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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윌리엄스,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ㅣ 컴북스 이론총서
박만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평점 :
예를 들어 어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쳐봅시다. 그것은 동시에 미로이면서도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에서 자칫 발을 헛디뎌 낙하하는 자의 끊이지 않는 비명소리, 하늘을 비행하다가 사라져버린 프랑스의 어느 작가의 실종, 말 못하는 소녀가 날카로운 면도날로 자신을 끝없이 자해하는 한낮의 태양이 지글거리는 시간. 박만준의 문장을 읽다가. 앞과 뒤와 옆을 다 예측할 수 있는 인간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마는 형상화가 쉬이 되지 않을 때 내 안에서 호기심이 끓어오른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적절한 피드백이 서로에게 오고가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짐승처럼 변할 수 있는가. 다양한 배신들이 파스텔빛으로 봄을 얼룩진다. 확실한 건 더 이상은 면도날로 내 살을 긋는 짓을 나는 하지 않는다. 소녀가 마녀가 되고 마녀가 소녀로 변환되는 그 과정들이 얼마나 심플한지 드러낼 정도는 된듯. 원한 적은 없지만.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회피형 인간들에 대해서 친구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침묵이 얼마나 피를 마르게 하는지, 그래서 내 안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피가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걸 체크하려고 살그머니 커튼을 열고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간 것은 아닌지 내내 그런 생각들. 원해서 쓰레기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 말을 듣고 다시 읽어보니 자기객관화가 그 나이에 아직까지 원활하지 않다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당신은 쓰레기가 아닙니다. 다만 당신이 한 짓들은 모두 쓰레기였습니다. 이렇게까지 선을 그어서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싶은. 어린 시절에 유행했던 SF시리즈에서 외계인들은 항상 푸른 피를 지니고 있었다. 만일 푸른 피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세 살 차이 나는 동생과 그 이야기로 한참 옥신각신 떠들었던 기억도. 외계인은 모두 푸른 피를 지니고 있고 인간들은 모두 붉은 피를 지니고 있는데 푸른 피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건 말이 안돼. 불가능해. 라고 어린 동생은 칼같이 잘라서 이야기했지만 하지만 어딘가에 푸른 피를 지니고 있는 인간도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인데 단순히 그 사실 하나만으로 외계인이 된다?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박만준과 홍신자를 번갈아 읽다가 문득.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회피형 인간은 아닌지라 마냥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관계가 성립이 되리라고 여기는 태도는 그닥. 이게 또 몇 차례 반복이 되다보니 그러한듯. 관계에 구심점이 있는 경우는 물론 다르지만.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세상에 몇이 있겠는가. 악과 동등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그 수치를 알고 모르고 거기에서 그 인간의 자아가 형성이 되는 거고. 내 죄악과 내 수치와 내 철면피 같은 면모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을 테고 그건 또 그것대로 나를 이루는 불완전한 면모들이다. 서로가 서로의 반영이라는 이야기도 했다시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끌렸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일련의 사태들이 모두 다 이어져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게 봄날 밝은 하늘 아래에서 다 이루어지기에 그러는 걸 수도 있지만. 어제가 피날레였다. 그걸 어젯밤 잠들기 전에 알았음. 개나리가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막 하늘과 땅이 구분된 것처럼 이 자그마한 별 안에서 별의별 카오스가 다 이루어지는 걸 마주하는 요즘, 어떻게든 흐르는구나.

그 방법은 이데올로기적인 모델의 조야한 재생산에서 확신에 찬 모델의 구현에 이르기까지 줄비하다. '이와 같은' 인물과 '저러한' 관계에 대한 주지의 모델을 실행하는 것은 대부분의 진지한 소설과 희곡의 진정한 성취이지만, 인물과 그 관계에 대한 새로운 명시화와 형성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재생산에서 실행에 이르는 범위에 적용코자 통상 쓰였던 창조적이라는 의미와는 다른, '부상한다'라는 의미의 창조적 성격을 띤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가지 예를 통해 '창조' 혹은 '창조적'이라는 낱말의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문학 생산은 새로운 비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자아 창조라는 특수한 행위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그리고 자아 창조 행위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아 구성 행위다. 이와 같은 실천 행위를 통해 사회의 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사회 이론의 고유한 기능이다. 사회적 과정들은 우리가 체험하고 있듯이 단순히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성과 투쟁의 현실로 이루어지는 능동적 역사다. 재생산과 예증부터 구현과 실행을 거쳐 새로운 명시화와 형성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에 있는 양식들은 모두 실천적 의식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행위에도 들어 있다. 의미화 과정은 언제나 본성상 능동적이며, 모든 사회적인 것의 기반일 뿐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가는 실천적 행위다. 또한 자아 구성이나 사회적 구성도 능동적 과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창조성이 포함되어 있다. 글쓰기는 물질적인 사회적 예술의 중심이 되는 것이므로 이 모든 형식과 의도로 사용되어 왔고 또 계속 사용된다. 그 모든 양식과 수단 속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과 자아 창조의 과정에 상응하는 진정한 연속체다. 글쓰기는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이지만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글쓰기는 언제나 자아 구성이고 사회적 구성이지만 개성이나 이데올로기적 침전물로 환원될 수는 없다. 글쓰기는 새로운 명시화고 그 자체의 양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성 작용이다. (88-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