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어떤 노래를 들었다. 기이한, 놀라운 힘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굉음에 가까운 전자 기타 소리와 알 수 없는 가사들이 혼재된 이 노래는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주 가끔씩, 이 노래를 연속 재생으로 해놓고 틀어놓는 날이 있다. 내 음악 취향과는 전혀 먼 이 노래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 나도 모른다. 가사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 노래는 바로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브렛 모건이 2015년에 만든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은 Nirvana의 리더 싱어 커트 코베인에 대한 다큐이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해서 자신의 음악으로 최정상에 올랐으나 결국 스물 일곱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래서 불멸의 신화가 되어버린 가수. 이 다큐는 커트 코베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대한 여러 단서들을 제공한다. 커트의 유년시절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홈 비디오 화면, 주변 사람들의 증언, 커트의 글과 그림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음악은 오로지 Nirvana의 노래만이 나올 뿐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커트의 십대 시절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해서 넣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신선한 시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다큐를 본 커트의 절친한 친구 버즈 오스본은 그 이야기들이 사실과 전혀 다른 '허튼소리(bullshit)'라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다큐에 불만을 표시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커트의 어머니 웬디 코베인이다. 브렛 모건과 같은 작자(that man이라는 표현을 썼다)와 다큐 작업을 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한 것이다. 아마도 다큐에서 보여진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웬디는 차분하고 안정된 인상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명료하고 듣기 좋은 말투와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웬디 코베인이 구사하는 영어는 결코 하층민이 구사하는 영어가 아니다. 나름의 언어적 감각이라고나 할까, 그 점은 커트의 누이인 킴의 말투에서도 느껴졌다. 그런 것에서 커트가 싱어송라이터로 보여준 언어적 역량이 어머니에게서 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커트의 나이 9살에 있었던 자신의 이혼이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는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린 커트에게 그 이혼은 아마도 정서적인 대지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집에서도 새엄마와 잘 지내지 못했던 커트는 조부모 집을 비롯해 여러 군데를 떠도는데, 그 십대의 시간들은 타고난 기질에 더해 불안과 고통이 깊게 뿌리내리는 시기였다.
커트에게 음악은 그 혼돈과 괴로움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트레이시는 커트의 첫 여자친구로 그가 이제 막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시절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평범한 중년여성으로 커트와의 관계에 대해 담담히 말하는 트레이시를 보고 있노라면, 커트가 나중에 만나게 될 코트니 러브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레이시는 자신과 만날 때의 커트는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커트의 인생에 등장한 코트니 러브는 사랑과 함께 마약도 선사한다. Nirvana의 팬들에게 애증의, 어쩌면 불구대천의 원수같은 코트니 러브는 그렇게 다큐 중간부터 등장해서 끝날 때까지 그 면상을 봐야한다.
다큐 후반부를 차지하는 자료 화면은 코트니가 찍은 비디오 화면들로,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 코트니의 임신과 출산, 딸 프랜시스와의 일상들을 볼 수 있다. 뭐랄까,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약쟁이' 부모의 자식 사랑도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한다. 충격적인 장면도 있다. 프랜시스가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던 날, 마약에 취해있는 커트를 보면서 코트니는 아이에게 약쟁이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없는 가여운 어린 아기 프랜시스는 이 다큐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는데, 다큐 작업을 후회한다는 할머니와는 달리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프랜시스에게는 이 다큐가 성장과정 내내 정서적 외상에 시달렸던 자신에 대한 성찰의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코트니 러브. 이 여자야말로 커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가려버린다. 이 다큐의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커트 코베인과 그의 음악 인생의 전부인 Nirvana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룹 멤버들의 인터뷰가 노보셀릭 딱 한명, 그것도 10분 정도나 될까 싶은 아주 짧은 분량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아주 실망스럽다.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Nirvana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것이 전부다. 공연이나 앨범 제작, 멤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 그 대신 코트니 러브에게 마치 자기 변호의 이야기를 하도록 판 깔아준 느낌마저 들 정도다. 얼굴에 두꺼운 철판 딱 깔고, '내가 마약을 하긴 했어. 그래도 아기 가졌을 땐 안했다고'라고 말하는가 하면(그건 사실이 아니지), 커트 몰래 바람 피운 적이 없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원체 남자들 꼬시는데 선수거든(big flirt). 뭐, 딱 한번 정도 그랬던 것 같기는 해."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Black widow. 한 남자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고통과 파멸의 길로 안내한 사람이 되었다. 너무나도 예민하고, 자신의 불안을 감당할 수 없었던 커트에게 사랑과 마약을 주면서 서서히 음악을 망가뜨렸고, 결국에 그 영혼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웬수같은 여자의 얼굴을 다큐에서 오래 보는 것을 좋아할 Nirvana팬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다큐를 보고 가장 좋아할 사람은 코트니 러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주목받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겠지.
도대체 커트 코베인의 뭘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차라리 Weird Al Yankovic이 만든 패러디 뮤직 비디오 'Smells like Nirvana'가 짧지만 더 솔직하고, 통찰력있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150편이 넘는 패러디 뮤직 비디오를 만든 재능있는 음악가인 그에게 'Smells like teen spirit'을 패러디한 그 작품은 유명세를 떨치게 만들었다. 커트 코베인은 흔쾌히 제작을 허락했으며, 자신의 뮤직 비디오 제작을 맡았던 감독과 조연배우 섭외, 소품 대여에 이르기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대인배였던 것이다.
그렇게 Weird Al이 만든 패러디 뮤직 비디오는 뛰어난 위트와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마치 원래의 뮤직 비디오와 한쌍으로 취급된다. 그는 늘 커트 코베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우연히 마주친 단 한번으로 LA의 한 식당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신이 보답으로 해줄만한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커트 코베인은 손을 그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매니큐어나 칠해줘요(Polish my nails)."
그런 일화를 보면, 커트 코베인은 격의없고 소탈한 사람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Montage of Heck'을 구글 영화에서는 '지옥의 몽타주'란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데, 참 마음에 안든다. Heck을 설마 Hell로 읽은 건가, 그런 말도 안되는 번역을 쓰다니 안타깝다. 'Montage of Heck'은 1988년에 커트 코베인이 개인적으로 녹음한 라디오 소리들, 데모 연주들이 담긴 녹음 모음집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걸 그대로 다큐 제목으로 쓴 브렛 모건의 상상력도 참 빈곤하다 싶다.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 다큐이지만, 커트 코베인의 팬이라면 2시간이 좀 넘는 러닝 타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하기는 하다.
*사진 출처: lwli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