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사다리 움직임 연구소의 “벚나무 동산은” 외형상으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어 보인다. 12개의 의자만으로 무대를 구성한 점이라던가, 희극적 요소의 과감한 도입, 배우들의 독특한 움직임과 대사 처리 등은 확실히 관객의 눈길을 끄는 점이다. 그래서였을까? 두 시간 남짓 되는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의 집중력과 호응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과연 관객들의 만족감을 가져오게 만든 것은 이 연극만이 가진 독특한 장점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연극에 진정한 힘을 부여한 것은 안톤 체홉이라는 위대한 극작가의 원작 “벚꽃 동산”이 있기 때문이다. “벚나무 동산”은 그 원작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 연극인 것이다.

 

  한국적 현실에 맞게 각색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지나치게 희극적인 요소를 도입한 부분은 눈에 거슬렸다. 솔직히 그것은 흥행성을 염두에 둔 상업적 발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사투리의 희극적 변용, 마술의 시연 등과 같은 요소가 원작과 얼마나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극의 전개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어떤 면에서는 원작의 본질을 흐렸다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체홉이 “벚꽃 동산”에서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체홉은 작품 속의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모두 제각각 상처와 사연을 지닌 인물들은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배회하며 떠나기를 반복한다. 연극 “벚나무 동산”에서 결국 동산을 차지한 천용구 마저도 일견 신분제를 조롱하고 부를 축적해서 한풀이하는 승리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도 ‘떠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를 비롯해 다른 인물들을 떠나게 만드는 것은 개인 보다 더 큰 거부할 수 없는 시대와 역사적 흐름이라는 외부적 요인이다.

 

  그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사람들이 체홉의 연극에서는 주인공들이 된다. 어떤 면에서 원작의 시대적 배경인 러시아 제정 말기와 일제 강점기는 격동의 시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고, 그 부분은 “벚나무 동산”의 시대 설정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귀족-농노와 양반-노비로 대변되는 신분제의 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각색의 장점은 무난하게 원작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벚나무 동산”이 떠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나마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러한 점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작이 주는 절제된 슬픔과 삶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르기에는 다소 힘이 부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시도가 항상 좋은 것을 담보하지 못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이 의미를 가지려면 기존의 것에 대한 철저하고 냉정한 분석과 함께 창의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벚나무 동산”의 시도는 새롭기는 하지만 의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작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힘겹게 서있는 이 작품을 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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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란 얼마나 때로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것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영역은 그야말로 광대무변하다고 할 것이다. 포르말리이니 극단의 “광대들의 학교”도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어떤 면에서 “광대들의 학교”는 말하는 부분 보다는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도입부는 매우 흥미로워서 처음부터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영사기로 재현된 모나리자 그림, 아크로바틱에 가까운 배우들의 몸짓, 독특한 음향 등은 극에 신선함을 불어 넣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커튼으로 분리된 세 개의 연극적 공간은 극의 전개에 있어서 중층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커튼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있는 요소들과는 별개로, 원작 희곡을 읽어보지 않고 이 극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다. 연극 시작에 앞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다. 주인공 내면의 분열적 자아를 연극적으로 표현한다는 시도 자체가 기존의 내러티브 구조를 차용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광대들의 학교”는 쉴 새 없이 내러티브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며, 때론 타협하면서 극을 풀어나간다.  

 

  이렇게 내러티브가 혼란스럽게 질주하는 동안 관객이 도입부의 긴장감에서 점차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막히면 이미지를 따라가고, 그것도 막히면 음악과 소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그렇게 반복되는 과정은 당연히 극적 흥미를 반감시키게 만든다. 이것이 후반부가 시작되기 전쯤에 배우가 잠시 연극을 중단시키는 지점에 이르면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상당부분 소멸되고 만다(일부 관중은 그때에 자리를 떠버렸다).

 

  이어진 후반부는 수습할 수 없는 내러티브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미 없는 언어의 나열은 귀와 눈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관객을 극도의 혼란스러움으로 몰고 간다. 이쯤 되면 관행화된 내러티브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익숙해 있으며, 그것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파악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실감하게 될 법도 하다. 어쩌면 그것이 연출자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자폐아의 내면처럼 세상에는 우리 자신의 익숙한 내러티브 관습에서 벗어나 위치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광대들의 학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모호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나와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익숙한 사고의 틀로는 쉽지 않음을 넌지시 일러주면서, 타인과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일면 우리 자신의 비타협적이고 편파적인 모습과 맞닿아 있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을 선언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광대들의 학교”는 길 잃은 내러티브 속에서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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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은 독일 나치즘의 모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노동당이 결성된 해였다. 이것은 후에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으로 거듭나면서 히틀러의 확고부동한 통치기반이 되었다. 1920년에 제작된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이 나치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이후 독일 사회가 겪게 될 정치 사회적 격변을 예고하는 징후가 나타나 있다. 영화에 나타난 ‘밤’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제인이 밤에 몽유병자 케사르에게 납치당하는 장면은 마치 헨리 푸셀리의 그 유명한 그림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밤’은 침입, 강탈, 납치, 살인과 같은 악행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쉽게 은폐시킬 수 있는 시간적 배경이 된다. 칼리가리 박사는 밤의 악몽의 주재자이며 모든 악행의 중심에 서있지만, 직접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조종자, 감시자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방사형으로 설계된 정신병원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전형이며, 이것은 이후 독일 국민들이 처하게 될 국가적 감시와 처벌을 예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칼리가리 박사를 히틀러로 볼 수 있을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박사가 사랑한 ‘밤’을 히틀러 또한 사랑했을 것이다. 그는 독일 사회에 ‘밤’이 드리워지길 기다렸고, 마침내 그 ‘밤’이 오자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을 구현해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전쟁과 살육의 광풍이 혹독하게 휘몰아쳤던 히틀러 치하 독일의 ‘밤’에 대한 전주곡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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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수긍이 가는 멋진 해석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극의 시작은 다소 낯설다. 김 순경 역의 배우가 관객들에게 주의사항을 당부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규회가 등장하면서 바로 극이 시작되어 버린다. 관객에게는 일상의 공간에서 곧바로 연극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동과도 같은 체험인 것이다. 그런데 규회라는 인물의 차림새가 심상치 않다. 온몸이 물에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그는 김 순경에게 길이 어디 있는가를 묻는다. 

 

  연극은 황 마담과 엄 사장을 비롯해 호수 다방 주변 인물들의 걸쭉한 입담을 통해 심각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마구 흘려놓는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정신지체 장애자인 명숙이 섬 주민들의 그릇된 욕망의 희생자로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것에 대해서 그 어떤 동정심도 들어가 있지 않다. 명숙의 죽음과 그 사촌인 규회의 울분은 오히려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데, 이것은 이 연극이 힘없고 소외된 인생들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보듬는 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연극은 그 보다는 엄 사장의 입에 붙은 ‘개새끼’라는 욕설처럼 어떻게든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허세를 부리는 3류 인생들의 삶의 방식을 긍정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연출의 의도는 극의 결말에 가서 확연히 드러난다. 조합장에 당선된 엄 사장의 허장성세와 주변 사람들의 빠른 속물적 변모는 마치 섬의 번영과 부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섬과 뭍, 가해자와 피해자,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패배한 자와 승리한 자, 이러한 익숙한 대비구도는 극의 선명한 전개를 부각시키지만 동시에 그 한계마저도 끌어안고 있다. 관객은 그러한 명확한 구도가 주는 친근함과 안정감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함과 진부함도 동시에 체험한다. 그래서 극의 초반에 나온 규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는 절규에 가까운 대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 연극이 지닌 구조적 한계에 대한 자탄처럼 들린다.

 

  연극은 그 ‘길’에 대해 침묵하는 대신, 결말부분에 이르러 엄 사장을 비롯해 주변 인물들의 삶의 변화를 극적 반전으로 제시하며 서둘러 모든 갈등과 문제들을 봉합하려 한다. 이러한 미진한 결말과 함께 아쉬운 부분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신지체 장애 여성인 명숙에 대한 묘사인데, 작가의 시선은 여성성과 열등한 것에 대해 노골적인 멸시와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 모든 점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볼 때, 연극 <선착장에서>는 익숙한 것이 주는 진부함과 친근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경주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일탈인 동시에 모험이기도 하다. 약간의 용기가 있다면 그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출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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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다 보고나서 왜 제목이 "엘리펀트"일까가 궁금해졌다. 서양의 우화에서 '거실의 코끼리'는 피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을 뜻하는데,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폭력의 문제가 그러한 것일 수 있다는 것. 또 한가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이야기에서 나온 것처럼 하나의 사물, 사태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 어떤 것이 감독의 의도에 더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 콜럼바인 고교의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감독 마이클 무어에게도 이 사건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 "볼링 포 콜럼바인"이라는 다큐를 만들게 했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본 이 사건의 본질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사람들을 절망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 결과 사람들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폭력과 살상에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어의 분석은 총기 난사 사건의 주범들의 범행 당일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좀 더 큰 사회학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구스 반 산트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을까? "엘리펀트"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좋은 답을 제공해줄 것 같지만 사실 이 영화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다. 감독은 단지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는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들의 일상을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게 훓어나간다. 서로 겹치는 시점 쇼트나, 롱테이크 같은 기법의 사용은 흥미있긴 해도 그다지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어떤 면에서는 졸립게 만든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서 가해자 학생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면서 여러가지 단서들을 보여준다. TV에서 나오는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뉴스, 그들이 즐기던 인명 살상 컴퓨터 게임, 자주 보는 인터넷의 총기 구매 사이트 등.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도 강조되어 있지 않고 그저 추측의 가능성만을 흘릴 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처음부터 관점이라던가 해석이라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했는지 섣불리 단정짓고 결론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감독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문제화시키는 것에 비하면 매우 영리하고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작가의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란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하며, 자신의 작품으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한다.

  "엘리펀트"가 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서정적인 오프닝과 엔딩 신, 가해자 학생이 연주하는 평화로운 피아노 음악, 이런 것이 구스 반 산트의 작가적 관점이라면 더이상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의 본질을 직면하는 대신 유보하고 침묵함으로써 자신의 작가적 위치를 일정부분 포기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는 그 이면의 진실을 응시하고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펀트"가 나름대로 주목할 작품이기는 해도 보는 이의 마음 깊이 와닿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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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10-09 13:5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리뷰 쓴 적이 있어요.^^ 이 영화에 대해 미국의 한 유명 평론가가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고 말했데요.그런데 여기에 대해 감독인 구스 반 산트는 바로 그 무의미함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님의 글을 쭉 읽어보니 그 평론가가 그 한마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