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편지(The Letter, 194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6년,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은 말레이시아 여행을 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들을 모아 출간한다. '편지(The Letter)'는 바로 그 단편집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다. 그는 싱가포르의 한 변호사로부터 1911년에 있었던 악명높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석 광산 책임자의 아내가 관리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었다. 여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다. 서머싯 몸은 그 실화를 그대로 따왔다. 그가 한 것은 거기에 '편지'라는 소재를 추가한 것이다. 그 단편 소설은 인기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희곡으로 다시 썼다. 1929년에 헐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영화화되었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0년에 베티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충격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대 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저택에서 별안간 총소리가 이어진다. 총에 맞은 남자가 계단을 굴러 넘어지는데, 뒤따라 나온 여자는 남자가 쓰러진 뒤에도 총격을 가한다. 여자가 쏜 총알은 한 발이 아닌, 모두 여섯 발이었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 레슬리는 집사에게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라고 말한다. 레슬리는 체포되고, 남편 로버트는 부부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조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슬리는 자신을 범하려던 해먼드에게 맞서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한다. 그 주장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조이스에게 중국인 비서 옹은 레슬리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귀뜸한다. 죽은 해먼드의 부인이 레슬리가 해먼드에게 와달라고 쓴 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을 건네주는 댓가는 만 달러라는 것. 조이스는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획득할 돈을 타내고, 조이스와 동행한 레슬리는 해먼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낸다. 과연 그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며, 레슬리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풀려날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은 여행하기를 무척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는 여행지에서 들은 이야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 2006)'의 원작 소설도 그런 여행의 산물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체류를 통해 32편의 단편 소설을 썼고, 그것을 따로 묶어서 단편집으로 펴냈다. 그만큼 말레이는 그에게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 묘사한 말레이의 모습은 현지인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구습과 전근대성의 상징으로서의 말레이에 대한 묘사는 현지인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영화 '편지'에서도 그런 면모는 선명하게 부각된다.

  레슬리의 현지인 집사는 살인이 있던 날 밤 사라진다. 사라진 그는 해먼드 부인의 수하가 되어 복수를 돕는다. 부인의 외모는 현지 말레이인들과 좀 다른데, 영화 속에서 중국인과 유럽인의 혼혈로 나온다. 게일 손더버그가 연기한 해먼드 부인의 외양은 중국풍의 옷에 치렁치렁한 장신구들, 냉혹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다. 레슬리는 그런 해먼드 부인의 모습을 끔찍하다고 묘사한다. 관객들에게도 해먼드 부인은 기이한 이국성과 비호감의 이미지로 비춰진다. 현지인에 대한 그런 뒤틀린 이미지는 처음으로 편지의 존재를 드러내는 조이스의 비서 옹에게서 더욱 강화된다. 영어를 구사하고, 멀끔한 양장을 입은 옹은 주도면밀하게 편지 거래를 성사시킨다. 편지의 사본으로 조이스에게 레슬리에 대한 의혹과 불안을 심어주고, 결국 레슬리 남편 로버트의 재산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만 달러라는 큰 돈으로 편지를 사게 만든다. 항상 웃는 표정의, 성실한 비서는 교활하고 파렴치한 거간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편지'에서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영화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이국성과 식민지성이다. 레슬리의 재판 장면에서 재판부와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들이며, 그들은 결국 레슬리의 정당방위를 영웅적인 행위로 보고 무죄 판결을 내린다. 지배계층으로서의 피식민지인들의 비윤리성은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레슬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이스는 변호사로서의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증인 매수에 나선다. 그가 레슬리의 남편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입수하는 데에 쓴 돈 1만 달러는 로버트의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나온 돈이다. 식민지의 자원에서 수탈한 이윤은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범죄를 은폐하는 데에 사용된다.

  원작 소설에서 해먼드의 여자는 'wife'가 아닌 'mistress(情婦)'로 나온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유라시아 혼혈이 아닌 '중국인' 여성, 그것도 연상의 나이든 여자로 지칭된다. 결국 해먼드 부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 속 레슬리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레슬리가 무죄방면되어 자신의 화려한 생일파티를 여는 장면에서 끝난다. 왜 원작과 다른 그런 각색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당시 미국 영화의 검열 제도(The Hays Cord) 때문이었다.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적용된 스튜디오의 자체 검열 제도는 '편지'에도 적용되었다.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은 핵심 사항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여성'은 '유라시아 여성'으로 바뀌었다. 또한 내연녀의 등장도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등장했다. 레슬리의 죽음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불륜에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서머싯 몸은 뛰어난 작가였으나, 제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그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쓴 '편지'는 기묘한 이국성과 함께 식민지주의가 날것으로 숨쉬고 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그런 원작을 절묘하게 가공한 필름 느와르를 보여준다. 베티 데이비스는 고혹적인 외모에 사악한 열정을 지닌 레슬리를 잘 소화해냈다. 엄격한 검열이 없었다고 해도 '편지'의 결말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레슬리는 자신이 죽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남편에게 고백한다. 그런 여자를 사랑해서 버리지 못하는 남편에게도 고통의 시간은 이어질 것이다. 실제의 치정 사건은 그렇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심리물로 재탄생했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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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원래는 40분 정도로 찍으려 했던 대본은 1시간 분량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조사 자료들이 쌓여갔고, 영화 촬영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찍어 놓은 필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폐기하기도 했다. 수용소 장교 숙소에 머물면서 촬영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과 정면 충돌한다. 마흔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그의 동료 감독 비톨트 레시에비츠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영화를 최종 편집하고 완성한다. 안제이 뭉크(Andrzej Munk) 감독의 유고작 '승객(Pasażerka, Passenger)'은 그렇게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리자는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중간 기착지 항구에서 자신이 예전에 알던 여자와 흡사한 외모의 승객이 타는 것을 보고 리자는 놀라서 얼어붙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감독관으로 복무했던 리자는 수감자 마르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리자는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고통스런 과거로의 여행은 다음 기착지에서 중단된다. 마르타와 닮은 외모의 승객이 내리고, 리자는 비로소 안도한다.

  폴란드의 작가 조피아 포즈미스는 1959년에 라디오 방송 드라마 대본으로 '45번 칸의 승객(Passenger from Cabin Number 45)'을 썼다. 포즈미스는 독일에 항거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 포즈미스가 탔던 칸의 번호가 45번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에 뭉크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63년에 영화가 개봉된 것과는 별개로 원작자 포즈미스는 1962년에 이전의 라디오 대본에 이야기를 추가해 책으로 펴냈다. 소설을 바탕으로 1968년에는 소련에서 오페라 작품이 만들어졌다. 원작 텍스트의 다양한 변용 가운데 영화 '승객'이야말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낸 유명한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현실의 리자가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다. 현실 부분은 영화의 스틸컷 사진이, 과거의 회상은 필름 촬영분으로 되어 있고, 리자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voice-over)로 깔린다. 리자는 남편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회상에서 과거의 과오를 최대한으로 합리화한다. 마르타가 애인 타데우스와 만나게끔 주선해 주고,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미화한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회상 장면에서 리자는 자신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마르타를 괴롭히고, 애인과의 만남도 금지시켜 버린다. 아무것도 모른채 가스실로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거나, 경비견들이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에도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마르타는 방관자로서의 리자를 비아냥거리면서 리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다. 둘 사이의 권력 관계는 겉으로는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타는 리자와의 심리적 대결에서 결코 무기력하게 밀리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 속의 가해자-피해자 구도와는 달리, '승객'은 학살의 방관자 내지는 동조자로서의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리자는 정말로 사악한 인물인가? 마르타에게 보여주는 리자의 행동들은 양가적(兩價的)이다. 유대인들의 소지품 분류 창고를 담당하는 리자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 속의 아기 울음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감독관은 아기를 찾아내어 죽이려하지만, 리자는 마르타가 유모차를 확인하게 하고 인형을 건네는 마르타를 추궁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마르타를 제외시켜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관객들은 리자의 독백과 재현된 과거의 기억 속에서 과연 리자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진실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리자가 목격한 유람선의 여승객이 진짜 마르타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관객들은 피해자로서의 마르타의 증언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리자와 과거 수용소에서의 일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에 다양하게 접혀진 이야기들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안제이 뭉크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그런 것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영화 속 리자의 기억과 함께, 관객들은 뭉크 감독이 의도한 원래의 이야기도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메꾸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동시대의 알렝 레네가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Night And Fog, 1956)'로 학살의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었다면, 뭉크는 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기억과 그 이후의 삶을 다룬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은 왜곡되고 흐려지며, 학살에 개입된 여러 입장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도덕적 오점을 덜어내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가역성과 모호함을 드러내는 예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에 있었던, 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아기'에 대한 것이다. 빠르게 지나간 유모차는 화면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마르타는 인형을 가져온다. 리자와 동료 감독관을 비롯해, 관객들도 분명히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과연 아기는 거기에 있었는가? 마르타가 아기를 숨기고 인형을 잽싸게 찾아 건넨 것인가? 처음부터 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영화 속에서 아기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더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수용소 생존자로서 원작자 조피아 포즈미스를 지칭했던 제목 '승객'은 뭉크의 영화에서는 수용소 감독관 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피해자의 학살의 기억은 방관자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편집되어서 구술된다. 불완전한 리자의 기억 속에서도 참혹한 수용소의 모습과 그곳을 채운 죽음의 자취는 생생하게 재현된다. 영화 '승객'을 통해 안제이 뭉크는 역사적 비극과 그것을 조망하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mini-cinema.org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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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샨 마카베예프(Dušan Makavejev) 감독의 'WR: 유기체의 신비(W.R.-Misterije organizma, 1971)'를 영화사 교과서에서 글로만 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희귀한 예술 영화 자료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책 속에서 영화 제목을 읽고 마치 신화 속의 황금 양털을 상상하듯 그렇게 생각만 했었다. 이제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도, 영화를 보려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저주받은 걸작', 시놉시스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영화, 아마도 'WR: 유기체의 신비'는 영화 보기의 전위적 모험을 하려는 사람에게 적합한지도 모른다. 그럼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데뷔작은 어떨까?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는 의외로 점잖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혹세무민의 상징이었던 수도승 라스푸틴을 연상케 하는 최면술사의 등장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최면술' 공연을 하고 있는 참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주된 플롯이 광산 마을 보르(Bor)에 파견된 발전기 엔지니어 루딘스키와 젊은 여성 라이카의 연애담이라면, 하위 플롯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공장 노동자 바르뷸로빅과 아내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거기에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된 공장의 모습과 노동자들의 일상, 황량하고 건조한 광산 마을 일대의 풍경, 마을을 방문한 서커스 장면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 있다. 이런 서사의 불균일성은 관객에게 낯설음과 불편함을 선사하지만, 소화못할 정도는 아니다.

  1960년대를 휩쓸었던 새로운 영화 사조 누벨 바그(Nouvelle Vague)는 동유럽 국가 유고슬라비아에도 도착했고, 그것은 'Black Wave'로 탄생했다. 개인주의적인 경향, 정부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지닌 영화 창작의 흐름에 두샨 마카베예프도 동참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를 통해 마카베예프는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제시한다.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최면술사의 공연 장면을 비롯해, 마을 주변부의 황량한 풍경을 촬영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이는 갈라진 진흙길을 걷는 연인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선전 도구로 제작된 노동자의 커다란 손들이 그려진 공장 벽의 걸개 그림과 제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서는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이 보인다. 마카베예프는 거기에 통속적인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촌스럽다고 생각될 정도의 극적인 영화 음악이 등장할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광산 마을에 발전기 설비 제작을 위해 잠시 파견된 중년의 엔지니어 루딘스키는 동네 이발소의 매력적인 아가씨 라이카의 구애를 받는다. 루딘스키는 처음에는 그 접근을 거부하지만, 결국 라이카와 연인 사이가 된다. 한편 공장의 일꾼 바르뷸로빅은 음주와 불륜 문제로 아내에게 고통을 준다. 루딘스키가 이끄는 설비팀은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치고, 정부에서는 그 공로로 훈장을 수여하고 축하 음악회까지 열어준다. 라이카는 곧 떠날 루딘스키를 버리고, 트럭 운전 기사 보리스와 사귄다. 루딘스키는 라이카에게 분노하지만, 늙은 남자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런 줄거리로 러닝 타임 81분을 어떻게 채우는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파편화된 내러티브들로 매우 산만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마카베예프와 영화 제작팀은 영화 제작 전에 광산 마을에 머물면서 다양한 주민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취재했다. 마카베예프는 거칠고 팍팍한 하층 노동자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내기 위해 국가의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국가는 계속적인 프로파간다로 노동자를 산업 역군으로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음주와 폭력, 태업과 절도(공장에서 철근을 훔쳐내는 장면이 나온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고급 엔지니어 루딘스키의 노동은 국가의 인정을 받고 치하의 대상이 된다. 그의 훈장 수여식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는 기묘한 이질성을 풍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는 전 인류의 화합과 단결을 촉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외치는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엄연히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마카예프가 영화 속에서 등장시킨 최면술사와 서커스 공연은 그런 현실로부터 노동자들을 차폐시키고 사회주의의 환상 속에 가두는 국가 권력의 기만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말로 '남자는 새가 아니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Man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번역한 명백한 오역이다. 영화에서 설비 작업 도중 공중에 걸린 밧줄 사다리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인부를 보고 루딘스키가 소리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은 새가 아니라구!' 루딘스키의 말은 마치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강제하는 명령처럼 들린다. 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지상에서의 노동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땅에 매인 노동자의 삶에서 탈출과 비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카베예프는 그런 현실에서 성 정치학을 반영한 영화로 새로운 출구를 꿈꾸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는 마카베예프의 첫 영화적 비상(飛翔)으로 이후에 이어질 그의 영화 여정에 대한 여러 단서들이 내포되어 있다. 
  


*사진 출처: janusfilm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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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가 있다면 아마도 '자동차'일 것이다. 몬티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Two-Lane Blacktop, 1971)', 조지 루카스의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에서 차는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시절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그것이 미국인들에게 자유와 정체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에도 차가 나온다. 경찰차 박람회장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기동순찰대 차량이 등장한다. 그뿐인가? 경찰을 인질로 삼은 납치범들을 취재하기 위한 방송용 차량,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의 차도 있다. 스필버그는 아예 중고차 판매장을 불꽃튀는 총격전의 장소로 선택했다. 이 영화에는 차가 너무 많이 나온다. 주인공이 면회하러 온 동료 죄수 부모의 고물차를 타고 감옥에서 도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의 죽음까지, 영화는 차에서 시작해 차에서 끝난다.   

  절도 혐의로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루(골디 혼 분)는 어린 아들을 아동보호국에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출소를 4개월 앞둔 남편 클로비스(윌리엄 애서튼 분)를 찾아가 아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며 탈옥을 부추긴다. 차를 탈취해 경관을 인질로 잡고, 아들이 있는 슈가랜드로 향하는 이 어중띤 납치범 부부는 곧 경찰과 언론의 추적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마일드 버전 같은 납치범 부부와 인질 슬라이드 경관(마이클 삭스 분)은 마음을 터놓는 친구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경찰 추적팀을 이끄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태너 반장(벤 존슨 분)은 어떻게든 인명 피해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어설픈 납치범 부부에게 파국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루 역의 골디 혼은 영화 내내 안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버적거리는 소리를 낸다. 스물 일곱 살 초짜 감독 스필버그가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애를 먹었다는 티가 역력히 난다.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두각을 보여주었던 골디 혼에게 이 영화는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골디 혼은 몸부림을 쳐가며 자신의 역을 해낸다. 4개월만 참으면 풀려날 남편을 꼬드겨 탈주범으로 만드는 루의 무모함과 충동적인 기질은 사악하게까지 보인다. 이 철없는 여자는 아이를 되찾아야 한다는 모성애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이기적이며 분별력이 없는 자기애(自己愛)와 다를 바 없다. 도주 행각 중에도 골드 스탬프(Texas Gold Stamps, 텍사스 지역에서 발행되던 일종의 상업적 할인 쿠폰)를 악착같이 그러모으는 것이며, 외모 치장을 위해 헤어스프레이와 립스틱을 사는 모습은 루의 철없고 정신 나간 모습을 부각시킨다. 이 여자는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아들이 입양된 집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저격수들이다. 낌새를 눈치챈 슬라이드는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리지만, 루는 클로비스에게 아들을 되찾아 오라고 성질을 피운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총에 맞아 죽는다.

  1969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 속의 아내 일라 페(Illa Fae)는 남편의 도주를 부추기지 않았다. 친정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가던 부부는 경찰의 예기치 않은 검문에 당황해서 경찰을 인질로 잡고 추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남자는 아이들이 있는 여자의 부모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살되었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슈가랜드 특급'은 실화의 많은 부분을 변형시키고 왜곡했다. 언론의 광적인 보도 행태, 범죄자를 미화하며 영웅과 동일시하는 군중 심리, 공권력을 대신해 자신들의 손으로 탈주범을 처단하겠다는 자경단의 광기, 그 모든 것들이 사건에 덧입혀졌다. 철저히 스필버그의 상업적인 감각으로 선별된 그런 장식 쪼가리들은 정교하게 구현된 차량 스턴트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에 문제의 발단이 된 영화 속 여성 루에게 비난과 책임을 몰아넣는 오명도 씌운다.

  루가 보여주는 즉흥성, 무분별함, 비도덕성과 대비되는 캐릭터는 경찰 추격팀을 이끄는 태너 반장이다. 주로 서부극에서 연기한 벤 존슨이 보여주는 무게감 있고 강단 있는 18년 경력의 경찰 태너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재직 중에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그는 루와 클로비스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보여주는 직업적 윤리와 강직함, 합리적인 태도, 온정과 연민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미국이 지향하는 시민으로서의 이상을 보여준다. 그는 방향을 잃은 납치범들의 멘토에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도주 중인 루에게 경찰은 루의 아버지를 데려가 무전으로 회유 방송을 하게 한다. 말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너무나 늙은 부친은 딸을 향해 무전 방송을 하지만, 치킨 사러 나간 딸은 듣지 못하고 차에 있던 슬라이드가 듣는다. 수갑을 찬 채로 구금 중이던 그는 돌아온 루에게 무전기를 꺼달라고 말한다. 더이상 아버지, 국가 권력으로 대변되는 목소리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은 1970년대의 미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반복되는 석유 파동, 달러화의 약세 속에서 이어진 경제 침체와 더불어 포드와 카터로 이어지는 정권은 유약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점점 보수 쪽으로 기운다. 허약해진 미국을 다시 되살릴 정치 권력,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레이건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그의 선거 문구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은 그러한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분출된 보수의 목소리였다.

  영화의 마지막, 태너는 클로비스의 죽음을 확인하고 허리춤에서 피범벅이 된 권총을 빼낸다. 그 총은 클로비스가 슬라이드에게 뺏은 총이었다. 피를 닦아 낸 총을 슬라이드에게 건네주는 태너는 납치범들에게 동화된 경관에게 다시금 직업적 의무와 윤리를 일깨운다. 영화 초반부에 잡범을 검거해서 순찰차에 태우고 심문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듯 슬라이드는 매우 깐깐하고 직업 의식이 투철한 경찰이다. 그런 슬라이드에게 태너는 권위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대선배, 미국의 아버지로서 비춰진다. 그가 대변하는 모범적 부성은 미국의 보수적 가치와 정확히 부합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필버그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주축이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톰 행크스가 연기한 존 밀러 대위를 떠올려 보라. 그가 보여준 도덕성과 인간성은 라이언 일병에게 생의 귀감이 된다. 완벽한 부성에 대한 열망,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가부장의 서사, 이것은 '우주 전쟁(2005)'에서도 재현된다. 여기에서 톰 크루즈는 외계인에 맞서 딸을 지켜낸다. 이 영화 속 아버지 레이는 생활력이 없어서 이혼당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딸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사히 구해낸 딸을 아내에게 데려다 주고, 그는 집 밖에 서있다. 비록 딸을 생환시켰음에도, 그는 그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혔고 그런 하자 있는 부성은 집으로 귀환할 수 없다. 그것은 존 포드의 '수색자(1956)'의 결말에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존 웨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폴린 카엘은 이 영화를 일컫어 '영화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고 극찬했다. 나는 거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well-made film'이 좋은 영화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슈가랜드 특급'은 영화 속 황량한 텍사스 도로처럼 텅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1970년대 미국의 내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스필버그의 이 영화에는 깊이있는 성찰 대신에 철저히 상업적인 마인드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1974년, 미국은 이제 자신들의 영화 산업적 역량을 극대화시킬 감독을 하나 얻은 참이었다. 번지르르한, 그렇지만 그 속은 공허한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에는 그런 양면성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bostonhass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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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쓰면, 읽을 사람은 있어?"

  안데르스의 여자 친구가 그렇게 묻는다. 여자 친구 엘지는 이웃에 산다. 허름한 빈민가 공동 주택에서 사는 안데르스에게는 알콜 중독자 아빠, 세탁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엄마가 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그는 틈만 나면 글을 쓴다. 책상도 없는 그는 식탁을 창가로 끌어다 서재를 대신해 거기에서 글을 쓴다. 안데르스에게는 오직 글만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기댈 수 있는 희망의 빛이다. 쓴 글을 출판사들에 보내고 답신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인 그에게 어느 날, 스톡홀름의 출판사에서 답장이 날아든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으로 잘 알려진 보 비더버그 감독의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Kvarteret Korpen, Raven's End, 1963)은 하층민 청년의 자아 찾기를 그린다. 흑백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1963년에 제작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역시 같은 해 만든 첫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토미 베르그렌이 안데르스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은 종종 감독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된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보 비더버그는 그에 대해 부인했다. 오히려 안데르스 캐릭터의 유사성은 그 역을 연기한 토미 베르그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층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다. 자신의 삶과 비슷한 배역이어서 그랬을까? 베르그렌은 신인이었음에도 아주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은 1936년의 스웨덴의 말뫼,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다. 전단지 돌리는 일이라도 하라고 아내는 다그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이 가족은 세탁부로 일하는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먹고 살아갈 뿐이다. 안데르스는 자신이 잘 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글쓰기에 몰두한다. 축구 선수인 그의 절친한 친구 식스텐은 출세해서 파리의 매춘부를 만나는 것이 꿈이지만,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고 싶다. 변함없는 지긋지긋한 일상, 공동 주택 앞의 공터에는 선거 유세 방송으로 시끄럽다. 출판사에서 날아온 답장에 잔뜩 기대를 걸고 스톡홀름을 방문했지만 뜨뜻미지근한 답변에 안데르스는 실망한다. 글쓰기도 시들해지던 안데르스에게 여자 친구 엘지는 임신 소식을 알린다. 안데르스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갈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이 괴로운 청년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서 무슨 쓸모있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온 무기력하고 한심한 가장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

  "난 가라앉고 있어. 삶을 견디기 위해 잠수종(潜水鐘, diving bell)에 들어가는 거야. 늘 그래왔다구."

  안데르스는 비좁은 집도, 부모도, 여자 친구도 넌더리가 난다. 마음 둘 데 없는 불운한 청춘은 괴롭기만 하다. 안데르스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의 스웨덴의 상황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전세계로 확장되었고, 스웨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보 비더버그는 이 영화에서 선거와 정치를 비중있게 다룬다. 영화 초반부에 히틀러의 연설 방송이 들린다. 스웨덴 선거에서 나치 당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파 정당이었던 농민당은 히틀러의 이념과 노선에 경도되어 있었다. 1932년의 선거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좌파 정당 사민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확실한 우세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1936년의 선거는 사민당과 스웨덴의 운명을 가르는 선거이기도 했다. 안데르스가 엄마에게 히틀러 추종자가 의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혼란의 시대 속, 방황하는 청춘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안데르스를 비롯해 여자 친구 엘지, 식스텐에게 현실은 출구없는 복도 같다. 빈곤에 허덕이면서 그저 삶을 견딜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술에 절어서 인생을 회피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은 잠수종의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처럼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 진창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무겁고 암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에 쓰이는 음악은 매우 경쾌하고 아름답다. '엘비라 마디간'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썼던 비더버그의 음악적 안목은 이 영화에서부터인지 모른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인 주세페 토렐리(Giuseppe Torelli)의 '트럼펫 협주곡 D장조'가 주요한 장면에서 흐르는데, 이 밝은 곡은 영화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었을까? 영화는 안데르스의 청춘에서 멈춘다. 나는 그가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응시하는 사람, 인생을 견디기 위해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 작가란 그런 사람이다. 매력적인 서사와 동적이고 감각적인 촬영이 돋보이는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1995년에 스웨덴 관객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스웨덴 영화였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서운했을까? 그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영화 속 주인공 안데르스와 함께 보 비더버그를 영화 작가로 탄생시킨 영화였다.



*사진 출처: avxhm.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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