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보(placebo)


올해는 가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나무들은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나뭇잎을 떨군다
시간이 없는 것이다 얼른 살 궁리를 해야지
나는 외풍이 심한 집 창문에다 뽁뽁이를 겹겹이
이어서 붙인다 겨울이면 집안은 바람으로 꽉 들어찬다
나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이깟 뽁뽁이 따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붙인다
이건 마치 생강차가 목감기에 좋다는 민간요법을 믿는 것과도 같다
만성편도선염에 시달리는 나의 목은 늘 부어있다
항생제도 소용이 없다 배즙도 소용이 없다 생강차도 소용이 없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어디서 들으니 개량종 생강은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시중에 파는 생강은 죄다 개량종 생강이다 사람들이 매운 것을
싫어하므로 생강은 매운맛을 버렸고, 크기만 커졌다 토종 생강,
그러니까 조선 생강이 효과가 있다는데, 그걸 파는 데가 없다
그 조그맣고 진짜 매운 조선 생강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으로는 조선 생강을 상상하면서, 개량종 생강으로
우려낸 차를 마신다 조선 생강차를 먹으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
그렇다, 믿음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플라시보(placebo) 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나의 목은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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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책상 위의 시계가 5분 늦게 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얼른 분침을 바로
잡아준다 하지만 이 시계는 점점 더
정각에서 멀어질 것이다 새 건전지를
끼워줘야겠지 나는 시계에 새 건전지를
끼워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원래 이런 시계는
쓰다 남은 건전지를 끼워도 잘도 간다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이 발견을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알려준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수명이 다한 것처럼 보이는 건전지가 그렇게
꾸역꾸역 지 목숨을 이어가는 것처럼 희망도
끈적끈적 점액을 내뿜으며 들러붙는다 슬프게도
희망이란 원래 버리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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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1.
아파트의 분리수거장에 그리 낡지 않은 매트리스와
이불이 나와 있다 이불은 두 개의 끈으로 잘 동여매져
있었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진홍색의 솜이불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이불도 알록달록한 천에
수가 놓아져 있었다 장미와 모란과 학이 있는 이불
나는 버려진 옛날 이불에서 죽음의 기운을 읽는다
아마도 저 이불의 주인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깨끗해 보이는 매트리스도 그래서 함께 버려졌으리라

2.
가을 새벽, 소슬바람에 잠이 깼다
춥다, 나는 오리털 이불을 꺼내었다 덮어보니
무겁다, 최신의 과학 기사에 따르면 무거운 이불을
덮어야 잠이 잘 온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가 다소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이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깟 손바닥 두께만큼의 오리털 이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나는 인생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더해져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지 생각한다
휘청거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무게의 짐
하지만 나는 늘 휘청거렸다

3.
한때 극세사 이불이 크게 유행했었다
엄마는 극세사 이불이 마음에 들었는지
꽤 많이 사들였다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마다 샀다
극세사 이불의 색상은 거의 비슷했다
다홍색 빨강색 자주색 보라색
내게는 아주 옛날의 내복 색깔 같았다
그런데 엄마는 극세사 이불을 덮지 않았다
그걸 덮으면 너무 더워서 갑갑하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산 이불을 막내딸 혼수로 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동생은 이불 색깔이 촌스럽다며 가져가지 않았다
엄마가 사랑한 극세사 이불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나의 장롱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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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


작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세요
뭐 필독서나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들어야 할 수업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일단 글을 쓰기 위한 뼈대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 들어갈 내용은 좀 생각을 해봐야겠죠
참고할 만한 자료들도 모아보고
그렇게 내 글을 써나가고 싶거든요

자, 내가 해결책을 알려줄게
잘 쓰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해
어떻게든 오랫동안 버티면서 쓴다고
생각하면 뭐든 될 거야
말하자면 시간과의 싸움이지
너와 같이 출발한 사람이 어느 순간,
네 옆에 보이지 않을 때
네가 버티는 것은 더럽게도 힘들고
너의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은 저기 어디
외계 행성에나 있을 것이므로
너의 감수성은 미세플라스틱처럼 바스러지고
나중에는 그냥 도망쳐 버리고 싶어져
이봐, 알아들었어?
지금부터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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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과(沙果)


가려운 어깨를 긁는다
나의 병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1년째 오른쪽 발이 아프더니
이제는 왼쪽 발까지 아프다
걸을 수 없다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쓰레기통 밑바닥에
굴러다니는 푸른 사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 사과
그 사과는 왜 버려졌을까
쓰레기의 내력을 헤아려 본다

저 사과는 아픈 사과다
아픈 것들은 죄다 멸시를 받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결국은 버려질 것이기에

앞집의 노인은 백 살을 앞두고 있다
몸이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한지가 꽤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사망률이 치솟는다
나는 앞집 노인이 올가을을
넘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남은 생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쓸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버려질 글을 또 얼마나 쓸지

가려운 어깨는 불길한 징조이다
붉은 반점도 우는 소리를 낸다
아픈 사과가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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