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小說家)의 언니


소설가 K가 내 동생이에요

K의 언니는 연극 공연을 보러 간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연극이었는데,
돈이 없는 나는 학교에서 하는 그런 연극을 자주 보러 갔다

내가 K를 본 적이 있었던가?
비좁은 학교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두어 번 본 것도 같다
K는 학생 시절에 일찍 등단해서 약간은 스타의 느낌이 났다
평범한, 일반인 스타의 느낌,
이라고 쓰고는 뭔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어떻게 달리 고칠 수도 없다 아무튼,
K는 소설책 표지에 나온 K의 사진과
진짜 똑같이 생겼다 K의 언니도 K와 많이 닮았다

K의 언니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자신이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연극 공연 연출을 하고 있노라고 했다
소설가의 언니도 특이한 일을 하고 있었다

K는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작가로 아주 잘 나갔다
문제는 그게 단편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이었다
K의 첫 장편은 폭삭 망한 수준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최근에 K의 두번째 장편이 아주 오랜만에 나왔다
나는 K의 소설은 이제 더이상 궁금하지 않지만,
가끔 K의 언니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는 궁금했다

짧은 대화에서도 참으로 인간적인 향기가 나는 사람
소설가의 언니는 그런 사람 같았다
그날, 나와 K의 언니가 본 연극 공연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토록 명민했던 내가 이제는 정말 늙었다는 생각만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인()의 아들


H는 시인의 아들이었다 나는 H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나는 H의 아버지가 쓴 시들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었다

H야, 그 시에 나오는 아이는 너를 뜻하는 게 맞아?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 거겠죠

느물거리는 말투로 H는 대답했다

H의 아버지는 H와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나는 H 아버지의 수업을 들으러 갔었다
그런데 시인은 수업 시간에 담배를 너무나 많이 피웠다
나는 30분만 듣다가 가방을 챙겨서 조용히 강의실을 나왔다

H의 아버지는 내가 졸업할 때 축사를 했었다

예술을 하려는 여러분!
절벽에서 뛰어내리십시오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만 살아남습니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절벽 앞에 서 있다
천 길 낭떠러지 밑에는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밤은 깊어가는데
돌아갈 길이 없다

오늘은 문득 H 생각이 났다
H가 무엇을 하면서 먹고 사는지 알 수 없다
H의 아버지는 아직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 시간에 담배 피우는 것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때와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능(可能)


5월, 봄밤은 아직 춥다
나는 보일러를 틀고, 전기장판의 코드를 연결한다
전원부의 다이얼 숫자는 1
약하게, 이 늦은 봄밤의 가능한 온기,
나는 가능(可能)한 역들을 이미 지나왔다
누런 이빨을 드러낸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환자들이 말입니다 치아에 수명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아요 치아를 죽을 때까지 쓴다고 생각해요
단정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치과 의사
그렇군요 치아도 언젠가 죽을 날이 있다는 걸
나는 내가 죽는 날에 남아있을
가능한 치아의 개수를 헤아려 본다

건너편 아파트의 커다란 개는
이 밤에도 짖는다
두려움에 떠는 불쌍한 개와
개의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하는 몹쓸 주인에게
가능한 예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33년 된 목백합 나무는 밤바람에 우는 소리를 낸다
그 나무는 한 달 전에 베어졌다
나는 오가며 살펴보곤 한다
그루터기에 무엇이 생기는지를
불가능한 무언가를 상상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하얀 팝콘이 가득 찬 종이봉투를 받았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개들을 싫어한다 짜증을
내면서 잠에서 깼다 새벽에 회사 직원이 죽었어
이제 마흔 좀 넘겼는데, 심정지래 나는 심정지와
심장마비가 어떻게 다른지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한다
심장이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면 심정지가 온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첫날,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원망과 두려움으로 바라보았죠
그러다가 결국 그날 저녁에 엄마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어요 못할 짓이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냥 자다가 새벽에
조용히 죽으면 좋겠어요 고통 없이요 여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쓴 글을 읽는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는 쓰디쓴 모래가 묻어난다 끈적거리는 검은 모래
상갓집에 잘 다녀와 아침부터 흐리더니 비가 퍼붓는다
나는 하얀 팝콘의 꿈이 무슨 뜻인지 Chat GPT에게
물어본다 팝콘은 부풀면서 터지니까 뭔가 좋은 소식이
들릴지도 몰라요 흰색은 희망의 색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검은색의 죽음이 파근파근하게 걸어오면서 웃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춘일 서정(春日抒情)


재잘거리는 철쭉이 핀 산책로
두 개의 등산 스틱으로 걸아가는 노인
나에게는 두 개의 안경이 있다
근거리용과 원거리용
늙음에는 돈이 필요하다 아주 간절하게

이미 라일락이 진 자리
아파트 잔디밭의 개똥 금지 표지판을
좌절 금지로 매번 읽는다

다시 서른 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난 가지 않겠어, 어떻게,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라고, 그냥 여기에서
두 다리를 땅바닥에 꽉 붙이고
오래된 흉터를 어루만지면서
쉼표는 왜 그리 많은지
마침표를 찍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며칠 전 꿈에서 사라진 새끼 고양이의 행방을
오늘 새벽의 꿈에서 확인한다
작은 방 창문 건너편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는
봄볕 아래 자꾸만 헤살거리며

곧 겨울이 오겠구나
엄마, 이제 여름이 올 거야
아직은 봄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