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을 대강 마치고 외출 전에 완독, 이른 저녁을 먹기 전에 바나나를 하나 까서 입 안에 넣어 오물거리며 마지막 장면을 읽다가 눈물을 결국 뚝뚝 떨구었고 떨어진 눈물이 종이를 적시는 걸 지켜보면서 우리딸 책 더러워지는 거 싫어하는데_라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눈물 자국을 꾹꾹 소매로 찍어 없앴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난 후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는 작가 프로필을 다시 읽었다.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다가오는 무게감이 남다른 거겠지만 이 짧은 단편과도 같은 중편 소설이 앞으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하게 될지는 굳이 떠들 필요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이 읽으면 좋겠구나 라는 생각이 일단 들었다. 아니 읽어야 하는 이들은 어른들이지. 함께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대해서도. 

아는 만큼 행하고 행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기로 한다. 그게 내 몸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도 들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 여전히 심장이 미친듯 뛴다. 미친듯 아저씨와 아줌마를 향해 달려가는 '나'처럼. 시간을 들여 마음을 쓴다는 일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말이다, 나 스스로에게 말고, 나 스스로를 위해 말고, 그 마음씀은 읽기에서도 사랑에서도 역시 동일하다. 찰나에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기도 하다는 속성 또한 동일하고. 


출간되지 않은 클레어 키건의 다른 작품을 방금 전에 주문했다. 아마도 곧 번역되어 나오겠지.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마카롱을 열두 개쯤 먹었다. 잠시 후 두 남자가 초인종을 울리더니 학교 지붕교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 복권을 팔러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당연히 사야지." 킨셀라 아저씨가 말했다.
"우린 사실 그렇게"
"들어오게." 킨셀라 아저씨가 말했다.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그래서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차를 더 끓였다. - P47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아주머니가 나에게 갈색 가죽가방을 준다. "낡은 거지만 가져도 된단다."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아무 데도 안 가서 쓸 일이 없어."
우리는 내 옷을 개서 그 안에 넣고 고리의 웹스 서점에서 산 책도 넣는다. 하이디』, 『다음으로 케이티가 한 일은What Katy Did Next』, 『눈의 여왕』. 처음에는 약간 어려운 단어 때문에 쩔쩔맸지만 킨셀라 아저씨가 단어를 하나하나 손톱으로 짚으면서 내가 짐작해서 맞추거나 비슷하게 맞출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나는 짐작으로 맞출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출발하는 것이 느껴지고, 전에는 갈 수 없었던 곳들까지 자유롭게 가게 되었다가, 나중엔 정말 쉬워진 것처럼. - P83

나는 아기를 안은 엄마와 함께 두 사람을 따라서 자동차 앞까지 나간다. 킨셀라 아저씨가 잼 상자와 25킬로그램짜리 감자 자루를 꺼낸다.
"포슬포슬해." 아저씨가 말한다. "퀸 품종이야, 메리."
우리는 잠깐 가만히 서 있다가 엄마가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나를 맡아주다니 정말 친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도 힘들 게 없었어."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정말 잘 지냈고, 앞으로도 언제든지 맡겨도 돼." 아주머니가 말한다.
"아주 좋은 딸을 뒀어, 메리."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책 계속 열심히 읽어라." 아저씨가 나에게 말한다. "다음에 왔을 때는 습자 연습장에 금별을 받아서 아저씨한테 보여주는 거다." 그런 다음 아저씨가 내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아주머니가 나를 안아준다. 나는 두 사람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문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 시동이 켜지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흠칫 놀란다. 킨셀라 아저씨는 여기 올때보다 더 서두르는 것 같다. - P95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차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한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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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 Things Like These : Shortlisted for the Booker Prize 2022 (Paperback, Main) - 『이처럼 사소한 것들』원서
Claire Keegan / Faber & Faber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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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인간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드는 소설. 인간이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무엇을 앗아갈 수 있는지 비교대조하며 보여주는 소설. 묵직한 한 방. 소시민 빌 펄롱에게서 예수를 보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부인하던 모습도. 불안을 발판으로 삼아 그는 주저함 없이 그의 일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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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1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소설. 펄롱이라는 사건.

수이 2024-01-21 10:40   좋아요 0 | URL
펄롱이라는 사건, 좋다, 리뷰 제목으로. 아 근데 이미 쓰셨지!

단발머리 2024-01-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님 나와요? 😳😳

수이 2024-01-22 12:39   좋아요 0 | URL
예수님이 현세에 존재한다면_ 그런 걸 잠깐 상상해봤습니다.
 

(14)

불경기_ 부의 잣대인 부동산 타워들과 겹침. 나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함의 군상화.

교육열, 그 근간, 나보다 더 좋은 것들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 그 와중에 펄롱의 인간성.

(20)

크리스마스 캐롤!

(26-27)

타인에 의한 인정, 자아정체성 형성

(30)

시간성

(42)

직감

(46)

갈등 시작

(66-67)

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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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1-20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적으로다가...... 마리한테 돈 줘요. 손만 잡지 말고 ㅋㅋㅋㅋㅋ손 밑에 오만원권 깔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4-01-21 00:54   좋아요 1 | URL
주변에도 예수가 존재한다면 어쩌면 빌 펄롱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소설.
 
자크 라캉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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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과 승화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이들이 얼마나 무수한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관계도 역시 그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진 경우 잦고. 내가 하면 사랑이요, 네가 하면 불륜이다, 하여 너는 불탈 것이다_라는 논리는 17세기에서나 가능할 줄 알았지, 현재에도 그럴 줄이야. 그 불안들 탐구하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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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살림지식총서 340
김용수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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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이 도착의 부분집합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나 궁금한 지점, 내(가 하고 있는) 사랑만 진실되다고 여기는 태도는 뭘까?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만 진실되고 도덕적이고 너희들이 하는 말은 그릇되고 부정확하고 비도덕적이라고 단정짓는 태도는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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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초월자의 지위 획득에 대해서 라캉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희진샘이 계속 창작자(쓰는 이)의 재현의 윤리를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어제도 싫은 글 1. 나르시시즘 심한 글 2. 타자화한 글 3. 비윤리적인 글 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전반적으로 한국의 독서 시장과 수준이 너무 ㅜㅜ 처참하다며… 괴로움에 버럭. 읽는 사람들이 좀 쓰래요. 언니 써~

수이 2024-01-19 08:33   좋아요 1 | URL
어제 강연 엣센스만 정리해서 올려주세요 쟝님, 다른 다정한 분에게도 부탁했는데 듣는 이들마다 또 유독 다가오는 부분이 큰 말들 있잖아요. 그래서 부탁드림. 요즘 맨날 쓰라는 이야기만 하시네 이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