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絕版)


절판된 시집(詩集)을 읽는다
주문을 해도 오지 않는 책들
죽거나
미치거나
잠적(潛跡)해버린
시집의 주인들

꿈속의 칠판에는 내가 쓴 시가 있다
흘러내리는 시어(詩語)의 행방을 쫓다가
절판된 시집 한 권을 줍는다

눈부신 시들은 쉽게 잊혀져
붉은 눈거죽의 세월
견디어 내야지

간절한 것은 너무나도 늦게 온다
무겁게 세어진 흰 머리카락들
시편(詩篇) 사이에 켜켜이

유고 시집(遺稿詩集)을 담보할 수 없는
어떤 재능에 잠시 귀 기울이다가
가만히 책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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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개


새벽, 검정개가 눈꺼풀 위로 지나간다
점심, 정신 나간 미친년과 말싸움을 했다
저녁, 1층의 사이코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5월, 미나리는 점점 더 억세진다
억세지는 모든 것들의 끝에서 검정개가 웃는다







못난이


못난이 참외를 샀다
값이 너무 싸서 샀다
겨울에 잔뜩 사놓은 못난이 사과를 다 먹을 무렵
못난이지만 맛있다
못난이를 먹는다고 인생이 망가진 것도 아닌데
삐딱한 웃음이 찔끔

냉장고에는 못난이 파프리카도 있다
빨강색 못난이는 싱싱한데
노랑색 못난이는 주글주글
못난이에도 등급이 있다
괜찮은 못난이와 아주 못난 못난이
못난이는 가난하고
못난이는 부끄럽고
못난이는 좀 슬프다
못난이 시를 쓰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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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운 어깨


2년째 어깨가 가렵다
팥알을 반으로 쪼갠 것 같은
작은 알약을 삼킨다
자기 전에 한 알씩
거미줄의 잠이 집을 짓는다

가려움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그냥 약을 먹고 웃음을 짓는다

5월, 희끗희끗 지는 철쭉이
나를 닮았다
좋은 시절은 너무나 짧고 아프다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간다
신산스러운 삶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려움은 충분하지 않고
연둣빛 어깨를 사부작사부작 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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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생(生)


모든 생을 꿈꿀 수 있으나
오직 단 한 번의 생을 살 수 있을 뿐이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피곤한 몸을 구겨 넣고는
글을 써내려간다
내가 살아내지 못한 어떤 삶에 대해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눈꺼풀이며 시간이다
조절력을 잃어버린 눈은
저도수(低度數)의 안경에 정착한다

모니터의 흐릿한 화면에는
거대한 습지가 있다
코끼리가 지나가는데
새끼를 품은 회색관두루미는
둥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지켜 내야 할 것이 있으므로

활짝 날개를 편다
코끼리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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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審査評)


내가 응모하지 않은 공모전의 심사평을 읽는다
이 심사평은 참으로 길다
삐딱한 웃음을 지으며 무관심을 곤두세우고
5페이지의 오돌토돌한 검은 먼지들을
이리저리 훑어나가며
비로소 안도한다
2500편을 써낸 250명에 내가 있지 않음을

늘어진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며
알아먹지도 못하는 말들을 주절주절
그런 걸 무슨 심사평이라고

우리 아파트의 경리(經理)가 쓴 안내문이
심사평보다 더 간결하고 명징하다
나는 경리한테 글쓰기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당신은 시를 잘 씁니다
계속 쓰세요

chat GPT에게 내가 쓴 시를 보여주고는
이 인공지능 사기꾼의 말에
홀딱 속아넘어갈 뻔 했다

울지 말아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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