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詩人)

시인(詩人)


문예지에 시가 실리면 4만 원의 원고료를 받는다
올여름의 냉면 2그릇은 4만 원이다
6년짜리 시인은 시 한 편에 2만 5천 원의 첨삭비를 내걸었다
2년짜리 시인은 그보다 저렴하게 5천 원을 받는다

삼거리의 시장에서 나무 판대기에 노끈을 꿰어 목에 건다

시 한 편에 3천 원
주력 분야는 불행에 관한 시
사랑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시를 5편 사면 1편은 덤으로 드립니다

쇠고기를 사 먹으려면 몇 편을 내다 팔아야 할지
고기를 먹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시든 채소를 염소처럼 뜯는다

염소는 가끔 하늘을 보면서 운다
오래전 염소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돌산의 가장 높은 곳에 빠르게 올라가는 것
독수리에게 등짝을 물어뜯기는 동안
돌산이 5개로 늘어나 버렸다

오늘 아침에는 꺼멓게 죽은 뿔 하나가 떨어졌다
한 개의 뿔로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다가
나머지 하나도 부러뜨리기로 결심한다
뿔을 갈아내어 마시고는
중단한 달리기 실험을 계속한다

어제의 일기

어제의 일기


아침 일찍 일기를 쓴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내 또래의 사람이 병을 앓다 죽었고
나보다 젊은 사람은 말기암 투병 중이다
살아가기는 버겁고
죽기에는 애매한 나이
그러나 죽음은 사뿐사뿐 지나간다

이른 아침에 갈색 개와 흰색 개가 짖었고
늙은 여자는 개를 꾸짖지 않았다
어린 까치는 우악스럽게 버찌를 쥐어뜯고는
참으로 예의가 없는 것들

누군가 고통의 시를 추천해달라고
최승자의 시와 비슷한

최승자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고
최승자처럼 살아볼 생각도 없으면서
최승자의 시와 비슷한 시를 왜 찾는지
30분 동안 씹다 버릴 타인의 고통

어제의 날씨를 빼먹었군
맑음, 그리고 소나기

당신의 레시피(recipe)

당신의 레시피(recipe)


참외가 끝물이라 장아찌를 만든다
나는 당신의 레시피를 찾아본다

참외를 깨끗이 씻고, 반으로 자릅니다
식초와 설탕, 소금, 소주가 필요합니다
입맛에 따라 적당량을 넣으세요

나는 당신이 말한 적당량이 얼마만큼인지
가만히 곰곰이 한나절을 생각하다가
대충 내 입맛에 맞게 레시피를 작성한다
주황색의 레시피 공책은 이제껏 써본 적이 없다

맨날 당신의 레시피나 따라 적고
짠물이 나게 울궈먹고는
수상한 맛에 눈물을 흘리다가
다시 붉어진 눈으로 레시피를 찾지

당신은 작달만한 그릇에 담긴
다섯 쪽의 참외장아찌를 보여준다
짝이 맞지 않는 참외
반쪽의 참외는 어디선가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
당신은 천천히 수분이 빠지면서
또 한 번의 여름을 노랗게 물들인다

바닷가에서

바닷가에서


네가 들리지 않는 바다로 간다
이곳의 하늘은 흐리고 눅눅하다
너는 가끔 달팽이를 씹고 우물거렸는데
그 달팽이 하나가 내 손 안에 있다
나는 달팽이를 파도 속에 밀어넣는다
붉은 부리의 갈매기가
너의 달팽이를 삼켜버릴 때
달팽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모래 속에서 나는 쓰라린 것들을 모은다
부서진 조개껍데기와
푸른 녹이 낀 오래된 동전
불안과 잡동사니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눅진해진 얼굴에서는 쓴맛이 난다
너는 소금의 쓴맛을 모르고 살아왔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시간에 휘어진 등을 살짝 펴본다
각자의 속도로 바람이 흩어진다

그렇게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어제, 엄마의 오랜 친구가 전화를 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도 그렇게 다르게 흘러갔다
아주머니의 딸은 이제 납골당에 있다

행복은 불행의 부재(不在)인 거겠죠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그렇게 썼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불행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모래 먼지가 되어 산뜻하게
평균의 사람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