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나루세 미키오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함께 했다. 거의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달리,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과는 영화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되는 연출 스타일의 감독들과 작업을 했던 셈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5년작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를 찍은 이듬해에 다시 타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한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 중부에 자리한 기후현의 다카야마시에서 촬영되었다. 당시 촬영 현장을 찍은 주민의 사진을 보니, 촬영 현장은 배우들을 구경하러 몰린 마을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진 속에는 촬영장에서 담소하는 배우들, 연출 지도를 열심히 하는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모습도 있었다. 이 감독이 만드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엿본 느낌이 들었다.

  '먼 구름'은 구시대적 인습에 갇혀 고통받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한국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였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한 주인공 후유코 역시 딸 하나를 둔 과부이다. 후유코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바램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이 남편이란 작자는 바람둥이에 손찌검까지 하는 무도한 인간이었다. 5년의 결혼 생활 동안 고통받던 후유코는 남편이 죽은 후 딸을 키우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그런데, 옛사랑 케이조가 먼 곳으로 전근가기 전에 고향에 잠시 들르면서 후유코의 일상은 흔들린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새출발을 하자며 인생의 행복을 찾아주겠다고 말한다. 한편 후유코의 죽은 남편의 동생 슌스케는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 과연 후유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형사취수(兄死娶嫂). 형제의 사후에 그 처를 아내로 삼는 혼인 풍속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척 낯설게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습속이었다. 후유코의 나쁜 남편과는 달리 동생 슌스케는 따뜻하고 점잖은 사람이다. 그는 후유코와 조카딸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케이조의 등장으로 후유코의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이제는 행복합니까?"

  케이조도 슌스케도 후유코에게 그렇게 묻는다. 홀로 딸 키우는 과부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지만, 후유코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후유코는 진짜 행복해서 그렇게 대답한 걸까? 옛연인 케이조에게도, 도련님 슌스케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후유코는 홀로 집에 있을 때, 집안을 둘러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높은 대들보가 이어진 그 큰 집은 마치 감옥처럼 보인다. 늘 웃는 표정의 후유코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후유코에 대한 케이조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케이조의 가족들도 후유코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함께 떠나자는 케이조의 애원에 후유코는 바깥 세상이 두렵다고 말한다. 고통을 주었던 남편은 이제 곁에 없다. 부유한 시댁의 안주인으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딸 하나 키우는 삶은 별다른 재미는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새출발이 행복을 줄 수 있을지 후유코는 생각이 많아진다.    

  후유코가 케이조와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한 것을 보고 마을에는 온갖 소문이 떠돈다. 남의 입과 눈이 아직은 무서운 시대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케이조의 여동생이 보여주는 발랄함과 자유분방함, 마을을 찾아온 재즈 악단과 댄서들의 공연 모습은 1950년대 중반 일본 사회의 서구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랜 관습과 사고방식의 틀은 견고하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것을 영화 중간 중간에 넣은 마을의 마츠리를 통해 보여준다. 성대하게 펼쳐지는 마츠리 장면은 자유주의적인 서양의 가치관과 대비되는 일본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하고 단단한 틀 앞에서 후유코는 갈등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과 딸에 대한 모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케이조가 약속한 새출발에 후유코의 딸 키누코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케이조가 떠나는 날, 후유코는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역으로 달려간다.

  마침, 일 때문에 출장을 갔던 슌스케가 역에서 형수를 발견하고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 후유코는 망설인다. 이 때 후유코가 느끼는 내면의 극심한 갈등과 고통을 타카미네 히데코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으로 보여주는데, 정말이지 이 대배우의 연기는 기가 막힌다. 그냥 오래된 구식 영화겠거니, 하고 보던 관객들이라도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후유코를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에게 몰입하게 될 것이다. '먼 구름'은 구식의 시대와 그 시대의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연출 방식은 절대로 후진 것이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 'The Tattered Wings'는 번역하면 '해진 날개'이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더이상 해진 날개로 살아가지 말라고, 자신이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직은 남자에 의지해서 행복의 날개를 펼쳐야만 하는 시대였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후유코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rks.com


   
*다음 글은 일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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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 좀 특이하다. 우리말 제목은 '뉴욕의 연인들'이라고 꽤 멋지게 지었다. 원제는 'They All Laughed',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다 사랑에 빠지고 각자의 사랑을 쟁취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실제 배우들의 이야기와 영화의 운명은 결코 행복한 웃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Peter Bogdanovich) 감독의 1981년작 '뉴욕의 연인들(They All Laughed)'은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나서야 겨우 개봉되었다. 영화의 완성도는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었고, 난무하는 혹평 속에서 흥행은 실패했다. 'The Last Picture Show(1971)', 'Paper Moon(1973)'으로 1970년대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던 그의 경력은 곤두박질친다. 그는 이 영화 이후 4년 후인 1985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갔다.

  오딧세이 탐정 사무소의 탐정 존(벤 가자라 분)과 찰스(존 리터 분)는 각자 고객의 의뢰에 따라 미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존은 뉴욕을 방문한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 안젤라(오드리 햅번 분)를, 찰스는 남편의 의심을 받고 있는 유부녀 돌로레스(도로시 스트래튼)의 뒤를 밟는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미행하는 여자들과 사랑에 빠진다. 컨트리 가수인 존의 애인 크리스티는 존의 변심에 찰스에게 접근하지만, 찰스가 돌로레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크리스티는 결국 돌로레스의 애인 후안과 맺어진다. 안젤라와 존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남편과 함께 안젤라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찰스는 돌로레스와 연인이 되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게 전부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1시간은 존과 찰스의 미행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분명히 로맨틱 코미디라면 즐겁고 행복한 사랑의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 영화는 지루함과 비현실성으로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건질만한 것은 1980년의 뉴욕의 사람들과 풍경이다.

  찰스가 동료 아서와 함께 롤러장에서 돌로레스를 미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뉴욕의 롤러장과 그곳을 채운 사람들의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시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음악을 비롯해 영화에 찍힌 뉴욕 시민들의 모습은 마치 타임 캡슐을 열어본 듯한 느낌을 준다. 컨트리 가수로 나오는 크리스티의 공연 장면과 클럽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보는 것도 즐겁다. 이 영화의 지루하고 맥빠지는 이야기 전개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뉴욕의 넘치는 생동감이다. 그걸 빼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보그다노비치의 무기력함과 바닥난 영화적 재능을 입증할 뿐이다. 찰스 역으로 나오는 존 리터의 코미디 연기는 하나도 웃기지 않다.


  50대에 접어든 오드리 햅번의 나이든 외모를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햅번에게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햅번을 힘들게 했던 부분은 상대역인 벤 가자라와의 좌절된 연애였다. 1979년에 영화 'Bloodline'에 출연하면서 알게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햅번은 남편의 외도로 실질적으로는 별거 상태에 있었고, 가자라도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가자라는 햅번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런 감정의 여파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두 배우는 '뉴욕의 연인들'을 찍었다. 보그다노비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가 친분이 있는 배우(벤 가자라)의 사적인 삶을 영화로 드러내는 방식은 직업 윤리에 비추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먹는 것에도 별다른 주저함이 없었다.

  영화 속에서 보그다노비치의 명백한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는 돌로레스와 사랑에 빠진다. 돌로레스 역을 연기한 배우는 도로시 스트래튼으로 이제 스무 살이 된, 플레이보이 모델 출신의 금발 미인이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보그다노비치는 도로시 스트래튼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문제는 스트래튼이 결혼한 유부녀였다는 것. 스트래튼의 남편 폴 스나이더는 말 그대로 양아치 포주 출신으로 아내의 미모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인물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서 뒤를 밟게하는 돌로레스의 남편처럼 스나이더도 사립탐정을 고용했고, 그는 곧 아내가 감독과 새출발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의 결별 통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포주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영화를 배급하려던 영화사들이 결정을 철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그다노비치는 스트래튼의 유작이 된 영화를 어떻게든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결국 사재 5백만 달러를 털어넣은 무리한 배급 결정은 파산과 몰락으로 이어졌다(그는 자신의 이전 흥행작들로 번 돈을 다 쏟아부었다). 오프닝 크레딧에 도로시 스트래튼의 추모글이 가장 먼저 뜨는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막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의 참혹한 죽음에 더해, 이 영화의 완성도는 비평적인 면에서도 너무나 떨어진다. 현실성 없는, 그저 그런 '뉴욕 사랑 찬가'쯤 될까? 어떻게 하다가 보그다노비치는 자신의 영화적 재능의 밑바닥을 보여주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파국에 빠지게 된 것일까? 그는 스트래튼의 여동생과 1988년 재혼해서 13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스트래튼의 죽음은 그의 영화 경력 뿐 아니라 인생에도 길고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셈이다. 영화 '뉴욕의 연인들'을 보는 것은 그런 면에서 영화적인 것과 실제의 경계에 대한 사색의 공간을 만든다. 존과의 짧은 밀회 후 이별하게 되는 안젤라의 모습은 오드리 햅번의 씁쓸한 사랑의 결말이었다. 반면에 미모의 돌로레스에게 반한 찰스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지만, 현실의 돌로레스(스트래튼)는 찰스(보그다노비치)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웃을 수 없었던 사연을 지닌 이 영화는 2006년에서야 DVD로 발매되었다. 실제 배우들의 슬픈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를 뉴욕의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풍광은 더욱 선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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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스나이퍼(The Sniper, 1952)'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은 영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운 사람이었다. 영화사에 들어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성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B급 영화들을 잘 만들어내어서 마침내 자신만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에 매카시즘이라는 시대의 광풍이 불어닥친다. 공산주의자로 찍힌 그는 동료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강요받았다. 영국으로 잠시 피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하려면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감옥에서 보낸 짧은 시간 이후, 드미트릭은 결국 동료들을 고발하고 다시 영화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스나이퍼(The Sniper, 1952)는 그가 의회 증언 이후 처음으로 찍은 복귀작이다. '변절자'라는 오명이 드미트릭을 힘들게 했지만, 그는 이 영화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 필름 느와르 영화에는 당시 드미트릭 감독이 처한 심리적 압박감도 느껴진다.

  영화는 미국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성범죄 사건들의 통계를 언급하는 자막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여성들로, 그런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 총은 든 남자가 창가에서 누군가를 겨누고 있다. 이제 막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여자를 겨누던 남자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총을 내려놓는다. 남자의 이름은 에디(아서 프란츠 분), 그는 왜 여자를 죽이려는 것일까? 남자는 들끓는 살인의 욕망을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손을 전기 스토브에 대고 스스로 화상을 입힌다. 그러나 유예된 살인은 얼마 안가 실행된다. 그의 총에 의해 연달아 나오는 희생자들로 도시는 패닉에 빠진다. 경찰들은 수사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살인범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에디는 경찰에 편지를 남긴다.

  "제발 날 멈추게 해주시오. 나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난 이 일을 계속 하게 될 테니까요."

  에디의 내면은 병들어 있으며 그의 현실감각은 손상되고 왜곡되었다. 그는 다정한 연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혐오와 적대적 감정은 에디가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세탁 회사에서 일하는 에디는 고객으로 알게 된 클럽의 피아니스트 진을 좋아하지만, 진은 에디를 세탁부로 대할 뿐이다. 좌절된 욕망은 살인에의 추동으로 이어진다. 그의 범죄에는 총이 수반된다. 영화는 정신이상자가 총기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위험성을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미국의 총기 소유 문제에 대해 비판한 선구적 영화이기도 하다. 유리 파편이 산재한 첫 번째 살인 장면, 유리창을 뚫고 피해자 여성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두 번째 살인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정서적 충격은 꽤 크다. 아무 이유없이 여성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에디의 모습은 '젠더 증오 범죄(gender-based hate crime)'의 전형성을 나타낸다.

  '스나이퍼'는 범인의 추적과 검거에 시간을 할애하는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와는 달리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정신의학자 켄트 박사는 형사 반장과의 대화에서 범인이 여성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된 것은 성장과정이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전기 스토브에 다친 에디의 손을 보고 하숙집 할머니는 남자들도 어릴 때 요리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에디는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답한다. 에디의 대답은 어머니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분노의 감정이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켄트 박사는 정신적 문제를 지닌 이들의 초기 병력 관리와 치료가 더 큰 범죄를 막을 수 있다며 시장과 시의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설득한다. 정신이상 범죄자에 대한 그의 정책적 제안은 이 영화가 범죄를 사회 병리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밤의 어둠에 숨어 살인을 저지르던 에디는 이젠 백주 대낮에 여성에게 총을 겨눈다. 결국 자신의 방에서 경찰에 의해 잡히게 된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 냉혹한 연쇄살인범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관객에게 기이한 연민과 혼란의 감정을 안겨준다.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에디는 살인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 남자는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으며, 그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상실했다. 어떤 면에서 드미트릭 감독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에디의 모습에서 당시 자신이 겪던 시련을 투사했는지도 모른다. 감독으로서 일거리가 더이상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신에게 적대적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영화 속 에디라는 캐릭터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에디가 보여준 그 눈물은 후회라기 보다는 안도의 눈물일 것이다. 감옥에 갇히게 되면 더이상 살인의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도시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영화는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마지막 살인을 저지른 에디는 한낮의 그 번화한 대도시의 숨겨진 뒷골목과 인적 하나 없는 음산한 거리로 도주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내적 감옥에 유폐된 '외로운 늑대(lone wolf)'로서의 연쇄살인범의 초상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orontofilmsocie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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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타카가 평생 그런 부당한 대우를 참으면서 사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아요."

  누나 마사는 동급생에게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진 동생을 보며 흐느낀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 유타카는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동급생과 싸우다 다친다. 더러운 피를 가졌다느니, 개(いぬ 이누로 발음, 아이누인들에 대한 욕설)와 닮았다는 수군거림을 듣는 유타카는 아이누(Ainu)이다. 일본의 북쪽 지방에 거주하는 선주민(先住民) 아이누.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9년작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Whistling in Kotan, 1959)'은 훗카이도의 코탄 마을을 배경으로 아이누족 남매의 시련과 고통을 그려낸다. 주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와 그 내면을 다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아이들, 그것도 차별받는 아이누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거기에다 컬러와 시네마스코프를 채택한 화면은 늘 보던 이 감독의 흑백, 실내 촬영 위주의 영화와도 다르다. 훗카이도의 맑은 호수로 유명한 시코츠호(支笏湖)의 풍경과 그 일대의 모습, 단편적이지만 아이누족들과 그들의 공연 장면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영화는 동화작가이며 교육자인 이시모리 노부오(石森延男)가 1957년에 발표한 소설 '코탄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내가 알기로 아이누족에 대해 다룬 일본 영화는 거의 없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둘째 오빠(にあんちゃ, 1959)'는 탄광촌을 배경으로 차별받는 재일교포의 아픔을 그려낸다. 재일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것을 같은 해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1959)'로 만들었다. 국외자들을 다루는 일본 영화가 드문 당시의 현실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일본 내에서 철저히 차별받는 아이누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아이누족 배우들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 배우들이 아이누족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 그 모습은 아이누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주로 긴 수염에 어두운 얼굴색으로 나오는 성인 남자들과 두꺼운 입술 문신을 한 이웃 할머니 이칸테의 분장은 전형적인 아이누족의 외모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이누족의 이미지는 차별적 요소를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이누족의 생활 방식, 신화와 전설, 장례 풍습과도 같은 민속지학적인 자료에 매우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머니를 여의고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사와 유타카 남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꿈을 가지고 살아가려 하지만 남매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마사는 지갑을 잃어버린 반 아이에 의해 도둑으로 몰리고, 유타카는 공부를 잘하지만 그것을 시기하는 동급생의 괴롭힘과 마주한다. 그래도 이 남매에게는 정서적인 지지와 위로를 보내는 이웃과 선생님이 있다. 미술을 가르치는 타니구치 선생은 마사에게 힘이 되어주고, 마사는 그런 선생님을 흠모한다. 옆집에 사는 이칸테 할머니와 후에 언니도 마음을 나누는 이웃이다. 그러나 후에가 가출하고 이칸테 할머니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남매를 둘러싼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군 부대의 철수로 군무원 일자리를 잃게된 아버지는 벌목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남매의 곁을 떠난다. 그렇게 남겨진 남매에게 비정하기 짝이 없는 삼촌은 남매의 집을 팔아버리고,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종용한다.

  마사와 유타카 남매가 겪는 모욕적이고 부당한 차별의 현실은 아이누족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진 유타카를 보며 남매가 의지하는 이웃 청년은 아이누 남자라면 저렇게 다 맞아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분을 이기지 못하는 마사에게 경찰은 아이누 편이 아니며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달랜다. 문제는 그들이 겪는 이 조직적인 차별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데에 있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유타카에게는 착한 일본인 친구도 있고, 학교 교장인 타자와 선생은 아이누인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며 그들을 평등하게 대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누 아가씨 후에와 엮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이칸테 할머니는 타자와 선생에게 손녀딸의 혼사를 말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그것을 알게 된 후에는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루고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는 남매까지, 이렇게 '내 마음의 휘파람'에 나오는 코탄 마을의 아이누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진 꿈들은 모두 냉혹한 현실 속에서 바스러진다.

  나루세 미키오가 보여주는 아이누족 남매의 수난기는 암울하고 슬픔으로 차있지만, 놀라운 흡인력과 핍진성(逼眞性)을 갖고 있다. 사실 남매로 나오는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어색하고 뻣뻣하며, 다른 아역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 또한 실망스럽다. 그러나 배우들에 대한 연출 지시를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나루세 미키오의 스타일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의 완성도를 성취해낸다. 126분의 러닝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영화의 내러티브는 잘 짜여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인정머리 하나 없는 삼촌을 따라나서는 남매의 모습은 처연하기 짝이 없다. 아직 다리가 낫지 않은 유타카는 절룩거리며 걷고, 마사는 고향 마을을 보며 마음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서로를 바라보며 괜찮냐고 묻는 남매. 유타카는 기운을 내려는듯 휘파람을 신나게 분다. 그러한 결말은 일본 사회의 국외자로서 아이누족 남매의 미래가 험한 길 위에 있을지라도 고통을 견디어 내며, 세상에 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의 한 조각을 던져주는듯 하다.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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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에 클래식 FM 실황 음악회에서는 올해 조르주 에네스쿠 콩쿨 수상자 특집을 방송해주었다. 요새 떠오르는 젊은 연주자들은 모두 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이들은 없었다. 다들 잘 하네, 하고 듣다가 바이올린 부문 연주에서 깜짝 놀랐다. 무슨 예전 거장의 음반을 틀어놓은 줄 알았다. 3위를 차지한 독일 출신의 타실로 프로브스트란 이름의 연주자는 이제 19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 그것도 아주 순전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 저런 연주자가 노력과 성실성을 겸비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아시프 카파디아(Asif Kapadia) 감독의 2010년도 다큐 '세나(Senna)'에도 카레이싱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이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일톤(Ayrton), 세나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이전의 성에서 따왔다. 그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포뮬러 원(Formula One)을 지배했던 카레이서였다. 다큐는 그의 초기 경력, 영광의 순간, 라이벌과의 암투,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다룬다.

  다큐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106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포뮬러 원의 경기 장면이 40분에 이른다. 나머지 장면은 세나의 가족이 소유한 개인 비디오 화면과 뉴스를 비롯한 자료 화면이 채운다. 내레이션도 없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도 대부분 목소리로만 나오는 아주 절제된 구성이다. 자동차 경주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세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다큐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감독 아시프 카파디아도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세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세나'라는 인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신, 이 인물의 삶을 3막 구조의 서사 영화로 구성하는 데에 촛점을 두었다(2011년 wired.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가 보기에 이 인물의 생애는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우승을 다투는 적대적 경쟁자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정치적이고 편파적인 FISA(포뮬러 원 주관 단체)의 회장 장 마리 발레스트르(Jean-Marie Balestre), 3연속 챔피언을 차지한 후의 내리막길, 경기 중의 사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 카파디아는 마치 영웅의 신화를 구술하는 음유시인처럼 '세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포뮬러 원의 영웅은 특히 비 오는 날의 경주에서 더 뛰어났다. 세나가 경기 도중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 환호하는 차량 내부 화면은 이 사람이 가진 재능의 특출함을 보여준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비'라는 악조건이 세나에게는 축복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편파적인 협회의 결정에도 맞선다. 1989년 일본 그랑프리, 세나는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충돌한 후에 1등으로 들어왔음에도 승리를 취소당한다. 오히려 프로스트에게 반칙을 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자격 정지 6개월의 처분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프랑스 국적의 프로스트와 돈독한 사이였던 프랑스인 발레스트로 회장의 편파적인 영향력에 항의를 표명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불합리한 경기 조건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된 승리로 포뮬러 원에서의 자신의 역사를 써나간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과 그와 반대편에 선 적대자들. 이처럼 이야기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영화처럼 구성된 흥미진진한 다큐는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다큐에서 세나를 괴롭히는 나쁜 경쟁자처럼 나오는 알랭 프로스트 입장에서는 이 다큐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달성한 포뮬러 원에서의 4번의 챔피언 기록 보다는 세나와의 반목과 갈등이 그를 규정짓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다큐가 세나와 자신이 동료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경력의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누락시켰다며 불만을 표명하기도 했다. 어쨌든 세나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기도 했던 프로스트와 세나의 마지막 관계가 어떠했는지 이 다큐의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프로스트는 마치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의 영원히 미움받는 살리에리처럼 낙인이 찍혀버린 것 같다. 궁정 음악장인 살리에리는 모짜르트와 경쟁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모짜르트 사후 미망인 콘스탄체와 모짜르트의 아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대하고 명망 높은 음악가였음에도 셰퍼의 희곡에서는 악의적으로 묘사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다큐 '세나'는 오래되고 무거운 짐짝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큐만 보면 세나는 자동차 경주의 영웅으로 암담한 현실의 조국 브라질에 주어진 커다란 희망, 브라질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자선 사업가, F1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완벽한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신화가 된다. 자동차 부품의 기계적 결함으로 최종적으로 판명이 난 사고의 원인을 다큐는 깊이있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 모든 비극은 '자동차 경주 산업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로 두루뭉실하게 언급될 뿐이다. 국가적으로 치루어진 세나의 장례식 장면으로 영웅의 죽음은 마무리된다. 이 다큐는 자료 화면을 제공한 포뮬러 원(물론 다큐 제작시 큰 돈을 내고 구매한 것이다), 세나의 일상이 담긴 홈 비디오 화면을 제공한 세나의 유가족들과 사전에 철저히 조율되었다. 과연 그렇게 잘 재단된 한 인물의 다큐가 진실과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나의 개인 비디오에 함께 나오는 여성들은 매번 얼굴이 다른데 그가 사귄 여성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나는 오히려 '세나'를 보고나서, 진짜 세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세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관점이 제거된, 영화화된 자동차 경주 영웅의 이야기이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어떤 면에서 자료 화면을 영혼없이 이어붙인 편집자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2015년에 만든 다큐 '에이미(Amy)'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 것은 놀랍다. 적어도 한 인물의 다큐에는 제작자의 어떤 관점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중의 호응, 또는 극심한 반발을 가져오는 것일지라도 하나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은 다큐 작가로서의 발언인 셈이다. '세나'는 아주 흥미있는 다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잘 만들어진 영웅의 신화에는 영웅의 인간적 모습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세나'는 인간적인 숨결을 제거해버린 영웅의 감동적인 서사로 남았다.



*사진 출처: wir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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