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Babylift'란 명칭의 작전이 수행된다. 그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온 베트남 고아들은 입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이디(Heidi Bub)도 그렇게 미국으로 온 베트남 아이였다. 미국 남부, 신실한 종교심을 가진 싱글 여성의 아이로 입양된 하이디에게 성장의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억압적이고 냉담한 양모는 하이디에게 베트남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도록 가르쳤고, 하이디는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양모와의 갈등은 급기야 하이디가 대학생이 되면서 완전한 결별로 이어진다.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엄마가 된 하이디는 베트남의 친모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하이디의 친모도 딸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베트남계 미국 언론인 트란의 도움으로 모녀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다낭에서 온 딸(Daughter from Danang)'은 불행하게 헤어진 모녀의 상봉 속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의 깊은 상처를 조명한다.

  첫 인터뷰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이디의 외모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베트남 인과 백인 혼혈인 하이디의 외모는 이 여성에게 드리운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짐작케 한다. 유색 인종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이 있는 남부에서 성장한 하이디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KKK단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며 자란 하이디에게 남부는 독선적인 양모와 함께 견뎌야할 삶의 토대였다. 양모와의 단절 이후, 하이디는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애정에 대한 갈망을 상상 속의 친모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다낭에서의 상봉, 하이디는 친모 마이와 의붓 아버지, 이부(異父) 형제들을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은 이 가족의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감독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는 이 베트남 모녀의 상봉기를 흥미있는 플롯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우선 다큐는 'Babylift' 작전과 베트남전 관련 자료 화면으로 이야기를 연다. 뒤이어 하이디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 만남을 기대하는 친모 마이의 인터뷰, 베트남으로의 여정, 상봉에 이르는 과정을 속도감있게 전개시킨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의 궁금증은 증폭된다. 하이디의 생모는 어떻게 하이디를 낳게 되었고, 미국으로 보내게 되었을까? 현재 같이 살고 있는 가족들은 어떤 이들이며, 과연 하이디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다큐의 후반부는 그런 의문에 대한 답들이 실타래 풀듯이 제시된다. '다낭에서 온 딸'은 잘 구성된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의 예시로 쓰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상봉의 기쁨은 이내 서로 다른 문화와의 부딪힘에서 오는 '문화 충격(Culture shock)'으로 이어진다. 덥고 습한 베트남의 날씨는 하이디를 힘들게 하며, 온갖 낯선 식재료들이 팔리는 재래시장의 풍경은 기이하게만 느껴진다. 친모의 과도한 스킨십도 냉정한 양모 밑에서 자란 하이디에게는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하이디는 친모가 얼굴을 부비며 입을 맞추자, 곧바로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내기도 한다. 의붓 아버지의 존재도 하이디에게 무척 낯설다.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11년 동안 베트콩으로 전쟁에 참전한 사람이다. 하이디의 생모는 먹고 살기 위해 미군 부대에서 일하다가 어느 미군을 알게 되고, 하이디가 태어났다. 미군의 아이를 낳았다는 손가락질, 자신의 아이들이 겪는 차별과 설움, 하이디의 미래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이 맞물려 하이디의 미국행이 결정되었다. 어떻게 아이를 버릴 수 있는지 친모를 원망하던 하이디의 생각은 베트남에 와서 곧 바뀐다. 이부 자매의 가난한 살림살이와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현실을 보며 자신이 미국에서 누린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며 고맙게 생각하게 된다.

  하이디는 원래 머무르기로 한 체류 기간을 단축한다. 6살까지 살았던 베트남에서의 추억은 퇴색되었고 실망으로 채워졌다. 거기에 떠나기 전 마지막 만남은 하이디에게 크나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준다. 이부 큰오빠는 하이디에게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서 같이 살아야 할 것과, 그것이 어려우면 매달 어머니 봉양을 위한 생활비를 보내라고 말한다. 이미 체류 기간 동안 가족을 위해 많은 지출을 한 하이디는 생면부지의 낯선 베트남인들이 자신을 현금출납기로 취급한다고 여긴다. 하이디는 단호하게 그 요청을 거절한다. 친모와 그 가족들은 자식으로서 가져야할 의무를 하이디가 거부한다고 생각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이 문화적, 정서적 충돌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해 아시아권 관객들과 서양 관객들의 리뷰 반응이 갈리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이 다큐에 대한 리뷰를 읽다보면, 베트남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하이디의 무지와 오해를 질타하는 평이 나온다. 서양의 관객들에게 베트남 가족의 요구는 뻔뻔하고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22년 동안 헤어져 아무런 교류도 없는 자식에게 봉양의 의무를 설파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다.

  "글쎄요, 문은 닫았는데 아직 잠그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다큐는 그로부터 2년 후, 하이디의 일상을 보여준다. 하이디는 베트남에서 날아온 편지들이 돈과 관련된 요구라며 냉소적으로 말한다. 거기에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은 하이디는 베트남의 가족들에 대한 입장을 묻는 감독의 질문에 그렇게 답한다. 결국 베트남 계 남부 미국인 여성 하이디의 과거로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다낭에서 온 딸'은 그 여행이 보여주는 미국 현대사의 민낯과 서로 다른 문화의 부딪힘에서 오는 파열음을 우직하게 담아낸다. 그러나 그것을 담는 다큐의 관점은 일부는 기울어져 있고, 편파적이다. 카메라는 베트남의 모습을 낯설고, 기이하며,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혼합물로 포착한다. 이 다큐의 제목이 '다낭에서 온 딸'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어떤 면에서 그 제목은 미국이 수용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이식한 베트남 출신 입양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미국식 조망이라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사진 출처: itv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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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숲 속을 헤치며 말을 타고 가는 두 명의 여행자를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때는 1835년, 루마니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왈라키아 왕조가 시대적 배경이다. 대영주(Boyar로 지칭함)의 법 집행관인 코스탄딘은 영주의 명을 받고 도망 노예 집시 카르핀을 찾는 중이다. 그의 동행은 아들 이오니타. 앳된 티가 역력한 십대의 아들은 군복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도망자를 쫓는 여정은 경험많고 노련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러주는 직업과 세상살이에 대한 교육의 시간이 된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제, 집시, 농민, 관료들과의 만남은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를 알 수 있는 역사화처럼 묘사된다. 루마니아의 감독 라두 주드(Radu Jude)의 2015년작 'Aferim!'은 관객들을 19세기의 루마니아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은 '집시(Roma)'와 관련되어 있다. 코스탄딘은 가는 도중에 만나는 집시 무리를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과 같은, 어쩌면 짐승 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코스탄딘은 채찍을 휘두르며 집시들을 제압하며, 그들이 채굴한 사금도 갈취한다. '사금 채취'는 집시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한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귀족 계급과 수도원은 그런 집시들을 노예로 두면서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수탈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시란 벌레처럼 더럽고 하찮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가 집시처럼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길에서 만난 사제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토로한다. 코스탄딘과 사제가 공유하는 그런 차별적 인식은 유럽 사회가 가진 반유태주의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부자(父子)가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숲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19세기 루마니아인의 정신 세계를 반영한다. 코스탄딘은 길을 묻는 투르크의 관료에게 일부러 틀린 길을 알려준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왈라키아 공국의 사람으로서 그가 투르크인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근원적인 증오이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계급체계는 인정한다. 길 비키라고 행패부리는 귀족과 수행원들에게는 군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이웃 영주의 관료가 영토의 무단 침입을 문제 삼자 돈으로 구슬린다. 지배 계급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의 질서에 철저히 순응한다. 코스탄딘이 바라보는 세상은 흑백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지식 그대로 아들에게 가르친다. 존경해야할 사람과 증오해 마땅한 대상이 있고, 복종해야할 지배 계급과 마구 짓밟아도 되는 집시 노예들이 있다. 어리버리해 보이는 그의 아들은 스펀지처럼 아버지의 가르침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세대 간에 전수되는 경험과 지식은 온갖 편견과 증오, 비굴함과 우월감이 혼재되어 있다.

  자, 다시 코스탄딘의 여정으로 돌아간다. 그는 도망간 집시 노예 카르핀을 아들과 합심해 붙잡는다. 카르핀을 숨겨준 농민은 착해서 그를 숨겨준 것이 아니다. 마치 임자없는 물건 줍듯이 농민은 아주 어린 집시와 카르핀을 노예로 삼았다. 오랫동안 노예제를 유지해온 루마니아에서 집시들은 주요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카르핀을 잡으면서 어린 집시까지 빼앗은 코스탄딘은 여비를 위해 시골 장터에서 집시 아이를 팔아버린다. 아이를 사가려는 귀족은 가축 품평하듯 아이의 치아를 살펴본다. 라두 주드가 보여주는 19세기 초반의 루마니아는 그런 곳이다. 차꼬를 채워서 데리고 가는 노예 카르핀은 말 그대로 짐짝처럼 부려지며, 부자가 먹다남긴 음식 찌꺼기로 연명한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자연의 고요함과 광활함은 놀랍게도 인간 세계의 잔혹함과 기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 세계에 연민과 동정, 합리적 이성이란 것이 존재할까? 카르핀은 돌아오는 여정 내내 무죄를 호소한다. 잘못은 유혹한 영주의 부인에게 있으며, 자신을 영주에게 넘겨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죄없는 노예를 풀어주자는 아들의 말을 코스탄딘은 묵살한다. 그는 영주 부인의 과오를 곧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영주에게 카르핀을 넘긴다. 그는 투철한 직업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아들에게 가르친다. 그 여정의 끝에서 그가 아들과 함께 목격하게 되는 것은 분노한 영주의 무지막지한 처벌이다.

  "세상이란 데가 원래 그런 거야."

  처벌 장면에 충격을 받은 아들에게 코스탄딘은 그렇게 위로한다. 권력을 가진 자가 미쳐 날뛰는 것을 바라보야야 하는 세계, 법과 도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무지막지한 힘의 세계, 그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 굴종하고, 약한 이들은 짓밟는다. 영화의 마지막, 짧게 나오는 자막은 영화가 실제 역사적 기록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과연 오늘날 현대의 관객이 사는 세상은 영화 속 코스탄딘이 살았던 세계에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두 주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루는 근원적 지배 구조와 그것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세대의 이 루마니아 감독은 생생하고 통렬한 역사극을 통해 현재를 돌아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romaniajournal.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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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The Swimmer(1968)'를 방영한 적이 있다.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독특하고 기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아주 가끔씩,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버트 랭카스터가 수영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야외 수영장을 배회하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헐리우드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참 놀랍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프랭크 페리(Frank Perry)였다. 'Last Summer'는 그가 이반 헌터(Evan Hunter)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9년에 만든 영화이다. 1968년, 미국 영화에 새로운 등급 시스템이 도입된다. 'MPA(Motion Picture Association) film rating system'은 기존의 검열 제도인 'Hays Code'를 대체했다. 'Last Summer'는 새롭게 만들어진 등급 시스템에서 'X 등급(Rated X; 16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았는데, 이는 TV 방영은 물론 일반 상영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 등급이었다. 영화가 어떤 장면을 포함하고 있길래 그런 판정을 받았을까? 십대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여름을 그린 이 영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고 잊혀져 있었다.

  영화는 부유한 이들의 여름 별장지인 Fire Island의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다. 샌디(바바라 허쉬 분)는 해변에서 낚시 바늘에 목을 다친 갈매기를 발견한다. 마침 지나가던 피터(리처드 토마스 분)와 댄(브루스 데이비슨 분)이 샌디의 갈매기 치료를 돕는다. 피터와 댄은 매력적인 샌디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고, 샌디는 그들을 조종하며 군림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샌디가 갈매기를 끈으로 묶어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로다(캐서린 번즈 분)는 샌디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로다는 차츰 그 세 명과 가까워진다. 로다는 피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피터는 댄과 함께 샌디에게 매혹되어 있다. 제멋대로인 샌디는 로다에게도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려 한다. 샌디는 전화 데이트 서비스로 만나게 된 푸에르토리코 남자를 골탕먹이기 위한 미끼로 로다를 내세우고, 남자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맞도록 내버려 둔다. 로다는 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샌디는 그런 로다를 무시하며 비웃는다. 그리고 마침내 샌디의 사악하고 잔혹한 면모는 로다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몬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도발적인 비키니를 입고 나오는 샌디는 성적인 매력으로 피터와 댄을 굴복시킨다. 그 세 명은 마치 하나의 몸을 이루어 같은 사고를 하는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손을 쪼았다는 이유로 갈매기를 돌로 쳐서 죽여버리는 샌디의 행동은 이제부터 시작될 일탈의 신호탄 같다. 샌디의 어머니는 내연남과 어디론가 떠나서 별장은 비어있다. 그 빈 집은 부유하고 자유분방한 십대들의 방종의 공간이 된다.


  대마초 흡연과 성적인 일탈, 이것은 이 영화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와 기이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마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에서 무인도에 난파된 소년들이 야만성에 물들어가듯, 샌디의 비도덕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은 피터와 댄의 내면을 지배한다. 처음에 갈매기에서 시작했던 것이 사람으로 향한다. 야만의 3인조는 중년의 남자를 술 취하게 만들어 불량배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온다. 이 막 나가는 십대들에게 브레이크란 없다. 수줍고, 보수적이며, 도덕성을 지닌 로다는 샌디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샌디는 포식자들처럼 로다를 제압하고 지배력을 과시한다. 그렇게 샌디와 피터, 댄이 로다를 향해 드러내는 포식자의 야만성은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을 이룬다.

  이런 영화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화가 주는 정서적인 불편함과 충격의 파장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Last Summer'는 당시 히피 세대의 일그러진 부분을 조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내포한 계급적 논의 또한 무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에 바다가 보이는 멋진 별장에 머물며, 요트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유한 십대에게 금지된 것은 없다. 샌디의 저속하고 불온한 언사, 지배적인 성향, 그 모든 것은 샌디가 가진 계급적 특권 속에 포함되어 있다. 샌디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탈의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그것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상(로다)에 대한 폭력으로 확장된다. 영화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지배 계급의 잔혹성은 관객에게 지속적인 불안을 안겨준다.

  'Last Summer'는 영화의 35밀리 필름 프린트가 모두 소실되었다. 2001년에 호주 국립 영상물 아카이브에서 16밀리 프린트가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DVD 발매는 요원한 일이며, 오늘날의 관객들은 화질이 좋지 않은 VHS 영상으로 감상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잊혀지고 버려졌다. 프랭크 페리가 자신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비주류적 감수성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고, 그것이 그의 영화의 불운한 현재 상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세월의 우물 밑바닥에서 다시금 끌어올려질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시대적 정서, 아울러 197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 계층간의 갈등에 대한 예언적 상징성은 놀랍다. 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이 가진 포식자의 얼굴을 프랭크 페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포착한다.



*사진 출처: cine.nl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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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이사(お引越し)'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삼각형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세 명의 가족들을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록색의 이 독특한 모양의 식탁 가운데에는 13살 딸 렌코, 엄마와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뭔가 심드렁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엇나가는 대화를 이어가고, 딸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가족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길 기다리는 렌코에게 엄마는 아빠가 주고 간 이혼 서류를 보여준다. 그렇게 다정한 아빠가 이제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니, 렌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엄마 아빠가 따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렌코는 어떻게 해서든 아빠의 마음을 되돌려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렌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와 호수로의 가족 여행을 몰래 계획한 렌코, 렌코의 부모는 다시 합칠 수 있을까?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1993년작 '이사(お引越し, Moving)'는 부모의 결별을 마주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히코 타나카(ひこ・田中)가 199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렌코를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는 8200명이 넘는 오디션 지원자들을 제치고 발탁되었다.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게이샤로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는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에 큰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신인인 어린 소녀의 연기 지도가 소마이 신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닛카츠(日活) 영화사의 조감독 시절에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타바타 토모코를 렌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별거는 렌코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렌코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이 보여주는 5단계의 심리적 변화와도 비슷하다. 임종학 연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인 과정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로 정리했다. 렌코는 엄마가 건네준 이혼 서류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에게도 엄마가 아빠의 머리를 잘라주었다며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지어내 말한다(부정).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혼 가정의 급우 샐리는 렌코의 변화를 알아챈다. 아이들 사이에서 렌코는 거짓말장이가 되어버린다. 당차고 주목받는 아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힘든 렌코는 그 모든 원인을 부모의 탓으로 돌린다. 아빠에게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 엄마도, 딸인 자신을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아빠도 밉다(분노).

  렌코는 적극적으로 부모의 결합을 위해 애를 쓴다(타협). 욕실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소동을 겪은 뒤로 렌코의 부모는 렌코를 위해 자주 만나기로 한다. 렌코에게는 희망적인 변화이지만, 그것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렌코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통해 부모의 화해를 끌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비와 호수를 찾은 아빠는 자신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딸에게 일러준다. 렌코는 자신의 그 어떤 시도로도 부모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우울). 영화는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우울감에 빠진 렌코가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영화의 후반부에 길고, 다소 지루하게 배치한다. 렌코는 홀로 호수 근방과 산 속을 헤맨다. 마침 열리고 있는 마츠리의 불꽃놀이와 호수에 띄워진 용선(龍船)의 장대한 풍경을 보며 렌코의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삶의 변화에 열리기 시작한다.

  "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축하합니다)。"

  소마이 신지는 호수 위에 띄워진 불붙은 용선을 바라보며 과거의 렌코를 현재의 렌코가 끌어안는 것으로 소녀의 성장을 묘사한다. 렌코는 호수에서 몇 번이고 '축하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예기치 않게 주어진 상처를 견뎌낸 자신에게 렌코가 던지는 축복의 말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렌코는 헤어질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상황도,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며 엄마와 함께 살아야하는 자신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렌코와 엄마는 '숲속의 곰' 동요를 부른다. 훌쩍 자라버린 렌코에게 그 동요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지만, 렌코는 엄마 앞에서 모처럼 착한 딸을 '연기'한다. 엄마가 먼저 시작한 노래는 나중에 렌코의 선창을 엄마가 따라 부르게 된다. 렌코는 이제 엄마에게 마냥 기대고 바라보는 아이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초등학생인 렌코가 어느새 교복을 입은 중학생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웃고 있다. 정지된 화면으로 포착된 그 장면은 비로소 렌코의 작은 성장의 여정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준다.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약간씩 서로 다른 간사이 사투리를 구사한다. 교토 출신의 타바타 토모코가 쓰는 간사이 사투리는 투박하면서도 귀엽다. 렌코의 부모를 연기한 사쿠라다 준코와 나카이 키이치의 연기도 꽤 좋다. 영화는 아이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어른의 세계인 부부가 겪는 갈등과 어려움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한창 때의 나이인 53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올해 초, 일본에서는 그의 사후 20주기를 맞이해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영화 '이사'는 소마이 신지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연출 역량이 집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을 위한 내적 여정은 가슴 찡하면서도 흥미롭다.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으며 성장하게 된 렌코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어린 시절의 자아와 마주하고 화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출처: note.com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감독 소마이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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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워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쉽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 조카딸과 함께 사는 시골 노신사는 자신의 집을 독일군 장교의 숙소로 징발당한다. 뜻하지 않게 적과 동거하게 된 노인과 조카는 독일군 중위 베르너에게 한결같은 침묵으로 대한다. 그들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베르너는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가 있는 거실 벽난로에서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노인과 조카의 단단한 침묵에 어느새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점령군 장교가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며, 예술적인 소양을 지닌 교양인임을 알게 된다. 비록 말로 이루어지는 그 어떤 대화도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생겨난다.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의 데뷔작 '바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ea, 1949)'은 1942년에 출간된 작가 베르코스(Vercors)의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멜빌은 자신이 첫 장편으로 반전 문학 작품을 선택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그 어떤 거친 폭력이나 살상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노인과 조카의 내면 묘사와 독일군 장교의 혼잣말이 잔잔하게 펼쳐질 뿐이다. 멜빌은 소설의 그 단조로움과 고요함을 오로지 영상과 소리에 의지해서 풀어나간다. 영화의 서사 대부분이 노인의 집 거실 벽난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작가의 집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그 비좁은 거실 공간을 다채롭게 제시하고 활용한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교의 발소리, 그가 거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벽난로의 장작을 뒤적거리는 소리, 등장 인물들의 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영화의 느슨한 서사를 메꾼다. 오히려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된 영화 음악이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작곡을 전공했다는 베르너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애정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점령군이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의 우호적 결합을 촉진하는 매개자의 위치에 둔다. 그는 그것을 '결혼'이라는 상징적 은유로 표현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결혼, 하나의 아름다운 유럽. 베르너가 설파하는 이상은 식민의 역사를 지닌 우리 나라의 관객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내선일체(内鮮一体),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내세운 정책적 구호와 다를 것이 없다. 이 예의바른 독일군 장교는 노인과 조카딸에게 가진 인간적 호의, 소통에의 열망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호소한다.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를 빌어 자신을 '야수'의 외양이 아니라, 그가 가진 부드러운 내면의 덕성을 보아달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바램은 물에 풀린 물감처럼 노인과 조카딸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 예의바르고 예술적 교양으로 무장한 점령군 장교를 미워하는 것은 영화 속 노인과 조카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가 들려주는 바흐의 프렐류드 연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나라와 광기에 찬 독재자를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를 미워할 수는 없다. 저항의 의미로서의 침묵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베르너가 파리로 떠나있던 기간 동안 노인과 조카딸은 그의 귀환을 기다리게 된다. 노인은 그의 소식이 궁금해져서 사령부 건물에까지 가본다. 그는 이미 돌아와 있었지만, 노인의 집에 가지 않는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그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 소식을 듣는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더해, 그가 가진 전쟁에 대한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관점은 동료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베르너는 전쟁의 광기와 비인간성에 절망하고, 비로소 노인과 조카딸에게 했던 자신의 이야기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멜빌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을 넣어서 명백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베르너가 떠나는 날 아침, 노인은 자신이 책갈피에 끼워둔 종이를 베르너가 보게끔 놔둔다. '군인이 국가의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미덕이다'라는 문구는 독일군 장교에 대한 노인의 유일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별은 늘 그랬듯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 제목의 '바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노인의 침묵이 상징하는 강력한 항전의 의지를 거대한 바다에 비유한 것일까? 그러나 침묵의 바다 아래에서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요동치며 들끓는다.


  실제로 나치에 반대하는 이들과 반전주의자들은 원작 소설을 쓴 Jean Bruller(Vercors는 필명이다)가 나치에 우호적인 소설을 쓴 거 아니냐며 거부감과 비난을 표명했다. 그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원작 소설의 베르너는 매우 양심적이며, 도덕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런 인간적인 나치 장교에 대한 연민과 동정, 점령지 주민이 침략자에 대해 느끼는 열패감과 두려움, 적개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모호한 감정들... 전쟁은 눈에 드러나는 파괴와 잔학스런 범죄 뿐만이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한 여러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갈등을 포함한다. 피와 학살이 드러나지 않고, 포성이 들리지 않는 독특한 전쟁 영화 '바다의 침묵'을 통해 멜빌은 극한의 상황과 마주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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