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는 금요일 밤에 'EIDF 걸작선'을 방영해 준다. 지나간 EIDF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 가운데 괜찮았던 다큐들을 뽑아서 보여주는 것인데, 지난주 금요일에는 레베카 스턴의 '그루밍(Well Groomed, 2019)'을 방영했다.


  '그루밍'은 미국의 애완견 미용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이다. 애견 관련 사업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에서 애견 미용 시장은 매우 유망한,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시장임이 분명하다. 그 첨단을 보여주는 애견 미용 대회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양극단으로 나뉠 수 있다. 개들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학대하는 것이라는 의견부터, 개를 주제로 한 새로운 창작과 예술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어느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루밍'은 아무런 관점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매우 실망스러운 다큐이다.


  이런 다큐를 'EIDF 걸작선'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책임에 대해 편성 담당자는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나간 EIDF 상영작 가운데 아무 작품이나 상영해도 이 다큐 보다는 나을 것이다. 문제의식도 부재하고,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볼 수 없는 이 다큐가 지난 2019 EIDF에 상영되었다는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는 EIDF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루밍'은 미국 애견 미용 대회를 그냥 취재한 화면들의 나열일 뿐이다. 주요 참가자들의 애견 미용에 대한 의견을 '열정'과 '창조적 영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이 다큐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매우 불편해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 애견 미용 대회를 보는 비판적인 관점이 들어가기는 한다. 그런데 이 부분도 문제가 있는 것이, 방영된 어느 토크쇼의 한 대목을 따와서 집어넣었다. 토크쇼 참가자는 애견 미용은 개의 입장에서는 학대이고 인간의 그릇된 욕망의 반영일 뿐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에 대해 애견 미용 대회의 참가자인 캣 옵손은 개들은 자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선택할 수 있다는 말로 강변한다. 감독 레베카 스턴은 그야말로 그 어떤 작가적 입장도 없이 토크쇼 편집 화면 뒤에 숨어있다. 그냥 이런 입장도 있으니 보는 관객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건데, 이는 감독의 매우 비겁하며 무기력한 자세를 입증한다.


  이 다큐는 일견 구스 반 산트가 2003년에 만든 '엘리펀트(Elephant)'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만든 '엘리펀트'는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당시 이 영화를 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을 제시했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아무 의미없는 영화이다."


  '엘리펀트'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의 일상을 카메라로 쭉 따라간다. 관객들은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동기나 어떤 마음의 배경을 읽고 싶어하지만, 산트는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마치 총격전이 이루어지는 비디오 게임 화면처럼 펼쳐지는 범행 장면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엘리펀트'는 사건을 보여줄 뿐, 그 뒤에 숨겨진 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의 존재에 대해 철저히 부정한다. 이것을 현실의 비극적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작가적 관점의 포기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구스 반 산트는 그냥 겉멋 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EIDF가 시작된 2004년부터 열렬한 시청자였던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EIDF의 작품들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전반적인 다큐 상영작의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획 전반의 문제와 함께 다른 외부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특히 특정 국가와 그 나라가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협회와 관련된 상영작들이 눈에 띄게 진입했는데, 이와 관련된 잡음도 있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주최 측에서는 EIDF의 수익성 문제도 제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EBS는 공영방송으로서 좀 더 공익적인 목적을 더 우위에 두어야 하며, 그건 EIDF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상업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새롭고, 실험적인 다큐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수준 높은 상영작들을 선정해야 한다. '그루밍'과 같은 한심한 다큐멘터리가 상영작으로 선정되는 일은 피했어야 했다.


  지난 주말에 '그루밍'을 보고 나서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적어도 '걸작선'이란 이름만 들어가지 않았어도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EIDF는 올해 열 여덟 해를 맞이한다. 그 연륜과 명성에 걸맞는 다큐멘터리를 올해는 만날 수 있을까? '그루밍'과 같은 다큐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주제로 분류되어 상영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다큐는 다큐라고 할 수 없다. EIDF의 분발과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출처: h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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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1-06 07:51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특히 요즘같이 자료 (영상,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바라볼지가 중요한 것 같은데..말이죠.
 

 

  "가족이란, 남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남겼다는 이 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아호, 나의 아들(陽光普照, 2019)'에 나오는 아버지 아원에게도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이 하나 있다. 어려서부터 말썽만 부리고 사고뭉치로 자라난 둘째 아들 '아호'이다. 운전학원의 강사로 일하는 아원은 운전 연수생들이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하나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자식은 첫째 아들 '아하오' 뿐이다.


  오랜만에 대만 영화를 보았다. 청몽홍 감독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오래전에 내가 보았던 대만 영화들은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정전(傳)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1994)'의 마지막 장면, 여주인공 메이의 긴 울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멍(1998)'이 보여준 소외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은 또 어떠한가. 허우샤오센은 '비정성시(1989)'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초기작인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의 장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두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챙겨서 보았지만, 나중에 보여준 그들의 영화들은 꽤 실망스러웠다. 대만 영화는 두 감독의 부침(沈)에 따라 쇠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는 대만 영화들을 잊고 있었다.


  '아호, 나의 아들'은 그런 나에게 대만 영화의 저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몽홍이 보여주는 어느 가족의 초상은 강렬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영화 도입부의 끔찍한 범죄 장면은 이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의 세계가 자신의 선배들과는 남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같다. 영화 중간 중간에도 청몽홍이 다루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우 날것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본다. 그런 것을 보면 이 감독에게는 매우 거친 야생성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 전체를 통해서 청몽홍이 보여주는 인물의 내면 묘사와 연출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그 점이 러닝 타임 2시간 35분을 무리없이 이어가는 원동력이다.


  둘째 아들 아호는 자신을 괴롭힌 '오뎅'에게 저지른 폭력 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거기에는 아호의 친구 '무'도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 아원은 법정에서 판사에게 아들을 감옥에 가두어서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원의 희망은 의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 중인 첫째 아들에게만 있다. 첫째 아하오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온종일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으로 인식한다. 영화 제목 '陽光普照(양광보조, 영어 제목은 'A Sun'이다)'는 '두루 내리 비치는 태양빛'이란 뜻이다. 


  첫째에게만 쏟아지는 햇빛, 둘째인 아호는 어둠 속에 서있다. 이 가족의 비극은 그렇게 양분된 빛과 어둠에서 기인한다. 아버지는 운전 학원 강사로, 엄마는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의 미용일을 하며 아이들을 어렵게 키웠지만, 그 부부는 자신들에게 닥친 예기치 못한 비극을 목도한다. 아원에게는 운전 연수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대로 결국 한 명의 아들만 남는다. 그런데 그 아들 아호는 출소 후에 친구 '무'의 겁박에 못이겨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하라"


  그 말은 아원의 인생 좌우명인 동시에 직장인 운전 학원의 야외 연습장에 크게 써져있는 말이다. 아원은 모범적인 도로 주행을 하는 운전자처럼 성실히 살아왔다고 믿지만, 그에게 닥친 가족의 현실은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그에게 아내마저 비난을 더한다.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냐고...


  영화의 결말부. 아원은 아내에게 자신이 하나 남은 아들 아호를 위해 감내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다. 아내는 남편이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에 절규한다.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응축된 감정의 분출은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나는 아내가 남편의 비밀을 알고 오열하는 장면에서 바닥에 주저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몽홍의 연출은 결코 지나침이 없다. 아내는 무너지지 않고, 남편을 감싸 안는다. 부부라는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는 그 장면에서 관객은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본다.


  영화 '테이큰(Taken, 2008)'처럼 격렬하고 빠른 호흡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는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느리지만 치밀한 서사, 진중하고 묵직한 연출이 그려내는 어느 가족의 고통스러운, 그러나 절망으로 향하지 않는 초상화를 보는 일은 꽤 긴 여운이 남는다. 가족이란 어쩌면 '사랑'이란 이름의 태양빛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태우기도 하고, 그 빛으로 온기를 얻어 살아가게도 만드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아호가 엄마를 자전거에 태우고 한적한 길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엄마의 얼굴에 닿는다. 이 가족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 빛으로 더이상 다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inemaescap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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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사실은 사카가미 군을 좋아해."

  "응, 나도 알아. 그런데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알고 있어."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 나루세와 사카가미는 고등학교 동급생이다. 대체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위의 대화만 보면, 애니메이션 영화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The Anthem of the Heart, 2015)'는 뻔한 청춘 학원물 같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도입부부터 뭔가 남다르다. 그냥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충격적이다. 어린 소녀 '나루세 준'이 동네의 산 정상에 위치한 러브호텔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여자와 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일을 엄마에게 말하게 된 나루세. 결국 부모는 이혼하게 되고, 그 모든 일을 나루세의 '말' 때문이라고 아빠가 말하자 나루세는 충격을 받고 '함묵증(mutism)'에 걸려서 말을 하지 못한다. 나루세는 자신의 입을 막아버린 것은 달걀 요괴(외양은 요정처럼 귀여우나, 쏟아내는 말은 괴물같으므로 '요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 '달걀'일까? 나루세가 아빠의 불륜을 엄마에게 알릴 때, 나루세의 엄마는 남편의 도시락 반찬으로 만들고 있었던 계란 말이를 나루세의 입에 욱여넣으며 말을 막는다.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는 그렇게 말을 봉인하고 성장한 나루세의 마음의 행로를 따라간다. 학교에서 주관하는 '지역 주민 교류회(일종의 마을 잔치쯤으로 보면 된다)'에서 선보일 극의 실행 위원으로 나루세와 동급생 세 명이 선정된다. 사카가미 다쿠미, 니토 나쓰키, 다사키 다이키가 그들이다. 앞서 언급한 대화에 나온 사카가미는 나루세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루세가 말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서 선보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루세는 사카가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아픔을 가진 여주인공 나루세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오직 문자 메시지로만) 의지하게 되는 사카가미를 '왕자님'으로 여기고 연모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사카가미도 그렇게 완전무결한 왕자님은 아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불화로 이혼했고, 조부모와 살면서 그 자신도 마음의 말을 담아두기만 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사카가미에게는 그래도 '음악'이라는 유일한 통로가 있었는데, 그것이 나루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드는 바탕이 된다. 나루세가 마음으로 외치고 싶어하는 말을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나루세의 학급 동기들 모두가 뮤지컬에 합세하여 나루세를 응원한다(뭔가 현실은 나루세 같은 아이가 이지메의 대상이 될 것 같지만). 아, 정말이지 놀라운 사랑과 연대(solidarity)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나름 감동을 주는 작품 같지만, 사실 '마음이 외치고 싶어'는 서사의 빈 구멍이 여기저기 드러나고 결말까지 달려가는 과정이 엉성하기까지 하다. 영화를 평론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작품이 제일 애매하다. 아주 좋은 작품이나 못 만든 영화는 그에 대해 나름대로 할 말이 많지만, 이런 어중간한 작품들은 난감함을 느끼게 한다. 별점 5개 가운데 3개를 겨우 빠듯하게 채울 것 같은 영화들은 사실 그다지 언급할 뭔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애니메이션의 진가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이 작품을 어린 시절에 정신적 외상을 갖게 된 나루세의 진정한 치유기로 보면,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는 아주 좋은 심리 서사극이 된다. 특히 후반부에 나루세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공연되는 뮤지컬은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연극적 방법을 통해 심리적 문제를 치유하는 정신치료의 방법)'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또한 나루세가 사카가미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니라, 심리 상담에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느낄 수 있는 '전이(, Transference)'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카가미는 나루세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어하는 모든 감정과 말의 통로인 동시에, 나루세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나루세는 사카가미를 좋아한다고 느끼지만, 사카가미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결국 실망한 나루세는 공연 직전에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 사카가미는 나루세를 찾아나서는데, 이 뮤지컬 공연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는 애니메이션의 흥행에 힘입어 동명의 실사 영화로 2017년에 제작되기도 했다. 사실 이걸 구태여 또 영화로 찍어서 따로 보여줄 것이 있는가는 의문이지만, 그만큼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매력이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단순히 애니메이션 팬들만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거기에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 풋풋한 사랑의 감정, 이 모든 것은 관객의 시선을 끈다. 물론 서사적 완성도 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에 별점을 준다면 세 개에 더해 슬쩍 반 개를 더 얹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설프고,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이 애니메이션에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특히 나중에 나루세가 사카가미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장면은 심각한 감정의 폭발이 이루어짐에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어린 친구들이 참 재밌네, 하는 느낌이랄까...


  작품 속에서 공연되는 뮤지컬의 제목은 '청춘의 정강이'인데, 이 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등장인물들 그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어쩌면 별다른 개연성이 없는 뮤지컬 내용에 아무렇게나 붙인 제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로 심리적으로 절뚝거리며 살아온 나루세가 온전한 정강이 뼈를 되찾고 잃어버린 말도 찾아 결국은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은유로 느껴진다. 마음 속에 금이 간 정강이 뼈 하나쯤 있는 이들이라면,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의 나루세를 응원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림 출처: animearcad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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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선인장'은 특이하게도 겨울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나는 원래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별다른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어쩌다가 키우게 된 이 선인장은 해마다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무렵에 화려한 꽃을 피워서 참 보기가 좋았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0년 동안 분갈이라는 것은 해준 적도 없고, 천 원짜리 작은 원예 영양제 하나 사서는 어쩌다 한 번 뿌려준 것이 전부였다. 영어로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는 사람을 'green thumb'이라고 한다. 'You have a green thumb.'이란 말은, 당신은 원예에 재능이 있군요, 라는 뜻이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런 말을 들을 일은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 자신이 꽃 피워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도 지키는 크리스마스 선인장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남미가 원산지인 이 식물의 유전자에는 추워지는 시기에 꽃을 피우게끔 유전적 설계가 되어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북반구에서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해마다 겨울에 이 선인장의 꽃을 보는 것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선 어떤 감동을 준다. 올해는 15개의 꽃봉오리가 올라왔는데, 화분을 옮기다가 실수로 하나가 떨어졌다. 나머지 14개가 성탄절을 앞두고 피어나기 시작해서, 이제는 다 졌다.


  꽃이 피어나기로 되어 있는 꽃나무라면 반드시 필 것이다. 다만 꽃나무마다 처한 환경에 따라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봄에 피는 목련을 보다 보면, 양지 바른 곳의 목련은 아주 일찍 꽃망울을 터뜨려서 눈길을 끈다. 그러나 응달진 곳의 목련은 다른 목련들이 다 진 다음에 아주 늦게 꽃을 피우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그 차이가 한달 가까이 나기도 하는 것을 본다. 그렇게 늦게 피우는 목련을 보면서 사람의 인생도 저러할까, 하는 생각을 해마다 하게 되기도 한다. 햇빛도 거의 들지 않는 아파트 구석진 화단에서도 기어코, 어떻게든 꽃을 피워내는 목련의 의지랄까, 나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어떤 경외심을 느끼기도 했다.


  성경의 전도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든 때가 있다'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말로 '시절인연(緣)'이란 표현을 쓴다. 중국 명말의 승려가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절인연이 도래(來)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


  모든 사물의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과 뜻을 다해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인생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 가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쩌면 그 '때'야말로 그 일이 이루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때인지도 모른다.


  올해 내가 계획했던 것들 가운데, 이룬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 밖에 없다. 원래는 소설을 쓰려고 했으나, 어떻게 하다 보니 쓰게 된 글들은 영화 평론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도록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년에는 소설도 쓸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이야기들이 말문을 조금씩 열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과일 '후숙()'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청과 회사에 다녔던 경험담을 썼던 글쓴이가 후숙을 담당했던 과일은 바나나였다. 그 일을 배우고 한 1년쯤 되었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 미국의 유명한 과일 유통업체의 후숙 전문가를 초빙해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고 했다. 그 전문가는 수십년의 경력이 있는 이였는데, 강의 말미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후숙의 시기는 과일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 말은 글쓴이에게 나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후숙에 대한 정해진 매뉴얼과 경험에 의해 후숙은 전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정도의 온도에, 에틸렌 가스는 어느 정도로 주고 하는 정량적인 매뉴얼만 있으면 후숙은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데 과일과 오랫동안 함께 해온 '후숙 장인'은 과일이 그 후숙의 시기를 결정하는 주체임을 알려줌으로써 글쓴이에게 겸손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후숙에 대한 그 말은 나에게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인생의 어떤 일은 그것이 이루어질 만한 때에 이르러서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기 보다는, 천천히 가더라도 자신이 해야할 것을 잊지 않고 매일 조금씩 해나가는 것.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에는 그것이 '시절인연'과 만나 꽃을 피우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해를 보내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새해부터는 월요일과 목요일,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글을 더 쓸 수도 있습니다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해요. 독자 여러분들에게 복된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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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는 잔교(橋), 바다, 하늘, 이 세 군데에서 서사가 나누어 진행된다. 시간대도 각각이다. 잔교에서의 1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의 이야기가 나중에 하나의 시점과 공간에서 만난다. 이렇게 조각난 서사에 관객이 집중하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이런 방식이 그럼 유기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겠다. 이 영화의 서사는 마치 덜컹거리는 기차 바퀴처럼 어설프고 한심하게 굴러간다. 보는 내내 도대체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되뇌이게 된다.

 

  놀란은 분명 영화적 재능이 출중한 감독이다. 그가 '인셉션(Inception, 2010)'에서 보여준 재기 넘치는 구성과 연출은 이 감독의 이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만든다. 그런데 '덩케르크(이 발음도 정말 이상하다. 됭케르크로 하던가 차라리 영어식으로 '던커크'라고 하는 편이 낫다)'는 정말이지 실망스럽다. 그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전쟁의 참혹함도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감동도, 그 무엇도 발견하기 어렵다. 모든 것이 다 어중간한 수준에서 이야기가 더 나아가질 못한다.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는 이미 앞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가 그 극한의 지점을 보여주었다. 스필버그는 거기에다 자신의 장기인 휴머니즘까지 버무려서 정말이지 자신의 역작을 만들어 냈다. 어쩌면 앞으로 나오는 전쟁 영화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경쟁해야만 할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에서 보여지는 바다 위의 무수한 시신들처럼 부유하고 있다. 그 정점에 있는 배우는 킬리언 머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번에 전쟁 영화를 찍으려고 해. 배역 하나를 맡아서 해주면 하는데."

  "어떤 배역인데요?"

  "음, 그냥 일단 와서 해보자구."


  아마 내 생각에는 놀란이 그렇게 머피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말 자기 경력 생각하는 배우라면 이런 영화에 이름도 없는 '떨고 있는 병사(Shivering Solider)'로 나올 이유가 없다. 배역이 무슨 큰 의미가 있지도 않다. 한마디로 겁에 질린 병사로 별로 중요한 역할도 아니다. 킬리언 머피는 놀란과의 인간적 '의리' 때문에 놀란의 요청을 수락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떨고 있는, 뭔가 좀 덜떨어진 병사를 연기하는 킬리언 머피를 보는 것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대체 저 배우가 영화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만 든다.

 

  이 영화에서 오직 찬사받을 만한 것은 한스 짐머가 맡은 '음악'이다. 영화 시작부터 관객의 신경을 미세하게 긁는 음악은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전쟁터로 옮겨놓는다. 뭔가 터질 것 같은 불안과 공포는 '영상'이 아니라 '음악'으로 전달된다. 한스 짐머가 '덩케르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영화가 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더라도, 자신이 만드는 음악만큼은 최고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영화의 음악은 한스 짐머가 현 시점에서 최고의 영화 음악가라는 점을 입증한다.

 

  놀란의 '덩케르크'는 영화적 성취도 볼 수 없고, 그렇다고 덩케르크에서 있었던 역사적 철수 작전과 관련해 뭔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전쟁 다큐멘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영화가 따라가기에는 버겁다. 스필버그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보여주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성과 함께 이야기를 엮어내는 스토리텔러로서 감독의 역량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놀란의 이 전쟁 영화는 어설픈 시도였고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조각난 서사의 보잘 것 없는 말로를 영화 내내 목도한다. 


  '덩케르크'를 보느니, 차라리 앙리 베르누이의 '쥐트코트의 주말(Weekend at Dunkirk, 1964)'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낫다. 던커크 철수 작전을 다룬 이 영화는 철수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겪는 혼란과 두려움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낸 뛰어난 작품이다. 나는 놀란의 영화적 재능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의 '덩케르크'는 매우 실망스럽다. 디지털이 아닌 아직도 필름으로 찍는 것을 고수하는 놀란이 왜 아깝게 필름과 제작비를 낭비해가며 이런 영화를 찍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어쩌면 놀란은 자신이 전쟁 영화도 잘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카데미 상에 대한 갈망도 있을 수 있었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 그리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보여줄 것이 많다. 그런데 놀란은 '덩케르크'에서 그 어떤 영화적 성취도 보여주지 못한다. 전쟁의 잔혹함은 절제되어 있고, 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피상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국군을 구하러 가는 작은 고깃배의 선실에서 어이없이 죽음에 이르는 조지(배리 키오건 분)처럼, '덩케르크'의 서사는 황급히 닫히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가 가져오는 허망함과 부박함이 어떤 것인가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전쟁 영화 '덩케르크'는 아주 잘 보여준다.



*사진 출처:(ourculturem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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