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박여진 옮김 / 윌북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5년 동안 내 책장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것인데 한번 쓰윽 보고 그냥 넣어 두었다. 책 밑에 찍힌 서점의 붉은 도장의 날짜가 2015년 4월.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다시 꺼내 보았다.


  평생을 가정부와 유모로 여러 집들을 전전했던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던 마이어는 죽은 후에서야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 사진들이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수집가 존 말루프가 마이어가 남기고 간 대부분의 네거티브 필름과 사진들을 경매를 통해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마이어의 사진이 가진 진가가 알려지면서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 일어났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말루프는 혈족이 아니므로 유산의 정당한 소유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혈통 찾기 전문가, 족보 탐정들이 동원되어서 유럽에 있는 혈연들을 찾아냈고, 그 진흙탕 소송은 2021년 현재 아직도 진행 중이다.


  책에 실린 마이어의 사진을 본 내 느낌은 그렇다.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려면, 그래도 나름의 독자적인 자기 세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이어에게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이어는 거리의 사진사는 될 수 있어도, 사진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이어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대의 유명한 사진 작가들 여럿이 떠오른다. 로버트 프랭크의 '아메리칸'이 보여줬던 미국의 시대적 초상, 다이앤 아버스가 탐험했던 기괴한 인물들과 비주류의 세계, 그리고 빌 커닝햄의 패션 스트리트도 겹쳐서 보인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온갖 잡동사니들의 총집합 같다. 


  마이어는 정말로 평생에 걸쳐서 대단히 많은 사진을 찍었고, 어쩌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 가정부와 유모로 일했던 시간 빼고 나머지를 사진기와 함께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저장 강박증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도 같다. 자신이 찍은 사진과 필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영수증과 서류도 마이어의 수집 목록에 들어 있었고, 그것이 창고 몇 개의 분량이었다고 한다. 마이어의 사진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도 사후에 창고 보관비를 내지못해서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수집하고 쌓아놓기만 했을 뿐, 마이어는 정리를 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생전에 유언장이라던가, 말년에 자신의 물품과 관련해서 무언가 법적인 조치라도 취했다면 지금의 지저분한 소송은 없었을 것이다. 마이어의 사진들은 그 소송 지옥에 갇혀서 대중들과 만날 기회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카메라와 함께 평생을 보내면서 삶의 무게를 지탱했던 이가 남긴 사진이라도 빨리 빛을 볼 수 있기만을 바랄 밖에.


  마이어의 사진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진기를 들고 찍은 자신의 많은 초상 사진이다. 그 사진들은 사진기가 마이어 자신의 생의 근원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사진기를 들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세상과 사람들을 담아낸 사람. 이 책의 제목 '나는 카메라다'는 마이어를 나타내는 가장 명징한 명제이기도 하다.


  따뜻한 가족이 있는 가정, 안정된 직업, 평온한 일상,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이어가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오직 '카메라'만이 마이어가 가진 전부였고, 그 카메라가 마이어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렇게라도 버거웠던 삶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고 축복일지 모른다. 온 생애를 걸쳐 평범한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지만, 마이어는 자신이 남긴 사진을 통해 특별한 삶을 지속할 토대를 마련했다. 마이어의 사진을 만나는 이들은 마이어를 어떤 식으로든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진들에 빛나는 재능과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음에도 거기에는 번득이는 열정과 도저한 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이어의 사진 세계로 가는 작은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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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다큐멘터리(Personal Documentary)를 만든 감독이 들을 수 있는 심한 혹평이 있다면 무슨 말일까? 아마도 다큐를 본 관객의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닐까?


  "일기는 일기장에."


  자기 자신,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 사적 다큐는 어쩌면 다큐 제작자에게 가장 편하고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의 이야기가 사회와 만나는 접점이 없고, 단순히 흥미있는 이야기이거나 그저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이라면 다큐가 아니라 '영상 일기장'이 되는 일은 흔하다. 그러므로 사적 다큐를 만드는 이들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확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Gallivant(1996)'를 만든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앤드류 쾨팅은 그런 지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쾨팅은 쥬버트 증후군(Joubert Syndrome)을 가진 어린 딸 이든과 자신의 노모 글래디스의 여행기를 이 다큐에 담아냈다. 염색체 이상으로 뇌와 신체의 기능을 비롯해 언어 능력에 장애를 가진 이든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응'과 '아냐' 정도가 이든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할머니 글래디스는 끊임없이 이든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이든이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여행하는 동안 글래디스는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 얼굴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이든의 표현법을 터득해 나간다. 그렇게 할머니와 손녀는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가게 된다.


  'Gallivant'의 기본적 이야기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할머니와 손녀가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거기에 감독이자 글래디스의 아들, 이든의 아버지로서 쾨팅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다큐 내내 부각시킨다. 관객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든의 손짓과 감탄사가 가진 의미를 아버지 쾨팅은 알고 있다. 이든이 언덕 위에 자리한 거대한 성채 앞에서 무언가 표현을 하는데, 쾨팅은 기가 막히게 딸의 마음 속 언어를 알아채서 자막으로 보여준다. 정말로 그가 장애를 가진 딸 이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절절한 깊이를 가늠케 한다. 웨일즈에서 스코틀랜드, 영국의 동남부 해안에 이르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여행하면서 그렇게 이 세 명의 가족은 서로 더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 과정을 담아내는 쾨팅의 서사 방식은 결코 단순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빠르게 배속 편집된 화면이 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물들의 말은 제대로 잘 들리지 않으며 장면들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뉴스 릴(news reel)과 여러 자료 화면, 라디오 방송, 수화로 제작된 교육용 화면, 쾨팅과 제작진이 분장하고 찍은 장면들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며 관객의 집중력을 시험한다. 마치 실험 영화를 찍듯 개연성 없는 극도의 클로즈업, 여행지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던지는 별 의미없는 쾨팅의 질문들,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음악(로만 폴란스키의 1966년 영화 'Cul-de-sac'의 음악을 차용했다)은 일반적인 여행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있다.


  여행지의 풍광도 평화로움이나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의류 공장에서는 거품이 가득한 폐수가 쏟아지며, 'Clootywell'이라는 마을에서는 온갖 종류의 속옷이 나무에 걸려있는 기이한 광경과 마주한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성황당 당산나무에 묶어놓은 색색의 헝겊들을 생각하면 될듯 하다. '이것이 우리 가족이 여행하면서 보고 만난 1995년의 영국과 영국인의 모습이다'라고 쾨팅은 선언하는 것 같다. 다소 낙후된 영국 북부를 비롯해 소도시 사람들은 생기가 없고, 정부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는다. 그런가 하면 시골 마을에서의 전통춤과 마을 주민의 하모니카 연주도 나름의 볼거리로 들어 있다. 그저 되는대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혼란스러운 가족 여행기는 외부 세계와 사람들로 그 방향을 넓혀 간다.  

  

  그렇게 'Gallivant'는 가족 일기장의 한계를 넘어서 사회적 접점을 만들고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 보기 편한, 감동이 가득한 다큐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큐를 전공하거나 제작하려는 이들의 필수 감상 목록에는 들어가겠지만, 일반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를 보는 일은 오래된, 그렇지만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어떤 무언가와 만나는 일이다. 앤드류 쾨팅은 별 의미없이 돌아다니며(gallivant) 자신이 만난 영국인들과 그들의 삶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그는 사적 다큐가 가진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서 온갖 영화적 실험이 가득한 자국 문화 탐방기를 만들어 냈다.


  "난 이든과 함께 지낸 매순간을 즐겼어. 그러니까 그 말은... 이 아이와 내가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이겠지."


  생의 황혼의 시간에 서있는 노모에게는 손녀딸과의 살가운 시간을, 딸 이든에게는 가족 여행의 추억을, 쾨팅 자신은 새로운 영화적 탐험을 하면서 그 시대의 영국을 담아낸 작품. 'Gallivant'는 그런 다큐이다.



*사진 출처: tainiothiki.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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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수도원 피정에서 원장 신부님에게 들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하루는 수련 수사 두 명이 화장실 청소를 하다 말고 신부님을 찾아왔다고 했다. 서로 청소하는 방식이 다른데,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좀 생각해 보다가, 화장실을 반으로 나눠서 각자의 방식으로 청소하라고 했어요.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화장실 청소 같은 것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나누어 할 수 있다지만, 만약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어떨까? 나카하라 슌 감독의 '12명의 상냥한 일본인(The Gentle Twelve, 1991)'은 뜻하지 않게 배심원으로 위촉받은 평범한 시민 12명이 살인 피의자의 유무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 평결 과정을 담아낸다. 그들이 내리는 평결에 따라 남편을 죽인 혐의를 짊어진 젊은 여성의 남은 인생이 달라지게 된다. 단 1명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평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마 시드니 루멧 감독의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을 본 이들이라면 쉽게 눈치를 챌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영화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1997)'의 각본을 쓴 미타니 코키는 '일본에도 배심원 제도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가정하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이 미국 사법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은 덜 무겁고 경쾌하다. 러닝 타임이 2시간 가까이 되는데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12명의 배심원들에게는 이름이 없고, 배심원 1호, 2호와 같이 번호가 부여된다. 영화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배심원장을 맡은 1호의 제안에 따라 거수로 피의자의 유무죄를 평결하게 된다. 젊은 여성 피의자는 폭력으로 이혼한 남편의 재혼 요구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남편을 밀쳐서 트럭에 치여 죽게 만들었다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다. 배심원들은 재판 과정을 모두 보았고, 이제 평결을 내려야 한다. 미모에, 기구하고 가련한 인생사를 가진 여성 피의자에게 동정심을 느낀 배심원들은 별다른 토론도 하지 않고 전원 무죄 평결에 이른다. 그렇게 배심원들이 모두 방을 나서려는 순간, 배심원 2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유죄를 주장한다. 그때부터 치열한 토론이 시작된다.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에는 토론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행태들이 다 나온다. 큰 소리로 우기기, 비꼬기, 사실 왜곡, 끼어들기와 거짓말, 감성에의 호소... 각각의 배심원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직업, 살아온 이력에 따라 피의자의 유죄와 무죄를 주장한다. 그 과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이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기 보다는 배심원들이 가진 개인적 편견과 경험에 기대고 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과연 사람이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나름의 논리와 증거를 들이대며 유죄를 강력히 주장하는 배심원 2호의 반대편에 배심원 6호가 있다. 한마디로 무지막지하게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는 이 사람의 판단 근거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다. 노총각으로 살면서 연애도 못해봤는데, 피의자의 남편은 별로 잘 생기지도 못했으면서 여자들에게 빌붙어서 편하게 살던 한심한 인간이므로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면서 피의자의 무죄를 큰소리로 주장할 때 묘한 타당성이 느껴진다. 가치 판단에서 감성이 차지하는 비중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뭐랄까, 필링(feeling)이랄까..."


  토론이고 뭐고 다 귀찮고, 그냥 느낌상 그렇다고 말하는 배심원 4호도 있다. 그 어떤 합리적인 추론도 마다하며 그런 감정적 판단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배심원들이 여럿이다. 토론이 거듭되면서 고민하는 배심원들의 마음은 요동친다. 영화는 그렇게 최종 평결에 이르기까지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나름의 유머 감각 또한 놓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제작년도가 1991년이니, 30년이나 묵은 영화이다. 그럼에도 '12명의 상냥한 일본인'에는 구식의 촌스런 감성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미타니 코키가 써낸 생생한 대사들은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 있다. 평결이 이루어지는 방에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대립과 갈등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그 내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연극으로 상연되면서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물론 장점만 갖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 속 3명의 여성 배심원 캐릭터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명은 중년 부인으로 피의자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다른 한 명은 그저 수첩에다 정리만 잘 하는 맹한 노처녀, 그리고 이랬다 저랬다 줏대없이 휩쓸리는 젊은 엄마가 그들이다. 어떻게 죄다 좀 덜 떨어진 캐릭터들로 묘사된다. 그것이 단순히 여성 캐릭터들에게 부여된 우연한 특질들인지, 아니면 일본 사회에서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여러 편견의 집합체로서 묘사된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건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 인물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남성 배심원 캐릭터들도 있다. 하지만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하나같이 다 그렇다면 관객의 입장에서 마냥 웃을 수만도 없다. 거기에다 재판에서 나온 아줌마의 증언을 두고 남자 배심원들이 보여주는 지독한 편견과 비아냥은 어딘지 모르게 뒤틀려 있다. 어떤 면에서 그 점이 구시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12명의 상냥한 일본인'과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으로 통용되고 있다. 일본어 제목의 뜻대로라면 '상냥한'이 맞지만, '마음 약한'이라는 제목이 심정적으로는 더 맞지 않나 싶다. 이 영화 속의 배심원 캐릭터들은 모두 '약함(weakness)'을 지녔으며, 그것이 그들이 내리는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사실 그들만이 그런 약점을 가진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약함과 함께, 평결이 이루어지는 영화 속의 그 방에서 자신은 과연 어떤 편에 설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 출처: asianwi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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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는 어떤 면에서 범죄 수사물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 드라마로 인해 시청자들은 범죄 현장에서의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증거 분석에 사용되는 온갖 첨단 기법과 부검 과정에서 밝혀지는 의학적 사실도 접할 수 있었다. 증거물의 분석 과정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놀랍도록 사실적인 화면에 감탄을 금치 못하기도 했다. 그런 것에 익숙한 오늘날의 관객에게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은 좀 뜬금없는, 아주 구식의 추리물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추리 소설 작가로 부와 명성을 쌓아온 할란 트롬비는 85세 생일 다음날, 자신의 저택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타살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경위 엘리엇과 부하 경관 와그너, 그리고 이 영화에서 실질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 분)이 할란의 저택을 찾는다. 트롬비 일가는 생일 저녁 각자의 행적들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고, 그 와중에 할란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일가족들의 혼란과 분노는 극에 달한다. 놀랍게도 할란의 저택, 책의 저작권을 비롯해 모든 재산이 그의 건강을 돌보던 고용 간호사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 분)에게 상속된 것. 과연 할란의 죽음은 타살일까, 자살일까? 마르타가 그의 재산을 전부 상속받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모든 이야기가 러닝 타임 130분에 걸쳐서 펼쳐진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영화화한 일련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있는 영화팬들이라면 이런 고전 추리물의 귀환은 꽤나 반갑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영화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르큘 포와로를 꼽으라면 피터 유스티노프일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작품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1974)'은 앨버트 피니가 포와로 역으로 나왔지만, '나일 강의 죽음(1978)'을 본 관객들은 유스티노프를 포와로의 환생으로 생각했을 법하다. 약간의 허세와 유머 감각 뒤에 숨겨진 치밀하고 이지적인 면모를 보여준 포와로의 모습을 유스티노프는 아주 잘 연기해냈다. '나이브스 아웃'의 사립 탐정 블랑은 그런 포와로의 모습과는 다소 이질적이다. 무뚝뚝하고 뭔가 어설픈듯이 보이지만 냉철한 수사 감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이 영화에서 균형감을 가진 심판자, 중재자 역할로 나온다. 


  '나이브스 아웃'은 13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을 즐겁게 속주(奏)한다. 트롬비 일가 구성원들 사이 얽히고 설킨 애증의 비밀이 잘 포장된 초콜릿들을 하나씩 까먹는 것처럼 펼쳐진다. 관객들은 마침내 노 추리작가의 죽음에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되고, 마르타가 고귀한 승리를 쟁취했다는 데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추리극의 외피 안쪽에 아주 분명한 정치적 서사를 펼쳐 놓는다.


  할란의 생일날 저녁에 일가족들이 모여서 트럼프의 이민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할란의 셋째 아들 월트 부부와 그 아들은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한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조니와 그 딸 메그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렇게 트롬비 일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 보면, 뭐랄까, 미국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들을 대변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이들이 '돈' 앞에서는 하나로 똘똘 뭉친다. 정작 한 푼의 유산도 일가족 누구도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교양이라는 덕목으로 장착된 모든 것들을 내던진다. 셋째 아들 월트는 마르타의 어머니가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상속 포기를 종용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메그조차 자신의 대학 등록금과 미래 앞에서 마르타와 대립한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이 추리극이 여러 정치적 수사로 가득차 있음을 감추지 않는다. 할란의 저택은 그 자체로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변한다. 영화 말미에 블랑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 집은 파키스탄 사람에게 헐값에 사들인 것으로 트롬비 일가의 근원적 부의 시작은 이민자의 집이었다.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단검이 장식된 의자는 폭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원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과 박해, 시민 전쟁으로 부르는 남과 북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온 노예제와 흑인 차별, 그리고 오늘날의 배타적인 이민자 정책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서로 다른 정치적 세력들 사이의 칼을 빼든(knives out) 대립의 역사였다.


  마침내 마르타는 정당하게 할란의 유산 상속자 자격을 획득한다. 할란이 늘 쓰던 컵을 들고 2층의 테라스에서 마당에 서있는 트롬비 일가를 바라본다. 컵에는 '내 집, 내 규칙, 내 커피(My House, My Rules, My Coffe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할란을 성심껏 간호한 노력을 봐서 나중에 보살펴 주겠다고 짐짓 선심을 썼던 셋째 아들 월트를 비롯해 나머지 가족들은 마르타의 호의를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속물 근성에 찌들리고,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돈을 물쓰듯 하며, 속임수와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서로를 위선으로 대했던 트롬비 일가는 할란의 진정한 상속자가 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마치 할란의 저택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당한 주인은 이민자들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사건의 해결로 마르타의 결백을 입증한 탐정 브누아 블랑의 이름이 가진 뜻을 되새겨볼만 하다. 그의 이름 자체가 참 흥미로운데, '브누와 블랑(Benoit Blanc)'은 '축복받은 백색'이란 뜻이다. '백인됨(Whiteness)'은 미국의 역사에서 미국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 정치, 문화, 다양한 배경들이 직조된 미국의 주류 지배 계층의 특질이다. 감독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을 통해 그 '백인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가해졌던 비인간적인 처우와 정책들은 '백인됨'의 극우적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 편향된 가치가 아니라 공정성과 합리성, 이성적 사고를 가진 '백인'으로서의 브누와 블랑 같은 이들이 오늘날의 미국에 필요함을 역설한다.  


  미국의 많은 정치학자들은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뜻하는 'Trumpism'이 트럼프의 퇴임 이후에도 금새 청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가져온 분열과 대립, 백인우월주의와 극우주의 세력의 부상이 결코 쉽게 사그라들 수 없는 것임을 미국 내에서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브스 아웃'은 오늘날의 미국이 직면한 정치적 격변기에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련된 은유를 추리극의 외투를 덧입혀 보여준다. 이 영화의 관객들은 그 외투 안쪽에 자리한 정치적 서사를 놓치지 않고 볼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news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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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하다 보면, 어떤 건 어디다 버려야할지 애매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쓰지 않는 전선줄 같은 것들. 줄의 외피는 플라스틱인데 그 안에는 금속으로 되어 있으니 대체 어디다 버려야 맞는 걸까? 'Welcome to Sodom(2018)'을 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다. 그냥 전자 제품과 같이 버리는 것이 제일 낫고, 따로 버려야 한다면 금속에다 넣는 것이 맞다. 해마다 25만톤에 해당하는 전자 제품 쓰레기들이 불법적으로 이 나라에 폐기된다. 이 나라의 북부에는 그렇게 쌓인 거대한 전자 쓰레기의 대지가 있고, 그것을 쓸모있는 자원으로 다시 살려내는 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 그 나라는 '가나(Ghana)'다.


  크리스티안 크뢰네스와 플로리안 바겐자머가 만든 'Welcome to Sodom'은 환경 문제를 다룬 다큐로 그 주제가 꽤나 묵직하다. 소돔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부패와 타락의 도시다. 가나 북부에 위치한 전자 쓰레기 평야를 그곳 사람들은 '소돔'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는 말그대로 어떤 지옥도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전자 제품을 분해하고 전선줄을 태우며, 아이들은 부서진 고철이 떨어진 땅바닥을 자석으로 훑고 다닌다. 더이상 쓸 수 없다고 버린 전자 제품들이 그곳에서는 소중한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곳의 풍경은 끊임없이 부수는 망치 소리와 화염, 그로 인해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로 채워진다.


  "이 쓰레기들은 유럽에서 왔어요. 난 언젠가 그곳으로 가려구요. 여권도 만들어 놨어요.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쓰레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다니며, 아이들이 뛰논다. 이 다큐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나름의 경쾌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망치 소리가 주된 배경음으로 깔리는 그곳 소돔에는 미친 설교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신의 심판을 부르짖는가 하면, 누군가는 즉석 공연을 하기도 한다. 쓰레기 수집상 래퍼는 자신의 일상을 랩으로 만들어 부르는데, 그는 소돔의 삶이 노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면 젊은이들의 춤판이 벌어지고, 어느새 쓰레기장은 클럽으로 변모한다. 


  천막 식당, 야외 이발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수를 파는 물장사꾼도 있다. 이 다큐의 관객들에게 소돔은 현실판 쓰레기 지옥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도망자들에게는 그 어떤 걱정도 없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감비아에서 의대를 다녔다는 수집상은 자신의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 그는 게이이고 유대인이다. 그런가 하면 우주인이 꿈인 어린 고철 수집가도 있다. 소년은 우주인이 되어 자신이 사는 땅을 멀리서 내려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


  'Welcome to Sodom'은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들과 살아가는 이들의 여러 목소리들을 담아내면서, 지금 현재 전지구적으로 당면한 전자 쓰레기(Electronic waste) 문제를 조망한다. 관객들은 선진국에서 빈곤국으로 이동하는 폐기물들의 이면에 많은 비합법성과 불공정성이 존재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엄청난 전자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적 문제와 그것을 떠맡은 이들의 삶에 미치는 해악도 마주한다.   


  이 다큐는 촬영이 무척 좋은데, 사방이 유독가스에 온갖 소음과 냄새로 진동하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안정적인 구도로 찍을 수 있었나 내내 감탄하게 된다. 핸드헬드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에서도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돔의 래퍼가 노래 부르는 장면을 찍을 때는 다큐에서 뮤직 비디오로 전환되는 것 같은 생동감과 속도감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다큐에서 그와 같은 장면은 나름의 볼거리와 영화적 리듬을 부여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소돔의 전자 쓰레기들에서 나온 금속으로 그곳 철공소에서 커다란 냄비를 만들어 내는 장면이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쓰레기 지옥의 불에서 다시 태어난 순수한 금속이 다시 사람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은색 냄비를 만들어내기까지 누군가는 영구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유독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땅바닥의 고철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는 것을 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 지옥의 연금술사들이었다. 한 때는 사바나였던 곳은 앞으로도 쏟아지는 폐기물로 계속 덮이며, 소돔 사람들의 삶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Welcome to Sodom'은 그런 음울한 현실에서 관객들에게 전자 제품의 소비와 폐기에 이르는 그 전과정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welcome-to-sod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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