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쉽지 않지만 내가 이 정도 인간일 수 있는 건 역시 육아 덕분이다. 더불어 나를 키운 사람들. 중년이 되어 정체성이 흔들리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어린 한 인간을 키우는 활동은 정체성의 재발견을 이끌어내기도 한다는 사실. 마주하거나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걷고 있노라면 문득 궁금해진다. 나를 닮았으나 나와는 전혀 다른 안의 것들을 갖고 있는 이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싶은. 브래디 미카코 언니와 김성우 글을 번갈아 읽는 동안 시간이 잘도 흘렀다. 볼 일은 다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간만에 여유롭게. 아이는 영화를 보다가 살짝 졸았다.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이건 그냥 별볼일 없는 미학과 병맛을 뒤섞은 거야, 라고 간단하게 대꾸했다. 의미를 굳이 찾을 필요 없어, 어쩌면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야. 라고 말하니 어른의 세계란 아직 난해해, 내게는, 이라고 아이가 답해서 어른인 내게도 어른의 세계는 난해한 건 마찬가지, 라고 말하니 엄마는 엄마가 아니라 언니니까, 라고 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가고자 했던 식당에는 인간들이 그득하고 곧 브레이크 타임인지라 아주 오랜만에 단골집에 가서 아이와 식사를 했다. 난폭하고 공격성이 강해서 누군가에게 당했다 싶으면 냉큼 덥석 짐승처럼 무는 건 언제부터인가 산모기에게 물려 간지러운 부위를 긁적거리면서 따져보았다. 얼마 되지 않았다. 온순하고 착한 아이가 이런 식으로 중년이 되어 반항심을 드러낸다는 건 과연 성숙한 일일까. 질문을 하고 바로 답을 하자면 그러하다. 당하면 무는 게 답이다. 잔인하고 개사이코같은 년이라고 욕을 듣는 일은 별로 두려운 게 아닌지라. 당하면 물어뜯어라, 가능하면 치명적인 곳으로 제대로, 라고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면서도 이게 맞나 싶을 때도 있지만 당하고 훌쩍거리며 비탄의 주인공 노릇을 해봤자 혈압만 오를 뿐이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사춘기 이전 시절로 족하다. 영화를 보는데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믿으니까, 라고 주인공이 이야기를 했고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당신을 그럴 짓을 할 위인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지는군, 라고 말했다. 오호라, 눈빛을 반짝이면서 영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는 믿으니까, 라는 말을 1년 전에 듣고서 그렇지,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고개를 끄덕였고 1년이 지나고난 후 나는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너는 완전 그런 짓을 하고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뻔뻔한 인간이더라, 라는 말을 오늘 아침 하고 이런 우연들의 조합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인간이 인간에게 믿음을 준다는 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거고 그 기대를 바닥부터 흔들어 무너뜨리는 건 인간에 대한 저주를 하게 만드는데 이건 좋지 못한 일이다. 안전 기지가 안전 기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인간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주 작은 자극에도 곪아 터지는 거대한 종기를 심장과 뇌 안에 지니게 된다. 부모를 제외하고 그 이후 만나는 모든 인간들을 만날 적마다 그 종기가 곪아 터진다고 치자. 어디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뜨끈한 심장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말하는 거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도 하는 멋진 이들이 있긴 하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쉬이 영향받는 존재다. 연약하기 그지 없는 말랑말랑거리는 존재다. 그래서 안전 기지의 역할이 더 중요한 거겠지만. 하여 안전 기지를 가지지 못한 채 성장한 인간은 자신이 성인이 되어서도 안전 기지의 역할을 할 수 없노라는 브래디 미카코 언니의 스승 애니 말을 입속으로 궁글리는 동안 그런 식으로 배신과 거짓과 감정이 뒤얽혀 이상한 것들이 생겨나는 건가 싶어서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았다. 양육자에게 학대를 당하거나 버림을 당하는 경우야 그 프레임으로 보자면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꽤 있으니까 이것도 좀 뒤적여보긴 해야할듯. 인간은 단순하지 않다. 그 몸과 그 마음을 봐, 정말 하나의 우주잖아. 한 시간 달렸다면 좋았겠지만 그냥 서늘한 바람 부는 동안 아이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걸어도 괜찮았다. 훌쩍거리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아가, 근데 너 엄마 애인 생기면 어쩌려고 이러냐? 웃으면서 말했다. 수면 시간을 늘렸고 자극적인 걸 좀 덜 먹고 그러다보니 혓바늘은 모두 사라졌다. 안 괜찮지만 괜찮다는 피드백이 좋아서 나도 종종 써먹어야겠다 싶었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그거 꽤 괜찮은데? 안 괜찮지만 괜찮다, 그 말, 말하고나니 별 게 다 괜찮네, 풋, 하는 엄마 반응. 쿨한 인간이고 싶다. 허나 지금 이 몸에 이 마음을 지니고서는 무리다. 무리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좀 무리해서 쿨한 척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건 껌이다. 그만큼 삭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으흠. 애초에 쿨한 인간들은 종족 자체가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쿨한 건지 아니면 쿨한 척 하는 건지 헷갈리는 어떤 중년의 글을 읽고난 후. 쿨한 척 하는 인간들도 쿨한 척 하는 글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로 쿨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오, 쿨해, 라고 말할뿐. 우연히 브라우니 마주하고 나도 모르게 방긋 웃고 말았다. 이건 확실한 나의 정체성이로군, 정말로 방긋 웃으면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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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2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우니 보구서 방긋하는 게 확실한 정체성.ㅋㅋㅋㅋㅋ
모두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ㅋㅋ
저도 때때로 쿨한 건지, 쿨한 척 하는 건지…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 하는 건지…감정의 노선들이 왔다리 갔다리 헷갈릴 때 많던데…
그래도 좋아하는 것을 보고 방긋 웃음이 나와버리는 건 가장 솔직할 때에요.ㅋㅋㅋ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 차별과 다양성 사이의 아이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1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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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디 미카코 언니를 재독하다가 하프 앤 하프에 대해서 모자가 한 대화를 눈여겨보다가 튀어나오면 그걸 꼭 망치로 찍어 튀어나온 걸 다른 것들과판판하게 동일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서도 겹쳐서. 선의와 악의와는 별개의 문제로. 사춘기를 겪었던 시기에도 그랬지만 갱년기를 겪으면서 사춘기의 절정에 다다르는 소녀를 양육하면서 다시 느끼는 바, 다양성과 그걸 또 판판하게 다듬는 생의 작업에 대해서도. 가족, 친구, 연인이라는 관계성 안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재단해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삶에 규격이라는 게 진짜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한편, 규격 따위 엿먹으라고 해, 라고 줄곧 반항하는 이들도 있는 거고. 삶이라는 게 다 제각각 얼굴이 다른 것처럼 제각각 목소리가 다른 것처럼 제각각 다른 삶의 목표가 있는 것처럼 다 다양하고 다른데 그걸 어떤 틀에 맞춰 이게 옳고 이렇게 해야 제대로 사는 거고, 그게 얼마나 암울하고 답답한 일인지는 그 규격에 맞춰 살아온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거고, 이게 또 흥미로운 거로구나 싶다. 이걸 언니 글을 읽다보면 더 알게 되고. 

왜 브래디 미카코 언니에게 반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도. 브라이튼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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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 잘못 배우면 색마 되죠, 라는 오늘의 선생님 말씀이 정말 핫해서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이 꽉 물고 눈물 나올 정도로 웃었다. 태어나서 오늘 가장 겸손했고 겸손해졌다. 큰일났네 하고 속으로 나 혼자 들떠서 덩실덩실 춤췄다. 결국 못 참고 근데 쌤, 현상학 제대로 배워도 색마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지르고 말았다. 아 조금 더 겸손했어야 하는데 젠장, 나란 인간은 역시 글렀어. 그새를 못 참고.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언니가 교수 이야기 듣더니 소설로 내자, 수연아, 해서 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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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6-1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아야 하느니 ㅋㅋㅋㅋ참아야합니다. 눈물 나올 정도로 웃기면 말이죠 ㅋㅋㅋ 이렇게 됩니다! 😂

수이 2025-06-18 23:39   좋아요 1 | URL
출근하셔야 합니다, 얼른 침소로 드시죠 마님 🤫

단발머리 2025-06-18 23:42   좋아요 0 | URL
식탁에서 고개 박고 있다가 ㅋㅋㅋ 이제 들어갑니다. 😴 굿나잇!

수이 2025-06-19 13:14   좋아요 1 | URL
굿모닝, 마님, 아니 굿애프터눈 마님, 점심 메뉴는? 저는 메이비 콩국수 ㅋㅋ
 








그냥 보면 짠해, 라고 한 내 친구가 가는 단골 카페 주인장은 알고 보니 30년 전에 내가 쟤는 별로인데 말야, 라고 말한 녀석의 전아내. 이혼녀라는 걸 알아서 짠한 거냐? 물어보니 아니 그냥, 보면 볼수록 좀 짠해, 라고 해서 어디 그 짠한 이혼녀 얼굴 보러 가자, 하고 테이크아웃해서 커피 일잔, 왜 짠해보이는지 알겠네, 말하니 그치? 그치? 라고 해서 나도 이혼녀인지라 누군가 보면 짠할까? 하고 친구에게 물어보니 네 어디를 봐서 짠하냐? 대체 네 어딜 봐서?! 라고 친구가 말해서 민망했다, 아주 쪼금. 설이라는 글자를 보면 짠하냐? 라고 친구가 갑자기 물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 작년 여름 내 삐쩍 마른 가슴뼈 떠올리면 짠하지, 말하니 해골이 덜거덕덜거덕 걸어다녔지, 근데 지금은 돼지, 라고 친구가 말해서 속으로 이년이, 했다.

올 여름 들어 오늘 처음으로 우연히 2만보를 넘게 걸었고 소주를 좀 마시고 맥주 좀 마시고 물을 좀 덜 마셔서 저녁 무렵에는 힘들었다. 친구는 꽐라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땀 너무 빼고 수분보충 제대로 못하고 곳곳에 에어컨 바람이 너무 쎈데 알콜 마셔서 상태 메롱거리다가 귀가해서 그릭요거트에 견과류 한주먹 넣고 와구와구 퍼먹으니 그제서야 좀 속이 풀리더라는.

읽고 있는 책에 적힌 플래너리 오코너 문장 바라보는 동안 들려온 카페 음악이 참 괜찮았는데 무슨 연주곡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다만 나는 이곳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주 오겠구나 알았고 짠한 이혼녀가 하는 카페 커피맛도 괜찮아서 이곳도 자주 오겠구나 알았다. 여름이 들끓고 그 와중에 조용히 오고가는 공간들과 그 세세한 틈바구니 사이에 머무르는 온기와 냉기를 관찰하는 동안 또 시간이 흐르겠구나 알았다. 표정들, 인간들의 스쳐지나가는 듯한. 그곳에서 얻는 것들이 참 많다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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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6-18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공지능 책에 오코너 무슨 일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부제가.... 지금 준비해야 한대요. 큰일입니다, 진짜!

수이 2025-06-18 18:55   좋아요 1 | URL
배고파 쓰러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 뛰쳐나가서 떡볶이 먹고 싶습니다

단발머리 2025-06-18 18:56   좋아요 0 | URL
나두 떡볶이! 🥵🥵🥵

수이 2025-06-18 21:30   좋아요 1 | URL
크림빵으로 변경 ㅋㅋ
 

어떤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느냐가 타인들을 바라보고 마주하게끔 한다, 인간이 인간 너머의 것들을 마주하는 경우에도. 간만에 열독. 장마 시작되면 바로 페이지들 그 너머로.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담대하지도 못한 주제에 담대한 척 가면을 쓰는 건 그닥. 내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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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6-16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알라딘에 올라온 어떤 이웃님 글에 AI가 지능은 있지만 의식은 없다.... 이런 글을 본 것 같아요. 인공지능의 자기 인식이 가능해졌을 때, 걔는 착한 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전 자주 들어요. 이 책 다 읽고 알려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5-06-17 22:49   좋아요 0 | URL
인간이 자기객관화가 되면 더 이상 악을 저지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모럴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더 이상 헤아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런데 또 인간이 그렇게 쉬이 똑똑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신들이 인간들에게 이런저런 고통과 기쁨과 또 고통을 준다고도 어느 신화 이야기에서 그러던데 말이죠. 단발님 댓글 보다가 자기객관화 되는 순간 한강으로 뛰어들 인간들 참 한둘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