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교의 선문답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서 참사람이 된다."  영화의 제목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바로 그 선문답이 가리키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많은 비유들 가운데 하나인 포도나무는 바로 예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베라니요, 거기엔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민병훈 감독의 이 영화는 외양상으로는 가톨릭의 색채를 띤 종교영화입니다. 신학생, 신부, 수녀, 이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뿐만 아니라 배경이 되는 공간도 신학교, 수도원, 성당이 주를 이루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거룩한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단정하는 일은 아직 이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민이 매우 인간적이니까요. 신학생인 수현은 여자친구인 수아를 마음에서 밀어내지 못해 힘들어합니다. 그가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서 찾아간 수도원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또 어떤가요? 수련 수사인 정수는 예쁜 외국인 노동자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상태이고, 무뚝뚝하고 엄격해 보이는 문 신부는 자신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네, 그들은 모두 약함을 가진 인간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수현의 마음은 수아와 너무나 닮은 헬레나를 보고서 더 헝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수아의 갑작스런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의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병훈 감독은 이 영화가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수현에게 있어 그 두려움이란 신을 따르는 길, 사제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기인 강우가 신학교를 그만 두는 모습을 보고 흔들리지요. 강우는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출 수 있어?" 강우는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떠나지만, 주인공 수현은 아직 자신이 가야할지 멈추어야 할지 모릅니다. 

  영화에는 수현이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과 직면하게 만들기 위한 몇가지 우연적인 사건과 신비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자친구와 닮은 외모의 수련 수녀라던가, 죽어가는 아이가 수현의 기도로 병이 낫는다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물론 이것들은 명확히 설명되지도 않고, 그 때문에 관객들의 상상력은 더 풍성해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요소들로 인해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는 감독의 시도는 너무 도식적이에요. 영화는 단아하고 깔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여요. 

  영화의 제목은 말 그대로 포도나무를 베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문답도 마찬가지구요. 그 말의 뜻은 수행자가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맞서야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수행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직시하고,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심리상담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과도 비슷해 보이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돌아가는 기차 안, 자신의 손목시계에 귀를 갖다댄 수현은 잠시동안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크게 울리는 초침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그가 짓는 미소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이의 설레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제 막, 신을 따라 떠나는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사제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장면을 보면 그럴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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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그 비극적 삶에 대해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영화 "힐러리와 재키(1998)"는 바로 그 재클린과 언니 힐러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재클린의 언니 힐러리와 동생 피어스가 함께 쓴 자서전일 겁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가족의 시점, 특히 힐러리의 시점이 주가 됩니다.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의 힐러리(플룻 연주자였어요)가 재클린 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재클린의 재능은 힐러리를 앞질러 나가게 되죠. 그래서 힐러리가 재클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정도 질투가 섞여있는 것처럼 보여요. 힐러리가 동생에게 보여주는 그 모든 호의에도 불구하고요. 천재적 재능을 가진 동생 재클린은 17살때부터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고, 전세계에 연주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경력을 쌓아갑니다.

  22살이 된 재클린은 촉망받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합니다. 재클린의 연주 레코딩 가운데에 대부분은 바렌보임과의 협연에서 나온 것이었죠. 바렌보임은 자신의 경력을 쌓는 데에 재클린을 혹사시켰다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데, 재클린의 연주 스케줄이 지나치게 꽉 짜여져 있었고, 그것이 재클린의 발병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 때문이었어요. 

  영화는 재클린이 살았던 실제의 드라마틱한 삶에 비한다면 아주 평범해요. 그녀가 살아내야했던 삶의 엄청난 고통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요. 영화가 그것을 다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니까요. 28살에 다발성 경화증으로 진단받은 재클린은 첼로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고 이후 14년을 투병하다 세상을 떠요. 재클린은 투병기간동안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남편 바렌보임은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동거하면서 두 아들을 낳았고, 재클린을 버려두다시피 했죠. 그런가하면 가족들은 재클린이 결혼과 함께 남편이 믿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후 멀어져있었구요. 물론 영화는 언니 힐러리와 가족의 관점이 더 투영되었으니 이야기가 좀 다릅니다.

  영화가 재클린과 그 삶에 대해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내었을까요? 재클린의 지인들은 영화 개봉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재클린의 모습과 다르다면서 영화사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해요. 바렌보임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없는 거냐며 투덜거렸고요.

  재클린의 연주 음반을 들어보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클린이 들려주는 첼로는 매우 순수하고 놀라울 정도로 활기가 넘치죠. 영화에서 묘사된 제멋대로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의 재클린도 어느 부분은 진실일 수도 있어요. 에밀리 왓슨의 뛰어난 연기가 그 믿음을 더하게 만들거든요. 

  이 영화에서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재클린과 첼로의 관계에요. 영화에서 재클린과 첼로의 관계는 사도마도히즘적이에요. 자신에게 끊임없이 연주를 강요하는 첼로를 재클린은 일부러 택시에 두고 내리거나 추운 겨울날 밖에 내놓기까지 하죠. 그럼에도 재클린 앞에 다시 놓여져 그녀로 하여금 연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첼로를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에요. 그 첼로가 다비도프였어요. 다비도프가 재클린 사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알아보니 지금은 요요마의 손에 있더군요(영문 위키피디아에 그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조하고요). 



  재클린의 삶을 보면 어쩌면 재능이란 저주받은 이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삶이었어요. "힐러리와 재키"는 그렇게 천재 첼리스트의 가려진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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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상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2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최연 옮김 / 소화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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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기는 일본의 근대를 대표하는 여류작가인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일기체 소설이다. 나는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꺼내어 읽다가, 기억 속에서 책의 내용과 중첩되는 이미지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방랑자의 수첩(1962)"이란 영화였다.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술집의 종업원, 여관의 여급, 경리, 파출부 등, 생계를 위해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시를 쓴다. 그리고 어려움 끝에 마침내 작가로 성공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그려내는 감독 나루세 미키오의 시선이 참으로 기이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여류작가의 눈부신 성공담처럼 그려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는 격동하는 근대 속에서 여성작가가가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겪어야 했던 밑바닥 생활의 궁핍과 남자들과의 어긋난 연애담, 비루했던 일상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작가, 시인, 예술가의 삶에 드리워진 보기좋은 허울과 치장을 걷어내고 그 이면의 삶에 대해 연민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하야시 후미코였다. "방랑기"는 나루세 미키오가 만든 "방랑자의 수첩"의 원작이 되는 작품이다. 영화는 연대기순으로 서사를 이어가지만, "방랑기"의 서사는 그렇지 않다. 후미코는 마치 일부러 시간을 섞어놓은 것처럼 일기와 시들이 정확히 언제 쓴 것인지 모르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방랑생활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글인 것이다.

  그러한 연대기적 혼란 속에서 작가의 삶에 대한 진정성과 빼어난 문학성은 역설적으로 더욱 빛난다. 무엇보다 그녀가 쓴 시들이 너무도 훌륭해서 읽는 내내, 그 시집들을 어떻게 구할 방법이 없는가를 궁리하게 만들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나온 것이 없고, 만약 구한다면 일본에서 나온 전집을 사와야할 판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녀의 시집을 꼭 구해서 읽고 싶다).

  혼란과 격동의 일본 근대를 살아갔던 한 여성이 있었다. 시인으로, 또 작가로서 그녀는 마치 피를 토해내듯 어렵게 글을 써가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방랑기"는 그 시절에 대한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자전적 고백이자, 문학에 대한 연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작품이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좋은 역자를 만나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을 준다. 다섯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 "방랑기"는 상권과 하권, 그렇게 두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궁핍한 시대에 더 빛났던 한 여성 작가의 영혼을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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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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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작을 하는 이들에게 창작 수업의 합평 시간은 매번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나 또한 합평 시간마다 아무렇지 않게 오고 간 날이 선 비평의 말들에 익숙해지는 일은 쉽지가 않았었다. 괜찮다고 써간 글이 그 시간이 되면 너덜너덜한 글 조각이 되어 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 창작 수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써간 시들은 그 순박한(!) 감상성이 문제였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어들은 촌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는 넘쳐나는 감정의 시어들을 과감하게 잘라내느라 힘이 들었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으면서 내가 나의 시에서 그토록 잘라내고 싶어했던 깊은 감성과 정서의 뿌리를 발견해냈다. 시 창작 수업 선생님이 질색을 하던 그 감정의 시어들이 문태준의 시 세계에서는 자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처럼의 평안함을 느끼면서 한때 내가 써낸 시들이 참으로 못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감정이 베어져 나오는 시는 촌스럽지 않다. 오히려 때론 눈이 시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제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시를 통해 정서를 드러내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태준의 시집을 읽고 잠깐 생각했다. 다시 시를 써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가재미"에는 시를 통해 내가 드러내고 싶어했던, 한때 열렬히 찾아 헤매었던 깊은 정서의 뿌리들이 가닥 가닥 살아있다.  

  시에서 베어져 나오는 눈부신 정서의 힘을 느껴보고 싶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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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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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소설 작법에 있어서도 내적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평면적인 캐릭터는 이야기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주인공은 반드시 변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고 창작 강의 시간에 소설가 선생님은 강조하곤 했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는 법이다. 

  "완득이"는 성장 소설의 기본 문법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세상과 사람에 대한 소통을 거부하던 완득이는 주변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조금씩 벽을 깨고 나오기 시작한다. 작가는 완득이의 개인적 성장을 그려내면서 거기에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래서 "완득이"는 한 청소년의 성장일기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나름의 의미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아동문학, 내지는 청소년 문학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제는 고인이 되신 권정생 선생의 "몽실언니"가 주는 따뜻하고도 가슴저린 느낌으로 남아있다. "완득이"를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마치 시간터널을 통해 다른 시간대로 순간이동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당혹감과 이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인물과 상황에 대한 설정이라고는 해도 욕설과 비속어를 이야기 내내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또한 작가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과 시각은 어떤 면에서는 단선적이고 표피적인 것처럼 보인다.

  "몽실 언니"의 몽실이나 "완득이"의 주인공은 모두 상처를 지니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사는 모습이 달라져도 아이들이 고민하고 꿈꾸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상처를 보듬어가며 아이는 커나간다. 어쨌든, 완득이는, 소년은 성장한다.

  "완득이"를 덮으며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왜 성장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난한 애들일까 하는. 부잣집 애들의 성장 이야기는 별로 매혹적이지 못한가? 아마도 어려움과 결핍이 인생의 숨겨진 많은 면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싶은 생각이 문득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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