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의 지평과 앙드레의 지평이 만났을 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My Dinner with Andre, 1981)


  "예전의 내 머릿속에는 예술과 음악으로 가득찼었는데, 내 나이 서른 여섯, 이젠 오로지 돈 생각만 할 뿐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궁핍한 극작가 월러스는 약간은 어색하고 불편한 저녁 식사 약속을 앞두고 있다. 연극계에서 잘 나가던 연출가 앙드레는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어느날 갑자기 잠적했다. 월러스는 그가 티벳이며 세계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가,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앙드레를 봤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희곡을 무대에 올려준 예전의 인연도 있고,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도 궁금해진 월러스는 앙드레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한다. 1시간 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 두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다. 영화 속 등장인물 월러스와 앙드레는 실제 연극계 종사자로 실명으로 등장한다. 월러스는 친구 앙드레와 나눈 대화를 희곡으로 써서 연극으로 올릴 생각이었으나 영화가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소식을 들은 루이 말은 감독을 자청했고, 그렇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가 만들어졌다.     

  월러스는 딱히 할 말도 없고, 질문을 계속 던짐으로써 앙드레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유도한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앙드레의 말문이 터진다. 영화는 거의 앙드레의 1인극처럼 보일 정도다. 월러스는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다가, 식사가 끝날 무렵에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그런데 앙드레, 이 양반이 들려주는 방랑기가 정말 골때린다. 앙드레는 자신의 절친 그로토프스키의 연극 세미나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일반인 40명과 숲속에서 진행된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연극 캠프는 하루종일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일종의 실험적 연극 캠프였다. 앙드레는 계속해서 그로토프스키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째 그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예전에 연극 수업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렇다.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는 폴란드 출신의 유명한 연출가로 일명 '가난한 연극'으로 연극 연출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사람이다.

  앙드레 그레고리는 그로토프스키가 미국에서 3년 남짓 체류할 때, 실제로 무척 가깝게 지냈고 그의 미국 정착을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수동적 관객의 존재를 배제하고, 연극의 원초적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로토프스키의 급진적 연극론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에서 별다른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는 미국 체류를 끝내고 이태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신의 연극적 실험을 이어갔다. 나중에는 일반적 연극 연출은 포기하고, 자신과 가까운 친구와 연극 관계자들만을 초청한 연극 세미나를 이끌었다. 영화에서 앙드레가 말하는 숲속 연극 캠프 이야기는 그렇게 초청받아 참가한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불 없이 숲에서 지내기, 아침에 직접 빵 구워보기를 비롯해 파놓은 구덩이에 참가자를 들어가게 해서 머리만 내놓고 흙으로 덮기 등등,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기상천외한 실험 연극적 시도가 이어졌다. 영화에서 앙드레가 친구들이 자신을 구덩이에 내던져 파묻었다가 나중에 꺼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아무튼 이 특이하기 짝이 없는 연출가의 방랑은 폴란드의 숲,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사하라 사막 등등 세계 곳곳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앙드레는 왜 그런 곳을 다니며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매일매일 쌓이는 공과금 고지서와 씨름하고, 자신의 희곡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월러스에게 앙드레의 기행은 팔자 늘어진 유람처럼 보인다. 앙드레는 자신의 삶의 본질, 존재의 진정한 자각을 찾아 떠났다고 온갖 철학적인 수사를 늘어놓는다. 웨이트리스로 맞벌이하는 여자친구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기를 꿈꾸는 월러스는 앙드레가 찾는 인생의 의미가 머나먼 나라들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에 마시다 놔둔 커피를 아침에 마시려는데 바퀴벌레가 없으면 만족한다는 월러스. 그가 뉴욕의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준 전기 장판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자 앙드레의 반응은 이렇다.

  "전기 장판이 주는 안온함은 실재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구. 그건 우리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 그런 것 없이 사는 것이 진짜 세계와 대면하는 거야."

  이미 전기 장판 없이 살 수 없는 몸뚱이가 되어버린 뉴요커 월러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앙드레를 바라본다. 월러스는 앙드레가 말하는 결정론적 세계관, 운명, 무의식 같은 것에 별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실 때쯤 월러스는 앙드레의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털어놓는다. 아마 앙드레도 월러스가 말하는 일상의 행복과 과학적 합리주의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레스토랑의 손님들이 이미 1시간 전에 다 나가고 문 닫을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탄 월러스는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늘 별 생각없이 바라보던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들에서 어릴 적 자신과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린다. 어쩌면 앙드레와의 대화가 월러스의 세계를 조금은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낯설고 기이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새삼 오래전 서양 현대 철학사를 한학기 동안 머리 아프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강의가 결국 내게 남긴 것은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 한 조각이었다. 나의 지평과 너의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것, 월러스의 지평은 앙드레의 지평과 만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건 앙드레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앙드레와의 저녁 식사'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지평을 넓히려는 이들은 언젠가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는 도입부부터 특이하다. 항공 촬영으로 뉴욕 도시를 조망하는 장면과 함께 남성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영화의 제작자 마크 헬린저(Mark Hellinger). 그는 관객에게 앞으로 보게 될 영화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한다. 영화의 제목과 감독,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소개 등등...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설명과 함께 뉴욕의 무더운 여름날, 새벽 1시에 일어나는 살인 사건 현장으로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젊은 여자는 두 명의 남자에 둘러싸여 죽임을 당한다. 한 명의 얼굴은 보이지만, 다른 한 명은 등을 보이고 서있다. 다음날, 여자의 집으로 출근한 가정부는 시신을 발견한다. 사건이 신고되고, 그때부터 형사들의 범인찾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죽은 여성은 진 덱스터란 이름의 모델. 과연 누가, 왜 이 여자를 살해했을까?

  오늘날의 관객에게 70년 전의 범죄 수사 과정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흥미롭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 반장 멀둔은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인 남자 잠옷을 아무렇게 않게 들어서 살펴 본다. 당시의 과학 수사라는 것이 기껏해야 검시와 지문 채취라는 전통적 방법이 전부라는 사실은 형사들의 어려움을 짐작하게 만든다. 살인범을 잡으려는 형사들은 뉴욕 바닥에서 바늘 찾는 형국으로 탐문 수사와 미행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범인을 검거하기까지의 과정은 일반적인 필름 느와르 영화와 비교해 그다지 특출난 점이 없다. 그러나 '네이키드 시티'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시티', 즉 뉴욕의 사람들과 그곳의 다채로운 풍광들이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여느 범죄 추리물과 차별점을 갖는다. 마차에 실려 배달되는 우유, 아침에 미어터지는 뉴욕의 지하철, 범죄 소식을 알리는 신문 매체의 유통 과정, 사람들이 식사하는 카페와 번잡한 시장,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노는 여름의 노상 도로... 영화는 1948년의 뉴욕이란 도시를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 소형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영화의 그러한 사실주의적 면모는 거대 도시에서 일어나는 잔혹한 범죄와 도덕적 타락, 도시인의 익명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죽은 모델 진 덱스터는 장물아비와 공모해 보석을 훔쳐 화려한 생활을 유지하는 부도덕한 인물이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의 불륜, 절도, 사기, 거짓말이 속속 드러난다. 돈을 추종하는 남자가 약혼녀에게 준 반지는 장물이다. 그런가 하면, 살인을 저지른 주범은 훔친 보석을 나누기 싫어서 공범을 죽인다. 나이든 남자는 젊은 여자의 미모에 눈이 멀어 범죄를 묵인한다. 이 도시는 벌거벗은 욕망으로 넘쳐나고 있으며, 그 욕망의 끝은 범죄와 맞닿아 있다. 평화로운 일상의 공간은 언제든 범죄가 틈입할 수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강에서는 시체가 떠오르고, 도시의 일상적 공간인 도로와 다리는 범죄자가 탈주극을 벌이는 장소가 된다. 젊은 형사 할로런은 자신의 아이가 집앞을 벗어나 근처 큰 도로에 혼자 갔다왔다는 아내의 말에 걱정한다. 이 도시에서 완벽한 안전은 결코 담보할 수 없다.

  '네이키드 시티'는 도시가 갖고 있는 양면성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화려한 쇼윈도, 부유층의 주거지와 대비되는 범죄자가 사는 빈민가가 있다. 고급 병원의 안락한 진료실의 의사와 고층 건물 현장에서 위험한 일을 하는 막노동자는 또 다른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마지막, 형사들의 추격을 피해 다리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던 범인은 추락한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던 범죄자는 비상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검거하러 온 형사 할로런에게 전직 레슬러인 자신의 육체를 과시하며 자신은 머리도 좋다고 말한다. 강인한 육체와 좋은 머리를 갖고도 하층민이 생존하기에 이 크나큰 도시는 냉혹하고 비정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범죄의 길은 파멸로 이어진다.

  영화의 마지막에 촬영에 협조해준 뉴욕시 당국에 고마움을 표하는 자막이 뜬다. 뉴욕이란 도시는 일찍부터 영화의 상업성에 눈을 떴고, 그것은 곧 정책적 지원과 혜택으로 이어졌다. 뉴욕은 영화 제작시 다른 도시에 비해 적은 세율을 적용한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많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The Departed, 2006)'도 영화 속 배경은 보스턴이지만, 실제 대부분의 촬영은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뉴욕시가 제공하는 세금 감면 혜택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네이키드 시티'는 줄스 다신의 재능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영화인 동시에 뉴욕이란 도시로의 매혹적이고 놀라운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사진 출처: criterion.com   감독 줄스 다신(Jules Dassi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외 합작이 소련 영화에 남긴 유종의 미,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Невероятные приключения итальянцев в России, 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 1974)

  노부인은 임종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의 불길을 피해 이태리에 정착한 이 할머니에게는 손녀딸이 있다. 할머니는 손녀딸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유언을 남긴다. 고국을 떠나기 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자상 밑에다 수십억에 달하는 보석들을 감추어 두었다는 것. 병실에서 그 유언을 들은 사람은 손녀딸 올가를 비롯해 주치의, 다리 깁스를 한 환자, 남자 간호사 안토니오와 주제페, 마피아 로사리오까지 모두 여섯 명. 이들은 곧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라 보물을 찾을 생각에 들뜬다. 마피아 로사리오는 의사의 여권을 몰래 버리고, 깁스 환자는 밀수범이라고 세관에 신고해서 두 명을 떼놓는다. 나머지 세 명과 보물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는 올가는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마피아는 나머지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안토니오와 주제페는 러시아 여행 가이드 안드레이와 함께 올가를 찾으려 애를 쓴다. 우여곡절 끝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너무나도 많은 사자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자상마다 파헤쳐 보는 보물 탐사대, 과연 보물 찾기는 성공할 것인가...

  엘다 라쟈노프(Eldar Ryazanov)감독의 1973년작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Unbelievable Adventures of Italians in Russia)'은 소련 국영 영화사 모스 필름(Mosfilm)과 이태리 영화사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이태리 영화사가 모스 필름에 진 빚을 갚기 위한 대안이었다. 1970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워털루(Waterloo)'가 이태리와 합작으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소련은 그 영화를 위해 막대한 제작비와 물량을 쏟아부었지만, 해외 흥행 실적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은 '워털루'가 망하는 것을 보고 나폴레옹에 대한 시대극을 만들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이태리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소련 영화 당국과 모스 필름의 손해는 컸다. 그에 대해 일종의 빚 청구서로 수익을 내기 위한 합작 영화 한 편을 더 만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양쪽에서 공동으로 쓰기로 한 시나리오는 여러 번 엎어진 끝에 겨우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이태리 촬영시 제작비는 로렌티스가 부담하기로 했는데, 이 짠돌이 제작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을 기용했고 영화를 위해 온 소련 촬영팀들에 대한 대우도 박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이 골치 아픈 프로젝트를 맡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련 영화 촬영 국가 위원회(Goskino)는 그 책임을 라쟈노프에게 맡겼다. 코미디 연출에 소질이 있는 라쟈노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라쟈노프는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업에만 참여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떠맡았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멋지게 만들어 냈다. 이 영화를 보면 나름대로 큰 제작비가 투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초반부에 마피아 로사리오의 실수 때문에 비행기가 고속도로에 긴급 착륙하는 장면이 나온다. 진짜로 비행기가 차들이 달리는 도로 한 가운데에 착륙을 한다! 물론 실제 고속도로에서의 촬영이 아니라, 공항의 활주로에서 이루어졌지만 거의 묘기에 가까운 그 착륙 장면은 놀랍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토니오와 주제페, 안드레이가 올가를 자동차로 따라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 스턴트는 박진감이 넘친다. 자동차 스턴트는 이태리의 레이서 겸 스턴트맨인 세르지오 미오니가 맡아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 냈다. 이 영화에 합성으로 처리된 가짜 장면은 하나도 없다. 라쟈노프 감독은 그런 장면들을 합성이 아닌 실제의 것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주유소 폭발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주유소 모양의 건물을 똑같이 지어놓고, 진짜로 폭파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국가가 영화 산업을 총괄하고 지원하는 소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볼거리에 더해 어설픈 보물 탐사대가 가는 곳마다 벌이는 소동은 끊임없는 웃음을 만들어 낸다. 사자상 아래 도로를 파헤치는가 하면, 동물원의 사자 우리까지 가서 보물을 찾다가 사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게으르고 말 안듣는 사자를 다루는 것은 라쟈노프 감독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다. 사자는 이태리 배우 한 명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는데,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부주의하게 접근한 일반인에게 덤벼들었다가 경찰의 총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 때문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사자와 근접한 거리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러시아 여행 가이드 역을 맡은 안드레이 미로노프는 두어 발자국 거리에서 사자에게 말을 건네는 연기를 해야했다. 이 대단한 근성을 가진 배우는 자동차 스턴트 신의 일부분과 6층 호텔 창문에서 카펫으로 내려오는 장면까지 직접 해냈다. 그는 1969년작 '다이아몬드 팔(The Diamond Arm)'에서도 몸을 유연하게 쓰는 연기며 슬랩스틱도 잘 소화해냈다.

  라쟈노프 감독의 연출은 성공적이었다. 소련에서 개봉 첫해 5천만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액션과 코미디가 적절히 어우러진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 '워털루'는 소련 영화 당국에 트라우마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소련은 이태리와의 영화 합작을 시도했을까? 소련 국내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내수 시장을 넘어선 새로운 수익 창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에 따른 정책적 지원은 흐루시초프 시절의 '해빙기'와도 맞물려 추진되었다. 소련은 원래 서독과의 영화 합작을 모색했다. 그러다 1967년에 이태리와의 상호 합작에 대한 협약이 이루어지면서 서독 대신 이태리가 제작 파트너가 되었다. 이태리는 제작 기술 쪽의 강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본 조달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영화에 대한 소련의 국가 정책적 지원은 이태리 제작사들에게 매력적인 조건이었고, 소련은 이태리를 통해 해외 배급과 판권 시장을 확장해 나간다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태리 영화사의 자본주의적 마인드와 소련의 관료주의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거기에 제작 현장에서의 의사 소통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오해는 영화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의 1969년작 'The Red Tent'는 그런 가운데 나온 첫 결과물이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합작 영화 시스템은 '워털루'의 대실패로 결국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어느 이태리인들의 러시아 대모험'은 그 결별의 과정에서 소련이 거둔 유종의 미일지도 모른다. 러시아어 대사는 더빙으로 처리되었지만, 주연 여배우를 비롯해 4명의 이태리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은 편이다. 소련 영화 당국과 라쟈노프 감독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했고,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게 이 영화의 제작 배경에는 소련이 가진 영화 산업적 고민이 깔려 있다. 안정적인 내수 시장을 넘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했던 소련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쓰디쓴 경험들이 훗날 소련 붕괴 이후 해외 합작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던 민간 영화 제작사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의 산업적 측면과 상업적 속성에 대해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1967년부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태리와의 합작을 통해 그렇게 충분히 학습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film.ru


**사진 출처: pikabu.ru  실제 주유소로 착각한 운전자들이 기름을 넣기 위해 찾았던 주유소 세트의 폭발 장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타르 이오셀리아니(Otar Iosseliani)의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은 러시아 영화사 시간이었다.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Once Upon a Time There Was a Singing Blackbird, 1970)'를 수업 시간에 보았었는데, 영화가 참 독특했다. 소련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놀랍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서 본 기억이 난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개성이 넘쳤고, 생각할 거리들이 많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감독을 잊고 있다가, 오늘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Favorites of the Moon)'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영화다. 그는 소련에서 찍었던 자신의 작품들이 연이은 검열로 냉대를 받자, 1982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달의 연인들'은 그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만든 영화로, 어느 정도는 낯선 나라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이 들어가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복잡하다. 시대가 왔다 갔다 하고, 컬러와 흑백이 교차된다. 서로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 번갈아 보여진다. 이런 영화들을 만나면 제대로 봐야지 싶은 마음에 긴장하게 된다. 대개의 영화들은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윤곽이 파악이 되는데, 이 영화는 그때까지도 내러티브의 조각들을 툭툭 던지기만 한다. 1) 첫 장면에서 도자기 접시가 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도자기 공방의 모습이 비춰진다.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브르(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도자기 세트는 단단한 나무 상자에 포장되어 어느 저택에 배송된다. 시대적 배경은 18세기이다. 2) 그 다음에는 19세기 화가의 공방이 나온다. 화가는 여인의 상반신 누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3)다음 장면의 시대적 배경은 현대, 현악 4중주단이 연습하고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영화는 흑백 화면에 귀족의 일상 생활을 비춰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을 때, 영화는 1983년의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다. 처음에 봤던 그 도자기와 여인의 초상화가 파리의 여러 사람들의 삶과 뒤엉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치 목공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부분 부분을 나누어 자르고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것처럼 이오셀리아니도 처음에 던진 내러티브의 조각들을 차례대로 맞추어 나간다.  

  '달의 연인들'의 구조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고 그렇게 합쳐진 내러티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경매장에서 도자기 세트를 낙찰받은 이는 돈많은 무기판매상 라플라스의 아내이다. 라플라스는 폭발물 제조업자 구스타브와 함께 테러리스트들에게 폭탄을 판다. 구스타브는 라플라스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구스타브의 여자 친구 클레르는 경찰 서장 뒤포르 파케와 몰래 만나고 있다. 파케는 경매장에서 여인의 초상화를 낙찰받은 사람이다. 이 초상화를 훔치는 도둑 부자(父子)가 있다. 도둑의 아내는 매춘부로 클레르의 아버지와 친구이다. 학교의 음악 선생인 클레르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공원 조각상을 사제 폭탄으로 날려 버린다. 여기에 펑크락 여자 가수, 노숙자들, 청소부들, 테러리스트들이 더 나온다. 이오셀리아니는 여러 등장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기획하고 기가 막히게 조율해 내어 자신만의 이야기 작법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흑백 화면으로 나왔던 귀족의 저택이 컬러로 바뀌면서, 포탄과 총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무너진 집으로 말이 들어와 그릇을 밟아서 깨버린다. 그 장면 뒤에 시대적 배경이 현대의 프랑스로 바뀌는데, 그것은 시대적 변혁과 그에 따른 새로운 계급의 등장을 암시한다. 귀족이 쓰던 도자기 식기와 초상화는 현대의 부르주아의 소장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도자기와 초상화들은 가치와 형태가 자꾸만 변해간다. 라플라스 부인이 낙찰받아 손님 접대용으로 과시하려던 그릇은 요리사의 실수로 깨져버린다. 경찰 서장의 집에 걸렸던 초상화는 도둑들의 칼질에 원래 캔버스 크기에서 줄어든다. 펑크락 가수 집에 있다가 다시 절도당한 그 그림의 크기는 나중에는 얼굴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된다. 고가의 깨진 도자기 그릇은 매춘부의 손에 들어가 복원되고, 그것은 도둑 아들의 재떨이로 전락한다.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의 마멸과 변형을 도자기와 초상화의 이미지를 통해 재현한다.

  '달의 연인들'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비판적으로 통찰하지만, 그 방식은 부드럽고 유머가 섞여있다. 무기상 라플라스 부부는 유력 인사들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데, 휠체어에 탄 아버지가 식당에 들어오자 다른 방으로 밀어서 내보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존재는 그렇게 은폐된다. 라플라스 부인은 도자기를 깬 요리사에게 모욕을 주지만, 현대의 요리사는 귀족의 하인이 아니다. 그는 깨진 그릇을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리고 나간다. 귀족의 초상화를 낙찰받은 경찰 서장은 그림을 도둑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예기치 못한 비극이 닥쳐온다. 포크레인으로 해체되는 귀족의 저택은 부르주아에 대한 이오셀리아니의 짖궃은 농담의 마지막 조각이 된다.

  영화의 제목 '달의 연인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서 따온 것이다. "밤의 사람들은 낮의 아름다움을 훔치는 도둑이 아니라, 다이아나(달과 사냥, 숲의 여신)의 숲지기, 어둠의 신사, 달의 하인으로 불려야 합니다."는 문구가 영화의 시작 부분에 제시된다.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무질서와 혼란, 절도와 파괴, 거짓말과 속임수는 서양 문화권에서의 달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그러나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달과 그것에 속한 이들의 모습에서 생성의 힘과 기묘한 조화를 발견해 낸다. 영화의 마지막, 도둑의 아들은 자신의 방에서 장인처럼 열심히 자물쇠를 분해하며 절도 기술을 연마한다. 그는 결코 도자기 장인이나 화가처럼 아름다움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영화는 '달의 사람들'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부분으로 존재하고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films.oeil-ecran.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글에는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비춰진다. 일본의 작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 속에서 게이샤 츠타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 가정부 오하루는 어떤 면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오하루는 게이샤 집에서 일하며 그네들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극중에서 오하루는 남편과 아들이 죽은, 혈혈단신의 40대 후반의 과부로 나온다. 작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이혼하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려운 형편 때문에 46살에 게이샤 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는데, 그 소설이 '흐르다'이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꽤 인기를 끌었고, 코다 아야에게 작가로서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리카는 직업 소개소의 추천서를 들고 츠타노야(츠타의 집이란 뜻)를 찾는다. 리카는 집주인 츠타와 그 딸 가츠요, 조카 요나고와 그 어린 딸 후지코,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 소메카, 제멋대로 행동하는 젊은 게이샤 나나코, 그리고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츠타의 큰언니를 만나게 된다. 리카라는 이름 대신 오하루로 불리우게 된 가정부는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씀으로 곧 이 집안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그러나 오하루는 이 집안이 빚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으며,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츠타는 남자에게 속아 집이 저당잡혀 있고, 큰언니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한다. 돈 떼먹고 달아난 게이샤의 삼촌은 조카 데리고 번 돈을 내놓으라며 툭하면 와서 행패를 부린다. 사람좋고 유약한 성품의 이 집주인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큰언니는 돈 많은 철강회사 임원을 소개해줄 테니 만나보라고 떠밀지만,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선배 게이샤 미즈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예전의 정인(情人)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한다. 공들여 단장을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지만, 바람만 맞고 들어오는 츠타. 과연 츠타노야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을까?

  영화는 츠타노야에 들어오게 된 오하루(타나카 키누요 분)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게이샤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오하루의 시점은 곧 관객의 시점이 된다. 이 예의바르고 분별력 있는 가정부는 모든 행동거지에 나름의 품위가 있다. 무도하게 행패를 부리는 게이샤 삼촌에게도 공손한 말로 응대하며, 배탈이 나서 아픈 꼬마 후지코가 주사를 잘 맞을 수 있도록 달랜다.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궁색하고 기가 죽어있는 소메카의 입장도 잘 헤아려 배려해준다. 츠타노야의 유일한 일반인이면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품성을 지닌 오하루는 몰락해가는 게이샤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다. 오하루가 바라본 그 세계는 화려한 외양 뒤에 돈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며, 한없이 외롭기 짝이 없는 여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에게 낙이라고 해봐야 술과 노래, 의지할 남자를 찾는 것이다. 오하루가 머물게 된 츠타노야의 칸칸이 구획된 방과 비좁은 복도는 매우 폐쇄적이며, 그곳 사람들의 일상과 삶은 거기에 매여 있다.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있다면 츠타가 애지중지 키우는 고양이 푼토일 것이다. 이 느긋한 고양이는 집안 곳곳을 돌아 다니며, 아무에게나 가서 앵긴다.

  예능인(게이샤, 藝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매춘과 연계되어 있는 이 직업은 츠타노야처럼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나나코가 기모노 대신에 양장을 하고 일하러 나갈 때이다. 연회 공연 없이 곧바로 여관방으로 직행하는 것을 나나코는 내켜하지 않지만, 급변하는 일본 사회에서 더이상 예인의 전통은 존중받기 어려워졌다. 그러므로 츠타의 딸 가츠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기를 거부한다. 가츠요는 오하루에게 자신의 굽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잠깐 게이샤 일을 하고 그만 두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그 세계에서 자란 가츠요는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직업 소개소도 가보고, 이력서도 써본다. 친구로부터 봉제일을 배우면 취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미싱 돌리는 연습도 한다. 남자에게 의탁하는 삶을 살아왔던 엄마와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가츠요의 머릿속에 결혼이란 선택지는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흐르다'에서 전통과 현대는 충돌한다.

  그러나 츠타노야에서 가츠요의 선택은 유별난 것이다. 남자가 살지 않는 이 집은 그 어느 곳보다 남자를 필요로 한다. 막돼먹은 게이샤 삼촌이 수시로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이 집에 남자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츠타의 조카 요나고는 딸이 아프자 애아빠를 찾아 다닌다. 츠타는 행패부리는 게이샤 삼촌의 고발 건으로 경찰서까지 가게되는데,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은 딸 가츠요가 아니라 선배 게이샤 미즈노의 조카 사에키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로서는 일하기 힘든 소메카는 연하의 젊은 남자와 동거하다 차이자 울음을 터뜨린다. 사랑도 삶도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그 세계의 돌아가는 방식에 가츠요는 냉소를 보내지만, 소메카는 남자없이 사는 삶이 가능하냐며 오히려 그런 가츠요를 비웃는다. 어쩌면 소메카의 그 말은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냐로 치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츠타노야의 사람들에게 남자만큼 필요한 것이 돈이기도 하다. 요나고의 남편은 아픈 애는 안보고, 약값이나 쓰라고 현관 문앞에 돈만 놓고 돌아간다. 일감이 없는 소메카는 맨밥에 간장을 비벼먹는다. 츠타는 과거의 후원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바라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큰언니는 동생인 츠타에게 돈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내고, 돈은 언제 갚냐고 채근한다. 돈과 남자가 등치되는 이 게이샤의 세계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의 상실은 몰락을 의미한다. 츠타노야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진다.  

  결국 츠타노야는 팔린다. 츠타는 샤미센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오하루는 여전히 그 집에 머무른다. 그러나 집을 산 츠타의 선배 미즈노는 그 집을 요릿집으로 바꿀 생각을 갖고 있다. 일 잘하는 오하루에게 넌지시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하지만, 오하루는 편치 않은 마음에 거절한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츠타는 다시 찾아온 소메카와 함께 평화롭게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다. 비감하고 처연한 샤미센 소리는 오랫동안 관객의 귓가에 머문다. 사라질 운명의 츠타노야와 함께 그 집을 스쳐 지나간 많은 게이샤들의 젊음과 아름다움, 슬픔과 기쁨, 온갖 비밀과 노랫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원작자 코다 아야는 자신이 늘 즐겨찾던 스미다 강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곤 했다. 그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늘 마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사라지는 것 같았고, 그것은 마음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고 적었다. 영화 '흐르다'의 나루세 미키오는 어느 게이샤 집안의 쓸쓸한 뒤안길을 통해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수를 담는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