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다보면 가끔은 감독 자신에 대한 사실을 추론 내지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을 보는데, 유부녀인 여자 주인공이 알게 되는 퇴역 군인과의 관계가 영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동네 주민으로서 서로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는, 전혀 이상한 사이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뭔가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감독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관계에서 내가 느꼈던 그 이질감은 감독의 성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1992년작 'The Long Day Closes'의 경우에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1950년대의 영국 리버풀을 배경으로 12살 소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암시하는 주요한 장면들이 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소년 버드는 주로 집안에 머물면서 창밖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느 때처럼 밖을 내다 보던 버드는 집 건너편의 공사 현장에서 젊은 인부와 눈이 마주친다. 청년은 버드에게 윙크를 하고, 소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창문 안쪽 벽으로 얼른 돌아선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꾸준히 영화 속 소재로 다루었던 테렌스 데이비스의 작품들을 본 이들에게 그 장면은 명백한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없고, 처음으로 보는 그의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버드가 목욕하는 형의 등을 닦아주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씻고 있는 형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형이 부탁하자 작은 수건으로 등을 닦는다. 고요하고 매혹적으로 포착된 그 장면에서 그것이 감독의 성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감독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The Long Day Closes'는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만든 영화이다.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 교실에 앉아서 필기를 하던 버드의 모습에서 갑자기 어둑한 하늘의 흰색의 돛이 휘날리는 배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뒤이어 교실에 혼자 있는 버드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식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점프컷은 이 영화가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닌 비선형적 구조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관에서 엄마와 함께 나와 길을 걷던 버드는 어느새 집의 거실에 들어와 있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이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덩어리지어진 여러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 버드의 어린 시절과 소년의 내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소년 버드에게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며 탈출구이다. 교사가 가하는 체벌이 일상화된 강압적 분위기의 학교, 여리고 내성적인 성향 때문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버드에게 영화관은 평온한 안식과 위로를 준다. 영화관과 더불어 집도 버드에게 온기를 주는 곳이다. 넓은 바다와 같은 품을 지닌 엄마, 다정한 두 형과 누나, 그리고 친숙한 이웃. 그럼에도 모두 연애 중인 형들과 또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누나에게 버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소년의 일상은 홀로 보내는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진다. 창가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학교 생활의 고통을 잊기 위해 교회에서 기도하는 버드. 수업시간에 교사가 설명하는 '침식(erosion)'이란 단어는 버드의 어린 시절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버드의 내면에 생채기를 내는 냉혹하고 무지막지한 교사들, 괴롭히는 아이들... 소년은 자신을 침식시키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고 견뎌낸다. 영화관에서 교회, 그리고 학교로 이어지는 하이 앵글 쇼트는 소년 버드의 일상인 동시에, 전후 폐쇄적이고 변화없는 영국 사회의 단면을 축소시켜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면, 소년의 집은 무너져 내린다.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버드의 모습은 이 소년에게 유년기의 기억이 훗날 계속적으로 변주되는 창작의 소재가 됨을 암시한다. 거미줄이 쳐진 어두운 심연 같은 집으로 들어가 버린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버드는 친구와 함께 달을 가린 구름이 흘러가는 저녁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버드의 소년 시절, 정확히 말하자면 테렌스 데이비스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자신을 견디게 해준 영화를 만들게 되고, 관객들은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소년 테렌스를 만난다. 냇 킹 콜, 도리스 데이, 데비 레이놀즈의 오래된 노래와 아카펠라로 연주되는 성가들이 그 과거로의 여행에 함께 한다. 베르메르의 인물화 구도를 차용한 쇼트들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따뜻함 또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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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잠을 자다 말고 옷을 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새벽 2시에 어딜 나가냐고 물으니, 공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는 달밤에 체조하러 가는 대신, 연기 연습을 하러 나간다. 서른 한 살의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는 새로 시작하는 연극 '해방(Liberation)'의 주인공을 맡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주인공 콘라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지역 연극제 출품작으로 공연될 이 작품을 위해 바르샤바의 유명 연출가가 내려왔다. 중앙 부처와 언론을 비롯해 다른 극단 관계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크지슈토프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줘서 이 시시하고 지겨운 지방 극단 배우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 남자, 제대로 콘라트 역을 해내어서 지방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그니에슈카 홀란드(Agnieszka Holland)의 장편 영화 데뷔작 '지방 극단 배우(Provincial Actors, 1979)'는 예술적 이상을 가진 연극 배우의 현실적 고민과 좌절을 그린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 크지슈토프는 사냥용 장총을 벽에다 걸어놓고 천으로 덮는다. 언젠가 사용될 것 같은 총이 주는 불안한 느낌은 영화 내내 흐른다. 이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도 무슨 공포영화에 나올 법한 것으로 시종일관 음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지방 극단의 그리 크지 않은 무대와 낡은 내부 시설, 크지슈토프와 아내 안카가 사는 비좁은 아파트, 그렇게 대부분 협소한 공간에서 촬영된 영화는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뿜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적인 우울과 불안, 강박적 공포는 그 모든 것과 절묘하게 감응한다.

  크지슈토프가 연극에 집중하고 매달릴수록, 아내 안카와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진다. 연기를 공부한 안카는 인형극단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자신이 가진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이상에 대한 괴리는 안카를 정서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게 만든다. 남편은 안카가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데,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소리가 다른 고양이를 키우자고 한다. 급기야 각방살이를 시작하지만, 방 하나 뿐인 궁색하고 좁은 아파트에서 안카는 부엌에 간이침대를 놓을 수 밖에 없다. 남편은 이 연극 한 편만 잘 되면 이 촌구석을 뜰 것으로 생각하지만, 안카가 보기에는 헛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지방 극단 배우면 예술과 연기에 대한 열정도 '지방급'인가? 저 인간들은 예술을 모독하고 있다, 고 크지슈토프를 생각한다. 위대한 폴란드의 작가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Stanisław Wyspiański)의 걸작 희곡을 제멋대로 잘라먹는 천박한 연출가는 연극을 망치고 있다. 동료들은 배우가 아닌, 월급쟁이 단원으로 잡담과 무성의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는 뭐가 그리 힘든지 바가지만 긁는다. 자신은 새벽에 공원에 나가 연기 연습을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데, 도대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는 이미 삼십 줄에 접어들었고, 이제 좋은 기회 잡기도 힘들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심해질수록 연기에 대한 압박도 커진다. 크지슈토프는 어렵사리 초연을 끝마치지만, 정신적으로는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면도날 위의 삶. 아그니에슈카 홀란드가 그려내는 예술가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적 이상은 저 멀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있고, 현실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그 둘 사이의 괴리가 가져오는 고통은 언제든 총으로 삶을 끝내버릴 것 같은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크지슈토프가 연기하는 연극 '해방'의 주인공 콘라트는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다. 연극 속 콘라트는 폴란드를 억압하는 모든 사상과 체제에 맞서 싸우는 고독한 투사로 폴란드의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애를 쓰는 인물이다. 그것을 연기하는 크지슈토프는 예술을 저속하게 만드는 연출가를 비롯해 동료 배우들과 투쟁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극단 배우의 삶에서 벗어나 큰 도시로 진출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나 크지슈토프에게 그 모든 것에서의 진정한 '해방'은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시시하고 우스워질 뿐이야."

  연기에 충실하려는 남편에게 냉소적인 아내는 그렇게 말한다. 연극 무대 뒤의 삶 또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 부처에서 내려온 관료와 비평가의 유세, 어느 여배우가 극단 관계자와 잤는지 너절한 소문이나 들먹이는 동료 배우들, 하급 실무 직원들을 멸시하고 하대하는 관행, 그것이 지방 극단 배우 크지슈토프를 둘러싼 현실이다. 아그니에슈카 홀란드는 이 영화에서 인간 운명과 그것에 얽힌 곤경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Kultura, 1979). 예술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지방 극단 배우의 진지한 시도와 연기에의 열정은 무시되고 좌절된다. 그는 배우를 그만 두고 큰 도시로 떠나 살자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말을 듣는 안카의 무심한 표정은 그들 부부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회의적임을 드러낸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운명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가? 영화는 그 모든 것에서의 '해방'이란 실로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임을 지방 극단 배우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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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대도시(Mahanagar, The Big city, 196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 그렇게 공부해봤자, 새언니처럼 부엌에나 있게 될 걸."

  퇴근하고 돌아온 오빠는 책상에 앉아있는 여동생에게 그렇게 빈정거린다. 그러나 부엌에만 있을 것 같았던 부인 아라티는 얼마 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일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다 '돈' 때문이었다. 옆집에서 하루종일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비좁고 낡은 주택, 은행원인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유지가 안되는 살림살이, 그도 그럴 것이 아라티는 연로한 시부모 봉양과 학교에 다니는 시누이의 학비까지 챙겨야 한다. 남편의 친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는 말에, 아라티도 생활비에 보탬이 될까 싶어 일을 찾아 본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은 편물기 판매 영업. 말 그대로 아라티는 세일즈 우먼이 된다. 그러나 살림만 하던 며느리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시어머니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시아버지는 아예 입을 닫고 반대의 뜻을 표명한다. 남편 수브라타도 조금씩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진다. 급기야 남편은 자신이 부업을 할 테니 일을 그만두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제 일에 재미를 붙인 아라티는 남편의 뜻에 따를까?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 감독의 1963년작 '대도시(The Big City)'는 중산층 가정 주부가 직업을 갖게 되면서 겪는 갈등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원작은 Narendranath Mitra의 단편 'Abataranika'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기혼 여성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두고 남편과 시부모가 보이는 반응은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케케묵은 구시대적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여년 전의 이 영화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와 대도시의 삶,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가족간의 갈등은 전혀 낡은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소심하고 의존적이었던 평범한 가정주부가 자신의 일을 갖게 되면서 보여주는 정체성과 심리적인 변화가 인상적이다. 아라티 역의 마드하비 무케르지(Madhabi Mukherjee)의 자연스럽고 호소력있는 연기는 영화를 반짝이게 만든다.

  첫출근 때 긴장하며 남편과 동행했던 아라티는 홀로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고 편물기를 팔러 다닌다. 아라티가 상대하는 고객들은 보통의 가정집 주부들이 아니다. 값비싼 편물기를 구매할 수 있는 부유층들의 주거지가 아라티의 영업장소이다. 사티야지트 레이는 영화 속에서 대도시 캘커타의 다양한 계층의 주거지와 삶의 방식을 흥미롭게 조망한다. 아라티의 비좁고 어수선한 집과 대비되는 부유층의 화려하고 넓은 거실, 아라티의 동료 이디스의 자유롭게 트인 공간의 집, 시아버지가 방문하게 되는 성공한 사업가 제자의 서구적이고 호화로운 저택, 각각의 집들에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1960년대 인도 사회의 모습들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아라티의 동료 이디스의 집은 더욱 독특하게 보인다. 이디스는 영국계 인도인(Anglo-Indian)으로 인도인과는 외모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벵골어가 아닌 영어를 쓴다. 아라티는 심한 감기에 걸려 아픈 이디스의 병문안을 가게 되는데, 그 집의 거실은 자유분방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이디스의 성격과도 닮아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라티 만큼이나 주목받는 인물이 있다면 이디스일 것이다. 이디스는 직장 동료들을 대신해 편물기 판매에 따른 커미션을 두고 상사와 담판을 벌인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이디스의 모습은 아라티에게 새로운 충격을 준다. 이디스가 아라티의 호의에 답례로 건네는 립스틱과 선글라스는 아라티의 삶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를 상징한다.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집안의 생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아라티는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다. 고객과의 만남에서 실직한 남편을 사업가로 둘러대며, 자신이 일하는 이유는 취미 삼아 재미로 해보는 것이라며 말하는 아라티. 이런 변화는 아라티가 대도시의 자본주의적 삶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그것에 적합한 사회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라티의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전직 교사로 이제는 십자말풀이로 소일하는 시아버지 프리요고팔은 체면과 의무를 중시하는 고루한 구시대적 인물이다. 그는 잘 나가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안과의사인 제자에게는 비싼 안경을, 사업가 제자에게는 용돈을 받아낸다. 아들의 경제적 무능함을 과장하며 얻어내는 그런 물질적인 도움은 엄밀히 말하면 '구걸' 내지는 '뜯어내는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의무임을 역설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그런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거기에서 관객들은 혈연과 지연, 학연이 얽혀 돌아가는 인도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아라티의 남편 수브라타는 은행의 갑작스런 파산으로 실직하게 되는데, 아라티의 직장 상사 히망슈는 수브라타가 자신과 같은 고향 출신임을 알고 일자리를 주선해주겠다는 호의를 보인다.

  좋은 영업 실적과 성실함으로 인정받은 아라티는 상사에게 매니저 자리를 제안받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라티는 상사가 이디스를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해고했음을 알게 된다. 이디스가 결근한 것이 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라티는 이디스의 해고가 부당하다며 상사에게 항의한다. 아라티는 히망슈가 이디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종적 편견 때문에 모욕을 주고 해고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히망슈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라티를 용납할 수 없다. 아라티는 사표를 던지고 나온다. 이 장면은 당시 인도 사회의 숨겨진 갈등의 요소로서 영국계 인도인의 문제를 표출시킨다. 영국이 동인도 회사의 설립으로 인도로 진출한 이래, 영국계 인도인들은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왔다. 아라티가 보여주는 분노는 그들이 받는 차별과 편견에 대한 사티야지트 레이의 명백한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다.

  차별받고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와 정의로운 분노. 아라티는 자신의 양심에 따르느라 직업적 경력과 기회를 포기하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그것은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까? 영화는 아라티의 선택을 인정하며 격려하는 남편과 함께 부부가 혼잡한 도시의 거리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큰 도시에 우리가 일할 자리가 없겠어요?'라고 아라티는 말한다. 영화의 이런 결말은 사티야지트 레이의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비정하고 냉혹한 도시의, 자본주의의 삶은 그곳에서 사는 이들을 돈의 추종자들, 물신숭배자들로 만들어 버린다. 생계에 대한 압박은 공정과 정의로움에 대한 요구보다 크고 절박하다. 그런 면에서 아라티의 선택은 순진하게까지 보인다. 개인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만으로 과연 사회가 변화될 수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이상주의적이지만, 모호한 답변을 내놓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대도시'의 주인공 아라티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나가려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나름의 감동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아라티와 남편이 작은 점처럼 사라지는 대도시의 풍경 속에서 살고 있는 관객이라면 아마도 더욱 더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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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3년작 '여자의 역사(女の歴史, A Woman's Life)'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뭔가 찬밥 취급을 받는 듯하다. 1962년에 만든 비슷한 제목의 '여자의 자리(女の座)'가 좀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았다. '여자의 역사'는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을 바탕으로 카사하라 료죠가 시나리오를 썼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신상옥 감독이 1968년에 만든 '여자의 일생'도 있다. 최근작으로는 프랑스에서 2016년에 만든 영화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정말로 모파상의 그 소설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단한 흡인력을 가졌구나 싶기도 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이 좀 넘는데, 보다보면 영화를 오밀조밀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나루세 미키오의 그저그런 범작으로 여길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시나리오도 원작 소설의 기본 뼈대만을 취했을 뿐, 그 내용은 일본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일생으로 소설과는 차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의 나이는 39살이었는데, 20대의 아가씨부터 중년에 이르는 나이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여배우는 단지 분장만으로 '늙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와 행동으로 나이든 사람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중년의 여인을 보여주기 위해 약간은 구부정하고 느리게 걷는 걸음걸이며, 목소리도 고음 대신 중저음을 사용한다. 배우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신의 미용실을 갖고 있는 노부코는 연로한 시어머니, 장성한 아들 코헤이과 함께 살고 있다. 코헤이는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며 노부코에게 알리지만, 노부코는 며느릿감이 카바레 종업원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한다. 제멋대로이며 엄마의 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아들은 노부코의 반대에도 살림을 차린다. 노부코는 그런 아들을 보며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새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노부코. 영화는 현재의 노부코가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을 중간중간 넣어서 노부코의 지나온 삶을 보여준다. 애정없이 이루어진 중매결혼, 남편의 징집과 전사, 남편의 친구 아키모토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 전후의 피폐한 삶,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기까지 노부코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나루세 미키오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삶의 시련과 마주하는 여자 주인공을 그려내면서도 눈물을 짜내는 멜로 드라마로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인공 노부코는 강인한 삶의 의지를 지닌 여성이다.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상황이 노부코를 더욱 더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과부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아들을 키워야 하는 노부코는 암거래 쌀 장사까지 한다. 영화는 전후의 혼란과 궁핍한 현실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한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공주들, 거리의 구두닦이 소년들, 찐빵을 먹는 이를 계속 쳐다보는 굶주린 이들... 나루세 미키오는 마치 인물화를 그리면서 주변 풍광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화가처럼 영화에 시대적 사실성을 더한다.

  아버지를 빼놓고, 노부코에게 남자들이란 고통의 근원이었다. 여자 문제는 없다고 믿었던 남편은 노부코를 속였고, 노부코가 반대한 결혼을 한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떴다. 노부코와 삶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시어머니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난 시아버지는 여관방에서 게이샤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어머니가 하는 대사는 통렬하게 들린다.

  "남자들은 여자를 아이로 만들어 버리지. 자기들은 멋대로 하고 살아. 그러고는 여자들 보다 먼저 죽어. 난 다음 생에서는 꼭 남자로 태어날 거야."

  노부코는 자신을 찾아온 며느리 미도리와 손자를 보듬는다. 이 어린 꼬마는 노부코에게 남은 삶의 빛이 되어줄까? 그렇게 한 여자의 삶의 역사를 그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와 다카미네 히데코의 팬들은 이 영화를 놓치기 어려울 것이다. 과하게 감상적인 영화 음악을 견뎌낼 수만 있다면, '여자의 역사'는 충분히 관객의 기대에 보답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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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

  남자의 직업은 지하철 검표원. 그의 일상은 지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업무가 끝나고도 집에 가지 않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잔다. 마음에 드는 처자가 커피 한 잔 산다며 카페에 가자고 해도 선뜻 가지 못한다. 카페는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하를 벗어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그의 전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의 동료와 우연히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의 분야에서 아주 잘 나갔던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안정된 직장도 그만두고 이렇게 지하 인간이 되어버렸을까? 무언가 비밀을 가진 듯한 남자의 이름은 볼츄. 지하에 자신을 유폐시키는 삶이 싫어진 그가 친한 선배에게 묻는다. 미국 태생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Nimród Antal, 헝가리식 이름 표기는 성을 먼저 쓰므로 '안탈 님로드'로 표기함)의 2003년작 'Kontroll'은 부다페스트 지하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물이다.

  볼츄의 주 업무는 승객들의 지하철 표를 검사하는 것(Kontroll)이다. 그는 하루종일 천차만별(이라고 쓰고 실상은 골때리는)의 승객들과 티켓 실랑이를 벌인다. 무임승차 승객들에게 얻어맞고 골탕먹는 것은 별 것 아닌 일상. 볼츄가 일하는 지하 공간에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 승객들의 투신 자살은 낯설지 않다. 어쩌면 볼츄와 그 동료들이 보여주는 또라이 같은 행동은 지하 생활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터득한 특성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볼츄는 동료를 놀려먹고 달아난 젊은 승객을 뒤쫓는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젊은 승객을 지하철이 들어오는 철로로 밀쳐서 죽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다. 두려움 때문에 두건 남자를 잡지 않은 볼츄는 졸지에 승객 살인범으로 몰린다. 얼마 후, 새벽에 몰래 열리는 지하철 파티에서 볼츄는 두건 살인범과 마주친다. 과연 그는 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까?

  'Kontroll'은 빠르고 역동적인 편집과 강한 록 비트의 음악이 돋보인다. 특히 헝가리 인디 밴드 'Neo'가 들려주는 음악은 음울하고 기이한 지하 공간의 느낌과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거의 20년 전 영화인데도, 이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과 그것이 담고 있는 정서는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님로드 안탈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하 세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게 만든다. 지하철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 거대한 전동차의 무시무시한 속도, 미로처럼 얽힌 선로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탈과 범죄... 안탈이 형상화한 지하 공간은 도시인들의 온갖 욕망이 충돌하며, 그들의 무의식이 하수구처럼 모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내면이 피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직원들이 지하철 공사의 정신과 주치의와 면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기면증과 편집증을 비롯해 다양한 불안과 고통을 호소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코믹하게 묘사되었지만,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볼츄의 동료 직원이 승객과 말다툼 끝에 칼부림을 하는 장면은 지하 공간의 병리성을 부각시킨다.      

  그런 지하 공간을 주인공 볼츄는 편안한 안식처로 생각한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상의 삶에서 도피한 사람이다. 지상과 그 현실의 삶과 마주하지 못하는 그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검은 두건의 지하철 살인마는 어떤 면에서 볼츄의 두려움이 형상화된 실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와 마주쳤을 때, 볼츄는 눈을 감고 그가 지나가는 것을 외면한다. 저돌적인 볼츄의 성향으로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직원 곤조와의 Railing(전동차가 들어오는 선로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달리기 시합)에서 볼츄는 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눈 앞의 살인마를 보고 얼어붙는다. 볼츄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심한 분노와 자괴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진 두건 살인마와의 재대면. 그것은 지하의 삶에 스스로를 가두는 자신의 내면과도 마주하는 일이다.

  님로드 안탈은 'Kontroll'에 코미디, 스릴러, 로맨스, 액션을 맛깔나게 버무려 놓는다. 거기에는 지하 공간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사유와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탐구가 지도처럼 펼쳐져 있다. 관객들은 안탈이 그려낸 지도를 따라 부다페스트의 지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지하 인간으로 살면서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던 볼츄는 과연 방법을 찾았을까? 영화의 마지막에 볼츄는 연인과 함께 지상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선다. 볼츄의 지상으로의 비상처럼, 새로운 세대의 헝가리 감독 님로드 안탈의 첫 영화도 그렇게 떠올랐다.



*사진 출처: eef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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