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마음이 시끄러웠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고, 생각은 맥없이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이든 현상이 있으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요새 나는 H의 소식을 어쩔 수 없이 듣고 있다. 몇년 전, 신문을 읽다가 H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H가 등단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문에서까지 그 작품 세계와 인생을 인터뷰로 실을 만큼 인정받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H는 글쓰기 수업에서 알게 되었다. 타과 학생으로서 그 글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명 뿐이었다. 중견 작가 선생이 맡은 그 수업은 일주일 동안 한편의 글을 써오고, 그것을 수강생들이 합평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학과의 수업방식에 적응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글쓰기 과제는 어렵지 않았으나, 합평 시간은 전쟁터 같았다. 그 학과의 학생들은 서로의 글을 거침없이 비난했고, 그렇게 오가는 합평 속에서 냉소와 조롱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매 수업시간을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헤맸다.


  H의 글은 항상 작가 선생의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 글에서 느껴지는 현학적이고 젠체하는 오만함이 싫었다. 그러나 작가 선생은 H의 글은 조금만 다듬는다면 조만간 등단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글에 대해서도 저렇게 다른 평가가 있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가 싫어한 것은 H의 글 뿐만이 아니었다. H를 더 싫어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양한 삶과 지적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서, 나와 그 학과 학생들과의 나이차는 꽤나 컸다. 적게는 네다섯, 많게는 열살 차이까지 났다. 나보다 한참 아래 연배의 H는 합평을 하면서 늘 내 호칭을 '아무개 씨'라고 지칭했다. 그 학과 학생들 가운데 대놓고 나한테 '아무개 씨'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태여 내 글을 언급할 때, 호칭을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H에게 따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H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일로 나는 H를 자기주관이 뚜렷한, 그러나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합평 시간에 나는 H의 유려하지만 현학적이고 공허한 문체를 지적했고, H는 내 글의 감상성을 비꼬고 배격했다. H는 자신의 글에 늘 자신만만했으며, 이미 등단한 작가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가 등단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 선생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양반도 한가지 잘못 본 것이 있기는 하다. 그 수업을 들었던 S의 등단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의 글은 진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S의 글에 대해서는 언급하기조차 꺼려했다. 한마디로, 말할 거리가 못되는 것으로 취급했다. 작가 선생의 평가는 더 신랄했다. S의 글은 '요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했다. 나도 그 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랬기에 나중에 S가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도 한 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주목받는 작가로 계속 이어서 내고 있었다. 한국의 문단이 그런 독특함도 수용할 수 있을만큼 새로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글이라도 내놓고 연명할 정도로 퇴보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합평 시간의 S는 자신의 글이 얻어터지는 만큼, 다른 사람의 글도 거리낌없이 두들겨댔다. 그러나 S는 내 글에 대해서는 무딘 날을 들이댔다. 어쩌면 S가 보기에 내 글은 맹물같은 무색무취의 것이어서, 그다지 말할 게 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S에 대해서는 희한하다고 생각했을 뿐, 안좋은 감정은 없었다. 모두에게 맹공격당하는 S와 그 글에 한편으로는 측은함을 느끼기까지 했다.


  S는 한때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 소식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에 반해 H는 아주 잘 나가고 있다. 나는 신문과 방송에서 H의 글과 그 근황을 어쩔 수 없이 읽고 듣고 있는 판국이다. 오늘도 H의 소식을 듣게 되어 아주 속이 불편하고 시끄러워졌다. 나는 H의 글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글인가를 생각해 본다. 내가 어떤 평가를 하든지 간에, H는 등단했고, 자신의 책을 계속 써내고 있고, 인정받고 있다.


  "어쨌든 나는 계속 글을 썼고, '컬럼비아 스펙테이터'지에 서평과 영화평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기사는 제법 자주 실렸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폴 오스터가 자신의 글쓰기 인생을 회고한 책 '빵 굽는 타자기'의 일부분이다. 오늘, 예전에 읽은 그 책을 다시 떠올렸다. H의 소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H와 나는 같은 시합을 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만의 글쓰기 경주를 하고 있고, 중요한 것은 완주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매일 쓰고 있다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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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에 대한 글이 아니다. 그 영화에 대한 글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면 넘칠만큼 많으니, 혹시라도 영화와 관련된 글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쓰는 글은 대체적으로 길고 그다지 재미가 있지도 않다. 오늘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영화에 얽힌 오래전 이야기다.


  '동숭시네마텍'이라고 이제는 문닫은 영화관이 있었다. 예술영화 전용관을 표방한 그 영화관은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영화관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나는 그곳을 참 많이도 드나들었다. 영화관 입구로 들어가는 그 벽에 붙은 비좁은 계단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들어갈 때마다 꽤 불편했었다. 그곳에서 본 영화들 가운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88)',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1962)' 같은 영화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그 충격이란 좋은 영화를 보고 받은 감성의 충격이 아니라 '영화적 사기'라고 생각해서 받은 충격이었다. 1시간 반 가까운 영화 상영 시간 내내 꼬마 아이가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영화. 당시 영화가 끝나고나서, 허망함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나즈막하게 불만을 말하던 관객들의 웅성거림을 나는 들었다. '이게 끝이야?', '무슨 영화가 이래?'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나는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보기는 했어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의 영화들은 예술 영화라는 이름으로 번지르르하게 잘 포장된 거품낀 영화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장면 장면들이 가끔 떠올랐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언덕길을 열심히 뛰어가는 아이.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 친구가 혼날까봐 대신 숙제를 해갔던 공책을 펼치면 나오는 작은 풀꽃. 그 영화에 담긴 진정성이랄까, 그것들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마침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상영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을 아직도 추억하는 사람은 많다. 엘레니 카라인드루의 음악이 흐르던 그 놀랍고 가슴 아픈 풍경 속의 어린 남매를 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필름으로 상영된 그 영화를 본 것을 내가 만난 인생의 행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영화들, 특히 필름으로 된 오래전 좋은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날들은 지나가버렸다.


  생각해 보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던 그 짧은 시기는 영화산업에 대격변이 몰려오기 이전의 폭풍전야같은 고요함, 아니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빛남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이미 영화에서는 필름에서 디지털 기반의 산업으로 바뀌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영화에 불어닥치고 있는 그러한 거대한 흐름과는 상관없이 영화라는 매체, 그 자체가 주는 모든 것이 무작정 좋았다. 좋은 영화가 있으면 어디든 보러 다녔고, 영화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서 읽었다.


  '동숭시네마텍'이 2000년, '하이퍼텍 나다'로 바뀌고 나서도 나는 그곳을 자주 갔었다. 그곳의 폐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좀 아쉽기는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복합상영관, 즉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곳에서 쏟아져나오는 관객들의 취향에 맞추어 영화라는 매체, 산업 전반이 재편성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영화는 '예술'의 관점 보다는 '산업'의 시각에서 보아야하는 것이었음에도 나는 영화가 가진 진정성, 더 나아가 구원의 가능성까지 믿었던 순수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이야기는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가끔, 내 영화 사랑의 시작, 그 근원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어릴적부터 영화는 봐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내가 명확히 인식하는 그 시작은 대학시절 학교 영화 동아리 시사회에서 본 어떤 영화 한편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편씩,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구하기 힘든 작가주의 예술 영화들을 구해서 보여주던 그 시사회. 조악한 화질은 그냥 감수하고 보는 것이었다. 어느날, 학생회관을 지나다 그 동아리 시사회의 공지를 읽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7인의 사무라이'를 상영합니다. 시간은 저녁 7시 반, 장소는 학생회관 내 소강당입니다."


  나는 그 공지를 읽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소강당의 시설은 그리 좋지 못해서, 나는 그곳에서 개설되는 강좌는 가급적 신청하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삐걱거리는 의자, 좁은 통로, 높은 경사각, 그 모든 것이 다 싫었다. 그날 저녁에 가보니, 영화를 보러온 사람은 서른 명 정도나 되었을까? 보통 낮시간의 시사회 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화면 비율이 맞지 않게 프로젝터로 재생된 영화는 역시나 화질이 좋지 않아서 계속 비내리는 풍경같았다. 나중에 진짜 비내리는 장면에서는 그 안좋은 화질 때문에 마치 폭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영화는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고, 상영시간은 더럽게 길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 가면, 집으로 가는 심야 좌석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고, 강당에 불이 켜지자 남아있는 사람은 몇명 되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 전철을 부랴부랴 타고 겨우 심야 좌석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나는 버스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제서야 그 영화를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과 전율이 느껴졌다. 그 영화에는 내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영화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딱히 어떻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영화가 나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영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영화라는 세계에 대해 한번 새롭게 살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초대장을 보냅니다. 당신이 이 초대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 영화가 보내는 초대장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다. 초대장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초대장을 버리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었다. 당시에 내가 그 영화를 보고 꼭 무슨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면 저 '영화'라는 것을 배워야겠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7인의 사무라이'는 그렇게 내게 기이한 매혹의 영화로 남았다. 그리고 그 영화의 기억 때문에 몇년 후 나는 그 초대장을 열어보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아주 가끔은, 아니 요즘들어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영화 시사회의 공지를 못보았더라면, 영화를 보게 되더라도 그냥 중간에 나왔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어떤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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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의 일이다. 자려고 하는데, 뭔가 창가 쪽에서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풍이 심한 집이라 창문마다 방풍비닐을 붙여놓아서, 바람부는 소리에 비닐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 아무튼 바람소리이겠거니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소리가 계속 들렸다. 퍼드드득, 같이 들리기도 하고, 그 소리는 묘하게 귀에 거슬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창가 커튼을 이리 저리 살펴보면서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갑자기 뭔가가 날아올랐다. 엄지손톱 보다 조금 큰 '나방'이었다.


  기겁한 나는 급한대로 책상의 잡지를 휘두르며 나방을 겨우 잡았다. 한겨울에 나방이 어떻게 방으로 들어온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환기를 위해서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따뜻한 기운을 따라 나방이 들어온 것 같았다. 나방도 이 추운 겨울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들어왔는데, 내가 살려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약간(?) 들었다. 그 일 이후로는 창가에서 약간의 무슨 소리만 들리면 혹시 벌레는 아닌가 잘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나방은 좀 덜 무섭다. 혐오스럽기로 치면 바퀴벌레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몇년 전, 한밤중에 찬장을 열었다가 뭔가 휙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 박멸에 진리라는 살충제를 사서 도포한 뒤로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마다 봄만 되면 베란다에서 손가락만큼 큰 바퀴벌레가 끈끈이에 죽어있곤 있다. 집바퀴와는 좀 다른 모습에 검색을 해보니 산바퀴라는 하는 야생 서식 바퀴가 날아다니다가 그렇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다행히 봄철 번식기에만 그렇게 좀 날아다니다 마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 살았던 아파트에는 애집개미라고 하는 불개미가 있었다. 과자 부스러기 하나만 떨어지면 엄청나게 몰려들었던 그 개미떼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밀폐용기는 있지도 않던 때라 과자와 같은 먹을 것들은 보관도 제대로 하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더 개미들이 극성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불개미에 많이 물리고 고생했던 기억은 바퀴와 더불어 정말 끔찍한 해충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집게 벌레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습한 화장실에서 출몰하는데, 그 흉측스러운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은 이루말할 수 없다. 반짝거리는 검은 외피에 그 집게 꼬리는 너무 무섭다. 그나마 바퀴벌레 보다는 느리게 움직여서 잡기가 좀 수월하기는 하다. 도대체 어디서 이 벌레들이 들어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거미들은 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거미줄을 치면서 창틀이나 방충망에 귀찮은 청소거리를 만들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특히 집에 주로 서식하는 유령거미들은 주로 작은 먼지덩이 같은 집을 짓는데, 그 자체로 보기가 좋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거미들이 집안의 해충을 없애주는 익충임에도 없애버려야할 해충 취급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해녀들을 다룬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물질을 나가려고 준비하던 나이든 해녀가 거미 한마리를 방에서 발견하고는 밖에다 놓아주는 장면이 있었다. 감독이 왜 거미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냐고 궁금해서 물었다.


  "뭐 딱히 이유는 없는데, 그냥 우리가 물질 나가기 전에는 거미는 살려서 내보내요. 절대 안죽여. 오랫동안 그리 해놔서."


  해녀들에게 거미가 뭔가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서일까? 나도 거미는 정말 놀랐을 때는 제외하고는 선뜻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방충망에 매달려 있을 때는 손으로 쳐서 털어버리고, 대개는 밖으로 내어보낸다. 그러고보니, 거미를 연구하는 곤충학자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른다.


  "거미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집에서 발견되는 거미는 주로 유령거미라고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 아무런 해도 안끼치고 오히려 해충을 없애줍니다. 그러니 집에서 거미를 보더라도 막 죽이지는 말아주세요. 물론 이 기사를 보고나서도 거미를 보면 죽이지 않기는 힘들 겁니다. 때론 죽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살려주면 좋겠어요."


  거미를 향한 곤충학자의 애정어린 부탁을 듣고나니, 창가와 구석진 곳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유령거미를 보더라도 그렇게 밉거나 짜증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벌레의 형상을 한 모든 것들은 크던 작던 그 자체가 알 수 없는 무서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 나를 놀라게 한 벌레는 책벌레라고 불리우는 '먼지다듬이'였다. 책들 사이에서 자잘한 것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걸 어쩌나 싶은 한숨부터 나왔다. 먼지다듬이는 그 작은 크기 때문에 방제가 어렵기로 소문난 벌레다.


  "그래, 너희들도 먹고 살아야겠지."


  그냥 그렇게 말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나는 많은 책들과 책벌레와 집에서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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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후면 아버지의 세번째 기일이다. 아버지는 계절 가운데 가을을 가장 좋아하셨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그 계절에 떠나셨다. 이맘때 떨어진 은행 열매를 밟게 되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을 때, 나중에 아버지를 어디로 모실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종손으로서 아버지는 고향의 선산을 늘 생각하셨지만, 그곳은 집에서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먼 산골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 생각도 해야했다. 그렇게 멀리 아버지를 보내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동생들은 당시에 주말마다 근교의 공원묘지와 추모 공원을 둘러보러 다녔다. 그렇게 해서 집에서 1시간 거리의 추모 공원으로 결정되었다. 문중 어른들은 그 결정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유골함을 실외 매장지에 둘 것인지, 실내 봉안당으로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했다. 그곳의 수목장은 아직 시범 사업 중이라 선택할 수 없었다. 실내 봉안당은 순서에 따라서 안장되는 것이라 이용자가 마음대로 그 자리를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은 자리들은 이미 다 자리가 찼고,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봉안실의 창가 자리, 시선에서 약간 높은 정중앙의 위치로 정해졌다.


  집에서 거리가 가까운 것을 어머니는 마음에 들어하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곤 했는데, 갈 때마다 그곳에서 만나는 인간의 면면들이 내게는 새로웠다. 한번은 화장실에 갔다가 세면대에 내팽겨진 북어를 보고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의 제례실에서는 이용자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간단히 제를 지낼 수 있는데, 아마 제를 지내고 그렇게 버리고 간 모양이었다. 냄새 나는 북어를 도로 싸서 가져가기 싫다고 그런 식으로 버리다니 기가 찼다.


  어버이날이나 연휴 같은 때는 가족 단위의 이용객들이 몰려서 좀 혼잡했다. 그럴 때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사람들의 행태도 눈에 띄었다. 애들이 봉안실에서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도 주의를 주거나 제지하는 법이 없었다. 예의범절이라는 건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럴 때는 한참을 밖에서 좀 걷다 오곤 했다.


  어느 날인가 봉안실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사람도 마침 우리 가족과 같은 봉안실로 들어갔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들어서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슬피 울음을 터뜨렸다. 봉안함이 있는 곳에 얼굴을 묻고서 우는 남자를 보니, 자리를 피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우리는 남자가 맘편히 울다가 나오게 밖에서 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동생은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한 5분이나 지났을까? 동생이 이제는 들어가도 될 것 같다고 전화가 왔다. 좀 있다 가야 하지 않냐고 했더니, 동생은 일단 추모관 입구로 오라고 했다. 입구 근처 벤치에서 후련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추모 방식은 그렇게 간결한 모양이었다.


  사실 봉안실에서는 고인을 추모하며 맘놓고 울거나 말을 편히 하기 어렵다. 평일의 한낮이라면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대개는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언젠가 본 나이든 중년여성은 흰 국화 꽃다발을 들고 봉안함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뒤돌아보고 눈물을 그쳤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자리를 피해서 복도에서 여자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를 모신 봉안함 옆으로는 세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옆자리는 한달쯤 지날 무렵에, 나머지 두 자리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채워졌다. 그 두 자리의 주인들은 한 가족이었다. 봉안함에는 유골함과 함께 위패를 둘 수 있는데, 그 위패들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알게 되었다.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위패에는 남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 딸이 한달 좀 지날 무렵에 세상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어머니 옆자리로 왔다. 나이를 헤아려 보니 이십대 초반이었다. 두 달도 안되는 시간에 남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하늘나라의 어머니 옆에서 맘껏 웃고 어리광도 부리면서 행복하게 지내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오빠도 힘을 낼게."


  여동생의 위패에 있는 글을 내 방식대로 바꾸어서 써보았다. 그 위패의 글을 쓴 이가 알지못하는 누군가에게 그 글이 그대로 읽히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패를 볼 때마다 깊이 새겨진 슬픔과 쓸쓸함을 가늠해 본다.  

 

  3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 그곳을 찾았어도 우리 가족은 그와 마주친 적이 없다.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그에게는 아직 살아갈 많은 날이 남아있을 테고, 그는 먼저 세상을 뜬 어머니와 여동생의 부재를 견디어야 한다. 이제는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가을의 길목에 설 때면,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덜 슬프고, 덜 외로웠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오랫동안 어머니와 여동생을 따뜻하게 추억할 수 있기를, 언젠가 웃는 얼굴로 하늘나라에서 그들을 만날 때까지 힘을 내어 살아주길 기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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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초봄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밤늦게까지 깨어 있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에 찻물을 끓이려고 가스레인지를 켜고 부엌 창문을 열었다. 밖에서 무언가 큰 기계 소음이 계속 들렸다. 마치 이삿짐 센터 사다리차가 내는 굉음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이 좀 넘었다. 앞동의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파트 옆에는 바로 스포츠 센터가 있는데, 그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왜 새벽에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싶었다. 그 기계 소음은 약 10분이 넘게 계속 이어지다가 마침내 그쳤다.


  그 며칠 후 새벽, 이번에는 새벽 2시쯤이었다. 그 소음이 다시 똑같이 들렸다. 아직 겨울 추위가 남아있던 때라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한번 나가서 확인해 보았다. 굉음의 정체는 바로 쓰레기 수거차였다. 청소 수거 업체의 차량이 스포츠 센터 주차장까지 들어와서 쓰레기를 수거해가고 있었다.


  나는 보름 정도 청소 수거 차량이 오는 요일과 시각들을 기록해 보았다. 주거지역에서 새벽 2시에 그런 소음이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의 환경과에 문의해서 담당 공무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담당 공무원은 일단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전화를 주기로 했다. 일주일 후에 전화를 받았다.


  "그 청소차가 시에서 하청을 준 업체에서 나가는 차량인데, 자기들도 배정된 시간표에 따라서 하다보니 그렇대요. 구청 직속이면 어떻게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을 텐데, 하청 업체도 워낙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나름 사정이 있나 보더라구요."


  수거 시간을 좀 앞시간으로 옮길 방법이 없냐고 물으니, 일단 이야기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는 끝이었다. 그 이후로도 청소 차량의 작업 시간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쓰레기 수거 업무의 상당량이 외부 하청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쓰레기 수거 관련 외주 업체 선정 공고가 여러개였다. 이제는 종영된 EBS의 다큐 '시선'에서 도시의 청소 노동자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청소라는 게,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좋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일을 이렇게 한밤중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해야하느냐는 거에요. 이렇게 밤에 일하면 잘 안보이기도 하고, 또 그래서 사고나 다칠 위험도 크단 말이에요."


  어느 외부 하청업체 청소 노동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또한 해마다 나아지지 않는 업무 환경과 임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지자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청소 업무의 외주화는 명목상으로 볼 때는 시의 예산을 보다 더 절감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외주를 주는 것이 인건비와 여러 부대비용의 측면에서 보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절감된 비용이 얼마나 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정작 새벽 2시에 이루어지는 쓰레기 수거 차량의 소음 때문에 잠을 깨는 시민이 있어도, 그 시간 조정도 하지 못한다면 비용 절감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밤늦게까지 들리는 것은 새벽 청소 수거 소음 뿐이 아니었다. 그 스포츠 센터에 재작년에 새로 들어온 볼링장 소음도 문제였다. 방음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그 소음이 인근 아파트 몇개 동에 걸쳐서 들리고 있다. 주간 시간에만 그런다면 견딜만 한데, 그 볼링장은 무려 새벽 3시까지 영업한다. 그런데 그 소음을 현실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생활 소음 관련 법률을 찾아보니, 그 기준이 실제로 적용되려면 진짜 공사장 소음 정도나 되어야 어떻게 현실적 수단을 강구해볼 수 있다. 담당 공무원에게 민원을 넣어보았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장 실사 나가서 업주에게 소음 안나게 보강 공사라도 해보라고 말을 좀 해보는 것이 전부다.


  그 스포츠 센터에 입주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은 오랫동안 해온 24시간 영업을 작년에 포기했다. 경비 절감이 이유였을 것이다. 한밤중에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 커피 전문점의 결정을 아쉬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동네에는 24시간 편의점과 24시간 해장국집은 아직 여전히 영업 중이어서 대신 갈 곳이 남아있다.


  며칠 전에도 청소 수거차의 소음을 들었는데, 그 소리에 깨어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이전보다 더 늦어진 모양이다. 새벽의 볼링장 소음도 여전히 들린다. 도대체 새벽 3시까지 볼링장이 영업을 해야하는 무슨 절박한 이유라도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이제는 새벽에 청소차 수거 소리에 가끔 잠을 깨더라도 화가 치밀어 오르지는 않는다. 그 늦은 시간에 일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겠거니 싶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이래저래 도시라는 곳은 쉽게 잠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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