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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호퍼
롤프 귄터 레너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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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책. 호퍼의 생애는 평범해서 읽는 재미는 그다지 없을지 모르나 책에 실린 도판들은 꽤 볼만 하다. 그가 그려낸 미국의 풍경은 미국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프로이트 심리학
캘빈 S. 홀 지음 / 문예출판사 / 2000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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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구닥다리에 지루하다고만 느꼈던 프로이트 심리학을 홀 아저씨(!)가 이토록 명료하게 풀어서 설명해줄 줄이야... 프로이트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책이다.
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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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었던 책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헨리 제임스의 빼어난 필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 무엇이 진실인지, 독자가 끝까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매혹적인 문체가 반짝반짝 빛난다.
모리스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07년 12월 31일에 저장
구판절판
올 여름엔 포스터 전집으로 무척 행복했었다. "모리스"는 포스터를 재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평생의 문제이기도 했던 동성애를 통해 사회의 금기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의 내면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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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 제127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토가와 유자부로 지음, 이길진 옮김 / 열림원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최근 몇년간 일본 소설은 문학 출판 시장에서 인기있는 아이템이 된듯 하다. 그것은 서점에 가보면 아주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이 잘 나가는 일본 소설 때문에 한국 문학 책이 안팔린다는 자조섞인 푸념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이제는 익숙해진 아쿠타가와 상을 비롯해 일본의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손쉽게 접한다. 하지만 모든 일본 소설들이 수작이 될 수는 없을 터, 더러는 깊이와 알맹이 없는 소설들을 만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 실망은 기껏 시간을 들여 읽은 소설이 무슨 무슨 상 수상작의 타이틀을 갖고 있을 때 더 배가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 나오키 상 수상작들 가운데 인상적인 작품은 별로 없었다. 적어도 "살다"를 읽기 전까지는.

  책에 실린 세 편은 모두 시대소설이다. 배경과 등장인물은 모두 옛날 것이지만 거기에 담긴 주제의식은 시대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녀간의 정, 명분과 실리 사이의 갈등, 인생에서의 선택과 후회에 대한 이 소설들은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변하지 않는 근원적인 삶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자칫 휘청거릴 수 있는 이러한 무게있는 주제들을 간결하게 정돈된 문체로 풀어낸다. 

  세 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평온한 모래톱'이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을 사창가에 판 아버지가 딸에 대한 안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혈육지정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작가는 삶을 견딘다는 것의 고통과 쓸쓸함을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소개되고 있는 일본소설의 대부분은 가볍고 감각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살다"를 읽고서 조금은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다. 내 경우엔 그랬다.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 소설책을 덮으며, 일본에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다. 좋은 소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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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예고없이 집을 방문했고, 저녁만 먹고 떠났다. 그의 어머니는 차를 운전해서 아버지를 어디론가 데려다 주었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나서야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알지못했던 사생활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에게는 부인과 딸이 있었고, 혼외 관계에서 얻은 또 다른 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예순이 되어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혼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가 11살 때, 아버지는 인도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에 기차역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현대 건축에 놀라운 영감을 불어넣은 루이스 칸이었다. 아들 나다니엘은 자신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생활을 가졌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버지의 지인들을 만나고,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들을 탐방한다. 그 여정은 5년이란 시간이 걸리고서야 끝난다.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세 개의 가정이 있었다. 그 집들은 불과 5마일 근방에 모여있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바람둥이였을까? 어째서 그토록 위대한 건축가가 사생활만큼은 도덕적이지 못하고 비밀 속에 두어야 했는지 아들은 그 답을 찾으러 나선다.

  에스토니아 태생으로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지만 쉰이 될 때까지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건축가였다. 그러다 우연히 가게 된 유럽 여행에서 보게된 고대와 중세 건축물들은 루이스 칸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그때부터 이 건축가의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켐벨 미술관, 소크 연구소,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칸의 건축물은 곧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건축물들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해나간다. 또한 한번도 같은 자리에서 만나본 적이 없는 두 명의 배다른 누나들과도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오래된 과거의 상처를 헤집는 질문을 해서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묻고 또 묻는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아버지 루이스 칸"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어렵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때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루이스 칸의 아들이자 이 다큐의 감독인 나다니엘 칸은 그 모든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건축물들이 주는 위대함 앞에서도 결코 거기에 매몰되어 서둘러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감독의 느리고 진중한 호흡을 통해 관객은 한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건축물에 영적인 영감을 불어넣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한 인간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 루이스 칸"은 인간의 내면에는 불완전함과 함께 그것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의 세계가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라기 보다는, 대상에 대한 애정일지도 모른다. 아들 나다니엘 칸은 그렇게 아버지 루이스 칸을 사랑했고, 그래서 결국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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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20 17: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큐 제목이 어떻게 되나요?

푸른별 2007-12-20 22:25   좋아요 0 | URL
IMDB에 My Architect(2003)로 나와있군요. 포스터를 보니 부제로 A Son's Journey라고 되어있네요. 2005년에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서도 방영이 되었습니다.

Mephistopheles 2007-12-21 01: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꼭 구해서 봐야 겠군요..
칸의 사생활은 비정상적이였을진 모르지만 그의 건축물은 대단하거든요.^^
 

  영화 〈조춘(早春)〉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른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시간이 그것인데 영화 속의 인물들은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증거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영화 내내 그러한 증언들을 듣게 된다. 한번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초반부에 남자 주인공 스기야마는 오랜만에 도쿄 본사에 올라온 자신의 상사를 집에서 묵게 한다. 손님의 이부자리를 마련한 부인에게 그는 묻는다. 

  “밤에 추울지도 모르는데 이불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밤에 남아있는 그 때가 바로 이른 봄이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는 이른 봄이라는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렇듯 초봄에서 시작된 시간적 배경은 계속해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제시되는데 스기야마의 친구인 미우라에게 이르면 초여름으로 변화한다. 

  미우라는 스기야마의 회사 동기로 병을 얻어 누워있는 처지이다. 거의 거동을 못하고 투병생활에 지친 미우라에게 스기야마의 방문은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울 따름이다.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토로하면서 미우라는 말한다.

  “내가 병을 얻어 누워있게된게 벌써 백일째군. 그새 봄에서 초여름이 되었네 그려.”

  이제 시간은 초여름에서 성하(盛夏)로 이르게 되는데, 그 때는 바로 영화의 끝부분에 해당한다. 샐러리맨 생활에 대한 회의와 부인과의 불화를 떠안고 지방의 공장으로 전근온 그에게 사무실의 동료는 무더위에 대해 말하며 그에게 묻는다.

  “도쿄도 여기처럼 더울까? 여긴 산으로 둘러싸여 열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더 덥게 느껴져.”

  이러한 대사들 외에도 시간은 여러 다른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영화 내내 제시된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은 계절에 대한 이러한 단서들을 마구 흘려대는 것일까? 과연 〈조춘(早春)〉에서 계절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 우리는 거기에 부여된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즈가 말하는 계절이란 일차적으로는 시간적인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춘(早春)〉의 인물들이 말하는 시간들은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즈는 여기에 좀 더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또한 인물의 대사를 통해 제시된다. 우리는 그것을 스기야마와 상사 오노데라의 대화 속에서 볼 수 있다. 

  부인을 남겨두고 홀로 전근지로 떠나온 스기야마는 자신의 괴로운 심사를 상사에게 털어놓는다. 마치 다정한 부자(父子)처럼 두 사람은 강물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주변으로 조정 연습을 하는 젊은이들의 배가 지나간다. 그것을 보고 오노데라는 말한다.

  “저들이야말로 인생의 봄이군.” 

  사실 인생의 봄을 살고 있는 것은 주인공 스기야마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막 서른의 초입에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에 산적한 문제들과 직면하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러한 갈등과 고통이야말로 〈조춘(早春)〉의 주요한 테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스기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회사생활에서 회의를 느끼고 별다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그는 같이 전철로 출퇴근하면서 알게된 여성과 급속도로 가깝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부인과의 관계는 급기야 별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래전에 병으로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거대 조직을 떠받치는 일개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샐러리맨으로서의 비애가 그로 하여금 좀처럼 삶에 천착하지 못하고 떠다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조춘(早春)〉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끊임없이 제시되는 계절, 즉 시간의 의미는 눈에 포착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어갈수록 관객은 눈에 보이는 즉자적인 의미로서의 계절과, 그와 동시에 인생의 한 시기, 즉 상처와 고통 속에서 혼란을 겪으며 부유하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의 내면과 조우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오즈는 항상성(恒常性)에 따르고 있는 자연의 시간과 그 법칙을 조화의 이상으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계절은 마치 자신이 오고 가야할 때를 아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계절이 자연 속에 머물다 가는 궤적을 명확히 추적해낼 수 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내면은 얽힌 실타래와 같아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혼란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결국 〈조춘(早春)〉에서 오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조화로운 시간, 자연에로의 회귀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처음과 끝장면을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역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 기차와 그것이 지나간 뒤의 산을 잠시 동안 보여준다. 기차는 얼핏 보기에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사실은 자연의 법칙과 유사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부부는 창 밖 너머 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차가 지나간 곳에는 산이 그들의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든든하게 서있다. 이제 한 남자의 내면에 일렁이던 고통과 상실의 감정은 잔잔해질 것이며, 그것은 그가 견뎌온 시간에 의해 마침내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렇듯 오즈에게 있어 시간은 상처입은 것과 잃어버린 것의 재건과 복귀를 의미한다. 영화 〈조춘(早春)〉에는 계절과 자연에 대비되는 한 남자의 흔들리는 내면의 부조화가 포착되어있다. 이것은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결국 치유와 회복으로의 여정을 가져오게 만드는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게 되고, 우리가 영화의 끝부분에서 목격하는 것도 화합과 평화의 대단원인 셈이다. 하지만 〈조춘(早春)〉에서 그러한 성숙과 변화, 조화와 통합의 시간에 이르게 되는 이는 스기야마 뿐만은 아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스기야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을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즈에게 있어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며, 그러한 이유로 영화 속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중요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를 잃은 후 겉도는 남편의 마음을 잡지 못해 속앓이를 하는 부인 마사코, 자신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한 상대로 늘 유부남을 택하고 스스로를 상처 속에 가두는 스기야마의 애인, 시집간 딸의 결혼 생활에 노심초사하며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사코의 어머니, 30년을 다닌 직장에서의 퇴직을 앞두고 생겨난 걱정과 근심을 술로 달래는 술집의 손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에 시달리다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하는 스기야마의 동료 미우라, 한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발견하고 그 지혜를 스기야마에게 일러주는 상사 오노데라와 같은 인물이 그러하다.

  이렇듯 점점이 흩어지고 열려진 개개의 시간들은 극의 흐름에 따라 하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를 형성한다. 개별적으로는 작고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식 가능한 덩어리, 즉 3차원적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오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삶 안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적 국면들에 대해 보여주면서,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반복적이고 동일한 기제를 성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간과 세계를 넘어 우주라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유에까지 맞닿는 지점을 보여준다.

  〈조춘(早春)〉은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오즈가 만들어낸 시간의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인생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렇게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화를 깨뜨리는 인간의 무질서 때문이다. 무질서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어리석음과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과 대비되는 항으로서 시간은 존재한다.  

  오즈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바로 그러한 시간에 대한 찬미를 아낌없이 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갈등과 고통, 혼란과 무질서적 상황들에 처한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에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오즈가 보기에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시간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춘(早春)〉의 인물들은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고 구원받는다.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하고 집을 나간 부인은 결국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남편은 그런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금 부인과 함께 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이제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스기야마는 부인에게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3년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부인은 답한다. 

  “3년이란 시간도 금새 흘러가버릴 거에요.”

  오즈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더라도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낼 것임을, 시간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그들 삶의 유일하고 힘 있는 증인이 되어줄 것이라고 일러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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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쥬코 - 프랑스 희곡선 1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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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위키 백과에서 로베르토 쥬코에 대해 찾아보니 이 인물의 간략한 전기가 나와 있었다. Succo 또는 Zucco로 불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이 연쇄 살인범은 1962년에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모를 칼로 찔러 죽였다. 같은 날 경찰 한명을 더 죽였는데 법정은 그가 정신이상이라는 이유로 10년 감호 선고를 내렸다.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던 그는 정치학 학위를 따기도 했다. 『로베르토 쥬코』에서 쥬코가 신사에게 자신을 학생으로 소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년째 되던 해 탈옥을 한 쥬코는 유럽 일대를 떠돌며 강간과 납치, 살인과 같은 갖가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 1987년과 1988년에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고향에서 붙잡힌 그는 다시금 탈옥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결국 자신의 감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는 AIDS에 걸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지하철에 나붙은 쥬코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이 희곡을 썼다고 했다. 왜 콜테스는 이 살인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콜테스는 쥬코가 저지른 끔찍한 범죄에 대해서 보여주기만 할 뿐, 왜 그가 그런 살인을 저지르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콜테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쥬코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쥬코가 만나게 되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집안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소녀와 깊은 고독과 상실감에 시달리는 귀부인 같은 인물은 모두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콜테스는 그들을 소녀, 귀부인, 신사, 형사와 같은 일반명사로 지칭한다. 이 극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로베르토 쥬코 뿐이다.

 

  콜테스가 보기에 스스럼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는 쥬코나 쥬코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그 누구와도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마저도 죽여버리는 쥬코의 범죄는 혈육과도 단절된 마음의 무서운 심연을 엿보게 한다. 콜테스는 왜 쥬코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동성애자로서, 또 AIDS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느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외와 고독을 쥬코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콜테스는 자신이 느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심연을 연쇄 살인마라는 거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쥬코는, 또 쥬코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소통을 갈구하지만 그 시도들은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린다. 『로베르토 쥬코』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앞의 생에 대해 결국 혼자일 뿐이라는 뼈저린 진실을 보여준다.

  과연 작가와 그가 쓴 작품을 엄밀하게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할까? 콜테스의 경우엔 그것이 어렵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를 피가 날 정도로 파고 또 파내어 그것으로 작품을 써서 먹고 사는 존재이다. 나는 이 말이 잔인하지만 진실이라고 믿는다. 고통스러운 상처 하나 없이 순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이, 그는 바로 작가이다. 콜테스는 자신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 점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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