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타임 2시간 40분, 주요 등장인물 24명,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등장인물들이 한 장소에 다 모이고, 결국 총소리와 노래로 끝이 나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알트만의 1975년작 '내쉬빌(Nashville)'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범상치가 않다. 미국의 성조기가 전면에 올라가는 가운데 정치적 선전과 구호가 가득한 선거 유세 차량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대안당의 대통령 후보 할 필립 워커의 유세 차량은 영화 내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쉴 새 없이 정치적 수사를 쏟아낸다. 워커의 정치 모금 행사가 준비중일 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컨트리 음악 가수들의 공연 준비로 떠들썩하다. 이것을 취재하러 온 BBC의 기자 오팔(제랄딘 채플린 분)은 내쉬빌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인터뷰하기에 바쁘다. 실력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큰 무대에 데뷔하려는 삼류 가수, 남편 몰래 포크락 가수와 바람난 주부, 무작정 내쉬빌에 찾아온 대학생,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에 남편을 버리고 가출한 가수 지망생, 그런 아내를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남편, 아픈 이모 병문안 때문에 내쉬빌에 왔으면서도 죽어가는 이모는 만나지도 않고 남자 꼬시러 다니는 히피,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여자 가수들, 그런 그들 주변의 많은 인물들이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을 펼치는 영화. 정신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영화의 끝에 다다른다.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본 이들이라면 '내쉬빌'의 다층적 서사 방식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다. '플레이어'가 할리우드 영화계의 폐부를 찌르는 이야기라면, '내쉬빌'은 컨트리 음악의 본고장 내쉬빌을 배경으로 1970년대 미국의 정서적 지형을 탐험한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의 정치와 연예 산업의 이면을 드러내는 알트만의 영화적 보고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흑인들의 음악인 재즈와 대척점에 서있는 백인들의 음악 컨트리. 알트만은 컨트리 음악이 지향하는 밝고 건강한 미국, 낙관적인 세계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내쉬빌'에서의 컨트리 음악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 컨트리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가스펠과 영화를 위해 작곡된 노래들로 가수들 본인의 곡들이 아니었다. 영화 마지막을 장식하는 'It don't worry me'를 한번 보자. 유명 컨트리 가수 바바라 진은 총을 맞고 쓰러지는데, 모두들 충격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마이크를 넘겨받은 가수지망생(바바라 해리스 분)이 이 노래를 부른다. 구질구질한 현실의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 걱정할 게 없다는 노래 가사는 알트만의 뒤틀린 유머처럼 들린다.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지도 못한 컨트리 가수들도 이 영화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그건 골수 컨트리 음악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알트만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컨트리 음악을 '써먹었다'.

  '내쉬빌'을 통해 알트만이 보여주는 1970년대의 미국은 공허하고 경박스러우며, 혼돈과 무지가 판치는 시대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당시의 미국에 대해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전적으로 허구적인 인물들과 그 이야기들의 조합인 '내쉬빌'이 가리키는 지점은 미국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오히려 알트만은 영화를 통해 관객들을 그 시대의 분위기와 만나게 만든다. 천문학적인 국방비가 흘러들어갔고 젊은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던 베트남 전쟁이 끝난 때가 1973년이었다. 한쪽에서는 약물에 찌든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흑인 인권 운동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평등과 다양성을 요구하는 민권 운동이 폭발했던 시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사임한 것이 1974년,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내쉬빌'에서 선거 유세 차량의 정치적 구호들이 기만적이고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아마도 미국민들은 케네디의 암살 이후로 그 어떤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골수 케네디 지지자를 자처한 인물 레이디 펄은 케네디야말로 '진짜'였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 인물들 가운데 진정성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속물적이고 자의식 과잉의 BBC 기자 오팔이 내쉬빌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것은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일 뿐이다. 후원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컨트리 가수 데뷔를 꿈꾸는 여자에게 스트립쇼를 강요하는 파렴치한 선거자금 모금책도 있다. 바람둥이 포크락 가수(키스 캐러딘 분)는 밀회 상대자인 여자가 아직 호텔방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여자 친구에게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건다. 너절하기 짝이 없는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이 욕망의 변주들을 알트만은 아주 조화롭게 연주해낸다. 그는 '내쉬빌'에서 어떤 면에서는 신과 같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알트만은 배우들에게 상당부분 즉흥적인 대사를 허용했다), 흩어지고 조각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맞추어 영화의 마지막에 한 장소에 그러모은다. 그리고 이 놀라운 영화의 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며 끝낸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가 끝난 후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알트만은 '내쉬빌'의 신이었다."

  이 영화는 1992년에 '미국 국립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 NFR)'가 선정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적으로 보존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화 작품으로 뽑힌 것이다. 만약에 누군가 이 영화로 1970년대의 미국 역사에 대해 알려고 한다면, 차라리 미국 현대사에 대한 책 한 권을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내쉬빌'에서 관객은 오로지 그 시대의 분위기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온갖 혼돈과 무질서와 불신이 팽배한 괴물같은 시대. 알트만은 그러한 1970년대의 한복판에서 조롱과 야유를 보낸다. 관객들은 '내쉬빌'이라는 만화경을 통해 그것을 관찰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러한 괴물같은 시대가 만들어낸 '걸작'인 셈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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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멜리사 레오 분)에게는 꿈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거지같은 트레일러 집에서 벗어나 크고 멋진 새 트레일러 집을 장만하는 것. 어느 날 아침, 레이가 어렵게 모은 목돈을 들고 도박 중독자 남편은 집을 나가 버린다. 동네 천냥마트에서 파트 타이머로 일하며 아들 둘을 키우는 레이에게는 새 집이고 뭐고 당장 하루벌이가 급하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된 원주민 릴라(미스티 업햄 분)가 밀입국자를 캐나다 국경 근방에서 데려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한번에 1200달러를 받는 일에 대한 유혹은 레이를 혹한의 얼음강으로 내몬다. 차 트렁크에 밀입국자 2명을 싣고 얼음강을 가로질러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릴라가 국경 수비대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릴라도 일을 그만두려는데, 레이는 마지막 한탕을 제안한다. 그러나 악덕 중개업자의 농간으로 일은 틀어지고, 국경 수비대의 추격을 받는다. 레이와 릴라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트니 헌트 감독의 2008년작 '프로즌 리버(Frozen River)'는 삶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된 두 여성간의 연대를 그려낸다. 레이와 릴라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레이 얼굴의 주글주글거리고 깊게 패인 주름은 지난한 삶의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도박 중독자인 남편과의 지긋지긋한 전쟁과도 같은 삶. 레이는 먹을 것 살 돈마저 도박에 가서 탕진한 남편을 향해 총까지 쏜 적이 있다. 릴라의 남편은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가 빼앗아서 키우고 있다. 릴라의 꿈은 아이를 데려올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돈에 절박한 두 엄마는 동업자가 된다.


  두 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성성'과 '연대'의 이야기를 그려낸 '프로즌 리버'는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는 빈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메꾸는 것은 레이와 릴라를 연기한 두 배우의 열연이다. 멜리사 레오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얼음강으로 나서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원주민 출신의 배우 미스티 업햄은 아이를 빼앗긴 엄마의 슬픔과 어떻게든 혼자서 삶과 직면하려는 용기있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두 여성이 처음의 적대적 만남에서부터 동업자,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코트니 헌트 감독은 모호크족 원주민들이 캐나다 국경을 오가며 담배 밀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편 영화로 구상했던 것이 살을 붙여가며 장편 영화 제작에 이르렀다. 문제는 영화 제작비를 어떻게 조달하는가였다. 헌트는 투자자들을 설득하려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긴장감있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떻게든 관객을 영화가 끝날때까지 붙잡아두는가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출처 2008년 huffpost.com과의 인터뷰). 밀입국 과정의 몇몇 장면, 수비대의 검문 검색이라던가 파키스탄 밀입국자 부부와 아기의 사연 같은 장면이 그래서 덧붙여졌을 것이다. 백만 달러라는 초저예산의 독립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6백만 달러라는 흥행 수익도 낼 수 있었다.

  영화의 현실 후일담은 이렇다. 첫 영화의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일까? 코트니 헌트는 2016년에 'The Whole Truth'를 찍었으나, 말그대로 쫄딱 망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무려 키아누 리브스와 르네 젤위거를 내세운 영화였다. 내 생각에 헌트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더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는 TV와 독립 영화를 비롯해 워낙 다작에 출연하는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충실히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미스티 업햄이 남았다.


  이 영화로 촉망받는 배우가 된 업햄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을 이어갔지만, 서른 둘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프로즌 리버'를 찍은지 6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업햄의 사인은 부검으로도 밝혀지지 못했다. 하비 와인스틴 프로덕션 소속 직원들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흘러나왔다. 신인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뤄야할 댓가 치고는 너무나 잔혹한 결말이었다. 그 누구도 삼키지 않았던 영화 속의 얼음강과는 달리 업햄은 인생의 얼음강에 빠지는 불운을 겪었다. '프로즌 리버'에서 릴라를 연기했던 미스티 업햄은 그 강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비극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nziff.co.nz  릴라 역의 미스티 업햄과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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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만약에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배우라고 하자. 들어오는 시나리오들 가운데에는 찍으면 영화도 잘 되고 돈도 더 잘 벌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영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배역은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째 흥행은 담보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대부분은 '될 것 같은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런데 스티브 맥퀸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1969년작 '멤피스로 간 세 도둑(Reivers)'은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들 가운데 좀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액션 영화들에 출연했고, 관객들이 그에게 기대한 이미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11살 소년이 주인공인 성장영화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동명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Reivers'에서 스티브 맥퀸은 소년의 여행을 이끄는 충실한 안내자 역할이다. 

  영화 제목 'Reivers'는 '훔치다'는 뜻의 'reive'에서 따온 것으로, 그 의미는 영화 속의 내레이션을 맡은 노년의 루시어스가 알려준다. 포크너의 마지막 소설인 'Reivers'는 어떤 면에서 작가의 소년 시절에 대한 회고담처럼 보인다. 소박하고 따뜻한 원작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미시시피의 어느 마을이다.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일꾼 분은 집안의 큰어른 보스가 사들인 자동차 윈턴 플라이어에 눈독을 들인다. 차를 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주인 일가가 친척 장례식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우게 된 것. 이내 새 자동차로 주인집 도련님 루시어스(미치 보겔 분), 루시어스의 친척 네드(루퍼트 크로세 분)와 멤피스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멤피스에서 네드는 몰래 자동차를 경주마로 바꾸고, 말주인과 내기를 하게 된다. 경마에 참여해서 이기게 되면 차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 말 한 마리를 얻는다는 생각에 차를 넘긴 네드에게 화가 치밀지만, 분은 하는 수 없이 루시어스를 기수(騎手)로 내세워 경마에 뛰어든다. 과연 신출내기 소년 기수는 경주에서 이길 수 있을까?

  영화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풍요롭고 낙관적인 삶의 풍경을 담아낸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과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나오는 장면들이다. 작가 포크너는 미시시피 출신으로 자신의 작품 속 대부분의 배경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였다. 남부가 어떤 곳인가? 남북 전쟁(Civil War)이 끝나고도 흑백 차별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 흑인 네드가 보여주는 여유로움과 뻔뻔함은 뭔가 좀 특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네드는 부잣집 보스 일가의 친척이다. 윗대의 백인 농장주와 흑인 사이에 태어난 후손으로, 그는 루시어스에게는 엄연히 일가붙이인 셈이다. 네드가 영화 초반부에 자동차를 빼앗아 몰며 분과 큰 소동극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네드의 행동에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으며, 마을 사람들도 그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마을에서 좀 떨어진 멤피스에서 그는 'nigger'로 취급될 뿐이다. 그것은 흑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단어이다. 안온했던 고향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에 가도 네드가 받는 취급은 그렇게 달라진다. 포크너는 어린 소년 루시어스의 눈으로 인종 차별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낸다.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도시, 부잣집 도련님 루시어스는 자신이 자라온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목격한다. 분의 매춘부 애인 코리를 통해서는 어른들의 타락한 모습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올곧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이 소년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루시어스가 분과 네드에게 보내는 신뢰와 우정은 짧고 강렬한 여행의 체험을 성장으로 이끈다.

  영화는 소박하고 담백하다. 소년의 성장담은 안전한 귀환으로 끝난다. 포크너 연구자들에게도 'Reivers'는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그저그런 소품으로 넘겨 버리는 것은 뭔가 아쉬운 느낌을 준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격화되기 이전, 마치 미국의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부잣집 백인 도련님, 흑인 친척, 백인 일꾼이라는 기묘한 조합의 3인조가 함께 떠나는 밝고 신나는 모험은 관객들을 미소짓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한 미국의 현대사로 진입하기 직전을 그려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KKK단이 구국의 영웅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린치당한 흑인들이 나무에 시체로 매달리는 시대와 마주하게 될 터였다.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소년 루시어스를 연기한 미치 보겔, 생에 대한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한 일꾼 분을 연기한 스티브 맥퀸은 아주 잘 어울린다. 네드를 연기한 루퍼트 크로세도 그 두 배우들과 좋은 케미를 선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 스티브 맥퀸이 얼마나 즐겁에 영화를 찍었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 자동차 광이였던 맥퀸은 영화에 나온 차 윈턴 플라이어를 영화 끝나고 나중에 사들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맥퀸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가 나오고, 남자를 넘어서는 여성 캐릭터도 없고, 아들같은 귀여운 소년도 나와서(그에게는 당시 9살된 아들이 있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루시어스를 바라보는 맥퀸의 눈빛은 딱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다. 스티브 맥퀸이 선택한 의외의 영화 'Reivers'는 그렇게 후대의 팬들에게는 작지만 빛나는 선물로 남았다.       



*사진 출처: goldderb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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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 전 상서(上書)'

  칠흑같은 새벽에 도서관으로 나온 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만년필을 꺼내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고리대금업자를 동생이 흠씬 두들겨 패고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적 드라마인가? 1987년 MBC에서 방영된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초반부 이야기다. 시청률이 무려 70%를 넘었던, 드라마 작가 김수현에게는 경력의 최전성기를 열어준 작품이다. 이 34년 전 드라마를 KTV에서 다시 틀어주고 있다. 그 시절에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던 이들에게는 꽤나 반가운 일이다.

  드라마는 춘천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방앗간 집 아들 태준과 태수, 사진집 딸 미자, 그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려낸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이 드라마는 억척스러운 어머니(김용림 분) 밑에서 자란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가 중심인물이다. 태준(남성훈 분)은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실현해 나간다. 가난한 집안 환경을 딛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 사법고시에 합격하지만 법조계가 아닌 회사에 취직해서 기업인의 길을 걷는다. 태수(이덕화 분)는 불같은 성미로 배운 것은 없지만 강한 의지와 돈에 대한 타고난 감각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군다. 태준이 사랑하는 여자 미자(차화연 분)는 단신으로 상경해서 여배우로 명성을 얻지만, 태준 어머니의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간다. 결국 태준과 결혼하게 되지만, 일 중독인 태준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린다. 이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과 야망의 대서사시가 대략 이 드라마의 줄거리가 되겠다.

  이 드라마를 오랜만에 다시 TV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반가움이었다. 그 시절, 이 드라마는 중장년층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회고하게 만들면서, 강렬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들과 흡인력 있는 서사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의 볼거리가 있는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시청률 70%대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34년이나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아도 인물과 대사, 이야기들이 나름대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그 당시의 시청자들이 볼 게 없어서 그 드라마 나오는 시간에 TV 앞에 앉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난한 하층 계급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성공 서사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경제 개발의 호황기에 접어든 중산층은 드라마 속에서 자신들의 과거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특히 태수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성공기는 굴곡있는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조망하게 해준다.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인물이 어려움 속에서 맨손으로 일구어낸 기업의 과거에는 1970년대의 석유 파동(Oil Shock)이 있는가 하면, 건설 산업 붐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태준이 보여주는 엘리트 기업인의 서사에는 그 어떤 집안의 뒷받침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얻어낸 성공이 그려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의 '개룡남'의 선구적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의 계층 상승은 자신의 노력과 약간의 운을 필요로 하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남성 시청자들에게 태준 태수 형제의 서사가 흥미있게 느껴졌다면,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미자'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사진집 딸로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구박덩이 취급을 받던 미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인기 여배우라는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이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성공의 서사였다. 그러나 직업적 의미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준과의 순탄치 않은 사랑, 결혼 이후 불거진 갈등과 증오, 그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적인 공허와 우울에 시달리는 미자는 화려한 성공 서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미자처럼 가부장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는 태수의 첫번째 부인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전당포 집 딸로 태수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쟁취한 정자는 결국 태수의 외면으로 이혼에 이른다. 아이 둘을 놔두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정자에게 두번째 결혼은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들과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들로는 태준 태수 형제의 여동생 선희(임예진 분)와 태수의 두번째 부인 은환(김청 분)이 있다. 선희는 차분하고 심지깊은 성격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며,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가족의 뜻에 거스르는 법이 없다. 태준의 친구인 홍조와 결혼 생활을 순탄하게 이어가는듯 보이지만, 선희라고 마음의 괴로움이 없을까? 미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편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느라 속이 타들어간다. 과수원집 딸 은환은 좋아하는 태수와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전처 소생의 자식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심지어 은환은 의붓 자식들 잘 키우기 위해 아이 갖는 것도 포기한다. 이런 인내와 희생의 여성 캐릭터들은 어쨌든 가부장제 하에서 보호받고, 그나마 덜 고통받는다. 

  이 드라마의 놀라운 점은 결말에 있었다. 태준은 기업의 회장으로부터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는데, 이를 두고 미자는 일과 성공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망으로 질주하는 태준을 비아냥 거린다. 그런 미자에게 태준이 주먹을 날리는 것이 이 드라마의 결말이었다. 쓰러지는 미자의 모습이 잡힌 정지화면에서 끝나는 이 결말은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하는 탄식을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태준과 미자의 애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수현은 2006년에 리메이크 드라마로 '사랑과 야망'을 다시 선보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원작에 미치지 못했고, 원작에서 수정되고 덧붙여진 이야기들은 아귀가 맞지 않고 너덜거렸다. 무엇보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실패는 이전과 달리 '시대가 변했다'는 데에 있었다. 2006년의 시청자들은 1987년의 시청자들이 아니었다. 리메이크 드라마는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외면당했다. 오래전 원작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리메이크작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1987년의 드라마를 자동재생시켰을 것이다.

  이 드라마로 배우 경력의 정점에 오른 차화연은 이듬해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은환 역의 김청은 청순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홍조의 여동생 역으로 나온 김도연은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로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성공적으로 안방 극장에 복귀한 배우가 하나 있다. '윤여정'이다. 미자의 후원자인 패션 디자이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은 조영남과 이혼한 직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했던 윤여정에게 이 역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였다. 김수현과 오랜 친구 사이로 윤여정은 이후로도 김수현 드라마에서 고정적인 배역을 맡았다. 이후에 이어진 너무 많은 드라마 출연으로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는 윤여정의 연기는 '사랑과 야망'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큰 인기로 온갖 화제를 몰고 다녔던 전설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KTV에서 평일 저녁 9시에 방영된다.  



*사진 출처: ksilbo.co.kr  미자 역의 차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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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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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이덕무의 소품집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에서 고전연구가 한정주가 뽑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그리 길지 않은 짧은 글들에 역자의 덧붙이는 글들이 매편마다 들어간다.


  이덕무는 북학파 실학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살다간 이였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가 엄청난 독서가였고, 또 글쓰기를 좋아한 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또 좋은 글은 어떤 글인지, 어떻게 하면 빼어난 글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또한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온갖 종류의 박물지에 대한 감상평들도 실려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우습고 황당해 보이는 당시의 과학 지식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 그는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는 가난을 수치스럽거나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글을 읽다보면 세상살이에 초연한 선비의 기상이 느껴진다. 나름대로 자신을 수양하며 얻은 깨달음들도 글로 남겼다. 일종의 수양록, 명상록을 쓴 셈이다. 그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글은 이러했다.


  "원망과 비방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는 까닭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면 진실로 즐겁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온마음으로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성과를 반드시 세상과 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것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써내려갔던 삶. 돈과 명성에 한눈을 팔지 않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쉬울까? 이덕무의 글에는 그런 것들으로부터 초연한 나름의 담백함과 결기가 느껴진다.


  매글마다 덧붙여진 역자의 감상은 이덕무의 글을 온전히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다. 장황하고 불필요한 그 글들은 차라리 따로 떼어서 역자의 수필집으로 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덕무의 원문을 보조하고 설명하기 위한 각주의 역할을 하지도 못하는 그런 글을 덧붙이는 것은 사족처럼 느껴진다. 그 부분을 비어두고, 글을 읽는 독자들의 감상을 쓰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다. 이 책에 별점을 더 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역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원저자의 글을 빛나게 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이런 번역 서적에서 그런 끼워넣기 구성은 원문이 가진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좋은 이덕무의 글을 만났다는 데에 의미를 두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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