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분리 수거를 하다 보면, 어떤 건 어디다 버려야할지 애매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쓰지 않는 전선줄 같은 것들. 줄의 외피는 플라스틱인데 그 안에는 금속으로 되어 있으니 대체 어디다 버려야 맞는 걸까? 'Welcome to Sodom(2018)'을 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다. 그냥 전자 제품과 같이 버리는 것이 제일 낫고, 따로 버려야 한다면 금속에다 넣는 것이 맞다. 해마다 25만톤에 해당하는 전자 제품 쓰레기들이 불법적으로 이 나라에 폐기된다. 이 나라의 북부에는 그렇게 쌓인 거대한 전자 쓰레기의 대지가 있고, 그것을 쓸모있는 자원으로 다시 살려내는 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있다. 그 나라는 '가나(Ghana)'다.


  크리스티안 크뢰네스와 플로리안 바겐자머가 만든 'Welcome to Sodom'은 환경 문제를 다룬 다큐로 그 주제가 꽤나 묵직하다. 소돔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부패와 타락의 도시다. 가나 북부에 위치한 전자 쓰레기 평야를 그곳 사람들은 '소돔'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는 말그대로 어떤 지옥도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전자 제품을 분해하고 전선줄을 태우며, 아이들은 부서진 고철이 떨어진 땅바닥을 자석으로 훑고 다닌다. 더이상 쓸 수 없다고 버린 전자 제품들이 그곳에서는 소중한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그곳의 풍경은 끊임없이 부수는 망치 소리와 화염, 그로 인해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로 채워진다.


  "이 쓰레기들은 유럽에서 왔어요. 난 언젠가 그곳으로 가려구요. 여권도 만들어 놨어요.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쓰레기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고, 소들이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다니며, 아이들이 뛰논다. 이 다큐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나름의 경쾌한 운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망치 소리가 주된 배경음으로 깔리는 그곳 소돔에는 미친 설교자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신의 심판을 부르짖는가 하면, 누군가는 즉석 공연을 하기도 한다. 쓰레기 수집상 래퍼는 자신의 일상을 랩으로 만들어 부르는데, 그는 소돔의 삶이 노래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면 젊은이들의 춤판이 벌어지고, 어느새 쓰레기장은 클럽으로 변모한다. 


  천막 식당, 야외 이발소,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수를 파는 물장사꾼도 있다. 이 다큐의 관객들에게 소돔은 현실판 쓰레기 지옥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도망자들에게는 그 어떤 걱정도 없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감비아에서 의대를 다녔다는 수집상은 자신의 나라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 그는 게이이고 유대인이다. 그런가 하면 우주인이 꿈인 어린 고철 수집가도 있다. 소년은 우주인이 되어 자신이 사는 땅을 멀리서 내려다 보고 싶다고 말한다.


  'Welcome to Sodom'은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들과 살아가는 이들의 여러 목소리들을 담아내면서, 지금 현재 전지구적으로 당면한 전자 쓰레기(Electronic waste) 문제를 조망한다. 관객들은 선진국에서 빈곤국으로 이동하는 폐기물들의 이면에 많은 비합법성과 불공정성이 존재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엄청난 전자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적 문제와 그것을 떠맡은 이들의 삶에 미치는 해악도 마주한다.   


  이 다큐는 촬영이 무척 좋은데, 사방이 유독가스에 온갖 소음과 냄새로 진동하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안정적인 구도로 찍을 수 있었나 내내 감탄하게 된다. 핸드헬드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에서도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돔의 래퍼가 노래 부르는 장면을 찍을 때는 다큐에서 뮤직 비디오로 전환되는 것 같은 생동감과 속도감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다큐에서 그와 같은 장면은 나름의 볼거리와 영화적 리듬을 부여한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소돔의 전자 쓰레기들에서 나온 금속으로 그곳 철공소에서 커다란 냄비를 만들어 내는 장면이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쓰레기 지옥의 불에서 다시 태어난 순수한 금속이 다시 사람의 일상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은색 냄비를 만들어내기까지 누군가는 영구적인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유독 가스를 들이마셔야 했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땅바닥의 고철을 찾으러 다녀야 했다는 것을 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쓰레기 지옥의 연금술사들이었다. 한 때는 사바나였던 곳은 앞으로도 쏟아지는 폐기물로 계속 덮이며, 소돔 사람들의 삶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다. 'Welcome to Sodom'은 그런 음울한 현실에서 관객들에게 전자 제품의 소비와 폐기에 이르는 그 전과정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촉구한다.


 

*사진 출처: welcome-to-sod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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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긴 영화를 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왕 샤오슈아이의 2019년 영화 '나의 아들에게(So Long, My Son)'는 러닝 타임이 무려 3시간이다. 이틀 동안 나누어서 보았다. 보고나서 내가 느낀 것은 그렇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영화를 찍다니... 이 영화는 이야기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따라간다.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뒤섞여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꽤나 집중을 요구한다. 과거의 커다란 슬픔과 상처를 지닌 인물의 내면은 현재까지도 황폐하고 쓸쓸하다. 영화는 나름대로 치유와 용서에 이르는 여정을 보여주고 싶어하지만, 그 모든 시도는 피상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야오쥔(왕징춘 분)과 리윈(융메이 분), 잉밍과 하이옌 부부는 국영 기업에서 오랫동안 친한 동료로 지내왔다. 그러나 야오쥔의 아들 싱싱이 잉밍의 아들 하오와 댐에서 놀다가 빠져 죽는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 야오쥔과 리윈은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아이를 입양해 싱싱이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그러나 삶은 결코 쉽게 풀리질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새 아들 싱싱은 사고뭉치로 자라났다. 그럴수록 야오쥔의 마음속에는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야 했던 아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내 리윈은 억지로 중절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리윈의 임신 사실을 당국에 고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이옌이었다. 그렇게 두 가족 사이에 얽힌 슬픔과 원망의 실타래는 깊다. 그로 인해 드리워진 과거의 그림자에서 그들이 벗어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중국 영화에서 6세대로 분류되는 왕 샤오슈아이는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북경자전거(2000)'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도시의 주변부를 맴도는 소년의 일상을 통해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을 담아낸 그 작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아마도 6세대의 감독들이 이전의 5세대로 대변되는 장예모, 첸카이거와 차별되는 지점이라면 개혁 개방 시대의 중국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6세대에 속하는 리위의 '둑길(2005)', '로스트 인 베이징(2007)'에는 개혁 개방 시기를 지나는 중국의 시골과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렇게 초기작에서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국의 정책 기조에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하면서 그들의 영화에서 사회비판적인 목소리는 사라진다. 아마도 중국 내에서의 영화 제작 현실이 그만큼 녹록지가 않기 때문이리라.


  '나의 아들에게'에 나오는 두 가족의 얽히고 설킨 애증의 역사에서 당시 정부 당국의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비판은 보기 어렵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거리낌없이 생명을 거두는 강제적인 산아제한 정책은 거의 국가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왕 샤오슈아이는 그 문제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것을 리윈의 임신 사실을 고발한 하이옌 개인의 고통스러운 속죄의 차원으로 돌려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하이옌은 자신의 아들이 리윈의 아들 싱싱을 죽게 만든 것에 더해 리윈이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출생을 막았다는 것에 평생을 두고 죄책감을 갖는다. 죽음을 앞둔 하이옌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 택하는 방식도 개인적인 참회와 야오쥔과 리윈 부부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3시간에 이르는 영화의 마지막 여정에는 용서와 축복이 자리한다. 그렇게 그 두 부부의 기나긴 고통의 시간은 화해로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 그러한 결말은 어둡고 힘들었던 폭압의 시대를 견뎌낸 인간 본성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움을 복수로 되갚지 않고, 인내와 사랑으로 삶의 고통에 맞선 야오쥔과 리윈의 삶에 그 누구라도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정부 당국에서 예산 받아 만든 문예 영화 같다. 그들 부부는 그 오랜 아픔의 세월 동안 큰소리를 내거나 고통을 토로한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폭풍같았던 문화 혁명기, 1980년대의 개혁 개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대다수 민중의 삶은 생존 그 자체가 제일 중요했을 것이다. 비바람을 견디는 풀처럼 눕고 또 눕는 삶. 아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살다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서야 아들의 무덤을 찾아와서 눈물을 삼키는 부모의 모습. 그들 부부의 삶에 가해졌던 역사적인 과오는 개인의 덕성과 시간에 의해 묻혀진다.


  주인공 야오쥔과 리윈 부부를 연기한 왕징춘과 융메이는 이 영화로 각각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좋은 연기이기는 했으나, 솔직히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내게는 어려웠다. 영화제 수상에도 지역과 국가에 대한 안배라는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아들에게'를 오늘날 중국 영화가 거둔 예술성의 쾌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중국 영화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직면하는 데에서 유형 무형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창작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중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옌의 소설 '개구리'를 떠올렸다. 그 작품에는 무지막지한 산아제한 정책의 선봉장에 섰던 여성 의사가 나온다. 모옌의 소설은 그 엄혹했던 시절을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여기에도 개인의 반성과 참회는 나오지만 국가와 당국에 대한 비난은 슬그머니 뒤로 빠져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어떤 식으로든 생존하고 성공한 창작자들은 그렇게 과거가 드리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왕 샤오슈아이의 '나의 아들에게' 또한 그 그림자를 감상적으로 그려내고, 폭압의 시대를 비판하기 보다는 우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영화의 감동을 인위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3시간은 눈물을 짜내기 위한 영화적 낭비처럼 느껴진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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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쉬운 건 하나도 없어. 이 큰 도시에서 우리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지."


  흐느껴 우는 난펑(판빙빙 분)을 위로하며 친구가 하는 말이다. 난펑은 재혼한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낸다. 술집에서 노래부르고 웃음 팔며 버는 돈이다. 술주정뱅이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엄마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술병이 나서 입원한 남자를 찾아온 난펑은 술 마시고 죽어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린다. 이렇게 마음 둘 데가 없기는 난펑의 남자 친구 딩보(진백림 분)도 마찬가지. 병으로 죽은 엄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여자 생겨서 재혼하는 아버지가 밉다. 페이저우라는 이름 대신 뚱보로 불리우는 친구는 부모와 불화로 집을 나왔다. 이들 셋은 버려진 빈집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 집이 철거를 하게 되자, 셋집을 알아 보다 경극을 가르치는 창 여사의 집에 방을 얻는다. 뭔가 잘 어울리지 않을 이 네 사람들은 별 문제 없이 같이 살 수 있을까...


  '둑길(2005)', '로스트 인 베이징(2007)', 이 두 작품에 이은 리위 감독의 '관음산(2010)'은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인생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 편하고 쉽게 끌어가려다 보니, 인물들 간의 관계는 헐겁고 내적인 유기성은 떨어진다. 이 영화는 리위 감독에게 중국 내 흥행으로 큰 성공을 가져다 주었고, 주연 배우인 판빙빙의 연기도 꽤 좋은 편이어서 이 영화로 동경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중성을 위해 자신만의 개성을 죽이고 적당히 타협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영화는 다소 진부하게까지 느껴진다.


  영화 속 난펑과 딩보, 뚱보가 직면한 현실의 괴로움은 그들만이 겪는 특출난 것이 아니다. 부모와의 갈등, 진로에 대한 고민, 연애와 생계의 문제, 이런 고민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관음산'의 세 친구들이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면 대지진의 상흔을 가진 도시의 풍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도피하듯이 도시 근처에 자리한 장대한 관음산을 자주 찾는다. 기차에 몰래 타고, 하염없이 걸으며, 관음산과 도시를 왕복한다. 길 위에서 그들은 자유로워 보이고 맘껏 웃으며 떠드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다. 그들이 결국 찾는 것은 편히 살 수 있는 자신만의 '집'이다. 이전의 가족과 집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 친구의 관계는 마치 진짜 가족 같다. 영화 초반부에 뚱보가 동네 불량배 무리에게 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난펑은 뚱보를 데리고 무리를 찾아가서 자신의 기세를 보여준다. 병을 깨서 자해를 하고 피가 줄줄 흐르는 채로 무리의 여자애와 강제로 입을 맞추는데, 그 장면을 본 패거리들은 놀라서 당황한다. 여성인 난펑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까지 뚱보 친구를 보호하고 지켜내려고 하는 모습은 마치 가족을 지키는 모성의 발현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난펑에게 두 친구가 진정한 가족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난펑의 유사 가족에 지진으로 아들을 잃은 창 여사가 합류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넷이 된다. 그렇게 집과 가족이 생겼고, 소소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행복이 이어진다.


  세 명의 젊은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나던 창 여사는 왠지 자신이 다시 찾은 일상의 행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창 여사는 새로운 가족에서 이탈하게 되고, 난펑과 딩보, 뚱보는 다시 길 위에 선다. 영화의 결말은 그들이 진정한 가족과 안정된 집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흔들리는 화물차의 뒷편에서 허탈한 표정으로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세 친구의 젊은 날에서 확실한 것은 삶은 여전히 쉽지 않을 거라는 점 뿐이다. 재건되고 있는 거대한 도시의 한 켠에서 그들은 앞으로도 주변인으로 살아갈 것이며, 그런 그들이 정착할 집은 어쩌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청춘의 어두운 그늘이 그들이 관음산을 나올 때 지나는 터널처럼 끝이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리위 감독의 '관음산'은 집을 찾아가는 여정의 청춘들을 도시와 거대한 자연 풍광 속에 녹여내서 보여준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밀도 있는 연출과 이야기의 핍진성은 떨어진다. 재능에도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처음에는 마법 구두를 신고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은 이들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 닳아버린 구두 뒷굽처럼 직직 끌리는 소리를 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관음산'을 만든 리위를 보며 새삼 느꼈다.



*사진 출처: sinethetamagazin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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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이언 헤이든 스미스 책임편집, 정지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만한 책이 뭐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책인데, 비닐 포장도 안뜯고 6년째 책장 안쪽에 처박혀 있었다. 왜 안보고 그렇게 놔두었을까? 거의 10년 가까이 영화를 안봤다. 영화라면 지겹고 신물이 났던 것도 같다.


  포장을 뜯고서 안쪽에 발행 년도를 보니 2014년. 책이 나오고 4판까지 찍어냈으니, 이 책은 꽤나 잘 팔린 책 같다. 이 판본 이후로도 2번이나 증보판이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아무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제목만 보는 데에 2시간이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 많은 영화들에 대한 추억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책은 어쩌면 내 젊은 날을 삼켰던 무수한 영화들의 목록인지도 모르겠다.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를 지금의 나에게 다시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전공이었고, 내가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열정을 가지고 보았었다. 책에 나온 그 많은 영화들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봤을까 싶기도 하다. 시간과 노력과 청춘의 시간들이 그 영화들과 함께 흘러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아야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꽤 괜찮은 길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 영화들이다. 세계 영화사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 영화사이기도 하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책의 편집자들도 대부분 미국의 학자들이므로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유럽 영화사는 좀 쳐주기는 했다. 일본과 대만 영화들도 부록처럼 들어가 있다. 한국 영화는 단 두 편이다. '하녀(1960)'와 '올드보이(2003)'. 새롭게 증보판을 낸다면 '기생충(2019)'이 들어가겠지. 이 책이 미국과 유럽 위주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 영화 공부의 많은 부분을 EBS에 빚졌다는 사실이다. 초창기 헐리우드 흑백 영화들, 다양한 유럽 예술 영화들을 EBS에서 만났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책에 나온 켄 러셀의 '악령들(The Devils, 1971)'을 EBS '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물론 지금의 EBS의 영화 선정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세계의 명화'가 망해가는 동네 비디오 가게처럼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앉아서 2시간 넘게 영화 제목을 들여다 보고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로소, 오래전에 본 영화들과 함께 젊은 날의 시간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이든 영화광이 서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나에게 대체 뭐였을까? 그 해답을 아직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올드 보이'가 나온 페이지는 900인데 뒷편의 색인에는 898쪽으로 나와있다. 단 2편의 한국 영화를 올리면서 쪽수까지 틀렸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겠지. 한국 영화가 아무리 성장했다 하더라도, 미국과 서구 유럽의 영화 학자들 시각에서는 아직도 비주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좀 컸네, 그래 끼워주지, 하는 느낌이랄까. 이제 영화는 산업의 영역에 종속되었고, 그걸 예술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영화를 찍는 것이 영화인들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매혹시키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젊은 날을 앞다투어 내던지게 만드는 이 요망한 영화의 알 수 없는 마력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영화와 함께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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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들은 당신처럼 다 미쳤소?"

  "나도 잘 모릅니다. 아마 뛰어난 화가들은 그럴지도."


  요양원에서 만난 전직 군인과 고흐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줄리언 슈나벨의 2018년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고흐가 죽기 전에 체류했던 아를과 오베르에서의 행적을 그린다. 고흐 역으로는 배우 윌럼 더포가 열연했는데, 이 연기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정말로 상 받을만한 연기였다.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고흐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화가이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갇히기도 하고, 결국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온갖 불행의 총합 같은 인생. 그러나 그의 신화는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는 현대 미술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피카소를 넘어서는 불멸의 화가로 남았다.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에서는 커크 더글러스가 고흐 역, 앤소니 퀸이 고갱으로 나온다. 그 영화는 어쩌면 고흐에 대한 가장 평이하고도 무난한 초상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의 잘 알려진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독 줄리언 슈나벨은 관객들에게 고흐라는 화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에 촛점을 둔다. 우울과 광기,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고흐의 혼돈스러운 마음의 풍경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간다. 그러한 실험 영화적 시도는 시각적 피로를 가중시킨다. 정지된 쇼트들이 거의 없으며, 한마디로 미친 듯이 춤추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마치 '광기 어린 화가의 내면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내 외치는 느낌을 준다. 그게 효과적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별로'라고 말하겠다. 슈나벨의 욕심이 좀 과했다. 


  촬영의 난삽함을 메꾸는 것은 윌럼 더포의 뛰어난 연기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 63세였을 윌럼 더포가 37살의 고흐를 그토록 생동감 있게 재현해낸 것은 정말로 놀랍다. 그는 고흐가 죽기 직전에 정말 저렇게 느끼고 말하고 그림을 그렸겠구나, 라고 관객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솔직히 윌럼 더포의 연기 경력 후반부에 이런 눈부신 재능을 보여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의 평범함과 타인과의 교류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열정과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내면 풍경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음악도 나름의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가는 피로를 상당히 누그러뜨리고 영화에 몰두하게 만든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름대로 고흐의 그림과 죽음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자살이 아닌 타살의 가능성, 새롭게 발견된 유작 스케치의 진품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고흐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주지는 못한다. 감독이 스스로 말했듯 이 영화는 슈나벨 자신이 느끼는 고흐의 삶에 대한 느낌이며 그것으로 관객이 인간 고흐에 더 가까이 가길 바라는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슈나벨 표 고흐 영화는 마치 고흐의 어지러운 내면처럼 혼돈, 무질서, 자유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성공적인 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화가가 생의 마지막 날들에 마주친 사람들의 냉담함, 무관심, 조롱과 멸시를 영화적으로 재현한 것은 의미가 있다.


  '고흐, 영원의 문'을 보다가 문득 2018년에 aljazeera 방송국에서 만든 다큐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가 떠올랐다. 중국 선전에서 오랫동안 고흐 그림의 모사 화가로 살던 남자는 진짜 고흐 작품을 만나러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1시간이 채 안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 다큐는 짝퉁 고흐 그림을 그려서 팔던 이가 고흐의 진짜 그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담아냈다. 그가 고흐 묘소를 찾아가 불을 붙인 담배를 올려두고 묵념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일개 모사 화가에게 고흐의 삶과 그림은 그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비록 비극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쳤지만, 고흐는 불멸의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고흐, 영원의 문'은 그렇게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는 고흐 이야기의 작은 쉼표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다른 영화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 출처: facebook.com/AtEternitysGate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s

출처: https://emptydream.tistory.com/4544 [빈꿈 EMPTYDREAM]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s

출처: https://emptydream.tistory.com/4544 [빈꿈 EMPTY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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