이어지고 때때로 환멸로 끝나버리거나 매듭을 아름답게 맺는 걸로 끝날 수도 있다. 너와 나_ 라는 관계가 있으니 상처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고 싶었다. 나는 사랑을 시작하기로 다짐했고  아마도 상처를 주고받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이성적으로는 한다. 물론 그러고 싶지 않지만. 하지만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껏 호르몬 작용은 3개월에서 6개월 갈 뿐인데 그 호르몬 작용으로 인한 행복감을 맛보기 위해서 몸과 마음과 정신을 오롯이 쓴다는 건 너무 손해보는 장사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으면서 사랑에 대한 내 가치관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또한 깨달았다. 사랑에 있어서는 나는 임경선 편이다. 임경선이 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 내용을 들으면서 나는 이 언니가 하는 사랑을 과거에 했네. 지금도 하고 있고_ 깨달았다.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몸을 트는 일조차 귀찮아 한다. 그걸 옳다 나쁘다 보는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이들이 주변에 하도 많아서 기이하게 여기기는 했다. 귀찮고 번거로워 사랑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하는 젊은 MZ 세대부터 이 나이에 무슨 사랑을 하겠다고 모임 같은 데 나가냐고 독거 노인 생활이 좋다고 하는 X세대 친구들까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지 않나, 사랑은.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물고빨고 서로 미친듯 좋아 어쩔 줄 몰라 해도 관계는 봄여름가을겨울로 이어진다. 그건 필연이다. 비단 사랑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이건 내가 한 말 아니라 내 베프가 한 말이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관계라면 또 마주하고 얼굴을 보면서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약도 발라주고 반창고도 붙여주고 그래도 다시 잘 지내보자_ 이런 마음이 서로에게 든다면 그들은 또 봄에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한쪽이 마음을 거둬들인다면 이제 쟤랑은 딱 겨울까지다_ 내년 봄부터는 보지 않겠다_ 한다면 그 관계는 끝난다. 상처는 마음을 닫는 이도 그 마음 닫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에게도 생기는 거고. 그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밖에서 그 관계를 응시하는 이들에게도 상처가 된다. 기껏 그 정도로 사랑을 주고 그 정도로 상처를 주려고 애쓴 거냐_ 라고 저절로 한숨이 나오고 만다. 그들은 겨울에 모두 헤어지고 만다. 때마침 매서운 겨울 바람은 곧 끝난다. 나는 봄을 말하고 싶다. 친구의 유투브를 보는 동안에도 그랬다. 잘 견뎠다. 겨울 잘 보내고 이제 봄이다. 하고싶은 말과 읽었던 문장들 읽어주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겨울을 잘 보냈다, 말했다. 상처들을 직시하는 삶. 정희진의 문장들 읽으면서 느꼈고 마리 루티를 읽으면서도 느꼈다. 인간의 언어로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 상처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그러니 그 상처들을 직시하고 그 상처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입들도 제각각이다. 하여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 내 상처와_ 그 기나긴 겨울날들_ 다른 이들은 모두 봄이라 여겼던_ 그렇게 사람들을 모두 착각하게 만들었던_ 내 이중성에 대해서도_ 그 상처를 두 손가락으로 벌려 다시 한번 헤집어보고 싶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입춘을 맞이해서 폭설이 내렸다. 한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어쩐지 봄 같다 느꼈다. 상처를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 이전까지 상처들을 한없이 받았다고 해서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겠다 다시는 내 인생에 봄 같은 건 오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편보다는 방향을 틀어 몸을 움직여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두려움과 두려움이 사방팔방으로 한가득한 건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정희진의 문장 하나 덧붙이는 걸로 마무리. 


"관계의 향방이 사랑을 구속하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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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07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4-02-06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앍.... 조끼... (지금도 입고 있다...)
앞으로는 분홍색 옷은 입지않도록 하겠습니다...!!!
발전하는 공쟝쟝되겠습니다!! ㅋㅋㅋㅋ

수이 2024-02-07 17:39   좋아요 0 | URL
조금 더 잘 받는 색깔이 있을 거예요, 쟝님. 흥하십시오. 응원합니다.
 




 친구가 책 사줬다. 자랑질이다. 자랑질하는 맛에 올리는 것도 있다.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온전하게 100퍼센트 완벽한 인생도 없고 100퍼센트 행복한 삶도 없지만 아 온전하게 즐겁고 온전하게 행복하고 그런 찰나들이 존재한다. 막 투정 부렸더니 사줄게 사줄게 사줄게, 이런 친구의 반응을 볼 때도 즐겁다. 진짜 사줘 이런 마음은 아니었지만 투정부리는 순간은 좋다. 그래서 친구가 책을 사줬습니다.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 정오가 될 무렵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동생이 전화 와서 하는 말이 자냐? 그래서 새벽 다섯시 반에 눈이 저절로 떠지는 바람에 이야기를 했더니 이야 갱년기 제대로 시작이구만 이라고 해서 확 엎어버릴까 했으나 감기 걸려 콜록거리는 동생에게 차마 그럴 수 없어 흐흐흐흐 웃기만 했다. 동생이랑 통화하고 라떼 마시고 초콜릿 먹었더니 잠이 완전히 깨서 이제 운동하러 나가야겠다. 매니악은 솔직히 책띠지만 봐도 엄청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친구가 읽어! 했으니까 읽어야겠다. 아침에 친구가 오슬오슬 좀 춥더라 해서 춥다니까 그럼 내가 웃겨줘야지, 웃으면 체온이 올라가니까, 싶어 좀 웃겨줬다. 제대로 웃은듯 싶어 잘 웃겨줬네, 좀 쪽팔리지만, 했다. 너 엄청 읽어야겠다_ 친구가 그래서 뭐 이 상태로라면 대학원에 가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킁, 물론 대학원은 그냥 하는 소리다. 영어만 좀 잘했으면 아이 갈 텐데, 싶기도 하다. 


 지난 주에 정희진 선생님 강연회 다녀오고난 후에 느낀 건데 인생 짧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번 사는데 그래도 좀 진실되게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선생님 목소리 듣는 동안 했더란다. 선생님이 웃으면 나도 웃고 선생님이 막 분노하면 나도 막 분노하고 그런 것들을 한 공간에서 느끼면서 나 선생님 좋아하네, 내 친구들만큼은 아니지만, 느꼈다. 애인이랑 통화하면서 내가 선생님 좋아하더라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럼 가서 사랑한다고 말씀드리지 그랬어, 라고 애인이 대꾸해서 하지만 내가 선생님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하려면 선생님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그래야지 나는 선생님 책 제대로 읽지도 않았는걸 했더니 꼭 알고 사랑해야 하나 사랑하다보면 알게 되는 것들도 있고 더 알고 싶고 그러는 거지, 라고 애인이 이야기해서 그래서 다음에 강의 들을 기회 있으면 그때는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더니 얼마나 요란법석하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려나, 선생님이 부담스러우시겠다 해서 흐흐흐 웃었다. 언제나 사랑 고백은 요란법석하게 한다. 그래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걸 상대방도 알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시대에 나무와 같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_ 그래서 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다고 생각한다. 라는 어떤 문장을 읽었다.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당신이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무와 같이 변하지 않을 그런 영원한 사랑을 줄 사람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나무와 같이 변하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사랑과 관계에 대한 맹목성일 수 있지만 이 시대에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누가 그렇게 변하지 않을 마음을 쉬이 주겠는가, 라고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냥 관뒀다. 그냥 나나 잘 하자, 이런 마음이 들어서. 그가 나무와 같이 듬직하게 계속 변함없이 다정하게 나를 사랑해준다면 좋겠지만 그 또한 인간의 마음이니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거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봤을 때 그 변화의 폭은 더 넓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사랑하는데 요따만큼 사랑해야지 한다고 하면 그 요따만한 사랑이 얼마나 뭘 그렇게 바뀌게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따만큼 이따만큼 사랑해야지 한다. 내가 얼만큼 보고 싶은지 말해봐_ 나는 그 말을 자주 하는데 그럼 그는 벼룩의 간만큼 보고싶지, 벼룩의 간만큼 사랑하지, 라고 대꾸한다. 그럼 나도 모르게 이씨, 하고 욕설을 내뱉으려고 하는데 그 다음 나오는 말이 벼룩의 간만큼 보고 싶고 벼룩의 간만큼 사랑하는데 잠도 잘 못 자지, 밥도 잘 못 먹지, 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흐흐흐흐 웃는다. 측량하고 규격을 정해서 꼭 사랑을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어차피 딱 우주의 먼지 그 정도 존재고 그만큼 살아가는데. 


 늦은 밤 버스 타고 집 앞에서 내려 걷는 동안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선생님 많이 좋아했네, 내가. 사실은 선생님 보면 샘, 글쎄, 제 꿈에 이틀 동안 연이어 나타나셨더라구요. 그래서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여러모로 바빠 보이셨고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해서 뭐 어쩌라고 이런 선생님 반응이 나올지도 몰라서 자제했다. 근데 뭐 하러 자제했나 그런 생각도 들긴 들었다. 선생님이 웃으시니까 저도 웃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제는 좀 선생님 책 읽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쏘쿨하게 이야기하면서 말야. 벼룩의 간만큼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만큼 사랑해요, 그래서 좀 읽어보려구요, 이렇게 쏘쿨하게 말야. 그날 막 투정부렸더니 친구가 사서 보낸 책들을 펼쳐놓고 뿌듯해한다. 내 친구가 책 사서 보냈다, 하고 자랑질해야지 알라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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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2-05 1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이님 글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인데요. 진짜 인생은 짧은 거 같아요. 아무 것도 아끼지 말고 (원래 잘 안 아끼는 편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지금, 현재만 생각하고 살아야겠어요.

사랑에 대해서라면 말이에요. 전 인간 종에 대한 기대가 낮은 사람이고,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도 크게 신뢰하지 않는 목석 같은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갈구하는 게 그런 사랑인 거 같아요. 변하지 않는 사랑, 결국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랑.... 그니깐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사람들은 그런 사랑 받기를 원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사랑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수이님처럼 내가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으니..... 저한테도 사랑 좀 ... 좀 주세요!

수이 2024-02-07 17:44   좋아요 1 | URL
인생이 짧다는 걸 알게 되는 건 그때 강연회에서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이미 먼저 간 사람들,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사람들, 그들이 알려주는 거 같아요. 저는 사랑에 있어서는 좀 자린고비 같은 타입이라고 여겼어요 저 스스로를. 그러니까 득이 될 만한 그런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면 예를 들어 나보다 더 똑똑하거나 나보다 더 다정하거나 나보다 더 능력이 있거나 그런 조건들. 물론 이 선조건들이 있어서 호감이 있고 또 그 이후 관계가 생성되고 그런 거지만 말이죠. 자린고비나 목석이나 어쩐지 비슷해 보이는걸요 ㅋㅋㅋㅋ

단발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인간이라면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랑을 원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본능 아닐까 싶은.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그런 사랑을 주고받았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엄마가 저에게 주시는 사랑이나 제가 딸아이에게 주는 사랑 말고는 없는듯 싶어요.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저는 그 경계를 넘어서서 그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은듯 해요. 바운더리를 넘어서고 고유하고 고유해서 오직 두 사람 사이에서만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한없는 사랑을 원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