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유머


이상하게 목이 마른 날
물을 들이켜도 자꾸 물을 마시는
그런 날에 누군가 이런 말을,

소금을 조금, 아주 조금만 물에 넣어
밍밍한 맛이 나도록 해봐요

식어버린 다즐링 홍차에
굵은 소금 몇 알갱이를 넣는다

바다의 먼 비릿내가 나는
슴슴한 물을 들이키면서 오늘의 유머를 읽는다
70억 로또에 당첨된 사람의 이야기
집과 외제 차를 사고
스타벅스 매장이 있는 건물의 주인이 된 남자
그런데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다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되면
시를 쓰지 않을 것인지 잠깐, 생각한다
시는 언제나 돈이 되지 않으며
그저 불면의 근원일 뿐이다

또 다른 오늘의 유머를 읽는다
나이 50이 넘어서 대운(大運)이 트이는 방법

돈 욕심을 버리시오
돈에 초연해져야 합니다

홍차의 소금이 새파란 입을 벌리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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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다


떠나야할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너는 아직 이별의 예감에 이르지 않았다
나와 나의 꿈은 이미 알고 있다
기다란 탁자의 끝에서 너는 지루한 표정으로
벽을 부수고 낯선 남자가 뛰쳐나오는데
천정의 석면 가루가 말문을 막는다

너는 무성의했고 무신경했으며 무지했다
너를 탓하지 않기로 한다
엉킨 시간을 무딘 가위로 힘겹게 자른다

어떻게든 다시 이어볼까 생각한다
시간의 틈에 댈 얇은 천을 고른다
해진 양말의 뒤꿈치를 기우듯
하지만 사람들은 새 양말을 산다

안녕, 깁지 못하는 말들
바삭거리는 과자가 되어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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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재활용품 수거장의 업라이트 피아노(upright piano)
어린 시절에 피아노 학원을 6년 동안 다녔지만
내 피아노가 없어서 매일 학원에 가서 연습했다
당시의 피아노 가격은 백만 원 정도였다
중국집 짜장면이 육백 원 하던 시절
용돈을 모으고 모으면 언젠가는 피아노를 살 줄 알았다

살림이 어려워지면 엄마는 내 통장의 돈을 빼갔다
살림은 늘 주글거렸고 결코 펴지지 않았다
피아노가 사라졌고 피아니스트도 떠났다

피아노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건반을 쳐본다
피아노는 멀쩡한데, 손가락이 늙었고
내 집에는 피아노의 자리가 없다
몇 대의 김치냉장고가 거쳐가면서 남긴
새 김치통들이 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무로 된 피아노와 강철의 줄과 그 안의 펠트를 생각한다
빗물에 버려진 것들과 잊혀진 시간에 대해서도
꿈은 연약하고 녹슬기 쉽다
또각또각 피아노가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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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짜리의 시


당신의 시를 삭제할게요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너무 성의가 없어요
머리에 피고름 나도록 언어를 연마해야죠
위대하신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 창작 안내서를 펼쳐 기본기를 익혀요
비평가를 위한 시를 써요

고개를 빳빳하게 들면 안됩니다
스승님께 숙이고
독자들에게 숙이고
아, 그건 아닌가
독자들이 알아먹지 못할 시를 써요
그게 시에요
탁자, 위의 테이블(table), 을 걸어가요
문, 을 통과해서 도어(door), 를 열어요

진정성을 비웃어요
흉내내기의 달인이 되는 겁니다
레퍼런스(reference)를 기억하세요

책기둥을 부수고
정신머리를 챙겨요
한 시간 일 분이 지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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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올해의 마지막 미나리를 데쳤다
억센 뿌리가 찡긋, 웃는다
밤새 왼쪽 눈이 퉁퉁 부었다
왜 오른쪽 눈은 멀쩡한지 궁금하다
알레르기 안약을 두 눈에 한 방울씩 공평하게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까먹는다

못난이 참외가 배송 중이다
얼마나 못생긴 참외가 올지 기대한다
소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시오
분노의 상품평은 읽지 않은 것으로 한다
잘생긴 참외의 삶도 그 끝은 식탁이다

반팔 티셔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꺼낸다
남색 줄무늬 티셔츠 하나면 충분하다
아프리카의 해변, 인도의 뒷골목, 인도네시아의 강어귀
미어터지게 누군가 버린 옷들은
긴 여행 끝에도 죽지 않는다

앞동 아파트의 커다란 개가 짖는다
세인트버나드가 무서워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조그만 강아지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불안이
6월의 아침을 까칠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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