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배송


새벽 2시 34분,
까박까박 식탁에서 졸다가
뚜우뚜우, 하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누군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머리숱이 없는 중년의 키 작은 남자

새벽, 배송

자본의 힘으로 박탈된
수면과 노동은 고객에게
신속함과 편리함을 선사한다

식탁의 태블릿 PC 화면에는
외신 기사 사진이 펼쳐져 있다
전쟁이 터진 저 먼나라
폭격으로 어머니를 잃은
여자는 부서진 잔해 위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유럽의 부자 나라는
기후변화로 폭우가 쏟아져
도시가 물에 잠겼다

산다는 것의 무게
언젠가 죽음과 같은
밤으로 끝나겠지만

다시 또 한 번
뚜우뚜우,
힘겹게 새벽을 나르던
그는 가늘어지는
엔진 소리와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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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개


흰색의 마른 개는
다리를 절며 걸었다
불규칙한 보폭으로
사부작사부작

늙음은 어딜 가나
송곳처럼 삐져나온다
염색물이 빠져버린
누리끼리한 머리
무릎이 나온 추리닝 바지
늙은 개의 주인도
늙음 속에 흐른다

개에게 남은 날을
헤아려 본다
늙은 개는 내년,
아파트 화단의
연분홍 철쭉과
탐스러운 푸른 수국을
볼 수 없으리라

늙고 병든 것들은 모두
질질 끌려가며
오래된 녹슨 자국을
아프게 남긴다

살았던 기억
지상의 빛나던 한순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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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의 감수성(感受性)


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라고 묻는다

겉으로 미소를 짓고는
등 뒤에서는 양파를 썰지
보안경 너머 킬킬거리며
눈물을 쏟아내, 시커먼

싸가지없음의 미학
너희 부모로부터
물려받았겠지
존중받고 싶으면
존중하는 법을 배워
세상살이야, 그게

우울과 불안으로
범벅이 된
유리알 같은 내면
언제든 부서질 준비
강철의 의지는
모방할 수도 없지, 결코

꼰대와 라떼를
경멸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그러는
넌 얼마나 뭐가

기본이 안 되어 있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하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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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요새 틈이 날 때마다 하는 일이 있다. 구글 서치 콘솔(Google Search Console)에 들어가서 내 블로그 글들의 색인 생성을 요청하는 일이다. 이제까지 써온 영화 글들이 대략 500편 정도이다. 이 글들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다가 직접 요청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려 500편의 글의 URL을 일일이 클릭해야만 한다. 클릭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구글에다가 '요청'하는 것이지, 그걸 들어주는 건 구글 마음이다.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셈. 구글이 보기에 내 글이 지들의 검색 결과에 나올 만큼 영양가 없다고 생각하면, 퇴짜를 놓을 수도 있다.

  아이구, 구글 행님요. 좀 잘 봐주이소. 겉으로는 이렇게 말을 해도, 속으로는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만 든다. 내 머릿속에는 문득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 대사관의 비자 신청은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구불구불, 마치 전국구 맛집의 대기 줄처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비자 신청을 하려고 기다리는 이들은 무작정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 기나긴 줄을 선 이들의 사진은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가지는 힘을 상징했다. 구글 서치 콘솔을 드나들면서 내 많은 글의 URL을 일일이 찍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딱, 그 사진 생각이 났다. 천조국 미국은 구글이며, 나는 그 구글 왕국의 방문 비자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사실 나는 최근까지도 '구글 서치 콘솔'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 개설기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블로그의 글이 구글 검색에 나오게 하려면, 구글에 직접 글의 색인 생성을 요청해야 합니다'는 구절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내가 글을 쫙 쓰면 구글 갸들이 다 알아서 검색하도록 해주는 거 아니었어? 정말로 나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 구글 블로그는 원래 알라딘 서재의 영화 글 백업 창고 개념의 블로그였다. 그런데 그쪽 블로그의 방문자 유입은 아주 적었다. 나는 그 블로거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내 블로그 글이 구글 검색 결과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 글이 검색 결과에 나오게 해주십사' 나는 구글에 정중하게 요청해야 하는 거였다.

  나처럼 구글 왕국 행 방문 티켓을 얻으려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블로그로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욱더 열심히 구글의 대문을 두드리고 두드릴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의 글, 콘텐츠가 구글 검색 결과에 나와야지 사람들이 와서 볼 테니까. 구글은 그런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아니, 하기 어렵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구글의 입장은 이러하다.

  "우리 시스템에는 매일 엄청난 요청이 들어오고 있어. 우리가 그걸 다 들어주려면 시스템에 부하가 걸려. 그러니 시간이 걸린다고. 기다리던가, 아니면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당신 글이 인터넷의 어디쯤에 있는지 찾아서 알려줘. 물론 그렇게 알려줘도 언제 등록이 될지 확답은 줄 수 없어."

  산더미처럼 쌓인 곰 인형의 눈알 붙이기 부업. 구글 서치 콘솔에다가 500편이 넘는 글의 URL을 찍고 있는 내 모양새가 그러하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을까? 그건 내 새끼들, 내 피와 시간과 정신이 들어간 그 글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는 속담. 여기에서 '함함하다'는 말은 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함함하기 그지없는 그 글이 구글의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딱, 그것뿐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인터넷으로 눈알을 붙여주어야 할 곰인형이 300개나 남아있다. 구글은 하루에 기껏해야 10여 개 안팎의 색인 생성 요청을 받아들인다. 나는 새삼 새로운 시대의 정보 권력자 구글의 위엄을 실감한다. 그것은 나에게 카프카가 쓴 '성(城)'의 거대한 성문 벽 앞의 한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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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놀이터


조그만 계집아이는
신나서 튕겨 나갈 듯
그네에 몸을 매달고
그 옆의 배 나온
애비는 느릿느릿
자신의 그네로
반원(半圓)을 연주한다

이제 자식이 옆에 없는
늙은 남자는 희고 마른
강아지 한 마리를 벤치에
풀어놓고 휴대전화에 외로운
얼굴을 조용히 묻는다
 
건너편 아파트 입구
붉은 빛줄기 번득이며
구급차가 누군가를 실으려고
대기 중이다 어슬렁어슬렁
회색의 어린 고양이가
그 옆을 지나간다 며칠 전
한밤중에 으스러지게 짝을
불러대던 그 녀석이었을까

구급차는 아무도 태우지
않고 떠났다 짐짓 좋은
애비노릇하느라 지친
남자는 계집아이를
달래어 집으로 갔다

밤 9시, 정신이 가출해버린
애새끼들이 악다구니를 쓰며
놀이터를 휘젓는다 아무도 미친
아이들을 탓하지 않으며
놀이터는 자비롭게
꾸벅꾸벅 졸음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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