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EBS 세계의 명화에서 틀어준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를 보았다. 보고나서 든 생각은 이랬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든 거지? 우디 앨런은 이런 영화도 쉽게 만들만큼 제작비도 잘 끌어다 썼던 모양이네', 싶었다. 한마디로 허세 가득한, 교양인들을 위한 문학, 음악, 미술 지식 테스트를 위한 리트머스 용지쯤 되는 영화로 보였다. 앨런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여러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들을 몇 명이나 아는지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그 사람들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볼 자격이 되는 거에요."


  그래, 나는 '주나 반스'만 빼놓고 다 안다. 그 인물들을 다 아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지독한 지적 속물주의(snobbism)가 이 영화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면, '미리 공부를 하고 보라'는 충고도 나온다. 기가 막힌다. 미리 공부를 하고 봐야할 만큼 이 영화는 대단한 영화인가?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우디 앨런이 자기 멋에 겨워 파리에서 노닥거리며 대충 만든 영화 같다. 그런데도 우디 앨런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흥행 수입을 기록했다니, 이 영화를 만들었던 때가 우디 앨런에게는 '황금 시대'였는지 모르겠다. 비평도 꽤 좋았다. 이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찾아보면 혹평을 찾아보기 어렵다. 죄다 미사여구 일색, 거장 감독에 대한 예우 치고는 과하다.


  영화 줄거리, 등장 인물이 궁금한 이들은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아주 잘 나오니 참고하면 된다. 사진과 인물 해설까지 곁들여 백과사전처럼 편집해 놓은 블로그도 있다. 파리 덕후들에게도 이 영화는 인기가 있다. 유럽 쪽에서 평가가 좋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1920년대,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는 이 영화를 유럽인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


  우디 앨런이 그토록 열광해 마지않는 시대가 1920년대라는 것은 영화를 보니 잘 알겠다. 헐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로 나오는 길 펜더(오언 윌슨 분)가 우디 앨런의 분신이라는 것도 명확하다. 자신의 작품을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도 알아주겠다. 길 펜더가 진정한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고민은 결코 진지한 것이 아니며, 약혼녀 이네즈와 피카소의 애인으로 나오는 가상의 여인 아드리아나와의 관계도 피상적이다. 도대체 이 영화에는 '진정성'같은 것이 없다. 길 펜더가 '마법 자동차(?)'를 타고 2010년에서 1920년대로 매일밤 여행을 떠나는 그 황당한 설정도 관객들은 용인해 주어야 한다. "Oh, my god!" 나는 점잖은 사람이므로 욕은 쓰지 않는다.


  오언 윌슨의 연기는 대단하다. 앨런의 연기 지도를 아주 충실히 잘 이해했으며, 앨런의 분신 역을 훌륭히 해냈다. 막장 연애사로 유명한 카를라 브루니는 몇 장면 등장하지도 않은 여행 가이드 역인데 확실히 화면을 잡아먹는다. 대단한 여자(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살바도르 달리가 참 웃겼다. 달리의 그 독특한 억양과 외모를 브로디만큼 재현해낼 수 있는 배우도 없을 것이다.


  그냥 그 뿐이다. 이 영화에 내가 별점을 주어야 한다면, 5개 만점에 1개에서 2개 사이를 고민할 것이다. 그래, 1개 반을 주기로 하자. 나는 우디 앨런의 몇몇 영화들은 아주 좋아했다. '젤리그(1983)',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뉴욕스토리(1989)', 그리고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같은 영화들.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2017년작 '원더 휠(Wonder Wheel)'이 정말 좋았다. 그 영화는 참 괜찮은 영화였는데, 그해 미국 주요 언론에서 꼽은 올해의 영화 20편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미아 패로의 양딸 딜런 패로가 우디 앨런이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성추행했다며 뉴욕타임즈에 폭탄같은 서한을 보냈다. 그때부터 앨런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악몽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앨런의 평판은 급전직하했다. 앨런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미아 패로의 입양 아들 모지즈 패로는 앨런의 편에 서서, 정작 애들을 학대한 것은 미아 패로였다고 주장했다(2018년 미국 허프포스트 참조). 미아 패로의 친자 로넌은 어머니 미아 패로와 여동생 딜런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우디 앨런은 부인이 된 순이 프레빈과의 엄청난 과거를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무마하고 자신의 경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딜런 패로가 터뜨린 폭탄의 파편들은 막지 못했다. 그 유탄들은 사방으로 튀었다. 미투 운동이 더해지면서 많은 여배우들이 앨런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급기야 2019년에는 자신과 계약한 아마존이 더이상의 제작을 거부하자 법정 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돈으로 합의를 보기는 했으나, 거장 감독으로 추앙받던 앨런의 영화 경력은 완전히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얼마전에 라디오를 듣는데, 아주 구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렌스키의 아리아, '어디로 갔는가, 내 황금같은 청춘의 날들이여'였다. 우디 앨런이 듣는다면 정말 울어버릴 것 같은 노래다. 말년의 그가 내놓은 자서전은 출판사마다 출판을 거부했고, 겨우 어렵게 출판한 자서전은 동네북처럼 비난으로 얻어맞았다. 이제 그에게는 황금같은 날들은 가고 오욕과 모멸감이 가득한 노년의 날들만 남았을 뿐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앨런의 황금시대 영화 같다. 그는 맘껏 자신의 영화적 환상을 펼쳐보인다. 사람들은 그가 보여준 꿈같은 시대의 재현에 열광했고, 그에게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모든 황금같은 시간들에는 끝이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sonyclassic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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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딱 이맘 때쯤이었던 것 같다. 11월 초, 아직은 가을이 남아있다 싶었는데 갑자기 추위가 몰아닥쳤다. 왜 그날 두터운 외투를 입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덜덜 떨면서 굿을 보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공연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듣고 있었다. 강사 선생이 그날 수업을 끝내면서, 굿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한번 가보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진적굿이라면서, 만신의 집주소를 알려주었다. 만신과는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지, 자신의 이름을 대면 대접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진적굿. 무당이 자신의 몸주신과 모시는 여러 신들에게 올리는 감사의 굿이다. 무당은 일반적으로 재갓집이라고 하는 자신의 고객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굿을 하는데, 이 진적굿은 무당 자신이 오직 스스로를 위해서 하는 굿이다. 나는 그 때까지 굿은 보기는 했어도, 진적굿은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무당 개인을 위한 굿이다 보니, 그 굿은 무당의 재갓집 신도들, 신딸과 신아들,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이들에게만 참석이 한정되어서 그런 면도 있었다.


  굿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시절, 종교학 강의를 들을 때였다. 중간 보고서 과제가 타종교 체험을 해보고, 그걸 써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운현궁에서 명성왕후 해원굿(한맺히고 원통한 것을 푸는 굿)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굿을 보러 갔었다. 정말이지 그 굿은... 내게는 진정한 문화 충격이었다. 타살거리('거리'는 연극의 '막'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굿은 여러 거리로 이루어지는데, 타살 거리는 돼지나 소를 제물로 바치는 굿이다)에서 커다란 돼지를 삼지창으로 세우는 것이며, 무당이 생고기를 씹어먹는 것은 놀라웠다. 온갖 화려한 무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춤을 추고, 공수를 내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흥미롭고 기이했다. 그 굿은 샤머니즘에 대한 내 관심의 시작점 같은 사건이었다.


  만신의 집은 인천에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강 이북의 강신무들이 대거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인천과 부평, 그 근방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황해도 굿의 명맥을 있는 이들이었다. 내가 보기로 한 진적굿의 K만신은 황해도 굿의 대가인 김금화의 신딸로, 나름 이름있는 무당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커다란 솥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분주히 움직였다.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자, 꽤 나이든 여성이 굿을 보러 왔냐고 물었다. K 만신이었다. 만신은 풍채가 아주 좋았다. 뭐랄까, 목소리까지 걸걸해서 여장부 같았다. 나는 강사 선생의 이름을 대고, 그 소개로 왔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배고프지 않냐며 식사부터 하라고 했다.


  만신이 나를 데리고 2층에 올라가니 무척 큰 주방에서는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신은 주방에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좀 차려오라고 일러두고는, 나를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방에는 웬 중년 남자 하나가 드러누워서 자고 있었다.


  "뭔 잠을 이렇게 늘어지도록 잔다냐. 어여 일어나."


  남자는 턱이 떨어질 정도로 하품을 하더니, 겨우 일어나 앉았다. 어제 밤새도록 굿을 뛰느라 그랬다면서 눙쳤다. 가만히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명성왕후 해원굿에서 본 박수 무당이었다. '아이구, 아재요, 여기서 또 보는구만요', 라고 속으로만 말했다. 7, 8년이나 흘렀을까, 박수 아재는 그다지 늙지도 않은 것 같았다. 박수 아재가 방을 나가고나서 방에 앉아있으려니, 이런저런 음식들이 차려진 밥상이 들어왔다. 정말 강사 양반이 친분이 대단한 모양이네 싶었다.


  점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터라 허기가 졌는데, 밥상이 꽤나 반갑게 느껴졌다. 밥을 얼마나 좀 먹었을까, 안방으로 손님들이 들어왔다. 만신에게 인사를 하러 온 젊은 남녀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싶어서 밥상을 들고 나가려 했다. 그걸 보더니 만신은 그냥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 일가붙이인데, 이제 막 결혼해서 인사하러 온 거."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만신은 그들에게 덕담을 건넸다. 남자는 자리를 뜨기 전에, 굿 잘 보고 가시라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챙겼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밥상을 주방에 갖다주고는 굿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20평 남짓한, 그리 크지 않은 굿당에는 사람들이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가득 찼다. 나는 나이든 할머니들이 모여있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안있어, 만신이 무복을 차려입고 와서 굿을 시작했다. 신이 실리자, 만신의 모습은 아까 내가 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었다. 큰소리로 사설(굿에서 무당이 읊는 이야기, 각각의 거리마다 내용이 달라진다)을 쏟아내며, 춤을 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구에 자리한 가구를 열더니, 무복들을 모두 꺼냈다. 나는 들어올 때 본 그것이 신발장인 줄 알았는데, 무복이 들어있던 옷장이었다. 무슨 화수분같이 엄청난 무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옷들은 만신이 무당으로 살아온 오랜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신은 곧이어 제단앞에서 빙빙 돌았다. 무당이 도는 방향은 반시계 방향으로 그것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신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만신은 앉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춤을 추라고 권유했는데, 내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들이 그냥 평범한 동네 할머니들이 아니라, 만신의 동료였던 은퇴한 무당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근처에 앉은 중년 남자는 나와는 달리 그들과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나는 춤을 출 생각도 없었고, 그 자리가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리를 입구 쪽으로 옮겨앉았는데, 얼마 안있어 한무리의 사람들이 입구로 쏟아져 들어왔다. 녹음기, 캠코더, 사진기를 들고 온 사람들은 굿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관련학과의 학생들, 사진가들이었다. 비좁은 굿당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런 큰굿에는 늘 그런 사람들로 붐비곤 했다.


  탁한 공기 때문인지 머리가 아파왔다. 바람을 쐬려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철제 기름통에서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밖은 어둠이 가득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굿은 밤새도록 이어질 터였다. 차가운 겨울의 공기가 머리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방인. 나는 내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손님이라고 느꼈다. 나는 만신이 모시는 그 많은 신들을 믿는 재갓집 사람도 아니었고, 또 무교()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굿당에서 그렇게 흥겹게 춤을 추던 구경꾼도 되지 못했다. 굿의 그 무엇이 그토록 꽤나 긴 시간동안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던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기이한 매혹이었다.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매혹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 세계는 관찰자나 연구자의 시선으로 이해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서만 알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신앙의 교리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대문을 나섰다. 골목길에는 들어올 때 보았던 붕어빵 장수가 그때까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졸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붕어빵들의 수많은 눈들이 왠지 외롭게 보였다. '천원에 열 개'라고 적힌 판지가 바람에 펄럭였다. 겨울로 들어가던 초입의 11월, 오래전 어느 해의 그 굿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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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의실 301호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강의실이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와서 '영화의 이해'강의를 들은 것도 이 강의실이었다. 301호 강의실은 커다란 스크린과 프로젝터, 그리고 영사실까지 갖춘 강의실이었는데, 본관 건물의 협소함 때문에 이 강의실을 쓰려는 여러 학과의 강의들로 늘 북새통이었다. 강의실 의자 가운데 몇개는 늘 고장난 상태였다. 내가 학교를 오랫동안 쉬었다가 복학하고나서 와보니, 그동안 못쓰는 의자가 늘어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강의실이 참 좋았다. 적당한 경사각을 가지고 있었고, 창가에는 햇볕이 잘 들었다. 뭔가 안온한 느낌을 주는 강의실이었다.


  3학년 2학기 때였던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서양 미술 비평 강의를 그 강의실에서 들었는데, 그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보고 싶은 DVD를 가지고 와서 혼자 그 강의실에서 영화를 틀어놓고 보았다. 영화관 스크린 보다는 좀 작지만, 그래도 영화관 혼자 전세내고 보는 느낌은 들었다. 정말이지 학교 다니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츠지모토 노리아키의 다큐 '미나마타(1971)'도 보았다. 자막이 없었지만, 일본 드라마에 미쳐서 살았을 때라 대충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다큐의 끝무렵이었나, 자신들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그 어떤 배상도 거부하는 회사 측 관계자들을 향해 피해자 가족들이 절규하는 장면이 있었다.


  "あなたが にんげんですか!"


  '당신들, 인간 맞아? 인간이 맞냐구!'라고 한 여성이 분노로 외쳤다. 나는 드문드문 알아듣던 일본어를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동시통역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한 인간의 진정성과 정의로운 분노, 그 절절함이 가슴을 후벼팠다.


  '지옥의 묵시록(1979)'은 공중파에서 이전에 보았는데, 그래도 큰 화면에서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틀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가운데 미친듯이 쏟아지는 공중 폭격 장면을 보고 나니, 그냥 혼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라 크래커를 하나 뜯었는데,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영화 속의 장면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메슥거렸다.


  영화는 온갖 기행과 광기의 집합체 같았다. 이 영화는 결코 분석 따위가 필요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전편에 걸쳐서 흐르는 그 미쳐버릴 듯한 기운은 보는 사람의 뇌수를 따라 흐르면서 전염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을 베르너 헤어초크의 '아귀레, 신의 분노(1972)'에서도 받았는데, 나중에 그 영화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실제 촬영 현장도 거의 혼돈과 파괴, 광기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그렇게 가장 근원적인 감정에 접근하기에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1935)'를 만들어 히틀러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자, 화면 속에서 마틴 신이 맡은 윌러드 대위는 커츠 대령을 찾기 위한 여정을 지루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마침내 말론 브랜도가 분한 커츠 대령이 나오는 장면에 이르렀다. 말론 브랜도가 보여주는 그 무성의하고 제멋대로인 연기는 대체 뭔가? 도대체 이 영화 어디에서 커츠 대령의 연기가 압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저 작자가 감독 꽤나 힘들게 했겠다 싶은 생각에 이르렀다.


  실제로 말론 브랜도는 대사도 제대로 외우지 않았고, 자신이 생각해낸 대사로 연기하기 일쑤였으니 코폴라는 진찌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다. 커츠 대령의 이미지를 날렵한 인물로 상정한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말론 브랜도는 체중 관리를 하지 못해 엄청난 거구로 나왔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나마 커츠 대령의 압도감을 드러내는 데에 유일하게 기여했을 뿐이다. 어떤 이는 말론 브랜도의 연기를 보고 나서 '저 사람은 진짜 공포와 두려움이 뭔지도 모르며,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예비역 누구를 데려다 놓아도 저 사람 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혹평했다.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말론 브랜도는 정말이지 커츠 대령을 대충, 무성의하게 연기했는데, 그것이 커츠 대령이 가진 본래의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을 역설적으로 더 잘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서, 원작자인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만약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암흑의 핵심'은 나에게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뭔가 어정쩡한, 말하다가 그만 둔 그런 소설이었다. 작품성으로 치자면, 내게는 콘래드의 다른 소설 '청춘'이나 '로드 짐'이 훨씬 더 인상적이고 좋았다. 불우한 집안 환경 때문에 십대 소년 시절부터 선원으로 바다를 떠돌았던 콘래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다가 내 인생의 하버드였다."


  그의 그 말대로 선원으로 살았던 그 시간들이 소설이 되었고, 이른바 '해양소설'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다. 창작을 하려면 그렇게 평생을 두고 파먹을 뭔가는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가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콘래드가 이 영화를 봤다면 좋아했을지는 차치하고, 이런 말을 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나의 커츠는 저렇지 않다구!"


  어쨌거나 윌러드는 커츠 대령을 처치하라는 임무를 완수한다. 마틴 신 혼자 다 해먹는 영화. 이 영화에서 가장 열심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 미쳐 돌아가는 영화 촬영 현장에서 그나마 정신줄 붙잡고 자기 몫을 해내는 이 배우야말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감독인 코폴라는 제작비 구하는 문제로 제작자들과 싸우고 난리치느라 힘들었고, 나머지 배우들과 스텝들도 고립된 촬영 현장에서 거의 아노미 상태였다고 하는 것은 영화를 보면 그냥 알게 되는 명백한 사실이다.


  "어휴, 미친 영화야, 미친 영화. 죄다 미쳤어."


  나는 301호 강의실의 불을 끄고 나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코폴라는 이 영화가 '반전 영화()'가 아니라고 누누히 강조했다. 그렇다. 이 영화는 광기,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며, 광기가 스크린 밖으로 흘러내려서 보는 사람마저 감염시키는 영화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광기의 그 바닥이 어디인가를 보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 사진 출처: vanityfa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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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영화들은 아주 오래전에 보았는데도 영화 속 그 장면들이 결코 잊혀지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 'Five Easy Pieces'가 내게는 그러하다. 1970년에 밥 라펠슨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우리말 제목으로는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되었다. 5개의 작은 소품. 이 제목은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 바비 듀피어가 어릴 적에 배운 피아노 소품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영화의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추워지는 때에 더 생각이 나기도 한다. 


  영화를 본 것은 EBS 세계의 명화 시간. 언제 방영되었나 검색해보니 1999년 9월 17일이다. 본 지 20년도 더 된 영화. 나 혼자만 알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의 보석상자 안에 있는 영화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영화는 주인공 바비 듀피어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를 이해했던 것 같다.


  석유 시추공으로 거칠고 무절제한 삶을 사는 바비에게 모든 것은 지루하고, 한심하며, 의미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루하루를 되는대로 살아간다. 어느날 누이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바비의 집으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달라는 것. 그는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살았다. 여자친구인 레이엇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바비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냉소로 일관한다. 그가 집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게된 레이엇은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길을 나선다. 


  그 여정은 중산층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의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던 바비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 출근길의 바비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상황을 살피려고 차에서 내려 앞의 트럭에 올라가본다. 트럭에 있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연주하는 곡이 쇼팽의 환상곡 F단조 Op. 49. 그렇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트럭은 옆도로로 빠져나간다. 차에 있던 그의 동료가 바비를 부르지만, 트럭은 이미 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이 장면은 피아니스트에서 막노동꾼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 그의 삶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예기치 않은 상황들, 선택들의 연속들인지도 모른다.


  바비가 집으로 향하는 여정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를 보여준다. 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태우고 가다 들른 식당에서의 장면.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바비 듀피어라는 사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싸구려 길가 식당에서 점심 메뉴를 주문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시콜콜히 말하지만, 종업원은 그런 건 메뉴판에 없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바비는 종업원을 향해 자신의 응축된 분노를 모욕적으로 쏟아낸다. 메뉴판에 적힌 질서정연한 글씨들을 혐오하는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 모두를 배척하고, 그것에 대한 심한 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더럽고 무식하게 보이는 시추공과는 전혀 딴판이다. 형의 약혼녀 캐서린이 바비가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을 알고서 연주를 부탁하자 그가 연주를 시작한다. 쇼팽의 전주곡 Op.28 중 4번은 무척 짧은 곡이지만, 이 연주 장면은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길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벽에 걸려있는 바비의 어린시절과 가족의 사진을 피아노 선율처럼 천천히 흘러내려 가며 보여준다. 나는 아직까지도 쇼팽의 전주곡 4번을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이 떠오른다. 자신이 원했지만, 결코 살아내지 못한 피아니스트의 꿈과 엉켜버린 인생의 선택들...


  "당신은 도무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뭘 원하죠?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가족과 일, 그 어떤 것에도 애정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러면서 어떻게 사랑받길 원하죠?"


  바비에게 한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캐서린도 결국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어째서 그가 그 안온한 삶을 박차고 자신을 마구잡이의 삶으로 내던졌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가진 재능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가진 자들의 위선에 대한 혐오이든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든 바비는 자신을 둘러싼 그 틀에서 살 수 없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비는 그곳을 떠났고, 그에게는 가족들이 경멸하는 하층민 애인 레이엇이 옆에 있다. 그는 가족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여자를 모텔방에다 두고 오지만, 여자는 바비를 찾아오고 레이엇과 가족들과의 대면은 파열음을 일으킨다.


  바비는 다시 떠난다. 레이엇과 함께 다시 떠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레이엇을 버린다. 추운 겨울 날씨에 외투와 지갑마저 다 내버리고 차에서 내린 그는 북쪽으로 간다는 트럭을 얻어타고 떠난다. 그가 집에 오는 길에 만났던 레즈비언 커플들이 간다고 했던 곳은 알래스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쓰레기 같은 사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피해서 순수한 장소인 알래스카로 떠난다고 했다. 바비의 목적지가 알래스카인지는 알 수 없다. 바비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Go nohwere. 아무 소용이 없는, 성공하지 못한, 이란 의미의 관용구.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바비의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실패한 낙오자의 삶일 뿐이다.


  이 영화의 DVD타이틀의 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He rode the fast lane on the road to nowhere."


  목적지가 없는 삶, 또는 목적지에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삶. 그러한 삶은 모두 쓸모없고 무의미한 삶인가? 누군가에게는 바비가 보여주는 일탈과 객기는 어른이 되지 못한, 중2병스러운 방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이가 다 정해진 삶의 행로를 가는 것도 아니며, 평균적인 삶의 행로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타인의 삶에 대해 '의미없음'을 정의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물론 바비가 보여주는 기존의 사회, 질서, 가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와 혐오가 타당한 것도 아니며, 바비의 내면도 그가 그렇게 진저리를 내는 중산층의 위선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않다. 그는 레이엇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결국엔 버리기 때문이다.


  잭 니콜슨은 1969년에 '이지 라이더(Easy Rider)'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하기는 했어도, 그가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는 바로 'Five Easy Pieces'라고 할 수 있다. 감독 밥 라펠슨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잭 니콜슨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으며, 결국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진정한 연기 괴물 잭 니콜슨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고, 그나마 정상적인(?) 모습의 잭 니콜슨을 볼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한 영화다. 바비 듀피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그래서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행로를 걸어가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좌절된 꿈의 부서진 조각을 끌어안고 사는 이의 내면을 잭 니콜슨은 충실히, 그리고 가슴 아프게 구현해낸다. 



* 이 영화의 제목을 '잃어버린 전주곡'으로 번역한 것은 너무 감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냥 영어 원제목으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듯하다.

** 영화 속에서 피아노 연주를 맡은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따로 있다. 정말로 피아노 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연기도 잭 니콜슨은 잘 해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잭 니콜슨이 진짜 연주하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도 많이 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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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의 '다큐 잇it'은 우리 일상의 구석구석을 조금은 색다른 시선으로 보는 프로그램이다. 종영된 '다큐 시선'의 뒤를 잇는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최근에 본 흥미있는 회차는 '청약 통장'과 '주식, 아직도 안하세요?'였다. 전자는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기 위한 젊은 세대의 치열한 분투를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담아냈고, 후자는 재테크 시대에 주식 열풍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주식을 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거기에 등장하는 이들의 일상에 등장하는 유튜브 화면이었다.


  '청약 통장'편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독립한 20대 청년이 자신의 원룸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의 책상 모니터 화면에서는 유튜브의 '먹방'이 재생되고 있었다. 청년은 혼자 밥먹을 때는 그 먹방을 틀어놓는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내게는 뭔가 신박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 요즘 젊은 친구들은 혼자 밥먹을 때는 저렇게 먹방을 틀어놓는구나... 그런가 하면 '주식, 아직도 안하세요?'편에서는 기러기 아빠로 집에서 주식 투자를 하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점심 먹을 때 모니터 화면에 틀어놓는 유튜브는 명상, 종교 관련 주제의 영상이었다. 목탁 소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불교경전이 나름 인상적이었다. 그가 그걸 틀어는 이유는 주식 투자로 매순간 긴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라고 했다. 혼자 밥 먹는 이들에게 유튜브는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

   

  동영상 플랫폼이 대세인 시대에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이제는 돈벌이 전장터가 된 유튜브에서 그래도 오랫동안 선전하고 있는 분야가 아마도 '먹방' 같다. 자주 가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뒷광고 논란으로 활동을 중단한 먹방 유튜버가 새로 올린 영상이 올라왔다. 댓글들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그 유튜버에 대한 악플이 하나도 없었고, 다시 활동을 재개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세였다는 점이다. 대체 이 유튜버는 어떤 차별점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열렬히 활동 재개를 원하는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먹방을 보았는데,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아주, 잘, 깨끗하게 먹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그 과도함(excessivenss)이 지배하는 화면에 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 것일까...


  먹방, 음식만 전문적으로 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 아예 이제는 영어로 'Mukbang'이라는 공인된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먹방이라고 해봐야, 이제는 종영된 'VJ 특공대', '6시 내고향' 같은 것이다.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먹방 영상들은 대개가 맛집, 지역 토속음식들이어서 그걸 본 시청자들은 그곳을 '탐방'을 하기 위한 참고 영상으로 여겼다. 그것 말고도 아주 고전적인 '한국인의 밥상'이 있기는 하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음식을 소재로 한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늘어나면서 공중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까지 화면에는 음식과 먹는 장면이 넘쳐난다. 지금은 트롯 열풍이 방송을 평정해서 트롯 관련 프로그램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음식 관련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고 있다.


  기성 세대에게 기존 TV 프로그램의 먹방은 맛집 탐방으로 이어지는 것에 비해, 젊은 세대에게 유튜브 먹방은 그 자체로 소비되는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혼자 밥 먹을 때 외롭지 않을 수 있고, 외모 강박에 시달리느라 살찌는 음식도 맘껏 못먹는데 그걸 대신해주는 먹방 유투버도 있고, 쪼들리는 형편에 사먹기 힘든 비싼 식재료를 맘껏 포식하는 것을 보며 대리 만족도 느끼고, 이런 요인들이 먹방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워낙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어서, 이걸 바라보는 시선들도 다양했다. 심리학에서는 불안장애와 섭식장애 쪽으로 파고 있고, 사회학에서는 1인 가구 증가로 인한 사회 현상으로 보고, 매체와 문화 연구 쪽에서는 먹방 시청자 행동 분석으로 밀고 있다. 먹방 연구는 마치 각종 학문들의 각축장 같다.


  내게는 먹방의 그 과도함이 그것을 보는 이들이 가진 현실적 '고통'과 '외로움'의 크기처럼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보여서 안보는 것을, 어떤 이들은 먹방을 보면서 편안함과 위로를 느낀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건, 먹방의 기저에 흐르는 그 정서의 층위가 단지 '누군가 먹는 것을 즐겁게 본다'에서 괴로운 현실에서 '나를 숨쉴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언가'에까지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10대에서 먹방과 쿡방의 (月)시청 시간이 평균 12시간, 매일 시청하는 비율도 15%에 달한다는 최근의 연구결과(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김혜경 교수팀 연구 참고)는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대부분 심야시간대에 혼자 먹방을 시청한다는 청소년들에게 먹방은 학업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재인 것이다. 계속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구직과 진로에 대한 압박감이 심한 젊은 세대에게도 먹방이 먹히는 이유도 그 지점에 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먹방은 어떤 면에서는 음식과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착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뒤틀린 폐쇄성을 보여준다는 생각도 든다. 맛집 탐방을 하거나 직접 요리를 해서 누군가와 같이 식사하는 대신에, 방에서 그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먹방을 시청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들이 지닌 고통과 외로움의 총량도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방은 그것이 시작된 한국을 넘어 세계로 국경을 계속 확장해가고 있는데, 이 확장성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의문을 남긴다.


  소통과 온기에 대한 요구. 그것이 범람하는 먹방의 함의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같이 따뜻한 밥을 먹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누는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저런 삶의 괴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먹방이 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이 시대에 인간관계는 더 단절될 수 밖에 없고, 악화되는 각종 경제 지표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떠났던 먹방 유튜버들은 다시 돌아오고, 새로운 먹방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 먹방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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