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니(제이다 핀켓 분)는 경찰의 오인 사격으로 착한 남동생을 잃었다. 은행원 프랭키(비비카 폭스 분)는 은행 강도가 같은 동네 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청소일을 하며 홀로 아기를 키우는 티션(킴벌리 엘리스 분)은 보모 구할 돈이 없어서 아이 양육권을 아동보호국에 빼앗긴다. 클레오(퀸 라티파 분)는 청소일로 겨우 먹고 사는 가난에 찌든 삶이 지긋지긋하다. 같은 동네에서 20년 넘게 알고 자란 4명의 흑인 친구들은 출구 없는 인생에서 크게 한탕할 꿈을 꾼다. 은행을 털어 그 돈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한 은행털이가 갈수록 대담해지고 훔친 액수도 커진다. 경찰의 추격이 시작되고, 4명의 친구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F. 게리 그레이의 1996년작 'Set It Off'는 당시로서는 좀 드문, 흑인 하층 여성 4명을 주인공으로 한 범죄 액션물이다.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이 가난하지만 착실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서 은행 강도로 돌변하는 그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다. 영화는 막막한 삶의 출구가 범죄로 이어지는 이유를 불평등하고 부당한 사회의 탓으로 손쉽게 돌려 버린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은행을 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Set It Off'의 주인공들은 그런 생각을 곧 실행에 옮긴다. 그들이 감행한 2번의 습격은 성공했지만, 마지막 시도는 비극으로 끝난다. 4명의 흑인 여성 강도단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이야기가 군데군데 비어있는 이 엉성한 범죄 액션물은 비교적 저예산인 9백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었는데, 흥행 수익은 대박을 쳤다. 제작비의 4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고, 영화의 OST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흑인 래퍼 아이스큐브(Ice Cube)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경력을 쌓아가다가, 제작사 뉴라인 시네마의 눈에 들어서 이 영화를 찍게 되었다. 당시에 그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다. 뮤직비디오 감독답게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들어간 러브신과 영화 '대부(1972)'의 일부를 차용해서 넣은 장면들은 실소를 나오게 만든다. 비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상당히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흥행에 성공했느냐는 점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델마와 루이스(1991)'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뉴라인 시네마의 제작 담당자가 시나리오 작가 Takashi Bufford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써보라고 한 것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뷰포드는 시나리오를 써서 냈지만, 3번이나 거절당했다고 15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말했다(출처 Blackfilm.com). 제작사에서는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범죄 액션 영화가 도저히 흥행이 될 것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Set It Off'는 뉴라인 시네마에 꽤 두둑한 돈을 안겨주었고, 이 영화의 성공으로 감독  F. 게리 그레이는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비평가의 시각으로는 한심한 작품이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와는 반대였던 것이다.

  어째서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서사의 완결성도 갖지 못하는 어떤 영화들은 흥행에 성공하는가?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2편의 한국 영화가 있다. '미녀는 괴로워(2006)', '7번방의 선물(2013)'이 그것이다. 그 영화들이 개봉되었을 때,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크게 흥행에 성공했고, 혹평을 퍼붓은 많은 비평가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두 영화가 과연 잘 만든 영화인가? 당시 이 영화를 두고 내 주변의 반응들은 그랬다. '어떤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인지를 점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들이 나왔다. 영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안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2021년 한국의 방구석에서, 먼 바다 건너 미국이란 나라, 1996년의 영화 관객들의 성향을 헤아려 보는 것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그다지 시덥지 않은 영화 보기에 낭비했다는 사실 보다도, 'Set It Off'라는 영화가 당시의 관객들에게 어떤 소구력(訴求力)을 가졌는지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 답답할 뿐이다. 대충 추측해 보기로는 그렇다. 1991년에 있었던 로드니 킹 사건의 여파가 흑인 사회에 지속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흑인들의 불만이 제대로 된 출구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영화 속에서 억눌리고 차별받는 4명의 흑인 여성들의 거침없는 범죄 행각과 폭주가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영화에서 음악이 가진 비중이 눈길을 끈다. 클레오 역을 맡은 퀸 라티파가 은행을 털러 갈 때마다 차에서 틀었던 노래들은 거칠고 폭력적인 가사의 랩 음악들이었다. 실제로 때려 부술 수 없는 부당한 현실은 영화 속의 음악과 주인공들을 통해서 일격을 당하고 균열을 일으킨다. 'Set It Off'는 기존의 블랙 필름(Black Film)이 보여준 남성 주인공들의 액션, 코미디의 장르에서 탈피해 여성 주인공들의 과감한 범죄 액션물을 표방한다. 흑인 관객들 사이에서도 여성 흑인 관객들을 겨냥한 '틈새 시장'을 개척한 영화인 셈이다.


  특정 시대의 '관객성'에 대한 연구나 논문을 쓰는 것은 꽤나 어렵고 까다로운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볼 수도 없고, 다양한 관객의 취향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요약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헤아려 보고 알아내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분명히 '시대의 호흡'으로 대중의 기호와 공명한다. 영화 비평이 단지 텍스트 하나만을 조각조각 내어서 해체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적인 시각일 뿐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와 그 시간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고찰은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다. 다소 시시하고 너절한 이 영화 'Set It Off'를 보면서 1996년의 미국, 흑인 관객들, 특히 하층민의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얻고자 했던 대리만족과 그 어떤 꿈들을 잠깐 동안이나마 생각했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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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도입부, 시끄럽게 돌아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나온다. 오프닝 타이틀에 찍힌 'Directed by Paul Schrader'가 보인다. 내가 감독도 아닌데, 왜 그걸 보고 가슴이 뻐근해졌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 비평과 시나리오 작가로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찍게 된 폴 슈레이더의 심정에 뭔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겠지. 1978년에 찍은 영화 '블루 칼라(Blue Collar)'는 폴 슈레이더의 영화 데뷔작이다. 각본은 그와 그의 형 레너드가 공동으로 썼다. 주연 배우로는 하비 카이텔, 리처드 프라이어, 야펫 코토가 나온다. 영화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세 명의 친구들의 어긋난 우정과 파국을 그려낸다.

  지크(리처드 프라이어 분), 제리(하비 카이텔 분), 스모키(야펫 코토 분)는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삶의 고민을 나누는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3명의 아이를 둔 지크는 소득 탈세로 국세청 직원이 찾아와서 체납 세금을 내라고 닥달을 받았다. 제리는 딸의 치아 교정기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2번의 전과 경력이 있는 스모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흥이다. 여자와 마약으로 찾은 삶의 탈출구를 제리와 지크에게도 가끔씩 선사한다. 스모키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지크는 노조 사무실의 금고를 털자고 제안한다. 어설프게 결성된 3인조 강도는 사무실 금고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금고를 뜯어보니 돈이라고는 600달러뿐. 허탕을 쳤나 싶었는데, 지크는 노조의 비밀 장부를 발견한다. 장부에는 노조가 노조원들 몰래 기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돈 대신에 그걸로 노조에 협박 편지를 보낸 지크. 지크가 노조 임원으로부터 간부 자리를 약속 받은 반면, 제리와 스모키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과연 이들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거칠고 고단한 하층 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른바 영어의 욕설 'F word'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나도 처음 봤다(영화 전체를 통털어 158번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대사와 배역 비중을 가진 지크 역의 리처드 프라이어가 욕설의 절반은 담당한 것 같다. 당시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처드 프라이어는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찍은 1인 3역의 코미디 'Which Way is Up?(1977)'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블루 칼라'의 배역에 더 의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의욕이 너무 지나쳤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길게 만들어서 자기 비중을 높이려고 애를 썼다. 촬영 현장에서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티격태격하는 캐릭터였던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냥 말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치고 박는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감독 폴 슈레이더였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첫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진상 배우 하나가 나대서 난리를 치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프라이어와 제일 많이 대립했던 하비 카이텔은 촬영 그만두고 중간에 가버리려고까지 했다. 골칫덩이 프라이어는 심지어 슈레이더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슈레이더의 정신적 고통이 극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진상 배우 프라이어는 영화의 연출까지 지가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영화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카메라에다 재떨이 던지고 난리치는 폭력이 난무했던 촬영 현장에서 폴 슈레이더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참 마음이 짠해진다. 초짜 감독의 드높은 꿈과 이상은 쪼그라들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대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모키의 죽음 이후 서로 대립하는 제리와 지크.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속에서 고조되는 하비 카이텔과 리처드 프라이어의 갈등은 매우 사실적이다. 지크와 갈라서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제리의 얼굴 표정은 진짜 더러운 뭔가를 응시하는 것 같다. 오로지 자기 분량 늘리기, 배역 돋보이기에 집착하는 프라이어에 카이텔이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 영화는 포스터 마저도 리처드 프라이어의 얼굴만이 양쪽으로 나온다.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쩌리 취급되었던 것은 '흥행' 때문이었다. 제작사는 인기 있는 프라이어의 이름에 기대어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진상 배우를 상대하는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감독 폴 슈레이더는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슈레이더가 오죽이나 고생을 했으면, 이 영화를 개봉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보살 감독 슈레이더는 어쨌든 자기 몫을 해냈다. 촬영장에서는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쳤어도, 영화 속 이야기에는 모든 것이 온전하고 충실하게 담겨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노조와 노조원 사이의 갈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획책하는 노동 계층 내의 분열, 노동 현장의 문제,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로 풀어낸다. 진상 배우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그런 완성도를 보여준 슈레이더는 분명 대단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올라간 그의 이름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데에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폴, 당신의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라고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가운데가 리처드 프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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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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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렝 드 보통은 꽤나 잘 나가는 작가인 모양이다. 이 사람 책이 많이 번역된 것은 잘 팔린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난 그가 쓴 책을 읽고 나서 좋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깊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가볍고 현학적인 문체로 포장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의 기술'의 그 경박스러움과 너절함,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자의식 과잉에 그냥 질려버렸다. 아, 이 사람 책은 그냥 걸러야겠네, 라고 생각한 것이 오래전이다. 이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설도 잘 쓰지 못하면서, 오만가지 잡학 지식을 가지고 철학자 노릇까지 하려든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가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와 토론하고 쓴 미술사 책이다. 당연히 무슨 대단한 전문적 지식은 찾아볼 수 없다.

  겉만 번지르르한 수사와 깊이있게 보이려는 온갖 철학적 문구들을 갖다 붙였지만 그 얄팍스러움이 어디 갈까? 미술사학 전공자만이 미술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평론 쓰는 사람들이 죄다 영화 전공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적어도 해당 분야에 대해 글을 쓰고 책을 내려면 좀 공부라도 제대로 하고, 자기 성찰이나 잘 한 다음에 쓰던가. 이 책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알렝 드 보통이 자기가 미술사에 정통한 것처럼 군다는 사실이다. 뭐 얼마나 미술사 책을 들여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학적이고 장황하게 늘어지는 문장들 속에서 뭔가 건질만한 지식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다지 좋지 않은 투박한 번역도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화려한 빈 껍데기. 이 책을 덮고나서 나에게 떠오른 이미지는 그랬다.

  이 책에서 그나마 건질만한 것은 괜찮은 도판들 보는 재미 정도나 될까? 책의 초반부에 나온 어떤 그림이 무척 반가웠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그림으로, 화가 이름을 안보고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반갑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을 되새겨주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벌써 2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인데, 사이 톰블리의 그림 몇 점이 어느 갤러리에서 전시된 적이 있었다. 그걸 찾아가서 보았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과 난감함이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느끼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커다란 캔버스에 아무리 봐도 애들 낙서 같은 작은 글씨와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는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그가 현대 회화의 거장이란다. 내가 이해하기 힘든 현대 미술의 그 도저함에 발걸음을 돌리며 갤러리를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사이 톰블리가 그렇게 뜬 데에는 잘 나가는 화상(畫商) 레오 카스텔리, 톰블리의 후예들인 바스키아와 낙서 미술가들이 한 몫을 했겠지만.

  책에 나온 현대 회화 도판들, 사진들, 설치 미술 작품들을 보다 보면 지금의 예술계가 돈과 상업성에 얼마나 깊숙히 발을 담그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개념을 선점하고 그것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가 잘 나가는 미술 작가가 되는 지름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도무지 깊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처럼, 예술이 지나치게 자본과 결탁하고 거기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릴 때,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를 찬찬히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만이 이 책의 유일한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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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여배우 머틀은 오랜만에 연극 공연의 배역을 맡았다. 시범 공연을 끝내고 나오던 비오는 날 밤, 십대 여학생 팬이 사인 요청을 하고 머틀은 흔쾌히 수락한다. 머틀은 곧 차에 타고 떠나려는데 그 여학생이 길에서 차 사고를 죽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사건 이후, 머틀은 제대로 연기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연극의 연출가, 극작가, 제작자가 나서서 머틀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데, 머틀의 상태는 갈수록 엉망이 된다. 마침내 연극이 정식 상연되는 오프닝 나이트 날, 주연 배우인 머틀은 공연 시작 전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공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연출가 메니(벤 가자라 분): 난 어떻게든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야 해. 골칫덩이 머틀이 말만 잘 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냥 열성팬 여자애 사고로 죽은 일 가지고 왜 저러나 몰라. 원래 배우라는 인간들이 제멋대로인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새벽 4시에 불안하다고 전화를 하지 않나, 마누라가 눈총 주는 것도 참아가며 징징거리는 소리 들어주었다구.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머틀하고 내가 무슨 사이가 아닌가 싶어서 잔뜩 신경 곤두서 있어.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고 자기가 만들어 내질 않나, 힘들다고 술 퍼마시고, 도대체 머틀 쟤를 어떻게 하면 좋냐고. 프로의 세계에서 저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내가 연극학과 학생하고 공연하는 건가? 진짜 돌아버리겠네...

극작가 사라(조안 블론델 분): 저 정신나간 여배우가 내 연극을 망치고 있어. 늙은 여자 배역이 싫다니, 자기 나이도 인정 못하고 정말 한심하네...

  작가가 목숨 걸고 쓴 대본이 우스운가 보네. 지 멋대로 대사를 바꾸다니. 자기는 폐경기 여자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길래, 나이를 물었어. 대답을 못해. 내가 보기엔 몇년 있으면 그렇게 되겠구먼. 늙은 여자 역을 잘 해내면 진짜 늙어버릴 것 같대. 말이 되는 소리야? 대체 배우를 왜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 사건 이후로 상태가 많이 안좋길래 귀신이라도 씌운 거 아닌가 싶었지. 아는 영매(靈媒)에게 데려가기까지 했는데 그냥 나와버리는 거야. 그러더니 한밤중에 내 집에 찾아와서 얼굴을 짓찧고 난리를 치더군. 진짜 미친 거야.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명성이 저 미친 여자 때문에 무너져버릴 것 같아. 이걸 어쩌면 좋냐구...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츠 분): 이 공연을 잘 해내고 싶어. 그런데 머틀이 계속 문제를 만들고 있어.

  그냥 난 연기에만 몰두하고 싶을 뿐이야.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왜 자꾸 개인적인 감정으로 무대를 엉망으로 만드냐구. 뺨 때리는 연기가 기분이 나쁜지 나를 후려치고, 뺨 맞고 쓰러져서 난리를 쳐. 대본에 있는 걸 어쩌란 말이야. 여자애 죽는 걸 보고나서는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해. 내가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술 취해 나한테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데 이게 뭔가 싶네.

연출가 메니의 부인(조라 램퍼트 분): 남편 연극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여배우가 속을 어지간히 썩이는 모양이네.

  새벽 4시에 전화하는 거 보고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어. 저 세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긴 1년 전에 19살짜리 계집애하고 바람난 남편이란 인간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 싹싹 빌고 용서해달라길래 하는 수 없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말야. 극장에 가서 볼 때마다 남편에게 허물없이 친하게 굴더군. 어휴, 그냥 공연 끝날 때까지만 내가 참자. 메니도 연극 때문에 잘해주고 그러는 거겠지. 근데, 어째 저 여자, 많이 불안해 보여. 저 상태로 간다면 연극이 제대로 올라갈지나 모르겠네.

여배우 머틀(지나 롤랜즈 분): 난 늙지 않았어. 왜 이딴 배역을 내가 연기해야되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떻게든 잘 해내려고 하는 내 맘을 아무도 몰라줘.

  죽은 여자애 장례식에 갔었어. 그 아버지가 나한테 그러더군. 아이가 있다면 여기 올 생각을 못했을 거라고. 그래. 난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지. 17살 때부터 연기로 살아온 인생이야. 난 아직도 내가 젊고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데 늙은 극작가 여편네가 쓴 자기 이야기를 내가 연기해야 되는 거야.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는 걸까? 난 프로니까 어떻게든 해낼 거야. 내 방식대로 연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인데, 메니는 날 다그치기만 해. 왜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죽은 여자애가 나타나서 날 괴롭히고 있어. 진짜 걔한테 맞았다니까. 무섭고 놀라서 집에서 뛰쳐나왔어. 결국 극작가 할망구가 소개해준 영매 찾아가서 그 애를 불러낼 수 있었어. 또 나를 때리길래 나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었지. 이 연극, 그냥 그만두고 싶다.

       
  존 카사베츠의 1977년작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는 연극 공연을 하게 된 여배우의 심리적 혼란과 두려움을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는 'The Second Woman'이라는 연극이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이런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극중극(劇中劇)의 형식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엇이 '진짜 자신'인가를 찾아나간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카사베츠가 공포 영화의 장르적 속성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여배우 머틀이 목격한 죽은 십대 팬 낸시는 어떤 혼령이나 기운의 형태가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로 머틀에게 나타난다. 이 영화를 별다른 생각없이 보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렇게 등장하는 낸시는 갑자기 '훅'치고 들어오는 주먹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공포 영화, 심령 스릴러의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의 얼개가 겹쳐있다. 중년 여배우가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 연기와 경력에 대한 강박, 그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쇼 비지니스 세계의 면면들, 이런 것들이 아주 흥미있게 펼쳐진다. 러닝타임 2시간 24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지는 속도감과 짜임새 있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주연 배우 지나 롤랜즈의 경이로운 연기가 이 영화를 놓칠 수 없는 명작의 반열로 밀어올린다. 카사베츠는 'Faces(1968)', 'The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이전에 감상한 두 작품 보다 이 영화가 그의 진정한 걸작이라고 느낀다. 카사베츠도 그 스스로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지나 롤랜즈의 눈부신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지나 롤랜즈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사진 출처: filmkuratorium.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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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엔 당신이 일 그만두고 아버지를 모셨으면 좋겠어."

  남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간호를 위해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말에 순순히 '그래요, 여보'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손씨 부인(소방방 분)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남편의 요구를 일축한다. 손 부인은 마흔 살 생일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그 혼란스런 와중에 시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는다. 남편은 아버지 문제라면 손을 내젓는 자신의 동생들에게는 별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아내에게 그 일을 미루고 싶어한다. 화장지 회사에서 잔뼈 굵은 실무자로, 집에서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 뒤치다꺼리, 이제는 치매 시아버지 수발까지 해야한다. 손 부인은 그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1995년작 '여인 사십(女人四十, Summer Snow)'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커다란 삶의 과제와 씨름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오늘날에도 나이든 부모의 병수발이 자식들에게 어려운 문제라는 점은 26년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요새는 대부분 요양원과 요양 병원을 1차적인 선택지로 생각하고, 비용 분담이 자식들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는 정도가 차이라고나 할까. 물론 '여인 사십'의 손 부인에게도 그 선택지가 있었고, 치매 증상이 심해진 시아버지를 어쩔 수 없이 시설에 맡긴다. 영화는 그 선택을 하기까지 손 부인이 겪는 일상의 힘듦을 마치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아무 데나 소변을 보고, 한밤중에 고래고래 지르는 시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는 일은 손 부인만이 할 수 있다. 남편도 아들도 별 도움이 안된다. 시아버지 수발도 힘든데, 직장에서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신입 여직원에게 밀려서 찬밥 신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어쩔 수 없이 주간 보호 센터에 시아버지를 보냈는데, 맘대로 밖으로 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일을 겪는다. 결국 요양 병원에서 지내게 된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집에 가고 싶다며 울먹인다.

  손 부인은 직장을 때려친다.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함께 늙어가고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서의 시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중요한 의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 'Summer Snow'는 시아버지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꽃비를 시아버지가 눈이 내린다고 좋아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같은 제목의 일본 드라마가 하도 유명해서 이 제목으로는 영화 검색이 잘 안된다). 가족이 모두 모여서 주말 농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시아버지가 손 부인을 불러서 조용히 말한다.

  "인생이란 건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거란다."

  그 부분의 영어 자막이 아마 'Life is full of joy'였을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감독 허안화는 손 부인의 고단한 사십을 그려냈단 말인가? 갑자기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여인 사십'은 분명 가부장제 질서에 여성을 순응시키거나,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성이 치루어야 하는 일방적인 희생을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손씨 부인이 내리는 결정의 배경에 자신의 소망과 욕구 대신 '가족'과 '화합'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애써서 감추는 느낌을 준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내는 책임감 있는 직장 여성, 좋은 아내와 엄마, 시아버지 병수발을 기꺼이 떠맡는 며느리, 이 모든 역할을 손 부인은 해낸다.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손 부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주어야 한다고 믿는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시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챙겼던 시어머니, 치매 걸린 성질 고약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한 여사,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한 여사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난 당신 아내 노릇 안해요. 남편 역을 내가 할게요."

  섬김과 보살핌의 대상으로서의 '남성'. 이 전통적 가치관은 손 부인의 윗세대가 충실히 따른 것이다. 손 부인은 현대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가부장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손 부인에게 사십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가족의 안정'이다. 직장을 그만 둠으로써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생 살이에 미숙한 아들에게는 조언자로, 시아버지에게는 좋은 간병인이 되고자 한다. 이 선택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인다. 그럼에도 손 부인의 결정은 시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에 의해 보상받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기쁨 그 자체라는 말로 들린다.

  이 영화를 2021년에 다시 만든다면 손 부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동일한 선택을 한다면 이 영화를 보던 여성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의 손씨 부인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둘 일도 없으며, 치매 병증이 심한 시아버지는 가족과 상의하여 선택한 요양원에 보내며, 비용은 형제들 간에 공정히 분담하도록 할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보는 일은 이렇게 시대와 가치관의 간극을 느끼게 만든다. '여인 사십'의 손씨 부인은 스스로 고달파짐으로써 가족의 문제를 떠안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였지만, 2021년을 살아가는 어떤 손씨 부인에게는 삶의 '균형'과 책임의 '분담'이 중요한 가치이다. 허안화의 '여인 사십'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족주의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구시대적이며 진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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