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시몽의 다큐 'Le Concour(2016)'는 프랑스 영화학교 페미스(La Femis)에 들어오려는 학생들의 입시 과정을 담아냈다. 우리말 제목은 '프랑스 영화 학교 입시 전쟁'이다. 이 다큐는 영어 제목이 'The Competition'과 'The Graduation'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생 선발 과정을 다뤘다는 점에서 'The Competition'이 더 적절한 제목이다. 제목 그대로 2시간 가량의 이 다큐는 그야말로 프랑스 최고의 영화 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의 치열한 입시 과정을 보여준다.


  다큐의 첫 부분, 입시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는 필기 시험이 진행된다. 시험 문제로 나오는 영화 화면을 보니 일본 영화인데, 아오이 유우가 나오는 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다큐 보다 말고, 아니 저 영화는 무슨 영화인가 궁금해진다. 아무튼 그 많은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머리를 쥐어짜며 답안지를 작성한다. 그러고 나서는 각자가 지원한 분야의 실기 시험과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대한 면접 시험이 이어진다.


  사실, 이 다큐의 진정한 주인공은 학생들을 뽑는 면접관들이다. 페미스는 학생 선발에 있어서 학교 교수들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실무자들을 초빙해서 의견을 듣는다. 영화 평론가, 제작자, 다큐 감독, 배급 회사의 책임자 같은 이들이다. 필기 답안지를 채점할 때도 한 사람이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청취한다. 그래서 더러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학생을 정말로 뽑아야 한다구요."

  "아니, 우리가 같은 답안지 본 거 맞아요? 그건 정말 형편없는 글이에요."


  그런 과정들은 모든 입시생들에게 '평등'한 입시를 보장 하기 위한 것이다. 불어로는 egalite, 영어로 equality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에서 나왔다. '자유, 평등, 박애(Liberte, Egalite, Fraternite)'가 그것이다. 그러한 공화국의 이상은 영화 학교의 입시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이 다큐에서 보게 된다. 면접관들은 학생들을 평가할 때에 무엇보다 영화적 재능을 우선으로 하지만, 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도 면밀히 살핀다. 평가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면접관들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다. 지원자 하나를 두고 극과 극을 달리는 관점차가 존재한다. 


  "이런 미친 학생은 페미스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만약 이 학생이 들어온다면 나는 절대로 안 보고 피해서 다닐 겁니다."

  "그래도 영화적 재능이 있잖아요. 의사 소통 능력(communication skill)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해요. 영화 감독 가운데도 미친 인간들 많아요. 그들이 좋은 작품을 찍기도 한다구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 소통 능력이에요. 그게 없으면 말짱 꽝이에요. 영화 촬영 현장은 엉망으로 돌아가는데, 감독이 그걸 외면하고 장난감 가게로 도망가서는 장난감 사는 인간도 있어요. 정말 미친 거죠."

 

  다큐 내내 그렇게 학생들을 두고 이어지는 면접관들의 다양한 토론과 의견 청취 과정은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특히, 후반부에 눈길을 끄는 지원자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두 여성 면접관의 의견 대립은 너무나도 맹렬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 지원자는 직업이 호텔 도어맨이었다. 그는 힘들게 일하면서 어떻게 하다 영화에 매료되었다. 촬영 장비를 사서 이것저것 찍어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간 뒤에 면접관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 '도어맨' 지원자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라고 적었지만 말로 하는 전투같다) 과정을 보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다. 지원자의 계층적 배경까지도 고려하면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면접관들의 모습은 '진짜 프랑스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게 만든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보다가, 필기 시험 출제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2012)'였다.

**사진 출처: unifran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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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맨날 영화나 파고 있으니 답답도 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잡다한 강의들을 들었더랬다. 예를 들면 선무도나 택견, 도예 수업 같은 것들. 아무튼 연기 수업이라고 해서 막 연기하는 거 배우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여러 동작들을 해보는 것이라, 어떻게 보면 스트레칭과 요가 수업 같다고 보면 된다.


  나는 워낙 몸치에 가까운 사람이라 연기과 사람들이 하는 동작을 따라가기는 커녕 그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이삼일은 근육통에 시달렸다. 참, 수업을 듣기 위해 처음으로 쫄쫄이 타이즈도 샀다.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의 초창기라 그런 옷은 인터넷으로 살 수도 없어서, 동대문 평화시장까지 갔었다. 무슨 스판덱스 쪼가리가 그렇게 비싼지, 내 기억에 3만원인가 했던 것 같다. 뭔가 무용이나 예능과 관련된 그런 특수 의상에는 특별한 가격이 책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었다. 내가 그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그랬다. 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몸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소통하는구나... 흔히 '연기'라고 하면 얼굴 표정을 짓거나 대사를 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일 뿐이다. 좋은 연기를 하려면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몸을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그 수업은 마치 연기의 세계를 아주 짧게, 잠깐 동안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게도 연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 다니던 동네 교회의 크리스마스 연극 공연에서였다. 그 교회는 아주 단촐한 개척 교회였는데, 당시에 나를 가르치던 피아노 선생님이 집사로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억지로 다니게 했던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다니게 되었는데 분위기가 나름 좋았다. 교회는 침례교파에 속했는데 목사님은 40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교회의 벽면에는 목사님이 수영장인지 아무튼 허리까지 몸을 담그고 목사 안수를 받는 커다란 사진이 있었다. 신자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느낌으로 나는 기억한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자리한 그 작은 교회를 나는 1년 가까이 다니다가 이사가면서 그곳을 떠났다.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부흥의 시대'였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경제 개발과 호황에 맞물린 개신교의 확장세는 거침이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신앙심으로 교회를 다녔다기 보다는, 서양의 새로운 신이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것 같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조차도 전도 열풍에 휩쓸렸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그 정점이었다. 아, 여름 성경 학교도 그러기는 했다. 애들은 그런 특별한 시기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 교회를 순례하면서 설교 듣고 과자와 여러가지 선물을 받아왔다.


  아무튼,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공연하기로 한 연극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성탄 전날에 머물게 된 여관에서 일어난 일을 담아낸 것이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공연했는데, 나는 여관 주인을 맡았다. 여관 주인은 아주 속물적이고 못된 사람으로 돈이 없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방이 없다며 거짓말로 내쫓는 역이었다. 나는 그 역할이 싫었다. 요셉과 마리아 역도 있고, 천사 역도 있었다. 아, 여관 주인 마누라 역도 있었구나. 아무튼 주일학교 선생님은 나에게 여관 주인 역을 하게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연극에서 가장 대사가 많았다. 그렇게 대본을 받고나서는 진짜 열심히 외웠다. 의상도 있었다. 선생님이 가져온 흰색 보자기인지 이불 커버인지 그걸 머리에 쓰고 검은 색 띠를 둘렀다. 중동 지방의 남자 의상을 어설프게 흉내낸 의상이었다. 상연 당일에는 선생님이 분장도 해주었는데, 수염도 붙였다.


  마침내, 성탄절 저녁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라고 해봐야, 설교가 이루어지는 빨강색 카펫이 깔린 강단이었지만 오직 그곳만이 불이 켜졌다. 주일 학교 애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했다. 나도 그 어떤 막힘 없이 대사를 해냈고, 특히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구박하는 밉살스런 연기를 아주 잘 해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으며 아주 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뭔가를 완벽하게 해냈다는 느낌은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마도 배우들이 하나의 작품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을 때의 느낌도 그러하리라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내가 연기 수업을 들었던 것도 그 성탄절 공연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 붙는 타이즈는 움직이기에는 편했지만, 내게는 꽤나 민망하게 느껴지는 의상이었다. 그렇게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한 학기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몸치였던 내가 좀 더 유연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예술의 어떤 분야든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 타이즈는 택견복과 함께 창고의 박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문득, 성탄절을 앞두고 그 타이즈와 연기 수업과 어린 시절의 성탄절 연극 공연이 떠올라서 이렇게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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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큐는 마치 '레스트레포(Restrepo, 2010)'의 후속편 같다. Danfung Dennis의 'Hell and Back Again(2011)'은 아프간 전에서 부상으로 제대한 해군 나탄 해리스 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리스는 교전 중에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걷질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만성적인 통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 여러가지 진통제를 비롯해 다양한 약들을 복용하고 있는데, 거의 한 뭉텅이에 가깝다.


  Danfung Dennis는 자신의 경력을 전쟁 사진 작가로 시작했다. 그러다 아프간 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좀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다큐의 제작을 기획했다. 이 다큐는 해리스가 속한 부대를 따라 다니며 그가 직접 찍은 전투 장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그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촬영했다. 나중에 해리스가 제대하고 나서는 해리스와 그의 아내 애쉴리가 어떻게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는지를 약 1년에 걸친 시간을 함께 하며 화면에 담아냈다.


  이 다큐는 전쟁에서 귀환한 병사가 겪는 PTSD가 어떤 것인지를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아무런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해리스의 일상 속에서도 고통과 불안, 두려움이 상존한다. 관객은 해리스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아프간에서의 기억을 복기하고 있음을 다큐 내내 교차 편집되어서 등장하는 아프간 전투 화면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집에서도, 마트에서 장볼 때에도, 아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도 해리스의 내면에 수시로 침입하는(intrusive) 외상의 기억들은 마치 떼어낼 수 없는 망령 같다. 감독은 그렇게 해리스의 일상에서 전투의 기억으로 전환되는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기이한 효과음을 넣는다.


  대놓고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결코 조력자의 위치에 있지 않는 주둔지의 아프간 주민들의 모습은 미군들에게 탈레반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지휘관은 주민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이렇게 싸우는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 하지만, 냉랭한 표정의 현지인들은 미군이 와서 더 힘들다며 차라리 떠나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출구없는 긴 전쟁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쳐서 돌아왔다. 해리스는 살아남았지만, 그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버겁기만 하다. 부상의 후유증은 어쩌면 평생을 갈지도 모르고, 정신적인 고통도 그의 몫으로 남았다. 


  "결국 이렇게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나마 좋은 점 하나는 그 빌어먹을 전장터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해리스는 다큐 끝 무렵에 그렇게 독백한다. 그는 자기 전에 침대 옆에 총을 두는데, 언제든 침입자에 대비해서 쏠 준비를 해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의 곁에서 이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해리스는 과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다큐는 그 질문에 대해 해리스가 부상을 입은 실제 전투 장면을 마지막 장면에 넣음으로써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리스는 총을 맞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고 되뇌인다. 그렇게 지옥에서 귀환했건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독 Danfung Dennis는 이 다큐로 2011년 선댄스 영화제의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감독에 대해 자료를 찾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비디오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려서 CEO가 되었다. 물론 명시적으로는 사진 작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이전의 경력을 더이상 이어가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그의 원래 전공도 응용 경제학과 경영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며 사진과 다큐 작업을 했던 것은 한 시절의 경험으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이 다큐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어쩌면 'Hell and Back Again'의 해리스처럼, 그도 한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다큐라는 열정의 전장에서 냉엄한 현실로 귀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ilmmaker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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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화면 우측 상단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란 설명과 함께 '퍼스널 쇼퍼'란 제목이 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았다. 그래도 칸에서 상까지 주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나에게 매우 낯선 감독이다.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나 살펴보니, 필모그래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가 뜬다. 아, 이 영화... 우연히 보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린 영화였다. 줄리엣 비노쉬의 나이든 모습도 내게는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비노쉬는 얼마나 빛났던가.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늙어가는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 영화에서 나이든 비노쉬와 대비되는 젊은 여배우가 나왔었는데, 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게 유부남 감독하고 바람난 철없는 여배우로 각인되던 참이었다. 결국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여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나갈 것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다 어제 '퍼스널 쇼퍼(2016)'에서 스튜어트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모린 역을 맡아서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망해버린 영화를 심폐소생시켜서 다시 되살릴 정도로 좋은 연기다.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공허한 껍데기 같다.


  모린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얼마 전 잃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태에 있다. 영매(媒)였던 루이스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루이스의 집에서 심령체(ectoplasm, 죽은 영혼에서 발산되는 유동성 물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다. 그것이 루이스인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존재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느날 모린의 휴대폰으로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문자가 온다.


  "난 널 알아, 너도 날 알고."


  그때부터 그 'Unknown'과 문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모린. 그렇게 문자를 주고 받으며, 모린은 자신의 내면 안에 감춰진 욕망과 두려움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실 주목할 부분은 모린과 Unknown이 주고 받는 문자 대화들이다. 모린에게 끊임없이 각성과 관심을 요구하는 Unknown의 문자들은 마치 글로 뭉쳐진 공포의 덩어리 같다. 안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공포 영화의 가장 무서운 장면처럼 모린도 그 문자들의 공격에 강박적으로 매여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관객들은 모린이 목격한 심령체나 또는 허공에 떠있다 저절로 떨어져 깨지는 컵이 나오는 반복된 장면들 보다 더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모린은 자신의 고객인 키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 큰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균일하고, 툭툭 끊어지며, 여기저기 빈 구멍들이 나 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다 보고 난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도대체 칸에서 아사야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유가 뭘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양면성과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저 조잡하고 실없는 소리들의 나열(spooky hokum)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나는 후자의 편에 서겠다.


  물질과 영혼, 이승과 저승, 돈이 넘쳐나는 화려한 고용주와 그를 대신에 물건 사다 나르는 고용인 퍼스널 쇼퍼. 뭐 이렇게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탐구하는 한 인간의 내적 여정이라고 해야할지, 겉포장지는 그럴듯하다. 막상 뜯어본 상자 속에는 '커다란 벽돌' 하나가 터억 하고 놓여있어서 그렇지. 중고 거래에서 사기꾼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이 영화에서 오직 볼 것이라고는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밖에 없다. 지극히 예민하고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낸 이 여배우의 연기를 보았다는 것만이 이 영화에 대한 실망을 상쇄한다. 화려하고 매우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에도 결코 관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스튜어트에게서는 중성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어쩌면 영매로서의 재능을 루이스와 나누어 가진 모린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중간의 영역에 서있는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출연작들을 한번 살펴 보았다. 혹평을 받은 것도 있고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도 있다. 적어도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배우로서 가진 역량과 가능성을 관객에게 충분히 입증해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칸에서 받은 감독상을 전기톱으로 잘라서 절반은 스튜어트에게 주어야할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이 영화의 분열된 이미지와 의미들을 힘겹게 이끌고는 결국에 종착지에 이르게 만드는 이 여배우의 저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오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조만간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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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이었던 것 같다.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막 독일군에게 끌려가는 혼란과 공포가 가득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는 이제 막 초반부를 좀 넘어서고 있었다. 그 영화에는 무언가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보았다. 영화가 끝났을 때에는 먹먹함마저 느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저주받은 재능이네. 영화를 저렇게 기깔나게 뽑아내다니..."


  '기깔나다'는 사전에도 없는 비속어이다. 보통 '기가 막히게 대단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때깔'이 그 어원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그런 표현을 써서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였다. 그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2002)'였다. 나는 그 영화를 오랫동안 외면해 왔었다.


  '물속의 칼(1962)'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흑백 화면 속에서 펼쳐지던 그 팽팽한 긴장감과 물 위의 '요트'라는 좁은 공간을 다루는 폴란스키의 탁월한 감각에 감탄했었다. 그 영화는 그의 첫 장편 영화였다. 한마디로 뛰어난 신인 감독의 세상을 향한 포효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지는 영화 작업들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해 나갔다. '악마의 씨(1968)', '차이나 타운(1974)'을 보았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진실(Death and the Maiden, 1994)'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는 '시고니 위버의 진실'로 알려진 그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 시고니 위버와 벤 킹슬리가 나온다. 그 두 사람의 진실을 향한 치열한 대결의 여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도의 몰입감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폴란스키는 그런 대단한, 엄청난 영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내가 그 모든 영화들을 보았던 때는, 아직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이었다. 나중에 그의 추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났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이미 그의 영화들을 다 봐두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더이상 그의 영화들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피아니스트'를 작년에서야, 그것도 우연히 틀었던 TV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약간의 거리낌도 느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하고...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음악 경력을 피아니스트로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지만, 그의 아내는 더 유명했다.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였다. 이십대 후반에 다발성 경화증으로 더이상 연주 경력을 이어갈 수 없었던 아내를 외면한 바렌보임은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아들 둘을 두었다. 자클린이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에 그가 세간의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지휘자로서의 경력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나는 바렌보임의 연주를 듣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나 지휘곡이 나오면 그냥 꺼버린다. 싫기도 하지만, 듣는 자체가 괴롭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의 음악인 줄 모르고 듣는 때가 있는데, 듣고 나서 그렇게 말하기는 한다. 연주는 괜찮네...


  바렌보임의 경우는 그것이 도덕적인 흠결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의 경력에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직업 윤리를 어기거나 명백한 범죄 사실에 해당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동료 여성 성악가들에 대한 성추행으로,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은 미성년자 성추행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그것이 그들의 경력과 명성에 먹칠을 했다. 폴란스키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궁지에 몰릴 정도의 박한 대우를 영화계에서 받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천재적인 영화적 재능에 대해 영화계와 동료 영화인들이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그에게 감독상을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고도 미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직접 수상하지도 못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미국을 갈 수 없는 불편이야 좀 겪겠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과 예술 작품은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오래전 시나리오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그 강의를 맡은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소설가 선생님(수강생들끼리는 '영감님'이란 별칭으로 불렀었다)이 어느 날, 분노에 차서 성토한 일이 있었다. 당시에 시인 서정주의 문학 작품에 대한 학계와 문단계의 비판과 함께 문학사적 '삭제'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있었다. 영감님은 그런 일련의 일들에 대해 모두들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


  영감님은 서정주의 후배였다. 문단의 그 누구도 서정주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들은 없었다. 서정주의 후배, 제자들이 한국 문학을 이제까지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근본()'은 생물학적 근본이 아니라, 문학적 근본의 의미였다. 서정주를 부인하는 것은 문인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한국 문학의 '호로자식'이 됨을 자처하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서정주는 명백한 친일 행각 이외에도, 5공화국 시절의 전두환 찬양시까지 만들어 바쳤던 이로 평생을 권력에 영합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의 생애와 별개로 '시'만큼은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칭송받아야 마땅한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뛰어난 감성의 시들을 만드는 '시인 서정주'와 시대의 권력에 순응하고 영합하는 '인간 서정주'는 전혀 다른 개체인가? 예술가의 작품을 예술가의 생애와 별개로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논리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하나의 육체에 깃든 한 명의 사람일 뿐이고, 결국 그것의 분리는 정신 장애와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예전에는 다중 인격 장애로 알려졌지만, 그 질병의 정의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vie Identity Disorder)'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건 어떠한가? 어느 연쇄 살인범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복역 중에 자신의 살인 행각에 대한 책을 써냈다. 그 책은 나름의 문학성을 인정받았고, 문단에서 그를 문인으로 인정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그가 쓴 소설은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정식으로 문예가 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당연히 그 신청은 거부당했다. 그러자 협회의 문인들이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학성만 뛰어나다면 그의 소설은 그가 저지른 살인들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소설을 여러분은 읽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일본의 연쇄 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의 이야기다. 가리타니 고진과 같은 유명한 문예 평론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작가 츠츠이 야스타가가 그의 편에 서서 협회를 탈퇴했다. 살인범이 쓴 책은 도저히 읽을 수 없다면, 사기범이나 절도범이 쓴 뛰어난 소설은 읽을 수 있다고 용인할 수 있겠는가? '예술성'이 그렇게 만능의 '투명 망토'내지는 '마법 탄환'으로 기능하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아마도 예술이 인간 세계의 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그 가치를 잘 보여주는 소설은 김동인의 단편 '광화사()'와 '광염(炎) 소나타'일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예술의 궁극성에 도달하기 위해 미쳐버린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자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된 작곡가가 주인공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의 초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래전, 학교에서 있었던 연극 세미나에 갔었다. 어느 미국 연극 연출가가 자신의 연극과 연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세미나가 끝날 무렵에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의 삶, 그리고 함께 하는 가족입니다."


  나는 좀 놀랐다. 그의 입에서 '연극'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아닌, '삶과 가족'이라는 답을 듣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예술'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은 때론 그것을 하는 이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파괴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나이들수록 인정하게 된다. 예술은 삶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만드는 예술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폴란스키의 나이가 올해 87세이다. 그가 죽기 전에 어떤 걸작 영화를 만들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영화를 구태여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피아니스트'처럼 우연히 TV에서 보게 될 수도 있겠지. 또 다시 감동을 받고, 불편한 마음을 알아챌 것이며, 그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저주받은 재능, 이라고. 그것이 영화를 좋아하는,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에 매혹된 많은 이들의 괴로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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