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상이 싫어!"

  두 딸들 앞에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엄마 베아트리스(조안 우드워드 분)는 결코 좋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집안은 정리되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하고,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서 더럽기 짝이 없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정서불안의 이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버겁다.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경멸하는 첫째 딸 루스는 타고난 불안한 성정에 뇌전증(간질)까지 앓고 있다. 막내 마틸다(넬 포츠 분, 폴 뉴먼의 딸)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그런 어두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과학 과제에 흥미를 붙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영화의 제목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는 마틸다가 해낸 과학 과제물에서 따왔다. 퓰리처 상을 받은 폴 진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폴 뉴먼이 자신의 부인 조안 우드워드와 함께 본 연극에 깊은 감명을 받고나서 제작되었다.

  영화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여성이 딸들과 함께 살면서 일으키는 현실의 파열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베아트리스는 집안에 병든 노인들을 보살피는 하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이 여자가 노인 환자들이라고 제대로 보살피겠는가? 노환으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내니 할머니는 마치 생기없는 인형처럼 그 집안에 자리하고 있다. 첫째 루스는 죽어가는 노인들이 거쳐가는 자신의 집과 엄마를 부끄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시간의 연극에서 조롱거리로 흉내내기까지 한다. 정신없는 엄마와 불안한 언니 사이에서 오직 마틸다만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우는 토끼와 금잔화 과제가 마틸다에게는 질식할 것 같은 집에서의 작은 숨구멍이 되어준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그런 마틸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고 상처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조안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역을 미친 여자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우드워드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어긋나 버린 마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의 비애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영화의 연기로 우드워드는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정작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배역이 지닌 어둡고 이그러진 면들 때문에 그 역을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아내가 싫어하든 말든 폴 뉴먼은 뚝심있게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자신이 연극 배우로도 여러 작품에 참여했던 뉴먼에게 연극은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고, 이 영화 제작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하기에는 상당히 동떨어진 지점에 있었다는 데에 있다.

  같은 배우 출신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상업성에 놀라운 감각을 보여준 것에 비해, 뉴먼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의 인물들은 어둡고, 흔들리며, 현실의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나마 마틸다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희망의 느낌이 그 칙칙하고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를 상쇄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 약하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은데, 이는 캐릭터의 불명확성에서 기인한다. 혹시 원작 희곡에 단서가 있을까 해서 희곡까지 찾아서 읽어보았지만, 희곡은 영화 보다 더 암울하다.

  다시 처음 대사로 돌아가 보자. 마틸다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렇게 혼자 답한다. 

  "엄마, 난 세상을 싫어하지 않아요."

  원작 희곡에서는 이 부분이 다르게 나온다.

  베아트리스: 난 세상이 싫어, 이런 내 기분을 너도 알지?
  마틸다: 응, 엄마.

  마틸다는 감마선을 쬔 금잔화가 피어난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먼 우주에서부터 쏟아진 원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심원한 기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자각한 마틸다는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마틸다의 대사는 마틸다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폴 뉴먼이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데에는 삶의 불안정성을 견디는 힘으로서의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romthefrontrow.net 베아트리스 역의 조안 우드워드와 마틸다 역의 넬 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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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4-09 16:39   좋아요 1 | URL
아, 저 이거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영화인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원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는 것도 영화를 보고나서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토끼키우기와 금잔화 실험으로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던 마틸다를 보면서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가 절망을 말하는가 혼란스럽기도 했었어요.

푸른별 2021-03-30 18:57   좋아요 1 | URL
hnine님은 이 영화를 보았군요.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마틸다가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소년원에 수감중인 악바르는 이제 18살 생일을 맞았다. 친구 알리는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지만, 악바르는 그런 알리에게 오히려 주먹을 날린다. 16살에 여자친구를 죽인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알리에게 18살은 바로 그 형이 집행되는 나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악바르의 상황을 알게된 알리. 사형을 앞둔 살인자라도 피해자 가족의 탄원이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알리는 방법을 찾는다. 가깝게 지내는 교도관에게 부탁을 해서 잠깐의 휴가를 얻어 나온 알리는 악바르의 누나 피루제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간다. 지난 3년 동안 피루제가 온갖 노력을 해도 소용없었던 그 일을 알리는 해낼 수 있을까?

  이란의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2004년작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는 관객들을 낯선 이란의 현실로 안내한다. 종교가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이 나라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무척 많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를 한번 보자. 늙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는 여자인 자신이 남자 환자의 몸을 씻기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이맘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이 영화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그 종교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살인자가 무슬림 남성인 경우 피해자 가족이 용서를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 단, 피해자 가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금전적 댓가(Blood Money)를 치루어야 한다.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목숨을 건질 방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무슬림 여성이 살인자일 때에는 그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 기준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Qisas, 코란을 바탕으로 성립된 관습적 처벌법에 명시되어 있다. 영화 속 악바르가 사형을 앞두고도 피해자 가족과 합의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알리는 친구가 죽인 여자친구의 아버지 집을 찾아간다. 죽은 딸에 대한 정의로운 처벌을 원하는 아버지 아블로카셈에게 사면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오히려 아블로카셈은 빨리 사형이 집행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악바르의 가족에게 목숨값을 지불하면 사형은 더 빨리 집행될 수 있다. 이 또한 Qisas에 명시된 것으로,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에 사형을 받을 남자의 가족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남자가 살인 피해자라면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이 사형이 집행된다. 이슬람 율법에서 여자의 목숨은 남자에 비해 덜 중요하다. 아블로카셈은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마련해 얼른 악바르의 죽음을 보려고 애를 쓰는 판국이다. 그의 뜻이 완고하다는 것을 알지만, 알리와 피루제는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 애를 쓴다. 그런 그들에게 조력자가 생긴다. 아블로카셈의 아내는 다리가 불편한 딸을 데리고 그와 재혼했는데, 그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편에게 합의를 종용한다. 합의금으로 엄청난 돈을 요구받은 피루제는 세탁부 일로 겨우 먹고 사는 처지이다. 악바르의 사면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집을 드나들던 알리를 좋게 본 아블로카셈의 아내는 돈 대신에 알리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궁리를 하게 된다. 알리는 친구의 목숨을 살리려면 원하지도 않은 결혼을 해야할 판이다. 알리는 피루제와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고,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피루제를 어떻게든 돌보고 싶어한다. 알리의 고민은 깊어간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아주 단순하게 시작한 알리의 여정을 촘촘하고 복잡하게 짜가면서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확 밀어버린다. 정말 대단한 솜씨다. 자, 당신이 영화 속의 알리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친구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이 가장 소중하므로 그런 선택은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친구는 더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무려 '목숨'이 걸린 문제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서 살아간다면, 알리는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그 선택을 기억해야만 한다.

  자신의 여자 친구를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살인을 저지른 악바르. 그런 악바르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정의에 대한 절규, 살인자일지라도 소중한 동생의 목숨을 살리려는 피루제, 친구의 목숨값으로 자신의 인생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의 알리, 장애인 딸의 인생을 위해서 온당치 못한 요구를 태연하게 하는 아블로카셈의 아내. 그들이 갇혀있는 복잡한 윤리적인 딜레마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헤집어 놓는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는 자신들의 행동에 각자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은 선과 악, 흑과 백처럼 명확하게 분리될 수 있는 영역에 자리하지 않는다.
 
  아쉬가르 파라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관객들을 불러모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잘 알지 못하는 이란이라는 나라의 현실과 거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영화는 그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그는 윤리적 딜레마에 처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마지막, 알리는 피루제의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들기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관객들은 알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결코 알 수 없다. 이 열린 결말은 놀라운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 감독의 그 이후로 이어질 영화들에 대한 예고편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iranianfilmempire.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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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당신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줄 것인가? 그렇다. 좀 무거운 질문이다. 이 다큐의 끝에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들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아프리카의 흑인 소년은 재치있게 대답한다.

  "난 아직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그 무언가를 찾지 못했어요."

  얀 아르튀스-베르트랑의 2015년 다큐 '휴먼(Human)'은 3년 동안 60여개국의 2000명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주제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들을 다큐로 담아냈다. 제작사에서 인터넷에 공개한 확장판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러닝타임이 무려 4시간 30분에 달한다. 극장판은 그보다 좀 짧아서 3시간 11분이다. 사랑과 행복, 빈부 격차, 노동 문제, 동성애, 전쟁과 폭력, 범죄, 삶과 죽음의 의미, 가족, 이주민, 교육, 장애와 질병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각양각색의 답들이 쏟아져 나온다. 구성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늘에서 찍은 전세계 곳곳의 자연 풍광이 마치 하나의 장을 넘기는 것처럼 각각의 주제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 장면들에 들어간 유려하고 장중한 선율의 음악이 지루함을 상쇄시키는 역할도 한다.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다양한 국가, 인종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 생각들부터 깊이있는 철학적 성찰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역사적 비극에 대한 증언도 들어있다. 캄보디아의 여성은 크메르 루주에 의해 어떻게 자신의 가족들이 죽어갔는지를 들려주고, 르완다의 사람들은 인종 청소 시기의 끔찍한 기억을 말한다. 이슬람 국가들과 러시아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 동성애자들의 증언도 나온다. 부패와 범죄로 고통받는 사람들, 가난과 빈부 격차에 대해 토로하는 이들, 정치적 부당함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이 다큐는 그렇게 온갖 이야기들의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과연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삶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큐를 기획한 의도도 나름대로 의미있고, 또 그 성과물인 'Human'의 만듦새도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의 나열은 도무지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저, '아,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피상적 스침을 만들어낼 뿐이다. 약간의 성찰을 곁들인 영상 서사시쯤 될까?


  'Human'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감정의 움직임, 행동의 촉구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무려 4시간 반에 이르는 다큐를 보고 나서, 대다수의 관객들은 너무나 잡다한 다큐 속 이야기들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 보다는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문구용품점에 가서 예쁜 팬시 문구류들을 잔뜩 구경하면서 몇 개를 샀지만, 집에 와서 서랍 속에 처박아 두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 다큐는 뭔가가 크게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이 다큐에 한국인의 인터뷰는 없었다. 중간에 들어간 영상에 통일교 합동 결혼식 장면이 나왔는데, 집단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조망한 여러 장면 속에 들어있었다. 자막에 'South Korea'라고 표기된 그 장면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다. 특정 종교의 합동 결혼식이 한국을 대표하는 장면도 아닌데, 그걸 구태여 넣은 감독의 의도가 참 황당하게 느껴진다. 알면서도 넣은 건지, 아니면 한국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다큐의 부박(浮薄)함을 드러내는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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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극한직업(2019)'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사는 치킨집 주인의 이 말이었다.

  "아, 아메리칸 스타일?"

  잠복근무를 위한 치킨집을 인수하는 자리에서 형사들은 위장한 자신들의 신분을 소개하는데 서로 말이 엉킨다. 남편 두 명과 아내 한 명. 하는 수 없이 전 남편과 현재 남편으로 소개하자, 치킨집 주인이 이것이 아메리칸 스타일이냐며 놀라워한다. 허버트 로스 감독의 1977년 영화 '굿바이 걸(The Goodbye Girl)'을 보면서 나에게 떠오른 단어는 바로 그 '아메리칸 스타일'이었다. 미국의 유명 희곡 작가 닐 사이먼이 시나리오를 쓴 이 영화는 싱글맘의 사랑 찾기를 '미국식'으로 담아낸다.

  폴라(마샤 메이슨 분)는 서른 셋의 전직 댄서 출신으로 10살된 딸 루시(퀸 커밍스 분)와 함께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동거하던 배우 남자 친구가 쪽지 한장 던져놓고 떠나버리자 폴라는 속상해 하고, 딸 루시는 그런 엄마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런데 남자는 떠나면서 살던 아파트를 자신의 친구에게 세를 내주고 가버린다. 졸지에 집을 비워줘야 하는 처지의 폴라 모녀에게 찾아온 엘리엇(리처드 드라이퍼스 분)은 당분간 함께 살아가자고 제안한다. 서로 맞지 않는 생활 방식 때문에 티격태격하던 폴라와 엘리엇은 조금씩 친해진다. 엘리엇은 어렵게 따낸 셰익스피어 연극 '리처드 3세'의 배역을 제대로 해내고 싶어하지만, 맘에 맞지 않는 연출가 때문에 극심한 갈등을 겪는다. 한편 폴라는 나이든 댄서로서 일자리를 얻기 힘든 자신의 처지에 좌절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위로하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루시도 엘리엇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따르게 된다. 과연 싱글맘 폴라의 사랑찾기는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간다. 무엇보다 영화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서로 좋은 케미를 보여주는 세 배우들의 연기다. 루시 역의 퀸 커밍스는 철없는 엄마와 부대끼며 사느라 일찍 철들어 버린 애어른 역을 깜찍하게 해낸다. 폴라 역의 마샤 메이슨은 당시 남편이었던 닐 사이먼의 창작 의도를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그리고 리처드 드라이퍼스. 그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엄청난 대사들을 그처럼 찰지고 재미있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자세히 들어보면 단어 하나하나 발음이 뭉개지거나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감수성 풍부하고 자존심 강한 연극 배우 역을 진지하고도 코믹하게 잘 연기한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서른 살의 나이였던 그는 아카데미 최연소 남우 주연상 수상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2003년에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의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그 기록을 깨뜨리는 데에는 25년이나 걸렸다.    
 
  아주 잘 만든, 재미난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굿바이 걸'에 흐르는 정서는 지극히 미국적이다. 딸을 데리고 사는 싱글맘이 남자 친구와 동거하며 사는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나라 관객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영화 속에서 폴라가 하는 고백들을 듣다 보면, 이전에도 남자들에게 배반 당하고 남겨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딸 루시가 그런 엄마를 오히려 위로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도 이해가 간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이 미국의 싱글맘 폴라는 남자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이제 폴라의 남자가 된 엘리엇은 루시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밤에 서로 방을 바꾸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네 엄마 방으로 옮겨갈 거야. 루시, 네 생각은 어떠니?"

  정신없이 돌아가는 두 사람의 사랑에 얼떨떨해진 2021년의 한국의 관객과는 상관없이 루시는 쿨하게 좋다고 대답한다. 이것이야말로 '찐 아메리카 스타일'인 모양이다. 루시의 유일한 걱정이라면 엄마가 엘리엇에게 나중에 또 딱지맞고 속상해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꼬마 루시도 역시 아메리칸 키드임에 분명하다. 내가 후진 구시대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이 영화 속의 미국 사람들과 나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살고 있을 뿐이다. 닐 사이먼은 진짜 미국인의 정서와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을 그려낸 희곡,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의 작품 속 대사들은 매우 직관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인물들 내면의 심리적 갈등과 그 깊이를 드러내는 데에는 역부족인 느낌을 준다. 그 때문에 그는 대중적인 인기는 많이 얻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록 아메리칸 스타일을 좀 이해하지 못한들 어떠하랴. 허버트 로스가 보여주는 밝고 희망적인 이 로맨틱 코미디는 마음 칙칙한 어느 날의 영화로 아주 잘 어울린다. 글을 마치기 전에 '굿바이 걸'의 현실 후일담을 말하자면 이렇다. 이 영화로 젊은 나이에 얻게 된 큰 영예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리처드 드라이퍼스는 한동안 마약 문제로 고생하다 재활 치료를 받고 '잠복근무(Stakeout, 1987)'로 재기할 수 있었다. 영화 촬영 당시 닐 사이먼의 아내였던 마샤 메이슨은 그와 여러 작품을 함께 하다 이혼했다. 영민하고 깜찍한 딸 루시를 연기한 퀸 커밍스는 연기 경력을 그리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연기에 재능이 있었음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세 명의 배우들이 가장 빛나고 좋았을 때 만든 영화 '굿바이 걸'은 40년도 더 된 영화임에도 녹슬지 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 출처: oscarcham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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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정원사로 살아온 챈스(피터 셀라스 분)은 자신의 고용주가 죽자, 자산을 정리하는 변호사들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는다. 이제까지 살아온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챈스는 오직 TV로만 세상을 배워왔다. 백치에 가까운 챈스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길에서 차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차주인 대부호의 아내 이브(셜리 맥클레인 분)는 부상당한 챈스를 집에 데려오고, 챈스는 이브의 대저택에서 치료를 위해 머무르게 된다. 이브의 남편 벤(멜빈 더글라스 분)은 엄청난 재력가로 정계의 막후 실력자이기도 하다. 벤은 챈스의 과묵하고 절도있는 태도를 보며 은퇴한 사업가로 생각하며 호감을 갖는다. 벤의 집에 대통령이 정기적인 모임을 위해 찾아온 날, 챈스는 경제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짤막하게 말하는데 그것은 벤과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그로부터 챈스는 의문의 정계 실력자로 부상하며 TV 토크쇼까지 나가는 유명세를 탄다. 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이브를 부탁하기까지 하는데, TV밖에 모르는 바보 챈스는 과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할 애쉬비 감독의 1979년작 '챈스(Being There)'는 TV만 보고 살아온 백치 정원사 챈스의 모험담을 그린 코디미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주인공 챈스 역을 맡은 피터 셀라스의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영문 자료를 읽다가 'deadpan humor'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코미디 연기를 의미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다. 챈스를 연기한 피터 셀라스의 연기를 보고나서야 그 무표정한 얼굴로 보여주는 웃음의 연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드러내지 않는 챈스의 고요하면서도 침착한 얼굴은 그야말로 피터 셀라스만의 고유한, 세련된 연기 기교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준 피터 셀라스는 극단을 운영했던 배우 부모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는 영화 '핑크 팬더(The Pink Panther, 1963)'의 클루소 탐정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화 속 챈스의 말과 행동은 모두 TV에서 보고 들은 것에서 나온다. 그는 말하자면 '미디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챈스가 세상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임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에서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는 커녕 유력 정재계 인사들이 두려워하는 인물로 부상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TV를 비롯한 언론 매체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가 트럼프 정권 시기에 새롭게 부각되게 만들었는데, 트럼프란 인물이야말로 TV 리얼리티 쇼를 통해 쌓은 이미지로 궁극에는 대통령 자리까지 꿰어찬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배경 보다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의 이미지가 어떤 가공할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트럼프 정권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로 'Being There'은 정치인 트럼프의 출현을 예견하는 영화로 과거로부터 새롭게 끌어올려졌던 것이다. 

  이 영화는 폴란드 출신의 미국 작가 저지 콜신스키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콜신스키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의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국제 펜클럽(PEN International)의 미국 지부 회장을 2번이나 맡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온갖 거짓말과 사기, 표절 혐의로 얼룩져 있었다.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재벌가의 미망인과 결혼하기도 했던 그는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둘러싼 거짓들이 밝혀지면서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가 1970년에 발표한 'Being There'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미국 생존기처럼 보인다. 대단한 입담과 거짓말로 미국에서 유명인사로 살아남은 그가 쓴 자전적 고백인 셈이다. 나는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표절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Being There'의 감독 할 애쉬비는 1970년대 미국 영화의 사회 비판적이고 독립 영화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New American Cinema)'의 인물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그런 사조로 정의할 수 없는 뭔가 기이하고 삐딱하게 치고 나가는 지점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야말로 그런 할 애쉬비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덧붙여진 피터 셀라스의 대사 엔지 장면이 그렇다. 감독의 고유한 발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이 마지막 부분은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흠집으로 남았다. 주연 배우 셀라스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서 애쉬비에게 제발 그 장면을 빼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으나 애쉬비는 거절했다. 이 성깔 대단한 감독은 영화 경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약물 문제로 고생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잭 니콜슨이 주연한 그의 영화 '마지막 지령(The Last Detail, 1973)'이 꽤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영화 한 편을 본다는 것은 그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을 둘러싼 이야기와 인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원작자와 감독, 배우의 굴곡진 인생사에서 어쩌면 가장 정점은 이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한 명의 여자 배우일 것이다. 바로 피터 셀라스의 4번째 부인 린 프레데릭이다. 고혹적인 외모로 모델과 배우로 활동했던 린이 52세의 셀라스와 결혼할 때의 나이는 스물 셋이었다. 셀라스는 평소 심혈관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셀라스는 아내 린이 그런 자신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주길 바랬다. 영화 'Being There'을 찍을 때 린은 셀라스의 촬영 현장을 늘 함께 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린 자신의 뜻이라기 보다는 남편의 요구 때문이었다. 린은 셀라스의 뜻에 따르느라 배우로서의 경력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80년에 셀라스가 사망하자, 린은 셀라스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 받는다. 그 액수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무려 300억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문제는 셀라스에게는 전처 소생의 자녀 세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겨우 500만원씩의 재산만이 상속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보다 못한 셀라스의 지인들이 나서서 자녀들에게 유산을 좀 나누어 주라고 부탁했지만, 이 젊은 미망인은 단호히 거절했다. 단지 3년을 함께 한 남편의 재산 대부분을 가져가면서 유자녀에게는 한 푼도 내어주지 않은 린을 향해 언론과 사람들이 보내는 멸시와 조롱,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린은 조국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데, 아마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가겠다는 바램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해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린은 출연 불가 배우였다. 린은 자신의 직업적 경력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었고, 이후로도 2번의 결혼과 이혼을 이어가다 서른 아홉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사인은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알콜 중독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린은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의 재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돈과 인생을 맞바꾼 셈이었다.

  영화 'Being There'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다. 벤의 장례식에 참석한 챈스는 중간에 자리를 떠서 근처의 호수를 거닌다. 그가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그는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를 '걷는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장면은 챈스라는 인물의 인생 자체가 꿈과 같은 허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그 장면이 챈스를 연기한 피터 셀라스의 마지막 여자 린 프레데릭의 인생과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주체할 수도 없는 엄청난 돈에 집착했고, 결국에는 그것에 질식해서 서서히 죽어갔던 삶. 더이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공 속으로 사라진 삶. 'Being There'은 그렇게 영화에 나오지 않은 한 여자의 비극적 인생의 한 장면을 감추어 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inemac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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