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db를 둘러보다가 재미있는 코너가 눈길을 끌었다. 1969년도 영화 가운데 당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작품을 투표해달라는 코너였다. 투표 목록에 올라온 영화들 가운데, 아주 낯선 영화가 눈길을 끌었다. '다이아몬드 팔(Brilliantovaya ruka, The Diamond Arm)'. 찾아보니 구소련 시대 영화였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 영화를 찾아서 본 것이 꽤나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니드 가이다이(Leonid Gaidai) 감독은 구소련 시절에 코미디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이 영화 '다이아몬드 팔'은 러시아 영화 역사상 기록적인 흥행 기록을 가지고 있다. 흥행 수익이 오늘날로 환산하면 영화 '타이타닉(1997)'의 그것과 견줄 정도라고 하니 그야말로 소련 영화로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의 영화였길래 그토록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국영 어업 연구소 직원인 세미욘(유리 니쿨린 분)은 터키로 짧은 크루즈 여행을 떠난다. 여행팀에는 지하세계를 주름잡는 '보스'의 부하 게샤(안드레이 미로노프 분)가 있는데, 세미욘과 게샤는 서로 친해진다. 게샤는 터키에 가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비싼 보석과 금을 밀수하기 위한 것. 터키에서 조직원과 접선하려는 게샤의 계획은 틀어지고, 세미욘을 게샤로 착각한 터키의 조직원은 세미욘에게 밀수 보석을 건넨다. 그들은 세미욘의 팔을 부러뜨린 후, 석고 깁스에 보석을 숨긴다. 얼떨결에 밀수꾼이 된 세미욘. 게샤는 자신의 동료 롤리크와 함께 세미욘에게 접근해 보석을 되찾으려고 하는데, 세미욘은 번번이 그들의 시도를 무산시킨다. 세미욘의 다이아몬드 팔 속에 감춰진 보석들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이 영화는 매우 흥겹다. 주연 배우 유리 니쿨린과 안드레이 미로노프는 영화 속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데, 아주 잘 부른다. 그 시절 소련의 영화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춤과 노래 실력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 세미욘 역의 유리 니쿨린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데, 영화 '핑크 팬더(1963)'의 배우 피터 셀러스 특유의 무표정 연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니쿨린은 서커스 단원으로서의 경력도 가지고 있어서인지 몸놀림이 매우 유연하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주된 동력은 슬랩스틱이다. 세미욘에게 접근해서 보석을 되찾으려는 게샤와 롤리크, 두 사람은 마치 덤 앤 더머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연발한다. 번번히 실패하는 그들의 시도들은 무성 영화 시절의 정교하고 순수한 슬랩스틱으로 재현된다.

  '다이아몬드 팔'은 주연 배우들의 노래, 슬랩스틱 연기에 더해 나름의 잘 짜여진 서사도 갖고 있다. 세미욘은 경찰에 정보를 주고, 경찰은 세미욘을 미끼로 지하 밀수 조직의 보스를 잡아들이려고 한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 세미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아내와 아파트 자치위원들의 추적, 이에 맞서 지하 세계 보스는 세미욘에게 미인계로 접근하려고 한다. 그들이 함께 펼치는 포복절도의 합동 공연은 영화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이미 50년 전의, 그리고 다른 문화권의 유머 코드를 갖고 있음에도 이 영화는 확실한 웃음을 선사한다. 누군가 이 영화를 두고 쓴 평에 '시간의 힘을 견뎌낸 영화'라는 표현을 했는데, 정말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 팔'속에 보이는 구소련의 일상 풍경들은 무척 화사하고 밝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영화 속의 풍요롭고 안정된 체제의 모습은 결코 연출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관에서 이 유쾌한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소련 관객들은 나름의 삶의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이후 1970년대의 경제 침체기를 겪게 된다. 구소련 시절에 이 영화가 만들어낸 기록적인 흥행은 좋았던 시대의 끝자락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 세미욘이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서 보여준 여유로운 미소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1969년의 구소련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사진 출처: allofcinema.com 주연 배우 안드레이 미로노프와 유리 니쿨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자는 소를 그 무엇보다 애지중지했다. 소를 씻기는 일이며, 소가 여물 먹는 것을 보는 일, 소와 함께 하는 그의 일상은 무척 행복했다. 남자가 키우는 암소는 새끼까지 가져서 살림밑천도 늘어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하루 바깥 일을 보고 돌아왔더니, 소가 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의 소가 도망갔다고 했다. 남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상심이 너무도 큰 나머지, 남자는 소 우리에 머물며 식음을 전폐한다. 그러다 소 울음 소리를 내면서 여물까지 먹기 시작한다. 걱정이 되어서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산'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소'라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본 이야기 같다.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 아닌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어느 날 벌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리우스 메흐르지(Dariush Mehrjui) 감독의 1969년작 '소(The Cow)'는 아끼던 소를 잃고 미쳐버려서 자신이 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문명 세계와 단절된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시작은 마을의 바보를 마구 때리고 놀리는 장면에서부터이다. 바보라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온갖 비웃음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데, 마을 사람들 가운데 동정과 연민을 보이는 이는 별로 없다. 이런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불한당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을을 수시로 침입해서 가축들을 훔쳐가는 도적질을 한다. 하산은 자신의 소가 도망갔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에 소가 있다고 믿으며, 그 소를 훔치려는 도적놈들을 막으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낸다. 그러나 사실 소는 하산이 집을 비운 사이에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었고, 마을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하산을 염려해서 우물가에 묻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하산은 미쳐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골람 후세인 사에디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작가이다.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출생한 그는 고향땅이 이란에 편입되면서 어쩔 수 없이 이란 사람이 되었다. 정신과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맑시스트였다. 이 영화가 서구의 평론가들에게 눈길을 끈 것은 하산이 소가 되었다고 믿고 소처럼 행동하는 부분이었다. 이를 맑스의 소외 이론을 적용해서 인간이 주변 여건에 의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사에디의 지적 배경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러나 영화 '소'를 단순히 인간 소외의 현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다층성을 외면하는 일이다.

  '소'를 만든 감독 다리우스 메흐르지는 이란의 중산층 출신으로 미국 UCLA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그런 그가 고국에 돌아와서 바라본 이란 사람들은 고립되고 낙후된, 종교적 신념과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뭉쳐있었다. 영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모든 안좋은 일들을 마을 바깥에 존재하는 도적들 때문이라고 여긴다. 늘 도적들 탓만 했던 그들의 문제 해결 능력은 소가 되었다고 믿는 하산의 광기를 대하는 데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치렁치렁한 검은 차도르를 입은 마을 여자들은 신의 노여움 탓이라며 자숙하며 회개하는 종교의식을 행한다. 그것은 실제로 메흐르지와 사에디가 이란의 시골마을을 탐방하는 과정에서 목격한 일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의 굿에 해당하는 그런 종교의식은 마치 민속지학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의식으로도 하산의 광기는 낫지 않는다. 마을 촌장은 하산을 근처 도시의 병원에 데려가기로 하는데, 하산이 미쳐 날뛰자 온몸을 줄로 묶어서 소처럼 끌고 간다.

  "가, 가라구, 이 짐승아!"

  하산이 끌려가는 것을 거부하자, 촌장은 채찍질을 하며 그렇게 외친다. 마을의 바보에게 행해졌던 잔인함이 이제는 소가 되어버린 하산에게 똑깥이 반복된다. 이해할 수 없고, 걸리적 거리는 골칫덩이를 대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산은 스스로 진흙탕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다. 인간으로도, 소로도, 그는 마을 사람들과 같이 살 수 없었다. 하산의 비극은 훗날 이란 혁명으로 신정국가가 되어버린 이란의 폐쇄성과도 맞닿아 있다.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 종교적 신념을 우선에 두고 인간 본연의 본성을 잃어가게 만드는 이란 사회의 모습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이란 혁명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극찬을 받으면서 이란 영화 산업의 존속을 보장하게 만들었다. 다리우스 메흐르지는 1980년대 초반에 이란 영화 산업의 선봉에 서면서 '어용 영화인'이란 비판까지 받기도 했다.

  영화 '소'는 서구식 영화 교육을 받은 영화인이 바라본 이란의 현실을 그려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사에디의 독창적 발상과 더불어 이 영화는 음악도 매력적이다. 토착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표현하는데,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호르모즈 파르핫도 UCLA에서 공부한 음악가였다. 당시 이란의 예술 엘리트들이 모여서 만든 이 영화는 보편성과 이국성이 공존한다. 영화는 소에 미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본성의 소외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이란 사회의 어두움과 혼란까지 담아내고 있다.           



*사진 출처: highonfilm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 '엘머 갠트리(Elmer Gantry, 1960)'의 주연을 맡은 버트 랭커스터는 영화가 개봉된 후,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친구는 영화 속 랭커스터가 연기한 엘머 갠트리가 랭커스터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썼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기꾼'이다. 엄청난 입담을 자랑하는 세일즈맨 엘머는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가전제품을 팔아먹으며 살아간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부흥회 전단지가 이 사기꾼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전단지에는 어여쁜 부흥회 전도사 샤론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샤론 팔코너(진 시몬스 분)도 떠돌이 삶을 산다는 점에서는 남자와 마찬가지. 작은 도시들을 전전하며 천막 부흥회로 헌금을 끌어모은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파는 품목의 차이이다. 엘머는 물건을, 샤론은 종교를 판다. 엘머는 샤론의 부흥회에 합류해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해 보인다. 엘머는 샤론에게 큰 도시 제니스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한다고 설득하고, 샤론의 부흥회 팀은 제니스로 간다. 과연 엘머와 샤론의 천막 부흥회는 제니스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엘머 갠트리'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가 1927년에 쓴 동명의 소설이다.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의 감독 리처드 브룩스는 원작의 내용을 상당 부분 바꾸었다. 무엇보다 '엘머 갠트리'는 기독교에 비판적인 색채를 띄고 있는 내용이라서, 제작사로서도 민감하고 골치아픈 부분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싱클레어 루이스는 그 당시에 불붙듯이 일어난 기독교 영성 운동을 취재하고 이 소설을 썼다. 이른바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에서 유래된 초교파적 성령운동이다. 미국에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 종교적 움직임은 20세기에 들어서 개신교 내부의 쇄신과 교파의 분화를 촉진시켰다(이에 대해 참고할만한 책은 하버드대 종교학과 교수 하비 콕스의 '영성 음악 여성'이다. 정말 좋은 책인데 절판된 점이 아쉽다). 그 시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사기꾼 엘머 갠트리가 겪은 어느 천막 부흥회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신문기자 짐 레퍼츠는 의심과 비판의 눈초리로 엘머와 샤론을 바라보며 부흥회를 취재한다. 짐은 샤론에게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설교를 하고 신의 이름을 파느냐고 묻는다. 짐이 보기에 샤론의 부흥회는 사람들의 죄의식과 불안함을 부추겨서 돈을 뜯어내는 사기극과 다름없다. 그의 확신을 분명하게 만드는 엘머의 허황되고 도발적인 연설은 마치 서커스 공연(버트 랭커스터는 이십대에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처럼 보인다. 버트 랭커스터는 그야말로 신들린듯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그의 입담과 퍼포먼스는 정말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다. 영화를 내내 지배하는 그의 존재감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이 사기꾼에게 종교적 열정으로만 살아온 샤론도 빠져든다. 둘은 사랑하게 되지만, 엘머의 과거가 그들의 장밋빛 미래에 그늘을 드리운다.

  '엘머 갠트리'가 보여주는 종교는 사기꾼들의 수작이 판치는 공허하고 추악한 복마전이다. 신에 대한 순수한 믿음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샤론은 자신의 진짜 성전을 짓기 위해 떠돌이 전도사 생활을 하며 돈을 모았노라고 엘머에게 털어놓는다. 영화는 번지르르한 말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변질된 설교가 사람들을 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미국에서 TV와 대중 설교로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었던 인기 목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가 목격했던 1920년대의 부흥회 설교꾼들의 모습은 시간차를 두고 그렇게 기묘하게 겹친다. 감독 리처드 브룩스는 부담스러운 종교 비판적인 메시지를 엘머와 샤론의 러브스토리로 적절하게 치환시키는 기지를 발휘한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그것은 브룩스 본인뿐만 아니라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진 시몬스에게도 좋은 영화 경력으로 남았다.

  이 영화로 버트 랭커스터는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진 시몬스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어디까지나 랭커스터의 연기를 잘 받쳐주는 데에 그쳤다. 의외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조연 셜리 존스가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차지했다. 엘머의 과거 연인이었다 매춘부가 된 룰루를 연기한 셜리 존스는 강렬하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엘머 갠트리'에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함께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이 담겨있다. 그 질문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 출처: silverscreenings.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롤라(Lola)'는 필리핀의 공용어인 타갈로그어로 '할머니'란 뜻이다. 브리얀테 멘도자 감독의 2009년작 'Lola'에는 두 명의 할머니가 나온다. 롤라 세파의 손자는 휴대폰을 노린 노상강도에게 죽임을 당했다. 롤라 푸링의 손자는 그 살인범이다. 영화는 롤라 세파의 가슴아픈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향과 초를 사들고 손주가 죽은 장소를 찾은 할머니는 비바람 속에서 초에 불을 붙이는 데에 애를 먹는다. 애도의 순간도 잠시, 할머니는 손주의 장례식 준비를 해야한다. 장례업자를 찾아가 관을 맞추는데 돈이 없어서 제일 싼 것으로 계약한다. 손주가 가입한 생명보험회사에서 나온 돈은 너무 적어서 별 도움도 안된다. 롤라 세파는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빚까지 내서 손주 장례를 치러야 할 판이다.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러 갔더니 벌써 용의자가 잡혔다고 한다. 경찰서에는 살인범 손자의 끼니가 걱정되어서 밥을 챙겨서 온 롤라 푸링이 있다.

  브리얀테 멘도자는 두 할머니가 사는 도시 마닐라의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롤라 세파가 사는 수로변에 위치한 수상 가옥은 낮은 천장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집안을 다녀야 하는 빈민층의 주거지다. 롤라 푸링은 손주와 노점상으로 먹고 사는데, 집에 누워있는 병든 아들 수발까지 하고 있다. 겨우 잠만 자고 밥만 먹는 공간으로서의 집은 마치 닭장 같다. 변변한 집안 살림살이는 죄다 전당포에 맡기고 남아있는 것은 손자가 좋아하는 TV 뿐이다. 그런데 살인을 저지른 큰손주의 석방을 위해 합의금까지 마련해야하니, 롤라 푸링의 머릿속은 온통 돈 생각 뿐이다. 돈에 찌들리기는 롤라 세파도 마찬가지. 장례식에 돈을 다 써버려서 빚까지 졌다. 같이 살고 있는 딸은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자고 롤라 세파를 설득한다. 죽은 손자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필리핀의 사법제도는 상당히 특이하다. 살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달리 자동적으로 기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고소인의 고발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지방 검사의 기소 여부에 따라 재판으로 넘겨진다. 필리핀은 오랜 스페인 식민 지배와 미 군정을 거치면서 독특한 사법 체계를 발전시켜왔다(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이가 있다면 '동남아시아 국가의 형사법 연구(Ⅰ)(강석구 저, 2011)'의 필리핀 형법을 살펴보길 바란다). 롤라 푸링이 롤라 세파와 합의를 해서 고소를 취하하게 할 수만 있다면, 푸링의 손자는 석방된다. 그러니까 살인죄를 저질러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다. 그래서 롤라 푸링은 돈을 모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손님의 거스름돈을 속여서 건네는가 하면, 시골사는 딸에게서 받은 오리알과 채소까지 팔아 푼돈이라도 그러모은다. 나중에는 사채업자에게까지 돈을 빌린다. 그렇게 모든 5만 페소를 합의금으로 건네고 손주는 풀려난다. 5만 페소를 한화로 환산해 보니 100만원이 좀 넘는 돈이다.

  'Lola'에는 우기의 마닐라 풍경이 담겨있다. 비바람이 부는 칙칙하고 습한 날씨는 가난한 이들의 내면 풍경 같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 정의 구현 따위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롤라 세파는 검사에게 살인범의 목을 매달아 달라며 고발의 뜻을 밝혔지만, 마지막에 합의금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 두 할머니는 자신들의 병고와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게 된다. 롤라 세파에게는 거둬야할 자손들이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생존은 정의 보다 앞자리에 위치한다.

  브리얀테 멘도자는 시종일관 핸드 헬드로 찍은 화면 속에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마치 다큐처럼 보여준다. 영상 미학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린 것 같은 촬영, 거기에다 온갖 소음이 섞여들어간 사운드는 관객들에게 꽤나 인내심을 요구한다. 언제부터인가 핸드 헬드는 저예산의, 마구잡이식으로 영화찍는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인상을 받는다. 시네마 베리떼(Cinema verite)와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의 끔찍한 혼종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이 브리얀테 멘도자의 스타일인 듯하다. 2009년에 그에게 깐느 감독상을 안겨준 말많은 피칠갑 영화 'Kinatay'도 그렇게 찍은 모양이다(나는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쨌든 'Lola'는 센 주제의 이야기만 찍는 이 감독의 영화 가운데 '순한맛'쯤 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만듦새는 상당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에는 힘이 있다.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점과 더불어 미디어와 필리핀의 빈부 격차에 대한 감독 나름의 성찰도 돋보인다. 롤라 푸링의 손자는 집에서 TV만 보는데, 그 TV속의 화면에는 하층민들의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멋진 쇼와 정치 뉴스가 흘러나온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비웃음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롤라 푸링이 시골의 딸에게 가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촬영을 하는 젊은 남자 둘은 기차 밖의 빈민가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너절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다. 고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고 나오는 두 할머니의 가족들은 법원 정문에서 멈춰선다. 고위 관료의 행차로 도로가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검은색 관용차의 행렬이 끝난 다음에 두 롤라는 각자의 길을 간다. 빈자들의 삶과 명확히 경계선이 그어진,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 'Lola'는 두 할머니의 예기치 않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 가난한 이들의 처절한 삶의 속내를 살펴보게 만든다. 영화 속의 두 롤라, 필리핀의 원로 배우 아니타 린다와 러스티카 카르피오의 놀라운 연기가 영화의 사실성을 더한다.



*사진 출처: cineurop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전, 시나리오 수업을 같이 듣던 수강생 가운데에는 연극학 전공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부업으로 연기 학원 강사일을 했는데, 어느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수강생 가운데 가장 어린 아이가 몇 살일 것 같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일고여덟 살 정도가 아니냐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4살'이었다. 알렉스 윈터가 2020년에 만든 다큐 'Shobiz Kids'는 아역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한 아역 배우로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들려주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감독 알렉스 윈터 자신도 아역 배우였다. 그는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 출연했었다. 다큐 속에 나오는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E.T.(1982)'의 헨리 토마스,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의 마라 윌슨, 디즈니 채널의 대표 스타 캐머런 보이스, '제 5원소(1997)'의 밀라 요보비치, TV 시리즈 '웨스트월드(2016)'의 에번 레이첼 우드, '스타 트렉'의 윌 휘턴이 그들이다.

  다큐는 성인이 된 그들이 회고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당시의 자료 화면들로 채워져 있다. 아역 배우로서 스타덤에 올랐던 그들이 털어놓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외로움, 상처와 분노를 듣다보면 저 쇼비지니스 세계는 결코 좋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통의 삶에게 이탈하게 만든,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E.T.'의 헨리 토마스는 유명세 때문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캐머런 보이스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서 홈스쿨링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정상적인 학교 교육과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에서 단절된 채 자랐다. 숙소인 트레일러와 호텔, 촬영장을 오가는 일상에서 외로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매니저 업무를 대행하는 부모는 그런 아이를 잘 보살폈을까? 놀랍게도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부모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한 이는 없었다. 밀라 요보비치는 배우였던 어머니의 등쌀에 못이겨 춤과 노래와 같은 온갖 배우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요보비치는 엄마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는 대체제였던 셈이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어린 시절부터 모델과 배우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작 요보비치 자신은 그 일을 원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스무 살 즈음에 엄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는 경력과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윌 휘턴의 경우는 부모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표현하는데, 휘턴은 부모가 자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학대했다고 회고한다. '돈 문제'는 그들에게 가장 민감하며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했다. 수입을 관리한 부모와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스타들의 이야기 중간에 현재의 아역 배우 지망생들과 그 부모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다. 매일 연기 수업을 받고, 오디션을 보러 돌아다니고, 배역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스타의 길에 대한 매혹은 많은 이들을 그렇게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매혹의 자기장 속에서 배우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Showbiz Kids'는 그 길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어두움도 조명한다. 약물과 일탈, 범죄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조립품처럼 그 성공담에 끼워져 있다. 흑인 아역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토드 브리지스는 마약으로 고생했다. 거기에다 마약상에게 총을 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겨우 풀려났다. 윌 휘턴은 'Stan by Me(1986)'에서 함께 공연했던 리버 피닉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작업 현장에서 겪었던 성적인 학대 문제도 언급된다. 에번 레이첼 우드와 윌 휘턴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도 딱히 무슨 명확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역 배우들의 노동 조건과 관련한 법적인 여건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들은 해결이 쉽지가 않다. 어쩌면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욕망의 투사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쇼비지니스 사업은 그런 부모들의 욕망과 부합하며, 그 속에서 스타가 된 아이들은 갑작스런 부와 명성을 다루지 못해 쉽게 상처받는다. 다큐에 나온 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그런 어려움들을 나름대로 다루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쯤되면 그들에게 과거의 눈부신 아역 스타 시절이 정말 좋은, 행복했던 기억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Showbiz Kids'는 아역 배우들과 쇼비즈니스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다큐이기는 하다. 그러나 감독 알렉스 윈터는 이 다큐에서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보여주지 못한다. 인맥으로 따낸 배우들과의 인터뷰와 영상 자료 화면들을 열심히 구해서 이어붙인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이 아니라 편집자 크레딧에 올라야 마땅하다.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관객들은 도대체 감독이 무엇을 했는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이 관점 부재의 다큐를 메꾸는 것은 오직 인터뷰를 해준 배우들의 진실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한번 찾아서 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observer.com 좌측부터 순서대로 감독 알렉스 윈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헨리 토마스, 마라 윌슨, 에번 레이첼 우드, 토드 브리지스, 윌 휘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