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맷 슈레이더 감독의 다큐 'Score: A Flim Music Documentary(2016)'을 보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요새 보는 영화들이 다큐에 치우쳐져 있다. 어, 그런데 잠깐만, 예전부터 나는 극영화 보다는 다큐를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다큐 'Score'는 말 그대로 영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무성 영화 시절에도 주로 오르간 연주로 대표되는 음악들이 영화에 들어가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영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영화 음악이 변천해왔는가를 들여다 본다. 뭐 나름대로 분석한다고 신경심리학자 불러다 놓고 음악이 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인터뷰도 한다(솔직히 그 부분은 쓸데없는 사족같다). 현재 잘 나가는 영화 음악 작곡가들이 서로 주고 받는 이런저런 자화자찬(?)들도 재미있다. 한스 짐머, 토마스 뉴먼, 트렌트 레즈너 같은 유명 영화 음악 작곡가들의 면면을 보는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다큐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 음악들 덕분에 귀가 호강하는 다큐가 되겠다. 요약하면, 생각보다 극한 직업인 '영화 음악가'들의 세계 탐구에 더해 가슴 뛰게 만드는 좋은 영화 음악이 주인공인 다큐인 셈이다.


  기존의 영화 음악가들은 골방에서 영감을 받아 모조리 혼자 다 작업하는 것 같았던 인식이었는데, 이제는 영화가 거대 산업이 되다 보니 영화 음악도 여러 사람이 팀을 만들어서 하는 하나의 공장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영화에 음악이라는 혼을 입히기 위해 음악가들이 쏟는 열정도 참 대단했다. 오만가지 악기들로 가득찬 작업실이 5개나 되는 이도 있었고, 다양한 소리를 내기 위해 아프리카 토속 악기까지 수집해서 작업에 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다큐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무성 영화 시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왔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 화면이었다. 영화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그 50초 가량의, 사람들이 기차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면을 담았을 뿐인 그 작품. 왜 그 짧은 화면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것일까...


  그 장면을 처음 본 것은 영화 공부를 시작한 첫해에 들었던 과목 '영화의 이해'에서 였다. 영화의 기본이 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배웠던 그 시간. 주로 명작 영화들의 장면장면들이 수업 교재로 쓰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와일드 번치(1969)', 그리고 한국 영화 '만다라(1981)'도 있었다. '만다라'는 도입부 롱 쇼트가 몇 분으로 느껴지는지를 적어야 했는데, 수강생들 모두 다 틀렸던 기억이 난다. 


  아, 그랬었지. 나는 'Score' 다큐를 보는 도중에 그 시절이 생각났다. 첫해에 들었던 과목 가운데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사'도 있었다. 그 과목도 내가 참 좋아했던 수업이었다. 그때 첫시간에 보았던 다큐가 '북극의 나누크(1922)'였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기념비적인 작품. 감독 로버트 플래허티는 다큐의 시조처럼 여겨졌지만, 그 작품이 온전한 다큐 정신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몇몇 장면들은 재연된 것이며, 사실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도 있었다. 나누크의 부인으로 나온 여성이 실제로는 플래허티의 이누이트 동거녀였고, 당시의 이누이트 인들이 작살이 아닌 총으로도 사냥했음에도 그런 장면은 배제했다는 점은 철저하게 플래허티가 계획한 화면들로만 구성된 기획 다큐의 측면이 강하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아주 노련하고 영민한 영화 제작자였다.


  그럼에도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이 무성영화 다큐는 관객들이 주인공 나누크와 그 가족의 일상으로 마법처럼 빠져들게 만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지금 내가 다시 본다면, 그냥 시큰둥하게 보고 말았을 작품. 그러나 그 시절의 나는 영화에 넋이 나간 상태였으므로, 영화에 대해 배우는 모든 것이 놀랍고 기쁘고 그랬었다. 오로지 열정만으로 지겹고 참기 힘든 영화도 보았다. 인종차별을 당연시하는 온갖 수사로 가득한 3시간 짜리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에서 KKK단원들이 구국의 열사처럼 등장하는 것도 그래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그토록 영화를 좋아했을까? 특히 다큐를 더 좋아했던 이유는 뭘까? 영화를 보면서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보여주는 매혹적인 세계들 때문에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시 맞닥뜨리는 우리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평범하고, 때론 지루하고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글쎄, 사람마다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이유들이 다 다르겠지. 내게는 영화가 나와는 다른 사람들, 세계들을 보여주는 창이었고, 그러한 응시를 통해 내가 조금씩 성장한다고 느꼈었다.


  대학 시절에 전공 수업을 열심히 듣기는 했어도, 나중에는 철학과 문학, 종교 관련 수업으로 학문적 유목민처럼 떠돌아 다녔었다. 철학과 애들은 내가 부전공하는 줄 알 정도였다. 그때 들은 서양 근현대 철학 수업은 진짜 어려웠다. 중세 철학사에 비하면 덜하기는 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설명해주던 강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평과 너의 지평이 만나는 것. 그래서 그렇게 만난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창고에 있는 박스 어딘가에 그때 수업시간에 받은 프린트 자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보관했다. 어쩌면 영화는 내가 가진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친구로 여겨졌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실제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 사건들을 보면서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다.


  '북극의 나누크'는 그것을 처음으로 보던 시절, 영화에 대한 내 첫마음을 일깨워주는 다큐인지도 모른다. 볼만한 다큐를 찾으려고 재생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그 다큐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이렇게 적어본다.



*사진 출처: filmmonthly.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이납은 카테라를 '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엄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테라는 그렇게 부르면 헷갈리니까 하나로 정하라고 한다. 그러자 자이납은 '진짜 엄마 아냐'하면서, 카테라의 늙은 어머니에게 '엄마'하고 안긴다.


  "어젯밤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 폭탄이 우리집에 떨어져서 우리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랬어요."


  도대체 23살의 카테라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흐라 마니 감독의 '침묵하는 여성들을 위하여(A Thousand Girls Like Me, 2018)'는 EIDF 2019 개막작으로 상영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이 여성 감독은 카테라에게 일어난 참혹한 비극에 대해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울림은 너무나도 크고 깊다.


  카테라는 자신을 강간한 아버지를 고발한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Sexual Abuse)를 당한 카테라는 3번 임신했고, 아버지는 아기들을 사막에 버렸다. 4번째 출산한 아이가 자이납이다. 카테라는 다시 임신하게 되자, 아버지를 고발했다. 율법학자들을 찾아가 물었지만, 그들은 참고 살라거나 기도하라는 말만을 했다. 15번째 찾아간 율법학자가 카테라에게 해답을 주었다. 


  "미디어 앞에 나가서 말하시오."


  카테라는 부르카(burqa)를 입고 TV에 나가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증언한다. 아버지는 기소되었지만, 정식 재판은 1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시작된다. 그 기간 동안 아버지 친가 사람들의 위협과 협박이 이어지고, 카테라는 경찰과 변호사들을 만나느라 돈을 다 써버린다. 뱃속의 아기는 법적 증거이기 때문에 낙태를 할 수 없다는 판사의 명령에 따라 카테라는 아기를 출산한다. 태어난 아기의 DNA를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카테라의 아버지라는 것이 명백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강제로 그랬다는 것을 우리가 입증해야 합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왜 저항하지 않았냐, 왜 신고하지 않았냐, 왜 주변에 알리지 않았냐를 문제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당신이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입증하지 않는다면, 유전자 검사는 별 소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변호사의 판단은 냉정하다. 카테라의 아버지는 매번 폭력을 일삼았고, 남동생들이 막으려고 하자 남동생들도 때려서 내쫓았다. 그 집에서 일어난 그 엄청난 일들을 증언하는 이웃들의 증언과 그들의 지장이 빼곡히 찍힌 고소장도 소용이 없다. 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느냐고? 밤낮으로 폭언과 폭력이 행해지는 그 집에서 어렸을 적부터 살아본 카테라가 아니라면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카테라는 자신에게 일어난 그 끔찍한 비극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입증해낸 그 유명한 실험. 반복된 전기 충격을 제어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개들은 나중에 전기 충격을 제어하는 버튼이 제대로 작동이 되어도 그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그냥 자신에게 오는 전기 충격을 다 받아낼 뿐이다. 왜 가정폭력의 희생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환경에서 벗어날 그 어떤 시도나 행동도 하지 않을까? 무기력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카테라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친가쪽 사람들은 카테라가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죽음의 위협을 일삼는다. 이른바 명예 살인(Honor Killing). 드디어 이루어진 재판에서 카테라 아버지의 유죄가 인정되지만, 형량은 선고되지 않고 계속 미뤄진다. 2015년에 있었던 재판의 형량 선고는 다큐가 완성된 2018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판 후 카테라는 친가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소문과 시선을 피해 하루살이처럼 이사를 다니며 떠도는 삶을 이어간다.


  "너와 나는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정해진 운명인가 보다."


  카테라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카테라는 자신에게 지워진 그 운명에 맞선다. '운명'에 해당하는 라틴어 'fatum'은 입으로 말해진 것(utterance), 선언된 것(declaration)의 의미가 있다. 이미 공표된 것이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죽음(death)의 뜻도 있다. '치명적인'이란 뜻의 영어 'fatal'이 여기에서 나왔다.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해 카테라는 거부의 뜻을 표명한다. '말'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카테라의 그 결심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카테라의 그 목숨을 건 '발화(發話)'는 자신과 두 아이들의 인생을 구한다. 여성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카테라는 자이납과 모하메드를 데리고 프랑스로 떠난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에는 행복한 카테라와 아이들의 사진이 올라간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카테라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무수한 여성들이 얼마나 더 침묵의 시간들을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다큐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보는 내내 가위눌리는 느낌'이라고 썼다. 그렇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욕지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카테라와 그 두 아이들의 시간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이 짊어진 운명의 짐은 겨우 조금 덜어졌을 뿐이다.


  용기. 1955년 12월 1일, 한 흑인 여성이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 때문에 체포된 여성의 이름은 로자 파크스(Rosa Parks). 결코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그 작은 행동이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용기를 가지고 한 작은 행동, 목숨을 걸고 하는 말 한마디, 그것이 새롭게 쓰여지는 역사의 시작이다. 카테라의 용기 있는 '말'이 부당한 운명에 침묵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언젠가 우리가 직접 보게 되길 소망한다.



*사진 출처: EIDF 홈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자책]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라틴어 수업 1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EBS 클래스 e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좋은 강의들이 참 많다. 최근에 들은 최장순의 '기획의 세계'도 좋았고, 또 이전에 들은 작가 장강명의 글쓰기 강의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글쓰기 강의는 다시 블로그에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인상적인, 마음을 울렸던 강의가 또 있다. 한동일의 '라틴어 인생수업'과 '공부법 수업'이 그것이다. 이 분은 직함도 여럿이다.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 교수, 사제 등등. 스스로를 '공부하는 노동자'로 칭하는 그는 공부 경력만 30년이다. 그런 그가 아마도 가장 좋아할 것 같은 호칭은 '선생'이지 싶다.


  이 책은 그가 대학에서 강의한 라틴어 수업을 정리한 책으로, EBS의 클래스 e는 이 책의 TV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는 TV에서 다 다루지 못한 여러 주제들, 이야기들이 실려있어서 흥미롭다. 방영된 '라틴어 인생수업'이 인기가 좋았는지, 얼마 안있어 '공부법 수업'이 4부작으로 편성되었다(이 강의는 공부 잘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가 아니다). 두 강의들 모두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동일 선생이 들려주는 인생의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부법 수업'에서는 선생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감동적인 부분들이 많았다. 사적인 자리도 아닌, 그런 대중적인 강의를 위한 방송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들려주는 모습이 남달랐다. 아마도 그러한 인생 이야기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청춘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처음 방송에서 선생의 강의를 듣게 되었을 때, 좋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학자 신부인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사제들의 교육은 교구의 장학금으로, 수도회에 소속된 신부들은 수도회에서 책임을 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세계에도 사람마다 가진 이런저런 배경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에 따라 진로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한 선생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위 시쳇말로 흙수저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선생이 강의에서 들려준 자신의 십 대 시절은 단칸방에, 매일 술을 마시는 아버지와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어머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 그런 가운데 마음을 둘 데 없었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친했던 친구의 집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친구 형의 서재에서 선생은 인생의 빛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책이었다. 온갖 고전 문학과 철학 책이 그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주었다.


  선생은 자신이 결코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덕성이 있었다. 열정과 성실성이었다. 그것이 그의 공부 인생 30년을 지탱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책을 통해 만나는 지식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꾸준히 쌓아가게 만들었던 성실성으로 인해 그에게는 이런저런 명예로운 호칭들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식을 탐구하는 '공부 노동자'로 자처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그의 책 '라틴어 수업'에는 그의 그런 소망, 특히 청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보석같은 조언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이 책에는 각 장마다 붙은 라틴어 경구에 대한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나에게 좋았던 부분은 5장 '단점과 장점(Defectus et Meritum)'이다. Defectus와 Meritum. 그 장은 우리 각자가 가진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생각해 보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과연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한 것은 단점이기만 한 것일까? 그것은 나에게 전적으로 불리하기만 한, 괴로움의 단초만 제공해주는 것일까? 최근에 본 다큐 'First Position(2011)'은 발레 영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거기에는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내전에 부모를 잃고 미국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미카엘라가 나온다. 미카엘라는 발레의 세계에서는 보기 드문 흑인인 데다가 백반증이라는 피부병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카엘라의 목과 어깨부분의 피부는 얼룩덜룩해 보인다. 그런 피부를 가진 것을 단점으로 여기는 미카엘라에게 양어머니는 이런 말을 해준다.


  "네 피부가 그래서 눈에 띈다면 너에게는 좋은 일이야. 수많은 발레리나들 가운데, 관객들은 너를 더 잘 기억하게 될 테니까."


  미카엘라의 Defectus는 그렇게 Meritum이 된다. 놀랍지 않은가? 미카엘라의 얼룩덜룩한 피부는 그대로이지만, 그것을 보는 관점을 바꾸니 남들에게는 없는 장점이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우리 자신의 단점과 열등감들은 새롭게 봐주어야할 장점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활용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28장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Dum vita est, spes est)'도 좋았다. 살아있기 때문에 실패와 고통도 감내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희망이란 좋은 거에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렇게 좋은 건 절대로 사라지지 않아요." 

 

  영화 '쇼생크 탈출(1994)'에서 주인공 앤디는 그렇게 말한다. '희망'은 그렇게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특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대사이다.


  이 책의 라틴어 경구들은 방황하고 고민하는 청춘들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조언이기도 하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 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마음이 서늘한 이들에게 든든한 마음의 외투가 되어줄 것 같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주말에 동생이 집에 잠깐 들렀다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나에게 물었다. 


  "같이 영화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 그 쪽에서 잘된 사람 있어?"


  나는 잠깐 생각해 보고는 대답했다.


  "없어."


  영화 감독 되기 어려운 거야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때 같이 공부했고 알고 지냈던 이들 가운데 입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관련 책을 쓴 사람도 없는 듯하다. 내가 관심있어서 들었던 글쓰기 수업에서는 두 명이 등단했다. 한 명은 지금 아주 잘 나가는 중이고, 한 명은 책 좀 쓰다가 지금은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써놓고 보니, 참으로 예술의 세계란 얼마나 무지막지한 곳인가 싶다. 순전한 재능의 세계, 그것이 기본이다. 거기에 더해 미친 듯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베스 카그먼 감독의 다큐 영화 'First Position(2011)'은 매년 뉴욕에서 열리는 'Youth America Grand Prix'에 참가하는 6명의 발레 유망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대회에서 입상하면 유명 발레 아카데미 장학금, 여러 발레단에서의 취업을 보장받는다. 세계 주요 도시에서 예선이 열리고, 그 가운데 선발된 경연자들이 뉴욕에 모여서 최종 경연을 치룬다. 한마디로 난다 긴다 하는 발레 영재들의 피터지는 각축장이다.


  6명의 출연자가 들려주는 각각의 사연, 그리고 마지막 경연 장면까지 러닝 타임 1시간 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아무리 9년 전 다큐 영화라 해도, 그 경연 결과를 말하는 건 스포일러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 한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무대 뒤에서는 눈물과 한탄, 자책이 가득하다. 그곳에 오기까지 그들 모두가 겪은 시간들은 마치 전쟁같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다.


  출연자들 가운데 눈부신 재능으로 상을 거머쥔 입상자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2011년에 찍은 다큐에서 그렇게 반짝거렸던 발레 영재들은 어찌 되었을까? 대부분 발레 무용수로서 경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를 그만 둔 경우도 있었다. 당시 12살의 미코는 대단한 유망주로 주목받았고, 다큐 이후로도 세계 유명 경연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런데 미코는 발레를 그만 두고 대학에 진학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시에라리온 출신으로 내전에 부모를 잃고, 미국 유대인 가정에 입양된 미카엘라의 이야기가 참 극적이다. 발레의 세계에서는 드문 흑인인데다가, 미카엘라는 백반증까지 가지고 있다. 최종 경연을 앞두고는 발목 부상으로 내내 고생한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이겨가며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미카엘라는 마치 부상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무대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다큐를 보는 내내 가슴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분야는 다르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부딪혔던 재능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5년, 중학생 때는 바이올린을 3년 동안 배웠다. 둘 다 정말 좋아서 배웠지만, 나는 내가 연주자로서의 재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끗하게 포기했다. 그렇게 배운 것을 실황연주 들을 때 써먹는다. 어디에서 연주자들이 실수했는지, 어느 부분에서 손이 삐끗해서 음정이 나갔는지, 어느 정도 연습을 했는지 대강 알아차릴 정도는 된다.   


  그리고 영화. 나는 이 '영화'라는 괴물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청춘을 삼켜버렸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건 아니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대상에게 '괴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미안해진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의 이미지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 미쳐서 자신의 젊은 날들을 그 속에 내던져 버렸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은 입구를 탐색하다가 진작에 가버렸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그 여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는 지도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영화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결과, 인생의 시간들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비극이 따로 없다. 


  "무서운 이야기네."


  동생은 내 말을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아마 다들 뭔가를 하면서 먹고는 살겠지. 누구는 유학까지 다녀와서 먹고 살 방도를 찾으려 무슨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그게 벌써 10년 전이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 세계는 재능과 노력, 운의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이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세계야. 살아남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거든.


  다시, 'First Position'. 미카엘라에게 발레를 가르친 스승은 '부상을 입을 수도, 실수할 수도 있지만,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조언한다.


  "Keep dancing!"


  미카엘라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어코 얻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사진 출처: theupcoming.co.u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어떤 노래를 들었다. 기이한, 놀라운 힘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굉음에 가까운 전자 기타 소리와 알 수 없는 가사들이 혼재된 이 노래는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주 가끔씩, 이 노래를 연속 재생으로 해놓고 틀어놓는 날이 있다. 내 음악 취향과는 전혀 먼 이 노래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 나도 모른다. 가사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이 노래는 바로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다.


  브렛 모건이 2015년에 만든 'Kurt Cobain: Montage of Heck'은 Nirvana의 리더 싱어 커트 코베인에 대한 다큐이다.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해서 자신의 음악으로 최정상에 올랐으나 결국 스물 일곱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그래서 불멸의 신화가 되어버린 가수. 이 다큐는 커트 코베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대한 여러 단서들을 제공한다. 커트의 유년시절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홈 비디오 화면, 주변 사람들의 증언, 커트의 글과 그림으로 차곡차곡 채워나간다. 음악은 오로지 Nirvana의 노래만이 나올 뿐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커트의 십대 시절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해서 넣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신선한 시도였다. 그러나 나중에 다큐를 본 커트의 절친한 친구 버즈 오스본은 그 이야기들이 사실과 전혀 다른 '허튼소리(bullshit)'라며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다큐에 불만을 표시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커트의 어머니 웬디 코베인이다. 브렛 모건과 같은 작자(that man이라는 표현을 썼다)와 다큐 작업을 한 것이 후회된다고 말한 것이다. 아마도 다큐에서 보여진 아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웬디는 차분하고 안정된 인상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명료하고 듣기 좋은 말투와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웬디 코베인이 구사하는 영어는 결코 하층민이 구사하는 영어가 아니다. 나름의 언어적 감각이라고나 할까, 그 점은 커트의 누이인 킴의 말투에서도 느껴졌다. 그런 것에서 커트가 싱어송라이터로 보여준 언어적 역량이 어머니에게서 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커트의 나이 9살에 있었던 자신의 이혼이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는 회한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린 커트에게 그 이혼은 아마도 정서적인 대지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집에서도 새엄마와 잘 지내지 못했던 커트는 조부모 집을 비롯해 여러 군데를 떠도는데, 그 십대의 시간들은 타고난 기질에 더해 불안과 고통이 깊게 뿌리내리는 시기였다.


  커트에게 음악은 그 혼돈과 괴로움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트레이시는 커트의 첫 여자친구로 그가 이제 막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시절에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평범한 중년여성으로 커트와의 관계에 대해 담담히 말하는 트레이시를 보고 있노라면, 커트가 나중에 만나게 될 코트니 러브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레이시는 자신과 만날 때의 커트는 마약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커트의 인생에 등장한 코트니 러브는 사랑과 함께 마약도 선사한다. Nirvana의 팬들에게 애증의, 어쩌면 불구대천의 원수같은 코트니 러브는 그렇게 다큐 중간부터 등장해서 끝날 때까지 그 면상을 봐야한다.


  다큐 후반부를 차지하는 자료 화면은 코트니가 찍은 비디오 화면들로, 두 사람의 친밀한 모습, 코트니의 임신과 출산, 딸 프랜시스와의 일상들을 볼 수 있다. 뭐랄까,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약쟁이' 부모의 자식 사랑도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한다. 충격적인 장면도 있다. 프랜시스가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던 날, 마약에 취해있는 커트를 보면서 코트니는 아이에게 약쟁이의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없는 가여운 어린 아기 프랜시스는 이 다큐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했는데, 다큐 작업을 후회한다는 할머니와는 달리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프랜시스에게는 이 다큐가 성장과정 내내 정서적 외상에 시달렸던 자신에 대한 성찰의 작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코트니 러브. 이 여자야말로 커트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가려버린다. 이 다큐의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커트 코베인과 그의 음악 인생의 전부인 Nirvana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룹 멤버들의 인터뷰가 노보셀릭 딱 한명, 그것도 10분 정도나 될까 싶은 아주 짧은 분량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아주 실망스럽다.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Nirvana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것이 전부다. 공연이나 앨범 제작, 멤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다. 그 대신 코트니 러브에게 마치 자기 변호의 이야기를 하도록 판 깔아준 느낌마저 들 정도다. 얼굴에 두꺼운 철판 딱 깔고, '내가 마약을 하긴 했어. 그래도 아기 가졌을 땐 안했다고'라고 말하는가 하면(그건 사실이 아니지), 커트 몰래 바람 피운 적이 없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원체 남자들 꼬시는데 선수거든(big flirt). 뭐, 딱 한번 정도 그랬던 것 같기는 해."


  그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Black widow. 한 남자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고통과 파멸의 길로 안내한 사람이 되었다. 너무나도 예민하고, 자신의 불안을 감당할 수 없었던 커트에게 사랑과 마약을 주면서 서서히 음악을 망가뜨렸고, 결국에 그 영혼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 웬수같은 여자의 얼굴을 다큐에서 오래 보는 것을 좋아할 Nirvana팬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다큐를 보고 가장 좋아할 사람은 코트니 러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주목받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겠지.


  도대체 커트 코베인의 뭘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차라리 Weird Al Yankovic이 만든 패러디 뮤직 비디오 'Smells like Nirvana'가 짧지만 더 솔직하고, 통찰력있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150편이 넘는 패러디 뮤직 비디오를 만든 재능있는 음악가인 그에게 'Smells like teen spirit'을 패러디한 그 작품은 유명세를 떨치게 만들었다. 커트 코베인은 흔쾌히 제작을 허락했으며, 자신의 뮤직 비디오 제작을 맡았던 감독과 조연배우 섭외, 소품 대여에 이르기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대인배였던 것이다.


  그렇게 Weird Al이 만든 패러디 뮤직 비디오는 뛰어난 위트와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마치 원래의 뮤직 비디오와 한쌍으로 취급된다. 그는 늘 커트 코베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우연히 마주친 단 한번으로 LA의 한 식당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며 자신이 보답으로 해줄만한 것이 있냐고 물었더니, 커트 코베인은 손을 그에게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매니큐어나 칠해줘요(Polish my nails)."


  그런 일화를 보면, 커트 코베인은 격의없고 소탈한 사람이었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Montage of Heck'을 구글 영화에서는 '지옥의 몽타주'란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데, 참 마음에 안든다. Heck을 설마 Hell로 읽은 건가, 그런 말도 안되는 번역을 쓰다니 안타깝다. 'Montage of Heck'은 1988년에 커트 코베인이 개인적으로 녹음한 라디오 소리들, 데모 연주들이 담긴 녹음 모음집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걸 그대로 다큐 제목으로 쓴 브렛 모건의 상상력도 참 빈곤하다 싶다. 이래저래 마음에 들지 않는 다큐이지만, 커트 코베인의 팬이라면 2시간이 좀 넘는 러닝 타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하기는 하다.



*사진 출처: lwlie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