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지만, 아직 한낮의 햇빛은 열기를 머금고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감나무의 감 색깔은 푸른색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 양지바른 곳의 감나무에는 주황색의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래, 가을이지.


  자주 나가는 산책길은 작은 공원을 경유하는데, 이 공원에는 목련, 산수유 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 가운데 가을만 되면 가장 수난을 당하는 나무가 참나무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이든 아줌마들이 배낭까지 메고 와서 도토리를 따간다.


  긴 막대기를 가져와서 가지를 후려치고, 발로 나무를 쾅쾅 쳐대면서 도토리를 따가느라 여념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그 공원에 참나무가 꽤나 많은 것 같지만, 내가 헤아려보니 열 두어서너 그루나 될까, 게다가 수령이 오래된 것도 아니어서 열매라도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을 터였다. 그런 도토리를 서로 따가겠다고 그러고 있는 모양새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알기로는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서 해먹으려면 꽤 많은 양이 필요할 텐데, 아마 이 공원 말고도 다른 곳까지 다니면서 따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돌아오는 길에 보니, 참나무 잎들과 도토리 껍질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나뒹굴고 있었다.


  가로수로 흔하게 심어진 은행 나무의 열매도 몇년 전까지만 해도 꽤 인기가 있었다. 커다란 포대 자루를 끌고 다니며 은행 나무를 쳐대면서 열매를 주워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열매를 따간 것으로도 모자라 그 냄새나는 껍데기를 까서 나무 밑에 한무더기로 버려놓고 가는 그 한심한 행태에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도시의 가로수 열매에는 매연같은 중금속 물질이 많다는 보도들이 여러번 나가고 나서는, 발에 밟힐 정도로 은행 열매가 많이 떨어져도 이제는 줍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은행 열매가 전통적으로 동양권에서는 식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은행 열매에 있는 4-MPN이라는 물질은 사람에 따라서는 신경 마비를 유발할 수 있는 신경독으로 작용한다. 이 물질은 열에도 안정적이라서 익히거나 열을 가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 병원 응급실에 은행 열매를 먹고 발작이나 마비 같은 증상으로 실려온 환자들의 인종을 살펴본 결과, 대다수가 아시아계라는 논문도 있을 정도다. 은행 열매의 독성을 간과하고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먹이다가 응급실에 실려오는 경우도 있다고 소아과 의사들이 경고하기까지 한다.


  대추 나무도 수난을 당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나는 아파트나 공원에 심어진 대추 나무가 빨갛게 잘 익은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대개가 익기도 전에 푸른 열매 채로 죄다 다 따가버리기 때문이다. 감나무의 경우에도 그 열매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을 정취를 느낄만큼 보기 좋게 익은 감들이 한 며칠 보기도 전에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린다. 아파트의 나무들은 정기적인 수목 소독을 하는데, 도대체 그런 나무 열매들을 기를 쓰고 따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몇년 전 가을의 일이다. 밖에서 무슨 큰소리가 나길래 내다 보았다. 중년의 남자와 늙은 여자가 서로 핏대를 세우며 싸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경비가 어쩔 줄 모르고 서있었다.


  "당신이 동대표 마누라면 마누라지, 어디서 경비를 종처럼 부려먹어. 이 아파트 경비가 당신이 감따라고 하면 감따는 사람이야? 내가 관리사무소에 항의를 하려고 전화를 몇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그리고 경비 아저씨, 이딴 일 하지 마쇼. 진짜 열 받네, 어휴."


  쩌렁쩌렁 울리는 중년 남자의 말을 듣고나서 무슨 일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바구니에는 아파트 감나무에서 딴 감들이 그득했다. 나이든 경비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곤혹스러움이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날은 마침 휴일이었다. 그래서 관리사무소 사람들은 중년 남자의 의기에 넘치는 분노를 피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 미학 개론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첫 강의 시간에 강사 선생님이 미학이란 학문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사과 나무에 열린 사과를 보는 두 가지의 관점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따 먹는 것으로, 또 다른 하나는 그냥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미학은 후자의 관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과수 농사를 짓는 농부가 아닌 도시의 사람들이 열매가 달린 가을의 나무들을 그러한 미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은 정녕 도달하기 힘든 이상일까? 며칠 전에 이미 따가버린 대추 나무 아래 떨어진 퍼런 대추들과, 나뒹굴어 다니는 참나무 잎가지들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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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 뉴스를 보고 있는데, 하단 자막에 '일본 여배우 다케우치 유코 사망'이라는 기사가 빠르게 지나갔다. 뜻밖의 소식이라 무척 놀랐다. 오후 내내 뒤이어 나온 기사들에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는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비극적 죽음이 맞는 듯하다. 요새는 언론사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파급력을 생각해서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보도에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을 보도 기준으로 삼고 있다.


  다케우치 유코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의 여배우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영화를 보지 않은 나에게는 일본 드라마 '런치의 여왕(2002)'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 드라마에서 레스토랑 키친 마카로니를 운영하는 4형제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나츠미 역으로 나온 다케우치 유코는 참으로 행복하게 빛나는 건강한 미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마도 그 드라마가 그녀에게는 진정한 출세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잠시 잊을 수 있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이전 드라마 출연작이었던 '데릴사위(2001)'에서도 그러한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매력은 잘 드러난다. 그 드라마에서 그녀의 웃음은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전해주는 그런 것이었다. 같은 해에 SMAP의 나카이 마사히로와 같이 출연한 드라마 '하얀 그림자(2001)'에서는 비련의 여주인공 역도 잘 소화해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의사 나오에를 사랑하게 된 간호사 노리코 역으로 분했는데, 생의 희망과 따뜻함을 자신의 연인에게 전해주는 모습으로 감동을 이끌어 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녀의 인생작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이겠지만, 내게는 그 영화가 이 여배우의 불행한 사생활의 전주곡처럼 여겨진다. 영화 출연을 계기로 부부로 맺어진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알려진 대로 불화로 점철되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종지부를 찍었다. 2005년에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와 함께 출연한 영화 '봄의 눈'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별로였지만, 다케우치 유코의 연기도 피상적이고 도식적으로 보였다.


  급하게 진행된 결혼과 출산, 이혼으로 이어진 사생활의 파고 속에서 이 여배우는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장미없는 꽃집(2008)'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드라마였다. 비밀을 간직한 여주인공 역을 무리없이 잘 소화해낸 다케우치 유코는 배우로서의 경력을 이어나갈 힘을 얻게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이 배우의 출연작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그토록 열심히, 즐겁게 보았던 일본 드라마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 그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경력이 어떻게 더 이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재혼을 했었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다케우치 유코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나서, 배우로서 꾸준히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츠마부키 사토시를 떠올렸다. 최근에 츠마부키 사토시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영화 '워터 보이즈(2001)'의 미소년으로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가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 나는 그 배우가 자신의 외모가 주는 귀엽고 편안한 인상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넓히는지를 궁금증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아마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보고나서 그가 연기의 스펙트럼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고, 배우로서도 좋은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드라마 '런치의 여왕'과 영화 '봄의 눈'에서 다케우치 유코와 같이 공연했었다. 내가 알았던, 한 시절을 함께 했던 배우들 가운데 한 사람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미소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배우 다케우치 유코. 그 미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나름의 정신적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떠나간 곳에서는 평안함 속에서 잠들기를, 작품 속에서 보여준 그 미소가 온전히 다케우치 유코 자신의 것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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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TS(방탄소년단) 멤버가 어떤 영상에서 먹고 있었던 빨간색 음식에 대한 서양 팬들의 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그 음식의 간편식 해외 수출이 꽤 많이 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 빨간색 음식은 '떡볶이'였다. 아, 떡볶이... 마음으로는 먹고 싶으나, 현실적으로는 먹지 못한지가 여러해가 다 되어간다. 예전부터 매운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수록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속이 불편해졌고, 그렇게 나는 빨간색 음식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갔다.


  사실 매운 맛이 식탁을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김치도 내게는 기피음식일 뿐이다. 고추장이 양념의 기본으로 들어가는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즉석 조리식품에서도 매운 맛은 대세가 된 지 오래다. 라면도 고춧가루 때문에 먹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먹는 우동 라면이 있었다. 그것도 어쩌다 먹는데, 어느날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약간의 매운 맛이 느껴졌다. 궁금해서 제품 포장지의 뒷면을 보니 스프 내용물에 '고춧가루'가 적혀 있었다. 더이상 그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맑은 국물의 탕류라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다. 분명히 맑은 색의 국물인데,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난다.


  프라이드 치킨에서도 매운 맛은 빠지지 않는다. 그냥 프라이드 치킨을 사왔는데, 튀김옷에 매운 맛을 가미했는지 입안에서부터 얼얼한 느낌이 전해진다. 역시 먹고나서 속이 쓰려온다. 고로케를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김치 고로케를 먹었을 때이다. 동생이 사 온 고로케 가운데 하나를 무심히 먹었다가 그날 내내 그 매운 맛 때문에 고생을 했다.


  전에는 특수한 양념의 식재료로 취급되었던 청양 고추를 요새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기본으로 넣는다. 그런 매운 맛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있다면, 아마도 어린이를 위한 음식 조리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아이를 위한 요리에는 매운 맛 대신에 단 맛이 들어간다. 어른들 음식이라고 해서 단 맛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 음식은 갈수록 달달해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잡채밥 간편식이 나왔길래 사서 먹어보았다. 달아도 너무 달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단 맛이였다. 잡채가 아니라 물엿으로 범벅을 해놓은 당면 볶음 같았다. 그 잡채밥의 양념 간장에는 매운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더 맵고 칼칼한 맛을 찾으러 다니면서, 그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극강의 단 맛에도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김장을 할 때, 어머니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덜 매운 고춧가루를 구할 수 있는가, 였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맵지 않은 순한 맛의 고춧가루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고춧가루는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고춧가루가 아주 매운 맛의 고춧가루여서, 맵지 않은 고추를 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아줌마의 전화 통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고춧가루를 아는 사람을 통해서 샀는데, 하나도 맵지 않아서 화가 난다는 소리였다. 아, 그 고춧가루를 우리 어머니가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언제 고추가 들어왔는지 대해서 임진왜란 이후 일본 유래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2010년, 한국 식품연구원과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공동 연구에서 새롭게 공개된 고문헌을 살펴본 결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15세기 이전에 고추장을 이용한 음식이 있었고, 그러한 발효 음식은 고추 전래 시기가 훨씬 이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쨌든 고춧가루를 이용한 김치가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고춧가루를 이용한 음식은 이전까지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보양식이었다가 소금이 귀한 시기에 방부제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 일반 대중의 식탁에 김치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은 이제는 한국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소울 푸드(Soul Food)' 의 위치까지 차지했다.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뭔가 매운 것을 먹으면 정신이 번쩍 들고, 그 매운 맛 때문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매운 맛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정일 것이다. 언젠가 내가 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매운 음식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여러 댓글이 달려서 공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회식 자리도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좋아하는 시뻘건 국물을 회식 자리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라는 글을 읽고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 기능은 떨어지게 마련이고, 그래서 매운 음식 보다는 담백한 것을 찾게 되는 듯하다. 식품 회사들이나 요리 연구가들이 매운 맛 위주의 음식 보다는 좀 더 다양한 한국적인 맛을 찾아서 새로운 조리법과 간편식을 개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매운 맛의 나라에는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인 맛'의 정의가 어떻게 하면 더 매울 수 있는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온 장류와 발효식품을 사용해서 식탁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올해는 잦은 비 때문에 고추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고춧가루 값이 예년에 비해 많이 올랐다고 한다. 배추 농사도 좋은 작황을 기대할 수 없어서 벌써부터 김장 걱정을 하는 이들도 많다. 깍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무 농사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매운 맛을 감수하고서라도 겨울 깍두기의 시원하고 달작지근한 맛은 놓칠 수가 없다. 맵지 않은 고춧가루만 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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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방송(KTV)에서 월요일 새벽 1시에 방영되는 'KTV 시네마'는 주로 오래전 한국 흑백 영화들을 방영한다. 1950, 60년대 흑백영화들은 대부분 한국 영화의 진부하고 신파적인 주제와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간혹 비전형적인 영화 문법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간에 방영된 박성복 감독의 1961년작 '해바라기 가족'이 그러했다. 그 시대에도 작가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유현목 감독은 여러편의 주목할만한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구름은 흘러도'는 그가 1961년도에 만든 문제작 '오발탄' 이전에 만든 영화로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부모를 잃고 가난을 견디며 사는 4남매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막내 말숙이의 일기를 통해 이어지는데, 말숙이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 그 자체라고도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큰오빠가 탄광촌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이 가족은 오빠가 탄광 파업에 참여하다 해고당하자 세상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나간다. 큰오빠는 다른 도시의 탄광으로, 둘째는 식모로, 그리고 남겨진 남매는 기름집 아저씨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말숙이의 유일한 위로는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일기장에 자신의 모든 소망과 꿈을 적어가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말숙이가 감당해야 하는 극심한 가난은 너무 처절해서 영화 내내 말숙은 거의 단벌 옷에 맨발로 나온다. 그 맨발을 보면 누가 저 아이에게 양말이라도 사서 신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둘째 오빠의 행색도 마찬가지여서 터지고 헤진 단벌 바지를 말숙이가 대충 꿰매주어 입고 다닌다. 이 영화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가를 말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 같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말숙이에게 늘 일기를 읽고 격려해주는 여선생은 빵을 사주는 호의 뿐만 아니라 학비 문제도 해결해서 학업을 잇게 해준다. 이 일기야말로 말숙이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영화는 말숙이의 일기가 출판되어서 세상에 큰 반향과 호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 4남매가 다시 탄광촌에 모여서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그렇게 좋은 결말로 끝났지만, 이 영화의 내적인 유기성은 성글게 이어져 있고, 그렇게 비어있고 단절된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는 보는 사람에게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재일교포 소녀 야마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로, 1958년 일본 출판사 광문사에서 '니안짱'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NHK에서 라디오 방송극으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명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서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는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출판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정식 계약을 맺고 출판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기를 끌었던 이 책은 영화화의 과정까지 밟게 된다.


  일본 탄광촌이 배경인 일기는 한국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면서 상당한 사실성을 상실했고, 그것이 영화 내내 무언가 잘 해명되지 않고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했다. 재일교포로 차별받고 정식 탄광 노동자가 될 수 없었던 스에코의 큰오빠와 4남매가 겪었던 현실은 탄광촌이라는 배경만 따온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로 치환되었다. '가난'은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는 주제였기에 스에코의 이야기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스에코와 4남매가 겪어야 했던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순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에서도 배제되어야 하는 요소였고, 당시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배경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제작된 두 영화 모두 원작자인 스에코가 그려낸 일기의 본질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화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구름은 흘러도'가 보여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에 찬 시선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유현목은 영화 내내 맨발로 나오는 말숙이가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가난이라는 혹독한 현실을 아름답고 처연한 일기의 문장들로 승화시킨다. 제각각 흩어진 가족들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언젠가 다시 하나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숙이의 희망에 찬 내레이션은 그 시대의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니안짱'은 산하 출판사에서 어린이용 도서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다. 영화를 보고나서 꼭 구해서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의 주인공 야마모토 스에코는 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문필가로 활동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출판된 일기로 받게된 엄청난 인세가 4남매의 삶의 행로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스에코에게는 인생을 뒤바꿔 놓은 일기였던 셈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자세한 배경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2012년에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발간한 김승구"아동 작문의 영화화와 한일 문화교섭"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 김승구는 현대시를 전공한 국문학자인데도 한국 영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데도 그의 논문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영화에서 말숙 역으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서 극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찾아보니 배우의 이름은 김영옥인데, 아역시절이라고 해도 원로배우 김영옥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 김영옥의 필모그래피에는 분명히 올라와 있지만, 이 영화의 아역이 그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옥 씨의 공식적인 영화 데뷔작은 '가거라 슬픔이여(1957)'인데, 그 영화 포스터의 아역 얼굴과 이 영화 주인공의 얼굴은 동일하게 보여서 김영옥 씨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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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낮에 무얼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다. 


  "전원 일기가 케이블 여기저기서 계속 나와서 그거 돌려가면서 본다. 아주 재미있어."


  주로 MBC의 자회사 케이블 방송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그 밖에도 국민방송(KTV)이나 다른 예전 드라마 전문 방송 채널에서도 전원일기가 나오고 있다. 저녁에 유선방송 채널을 계속 돌리다 보면 전원일기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방영순서가 제각각이라 때론 우습기도 하다. 어린 복길이와 영남이가 다른 채널에서는 어른으로 나오고, 김회장 집 부엌은 아궁이에서 현대식 부엌을 왔다 갔다 한다. 그 드라마를 계속 봐왔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여러 가족의 얽히고 설킨 일화와 비밀들을 잘 알지못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있다. 


  재미있게 보신다는 어머니와는 달리, 나에게는 그 드라마 한 회를 온전히 시청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 드라마의 초창기부터 종영때까지 대부분의 내용을 꿰고 있기는 하다. 그 당시에는 꽤나 재미나게 보았던 기억도 있다. 도시화가 한창 가속화되던 1980년대에 전원일기는 도시사람들의 정신적 휴식처같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집필 작가가 여러번 바뀌기도 했지만, 그 드라마가 강조하던 주된 가치는 비합리적인 공동체 의식, 가부장제, 남존여비, 혈연주의, 도시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 구시대적인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김회장의 말 한마디는 양촌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복길 할머니의 고약한 성미와 강짜 때문에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는 복길 엄마의 괴로움은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학을 나온 영남 엄마는 자신의 꿈과 희망을 가부장제 안에다 억지로 욱여넣으며 살고 있고, 배움은 짧은데 성정까지 제멋대로인 수남 엄마는 늘 자잘한 사건들을 일으킨다. 그런가 하면 가진 것도 없고, 불 같은 성미 때문에 가정에 충실하지도 못한 노마 아빠는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를 노마 엄마의 탓으로 돌린다.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고도 당당하고, 그렇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놓아야 한다고 버젓이 말하는 이른바 동네 청년들의 의식 수준은 참 보기 딱할 정도다. 그렇게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하는 행동들은 지금의 세대들이 보기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꼭 재미있다기 보다는, 저 시대에는 다 저러고 살았구나. 지금보면 참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데 그때 생각이 나서 그런 거지."


  그 드라마가 그렇게 재미있으시냐고 묻자 어머니는 그렇게 답하셨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전원일기는 어쩌면 오늘날의 기성세대가 살아온 그 시대의 여러 모습들과 가치관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화사회학적인 영상자료인지도 모르겠다. 그 드라마가 급변하는 농촌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하고, 구시대적인 가치들을 더이상 칭송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나중에는 연기하는 배우들조차 개연성 없고 별다른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드라마 내용에 부끄러움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배우 김혜자가 전원일기를 끝내면서 '신동아'에 그런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권태롭고 챙피해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김회장 부인 역을 그만 두고서 김혜자 씨도 자유로움을 느꼈을 것 같다. 2009년에 개봉된 봉준호의 영화 '마더'를 보고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배우 김혜자를 새롭게 재발견했을 것이다. 내게는 특히 극중에서 김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34년동안 골초였다가 담배를 끊었던 그가 보여준 그 장면은 오랫동안 연기했던 김회장 부인 역이 그 배우에게 정말 맞지 않은 옷 같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어쩌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전원일기'를 찍느라 다른 감독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복길이 할머니 역의 김수미는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예능에서 맹활약 중이다. 전원일기에서도 때론 슬랩스틱 같은 몸연기와 뛰어난 애드립을 선보이기도 한 복길이 할머니를 떠올려 보면 배우는 천상 배우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억척스러운 종기 엄마 역으로 나왔던 배우 이수나는 4년 전,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호전되었으나 근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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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9-23 21:15   좋아요 0 | URL
어느 시대 어느 순간이든 모순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고 본다면, 총체적으로 어떤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좋을 수 있는지 개인적 판단과 기준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