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의 생애 -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지음, 차경아 옮김 / 두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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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의 희곡 속에서의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소의 고문 도구만 보고도 겁이 나서 자신의 주장을 포기했노라고 토로한다. 막강한 종교권력과 끝까지 맞서 싸우길 기대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런 갈릴레이가 유약하고 비겁하다고? 어떤 이는 그렇게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의도는 갈릴레이의 행위에 대한 판단 이전에 권력 앞에 선 한 과학자의 내면적 갈등을 부각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브레히트가 본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진리가 가져올 엄청난 파장과 그 혁명적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그것을 권력자의 의지에 헌납하고 이후 남은 생애를 권력의 감시 속에 수인처럼 살아야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명백한 과학적 진리조차 왜곡하거나 폐기하려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영웅적 행위일 것이다. 갈릴레이의 선택은 분명 영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그러한 표면적 포기 내지는 패배 보다는 갈릴레이가 지키고자 했던 과학자로서의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인간이 치욕 속에서도 삶을 견딜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느냐고 독자와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진리에의 열망 때문에 갈릴레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과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폭압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갈릴레이의 생애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의무에 대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갈릴레이가 감시의 눈을 피해 썼던 책은 제자 안드레아의 손을 통해 국경을 넘어간다. 유약함 때문에 전 생애를 걸쳐 패배자의 삶을 살았던 한 명의 과학자는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살아남아 삶을 견딘다는 것과 그것이 남긴 의무의 가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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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밑의 욕망 범우희곡선 19
유진 오닐 지음, 신정옥 옮김 / 범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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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신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내려온 천사가 나온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답을 찾으러 온다. 천사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유진 오닐은 그에 대한 답을 다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욕망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으며, 그것이 삶의 고통의 근원이 된다. 결국 사람은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오닐이 가진 인간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농장의 상속을 두고 아버지 캐버트와 아들 에벤, 캐버트의 새아내 에비가 벌이는 암투는 지극히 속물적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함께 이들이 또한 사로잡힌 욕망은 성욕이다. 젊은 아내 에비에 대한 캐버트의 욕망, 에비와 에벤의 헤어날 수 없는 육체적 관계는 아이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비극을 향해 달음질쳐간다. 오닐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간 존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오닐은 여기에 캐버트의 신앙심을 하나 더 끼워넣는다. 농장을 위해 아내와 자식들을 일꾼처럼 마구 부려먹는 무정한 아버지인 그이지만 신의 존재는 거역할 수 없는 삶의 명제와도 같다. 캐버트는 신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에 대한 믿음은 도덕적이고 선량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신앙심은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캐버트가 보여주는 종교적 열정은 캐버트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집안에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렇듯 이 작품에 드러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냉소와 부정은 미국 사회의 도덕적 근원에 대한 회의로까지 읽힌다. 

  

  과연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오닐은 인간의 욕망이 불러오는 비극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추한 존재일까? 어쩌면 그것은 추하다기 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인간이며, 삶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진창 속에서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오닐은 〈느릅나무 밑의 욕망〉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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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벽에서 읽었던 작품 소개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마지막 시기에 그렸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지베르니에서 그린 모네 말년의 작품들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본식 다리 연작이 그러한데, 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과연 다리인가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채의 왜곡이 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모네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모네로서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그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백내장은 모네의 시력을 점차적으로 악화시켰으며 그러한 상황은 화가인 모네의 작업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감행한 수술의 결과는 더욱 참담해서 모네 말년의 그림들은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려졌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이 추상 회화의 시초가 된다고 써놓았으니 웃음이 나올밖에. 모네의 회화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추상이 아닌 구상에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나의 머리를 맴돈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면 모네가 추구했던 인상주의와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적어도 회화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모네가 살았던 시대는 미술사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진의 발명이란 사건이 있었다. 사진은 회화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그것은 회화가 사물의 단순한 재현이 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남아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자신들의 그림 속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회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에 인상주의는 미술사에 남을 수 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라지는 길목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의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이들은 재현을 포기한 표현주의와 추상 회화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회화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상과 추상, 그 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은 찾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회화는 다시금 재현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 하다. 독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극사실적 회화도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만약 모네가 오늘날의 회화 작품들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가 회화의 진정성이 남아있던 시대에 그림을 그렸던 행복한 작가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는 어쩌면 현대의 회화들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회화들에서 회화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찾는 일은 점차로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도, 관람객도 더 이상 그림을 통해 숭고함과 구원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회화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내면은 황폐해져가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네의 그림들은 회화의 진정성, 그것을 보는 이들의 내면적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시회에서 특히 네덜란드의 튤립 밭을 비롯해 영국의 체링크로스 다리, 항구와 선착장 등을 그린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모네가 여행을 하며 느꼈던 정취가 그림을 통해 그대로 전해오는 듯 했다. 나는 모네가 보았던 풍경들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쁨과 충일한 감정이 마음을 잔잔히 물들였다.

  한편, 그러한 감상 외에 전시 기획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실 이번 전시회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서양 유명 화가들의 이름을 내건 기획 전시회에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  “빛의 화가 모네 전”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모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연작의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는 이번 전시에서 정작 수련 연작 작품은 몇 점 되지 않았다. 사실 모네의 수련 작품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96년 가나 아트 센터에서였다. 단 한점의 수련 연작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때와 비교하여 본다면 이번 전시회의 수련 연작은 몇 점이 더 많기는 하지만, 크기나 내용 면에서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 보다는 모네의 가족 초상과 그의 초기 풍경화가 오히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전시회의 어느 부분이 “모네 전”이라고 내걸만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 단지 모네 작품만 몇 점 가져와서 전시하면 되는 건가? 만원이라는 관람료는 결코 적지 않다.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보고 사기당한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오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직 상업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전시 기획사, 미술관과 갤러리, 해외의 수준 낮은 컬렉션들, 그렇게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대형 기획 전시인 셈인데, 그 결과물이란 것이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서울 시립 미술관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매번 이런 식의 기획 전시를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절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성과와 상업적 이윤에 대한 강박관념은 공공미술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림을 보겠다는 관람객이 구름같이 몰려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이전 전시였던  “르네 마그리트 전”의 경우엔 관람기간을 보름이나 연장해야 했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다.

  아마 이번의 “모네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보러올 것이다. 빈약한 작품 구성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였을까? 전시가 끝나는 곳에는 다음 전시를 알려주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세상에, 다음엔 고흐가 온단다. 시립 미술관과 전시주관사인 한국일보사는 이제까지 터뜨려온 것 보다 더 큰 대박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술 전시에도 바야흐로 한탕주의가 유행하고 있다. 벌써부터 오는 11월의 고흐 전시회에 가야할지 고민이다. 이번의 모네 전과 같은 양상이라면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대형 기획 전시의 폐해를 얼마나 더 목격해야할까? 미술관의 전시 기획 풍토가 명분과 내실을 갖춘 것으로 변모해야할 필요성을 모네 전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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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슈만 :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연주회용 소품 G장조 & 알레그로와 서주 D단조 [Digipak]
슈만 (Robert Schumann) 작곡,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지휘, / Berlin Classics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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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고 있는 염가 음반 시리즈로는 낙소스와 EMI 레드라인 정도가 전부였다. 최근에 구입한Document사의 음반들도 그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염가 음반은 저렴한 가격 때문에 손이 선뜻 가기도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구매한 후에 큰 만족감을 준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그런데 베를린 클래식에서 나온 이 음반은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우선 쿠르트 마주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라는 쟁쟁한 이름이 신뢰감을 주었고, 피아노를 연주한 페터 뢰젤도 훌륭한 피아니스트여서 기대를 할만 했다. 실제로 음반으로 들어보니 어느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다. 처음 구입한 베를린 클래식의 음반이 이렇게 좋은 느낌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요새 슈만의 피아노 곡들을 새롭게 즐겨듣기 시작한 터라, 이 음반에 점수를 더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슈만의 피아노 곡들을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듣고 있으면 마음에 따뜻한 위로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슈만의 곡을 듣노라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의 손목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해야했고, 생의 후반기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으니 슈만은 신의 선물로 주어진 재능에 충실했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슈만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이 음반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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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게 똑같은 음반인데 가격 차이가...
    from 재즈닥터의 무한음악사랑 2007-12-20 12:20 
    페터 뢰젤과 쿠르트 마주어의 똑같은 연주가 이전에 에테르나 시리즈라고 해서 나왔었지요. 아마 지금도 찾아보면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건 가격이 3배 정도 더 비싸요... 베를린 클래식스의 염가 재발매 음반은 꽤 괜찮은게 많으니까 나올때 잘 보고 얼른 사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저도 이거 보고 내심 안타까워했습니다. 어느새 품절이어서...

1.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 
  홍상수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항상 자신의 분신들을 등장시켜왔다. “오! 수정”에서 문성근이 분한 영화감독, “극장전”의 김상경이 분한 영화 감독 지망생은 어느 정도 감독 자신이 반영된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해변의 여인”에서 홍상수는 그 자신을 날 것으로 내놓는듯한 느낌이 든다. 중래가 바로 그 인물이다. 
  중래란 인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이와 같은 철없음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문숙과 만나고 헤어진 일을 보면 그가 매우 즉흥적이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숙이 후배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려고 부리는 수작이라던가, 하룻밤을 보낸 후에 문숙이 보이는 친근함이 부담스러워 “산뜻해지고 싶다”고 단번에 감정적으로 밀쳐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계산적이거나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래는 그렇게 문숙을 보내고 혼자 다시 서해안으로 돌아와서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중래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해변가 나무 앞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우는 장면이 아닐까? 그렇다. 중래는 그런 인간이다. 횟집 종업원은 마구 무시하며 욕을 퍼대는 그가 나무 한 그루가 주는 알 수 없는 도저한 감동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중래란 인물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선희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접근해서 이것저것 묻는 대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살아오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느냐는 중래의 질문에 선희는 그다지 힘들었던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래는 “난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사는 게 힘든데.”라며 혼잣말을 한다. 중래의 그 말은 결코 우스개 소리가 아니며 아마도 그가 믿는 진실일 것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중래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일이 매우 심각하고 극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문숙을 보자. 문숙은 중래와 선희가 술에 취해 쓰러진 자신의 머리를 넘어갔는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중래에게는 정말 사소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문숙에게는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중래와 문숙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 속에서 어긋나게 배열되어 있다. 하늘의 별은 자신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나며 천진스럽게 말하던 문숙은 선희의 지갑이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알고도 선희에게는 못보았노라고 말한다.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과 감정의 과잉, 극대화된 자기중심성을 이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에 대해 친절한 모범 답안을 제시해준다. 그의 전작들에 그러한 모습들이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림까지 그려서 관객들에게 답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답은 중래가 문숙에게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 들어있다. 하나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 정도의 정보나 사실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세한 관찰을 통한 많은 정보를 취합해 판단할 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래는 알기 쉬운 도형 그림을 그려가며 문숙에게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킨다.     
  중래가 그려낸 도식은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가 견지하는 인식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이기심과 극도의 불합리함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의미 있고 숭고한 것을 찾고, 그것에 매혹되기 쉬운 면이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래나 문숙은 결코 속물로 단정짓고 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도정(道程)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에게 그들은 치졸함과 어리석음, 지나친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물들임에도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인 것이다.


2.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 
  “해변의 여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출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도 종종 봐왔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해변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젊은 남녀는 왜 개를 도로에 내버리고 가버릴까? 중래가 욕을 퍼댔던 횟집 종업원은 매우 소심한 인물이었음에도 왜 해변가에서 중래와 선희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일까? (그가 매우 소심한 인물이라는 점은 선희에게 얻어맞은 뒤 겁에 질려 소변을 보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장면들은 마치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왜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이 지나치듯 제시되는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중래가 횟집 종업원에게 한 언사는 분명 모욕적이고 지나친 면이 있다. 중래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후배 창욱의 요구를 애써 무시한다. 중래에게 그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한밤의 해변을 거닐고 있는 중래에게 예기치 않은 일로 나타난다. 그는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로 위협하는 낯선 이로 인해 겁에 질린다.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선희의 대찬 행동이다.  
  그런가하면 주인에게 버려진 개 똘이는 새 주인과 함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문숙 앞에 나타난다. 그 순간에 문숙이 똘이에 대해 이전에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과 믿음은 배반당하고 어긋나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코 지나버린 사물과 사건이 시간이 지난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와 나타나는 것, 그것은 마치 멀리 가버렸다 생각한 부메랑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홍상수가 생각하는 이 세계란 그처럼 인과론(因果論)으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속에 우연(偶然)이 슬그머니 끼어드는 곳이다. 중래가 처음에 구상한 영화가 우연히 일어난 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해 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란 점도 그러한 감독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 던진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우리네 삶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전혀 다른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론적 숙명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여기에 우연성이 선사하는 헐거운 매력을 덧붙인다. 문숙과 선희가 맺은 유대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문숙과 선희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문숙은 그 다음날, 침대 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빼내어 든다. 그 지갑은 선희가 그토록 찾던 것이었지만 문숙이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것을 마침내 문숙은 선희에게 돌려준다. 중래라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여자 사이에 적대감이 아닌 새로운 유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무시당하고 소홀히 다뤄져왔던 여성성에 대한 변모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일까? 혹자는 이것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여성들간의 연대의식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홍상수의 관심은 그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여자의 만남 그 자체가 갖고 온 우연한 결과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래와 문숙, 선희는 우연히 서해안의 해변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떠났다. 중래는 새 영화의 시놉을 건지고, 선희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며, 문숙은 해변 모래사장에 빠져버린 차를 빼내어 마침내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함께 지내는 동안 즐거웠을까? 아마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삶은, 이 거대한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자체로 놀랍고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발견의 여정을 홍상수는 여유와 유머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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