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에 내가 감독 되면, 저것들 안써. 그때도 지금처럼 웃음이 나오나 봐라."

  뭔가 학교에서 쩌리들만 모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 동아리의 부원은 자신을 비웃는 여학생들을 두고 그렇게 뇌까린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The Kirishima Thing, 2012)'는 2009년에 나온 아사이 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금요일, 학교의 최고 인기남인 키리시마가 갑자기 배구부를 그만 두고 종적을 감춘다. 주말 시합을 앞둔 배구부, 키리시마를 중심으로 뭉치며 다녔던 친구들은 모두 혼란에 빠진다. 모두들 키리시마를 애타게 찾는 가운데, 학교의 아웃사이더들 모임인 영화 동아리의 좀비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키리시마의 부재는 아이들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마에다가 리더로 있는 영화 동아리의 촬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영화는 처음에 키리시마의 소식이 전해진 금요일의 풍경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3번에 나누어 보여준다. 마에다와 영화 동아리 부원들, 키리시마의 여친 리사와 친구들, 키리시마의 절친 히로키를 좋아하는 밴드부 주장 사와지마, 이들은 마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 1950)'처럼 키리시마의 소식을 다른 입장에서 접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 첫날의 묘사를 통해 관객들은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키리시마'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이다.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는 '영화 속 키리시마는 말하자면 일본의 천황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다.

  배구부의 주장 키리시마의 부재로 토요일 시합에서 배구부는 패한다. 아무 말도 없이 연락을 끊고 잠수한 키리시마 때문에 여친 리사는 분노하며 허탈해 한다. 키리시마와 늘 어울렸던 히로키와 친구들은 도대체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키리시마의 카리스마에 기대어 매일의 일상을 보냈던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돌아볼 시간을 얻게 된다. 히로키는 자신이 속한 야구부 선배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재능과 꿈을 돌아본다. 배구부의 키 작은 고이즈미는 키리시마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열정만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부족을 실감한다. 재능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또 있다. 배드민턴 동아리의 미카는 배드민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죽은 언니를 떠올리며 괴로워 한다. 미카는 비슷한 처지의 고이즈미에게 연민을 갖는다.

  영화는 학원물에서 빠질 수 없는 연애도 촘촘히 짜넣는다. 밴드부의 주장 사와지마는 히로키를, 마에다는 좀비 영화 보러 갔다 만난 카스미를 좋아하게 된다. 사와지마가 히로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열심히 연주하는 곡은 엘가의 '사랑의 인사'다. 그러나 히로키는 그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마에다의 경우도 마찬가지. 영화는 그 또래 아이들이 겪는 짝사랑의 내밀한 감정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사와지마와 마에다는 또래 집단의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자리한 내성적인 아싸(아웃사이더)의 초상을 보여준다. 마에다의 영화 동아리방이 비춰지는 장면이 흥미로운데, 그곳은 검도부 방의 구석진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 그들에게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동아리 활동이다. 사와지마는 밴드부 주장으로, 마에다는 감독으로 영화 촬영에 최선을 다한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는 지금은 일본의 인기 배우로 자리잡은 이들의 신인 시절의 모습들을 즐겁게 볼 수 있다. 또래 집단의 인싸와 아싸에 대한 묘사를 비롯해 연애와 진로에 대한 고민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그 나이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희미하고 흐릿하게, 그리고 흔들려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면서 걸어가는 것이 청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감독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여배우와 결혼할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를 찍는다는 마에다의 말은 청춘의 특권에 대해 떠올리게 만든다. 그 시간은 먹고 사는 일에 매몰되지 않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과 온전히 머물 수 있는 인생의 짧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영화의 마지막에 마에다가 학교 옥상에서 좀비 영화를 찍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2막에 나오는 '엘자의 대성당의 행렬(Elsa's Procession to the Cathedral)'이다. 사와지마의 밴드부 연주로 들려지는 이 곡은 마에다가 찍는 음울한 좀비 영화와 기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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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말이 있다. 미하일 롬(Mikhail Romm) 감독의 1962년작 '1년의 9일(Nine Days in One Year)'은 수포자가 아니라 '물포자(물리 포기자)'가 보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이 참으로 많이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은 핵물리학자로 그의 주변 인물들도 물리학자들이다. 그들은 결혼식 연회장에서도 중수소의 양과 우주 여행을 주제로 냅킨에 계산까지 해가며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인다. 영화는 과학 연구에 자신의 삶을 내던진 젊은 과학자 구제프의 1년, 그 가운데 9일 보여준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이어진 기간이 아니라, 구제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던 날들만을 뽑은 것이다. 미하일 롬은 냉전 시대를 살아가는 핵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과학과 인간의 관계, 과학적 발견과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핵 융합 연구소 연구원인 구제프는 스승 신초프와 함께 실험을 하다 방사능에 피폭되는 사고를 겪는다(1일). 치사량의 방사능에 피폭된 스승은 사망하고, 구제프도 더이상의 피폭은 위험하다는 의사의 경고를 듣는다(2일). 그럼에도 그는 연구에의 열정을 멈출 수가 없다. 구제프와 친구 쿨리코프 사이에서 갈등하던 롤리야는 구제프와 결혼한다(3일). 그러나 일상의 모든 것을 연구에만 쏟는 구제프의 모습에 롤리야는 소외감을 느낀다(4일). 연구에 매진하던 구제프는 마침내 중성자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지만(5일), 그것이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연구는 답보 상태에 빠진다(6일). 구제프는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아 아버지를 만난다(7일). 실험 과정에서 또 다시 피폭을 겪은 그는 병이 심해지며(8일),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그는 골수 이식 수술을 기다린다(9일).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나는데, 그렇게 구제프의 인생에서 힘겨웠던 1년의 시간을 돌아본다.

  1960년대 소련이 이룬 과학적 발전은 눈부셨다. 1961년, 유리 가가린은 최초의 우주인으로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군비 경쟁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1년의 9일'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자의 삶을 확대해서 보여준다. 구제프는 학자로서 매우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미하일 롬은 연구소와 구제프의 집을 매우 미니멀리즘적인 세트로 구성했다. 연구소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장소는 연구원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지하 통로이다. 복잡한 전선줄이 얽혀있는 어두운 지하 복도는 연구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연구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는 곳이기도 하다. 과학이라는 신성한 사원을 지키는 사제들처럼 연구원들은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연구소의 분위기는 구제프의 신혼집 살림살이에서도 볼 수 있다. 가스 스토브와 식탁, 찬장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부엌, 다른 가구가 없는 침실은 정감있는 집이 아니라, 숙식을 해결하는 하숙집 같다는 느낌을 준다.

  구제프는 자신의 연구가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 무기가 아니라 원자력 에너지로 쓰일 거라는 긍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연구에 매진할수록 아내를 비롯해 주변과 단절된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구제프에게 중성자 연구가 핵폭탄 제조에 쓰일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구제프도 자신의 연구가 가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해야할 임무를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구제프와 상반되는 지점에 서있는 회의론자 쿨리코프는 이전의 과학 발전이 전쟁 무기 개발(독가스와 원자 폭탄)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흐루시초프의 '해빙기(Thaw era)'에 만들어진 영화로서 '1년의 9일'은 나름의 균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하일 롬은 과학 연구에 헌신하는 구제프의 모습을 과학자의 순수한 이상으로 상정한다. 연구소 동료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도 물리학적 주제들로 그들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제프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걸게 만든다. 그는 피폭으로 쇠약해져서 수술대에 오른다. 개를 대상으로 치료 성과가 입증된 것이어서, 그가 수술을 해도 산다는 보장은 없다. 영화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숭고한 과학자에게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해빙기'라고 해서 검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본에서는 피폭으로 실명한 구제프가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 장면은 삭제되었다. 어쨌든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인민들에게 희망에 찬 결론을 보여주는 쪽을 선호했다.

  이 영화를 만들 무렵, 미하일 롬은 이미 지난 시대의 구세대 감독으로 기억되었다. 그는 VGIK(러시아 국립 영화 학교)에서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젊은 세대의 제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자로서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나 롬은 이 영화로 자신이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해 보인다. 그가 그린 냉전 시대 과학자의 초상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다소 경직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년의 9일'은 독특한 소재로 그가 살던 시대의 과학적 진보에 대한 믿음, 인류애를 가진 과학자들의 열정, 국가 주도의 과학 연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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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이혼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난 우리 부모님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어요."

  부부의 첫째 딸은 부모의 이혼을 그렇게 회고했다. 매트 리들후버 감독의 2020년작 다큐 'My Darling Vivian'은 미국 컨트리 음악의 전설 조니 캐시(John R. Cash)의 숨겨진 가족사를 이야기한다. 조니 캐시와 두 번째 부인 준 카터와의 러브스토리는 영화 '앙코르(Walk the Line, 2005)'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비비안 리베르토가 바로 이 다큐의 주인공이다. 그들 부부의 4명의 딸들은 부모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과 어머니의 인간적 모습에 대해서 증언한다.

  유명인과 그 가족들의 실제 삶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다큐가 들려주는 비비안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17살의 비비안은 잘 생긴 공군의 구애를 받는다. 짧은 연애 기간 후, 독일로 파병된 남자는 3년 동안 엄청난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리고 그가 귀환했을 때, 비비안은 그와 결혼한다. 세일즈맨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여자의 남편은 노래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가 된다.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이 신인 가수는 곧 스타덤에 오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이 활약했고, 영화도 찍었으며, 꽉 짜인 공연 스케줄로 집에 들어오는 날은 거의 드물었다. 그 사이 여자는 4명의 딸들 엄마로 바쁘고, 외롭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예기치 않은 삶의 변화. 숲 속에 지은 대저택에는 수시로 방울뱀과 야생동물이 출몰했다. 여자는 산탄총을 들고 방울뱀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극성 팬들은 집 주소를 알고 찾아와 밤낮으로 문을 두들겨 댔다. 내성적인 성격의 비비안에게 그러한 변화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거기에다 그 시대 유명인들이 거쳐가는 안좋은 인생 행로를 남편은 걸어가고 있었다. 약물 중독이었다. 각성제를 비롯한 여러 약물에 중독된 자니 캐시는 멕시코에서 약물을 밀반입하려다 체포된다. 언론에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비안은 그런 남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신문에 크게 사진이 실린다. 남편은 곧 풀려났지만, 그 일의 불똥은 엉뚱하게 튄다. 비비안의 외모를 두고 흑인이 분명하다며 온갖 추측이 쏟아진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사진과 영상으로 제시되는 비비안의 외모에서 흑인 혼혈의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비비안의 부모와 형제는 모두 백인이고 오직 비비안만이 그들과 구별되는 외모와 피부색을 가졌다. 공공연한 인종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1960년대, 유명 컨트리 가수의 부인이 흑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비비안의 외증조모가 흑인 노예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KKK단을 비롯해 극성 팬들은 비비안과 가족에게 협박을 가했고, 조니 캐시의 공연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비비안은 그 모든 것과 홀로 맞서야 했다. 조니 캐시도 곤경에 처했지만, 그는 결혼 생활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첫째 딸의 회고대로 정말로 좋은 이혼이었을까? 어쨌든 남자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컨트리 가수와 재혼해서 경력의 성공가도를 달린다. 비비안도 재혼하지만, 딸들의 부양은 전적으로 비비안의 몫이었다.

  4명의 딸들은 신산스러웠던 어머니의 삶을 돌이켜 보며 회한에 젖는다. 그들은 어머니 비비안에게 전적인 연민만을 보이지 않는다. 불행했던 결혼 생활에 정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비비안은 딸들에게 그렇게 충실한 엄마 노릇을 하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서로를 보살피며 컸고, 불안정한 엄마를 보면서 늘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엄마가 한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한다. 남편이 재혼한 여자가 전처의 딸들을 자신이 다 키우고 있다며 뻔뻔하게 언플할 때, 남편이 죽은 뒤에 성대하게 열렸던 추모 음악회에서 그 여자 준 카터가 조니 캐시의 유일한 동반자로 칭송받을 때, 비비안의 슬픔과 분노는 클 수 밖에 없었다. 비비안은 손자들을 보살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한 일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을 찾았다. 그렇게 조니 캐시의 첫 번째 아내는 공식적으로 잊혀졌다.
 
  딸들이 어머니의 삶에 대한 공식적 복원에 적극적이었던 배경에는 영화 '앙코르'가 있었다. 사실과는 다른 영화 속 비비안에 대한 묘사는 딸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준 카터는 약물에 절은 조니 캐시를 구원한 음악적 동반자이며 연인으로 각인되었지만, 비비안은 정서불안의 철없는 아내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더스틴 티틀은 비비안의 손자로 할머니의 삶을 복원하는 이 다큐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다큐는 유족들이 소장한 편지, 사진, 비디오 자료들을 통해  비비안 리베르토의 인간적 모습을 차근차근 되살려낸다. 이 다큐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 '앙코르'의 원제 'Walk the Line'이 가진 역설에 대해서도 알게된다. 그것은 조니 캐시의 노래 제목 'I Walk the Line'에서 따온 것으로, 그 노래는 사실 비비안에 대한 연가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조니 캐시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던, 그래서 잊혀지길 바랬던 첫 번째 부인 비비안. 'My Darling Vivian'은 한 남자를 사랑했었고, 그 사랑 때문에 상처받았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한 여성의 삶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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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선생님이 노숙자라고 하던데, 정말 그래요?"
  "아니, 난 노숙자(homeless)가 아냐. 그냥 집이 없는 것(houseless) 뿐이야."

  한때 학교 보조 교사로 일했던 여자는 오랜만에 만난 학생에게 그렇게 대답한다. 중국계 미국인 감독 클로이 자오의 2020년작 '노매드랜드(Nomadland)'는 집을 떠나 길 위의 삶을 택한 중년 여성 펀(Fern)의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2017년에 출판된 제시카 브루더의 동명 논픽션으로, 클로이 자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을 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펀'이라는 캐릭터와 이야기는 자오의 창작물인 셈이다.

  펀이 오랫동안 살던 석고 광산 도시 엠파이어는 광산의 폐쇄와 함께 도시로서의 운명도 끝난다. 암에 걸린 남편의 죽음을 겪으며 펀은 밴 한 대에 자신의 삶을 담아 길을 떠난다. 영화는 온갖 일용직을 전전하며 노매드(nomad)의 삶을 고수하는 펀의 여정을 보여준다. 무려 1시간 50여분에 이르는 이 영화는 줄거리라고 할 것이 없다. 펀이 하는 다양한 일들, 아마존의 물류창고 일, 드러그 스토어 점원, 캠핑장 청소일, 햄버거 음식점 주방일 등이 마치 씨실처럼 직조된다. 날실은 길에서 만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펀이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광대한 미국 자연의 풍경도 정말 멋진 배경이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맞다. 이 영화는 음악이 꽤 좋다. 나중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현대 음악 작곡가로 잘 나가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이름이 뜬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명상적인 울림을 준다. 정말 그 뿐이다.

  '노매드랜드'는 작년 한 해 동안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를 휩쓴 영화이다. 나는 도대체 이 영화의 어디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찾아낼 수 없었다.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남편의 죽음. 여자는 그렇게 길을 떠났고, 길 위의 삶에도 잘 적응했다. 영화는 펀이 만나는 노매드들의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현시대 미국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늘어놓는다.

  "나는 이 삶이 마음에 들어요. 자유롭고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과연 실제 길 위의 삶이 그토록 충만하고 낭만적이며 평화로운 경험으로만 채워질까? 영화는 펀이 계속 일자리를 찾아다니며 생계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거주가 불안정한 여성이 겪는 위험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여성 노숙자들이 드문 이유는 성적 위협과 착취가 매우 현실적인 위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평화로운 노매드 공동체의 모습은 실제의 현실을 탈색시킨 것이다. 길 위의 삶은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어나갈 수 없다. 치안을 비롯해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고도 변수로 작용한다. 이 영화의 처절한 지루함에 몸이 뒤틀릴 무렵, 펀에게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펀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밴이 고장난다. 영화 시작 후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다. 나는 그제서야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펀은 차 수리비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결국 펀의 선택은 여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여동생은 돈도 빌려주고, 같이 살자고 제안도 한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게된 마음 맞는 노매드 데이브도 펀에게 진짜 '집'에서 살자고 말한다. 그러나 펀은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이 여자는 결코 절박한 처지의 노숙자가 아니다. 클로이 자오는 길 위의 삶을 이상적으로 포장한다. '집'으로 상징되는 물질에 매몰된 삶을 '죽은 것'이란 메시지를 보여줌으로써, 펀의 선택은 진정한 자유와 생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 된다. 그것은 여동생의 집에서 지인들과 나눈 주택 구매에 대한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펀은 집을 사기 위한 필사적 노력이란 자신의 미래를 건축물에 매몰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매드랜드'는 기꺼이 삶의 불안정성을 끌어안고 진정한 내적 자유와 평화를 위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찾길 요구한다. 그것이 노매드의 삶이라고 추켜세우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거친 현실과는 다르게 매끄럽게 가공되어 있으며 그저 얄팍한 성찰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작년 한 해에 이 영화가 그토록 세간의 화제가 된 이유는 전례없는 전염병의 시대에 줄어든 영화 제작 편수, 그리고 이 영화의 풍광이 보여주는 감상적 위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클로이 자오의 이 영화는 지루하고, 생기도 없으며, 경박스럽다. 한가지 더, 아마존 물류 센터의 급여가 '꽤 괜찮다'고 말하는 펀의 대사는 정말이지 끔찍하다. 아마존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혹독한 조건의 노동 환경을 제공하는 기업인지 클로이 자오는 정말 몰랐을까? 떠오르는 젊은 거장이라고 칭송받는 이 여성 감독은 정치 감각과 현실 타협 능력만큼은 대단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empire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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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구라(忠臣蔵)'는 억울하게 죽은 주군을 대신해 복수를 하는 47명의 가신(家臣) 사무라이들의 이야기이다.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좀 챙겨보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이야기인데, 이걸 극화한 것이 무척 많다.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추신구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신선조(新選組)'이야기 또한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졌다. 특히 2004년에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는 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 신선조를 새롭게 각인시켰다. 사와시마 타다시 감독의 '신선조(Shinsengumi, 1969)'는 막부 말기 쇼군의 친위 부대였던 신선조의 결성과 몰락의 과정을 그린다. 신선조를 이끌었던 콘도 이사미 역은 당시 일본 영화의 간판 스타였던 미후네 토시로가 맡았다. 그는 제작자로도 참여했으므로 영화는 사실상 미후네 토시로가 지배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신선조'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잘 정리된 자료들이 많으므로 참조하면 영화 감상에 도움이 된다. 막부 말기, 교토는 천황을 옹립해 새로운 일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와 쇼군을 지켜야 한다는 막부파가 대립하는 혼란스런 격전지였다. 신선조는 쇼군을 호위하기 위한 하급 무사들의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던 것이 무사들 뿐만 아니라 농민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콘도 이사미 또한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농 집안 출신으로 일반 농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신선조를 이끌었던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막부의 시각에서 봤을 때, 신선조의 존재는 적당히 써먹고 버려도 좋은 '사냥개'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진짜로 신선조가 했던 일은 그러했다. 존왕양이파를 주도했던 초슈 번과 그 일당들에 대한 가차없는 암살과 처단으로 신선조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미후네 토시로가 연기한 콘도 이사미는 쇼군과 막부를 옹호하는 신선조의 수장이다. 농민 출신인 그가 처음부터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다. 영화는 신선조의 첫 수장이었던 세리자와의 알콜 중독과 상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보여준다. 신선조는 초창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후원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인들에게 '삥'을 뜯어야 했는데 상인들 입장에서는 막부파와 천황파 사이에서 줄타는 것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세리자와는 자신의 무력을 너무 함부로 휘둘렀으므로 곧 제거의 대상이 된다. 콘도 이사미는 결격 사유를 지닌 전임자와 그 일파를 제거하고 정당한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신선조를 이끌며 천황파의 막부 타도 음모를 분쇄하는데, 미후네 토시로는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연기한다. 특히 존왕양이파들의 회합 장소를 습격해서 처단한 이케다야 사건 장면은 비좁은 공간에서의 처절한 결투를 잘 보여준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막부의 인정을 받고 잘 나가는 신선조에도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엄격한 규율의 적용과 반복되는 살상행위에 회의를 느끼는 신선조원들. 그들은 자신들이 피에 굶주린 막부의 개가 아니라며 항변한다. 그렇게 나가는 이탈자들에게 자비란 없다. 그러나 콘도 이사미는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단을 명령하는 악역으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중용의 미덕을 지닌 인물로, 신선조의 엄혹한 교조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히치카타가 기꺼이 악역을 대신한다. 아무튼 미후네 토시로는 자신이 돈 들여 만든 영화에서 나쁜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시대극에서 여성 캐릭터는 별로 말할 거리가 없다. 대의를 위해 자신과 어린 딸을 놔두고 떠나는 남편에게 '결심한 것을 축하드린다'고 말하는 콘도 이사미의 아내, 언제든 쉴 수 있는 안식처로 평생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게이샤 연인은 그저 영화 속 악세사리일 뿐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의 그런 역사적 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민중의 삶이란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이었다. 여성의 삶은 더 어려웠다. 결국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거나(콘도 이사미의 아내), 연인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게이샤의 여동생), 기약없이 만날 날을 기다리는(신선조원 오키타의 정인) 일이 그들의 몫이었다.

  막부가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에도 신선조는 끝까지 저항한다. 쇼군의 친위부대에서 하루아침에 반란군이 되어버린 신선조. 그들이 근대 일본 탄생의 걸림돌에서 무사도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의 열쇠는 신선조의 부대 깃발에 새겨진 '마코토(誠)'에서 찾을 수 있다. 극중 콘도 이사미는 몰락해 가는 막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신선조로서 '마코토'의 마음가짐을 지키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신선조를 수구 권력의 시대착오적 저항의 이미지가 아닌, 격동의 시대에 충심을 다한 무사의 후광을 씌운다. 일본 시대극(時代劇) 영화, 그리고 미후네 토시로의 팬이라면 이 영화는 놓칠 수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신선조의 백과 사전 항목을 보는 듯한 밋밋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의외로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과 한 집단의 흥망성쇠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사진 출처: zh.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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