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출류킨(Yuri Chulyukin) 감독의 1961년 영화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의 주인공 토샤를 보고 있으면, 영화 '애니(Annie, 1982)'의 귀엽고 당찬 꼬마 애니가 떠오른다. 토샤가 애니 보다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작은 키에 하는 행동은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 토샤와 애니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 요리 학교를 졸업한 18살의 토샤는 우랄의 목재 회사에 조리사로 일하기 위해 왔다. 토샤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모두 연애 중이다. 그곳은 무슨 사랑이 꽃피는 목재회사 같다. 젊은 남녀 직원들은 수시로 열리는 댄스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즐긴다. 과연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같은 토샤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길까? 영화 '아가씨들'은 빛나는 젊음의 에너지와 청춘의 사랑이 흘러 넘친다.

  원작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 토샤를 두고 여배우들의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다. 출류킨 감독은 배우인 아내에게 그 역할을 주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역할은 나데즈다 루미안체바(Nadezhda Rumyantseva)에게 돌아갔다. 당시 루미안체바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이 서른 살 여배우는 나이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18살 소녀 토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 동작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울고 웃는 모습은 천상 아이 같다. 영화는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되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루미안체바를 두고 '여자 찰리 채플린', '소련의 줄리에타 마시나'라는 호칭이 붙었다. 정말이지 '아가씨들'은 루미안체바를 위한 영화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화는 주인공 토샤와 연인 일리야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련의 국가 기간 산업에 종사하는 목재 노동자들의 모습 또한 비중있게 담는다. 일리야와 한 팀을 이루는 3명의 동료들은 틈만 나면 나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벌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일리야는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는 직원으로, 신문에 일리야의 사진과 함께 작업 성과가 실리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한창 성장하고 있는 소련의 산업 발전을 부각시키고, 그 중심인 노동자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노동자들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건전한 사전 작업이어야 한다. 일리야는 토샤의 룸메이트인 안피사와 사귀고 있었는데, 안피사는 진정한 사랑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잘 나가는 남자와 사귈까 궁리한다. 안피사는 일리야 대신에 새로 부임한 감독관과 교제를 시작한다. 일리야는 결국 토샤의 진정성과 순수함에 반해서 사귀게 된다. 안피사는 일리야가 토샤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좌절하는데, 이 여성 캐릭터가 느끼는 불행은 사랑과 결혼의 가치를 비웃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안피사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인 토샤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와 순수함, 그리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소련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 일리야는 자신이 거만하다며 춤 신청을 거절한 토샤를 골탕먹이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토샤의 음식을 혹평하며 내다 버린다.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일리야와 동료들을 위해 토샤는 직접 음식통을 들고 벌목장으로 찾아간다. 터무니 없는 냉대에도 끄떡하지 않고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기꺼이 음식을 대접하는 토샤의 모습에 일리야의 마음도 움직인다. 일리야는 어쩌면 토샤에게 '충실한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고집세고 제멋대로인 남자는 비로소 토샤와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아가씨들'은 그렇게 성실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소련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봄이 되자 목재 회사의 직원들은 새로 결혼할 부부 직원들을 위해 집을 짓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노동하고, 건전하게 연애하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국가에 기여하는 것. 그렇게 고아 출신의 요리사 토샤가 성취하는 사랑 이야기에는 소련의 국가적 이상이 깔려 있다. 알콩달콩한 청춘 남녀의 연애담에 알렉산드라 파흐무토바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정겨움을 더한다. 영화는 개봉 첫해, 3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구 소련 시절의 대표적 흥행작으로 남아있는 '아가씨들'은 경제 성장의 동력을 얻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당시 소련의 자신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가 젊은 관객들에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호소하는 노동과 연애, 결혼에 대한 강력한 프로파간다였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oxvo.ru     토샤 역의 배우 나데즈다 루미안체바


**사진 출처: in-w.ru


    

***다음 글은 목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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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여자의 자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는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와 19편이나 되는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거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루세 미키오는 늘 촬영장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자, 액션'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자신은 연기를 했다고. 나중에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따로 인사를 하고 집에 간 적은 없었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이 여배우에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엄청 어렵고 무서웠던 존재였던 것 같다. 아니, 그럼 함께 찍은 영화 가운데 나루세 미키오의 연기 지도라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을 찍을 때는 어려운 영화여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 금방이면 끝날 거야'하고 대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역 배우 때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여줬던 연기 천재인 타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까? 아무튼 그 인터뷰를 본 이후로,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말 없이 착착 돌아가는 그의 영화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1962년작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는 1962년 신년 특집으로 개봉한 가족 영화로 당시 활동했던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저런 배우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도쿄에 자리잡은 이시카와 집안의 가장(류 치수 분)의 갑작스런 병환을 계기로 그의 자녀들이 집에 모인다. 그는 첫 부인에게서 아들 켄타로와 지로, 딸 마츠와 우메코를, 재혼한 아내 아키에게서는 미치코와 나츠코, 유키코를 두었다. 장남 켄타로가 전사하고 며느리 요시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아들을 키우며 시부모와 함께 산다. 여관을 운영하는 욕심많은 딸 마츠,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는 미혼의 독립적인 딸 우메코, 무능하고 속이기 잘하는 남편과 닮은 미치코, 결혼 적령기로 남편감을 찾는 나츠코와 유키코, 이렇게 바람 잘 날 없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잡화점을 하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요시코가 중심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시카와 일가 구성원 각자의 삶을 고루고루 돌아가며 보여준다. 나루세 미키오의 특기란 이런 것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치우치거나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다. 마치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게 옷을 만드는 장인 같달까? 그런 감독의 솜씨 덕분에 관객들은 일가 구성원들 각양각색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이 가족의 주요한 관심사는 혼기가 찬 딸들의 혼사 문제이다. 나츠코는 여동생 유키코의 지인 아오야마를 좋아하게 되지만, 동생의 마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중매 결혼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나츠코와 유키코는 양장을 하고 나오는데, 젊은 세대의 여성이 구시대적 관습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은 의외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츠코와는 달리 기모노를 늘 입고 있는 우메코의 사고 방식은 현대적이다.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부모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겠다고 말하는 우메코는 감정 표현도 직설적이다. 우메코는 첫 눈에 반하게 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까지 생각한다. 신구 세대의 복식과 삶의 방식이 뒤엉켜 있는 틈 속에서 과부 며느리 요시코는 집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평상복으로, 외출할 때는 기모노를 입는다. 요시코의 유일한 관심사는 중학생 아들 켄짱의 학업이다. 그 아들이 요시코의 뜻대로 공부에 뜻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들은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의 기대 때문에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코는 기차 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그 일은 요시코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남편이 죽은 뒤로도 시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돌아갈 친정이 없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 요시코에게 유교적 가치인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기대던 아들이 죽자 요시코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선다. 이시카와의 자녀들은 요시코가 시댁을 떠나 재혼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츠코와 유키코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부모의 넓은 집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각자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다. 서글프게도 노부부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쓸모가 없구려."

  영화는 일견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의 쓸쓸한 노부부와 그런 부모에게 무심한 자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은 혈연이 아닌 며느리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동경 이야기'의 노부부처럼, '여자의 자리'의 이시카와와 아키 부부도 며느리 요시코에게 집을 팔아 셋이 같이 살 작은 집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들이 길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집에서는 자식들이 모여서 초조하게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나루세 미키오는 요시코가 선택하게 될 인생의 새로운 자리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자식의 죽음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는 일은 드문 일이다. 나츠코는 중매 결혼을 받아들이고, 유키코는 좋아하는 남자와 미래를 꿈꾼다. 우메코는 실연을 당하지만, 이전처럼 독립적인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오직 요시코만이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겪는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요시코는 어떤 삶의 자리를 선택할까? 그렇게 '여자의 자리'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은 여자의 삶을 둘러싼 결혼과 가정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낸다.



*사진 출처: aozoramusm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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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다보면 가끔은 감독 자신에 대한 사실을 추론 내지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을 보는데, 유부녀인 여자 주인공이 알게 되는 퇴역 군인과의 관계가 영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동네 주민으로서 서로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는, 전혀 이상한 사이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뭔가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감독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관계에서 내가 느꼈던 그 이질감은 감독의 성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1992년작 'The Long Day Closes'의 경우에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1950년대의 영국 리버풀을 배경으로 12살 소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암시하는 주요한 장면들이 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소년 버드는 주로 집안에 머물면서 창밖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느 때처럼 밖을 내다 보던 버드는 집 건너편의 공사 현장에서 젊은 인부와 눈이 마주친다. 청년은 버드에게 윙크를 하고, 소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창문 안쪽 벽으로 얼른 돌아선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꾸준히 영화 속 소재로 다루었던 테렌스 데이비스의 작품들을 본 이들에게 그 장면은 명백한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없고, 처음으로 보는 그의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버드가 목욕하는 형의 등을 닦아주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씻고 있는 형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형이 부탁하자 작은 수건으로 등을 닦는다. 고요하고 매혹적으로 포착된 그 장면에서 그것이 감독의 성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감독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The Long Day Closes'는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만든 영화이다.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 교실에 앉아서 필기를 하던 버드의 모습에서 갑자기 어둑한 하늘의 흰색의 돛이 휘날리는 배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뒤이어 교실에 혼자 있는 버드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식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점프컷은 이 영화가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닌 비선형적 구조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관에서 엄마와 함께 나와 길을 걷던 버드는 어느새 집의 거실에 들어와 있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이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덩어리지어진 여러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 버드의 어린 시절과 소년의 내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소년 버드에게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며 탈출구이다. 교사가 가하는 체벌이 일상화된 강압적 분위기의 학교, 여리고 내성적인 성향 때문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버드에게 영화관은 평온한 안식과 위로를 준다. 영화관과 더불어 집도 버드에게 온기를 주는 곳이다. 넓은 바다와 같은 품을 지닌 엄마, 다정한 두 형과 누나, 그리고 친숙한 이웃. 그럼에도 모두 연애 중인 형들과 또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누나에게 버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소년의 일상은 홀로 보내는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진다. 창가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학교 생활의 고통을 잊기 위해 교회에서 기도하는 버드. 수업시간에 교사가 설명하는 '침식(erosion)'이란 단어는 버드의 어린 시절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버드의 내면에 생채기를 내는 냉혹하고 무지막지한 교사들, 괴롭히는 아이들... 소년은 자신을 침식시키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고 견뎌낸다. 영화관에서 교회, 그리고 학교로 이어지는 하이 앵글 쇼트는 소년 버드의 일상인 동시에, 전후 폐쇄적이고 변화없는 영국 사회의 단면을 축소시켜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면, 소년의 집은 무너져 내린다.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버드의 모습은 이 소년에게 유년기의 기억이 훗날 계속적으로 변주되는 창작의 소재가 됨을 암시한다. 거미줄이 쳐진 어두운 심연 같은 집으로 들어가 버린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버드는 친구와 함께 달을 가린 구름이 흘러가는 저녁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버드의 소년 시절, 정확히 말하자면 테렌스 데이비스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자신을 견디게 해준 영화를 만들게 되고, 관객들은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소년 테렌스를 만난다. 냇 킹 콜, 도리스 데이, 데비 레이놀즈의 오래된 노래와 아카펠라로 연주되는 성가들이 그 과거로의 여행에 함께 한다. 베르메르의 인물화 구도를 차용한 쇼트들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따뜻함 또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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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잠을 자다 말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새벽 2시에 어딜 나가냐고 물으니, 공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는 달밤에 체조하러 가는 대신, 연기 연습을 하러 나간다. 서른 한 살의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는 새로 시작하는 연극 '해방(Liberation)'의 주인공을 맡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인공 콘라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지역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될 이 작품을 위해 바르샤바의 유명 연출가가 내려왔다. 중앙 부처와 언론을 비롯해 다른 극단 관계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크지슈토프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줘서 이 시시하고 지겨운 지방 극단 배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 제대로 콘라트 역을 해내어서 지방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의 장편 영화 데뷔작 '지방 극단 배우(Provincial Actors, 1979)'는 예술적 이상을 가진 연극 배우의 현실적 고민과 좌절을 그린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 크지슈토프는 사냥용 장총을 벽에다 걸어놓고 천으로 덮는다. 언젠가 사용될 것 같은 총이 주는 불안한 느낌은 영화 내내 흐른다. 이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도 무슨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것으로 시종일관 음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방 극단의 그리 크지 않은 무대와 낡은 내부 시설, 크지슈토프와 아내 안카가 사는 비좁은 아파트, 그렇게 대부분 협소한 공간에서 촬영된 영화는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뿜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적인 우울과 불안, 강박적 공포는 그 모든 것과 절묘하게 감응한다.

  크지슈토프가 연극에 집중하고 매달릴수록, 아내 안카와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진다. 연기를 공부한 안카는 인형극단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이상에 대한 괴리는 안카를 정서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게 만든다. 남편은 안카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데,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소리가 다른 고양이를 키우자고 한다. 급기야 각방살이를 시작하지만, 방 하나 뿐인 궁색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안카는 부엌에 간이침대를 놓을 수 밖에 없다. 남편은 이 연극 한 편만 잘 되면 이 촌구석을 뜰 것으로 생각하지만, 안카가 보기에는 헛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지방 극단 배우면 예술과 연기에 대한 열정도 '지방급'인가? 저 인간들은 예술을 모독하고 있다, 고 크지슈토프를 생각한다. 위대한 폴란드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Stanisław Wyspiański)의 걸작 희곡을 제멋대로 잘라먹는 천박한 연출가는 연극을 망치고 있다. 동료들은 배우가 아닌, 월급쟁이 단원으로 잡담과 무성의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는 뭐가 그리 힘든지 바가지만 긁는다. 자신은 새벽에 공원에 나가 연기 연습을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데, 도대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는 이미 삼십 줄에 접어들었고, 이제 좋은 기회 잡기도 힘들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심해질수록 연기에 대한 압박도 커진다. 크지슈토프는 어렵사리 초연을 끝마치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면도날 위의 삶. 아그니에슈카 홀란드가 그려내는 예술가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적 이상은 저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있고,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그 둘 사이의 괴리가 가져오는 고통은 언제든 총으로 삶을 끝내버릴 것 같은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크지슈토프가 연기하는 연극 '해방'의 주인공 콘라트는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연극 속 콘라트는 폴란드를 억압하는 모든 사상과 체제에 맞서 싸우는 고독한 투사로 폴란드의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이다. 그것을 연기하는 크지슈토프는 예술을 저속하게 만드는 연출가를 비롯해 동료 배우들과 투쟁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극단 배우의 삶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진출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크지슈토프에게 그 모든 것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시시하고 우스워질 뿐이야."

  연기에 충실하려는 남편에게 냉소적인 아내는 그렇게 말한다. 연극 무대 뒤의 삶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 부처에서 내려온 관료와 비평가의 유세, 어느 여배우가 극단 관계자와 잤는지 너절한 소문이나 들먹이는 동료 배우들, 하급 실무 직원들을 멸시하고 하대하는 관행, 그것이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를 둘러싼 현실이다. 아그니에슈카 홀란드는 이 영화에서 인간 운명과 그것에 얽힌 곤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Kultura, 1979). 예술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지방 극단 배우의 진지한 시도와 연기에의 열정은 무시되고 좌절된다. 그는 배우를 그만 두고 큰 도시로 떠나 살자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안카의 무심한 표정은 그들 부부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회의적임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운명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모든 것에서의 '해방'이란 실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임을 지방 극단 배우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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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대도시(Mahanagar, The Big city, 196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 그렇게 공부해봤자, 새언니처럼 부엌에나 있게 될 걸."

  퇴근하고 돌아온 오빠는 책상에 앉아있는 여동생에게 그렇게 빈정거린다. 그러나 부엌에만 있을 것 같았던 부인 아라티는 얼마 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일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다 '돈' 때문이었다. 옆집에서 하루종일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비좁고 낡은 주택, 은행원인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유지가 안되는 살림살이, 그도 그럴 것이 아라티는 연로한 시부모 봉양과 학교에 다니는 시누이의 학비까지 챙겨야 한다. 남편의 친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는 말에, 아라티도 생활비에 보탬이 될까 싶어 일을 찾아 본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은 편물기 판매 영업. 말 그대로 아라티는 세일즈 우먼이 된다. 그러나 살림만 하던 며느리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시어머니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시아버지는 아예 입을 닫고 반대의 뜻을 표명한다. 남편 수브라타도 조금씩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진다. 급기야 남편은 자신이 부업을 할 테니 일을 그만두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제 일에 재미를 붙인 아라티는 남편의 뜻에 따를까?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감독의 1963년작 '대도시(The Big City)'는 중산층 가정 주부가 직업을 갖게 되면서 겪는 갈등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Narendranath Mitra의 단편 'Abataranika'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기혼 여성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두고 남편과 시부모가 보이는 반응은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케케묵은 구시대적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와 대도시의 삶,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은 전혀 낡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소심하고 의존적이었던 평범한 가정주부가 자신의 일을 갖게 되면서 보여주는 정체성과 심리적인 변화가 인상적이다. 아라티 역의 마드하비 무케르지(Madhabi Mukherjee)의 자연스럽고 호소력있는 연기는 영화를 반짝이게 만든다.

  첫출근 때 긴장하며 남편과 동행했던 아라티는 홀로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고 편물기를 팔러 다닌다. 아라티가 상대하는 고객들은 보통의 가정집 주부들이 아니다. 값비싼 편물기를 구매할 수 있는 부유층들의 주거지가 아라티의 영업장소이다. 사티야지트 레이는 영화 속에서 대도시 캘커타의 다양한 계층의 주거지와 삶의 방식을 흥미롭게 조망한다. 아라티의 비좁고 어수선한 집과 대비되는 부유층의 화려하고 넓은 거실, 아라티의 동료 이디스의 자유롭게 트인 공간의 집, 시아버지가 방문하게 되는 성공한 사업가 제자의 서구적이고 호화로운 저택, 각각의 집들에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1960년대 인도 사회의 모습들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아라티의 동료 이디스의 집은 더욱 독특하게 보인다. 이디스는 영국계 인도인(Anglo-Indian)으로 인도인과는 외모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벵골어가 아닌 영어를 쓴다. 아라티는 심한 감기에 걸려 아픈 이디스의 병문안을 가게 되는데, 그 집의 거실은 자유분방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이디스의 성격과도 닮아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라티 만큼이나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면 이디스일 것이다. 이디스는 직장 동료들을 대신해 편물기 판매에 따른 커미션을 두고 상사와 담판을 벌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이디스의 모습은 아라티에게 새로운 충격을 준다. 이디스가 아라티의 호의에 답례로 건네는 립스틱과 선글라스는 아라티의 삶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를 상징한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집안의 생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아라티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고객과의 만남에서 실직한 남편을 사업가로 둘러대며, 자신이 일하는 이유는 취미 삼아 재미로 해보는 것이라며 말하는 아라티. 이런 변화는 아라티가 대도시의 자본주의적 삶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적합한 사회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라티의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전직 교사로 이제는 십자말풀이로 소일하는 시아버지 프리요고팔은 체면과 의무를 중시하는 고루한 구시대적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안과의사인 제자에게는 비싼 안경을, 사업가 제자에게는 용돈을 받아낸다. 아들의 경제적 무능함을 과장하며 얻어내는 그런 물질적인 도움은 엄밀히 말하면 '구걸' 내지는 '뜯어내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의무임을 역설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그런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관객들은 혈연과 지연, 학연이 얽혀 돌아가는 인도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아라티의 남편 수브라타는 은행의 갑작스런 파산으로 실직하게 되는데, 아라티의 직장 상사 히망슈는 수브라타가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임을 알고 일자리를 주선해주겠다는 호의를 보인다.

  좋은 영업 실적과 성실함으로 인정받은 아라티는 상사에게 매니저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라티는 상사가 이디스를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해고했음을 알게 된다. 이디스가 결근한 것이 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라티는 이디스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상사에게 항의한다. 아라티는 히망슈가 이디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종적 편견 때문에 모욕을 주고 해고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히망슈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라티를 용납할 수 없다. 아라티는 사표를 던지고 나온다. 이 장면은 당시 인도 사회의 숨겨진 갈등의 요소로서 영국계 인도인의 문제를 표출시킨다. 영국이 동인도 회사의 설립으로 인도로 진출한 이래, 영국계 인도인들은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아라티가 보여주는 분노는 그들이 받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사티야지트 레이의 명백한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다.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와 정의로운 분노. 아라티는 자신의 양심에 따르느라 직업적 경력과 기회를 포기하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그것은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 영화는 아라티의 선택을 인정하며 격려하는 남편과 함께 부부가 혼잡한 도시의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큰 도시에 우리가 일할 자리가 없겠어요?'라고 아라티는 말한다. 영화의 이런 결말은 사티야지트 레이의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비정하고 냉혹한 도시의, 자본주의의 삶은 그곳에서 사는 이들을 돈의 추종자들, 물신숭배자들로 만들어 버린다. 생계에 대한 압박은 공정과 정의로움에 대한 요구보다 크고 절박하다. 그런 면에서 아라티의 선택은 순진하게까지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만으로 과연 사회가 변화될 수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이상주의적이지만, 모호한 답변을 내놓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대도시'의 주인공 아라티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나가려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나름의 감동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아라티와 남편이 작은 점처럼 사라지는 대도시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도 더욱 더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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