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대(tripod)...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단어였다. 압둘라티프 케시시의 2007년작 '생선 쿠스쿠스(La graine et le mulet, The Secret of the Grain)'의 관객들은 시종일관 흔들리는 화면을 응시해야 한다. 이 감독은 스테디캠 덕후인가? 가족 드라마 찍는데 무슨 대단한 긴박한 상황이라도 들어갔다면 모르겠다. 식탁에서 온가족이 모여 쿠스쿠스를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왜 핸드 헬드가 필요한가? 거기에다 과다한 클로즈업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영화를 다큐 찍듯이 하면 사실성이 저절로 확보되는가? 이 영화는 화면 속으로 삼각대를 던져 넣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

  영화는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는 슬리만의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순의 나이로 평생 동안 배와 함께 일해온 슬리만은 구조조정으로 퇴직의 압력을 받는다. 그는 받은 퇴직금에 대출받은 돈을 더해 폐선을 개조한 식당을 열려고 한다. 튀니지 이민자 출신인 그가 식당 메뉴로 생각한 음식은 '생선 쿠스쿠스'. 그의 전처 수아드는 그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혼하고 작은 호텔 여주인 라티파, 의붓딸 림과 같이 살고 있는 그에게 전처와 자식들은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슬리만은 본격적인 식당 개업을 앞두고 시의 관계자와 여러 초대 손님들에게 음식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어쨌든 하나로 뭉친 가족은 손님 접대에 여념이 없는데, 주요리인 쿠스쿠스가 보이지 않는다. 과연 이 가족 식당의 첫 시식은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튀니지에서 출생한,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케시시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민족(異民族)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 대부분을 튀니지 이민자 출신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무엇보다 쿠스쿠스라는 요리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튀니지와 모로코 등지에서 즐겨먹는 요리다. 타진(Tajine)이라는 고깔 모자 뚜껑의 그릇에 담아서 내놓는 이 요리는 고기와 야채, 가는 밀가루를 쪄서 만든다. 슬리만의 전처 수아드는 자신이 만든 생선 쿠스쿠스로 자식들 내외를 불러모아 대접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이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나누는 잡다한 대화들은 가족애와 생의 활력으로 넘친다. 길게 이어지는 대화 장면을 케시시는 이민자 가정의 끈끈한 인간적 유대로 포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좀 과하다. 이 가족의 대화는 별다른 주제도 없고, 그저 시시한 잡담들을 이어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러닝타임 2시간 30분 속에는 그 지루하고 긴 대화 장면도 한몫을 한다.

  그렇다고 이 가족이 진정으로 화목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혼한 전처와 자식들은 35년 동안 가족을 위해 헌신한 슬리만을 그다지 존중하는 것 같지 않다. 물론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지내는 슬리만을 곱게 보기만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이 슬리만의 퇴직금을 운운하는 것은 이 가족에게 가장의 존재란 돈 벌어다 주는 기계였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슬리만은 억센 친자식들 보다 의붓딸 림을 더 의지하고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낀다. 아마도 이런 림과 가장 대비되는 자식은 슬리만의 장남 마지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바람둥이로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식당 개업을 앞둔 연회에서 쿠스쿠스 요리를 차에서 꺼내는 것을 깜빡하고 사라져 버린 것도 마지드였다. 골칫덩이 마지드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림이 나선다. 기다림에 지친 손님들 앞에서 필살기 '벨리 댄스'를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림의 압도적인 벨리 댄스가 차지한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림(하프시아 헤르지 분)의 터질 것 같은 배와 관능적인 몸짓이 10여분 가량 이어진다. 관객에 따라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보낼 수도 있고,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호감과 비호감을 떠나서 그 장면도 너무 길고 과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30분은 그렇게 의미없이 낭비되는 장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대체 감독 케시시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얼 보려주려는 것일까?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가족 구성원의 최종적 화합? 튀니지 이민자들의 가족애와 유대감? 벨리 댄스가 보여주는 육체미와 생의 에너지? 이 길 잃은 가족 서사는 어설프게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조잡스럽고 너절한 영화를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다. 이 감독은 절제와 중용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피상적인 묘사, 과도하고 의미없이 사용된 헨드 헬드 촬영과 클로즈업, 유기적이지 못한 서사, 매우 영악하게 사용된 선정적인 벨리 댄스 장면, 그 모든 것이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만든 생선 쿠스쿠스를 나는 그 누구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가 무슨 상을 받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치 그것은 영화에 붙은 작은 스티커처럼 보일 뿐이다.       



*사진 출처: hyderabad.afindi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궁금한 건 말이죠, 출판이 될지 확신도 없는 글을 왜 그렇게 쓰는 거에요?"

  25살의 대학원생은 생의 마지막 소설을 쓰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노작가에게 당돌하게 묻는다. 한때는 주목받았으나, 이제는 대중들과 평단의 뇌리에서 잊혀진 작가 레너드(프랭크 랜젤라 분)는 10년 넘게 자신의 소설과 씨름하고 있다. 자신의 소설로 박사논문을 쓰겠다며 찾아온 젊고 매력적인 헤더(로렌 앰브로즈 분)는 레너드의 마음을 점점 흔들어 놓는다. 헤더는 전직 교수였던 레너드를 처음에는 '교수님'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레너드'로 부르게 된다.


  앤드류 와그너 감독의 2007년작 'Starting Out in the Evening'은 브라이언 모튼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는 일견 늙은 작가와 젊은 여성의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레너드와 헤더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레너드는 헤더의 젊음과 과단성에 매혹된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이 명백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레너드는 매우 진중하고 신사적인 인물로 헤더의 접근을 거부하고 둘 사이의 거리를 지키려 애를 쓴다.


  그런 레너드에게 과감히 돌진하는 헤더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헤더가 직업적 성공을 위한 징검다리로만 레너드에게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헤더에게는 야망이 있다. 자신의 논문으로 비평계의 주목을 받겠다는 야망. 그런 헤더에게 레너드의 글들은 문학을 전공하게 만든, 인생의 변화를 만든 소중한 작품이었다. 처음 레너드의 집에 방문한 날, 헤더는 레너드의 서재에서 젊은 시절 레너드의 사진 한장을 몰래 빼온다. 자신이 존경하는 우상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이 헤더의 마음 속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자와 여자, 작가와 열성팬, 권위자와 입문자, 이런 다양한 속성들이 뒤섞인 두 사람의 관계는 헤더의 논문이 완성되어감에 따라 끝이 보이는 여정에 접어든다. 그러는 와중에 레너드의 심장 발작은 관계의 종말을 앞당긴다. 어렵게 회복된 레너드는 전보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데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도대체 왜 글쓰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레너드가 소설을 완성한다고 해도 이미 존재감을 잃어버린 작가가 된 레너드의 소설은 출판될 가능성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홀로, 늦은 밤까지, 타자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창작이란 결국은 생산성의 문제다. 이 세상에 영속적인 무언가를 남기려고 하는 열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택하는 방식은 결혼으로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그 생산성의 열망은 예술 작품으로 귀결된다. 자손을 남기는 것은 예술가에게 자신의 예술 작품 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레너드에게도 딸 에리얼이 있지만, 그 딸이 레너드의 영속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에리얼은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애인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 어느새 마흔 문턱에 이르렀다. 레너드는 에리얼에게 아이를 원하는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말하지만 에리얼은 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 10년 넘게 매달리고 있는 소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딸, 레너드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모두 불임의 상태이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마지막 소설에 매달리는 것은 영속성에 대한 열망인지도 모른다.  

  다시 처음의 헤더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레너드는 헤더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건 예술의 광기(madness of art) 같은 거겠지."

  퇴원 후 회복기의 성치 않은 몸으로도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문안을 온 헤더는 레너드에게 칭찬과 경외의 말을 쏟아낸다. 레너드는 그런 헤더의 뺨을 때린다. 이 장면은 얼핏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레너드는 헤더의 같잖은 아첨을 보며, 둘 사이의 관계가 거래였음을 깨닫는다. 헤더는 논문을 얻었고, 레너드는 젊음의 기운을 잠시 느꼈을 뿐이다. 젊은 여자와의 관계가 자신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레너드는 뼛속 깊이 자각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글쓰기로 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는 밤의 서재에서 턱을 괴고 타자기 앞에 앉아있다. 늘 그래왔듯, 자신의 글쓰기를 그렇게 이어가려는 것이다. 매일 밤에 새롭게 시작하는(starting out in the evening) 글쓰기의 일상, 그것이 작가의 숙명이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소설이 출판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저 쓸 따름이다. 고요한, 그러나 열정적인 내면의 광기에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다. 'Starting Out in the Evening'은 그러한 예술가의 고독한 숙명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러닝타임 2시간 40분, 주요 등장인물 24명,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등장인물들이 한 장소에 다 모이고, 결국 총소리와 노래로 끝이 나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알트만의 1975년작 '내쉬빌(Nashville)'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미국의 성조기가 전면에 올라가는 가운데 정치적 선전과 구호가 가득한 선거 유세 차량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대안당의 대통령 후보 할 필립 워커의 유세 차량은 영화 내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정치적 수사를 쏟아낸다. 워커의 정치 모금 행사가 준비중일 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컨트리 음악 가수들의 공연 준비로 떠들썩하다. 이것을 취재하러 온 BBC의 기자 오팔(제랄딘 채플린 분)은 내쉬빌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인터뷰하기에 바쁘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큰 무대에 데뷔하려는 삼류 가수, 남편 몰래 포크락 가수와 바람난 주부, 무작정 내쉬빌에 찾아온 대학생,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버리고 가출한 가수 지망생, 그런 아내를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남편, 아픈 이모 병문안 때문에 내쉬빌에 왔으면서도 죽어가는 이모는 만나지도 않고 남자 꼬시러 다니는 히피,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여자 가수들, 그런 그들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을 펼치는 영화. 정신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영화의 끝에 다다른다.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본 이들이라면 '내쉬빌'의 다층적 서사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다. '플레이어'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폐부를 찌르는 이야기라면, '내쉬빌'은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 내쉬빌을 배경으로 1970년대 미국의 정서적 지형을 탐험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의 정치와 연예 산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알트만의 영화적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인들의 음악인 재즈와 대척점에 서있는 백인들의 음악 컨트리. 알트만은 컨트리 음악이 지향하는 밝고 건강한 미국, 낙관적인 세계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내쉬빌'에서의 컨트리 음악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 컨트리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가스펠과 영화를 위해 작곡된 노래들로 가수들 본인의 곡들이 아니었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It don't worry me'를 한번 보자. 유명 컨트리 가수 바바라 진은 총을 맞고 쓰러지는데, 모두들 충격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마이크를 넘겨받은 가수지망생(바바라 해리스 분)이 이 노래를 부른다. 구질구질한 현실의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 걱정할 게 없다는 노래 가사는 알트만의 뒤틀린 유머처럼 들린다.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도 못한 컨트리 가수들도 이 영화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건 골수 컨트리 음악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알트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컨트리 음악을 '써먹었다'.

  '내쉬빌'을 통해 알트만이 보여주는 1970년대의 미국은 공허하고 경박스러우며, 혼돈과 무지가 판치는 시대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당시의 미국에 대해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적인 인물들과 그 이야기들의 조합인 '내쉬빌'이 가리키는 지점은 미국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알트만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을 그 시대의 분위기와 만나게 만든다. 천문학적인 국방비가 흘러들어갔고 젊은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던 베트남 전쟁이 끝난 때가 1973년이었다. 한쪽에서는 약물에 찌든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흑인 인권 운동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평등과 다양성을 요구하는 민권 운동이 폭발했던 시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한 것이 1974년,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내쉬빌'에서 선거 유세 차량의 정치적 구호들이 기만적이고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아마도 미국민들은 케네디의 암살 이후로 그 어떤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골수 케네디 지지자를 자처한 인물 레이디 펄은 케네디야말로 '진짜'였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 인물들 가운데 진정성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속물적이고 자의식 과잉의 BBC 기자 오팔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것은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후원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컨트리 가수 데뷔를 꿈꾸는 여자에게 스트립쇼를 강요하는 파렴치한 선거자금 모금책도 있다. 바람둥이 포크락 가수(키스 캐러딘 분)는 밀회 상대자인 여자가 아직 호텔방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여자 친구에게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건다. 너절하기 짝이 없는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이 욕망의 변주들을 알트만은 아주 조화롭게 연주해낸다. 그는 '내쉬빌'에서 어떤 면에서는 신과 같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알트만은 배우들에게 상당부분 즉흥적인 대사를 허용했다), 흩어지고 조각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맞추어 영화의 마지막에 한 장소에 그러모은다. 그리고 이 놀라운 영화의 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며 끝낸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끝난 후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알트만은 '내쉬빌'의 신이었다."

  이 영화는 1992년에 '미국 국립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 NFR)'가 선정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적으로 보존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화 작품으로 뽑힌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이 영화로 1970년대의 미국 역사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차라리 미국 현대사에 대한 책 한 권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쉬빌'에서 관객은 오로지 그 시대의 분위기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온갖 혼돈과 무질서와 불신이 팽배한 괴물같은 시대. 알트만은 그러한 1970년대의 한복판에서 조롱과 야유를 보낸다. 관객들은 '내쉬빌'이라는 만화경을 통해 그것을 관찰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러한 괴물같은 시대가 만들어낸 '걸작'인 셈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이(멜리사 레오 분)에게는 꿈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거지같은 트레일러 집에서 벗어나 크고 멋진 새 트레일러 집을 장만하는 것. 어느 날 아침, 레이가 어렵게 모은 목돈을 들고 도박 중독자 남편은 집을 나가 버린다. 동네 천냥마트에서 파트 타이머로 일하며 아들 둘을 키우는 레이에게는 새 집이고 뭐고 당장 하루벌이가 급하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된 원주민 릴라(미스티 업햄 분)가 밀입국자를 캐나다 국경 근방에서 데려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한번에 1200달러를 받는 일에 대한 유혹은 레이를 혹한의 얼음강으로 내몬다. 차 트렁크에 밀입국자 2명을 싣고 얼음강을 가로질러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릴라가 국경 수비대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릴라도 일을 그만두려는데, 레이는 마지막 한탕을 제안한다. 그러나 악덕 중개업자의 농간으로 일은 틀어지고, 국경 수비대의 추격을 받는다. 레이와 릴라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트니 헌트 감독의 2008년작 '프로즌 리버(Frozen River)'는 삶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된 두 여성간의 연대를 그려낸다. 레이와 릴라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레이 얼굴의 주글주글거리고 깊게 패인 주름은 지난한 삶의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도박 중독자인 남편과의 지긋지긋한 전쟁과도 같은 삶. 레이는 먹을 것 살 돈마저 도박에 가서 탕진한 남편을 향해 총까지 쏜 적이 있다. 릴라의 남편은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가 빼앗아서 키우고 있다. 릴라의 꿈은 아이를 데려올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돈에 절박한 두 엄마는 동업자가 된다.


  두 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성성'과 '연대'의 이야기를 그려낸 '프로즌 리버'는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는 빈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메꾸는 것은 레이와 릴라를 연기한 두 배우의 열연이다. 멜리사 레오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얼음강으로 나서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원주민 출신의 배우 미스티 업햄은 아이를 빼앗긴 엄마의 슬픔과 어떻게든 혼자서 삶과 직면하려는 용기있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두 여성이 처음의 적대적 만남에서부터 동업자,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코트니 헌트 감독은 모호크족 원주민들이 캐나다 국경을 오가며 담배 밀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편 영화로 구상했던 것이 살을 붙여가며 장편 영화 제작에 이르렀다. 문제는 영화 제작비를 어떻게 조달하는가였다. 헌트는 투자자들을 설득하려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긴장감있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떻게든 관객을 영화가 끝날때까지 붙잡아두는가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출처 2008년 huffpost.com과의 인터뷰). 밀입국 과정의 몇몇 장면, 수비대의 검문 검색이라던가 파키스탄 밀입국자 부부와 아기의 사연 같은 장면이 그래서 덧붙여졌을 것이다. 백만 달러라는 초저예산의 독립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6백만 달러라는 흥행 수익도 낼 수 있었다.

  영화의 현실 후일담은 이렇다. 첫 영화의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일까? 코트니 헌트는 2016년에 'The Whole Truth'를 찍었으나, 말그대로 쫄딱 망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무려 키아누 리브스와 르네 젤위거를 내세운 영화였다. 내 생각에 헌트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더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는 TV와 독립 영화를 비롯해 워낙 다작에 출연하는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충실히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미스티 업햄이 남았다.


  이 영화로 촉망받는 배우가 된 업햄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을 이어갔지만, 서른 둘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프로즌 리버'를 찍은지 6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업햄의 사인은 부검으로도 밝혀지지 못했다. 하비 와인스틴 프로덕션 소속 직원들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흘러나왔다. 신인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뤄야할 댓가 치고는 너무나 잔혹한 결말이었다. 그 누구도 삼키지 않았던 영화 속의 얼음강과는 달리 업햄은 인생의 얼음강에 빠지는 불운을 겪었다. '프로즌 리버'에서 릴라를 연기했던 미스티 업햄은 그 강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비극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nziff.co.nz  릴라 역의 미스티 업햄과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당신이 만약에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배우라고 하자. 들어오는 시나리오들 가운데에는 찍으면 영화도 잘 되고 돈도 더 잘 벌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영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배역은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째 흥행은 담보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대부분은 '될 것 같은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런데 스티브 맥퀸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1969년작 '멤피스로 간 세 도둑(Reivers)'은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들 가운데 좀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액션 영화들에 출연했고, 관객들이 그에게 기대한 이미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11살 소년이 주인공인 성장영화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동명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Reivers'에서 스티브 맥퀸은 소년의 여행을 이끄는 충실한 안내자 역할이다. 

  영화 제목 'Reivers'는 '훔치다'는 뜻의 'reive'에서 따온 것으로, 그 의미는 영화 속의 내레이션을 맡은 노년의 루시어스가 알려준다. 포크너의 마지막 소설인 'Reivers'는 어떤 면에서 작가의 소년 시절에 대한 회고담처럼 보인다. 소박하고 따뜻한 원작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미시시피의 어느 마을이다.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일꾼 분은 집안의 큰어른 보스가 사들인 자동차 윈턴 플라이어에 눈독을 들인다. 차를 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주인 일가가 친척 장례식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우게 된 것. 이내 새 자동차로 주인집 도련님 루시어스(미치 보겔 분), 루시어스의 친척 네드(루퍼트 크로세 분)와 멤피스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멤피스에서 네드는 몰래 자동차를 경주마로 바꾸고, 말주인과 내기를 하게 된다. 경마에 참여해서 이기게 되면 차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 말 한 마리를 얻는다는 생각에 차를 넘긴 네드에게 화가 치밀지만, 분은 하는 수 없이 루시어스를 기수(騎手)로 내세워 경마에 뛰어든다. 과연 신출내기 소년 기수는 경주에서 이길 수 있을까?

  영화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풍요롭고 낙관적인 삶의 풍경을 담아낸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과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나오는 장면들이다. 작가 포크너는 미시시피 출신으로 자신의 작품 속 대부분의 배경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였다. 남부가 어떤 곳인가? 남북 전쟁(Civil War)이 끝나고도 흑백 차별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 흑인 네드가 보여주는 여유로움과 뻔뻔함은 뭔가 좀 특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네드는 부잣집 보스 일가의 친척이다. 윗대의 백인 농장주와 흑인 사이에 태어난 후손으로, 그는 루시어스에게는 엄연히 일가붙이인 셈이다. 네드가 영화 초반부에 자동차를 빼앗아 몰며 분과 큰 소동극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네드의 행동에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으며, 마을 사람들도 그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마을에서 좀 떨어진 멤피스에서 그는 'nigger'로 취급될 뿐이다. 그것은 흑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단어이다. 안온했던 고향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에 가도 네드가 받는 취급은 그렇게 달라진다. 포크너는 어린 소년 루시어스의 눈으로 인종 차별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낸다.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도시, 부잣집 도련님 루시어스는 자신이 자라온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목격한다. 분의 매춘부 애인 코리를 통해서는 어른들의 타락한 모습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올곧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이 소년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루시어스가 분과 네드에게 보내는 신뢰와 우정은 짧고 강렬한 여행의 체험을 성장으로 이끈다.

  영화는 소박하고 담백하다. 소년의 성장담은 안전한 귀환으로 끝난다. 포크너 연구자들에게도 'Reivers'는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그저그런 소품으로 넘겨 버리는 것은 뭔가 아쉬운 느낌을 준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격화되기 이전, 마치 미국의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부잣집 백인 도련님, 흑인 친척, 백인 일꾼이라는 기묘한 조합의 3인조가 함께 떠나는 밝고 신나는 모험은 관객들을 미소짓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한 미국의 현대사로 진입하기 직전을 그려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KKK단이 구국의 영웅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린치당한 흑인들이 나무에 시체로 매달리는 시대와 마주하게 될 터였다.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소년 루시어스를 연기한 미치 보겔, 생에 대한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한 일꾼 분을 연기한 스티브 맥퀸은 아주 잘 어울린다. 네드를 연기한 루퍼트 크로세도 그 두 배우들과 좋은 케미를 선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 스티브 맥퀸이 얼마나 즐겁에 영화를 찍었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 자동차 광이였던 맥퀸은 영화에 나온 차 윈턴 플라이어를 영화 끝나고 나중에 사들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맥퀸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가 나오고, 남자를 넘어서는 여성 캐릭터도 없고, 아들같은 귀여운 소년도 나와서(그에게는 당시 9살된 아들이 있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루시어스를 바라보는 맥퀸의 눈빛은 딱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다. 스티브 맥퀸이 선택한 의외의 영화 'Reivers'는 그렇게 후대의 팬들에게는 작지만 빛나는 선물로 남았다.       



*사진 출처: goldderby.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