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개


큰 개가 짖고 작은 개가 짖는다
큰 개는 작은 개가 싫은 모양이다
작은 개는 큰 개가 우습다 앙칼지게 짖는다
네가 뭔데
큰 개는 작은 개가 무서워서 짖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작은 개의 주인은 매일 오후 5시
큰 개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간다
그렇게 작은 개와 큰 개가 만난다
괴롭고도 짜증나는 개들의 인사
큰 개의 주인은 어디론가 늘 나가 있다
큰 개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짖는다
놀라고 무섭고 외로워서

큰 개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는
우는 표정으로 드러누워 있다
이 더운 여름, 길고 누런 털은
눅눅해진 나머지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핀 것 같다
털갈이는 어찌 하는지

후두둑, 장맛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소리에도 놀라 짖는 큰 개
나는 큰 개가 몹시도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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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The rainy season)


튼살처럼 터져버린 물소 가죽 소파에
몸을 누이고 낮잠을 청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계셨다
회색의 얼굴, 아무 말도 없이

죽은 조상이 꿈에 보이는 건
어쨌든 좋은 건 아니에요
젊은 아가씨 무당이 말했다
 
엄마는 혼자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무너진 기억의 제방을 더듬으며
여기가 어딜까?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

나는 땀과 장맛비로 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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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띠


여름이면 도지는 병
따끔거리고 가렵지만
죽을병은 아니지

며칠 전 꿈에서 너를 보았지
보고 싶은 마음이란 땀띠 같은 것
서늘한 바람이 불면 사라지는
결국은 그런 것

그래도 가려워 미칠 것 같아
피가 나도록 긁어대지만
까짓것 칼라민(calamine) 좀 바르지
치덕치덕 두껍게
닳아져 버린 분홍의 감정
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이번 생에는 안 되겠지
다음 생이란 없어
이전 생에 우리가 만났었던가
오돌토돌한 불그죽죽한 흉터
가만히 긁으며 가을을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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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蔘鷄湯)


냉동 삼계탕을 주문했다
봉지째 데워서 먹을 수 있는 간편식
얼어버린 국물에 찹쌀밥 한 줌
내 주먹 크기의 작은 닭 한 마리

저 정도의 닭은 양계장에서 얼마나
키운 후에 도살되는 것일까
2주 정도? 아니면 20일?
배급기가 쏟아내는 사료를
꾸역꾸역 먹은 닭이 비좁은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십자가 모양으로 다리가 꺾인 닭은
참회하는 죄수가 되어 누워있다
타자(他者)의 살과 뼈를 취해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육식의 딜레마
고기맛에 중독된 사람들의 머릿속,
공장 닭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상하는 능력은 거세되었다

인공육(人工肉)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죄책감을 삼키고
뚝배기의 어린 닭 다리를 편하게 풀어주었다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이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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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리스


버려진 매트리스는 장맛비에 퉁퉁 불었다
빗물로 배가 불룩해진 매트리스
+7000, 폐기물 수거업자는 급하게 휘갈겨 쓴 숫자를 남겼다
이 매트리스를 수거하려면 7천 원이 더 필요하다는 뜻
매트리스의 주인은 일주일째 모른 척하고 있다

사람들의 뜨악한 눈길을 받으며
저렇게 자신의 몸뚱이를 드러내는 일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나는 매트리스를 보며 기이한 연민을 느낀다
흉물스럽고 외롭고 괴로운 매트리스

매트리스는 재활용이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버려진
매트리스의 거대한 무덤이 있을 것이다
뒤틀린 몸뚱이들이 엉키고 싸우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런 곳일지도 몰라
합성섬유와 솜덩어리는 갈가리 찢길 것이며
스프링은 튕겨지며 용광로에 갈 수도 있겠지
그 누구도 매트리스의 최후를 상상하지 않는다
매트리스의 고통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불어터진 매트리스의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물
이제, 사랑은 더러운 추억이 되어버렸으며
죽음은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물건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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