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K는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으면서 속없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나중에 알게 된 그는 굉장히 치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K를 떠올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래전, 다니던 학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은 변변한 휴게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 한 칸을 자신들의 휴식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K에게 그런 내 생각을 말했더니 K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 사람들이 불쌍하고 안돼 보이겠지. 하지만 말야,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일하고 지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 화장실에서 짬짬이 쉬는 것도 즐겁고 괜찮게 여길 걸.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 사람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라구. 내가 일하면서 본 많은 인부들이 그랬어."


  내 온정주의적 시선에 찬물을 끼얹던 K의 건조한 말투가 생각난다. K는 확실히 나보다 세상과 낮은 곳에서 사는, 잘 보이지 않는 계층의 사람들을 잘 알았다. 영화 '기생충(2019)'을 보면서 나는 문득 K의 말이 떠올랐다.


  송강호가 분한 기택네 가족은 전형적인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다. 반지하 방에 거주하는 그들은 집안에 출몰하는 곱등이를 없앤다고 거리의 소독차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시며,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시시때때로 노상방뇨하는 남자를 어쩌지도 못하고 참아낸다. 기택이 하는 일마다 안풀려서 온가족이 피자박스 접기로 소일하는데, 그것도 제대로 해내질 못해서 새파란 피자가게 여사장한테 받을 돈을 까이고 하대까지 받는다. 누가 봐도 이 가족은 참 불쌍해 보인다.


  그러던 어느날 기택의 아들 기우의 친구 민혁이 '수석'을 들고 찾아오면서, 이 가족의 모험의 여정이 시작된다. 산수의 경치가 새겨져 있어서 '산수경석'이라고 불리우는 이 돌을 민혁은 재운의 상징이라며 건네는데, 이 돌은 실은 이 가족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신물()과도 같다. 영화는 어쩌면 이 돌과 함께 하는 기택 가족의 모험담 같기도 하다. 나중에 폭우가 내려서 기택의 집이 물에 잠기는데, 이 돌은 가라앉지 않고 떠오른다. 기우는 이재민 대피소에서도 이 돌을 내려놓지 못한다. 왜 돌을 가지고 왔냐는 기택의 질문에 돌이 자꾸만 자신에게 '들러붙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가족에게 걸림돌이 될 이들을 제거하려고 할 때 흉기로 쓰려고 가져가기도 한다. 그러나 도리어 그 돌은 기우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신화의 영웅의 모험담에서 영웅에게는 어려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여정의 초반에 주어지는데, 기택의 가족에게 주어진 저 산수경석은 온갖 불행과 저주가 들러붙은 무기일 뿐이다.


  벌레의 삶. 이 가족이 모험의 여정을 택한 이유는 그 더럽고도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갖 협잡질과 능글거리는 거짓 연기로 박사장네 집을 잠식해 들어간다. 아들 기우는 영어 과외 선생, 딸 기정은 미술 선생, 기택은 운전기사, 부인 충숙은 가정부로 혼연일체가 되어 박사장네를 거리낌없이 농락한다. 이쯤되면 이 가난한 사람들, 아니 벌레 일가의 그 교활함과 사악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봉준호는 세상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흔한 온정주의적 시각을 사정없이 부숴버리고, 기택 가족으로 대변되는 하층민의 민낯을 까발린다. 캠핑을 떠난 박사장 가족의 집 거실을 점령하고 양주 파티를 벌이는 기택 가족의 행태는 그들의 몸에 밴 사고의 천박함과 추악한 이기주의를 드러낸다.


  '기생충'에는 기택 일가와 비슷한 벌레의 삶을 사는 또 다른 이들이 등장한다. 바로 박사장 집 가정부 문광과 근세 부부다. 문광은 가정부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며 박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을 넘지 않는다. 마치 박사장네가 살고 있는 그 집 자체로 보일 정도로 충실한 일꾼으로 살던 문광에게 기택 가족의 등장은 날벼락 같다. 일자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박사장 집 지하에 기거하던 남편 근세의 생존마저 위협을 받는다. 이들 부부가 기택 일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 두 가족의 혈투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들 모두가 박사장네를 계속 속여가면서 살 수 있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며 엄청난 적의와 살의를 표출한다. 결국 근세는 기택의 딸 기정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신은 충숙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벌레들에게 공존과 연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인 박사장은 그런 벌레들에게 '냄새'가 난다며 혐오감을 표출한다. 그는 기택에게 나는 냄새가 지하철에서 맡을 수 있는 '무말랭이 냄새'라고 표현한다.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자신은 그들과는 다른 종족임을 표명하는 동시에, 그가 벌레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역겨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사장은 그 벌레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선을 넘는다'고 표현하는데, 박사장이 보여주는 우월감에서 나온 그 지독한 멸시와 극악의 냉소를 기택은 참아내질 못한다. 비록 벌레의 삶을 살고 있지만, 기택이 보기에 박사장의 위선은 자신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기택이 자신의 자존감을 냄새 난다며 짓밟는 박사장에게 최후를 선사하면서,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선택했던 기택 일가의 여정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 모든 여정을 함께 했던 산수경석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기우가 강물에 돌을 넣자 비로소 '가라앉는다'. 그 저주의 부적과도 같은 신물(物)은 자신이 해야할 바를 다했다. 벌레들에게는 벌레의 삶이 어울린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벌레가 인간이 되기를 소망할 때, 그것은 세상의 순리를 어지럽히는 일이 되며 파국을 자초하게 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돌을 가져온 기우의 친구 민혁은 인간 세계에서 온 '재앙의 전령사'처럼 보인다. 


  영화 도입부에 기정과 기우는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화장실 천장에까지 휴대폰을 들이댄다. 마치 두 남매가 인간들이 사는 지상에서 내려오는 신탁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곰팡이와 곱등이, 꿉꿉한 냄새가 밴 반지하 벌레의 삶이 아닌, 지상에 사는 인간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매의 소망은 '전령사' 민혁에 의해 응답받는다. 그러나 실패가 예견된 이 비극의 여정을 통해 영화 '기생충'은 벌레들에게 결코 '선'을 넘지 말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기택 일가의 집을 삼킨 엄청난 폭우는 벌레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지하와 지상을 명백하게 가른다. 결국 기우와 충숙은 원래의 반지하 집으로, 기택은 박사장 집 지하로 돌아간다. 그곳이 그들이 원래 있어야할 자리였다. 


  영화관에서 '기생충'을 본 어떤 이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박사장이 말한 '냄새'를 풍기며 사는 존재임을, 그리고 영화관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어젯밤, 케이블 채널에서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영화가 그 어떤 공포 영화 보다 무서운 영화라고 느꼈다. '벌레들'에게 어두컴컴한 지하의 세계에서 조용히 지낼 것을, 인간들이 사는 지상의 세계를 넘볼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하는 이 영화에 대해 반박할 그 어떤 말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비극이 영화 '기생충'에 그렇게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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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서사비평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수업은 수강생들 각자가 추천한 영화 한편을 매 시간마다 보고,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첫 시간에 누군가 추천한 영화가 '첩혈쌍웅(1989)'이었다. '아, 무슨 저런 B급 감성의 후진 영화를 보자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보게 된 그 마지막 장면의 날아오르는 비둘기들...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확실히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진짜 혼자서 좋아서 보는 거 아닌 다음에야, 영화 공부할 때는 마이너 취급을 받았다. 그나마 인정해준다고 하는 작품들이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그리고 1997년의 홍콩 반환과 관련해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첨밀밀(1996)' 정도나 될까, 아무튼 그랬다.


  그런 홍콩 영화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쇼브라더스 제작의 1960,70년대 무협물들, 주성치 초기작들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본 영화가 '영웅본색(1986)'뿐이었다. '천장지구(1990)'도 당연히 안봤다. 그러던 것을 그 영화가 개봉한 지 30년만에서야 이제야 만났다. 주윤발이 주연한 '도신(1989)'도 최근에야 보았다. 젊은 시절의 주윤발과 유덕화, 왕조현이 그렇게나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어떤 영화들은 그렇게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서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아마 '천장지구'를 이십대 때 보았더라면, 영화 보다가 그냥 나가버렸을 것 같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아화(유덕화 분)와 곱게 자란 부잣집 딸 조조(오천련 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지만, 그 두 연인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이 그러한 어두움을 상쇄시킨다. '아름답다'라고 쓰기는 했지만, 다소, 아니 상당히 손발이 오글거리는 자기중심적 유치함이 가득한 장면들이기도 하다. 조조가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아화의 얼굴에 뭉개는 장면이라던지, 비오는 날 서로 검댕이 묻혀가며 즐거워하는 장면, 패러글라이딩 장면, 뭐 이런 장면들이 여러개 있다. 깡패로 내일 없이 사는 아화지만, 연애할 때 할 건 다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은 두 연인이 오토바이로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이 되겠다. 이렇게 '천장지구'를 보다보면, 여기서 본 것들을 다른 영화에서 참 많이들 울궈먹었네,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튼 그런 로맨스 영화의 원조 클리셰들이 많다.


  이십대 때 보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그 오글거림이 이제 나이들어서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영화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주인공들의 절절함과 막막함에도 몰입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영화 속의 청춘들을 보면서 나의 청춘 시절을 성찰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타인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기(retrospection)'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1991년에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배낭여행과 어학 연수 붐이 일었다. 강의실과 학교 벤치마다 어학 연수 업체의 홍보물들이 그득히 쌓여있었다. 그런 광고가 인쇄된 연습장과 노트를 참 잘 썼다. 방학 지나고 나서 얼굴이 안보인다 싶으면 캐나다, 하와이, 영국, 뭐 이렇게 연수를 떠난 거였다. 버글거리던 강의실은 좀 한산해졌고, 연수나 여행비용을 위한 아르바이트로 휴학을 하는 애들도 많았다. 있는 집 아이들이야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이지만, 중산층 언저리의 아이들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돈을 마련해서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누군가는 떠나는 동안, 나는 어학 연수 업체 광고가 인쇄된 연습장에다 영어 공부를 했다. 강남 출신의 친했던 친구 J는 캐나다 벤쿠버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 친구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Via Air Mail이라고 인쇄된 국제 우편 봉투에 넣어서 몇 번 보내기도 했다. J는 벤쿠버 풍경이 담긴 엽서에 답장을 보냈다. 아, 벤쿠버는 이렇게 생긴 도시구나... 마치 19세기 말에 이민을 꿈꾸던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 본토에 정착한 친척들이 보내온 자유의 여신상이 찍힌 뉴욕 사진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랬었다.


  학교에는 진짜 흙수저들만 남은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학점과 영어 성적을 최대한 올려서 대기업에 빨리 취직하는 것이 많은 아이들의 목표였다. 자랑스런 사원증 목에 걸고, 대기업 본사 정문을 점심 시간에 커피 들고 드나드는 것, 그렇게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렇지 못하는 삶은 낙오자 취급을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로 사는 삶 이외의 대안은 없는 것인지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보면 현실이란 참 암담하고 답도 없고, 괴로웠다.


  'Exit'라고 적힌 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천장지구'에 나오는 그 시절 홍콩의 젊은 애들도 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트럭 레이스로 객기 부리고, 주먹질하고, 오토바이 경주하고, 그렇게 자신을 허무의 구덩이에다 내던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고민없이 살았을 것 같은 조조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홍콩 반환을 앞두고, 부유층들이 캐나다로 삶의 기반을 옮기는 시기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조조의 부모도 딸을 그곳 학교로 불러들이려고 한다. 정해진 삶의 행로가 재미없다고 느꼈던 것일까, 조조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거칠지만, 한없이 불쌍하고 여린 아화에게 빠져든다. 어쩌면 조조에게 그것이 청춘의 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조가 택한 그 출구는 막혀있었다. 영화는 아화를 잃게 되는 조조의 청춘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피투성이 맨발로 힘들게 질주하며 아화를 찾으러 가는 그 밤의 아스팔트 도로는 그렇게 열려있다. 아화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조조의 사랑은 그렇게 미완으로 남았다. 아화는 어떤 면에서 그 출구의 여정을 끝마친다. 창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잃고,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온 그에게는 조조가 그 청춘의 출구였다. 그 출구로 들어선 직후에 그의 삶은 정지된다.


  이 영화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아화의 방'이다. 빈민가라고는 하나, 아화의 방은 꽤 큰 편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홍콩의 주거난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송환법으로 촉발된 홍콩 민주화 시위에 뛰어든 홍콩 젊은이들에게는 정치적인 이유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립을 위한 집 구하기가 극심하게 어려워졌다는 점이었다. 홍콩의 고질적인 사회적 문제인 주거난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했고, 젊은 세대는 그 책임을 기성세대와 정치권에 물었다. 그러나 아화가 살던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주거지 문제 보다는 다가올 홍콩 반환으로 인한 사회 체제의 불안정성이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청춘은 지나오고 보니 눈부시게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지, 그 시간을 살아내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끝없는 막연함과 고민들에 갇혀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좋은 때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청춘들은 당신들이 지금 시대의 젊은이로 사는 것이 얼마나 팍팍한지 아냐고 항변할 지도 모른다.


  '천장지구'를 내 청춘의 영화 목록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

때 보았더라면, 나는 이 영화에 흐르는 그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청춘의 정서를 잘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비극으로 끝난 두 남녀의 사랑이 보여주는 감성이 촌스럽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영화를 이해하기까지 때론 그렇게 세월의 힘도 필요하다.


  피와 폭력이 지배하는 한없이 가라앉는 화면의 무거움을 파숙 역으로 나온 오맹달의 뛰어난 바보형 연기가 막아낸다(오맹달은 이 연기로 홍콩 금상장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어두운 뒷골목 폭력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출구 없이 헤매는 막막한 청춘의 초상이 담긴 절절한 사랑 이야기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EBS 세계의 명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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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마땅히 쓸 글도 없고, 그냥 쉬어 가기로 했다. 대신, 지난 9월부터 블로그에 다시 글을 올리면서 느꼈던 이런저런 소회들을 써보려고 한다.


  원래 내가 쓰려던 글은 영화나 매체에 관련된 비평글은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습작, 글쓰기 훈련처럼 매일 무언가를 써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해서 어느날 갑자기 소설이 짠, 하고 써지는 것은 아니므로 어쨌든 하나의 글쓰기 일과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일상의 이야기들 위주로 써나갔는데, 문제는 내가 일상이 화보인 연예인도 아니고 나올 수 있는 소재의 한계라는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마른 행주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영화에 대한 글은 그다지 쓰고 싶지 않았지만, 배운 가락이 있으니 그게 또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오손 웰스가 말년에 회고했듯, 나에게 '망할 놈의 마법 상자' 같은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다. 너무너무 사랑했지만, 결국에는 밀쳐내는 그런 존재 같았다. 그럼에도 어떻게 쓰다보니 그것도 '미운 정'이 단단히 들었는지, 다시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이들은 너무도 많기 때문에, 내가 쓰는 글 어디에 '차별점'을 둘 것이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이건 마치 유투버를 하기로 마음먹은 초보가 작은 촬영장비 하나 들고 찍을 때 드는 당혹감, 그런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팔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 그 생업전선의 치열함과 엄중함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글이란, 그것을 읽어주는 독자를 상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나름의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즈음에 EBS 클래스e에서 최장순의 '기획의 세계' 강의를 우연히 들었다. 비단, 물건을 파는 마케팅에만 기획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는 블로그에서도 기획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강의였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해야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블로그 글 가운데에서 반응이 괜찮았던 글들이 드라마와 영화와 관련된 글이었다. 그래서 나름의 고민 끝에 내가 쓰게 될 글들의 방향을 영화와 매체 비평으로 잡았다. 글은 가급적 평이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현학적인 글은 가장 피하고 싶은 글이다. 그래도 글 안에 생각의 깊이, 성찰의 자료들은 담아야 하기에 흔한 인상비평도 지양하려고 한다.


  사실,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대세인 이 시대에 글 위주로 채워진 텍스트로 블로그를 꾸려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런치' 같은 블로그 플랫폼 화면을 보면 어찌나 다들 화사하게도 채우던지, 그 쪽은 나와는 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은 볼거리 위주의 시대에, 나처럼 오직 '생짜' 문자로만 채워진 글을 올리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사진이나 포스터 올리는 일이 드문 것은 첫째로는 내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쓰는 글에 덕지덕지 뭔가 볼 것을 붙여서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저작권 법에 명시된 공정이용 항목은 잘 숙지하고 있으므로, 출처 표기를 전제로 포스터 정도 올리는 일은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글을 읽는 이들이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좋은 영화 리뷰라고 느낀다면 나중에 독자가 스스로 자료를 찾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음,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불친절한 블로그 주인의 변명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 블로그를 우연히 들르게 된 이들은 그 생경함에 움찔, 하고 놀랄 수도 있다. 오직 글로만 채워진 텍스트에, 주인장과 방문자 사이에 그 어떤 댓글 교류도 없는데, 매일 글은 올라오고, 누군가는 그걸 읽는 희한한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뭐랄까, 블로그 주인장도 무진장 내성적인(introvert) 사람이고, 이곳을 오는 이들도 다들 수줍음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이 올라오면 읽지만, 그걸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아, 어떻게 답글을 달아야 하지', 고민하면서 결국은 답글을 달지 못한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블로그에 글 쓸 때는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글을 쓴다. 뭔가 '거지 모드', 그런 약간의 긴장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이 잘 써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면서, 커피가 전보다 늘었고, 다시 애정을 가지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조회수가 신경쓰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좋아요'에 신경이 더 쓰인다. 적어도 '좋아요'에 1이라도 찍히면, 어제도 '망글'은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표현해주는 독자들에게는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모두가 유튜브로 몰려가는 시대에, 이런 구닥다리 블로그를 찾아서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특별한' 이들일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다. 무어라 표현은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연대감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언제까지 글을 올리게 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동안에는 나도 보람을 느끼고, 이 곳을 찾아주는 이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이렇게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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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산책 나가는 길에 이른바 '효도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오는 아줌마를 보았다. 무슨 노래인가 했더니, 요새 유행하는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마침내 나와 거리가 좀 가까워졌을 때 그 아줌마가 라디오를 내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나는 우아하고, 잽싸게 그걸 피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아마도 그 아줌마는 자신이 듣는 노래를 나한테도 한번 들어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은 해본다. 물론 내 마음 속 대답은 'No, thank you'였지만.


  요새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계속 나오는 이야기가 그 미스터 트롯 가수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음악 취향은 가요를 좀 듣기는 하셨어도, 트롯은 아주 질색을 하셨다. 그런데 우연히 그 트롯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노래하는 걸 보고 트롯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시게 된 듯하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젊고 세련된' 트롯이었다. 게다가 그 7명의 트롯 가수들(그들은 항상 팀으로 예능에도 출연한다)의 인생사는 어찌나 다들 기구한지, 특히 어머니는 그 가운데 당신이 좋아하는 가수 K의 불운한 성장기를 자주 언급하셨다. 가수 K의 노래가 클래식 음악 방송에서도 소개되어서 한번 듣기는 했는데, 확실히 음색이나 창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는 했다. K는 높은 인기만큼이나 이런저런 구설수도 많아서 연예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건 걔가 철 없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야. 난 K가 잘 되었으면 한다. 노래를 너무 잘해."


  어머니는 K를 둘러싼 이런저런 구설에 대해 그리 말씀하셨다. '팬심'이란 게 있다면 저런 건가 보다, 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새삼 놀랐다.


  내 음악 취향은 그쪽은 전혀 아니었으므로, 모 방송국의 '미스 트롯'으로 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트롯 열풍이 광풍이 되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다만, '미스터 트롯'이 올해 방영된 이후, 공중파는 물론이고 케이블 채널을 점령하다시피한 트롯 관련 방송들에 피로감이 느껴지기는 했다.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현상의 근원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자료들을 찾다가 방송국 관계자들의 익명의 인터뷰들을 보니, 시청률 문제가 가장 커보였다. 인기가 바닥이었던 예능 프로그램도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특별 출연하고 나면 저조했던 시청률이 급등했다고 한다. '시청률 깡패'인 트롯 프로그램 앞에서는 답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좋은, 참신한 예능 프로그램 기획안을 내놓아도 윗선에서는 트롯 관련 프로그램을 언급한다고 했다.


  젊은 연령대의 시청자들이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이탈해서 OTT(Over The Top Service: 인터넷 기반 미디어 콘텐츠 제공 서비스)로 가는 동안, 기존의 시청방식에 익숙한 중장년층들이 케이블 채널의 주요 시청자층을 차지한 것을 트롯 열풍의 한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보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만든다'라는 것이다. '미스터 트롯' 경연 대회는 진작에 끝났지만, 그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랑의 콜센터'라는 예능 프로는 이 글을 쓰는 현재, 30주 연속 목요일 예능 프로그램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며칠 전 그 프로그램을 한번 보니,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신청곡들을 미스터 트롯 7인방 가수들이 불러주는 형식의 이 프로그램은 전화 연결에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전화 연결이 된 시청자는 300번 넘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신청자 가운데에는 네팔 이주민 여성도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전화기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싶은 궁금증이 밀려왔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가수 K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불렀는데, 뭔가 확실히 내가 전에 알던 그 노래와는 달랐다. 진중했고, 울림이 있었으며, 잘 다듬어진 창법으로 부른 그 노래는 비록 노래방 기기 점수 판정으로 낮은 점수를 받기는 했으나, 내게는 나름 새로운 충격이었다.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인기있는 대표적 '먹방'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팬들은 요새 불만이 많은데, 트롯 예능 프로그램의 폭발적 인기로 이전에는 재방 삼방까지 되었던 '맛있는 녀석들'이 밀려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케이블 채널의 인기있는 재방 목록을 트롯 예능이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트롯 전성시대'인 셈이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읽은 자료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빈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 언급되었던 리뷰였다. 성장한 자녀들이 집을 떠난 후, 중년 여성이 겪는 고독과 슬픔의 감정을 의미하는 이 말을 트롯 열풍의 원인에 대입하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트롯을 즐겨 듣고 좋아하는 주 연령층이 중장년층 여성이라 하더라도 '빈둥지 증후군'은 좀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기는 해도 한편으로 수긍이 안가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읽은 인터넷 게시판의 글이 그러했다. 트롯 열기에 극도의 짜증과 피로감을 느낀다는 게시글에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제가 하지 못한 효도를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해주고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줄 모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그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 매일매일을 활기차게 지내십니다." 


  그러자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효도는 님이 해야 하는 것이지, 미스터 트롯 가수들이 대신 해주는 거 아닙니다."


  아니 뭘 저렇게 '뼈 때리는' 글을 쓰나 싶었다. 그 말을 들으니 과연 '효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어쩌면 트롯 가수가 불러주는 노래를 들으며 어떤 누군가의 어머님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진정한 효도의 '아웃소싱(outsourcing)'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다음엔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잘 들어드리기 위해서, 결코 내 취향이 아닌 미스터 트롯 가수들의 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다. 어머니가 칭찬해 마지않는 임영웅이 부르는 '고맙소', 그리고 신나는 이찬원의 '진또배기'도 들었다. 나는 효도의 길이 쉽지 않음을 새삼 느끼며 유튜브 창을 조용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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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클린 뒤 프레, 라는 여성 첼리스트가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이 놀라운 첼리스트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열일곱 살 때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적어도 이 협주곡 만큼은 자클린의 연주를 뛰어넘는 음반을 꼽기가 어렵다. 그렇게 자신의 경력을 눈부시게 쌓아가던 그에게 이십대 후반,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이 찾아온다. 삼십대 초반의 은퇴, 그 이후로 자클린은 첼로를 다시는 연주할 수 없었다. 육체적인 질병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녀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눌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남편이 있기는 했다.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21살 때 결혼했다. 유대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개종까지 했다. 야심에 찬 바렌보임은 자클린과 함께 엄청난 연주일정을 소화해가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갔다. 자클린의 팬들 가운데에는 바렌보임의 자클린에 대한 그런 혹사가 발병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명성에 굶주린 늑대같은 이 남자는 자클린이 병으로 첼로를 하지 못하게 되자 그야말로 '헌신짝'처럼 버린다. 이혼을 요구했지만 자클린은 들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살림을 차린 후 아들 둘까지 낳았다. 그러는 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바렌보임의 위상은 더 커져갔다. 자클린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그의 명성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 '힐러리와 재키(1998)'는 그런 자클린의 생애를 담았다. 이 영화가 나오자 바렌보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세상 사람들이 기다려 줄 수 없는 거냐고 짜증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이 영화도 진실을 온전히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언니 힐러리와 그 남편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힐러리 남편을 자클린이 유혹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의 자클린을 유린한 것이라는 조카의 증언이 나중에 나왔다. 자클린은 이래저래 철저하게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였다.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짧았던 삶을 담은 다큐 '에이미(2015)'에도 그러한 비극이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였던 에이미는 블레이크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삶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나쁜 남자'의 전형적 표본 같은 블레이크는 에이미를 술과 약물의 세계로 안내한다. 사랑에 목말랐던 에이미는 야수같았던 남자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되어 온전한 판단능력을 상실한 채 중독자의 길을 걷는다. 개기름 좔좔 흐르는 얼굴로 다큐의 인터뷰에 나온 뻔뻔한 블레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그 면상을 한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마저 느끼게 만든다. 블레이크는 에이미 사후에도 에이미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돈벌이로 삼기도 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Rehab'을 들을 때마다, 저 노래 만들 시간에 재활원에 갔어야 했는데, 한탄을 하게 된다. 그걸 못하게 한 것은 에이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또한 블레이크와 비슷한 부류의, 에이미에게 '빨대' 꽂고 사는 더럽게도 한심한 인간이었다. 이 다큐는 그런 '포식자들' 사이에서 상처받고 고통받다가 결국은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한 여성 가수의 이야기인 셈이다.


  1979년에 나온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 더스틴 호프만이 나온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 '미투(Me Too)'운동에 소환되었다. 애슐리 저드의 폭로와 소송으로 시작된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는 헐리우드 일각에서 와인스틴과 친분관계가 있는 유력 인사들의 침묵과 방조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거기에 메릴 스트립도 언급되었는데, 와인스틴과 친했고 영화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여배우로서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다고 맹공격을 받았다. 메릴 스트립은 그 사실을 완곡히 부인했다. 그 과정에서 메릴 스트립은 과거 일화를 털어놓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영화 촬영 당시 더스틴 호프만에게 뺨을 맞은 일화를 공개한 것이다.


  그 장면은 명백히 대본에 없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혼 요구에 혼란과 고통에 빠진 남편의 육아, 법정 투쟁기를 다루고 있다. 메릴 스트립은 아내 역할을 맡았는데,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더스틴 호프만이 뺨을 때렸다고 한다. 감독과 영화 스텝들 모두가 놀랐고, 감독은 이 일 때문에 메릴 스트립이 고소를 하거나 촬영을 중단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범한 여배우는 프로페셔널한 자세로 영화를 끝까지 잘 찍었다. 더스틴 호프만에게 나중에 사과를 받기는 했지만, 메릴 스트립에게 이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스틴 호프만이 메릴 스트립의 뺨을 때린 데 대한 변명은 이러하다. 배역에 대한 사실감 있는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였고, 자신은 당시 이혼 소송 중인 부인에 대한 악감정을 메릴에게 느꼈다는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영화의 식당 장면에서도 호프만의 폭력을 경험했는데, 식당 벽에다 유리잔을 내던져 버려서 공포감을 유발시켰다고 언급했다. 그 역시 대본에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크레이머 부인의 놀랍도록 차가운 적의로 나타난다. 나는 오래전에 그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메릴 스트립은 왜 저렇게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남편에게 무섭도록 적대적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 의문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더스틴 호프만의 그런 '끔찍한' 행동은 영화에서 엄청난 적개심을 보여주는 데에 도움이 되었지만, 그런 것이 없었어도 자신은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스트립은 회고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영화를 찍을 당시 경력이 별로 없는 완전 초짜 배우가 아니었다. 브로드웨이 연극계에서의 나름대로의 경력도 있었고, 연기력도 검증된 배우로서 신인이기는 했지만 뺨 맞을 정도로 무시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호프만은 아무렇지 않게 상대 여배우의 싸다구를 '날려버린다'. 아마도 '너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앞으로 조심해서 잘 해라', 같은 기선 제압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다. 식당 장면에서 물컵 내던진 일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은 그 이야기를 2017년이 되어서야 공개했다. 자신 또한 헐리우드에서 영화 경력을 쌓아오는 동안 오만 말못할 부당함과 어려움을 겪었음을 미투에 힘입어 말하는 것이기도 했고, 후배 여배우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비난에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일화를 흘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일화를 공개하는 메릴 스트립의 속내는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희들, 내가 어떻게 이 영화판에서 살아남았는지 알기나 하냐? 나 신인 시절엔 아무 이유없이 연기 잘하라며 뺨을 맞기도 했어. 오만 더러운 꼴 다 봤지. 너희들 겪은 어려움도 알겠는데, 내가 경험한 일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같은 거지."


  생존자(survivor). 메릴 스트립은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결국 살아남았고, 자신의 배우 경력도 지켜냈다. 대체 당신은 다른 후배 여배우들 안돕고 뭐했느냐고 메릴 스트립이 비난을 받는 것은 내 생각에 그다지 정당하지 못하다. 그런 비난을 하려면 와인스틴의 절친 타란티노에게도 공평히 주어져야 한다. 타란티노는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영화 작업을 와인스틴과 계속 이어왔다. 심지어 한때 연인 사이였던 미라 소르비노가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알려줬는데도, 타란티노는 그것을 무시했다. 모두가 그저 '왕의 부하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무수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술을 만들어 내는 세계가 마치 정글과도 같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 속에는 무지막지한 포식자들이 있고, 그 아래에서 숨죽이며 겨우 생존을 이어가거나, 더러는 소리없이 사라지는 생명도 있다. 물론 뛰어난 생존력으로 포식자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위협의 순간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그 정글을 자유롭게 탐험하며 포식자들과 공존하고 있다. 어쩌면 예술 작품이란, 결국 그 정글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투쟁들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남는 사람은 그 정글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연기로 보여줄 수 있다. 생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이다. 

 


*위로부터 차례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힐러리와 재키', '에이미'

 포스터 출처:I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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