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요 엄마
마샤노먼 지음 / 예니 /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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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 세퍼드의  『매장된 아이』와 마샤 노먼의 『잘자요 엄마』두 작품 모두 알라딘에서는 품절이군요. 도서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감독이며 배우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는 한 토크쇼에서 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버리고 싶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말은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있어 가족의 존재가 갖는 무게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1978년 샘 세퍼드가 발표한 『매장된 아이』와 1983년에 마샤 노먼이 쓴 『잘자요 엄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다. 두 작품은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문제와 위기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두 작품이 모두 퓰리처 상을 수상한 데에는 그 안에 미국 사회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미국의 가정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매장된 아이』에서는 뒤뜰에 묻혀있는 매장된 아이가 문제가 된다.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는 죽임을 당하고 땅 속에 묻히지만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는 살아서 고통을 주는 존재이다. 『잘자요 엄마』에서는 자살을 결심하는 한 여성이 나온다. 어릴 때부터 간질 발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시는 원하지 않은 결혼과 그로 인한 이혼, 아들의 비행, 홀로 남은 엄마의 뒤치다꺼리를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 두 작품은 모두 미국의 가정이 병들어 있고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곳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에 나온 가정의 모습이 미국 가정이 겪고 있는 근본적 위기라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샘 세퍼드는 그것을 서부라는 강력한 공간적 지형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다. 서부는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곳이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일구어낸 도시, 개척자들이 실현해낸 일확천금의 꿈, 가족과 종교로 강력하게 결합된 공동체, 이 모든 것이 서부 개척의 역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서부의 모습 이면에는 미국이 감추고 싶어하는 학살과 차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디언 학살과 인종 차별과 같은 미국의 근원적 원죄가 마치 매장된 아이처럼 미국민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다. 『매장된 아이』를 단지 한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서부라는 공간의 상징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에 의해 머리를 다 깎여버린 아버지, 과거의 추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 정신을 놓아버린 큰 아들, 한쪽 다리를 잃은 작은 아들, 그런 가족 속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손자, 그들의 모습은 모두 병들어 있다. 매장된 아이가 있는 원죄의 대지가 키워낸 것은 기형적 가정이며, 그것은 샘 세퍼드가 바라본 미국의 가정이기도 하다.

  

  마샤 노먼은 세퍼드가 보여준 상징성과는 다른 측면에서 사실적인 희곡의 언어로 미국의 가정을 그려낸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가 어릴 적부터 앓고 있는 질병인 간질은 벗어나기 어려운 천형(天刑)처럼 묘사된다. 간질 치료약조차 제시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제시의 간질은 제시가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 되는데 바로 그 병 때문에 제시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살은 제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삶에 대한 온전한 통제력을 가지려는 시도가 된다. 그 무엇도 제시의 자살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가정은 치유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의 모습은 미국의 가정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병들고 고통받는 개인에게 가정이 더 이상 위안과 사랑을 주는 삶의 근거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혼율의 증가, 마약과 약물중독, 성문제, 빈부 격차로 인한 하층계급 가정의 붕괴와 같은 현상은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잘자요 엄마』에서 제시는 총으로 자살을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총기 소지문제와도 일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의 가정은 그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적 동력이 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잘자요 엄마』는 치밀한 극적 구성과 놀라운 흡인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 내재된 윤리적인 딜레마는 우리를 매우 곤혹스럽게 만든다. 자살을 한 개인, 또는 가정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가? 사회는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마샤 노먼은 미국 사회를 향해 마치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샘 세퍼드와 마샤 노먼은 『매장된 아이』와 『잘자요 엄마』를 통해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미국 가정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과연 위기에 처한 미국의 가정을 구해낼 방법은 있는가? 작가는 침묵한다. 답은 찾는 이들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란 그렇게 답을 찾는 이들에게 한 자락 빛을 던져주는 존재일런지도 모른다. 세퍼드와 노먼은 그러한 작가의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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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롤드 핀터 전집 2
해롤드 핀터 지음, 이현주 옮김 / 평민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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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케트 전집은 알라딘에서 볼 수가 없군요. 핀터의 전집만 있길래 그것으로 올립니다. 


  최근에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인베이젼 Invasion〉은 원작의 세 번째 리메이크 작이었다. 1957년에 나왔던 〈신체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이다. 이 작품은 SF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계의 힘이 보여주는 공포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도시의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를 하며 자신들과 다른 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감정을 가진 존재인가’하는 것이다.

  

  베케트와 핀터가 〈게임의 종말〉, 〈덤 웨이터〉를 통해 보여주는 현대인의 초상은 어떤 면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은 신체강탈자들은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생각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을 빼앗아 가버린다. 〈게임의 종말〉의 함과 클로브, 〈덤 웨이터〉의 구스와 벤은 정상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클로브는 함의 뒤치다꺼리와 무의미한 행위로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구스와 벤은 살인청부업을 아무렇지 않게 주어진 임무로 받아들여 해내고 있다. 왜 그들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발표된 년도가 같다. 1957년이다. 전후 깊게 드리워진 상처의 그림자를 이 두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학살극이라 할 수 있는 유대인 대량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치열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의 분위기는 특히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베케트와 핀터가 자신들의 시대와 호흡하며 뛰어난 작품을 내놓은 문제적 작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임의 종말〉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부상당한 함이나 〈덤 웨이터〉의 도입부에서 나온 늙은 노인의 죽음과 어린아이의 고양이 살해 기사는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된 폭력적 현실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보여준다. 

  베케트와 핀터는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여주는 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두 작가는 어떠한 해결책이나 구원을 제시하는 대신에 파국의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클로브는 함의 위협에 떠나지 못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소극(笑劇)이 반복되는 무대(삶)에 남는다. 구스는 자신에게 끊임없는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인물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반항을 선택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 베케트와 핀터가 보여주는 이러한 결말은 그들이 바라본 현대세계가 얼마나 우울하고, 희망을 꿈꿀 수 없게 만드는 곳인지를 증명한다.

 

  〈덤 웨이터〉의 구스는 외친다. “왜,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야. 왜 그는 이런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게임을 그만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하나 말해주지 않는다. 핀터는 게임에서 패배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인물에게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독자와 관객에게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누구도 그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코 그 누구와도 진정한 감정의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 모두가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주어진 명령에만 복종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하게 된 시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현대이다. 두 작가는 그 황량하고 슬픈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분열증적인 언어의 희곡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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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바이올린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전집 [2CD]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작곡, 포저 (Rachel Podger) / Channel Classics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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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가져가야할 단 한가지를 선택한다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바흐의 음반들이다. 무인도에서 바흐의 음반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아무튼, 심정적으로는 그 음반들만 있으면 아주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흐는 여전히 나의 음반 구매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번에 구입한 레이첼 포저와 트레버 피녹의 연주 음반은 정말 근래에 보기드문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쳄발로 연주자이기도 하고 지휘자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트레버 피녹에 비한다면 포저는 내게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미 음반을 구입한 이들의 호평이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역시, 레이첼 포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포저가 들려주는 바흐의 선율은 정말이지 너무나 포근해서 추운 겨울의 따뜻한 외투를 연상케 한다. 유려할 뿐만 아니라 명료한 포저의 연주는 트레버 피녹의 반주와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두 명의 연주자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놀라운 화음을 들려주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개성이 뛰어난 연주자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트레버 피녹의 반주가 돋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가을이 깊어가게 되면 옷깃을 여미게 될 날들이 많아질 것이다. 이 음반이 든든한 겨울 외투처럼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뿌듯해짐을 느낀다. 따뜻한 바이올린의 음색과 매력적인 하프시코드와의 화음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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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생애 -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지음, 차경아 옮김 / 두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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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의 희곡 속에서의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소의 고문 도구만 보고도 겁이 나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했노라고 토로한다. 막강한 종교권력과 끝까지 맞서 싸우길 기대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런 갈릴레이가 유약하고 비겁하다고? 어떤 이는 그렇게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의도는 갈릴레이의 행위에 대한 판단 이전에 권력 앞에 선 한 과학자의 내면적 갈등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브레히트가 본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진리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과 그 혁명적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그것을 권력자의 의지에 헌납하고 이후 남은 생애를 권력의 감시 속에 수인처럼 살아야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명백한 과학적 진리조차 왜곡하거나 폐기하려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영웅적 행위일 것이다. 갈릴레이의 선택은 분명 영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그러한 표면적 포기 내지는 패배 보다는 갈릴레이가 지키고자 했던 과학자로서의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인간이 치욕 속에서도 삶을 견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느냐고 독자와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진리에의 열망 때문에 갈릴레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폭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갈릴레이의 생애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감시의 눈을 피해 썼던 책은 제자 안드레아의 손을 통해 국경을 넘어간다. 유약함 때문에 전 생애를 걸쳐 패배자의 삶을 살았던 한 명의 과학자는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살아남아 삶을 견딘다는 것과 그것이 남긴 의무의 가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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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밑의 욕망 범우희곡선 19
유진 오닐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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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신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나온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답을 찾으러 온다. 천사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유진 오닐은 그에 대한 답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욕망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으며, 그것이 삶의 고통의 근원이 된다. 결국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오닐이 가진 인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농장의 상속을 두고 아버지 캐버트와 아들 에벤, 캐버트의 새아내 에비가 벌이는 암투는 지극히 속물적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함께 이들이 또한 사로잡힌 욕망은 성욕이다. 젊은 아내 에비에 대한 캐버트의 욕망, 에비와 에벤의 헤어날 수 없는 육체적 관계는 아이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비극을 향해 달음질쳐간다. 오닐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간 존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오닐은 여기에 캐버트의 신앙심을 하나 더 끼워넣는다. 농장을 위해 아내와 자식들을 일꾼처럼 마구 부려먹는 무정한 아버지인 그이지만 신의 존재는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명제와도 같다. 캐버트는 신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에 대한 믿음은 도덕적이고 선량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신앙심은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캐버트가 보여주는 종교적 열정은 캐버트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집안에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 드러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냉소와 부정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근원에 대한 회의로까지 읽힌다. 

  

  과연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오닐은 인간의 욕망이 불러오는 비극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추한 존재일까? 어쩌면 그것은 추하다기 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인간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진창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오닐은 〈느릅나무 밑의 욕망〉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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